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어쨌거나 유원이 제법 받아들이는 기색을 보이자 희서가 잽싸게 선을 그으며 말을 했다.
“그렇다고 유학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너도 참 멋대로다. 그럼 내가 얻는 게 대체 뭐야?”
“싫으면 이번 일에 든 비용 영수증 첨부해서 달아 놔. 나도 그편이 더 나으니까.”
“안 될 말이지. 어떻게 사람이 인정도 없이 그래.”
인정?
유원의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희서의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애초에 자신이 저지른 짓을 남한테 뒤집어씌워 놓고는 이제 와 뻔뻔하게 지껄이는 모습이 참 별꼴이었다. 사실 희서가 이렇게 뭘 해 주니 마니 하는 상황이 우스운 것이었다. 결국 저 녀석이 저지른 짓을 스스로 수습한 게 아닌가?
그런데도 뭐 대단한 것을 베푼 사람처럼 악착같이 얻어가려는 게 참 못된 심보였다.
하지만 그리 생각한들 어쩌겠나. 이러나저러나 같이 얽혀 버렸고, 수습은 한쪽에서 다 한 모양새가 되었으니 지금 상황에선 환과 희서가 약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넌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유원을 바라보며 희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며칠 뒤 마침내 학교에 돌아오게 된 환은, 이어서 본 광경에 일그러지는 표정을 미처 숨길 수가 없었다. 아니, 저와 희서의 옆에 유원이 너무나도 당연한 듯 붙어 있으니 말이다. 이건 환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과 달리 희서가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설마 자신이 오지 않았던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초조한 환이 희서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러니 유원은 그를 보며 여유롭게 웃음을 짓고, 희서는 난처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소문 잠재우려면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했잖아.”
안 그래도 오늘 학교에 오는 차 안에서 희서에게 이야기를 따로 듣기는 했다. 소문은 거의 가라앉았지만 막상 환이 얼굴을 내비치면 또 어떤 소리들을 해 올지 모르니, 일단 해명 글에 적혀 있던 세 사람의 사이부터 문제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홍동현은 명운 그룹과 합의를 하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전학을 가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그리되면 또 한 번 의심을 살 법도 했기에, 지금은 유원과 붙어 있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라고도 했다.
사이가 나쁜 줄 알았던 세 사람이 함께 붙어 다니니 의외라는 시선은 있지만, 확실히 다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엄두도 내지 않았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유원의 배경과 고소 공지가 참으로 효과적이었다.
“…그렇지.”
환도 상황을 이해는 했다. 하지만 ‘그럼 언제까지 이러는 건데?’ 하고 불쑥 묻고 싶어졌다.
뜻하지 않게 사건 사고에 휘말려 황실과 희서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친 그의 양심상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짜증 나.’
희서와 둘만의 시간을 맘껏 즐길 수 있어 행복했던 학교생활이 이젠 하루하루 스트레스를 견디는 시간으로 변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는, 쓸데없이 덩치만 큰 어느 불청객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희서의 일이라면 예민한 환의 시선에 유원의 태도 변화가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
이전에 희서를 향해 항상 궁을 나가야 해, 유학을 가야 해, 하던 그가 마치 ‘인생 컨설턴트’쯤 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꼼짝없이 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책을 읽는 희서를 옆에서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도 자신과 닮아 있어서,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환의 심장이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어느새?’
‘어쩌다?’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괴롭히듯 계속 피어올랐다.
그러나 가장 괴로운 것은 유원이 허락도 없이 불쑥불쑥 희서에게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환은 부글부글 끓다 못해 펑 하고 터지려 하는 제 속을 다스리기가 너무도 벅찼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손을 낚아채 부러뜨려 버리고도 싶었다.
‘희서는 저 노골적인 모습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일까.’
애가 닳고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희서에게 또 어떤 식으로 닿으려 들까, 또 어떤 기상천외한 짓을 할까, 경계하느라 환은 눈 한 번 마음껏 돌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유원은 그런 그를 더욱 놀리듯 구니 아무래도 그게 환을 더욱 몰아붙이게 된 것 같았다.
환이 몸살로 앓아누웠다.
무리도 아니었다. 아닌 척해도 앞선 소동으로 크게 마음 앓이를 한 상태에서 곧장 희서를 두고 유원과의 신경전이 이어졌으니 말이다. 몸도 마음도 여간 지친 게 아닐 터였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며칠 학교를 쉬기 위해 찾았던 핑계가 정말 현실이 되어 버렸다.
