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뭐가 속상했는데. 응?’
‘내가 어떻게 하면 될지 알려 줘. 도울 수 있는 건 모두 도울 테니까.’
‘이제 졸업도 곧이잖아. 어른 같은 건 금방 될 수 있을걸. 너무 초조해하지 마.’
얼마 전처럼 저도 모르는 말실수로 희서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환은 말을 신중히 고르려 들었다. 몇 가지 후보를 추리다가, 이내 ‘차례로 하나씩 다 해 보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물량 공세였다.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 소중해서 어느 것 하나라도 얻어걸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라도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이제 졸업도 곧….”
그런데 어쩐지 거기까지 내뱉은 환의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졸업 이야기가 나오니, 얼마 전 봉사 활동에 나갔다가 대학생들과 같이 있는 희서를 보곤 희서가 대학에 가는 상상을 했던 것이 다시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희서와 이렇게 같이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대학에 가면 분명 희서의 재능은 더욱 꽃을 피울 것이다. 그걸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릴 것이고 말이다. 그런 희서를 오로지 제 욕심 하나 때문에 궁 안에만 가둬 둘 수 없다는 것을, 환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날을 이렇게 손꼽아 기다릴 필요까지 있을까?’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희서에게 도리어 서운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희서가 얼른 저와 떨어지고 싶어서 그랬겠냐만, 그래도 심란한 제 마음을 너무 몰라주니 그것도 또 나름대로 섭섭한 것이었다.
그래서 원래 하려던 위로의 말 대신, 불쑥 못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근데 어른 되어도, 별로 그렇게 달라지는 건 없을걸?”
그러자 희서는 곧장 흔들리는 시선으로 환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서 환은 직감했다.
‘역시 이건 오답이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형편없는 말이라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이미 발을 잘못 디뎠으니, 황급히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바보 같게도 환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이대로도 좋은 것 같아.”
그게 환의 솔직한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마저 전달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겠지만, 지금처럼 같이 있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그러나 희서가 그리 중얼거리다 이내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것으로, 또다시 그날의 밤처럼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자리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엔 되는대로 둘러댄 것이 아니라, 제 솔직한 마음을 전달한 것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게 두 사람이 마주할 변화의 시작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
머지않아 궁은 황태자 강이 치를 국혼의 이야기로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그런 가운데 희서는 숙소에 틀어박혀 책을 붙들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원래도 그러했지만, 요즘은 조금 더 악착같아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러했다. 궁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으론 희서 방의 불이 도통 꺼지질 않는다는 소리도 있을 정도였다.
‘…그날의 일 때문인가.’
걱정되었지만, 단단히 마음 잡고 공부하겠다는 애를 말릴 명분이 부족해 일단은 내버려 뒀다.
그런데 돌아온 제사로 인해 궁을 나서야 했던 어느 날, 마침내 일이 생기고 말았다.
1년에도 몇 번씩, 셀 수 없이 반복해 온 일이었다. 그래도 언제나 그 준비는 하나부터 열까지 정신없고 분주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제수, 제기, 음악 등이 될 것이고, 그 외에도 종묘까지 이동하는 데 필요한 모든 중요한 것들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했다.
물론 환이 바쁠 일이야 새벽녘에 일어나 치장하는 것이 다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전의 그날처럼 희서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외신에서 취재까지 온다고 하여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며, 가벼운 메이크업까지 받고 있던 환은 옆에서 의복 등을 체크하느라 마찬가지로 분주한 성현에게 넌지시 물었다.
“희서는?”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한 물음이었다. 저도 모르는데 그라고 알까.
성현에 대한 설명을 잠깐 덧붙이자면, 그는 사실 황자궁의, 그중에서도 환을 가장 곁에서 모셔야 하는 궁인이었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희서의 덕을 가장 많이 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리된 것이 다 희서만 찾아 대는 제 탓이기는 했지만, 그걸 너무 대놓고 즐기니 환은 그를 이 궁에서 가장 뺀질거리는 사내로 생각했다.
그래서 실은 일전의 비슷한 상황에서 ‘글쎄요?’ 하고 답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엔 너무도 명확한 답이 곧장 튀어나왔다.
“아, 조금 전에 희서는 같이 못 간다고 연락 왔어요.”
“…뭐? 왜?”
조금의 당황스러운 침묵 후에 환이 던진 ‘왜?’라는 물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었다. 왜 같이 못 가는 것이냐 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고, 사실 더욱 놀라운 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정말 어떻게 알아? 희서가 얘한테만 연락한 거야?
