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니, 말이 쉽지,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괜히 어설프게 끼워 줬다가 잘못 넘어지기라도 하면, 누구 하나 덤터기 쓰고 골로 가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동아리 쪽에선 환이 오는 것이 영 껄끄러운 눈치였다.
그땐 부모들의 극성이었지만 이젠 알 만큼 아는 녀석들이라 본인들이 직접 난처해했다.
자기들끼리 그런 곤란한 눈빛을 주고받는 아이들을 향해, 축구부 동아리를 담당하고 있는 체육 교사는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경기 데리고 뛰라는 게 아니고, 도와준다잖아. 잡일 시켜. 부려 먹어.”
“…에이, 황자 전하한테 어떻게 그래요.”
“황자인 게 뭐가 그리 대단하냐며? 요즘 너희들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 그거 아니야?”
체육 교사가 그리 꼬집었더니 불만을 토로하던 녀석들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렸다.
물론 지금 앞에 있는 축구부 녀석들이 주도적으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닌 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 지껄이고 다니는 녀석들에게 내심 동조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리 멍석을 깔아 주니 하나같이 주춤거리며 몸을 사리는 게 우스웠다.
그 탓에 뒤에 서 있던 희서의 입술 새로 몰래 비웃음이 샜다.
“대회 전까지 손발 모자라는 건 맞잖아. 이미 황실 쪽에도 다 허락을 받아 놓은 상황이니, 해 봐. 한 번. 막말로 이때 아니면 언제 너희가 황자 전하를 부려 먹어 보겠냐?”
장난스러운 한마디가 덧붙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더는 별수가 없었다.
비록 양쪽 다 선뜻 내키지는 않아 보였지만, 어영부영 중간에 있는 체육 교사, 담임 교사, 그리고 희서에게 떠밀려 ‘이환 이미지 개선 프로젝트’가 시작이 되었다.
***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반면 희서에게서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한 환은 그런 생각에 불퉁한 얼굴을 했다.
저쪽에서 썩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 준다.’라는 그림을 만드니, 괜히 그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또 애초에 그렇게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봉사 활동도 아니고 이게 뭐야.’
처음 희서에게서 축구부 이야기를 들었을 땐, 내심 부상 선수 대신 공이라도 차는 건가 했다. 그런데 그건 아무래도 야무진 꿈이었던 모양이다. 공을 차긴커녕 막상 와 보니 볼 보이, 잡부 신세였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의욕이 넘칠 수가 없었다.
‘희서만 아니면….’
그랬다. 정말로 희서만 아니면 진작 도망가고도 남았다.
당최 왜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희서가 시키니까 우선은 버텨 보는 것이었다.
실은 자신이 옆에 없어야 다른 아이들과 더 어울리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던 희서였지만, 환이 그런 시큰둥한 태도이니 도저히 곁에 붙어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애초에 환을 혼자 둔다는 게 꿈같은 소리이기도 했다. 불시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 그래도 자신이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 게 맞긴 했다.
그러한 연유로 환과 희서는 함께 방과 후 축구부를 돕게 되었다.
환은 만일을 대비해 명목상이나마 후보 선수가 되었고, 희서는 아무리 명목상이라 하더라도 ‘이런’ 후보 선수가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매니저와 비슷한 자리를 얻었다.
그러긴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이 크게 대단한 걸 할 수 있을 리도 없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잡부와 다를 바 없었다. 훈련을 마친 선수들에게 물이나 수건 등을 가져다주거나, 짐을 옮기고, 공을 줍고, 피드백에 활용될 훈련 영상을 찍기도 했다.
그 외엔 뛰어다니는 선수들을 지켜보며 앉아 있는 것이, 평소의 체육 시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 희서는 뜨끔 놀라 옆에 있는 환을 바라보았다.
비록 프로 선수들은 아니지만, 아니, 어쩌면 오히려 또래 친구들이기에 더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환도 운동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유니폼을 입고 저리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무척 좋아했을 텐데….’
벤치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는 환의 심정이 뒤늦게 걱정이 된 희서가 옆에서 계속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얼핏 보기엔, 팔짱까지 끼고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공과 선수들의 움직임을 쫓는 눈이 쉬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아직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포기한 꿈이지만, 그래도 아직도 뛰고 싶을 것이었다.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둔 것이 아님을 희서는 알고 있었다.
“조만간 연습 정도는 같이 뛰어 볼 수 있게 될 거야.”
“…아니, 뭐, 꼭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위로처럼 건넨 희서의 말에 환은 그리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지 상기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솔직한 모습을 보며 희서는 또 한 번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기 위해서 해 줄 게 있는데.”
