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그사이 희서는 자신을 찾았다는 서란을 만나러 동궁으로 향했다.
혼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영문을 모르겠다면 결국 부딪쳐서 알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희서는 마침내 서란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처음으로 가까이 마주하는 그녀를 향해 희서는 한껏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주한 서란은, 갓 입궁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자선당에 잘 녹아든 모습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칼과 그와 대비되는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데, 가례를 치를 때 입은 아청색 적의와도 잘 어울렸지만, 오늘의 연한 백금색의 당의 역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서란은 그렇게 희서를 앉혀 놓고, 한참을 말없이 가만 관찰하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얼굴엔 앞서 다른 궁인들도 어려워했듯이 희로애락 같은 명확한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어디 불편한 기색이라도 비치면 납작 엎드리기라도 할 텐데. 어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그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희서 역시 난처했다.
이러다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좀 더 기다리던 끝에 희서가 다시 한번 아뢰었다.
“전하, 혹시 소인을 부르신 연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희서의 긴장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투였다. 공손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랬더니 서란이 그제야 입을 열어 답했다.
“됐어, 그런 어려운 말투. 그런 거 시키려고 부른 거 아니니까.”
새침한 그 말에 희서는 오히려 더욱 마음이 복잡해져 등 뒤로 땀을 한 줄기 흘려 냈다.
‘그렇다면 왜?’
어쩐지 더욱 안 좋은 상상만이 이어졌다.
이쯤이 되어서도 도저히 짐작 가는 것이 없는 희서가 미심쩍게 바라보니, 서란이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마침내 결심했는지 희서를 이곳까지 부른 진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비결이 뭐야?”
“…네?”
뜬금없는 소리에 희서의 머리 위로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떠오르게 되었다.
‘…무슨 비결?’
혼을 내거나 시비를 거는 투도 아니었다. 표정 변화는 여전히 크게 없지만, 그리 물으면서 희서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났다. 희서보다 연상인 서란이 어린아이 같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희서도 어린 시절 저런 눈빛을 많이 했다 보니 적어도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희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여기서 ‘비결’이란 단어가 나왔냐는 것이었다.
‘공부 비결을 묻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서란과 희서 사이엔 당혹스러운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앞선 서란의 물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녀가 누구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었다.
이름은 홍서란, 나이는 22세.
이번에 황실과 혼례를 맺게 된 유화 그룹의 막내딸이었다.
‘막내딸’이라는 설명 때문에 혹 금지옥엽으로 애지중지 키워졌을 것이라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그녀가 당시 가정부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입적은 했지만 차이가 크게 나는 손위 형제들에 비해 많은 부분 차별을 받고 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어쩌면 무던하다 표현되는 그녀의 성격은 그런 가정 환경에서 비롯되어 ‘그렇게 길러진’ 것일 수도 있을 터였다.
무던히 넘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결혼이 성사되었을 때도, 통보를 받은 그녀는 그저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일각에선 권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황실에 시집가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부류도 있었지만, 서란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 정도면 다행이다 싶었다.
막말로 돈 많은 영감의 후처 자리가 아닌 게 어딘가. 돈에 눈이 먼 제 가족들은 체면 불고하고 그런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하자면 황태자는 젊고, 잘생겼고….
물론 그 역시도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인가?’ 물으면 그건 또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지나친 욕심이겠거니 체념했다.
“아이는 최소 둘 이상이어야 합니다. 다소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그것이 황실에서 버티며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이 될 겁니다.”
결혼할 사이에,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저를 보고 가장 먼저 한 말이 이것이었다.
여지 하나 주지 않겠다는 듯한 냉정한 얼굴, 냉정한 말투.
“…이해했습니다.”
그 싸늘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리 답하며 서란은 저도 모르게 제 두 손을 꾹 말아 쥐었다.
그러나 이후 그간 황실이 했던 인터뷰나 다른 방송들을 섭렵하며 따로 알아본 바로는, 자신에게 별달리 안 좋은 감정이 있어서 그런다기보다 그의 원래 성격인 듯싶었다. 다들 그를 보며 철두철미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딱딱한 인물이라 이야기했다.
서란은 그게 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남편, 황제로서의 ‘공식적인’ 역할은 충실히 하지 않겠나 생각한 까닭이었다. 자신은 미래에 이 나라의 황후가 될 터였다. 현 황제와 황후도 아들을 넷이나 낳고, 별다른 잡음 없이… 아니, 그렇게 표현하기엔 사이가 더 좋은 듯하지만.
어쨌거나 비슷하게 만나도 잘살고 있지 않은가.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리되길 희망했다.
그 외 다른 기대를 일절 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을 거라고, 서란은 자신을 그리 다독였다.
그런데 혼례를 치르기 직전, 황실 법도 등을 익혀야 하는 이유로 미리 입궁하여 있던 중이었다. 서란은 우연히 얼마 전 동궁에서 벌어진 소란을 목격하게 되었다.