“공부한다는데요.”
그러나 이내 성현에게서 그러한 말이 이어지자 환의 눈썹이 꿈틀 들어 올려졌다.
‘공부.’
또 공부라.
환은 손을 들어 제 오뚝한 콧날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메이크업 브러시를 멈추게 했다. 어디 불편하시냐는 물음에 환은 생각했다. 그래, 몹시 불편했다.
‘어디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까.’
일전에 공부 핑계로 그 난리가 났었는데, 이번에도 또 같은 핑계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다니. 희서의 성의 없음에 환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누굴 바보로 아나. 그러다 보니 뒤이어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건 신호 같은 게 아닐까?’
아프다고. 와 달라고.
물론 정반대로 ‘그렇게 되었으니 잘하고 와라.’라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아니, 굳이 따지자면 더 높은 확률로 그쪽이겠지만. 환은 저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어느 정도인지 직접 제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뭘 해도 할 수 있을 듯했다.
이번엔 정말로 모르는 척 가만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환은 그 즉시 몸을 일으켰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기겁하며 만류하는 성현과 다른 궁인들을 뒤로하고, 환은 거의 탈주 수준으로 부리나케 궁인 숙소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꼭 현행범이라도 잡는 모양새로 희서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환은 그러기 무섭게 조금 다른 의미로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희서가 너무도 태연하게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전하?”
고개를 들어 의아하게 저를 바라보는 희서를 보자, 환은 그리 요란하게 들이닥친 스스로의 모습이 민망할 정도였다. 혹시 제가 찾아올 것까지도 예상하고 숨기려는 수작은 아닌가 하여 다급히 희서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아픈 기색 같은 건 전혀 없이 뽀송뽀송하기만 했다.
황망한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뭐해?”
“공부요.”
“…정말로?”
당혹스러운 대화였다.
환은 그 뒤로 뭐라 더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간 입을 달싹거리다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이번에도 아픈 줄 알고.”
그랬는데, 정말로 공부하려고 같이 못 간다는 거였어?
환은 그게 몹시 의아하고 또 괜히 서운했다. 아직 2학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중간고사나 모의고사 등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희서라면 그 정도 시험들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따로 준비하는 엄청난 시험이라도 있나?
대체 어떤 시험이 희서를 공부하게 만드는 걸까?
‘…그렇더라도 같이 가지.’
철없는 소리지만, 언제나 가장 상단에 있던 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 듯해 환은 당장 섭섭한 감정을 미처 숨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 무안한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그러다 환은 또 횡설수설 못난 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 황태후궁에 또 불려 가면 어떻게 해.”
자칫 걱정처럼 들리겠지만, 실은 투정이고 어린애 같은 협박이었다.
‘따라나서지 않으면 어른들한테 혼이 날 텐데?’ 하고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환은 그 유치한 소리를 자신이 뱉었다는 끔찍한 사실에 얼굴로 열이 몰려 곤혹스러워했다.
그 탓에 환은 아무래도 희서에게 혼쭐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혼자 가서도 잘하면 되는 게 아니냐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그게 백번 맞는 말이라 어찌 반박도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뒤이어 돌아온 희서의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환은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아,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미리 허락받았거든.”
“…뭐? 허락을 받았다고?”
“응.”
환으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환이 말썽을 부릴 때마다 늘 죄 없는 희서를 닦달하시던 황태후께서 희서가 오늘처럼 중요한 일정에 따라가지 않는 걸 허락하셨다는 것도 놀랍고, 또 희서가 저 모르게 그리 철저한 준비를 해 놓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그렇게나 성가셨다는 뜻일까.’
괜한 자격지심도 들었다.
“…그, 그래?”
어쨌거나 결론은 이젠 거기서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애한테 이보다 더 추한 방해꾼이 없었다. 눈에 띄게 풀이 죽은 환은 이곳에 들어올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초라한 모습이 희서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여태껏 매정하다 느낄 정도로,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환을 바라보고 있던 희서가 주저하다 말을 꺼냈다.
“…잘 다녀오면 저녁 같이 먹어.”
“…응. 좋아.”
환은 입꼬리를 올리며 단숨에 그러자고 대답했지만, 이전엔 당연했던 것들에 이제 조건이 붙는다는 사실을 알아채 몹시 당황스럽고 입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