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의 정원-20화 (19/145)

#20

“괜찮겠어? 이젠 내가 장독 깼다고 안 해 줄 건데.”

어느새 이렇게나 커다랗게 자란 환이, 여유롭고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희서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내가 설마 지금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해?”

자신만만하게 그리 말하고 있지만, 사실 전혀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책만 끼고 살지, 평소에 운동하는 모습이라고는 전혀 보질 못했다. 그런데 그 끔찍한 몸치가 무슨 수로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환이 보기엔, 아니, 누가 봐도 희서의 야무진 꿈이었다.

그 뒤 이어진 간단한 드리블에서 그러한 현실은 여실히 드러났다.

“굉장히 자신만만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웃지 마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환의 질문에 희서가 눈을 흘기며 딱 잘라 그리 답했다.

역시는 역시라고, 길어진 팔다리만큼 몸을 쓰는 것에 더욱 능숙해진 환에겐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어릴 때보다 오히려 더욱 일방적인 모양새였다. 공을 빼앗기는커녕 어떻게 가지고 놀 엄두를 못 내게 했다.

주춤거리는 희서의 어깨를 붙들고 이리저리 종이 인형처럼 휘둘러 대니, 그 모습이 퍽 우스웠다. 그러니 그가 두 볼을 붉히며 발끈해선 빽 소리를 치는 것도 당연했다.

“잠깐, 잠깐만! 잡는 건 반칙이지!”

“아닌데? 그러다 또 넘어질까 봐 잡아 주는 건데?”

“거짓말하지 마!”

바짝 약이 올라 아랫입술까지 꽉 깨문 희서의 모습이 못 견디게 귀여워, 환은 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험의 일로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하니 어떻게 위로해 줄까 생각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을 가장 먼저 떠올린 모양이었다. 또 그걸 쪼르르 달려가 구해 오는 모습까지 상상하니, 변함없이 그때 그 시절 어린아이 같아 사랑스러웠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사랑받고 있다고 느껴졌다.

비록 그게 환과 같은 의미의 사랑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슴 한쪽이 뿌듯해졌다.

이것도 조금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희서는 그 당시에도 물론 지금도 몸을 쓰는 활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앞서 보았듯이 많이 서툴기도 했고 말이다. 중요한 점은 그럼에도 희서는 단 한 번도 환의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혼자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져도, 끝까지 자신과 어울려 줬다.

‘그런 너를….’

그렇게 다정한 너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환은 이런 순간이 가장 괴로웠다.

사랑스러운 너를, 함부로 사랑스럽다 말할 수 없어서.

차마 평소처럼 눌러 내기엔 벅찬 마음이 들어, 질끈 입술까지 깨문 환은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던 희서의 어깨를 그대로 당겨 품에 안았다. 그렇게 희서를 꼭 붙든 환의 손이, 마치 지금 그의 가슴처럼 파르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좋아해.

아주 많이.

하지 못해 더욱 애가 타는 그 말을 입 안에서라도 굴리며 환은 간신히 마음을 삭였다. 그런 뒤에야, 그는 비로소 희서가 안심할 수 있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비록 정말로 하고 싶은 말들은 꾹꾹 눌러 삼킨 채였지만, 그래도 저 마음이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꼭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희서에겐 언제나 몇 번이고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고맙고 미안했다.

목이 메어서 그리 말하는 환을 가만 보고 있던 희서는 뒤이어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차분히 다독여 주었다.

“미안할 것도 참 많다.”

핀잔처럼 새침하게 내뱉어진 말이 다정했다.

물론 그 뒤론 다시 원래의 냉정한 희서로 돌아가 훨씬 더 많은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말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잘했어. 생각해 봐. 너 원래 점수 몇 점이었어? 어?”

“그건, 그렇지만….”

“열심히 노력했고, 그렇게까지 노력하는 모습 보고 나는 좀 감동까지 했어. 그럼 된 거 아니야? 내기가 그렇게 중요한 거야?”

“…희서야.”

세상에. 감동까지 했어?

‘나는 몰랐지.’

빠르게 스쳐 지나간 희서의 말을 놓치지 않고, 반대로 자신이 감동을 받아 버린 환이 눈물까지 글썽이려던 그때였다. 희서의 말이 조금 더 이어졌다.

“또 그렇게 억울하면 내기를 다시 하는 방법도 있고 말이야.”

“…응?”

“이번엔 70점 어때?”

“어, 희서야?”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다 못해 말라비틀어졌다. 또다시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에 환이 다급히 희서의 어깨를 붙들었다.

“다시 생각하니까 그… 정도까지 억울한 것 같지는 않아.”

“왜? 못 할 것 같아?”

“당연히 못 하지! 70점은!”

“이번에도 못 한다고 하고선 거의 해냈잖아?”