동궁에 찾아온 환을, 강이 벼락같은 목소리로 크게 혼을 내었다.
“희서를 그리 두고 오면 어떻게 해!”
그 광경이 서란에겐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그리 냉정하고 무미건조했던 사람이 저리 길길이 날뛰고 화를 낼 수도 있었던가.
“…희서.”
서란이 강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을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
그리 의식하기 시작하고 보니, 서란은 생각보다 이곳저곳에서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혼례를 치르고 황실 어른들께 이곳저곳 인사를 다니면서는 더욱 그러했다.
황실 식구들이 모였다 하면 주된 화제에 꼭 희서가 빠지지 않았다.
“희서가 요새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다 들었는데. 그래서 잘 안 보이는 건가?”
“그런데도 환이가 잠잠하단 말이에요? 이제야 드디어 철이 들었나.”
“철든 것치고는 공부하는 애한테 너무 붙어 있던데.”
“그래도 밖에서 사고 안 치는 게 어디니.”
“옆에서 방해 안 하는 게 어딘가요.”
“그건… 그렇지.”
그간 저지른 말썽들 때문인지 환을 향한 기대가 참으로 얄팍했다. 그저 옆에서 조용히 있는 것만으로도 다들 대단한 발전이라며 칭찬하니, 만약 환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큰소리를 쳤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도 이야기는 곧 희서에 대한 것으로 다시 돌아갔다.
“어쨌거나 정 실장, 희서 공부 쉬엄쉬엄 시키게. 몸 상하지 않게.”
“그래, 희서 잘 먹는 과자도 들어와 있으니 먹으러도 오라고 하고.”
“희서가 아직도 애기인 줄 아세요? 과자 먹으러 오라니. 들으면 깜짝 놀라겠는데.”
“아직 한참 어린애지.”
그로 인해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정작 당사자는 이 자리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두의 중심이 되었고, 완벽한 예외가 되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서란은 어찌 이럴 수 있는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물론 서란도 희서를 모르지는 않았다.
비록 자신이 그 황실의 일원이 될 줄 모르고 그다지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사람들도 환의 희서 타령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았다. 방송이고 어디서고 하도 떠들어 대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란은 이제 그 이상을 알고 싶어졌다.
환과 희서의 관계.
그를 넘어 강과 희서의 관계.
그리고 이 궁에서의 희서의 존재감에 대하여.
그리하여 서란은 큰마음을 먹고 희서를 제 처소로 부르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누굴 부르고 싶다는 서란의 말에 잠시 난처한 듯 보였던 궁인도 상대가 희서라니 금세 ‘그럼 괜찮겠지.’ 하고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서란은 확신했다. 황실 가족들뿐만 아니라 궁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는 ‘안전하고 완벽한 예외’가 틀림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모두에게 신뢰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거야?’
앞서 서란이 뱉은 ‘비결이 뭐야?’라는 질문의 숨은 의미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
그러는 사이에 환은 부리나케 제 형 강을 찾아 나섰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강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강이라면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중간에 뛰어들어 중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그가 필요했다. 이게 바로 자신이 난동을 부리지 않는 선에서 쥐어 짜낼 수 있는 환의 최선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인간이 또 부황 폐하를 뵈러 나갔다 한다.
‘필요할 때 찾으면 또 없지!’
어쩌면 그래서 이 시간대를 노린 건가? 그런 의심까지도 들었다.
‘황태자비 전하,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었네.’
환은 마음껏 오해하고 멋대로 배신감을 느끼며 씩씩거리고 강을 찾아갔다. 그러다 마침 볼일을 마쳤는지 편전을 나서고 있는 강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반대의 상황이 되어 환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매섭게 소리를 쳤다.
“똑바로 하라며! 형은 대체 뭐 하는 건데!”
“…뭔데?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환이 냅다 뛰어드니 짐짓 싸늘한 표정을 지어냈던 강은, 뒤이은 환의 설명에 마침내 정말로 얼어붙은 얼굴을 하게 되었다.
***
그 시각, 다시 서란과 희서가 있는 동궁이었다.
“…비결이라니요?”
앞선 전후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그와 같은 말 한마디만 들은 희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조심스럽게 되묻는 희서에게, 서란도 다시 한번 덤덤하게 물었다.
“왜 너는 그렇게 다 예외일까?”
서란의 입장에선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지만, 듣는 희서에겐 이번엔 차마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예외? 무슨 소리지? 더욱 긴장하여 눈을 굴리게만 되는 소리였다.
“…혹시 저로 인해 마음 상하신 일이 있으셨나요?”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희서가 침까지 꼴깍 삼키며 그리 묻자, 서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 상할 일?
나는 마음이 상했던가?
“아니, 부러웠던 것 같은데.”
“…네?”
그 어떤 여과도 없이 너무도 솔직히 튀어나온 답에, 희서는 또 한 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