“뭔데?”
“나랑 가위바위보.”
“뭐?”
희서가 또 참으로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 바람에 환은 잠시간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사실 난데없이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 자체부터, 엉뚱하고 어리둥절하지 않은 것이 없긴 했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는 듯 희서가 여기서 뭔가를 더 꾸미려 드니 환은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희서는 그에 대한 별다른 설명도 없이 냅다 손을 들어 버렸다.
“가위, 바위, 보!”
내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환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호기롭게 시작한 기세와 달리 희서는, 초라한 가위를 야무지게도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
“…….”
그러고는 이게 아닌데 싶었던지 슬쩍 환의 눈치를 살피곤 나머지 세 손가락을 슬그머니 폈다.
“어허.”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조작은 안 됐다. 발끈한 환이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어디서 밑장 빼기냐며 팔을 붙들었지만, 희서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삼세판이었거든.”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한국 사람들은 말 안 해도 원래 그런 거 아니야?”
그 뻔뻔함에 환은 실소를 흘렸다.
“그래, 어디 보자, 분명히 너 5판 3선 하자고 한다.”
“그럴 리가.”
희서는 콧방귀까지 뀌며 그리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잠시 뒤, 희서는 환의 말이 예언이라도 되는 듯이 5판 중에 고작 2판밖에 이기지 못해 망연자실해 있었다. 왜지? 자신은 나름대로 확률까지도 계산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임했는데.
별생각도 않고 툭툭 낸 환에게 졌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질 않는 듯했다. 희서는 그대로 제 손가락을 잠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희서가 돌연 눈을 치켜뜨며 환에게 막무가내로 말을 했다.
“전하께서 이기셨으니까, 전하가 아이스크림 쏘세요.”
“뭐? 그건 또 무슨….”
말을 이어 나가던 환은 불퉁한 희서의 얼굴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뜬금없이 가위바위보니 어쩌니 들이민다 했더니.’
아이스크림을 쏘라고?
결국 희서가 하고 싶은 것이 이것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만약 그가 이겼다면 의기양양해선 콧대까지 치켜세우며 그리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기 좋게 실패해 이리 억지를 부리는 모양새가 되었으니, 불만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희서를 보며 환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냥 시켜도 네가 시키면 했을 텐데.’
허술한 음모가 귀엽고 우스웠다.
사실 환이 돈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황실 돈으로 하는 것이었다.
치밀하게 미리 허락도 받아 놓았을 것이면서 저리 깜찍하게 굴었다. 아무래도 환의 이름을 붙여 그 명분을 챙겨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곧 그의 장단을 맞춰 줬다.
“아, 그럼. 기분 좋은 김에 내가 쏴야지. 희서 너는 뭐 먹고 싶은데? 말만 해.”
어깨까지 들썩이며 그리 과장해서 말했더니, 희서가 조금 기분이 풀린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황자님이 쏘시는 거란다!”
힘든 훈련 후에 시원하고 달달한 걸 입에 물려 주는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배달 온 아이스크림에 다들 왁자지껄 몰려들어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씩 골라 갔다. 그중에 유독 단순하고 장난기가 많은 녀석들은 더더욱 싱글벙글해선, 환에게 서슴없이 “잘 먹을게용, 황자님.” 하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오냐.”
퉁명스럽게 그리 답했지만, 쑥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그의 벌건 귓가로 다 티가 났다.
한 걸음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희서는 흐뭇해했다.
그런데 그리 기분 좋게 끝날 줄 알았던 소동이, 모두에게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고 난 뒤에 돌연 환이 희서의 앞에 용건이 있다는 듯 서며 이어졌다.
“왜요? 다른 거로 드려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요?”
“진 사람은 뭐 안 해?”
“…네?”
“아까 가위바위보 졌잖아. 모르는 척할 거야?”
별안간 중요한 사실을 짚는 환 때문에 희서는 잠시 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어쩐지 시키는 대로 술술 잘만 따른다 했더니, 그게 다 이런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배신감을 느낀 희서가 제 혀를 살짝 물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환은 이긴 사람은 아이스크림까지 쐈는데 무려 진 사람이 입을 싹 닦고 지나가려 한다며, 기가 막힌다고 희서를 몰아갔다. 저리 나오는 것은 분명 저도 원하는 게 있으니 하나 들어달라는 뜻이었다.
‘…이래서 기필코 이기고 싶었던 건데.’
그러질 못했으니 별수 있을까.
결국 혀를 쯧 찬 희서는 어디 말해 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희서의 반응을 본 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러면서 그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그의 핸드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