“엄밀히 말하면 못 한 거지?”

두 사람의 팽팽한 말싸움이 이어졌다.

특히나 환은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환에게 60점과 70점의 차이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어떻게든 비벼 볼 수 있을 법한 ‘인간계’와 감히 꿈꿀 수 없는 ‘천상계 초입’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조금 전의 애틋함은 온데간데없이 정색을 했다.

“그건 절대로 안 돼.”

그러나 희서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음엔 더 잘할 거면서 엄살은.”

무조건 해내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것보다 그 작은 혼잣말의 파괴력이 더욱 대단했다.

‘엄살? 누가? 내가?’

기가 막히면서도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믿고 그래?’ 하는 마음에 목덜미 쪽이 괜히 간지럽기도 했다. 그 탓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쉬이 말을 내뱉지 못하던 환은, 이내 괜스레 성을 왈칵 냈다.

“너는! 내가 70점 넘으면 뭘 어떻게, 응? 어떤 걸 요구할 줄 알고 겁도 없이!”

환으로선 제법 진지한 충고였는데도, 희서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얘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다.

“겁까지 내야 할 정도야?”

“당연하지!”

“뭘 해 줬으면 하는데?”

“그건….”

그때 가서 말하겠다는 환과 궁금한 희서 사이에 실랑이가 이어지며,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환의 처소가 두 사람의 목소리로 한바탕 왁자지껄해졌다.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더는 좌절하지 않고 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환은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음을 기약하며 이번 내기와 관련했던 일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결말은 뜻밖에도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59점이라며?”

희서가 다소 황망하게 바라보며 그리 물었다.

“…59점 맞았는데?”

사실 당황스럽기는 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환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손에 들린 성적표에 적힌 환의 수학 점수는 눈을 씻고 다시 봐도 61점이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환도 희서도 어안이 다 벙벙할 정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생각보다 덜 나온 것도 아니고 더 나와서 문제인 것이라, 따지고 들기도 사실 우스웠다. 그랬다가 자칫 ‘행정 처리상 실수’ 같은 이유를 들이밀며 도로 59점으로 돌리는 것은 아닐까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그건 결코 안 될 말이었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게 알아본 사정으로는, 아무래도 환의 ‘마킹 실수’가 있었던 듯했다.

참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계산 실수 같은 건 말도 안 된다고 간단한 덧셈 뺄셈도 몇 번이고 했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정작 답안지에 옮겨 적을 때 어이없는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풀어서 나온 답은 오답인데, 삐끗해서 실수로 마킹한 다른 답이 정답이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얻어걸려도 어떻게 이렇게 얻어걸려?’

변함없이 황당해하는 희서와는 달리, 상황을 파악한 환은 이내 헤벌쭉 입이 귀에 걸린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얻어걸리면 뭐 어떠냐는 생각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성적표에 61점이 적혀 있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얻어걸린 61점도 똑같은 61점이었다.

환은 눈을 반짝 빛내며 “희서야.” 하고 불렀다.

“…내가 해냈어. 정확히는 얘가!”

자신의 손을 붙들고 그리 기쁘게 말하는 환을 보며, 희서는 헛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

환의 그러한 주장으로, 희서는 결국 그날 곧장 환의 처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되었다. 어떻게 된 사정이든 60점을 넘긴 그가 내기를 이긴 건 맞았으니까 말이다.

환의 예상대로 희서가 황실 어른들께 허락을 얻어 내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같은 결과를 얻어 내려면 환은 대전 앞에 한나절을 드러누워 좌로 우로 수십 바퀴는 굴러도 어림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희서의 경우엔 들어가서 차나 좀 얻어 마셨을까? 고작 그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원하는 답을 척척 듣고 나왔다.

“대체 비결이 뭐야?”

이전에도 몇 번이나 물어본 적이 있지만, 희서의 대답은 늘 신통치 않았다.

“달리 이유가 있겠어? 너 때문이지.”

‘…내가 뭘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못 할 소리였다.

그러는 사이, 한 궁인이 환의 처소로 웬 커다란 이불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찾아왔다. 희서는 자신이 손수 뛰어나가 “고맙습니다.” 하고 깍듯이 받아서는 방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물론 환은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뭐야?”

“이불이죠.”

설마 그걸 몰라서 물을까.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더니, 희서가 태연히 침대 옆 바닥에 이불 더미를 내려놓으며 “자고 가려면 필요하니까요.” 하고 답을 했다. 희서야말로 뭔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굴었지만, 환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걸 바닥에 깔고 자겠다고?”

그리 묻자 희서가 잠시 파렴치한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뜨끈뜨끈한 온돌바닥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이불도 안 주려던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환은 다급히 “그건 아니야!” 하고 외쳤다. 그래, 물론 그건 아니지만.

내 침대가 있는데.

‘과연 굳이 그래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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