소설리스트

환희의 정원-18화 (17/145)

#18

답안지가 빠져나가기 무섭게, 각 교실로 정답이 파발처럼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걸 받아 든 녀석이 교탁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답을 부르면, 다른 녀석들은 그에 맞춰 일제히 시험지를 넘기며 채점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환은 어쩐 일인지 자신의 시험지를 꼭 접어 두고 있었다.

지금 그만큼 점수가 궁금한 사람이 또 없을 텐데.

그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한 희서가 옆에서 슬쩍 “채점 왜 안 해 보세요?” 하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환의 답은 단호했다.

“돌아가서 할 거야.”

“왜요?”

“…너무 떨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거나 혹은 반대로 메뚜기처럼 튀어 오르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만 같다고 했다.

“그러면 안 되잖아. 명색이 황자인데.”

태연한 척 그리 말했지만, 책상 밑에선 안달이 난 그의 다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희서의 입술 새로 픽, 웃음이 샜다.

솔직히 말하자면 희서는 이미 그의 손을 떠난 일로 뒤늦게 이리 떨어 봐야 별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그간 환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알았기에, 이번만큼은 괜히 얄미운 소리를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환이 무언가를 이렇게 이 악물고 노력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특히 그게 공부와 관련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그 첫 경험에 좋은 결과 역시 따라와 주길, 희서 역시 진심으로 바랐다.

***

그러나 현실은 항상 마음만큼 따라 주지 않는 냉정한 것이어서, 궁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처소에서 마침내 수학 시험지를 가채점한 환은 그 자리에서 앓아눕고 말았다.

“미친 거 아니야?”

그리 중얼대는 목소리가 억울함을 한껏 담고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싶었다.

“…59점?”

예능도 이 정도로 하면 조작이라고 욕을 먹을 터였다.

물론 1차 목표였던 50점은 넘겼다. 그러나 ‘희서와의 1박’이 걸려 있던 60점에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점이 부족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일부러 이렇게 받아 보라고 해도 점수를 계산하느라 한참 골머리를 앓지 싶었다.

운명의 장난인가?

“어떻게… 어떻게 1점이 부족해? 약 올려?”

화도 났다가, 기도 막혔다가, 눈앞이 오락가락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지중지 들고 온 시험지는 이제 아무렇게나 구겨져 옆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게 딱 환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괜찮아. 열심히 했잖아.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그런 환의 옆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희서가 나름의 위로랍시고 그리 말을 건넸으나, 미안하지만 지금의 환에겐 닿지 못할 소리였다.

“…다음이 무슨 소용이야.”

당장 함께 할 수 없는데.

누가 보면 앞으로 희서와 영영 헤어지는 줄로 알 정도로 유난스럽게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환은 자신의 머리 위로 덮쳐 오는 커다란 실망을 차마 감출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 정도 노력했으면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자만이었다.

제 주제를 모르고.

“…환아.”

“미안. 나 좀 씻을게.”

아무래도 이대론 더 못난 꼴만 보일 것 같은 생각에, 환은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충격으로 고장 난 머리를 간신히 굴려 찾은 쥐구멍이었다.

환은 지금 이 순간 희서의 옆에 있는 것이 못 견디게 창피했다.

‘희서를 먼저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혼자 있을 때 채점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멋진 모습만 보이기도 부족한데, 그렇게 유난을 떨고도 60점도 넘지 못했다. 그러니 안 그래도 똑똑한 희서가 보기엔 얼마나 형편없는 똥 멍청이 같겠나 싶은 것이었다.

‘평소에 공부를 좀 했으면 달랐을까.’

유효기간이 오늘까지인 후회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환은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그 탓에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희서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괜히 내기에 응했나.’

이게 다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동기 부여도 해 주는 겸, 환에게 공부하는 재미를 알려 주고 싶은 마음에 호응한 것이었는데. 괜히 그 내기 때문에 그를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버린 듯했다. 결과가 이렇게까지 아쉽게 될 줄은 희서도 정말로 알지 못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평소 그의 성정이라면 유쾌하게 웃어넘길 줄 알았는데….

저렇게 크게 실망할 줄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또 새삼, 평소 ‘어차피 소용없다’며 많은 것을 내려놓고 사는 환이 이번 시험은 얼마나 진지하게 노력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저런 좌절은 누구보다 열심히 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만큼이나 노력을 해 준 것 자체가 고마운 희서는 그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싶어졌다.

