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그렇구나. 다 알고 있었구나.”
그리 중얼거리던 환은 뒤이어서 조금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
모르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진작 다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 전 희서의 ‘네 일인데 어떻게 모르겠냐’ 하던 말도 다 다정해서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래도 미움받는 제 모습이 자랑스러울 만한 일까지는 아니었던 탓에 환의 표정이 흐려졌다. 새삼 부끄러워졌다.
‘그렇다고 울 정도로 비참한 일도 아니지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환은 대충 또 한 번 웃어 버렸다.
그러나 역시 희서의 눈은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속상하지?”
희서가 맞잡고 있던 손을 매만지며 그리 물어왔다. 그렇게 물으면 별것도 아닌 일도 다 서러워질 것 같은데. 잠시 못 말린다는 듯 희서를 보고 있던 환은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는 너만 있으면 되는데? 속상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장난스레 그리 말했지만, 이 역시도 진심이었다.
그러면서 환은 잡고 있던 희서의 손에 깍지까지 껴서 더욱 꽉 붙들었다. 그러자 희서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하고 투덜거렸지만, 입으로만 그랬을 뿐 실은 눈 둘 곳을 몰라 하며 부끄러워하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손가락들이 서로 얽힐 때마다, 환도 희서도 괜히 목덜미 언저리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있기를 잠시, 뒤이어 환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 봐. 일단은.”
“일단?”
“일단이지 그럼. 그 녀석이 그렇게 쉽게 포기하겠어?”
그 말은… 반박하기가 어렵네.
그런 의미인지 잠시 희서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를 향하던 그 집요한 눈빛, 자신의 말이 모두 맞고 너는 그걸 따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 그처럼 유원에 관한 여러 가지를 떠올려 보던 희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아니겠지.” 하고 답을 했다.
그게 마음에 들 리 없는 환은 불퉁하게 입을 내놓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일단은 그렇게 하겠지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야 해. 그땐….”
“…그땐?”
그러던 환이 돌연 잠시 숨을 멈추고 뜸까지 들이기에, 희서는 그 뒤로 혹시 ‘같이 해결해 가자.’와 같은 듬직한 말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혹시’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은 이미 그리 믿고 있어서 말을 듣기도 전에 벌써 환을 기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뒤,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오자 희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자식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진짜.”
“뭔 큰일 날 소리야!”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도 불경하고 위험하다는 듯 희서는 환의 팔을 찰싹 내리쳤다. 그러니 환은 돌연 자신이 혼나는 이 상황이 억울한 듯 “왜, 왜!” 하고 소리쳤다.
둘만 있는 자리인데 뭐, 이 정도도 이야기 못 하나? 누가 진짜 죽인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희서는 눈을 부릅뜨며 환에게 경고했다.
“궁에는 담벼락에도 귀가 있다는 말 몰라? 자나 깨나 말조심.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싸우는 건 정말 안 돼.”
요즘 아무래도 아슬아슬해서 한 번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싸움, 그중에서도 몸싸움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황자가 폭력을 썼다고?’
설령 상대방에게 두 대를 맞았더라도, 한 대를 때린 사실 때문에 환은 일방적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 있었다. 그건 아무리 운이 좋고, 또 아무리 사람들이 관대하게 봐주는 환이라고 하더라도 차마 넘어서지 못할 선이었다.
안타깝게도 황자라는 것은 그런 자리였다.
물론 다른 이의 앞에 서는 자들 중 누구에게 그러지 않겠냐만, 황자가 자국민을 향해 올린 손은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흠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희서도 두 번 세 번 환을 주의시키며 그에게 다짐을 받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주먹질은 절대로 안 돼. 알고 있지?”
그리 짚어 주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너무도 당연한 주의 사항이건만, 환은 새삼 그게 퍽 답답하고 억울한 모양이었다.
“상대방이 먼저 싸움을 걸어도? 먼저 때려도?”
“감히 황자를 누가 때려? 경호는 뭐 하고? 만에 하나 그럼 곧바로 신고를 해야지.”
“…그렇게 신고해서 누군가 달려올 때까지 난 바보처럼 계속 당하고만 있어야 해?”
“누가 그러래?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리 투덜대는 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희서의 말이 백번 맞는 것이야 그도 알았다. 누군가를 때리다니, 말도 안 되지. 망나니도 아니고 여기저기 주먹질을 마구 하고 다니고 싶을 리도 없었다. 다만 환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조차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묶이는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황자고 뭐고 이까짓 것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당최 하나도 없잖아.”
“이까짓이라니…!”
그러다 마침내 환의 불만이 그런 방향으로까지 나아가자, 화들짝 놀란 희서가 경악을 토해 내며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혹여나 저 엄청난 소리를 누군가 듣진 않았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말조심하자고 했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건만.
환을 또 한 번 나무라야 맞는 것이었지만, 그의 답답한 마음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 괜히 마음이 약해진 희서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환을 달랬다.
물론 그 위로라는 것이 퍽 우스웠다.
“알았어, 그럼 조금만….”