희서가 아플 때 옮을까 봐 한걱정을 해도 너무 튼튼해서 민망하기까지 했던 그인데.
‘이걸 진귀한 광경이라고 해야 할까.’
진찰을 마친 어의가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나선 뒤, 간호를 위해 곁에 남은 희서는 환의 이마를 짚어 열을 재며 혀를 찼다.
“이번 말썽은 너도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지?”
“…아직도 심해.”
환이 색색거리는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그리 칭얼거렸다.
“그 녀석도 전학 갔고, 이미 지나간 일을 혼자 이리 끙끙 앓아 봐야 풀 곳도 없어. 잊어야지.”
“내가 정말 동현인지 동우인지 걔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
환의 원망 섞인 물음에, 희서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동안 환이 모르리라 생각했던 것들도 실은 미리 알고 있었던 희서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역시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환은 다름 아닌 유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나 질색하며 티를 내는데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환아.”
희서가 타이르듯 부르니 환이 오르는 열 탓에 눈가가 붉어진 채로 말을 토해 냈다.
“…싫어.”
환도 알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염치가 없는 짓이라는 걸 말이다.
이렇게 된 건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신중히 생각하지 못하고 홀로 나섰다가 함정에 빠져 희서도 황실도 모두 몹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궁에 홀로 처박혀 있는 동안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수습하러 뛰어다녔을 그들에겐 감히 미안하다는 말조차 쉬이 나오지 않았다.
‘자숙하고, 또 자중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로 환은 그와 같은 경고를 받게 되었다.
당분간 쓸데없는 짓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감히 희서에게 투정을 부려?’
쥐 죽은 듯 조용히 입 다물고 눈치만 보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양심이 없어도 유분수지. 환도 저 자신을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비난했다. 하지만 어쩌면 좋을까.
그런데도 싫은 것을.
“…싫어, 희서야. 너랑 그 녀석이 붙어 있는 거.”
최근 한껏 곤두서 있던 환은 거의 매일 밤 악몽까지 꿨다.
재수 없는 최유원 그 녀석은 매번 싱글거리는 얼굴로 희서를 빼앗아 갔다. 저는 궁에 발이 묶여서 그런 희서를 되찾으러 뛰어가는 것조차 할 수가 없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데.
그저 꿈이지만 그 안에서 환은 매번 좌절하고 울고 쓰러졌다.
“…널 잃어버리는 나쁜 꿈을 꿔서, 잠도 잘 못 자겠어.”
오늘도 같은 꿈을 꿀까. 잠드는 매 순간이 불안하고 괴로웠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달뜬 숨을 거칠게 몰아 내쉬는 환을 보고 희서는 난처한 눈빛을 했다.
안 그런 것 같지만 환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그러니 어렸을 적에도 어른들의 자그만 기색에 그리 예민하게 상처를 받았던 것일 터였다. 이번에도 어쩌면, 완전히 눈치채진 못했더라도 조그만 단서들로 저도 모르게 희서의 결심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지금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그래서 희서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지금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어떨지 고민하게 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졸업과 동시에 궁을 나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말이다. 희서는 자신이 줄곧 궁 밖에서 황실과 환을 위해 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와 나누고 싶었다.
“…….”
하지만 그건 환에게 분명 몹시 실망스러운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희서가 주저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결정을 내린 이상 언제고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지만, 가뜩이나 아픈 와중에 더욱 실망하고 좌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다음에 해도 될 거야.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어쩌면 희서 역시 그날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기에 나온 안일한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러하여 공연히 입술만 달싹이던 희서는, 결국 환의 손을 잡아 다독이며 그를 달랬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자. 그래야 낫지.”
쓸데없는 생각?
자칫 매정하게 들리는 말에 환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희서를 바라보며 입을 삐죽였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진작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환은 이렇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덮어놓고 지나가면 또 금방 불안해질 것이기에, 희서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다 희서가 평소처럼 가긴 어딜 가냐, 안 간다, 그런 말을 해 주길 바랐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었으면 했다. 그런 바람에 환은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희서야.”
환이 어렵사리 희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때였다. 희서가 별안간 잡고 있던 환의 손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난데없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가만두고 보았더니, 이윽고 희서가 그 손을 들어 올려 손등 위로 쪽,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따뜻한 입술이 잠시 깃털처럼 닿았다 떨어졌다.
“어…?”
그러니 환은 순간 고장이 나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장이 났다’라는 말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가 없었다. 채 다물리지 않은 입이 어버버, 우스운 소리까지 낼 정도였다. 환으로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