이제 와 선심 쓰듯 ‘내기엔 실패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그냥 자 줄게.’라고 해 봤자 상처 난 자존심을 회복하기는커녕 더욱 긁어 놓을 것만 같았다. 또 희서로서도 나중에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도 떼를 쓰면 들어주는구나.’라고 생각할 여지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한 사정으로 원래 들어주기로 했던 것까지는 어렵겠지만.

‘…뭐가 있을까?’

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을 만한 방법이.

희서는 환이 굳게 닫아 버린 문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

그 시각, 환은 거울 앞에 선 자신의 젖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울한 기분을 떨쳐 내고 싶어 연거푸 세수도 해 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아직도 기가 막힌 1점이었다. 그게 너무 아쉬웠다. 차라리 턱도 없는 점수였다면 ‘그래, 역시 내가 그럼 그렇지.’ 싶었을 것이다.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거울 속 자신의 젖은 얼굴 역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것도 같았다.

‘못났다. 정말.’

생각해 보면 참 별일 아닌데도 이리 동요하는 꼴도 그러했다. 그래서 환은 또 한 번 좌절하며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욕실을 나선 환은, 텅 비어 있는 자신의 방을 보곤 새삼 또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돌아갔구나.’

물론 먼저 씻으러 가겠다고 자리를 나선 것도 자신이고, 희서는 그런 저를 보곤 쉬겠구나 싶어 돌아간 것일 터였다. 그러나 그의 철없고 변덕스러운 마음은 ‘그래도… 내가 이렇게 풀이 죽어 있는데, 말도 없이 쌩하고 간 건 너무한 거 아니야?’ 하고 투덜거리고 싶게 만들었다.

아쉽고, 서운하고, 야속했다.

이럴 때 보면 정말로 매정하고 무심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였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희서도 자신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실망이 큰 탓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조금 전, 자신부터 크게 실망한 탓에 희서의 얼굴이 어땠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억을 더듬어 가며 애써 봤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굳어 있었나?’

아니면 한심하게 바라보며 눈을 흘겼나?

얼핏 괜찮다고 말을 해 줬던 것 같지만, 어쩌면 속으로는 잔뜩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은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누굴 탓해.’

환은 손을 들어 제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일 날이 밝는 즉시 희서를 찾아야 할 듯했다. 실망한 희서가 다른 어떤 말을 뱉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선수를 치자고 마음먹었다.

미안하다고.

‘내가 더 노력하겠다고….’

지금보다 더 많이.

싹싹 빌면, 그러면 희서도 마음이 약해져 ‘딱 이번 한 번만 더 봐준다.’ 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길어지는 생각의 끝에, 결국 “어휴, 등신.” 하고 자신의 머리를 내리친 환은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일단은 조금 쉬고 싶어졌다.

그리 눕고도 실은 불편한 마음 탓에 한참을 뒤척였지만, 결국 그동안 쌓인 몸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 어느샌가 저도 모르게 까무룩 선잠이 든 참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느닷없이 벌컥, 하고 거칠게 열린 문 때문에 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아무리 밖에서 대접이 엉망인 황자라도 이곳은 궁 안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까지 그리 막되게 굴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처럼 환의 방문을 멋대로 벌컥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몇 되지 않았다. 또한 그 몇 안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법도와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환에게 그게 용인되는 사람은….

하나씩 제하며 따라가다 보면 남는 이는 결국 단 하나뿐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럴 수 있는가’와 ‘정말로 그리하는가’는 마치 하늘과 땅처럼 다른 문제였다. 그 탓에 환은 이게 꿈인지 아닌지 얼떨떨한 얼굴로 상대를 불렀다.

“…희, 희서야?”

“벌써 자? 잘 거야?”

“어? 아니, 잠, 잠깐 누워 있었는데.”

“그럼 나와.”

“어…?”

환이 무슨 사정인지 채 묻기도 전에, 할 말을 마친 희서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홱 나가 버렸다.

‘…뭐지? 저 박력?’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면서도 의외의 모습에 가슴이 뛴 환은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먼저 나간 희서를 놓칠세라, 헝클어진 머리를 미처 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헐레벌떡 그를 따라나섰다.

뒤이어 보게 된 광경은, 그의 처소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희서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발치엔 다름 아닌 축구공이 하나 있었다.

“…뭐야.”

이어 내뱉는 목소리는 다소 퉁명스러웠지만 그래도 전과 달리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희서와 공이라면, 떠오르는 소중한 추억이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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