조금만 싸우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난데없이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러나 꾹 눌러 참은 환은 부러 더 보란 듯 투덜거렸다. 어쩌면 조만간 있을지도 모를 최유원 그 녀석과의 충돌에서 최대한 덜 혼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다짜고짜 녀석에게 손찌검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쩌면 저도 방어라는 걸 해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손발 꽁꽁 묶어 놓고 뭘 싸우래. 어떻게 싸워?”
“왜 못 싸워? 안 묶어 놓은 곳 있잖아.”
“……?”
어디?
선뜻 이해하지 못한 환이 고개를 갸웃대니, 잠시 뒤 희서가 자랑스레 제 입술을 가리키며 웃었다.
“입.”
***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유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할 말이 있어 오늘 수업 끝나고 잠깐 봐]
아무리 생각해도 전처럼 밖에서 따로 보는 것까진 역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고심하던 희서가 택한 방법은, 어차피 만나야 하는 학교에서 겸사겸사 이야기를 마치자는 것이었다. 사실 따로 거창하게 불러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 ‘거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원은 그런 줄도 모르고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희서로부터 받은 그 메시지를 확인한 이후부터 눈에 띄게 기분 좋아하는 것이 표정에서부터 투명하게 티가 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제안을 희서가 ‘당연히’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아닌데.’
그 잔뜩 부풀어 올라 있을 기대를 좌절시킬 생각을 하니, 글쎄. 미안하기보다도 어쩐지 피곤해지겠단 생각이 먼저 들고 말았다. 그 탓에 희서는 수업이 끝나갈수록 저도 모르게 연신 제 목덜미를 주무르고 있었다.
환은 앞서 희서와 얘기했던 바와 같이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잠시 물러나 있기로 해서, 수업이 끝난 뒤 곧장 아래에 대기하고 있을 차로 먼저 내려보냈다. 물론 그러기까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눈빛이, 누가 보면 꼭 전쟁터라도 끌려가는 줄 알았겠지만 말이다.
‘기다리고 있어. 나 믿지?’
‘기다릴게. 얼른 마치고 와야 해. 무슨 일 있으면 꼭, 꼭 전화하고.’
참 유난이었다.
어쨌거나 환이 여차하면 밑에 있는 경호원들을 싹 다 올려 보낼 기세로 유원을 매섭게 쏘아보며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섰다. 그러자 마침내, 모두 돌아가고 난 텅 빈 교실에 유원과 희서, 두 사람이 남겨졌다.
‘환이 1분 1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기도 할 테고.’
그동안 지켜본 유원의 성정상 괜히 배려한답시고 에둘러 말했다가는 제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겠기에, 희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내 대답은 거절이야. 미안하지만, 난 너랑 유학 안 가.”
그러자 줄곧 싱글벙글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유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환 저 녀석 때문이야?”
그러고는 역시 단번에 그 질문부터 날아왔다.
자신이 거절하면 애꿎은 원망의 화살이 환에게 날아갈 것이라 했던 희서의 예상이 이보다 더 정확히 들어맞을 수 없었다. 일순 험악해지는 그의 눈빛을 보고 희서는, 환을 미리 내려보낸 것에 크게 안도했다. 환이 이 자리에 있기라도 했다간 자칫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그 녀석이 가지 말라고 해? 염치도 없이?”
“…염치?”
그런데 뒤이어 격분한 유원이 토해 낸 그 기가 막힌 소리에, 그래도 최대한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자 했던 희서의 표정도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저 단어 하나에서부터 티가 났다. 그가 평소에 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말이다.
‘어디서 감히….’
멋대로 환을 파렴치한쯤으로 취급하는 것이, 희서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물론 희서가 유학을 가지 않기로 결정한 배경에 환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리 결정한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떠먹여까지 주겠다는 맛있는 밥상을 대체 왜 걷어차는 것이냐고 누군가 그리 묻는다면 희서는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었다.
“아니, 최유원. 그건 너 때문이야.”
희서는 단호한 눈빛으로 유원을 올려다보며 그리 이야기했다.
물론 유원은 당연히 희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놀랍지도 않게, 그게 대체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는 표정을 짓곤 희서를 바라보고 서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희서는 정말로 진심이었고, 그게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안 그러면서.’
제게만 유독 심하게 집착하는 유원의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희서도 나름대로 그에 대해 알아본 바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호기심 같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 뭐 그런 의미에 가까웠다.
나름대로 노력해 보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그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리 희서라고 해도 어렸을 적 기억은 흐릿한 편이고, 또 두 사람 사이에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도 전혀 없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대신 어릴 적 사진이나 당시의 신문 기사 같은 것들을 뒤져, 영재반, 그리고 그 후의 일들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를 두고 희서는 홀로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
‘그래서 얘는 내가 미웠을까?’
사사건건 그의 앞을 가로막아서?
‘아니, 하지만….’
최근 그의 행동은 꼭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돌연 유학을 함께 가자고 하고, 자기네 회사에 들어오라고 하고. 남들이 들으면 틀림없이 혹할 거리를 끊임없이 들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밉지 않다’라는 감정을 넘어서 어떤 ‘호의’까지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왜?’
고민하던 희서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었고, 또 지금 그가 제게 어떤 감정이 있건 간에, 그것이 유원이 제게 하는 모든 일방적인 행동들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