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어?”
별안간 자신들의 테이블에 다가온 수상한 그를 보고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때, 주영만은 그를 알아보고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주르륵 내뱉고 말았다.
사실 모두들 덕질 경력이 상당한 만큼 심상치 않게 바라보고는 있었다. 다만 머리가 따라 주지 않을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환이야?”
누가 그리 묻자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마침내 코를 훌쩍이며 마스크를 벗어 냈다. 그와 동시에 주영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내적 비명을 지르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얘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이 시간에 어떻게 나온 거야?’
‘아니, 어?’
여기 지금 환희의 정원 정모잖아?
생각할수록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자리가 보통의 팬 모임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무려 환희의 정원이라는 커플 사이트의 정기 모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책 위원회쯤 되었다. 그런 자리에 다른 누구도 아닌 환이 대체 어떻게 알고 나타난 것일까.
모두가 감당이 안 되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꿈인가? 아니, 이런 꿈을 꿨다고 글을 올려도 다들 비웃을 것 같았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인지라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그 가운데, 주영이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내 탓인 것 같지?’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어쨌거나 환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 것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이 당혹스러운 광경에 대한 제 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주영은, 아무래도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생각에 쭈뼛쭈뼛 모두의 앞에 나섰다.
그러고는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겠지만, 정식으로 소개를 했다.
“…윤친왕 전하이시고, 내가조선의환이다 님이세요.”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온갖 미사여구로 수천 번쯤 소개가 된 경험이 있지만, 뒷부분처럼 소개되는 것은 생전 처음인지라 환은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의도와 달리, 앞에 모인 사람들은 더 큰 혼란에 빠진 모양이었다.
“뭐?”
“거짓말!”
“이거 뭐야? 몰카 그런 거야?”
“장난치지 마. 나 소름 돋으려고 해.”
그런 반응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환이 그간 활동을 보통 열심히 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도 하나같이 그에 못지않으니, 당연히 그 닉네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환희의 정원 사람들 사이에서 이른바 ‘댓글 요정’이라고 거의 모든 글에 빠짐없이 댓글을 달고 다닌 이였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다고?’
환이라고?
그 단순한 사실을 차마 연결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다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야, 씨. 그걸 다 봤다고? 누군가 경악스럽게 뱉은 격한 말과 함께 잠시의 술렁거림이 이어지는 동안, 자신이 ‘황금사과’라며 인사를 한 주영은 아닌 척해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환에게 속삭였다.
“대체 여긴 어떻게 나오신 거예요?”
“그건….”
동궁에서 울고불고했던 그 아수라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환은 대답 대신 퉁퉁 부은 눈으로 민망하게 웃었다. 그러니 주영도 적당히 상상이 가는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제대로 허락을, 받은 건 맞으시죠?”
떨리는 목소리로 그와 같은 확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이 곧장 “그럼요.” 하고 당연하다는 답을 했지만, 은근한 의심이 지워지지 않을 만큼 요즘의 환은 정말이지 누가 봐도 엉망인 상태였다.
***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겁쟁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희서를 보내 버렸으니 말이다. 할 수 있는 말도 없었고,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무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고…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려 드는 게 제 나쁜 버릇이라는 걸 알았다.
설령 그게 정말로 현실이더라도 이번에는 그랬으면 안 됐다.
이번에도 지금까지와 같이 체념하고 넘어가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대로 희서를 보내게 되는 결말뿐이었으니 말이다. 포기하는 것이었다. 제게 더없이 소중한 희서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계속 못 보게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마저 들자 마침내 심각성을 느낀 그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럴 수는 없어. 정말로.’
머리가 차갑게 식고 나자 환은 그 순간부터 절절히 후회했다.
희서 없이 혼자 지내 본 것이, 생각해 보니 9살, 10살 그즈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태껏 잘만 지내 왔던 궁이 낯설게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희서 없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환은 다른 말 다 필요 없이 외롭고, 괴롭고, 슬펐다.
궁 안팎으로 희서와 함께한 것이 이렇게나 많고 그게 자신의 전부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늘 요란하게 바뀌어 곤란하기까지 했던 제 눈앞의 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분명 재미있던 많은 것들이, 희서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시시하고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달리 관심이 가는 것도 없었다. 입맛까지 싹 달아나 입에 뭘 넣고 씹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겠으니 이건 그저 살아 있으니까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더라.”
둘째 형 호는 지나가며 제게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환은 동의할 수 없었다.
‘이렇게 힘든데? 이게 과연 시간 좀 지난다고 괜찮아지는 게 맞을까?’
어쩐지 그는 앞으로도 쭉 이럴 것만 같아서 몹시 겁이 났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샌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리 엉망으로 생활하는 환을 황실이, 그중에서도 특히 강이 내버려 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초반에야 갑자기 희서가 나가 버린 데에 따른 상실감에 어쩔 수 없다 이해했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응석만 부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결국 강은 적당히 타이를 요량으로 환을 동궁에 호출하기에 이르렀다.
“요즘 엉망으로 지낸다는 소리가 궁 안에 자자하던데.”
데자뷔인가 싶을 정도로 익숙한 장면이었다. 지난 여름 방학 때 끝을 모르고 노는 환을 봉사 활동에 보낼 때도 그러했지만, 그 외에도 환이 비슷한 일로 이미 여러 차례 이리 불려온 적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니 평소의 환이라면 강의 핀잔에 그게 뭐 어떠냐는 듯이 당당하게 굴었을 터였다.
어쩌면 제게 잔소리를 하는 강이 못마땅해서, 그를 더욱 약 올리기 위해 앉아 있는 자세부터 허리를 쭉 빼고 오만불손하게 행동했을 것이 분명했다.
“…….”
그런데 지금의 환은, 오만불손은커녕 두 손을 꼭 모으고 앉아 입을 꾹 다물곤 그야말로 툭 치면 울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강도 한숨을 푹,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지금 누구 놀려?”
“놀리는 거겠어?”
웬일로 강이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잠시 발끈했던 환이 결국 입을 도로 다물었다. 사실이 그렇다 보니, 설령 저를 정말 놀리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달리 할 말이 없는 탓이었다. 그래, 맞다. 있을 때 잘하지 못했다. 환의 고개가 푹 떨어져 내렸다.
그런 환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강이 뒤이어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너는 희서가 왜 나갔다고 생각해?”
“…….”
환은 이번에도 강의 질문에 쉽사리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질문이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비참한데 그걸 꼭 제 입으로 이야기해야 하는가 싶어, 환은 불퉁한 표정으로 강을 노려보았다.
“응? 네 생각을 말해 봐.”
하지만 강도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단호한 표정으로 그리 재촉하며 물러서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환도 가까스로 한숨처럼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형편없어서.”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한데.”
“뭐?”
덤덤히 이어진 강의 말에 환이 발끈해 눈을 치켜떴다. 아무리 그래도 제 입으로 하는 말과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말은 차이가 있는 탓이었다. 더군다나 혈육인 강이 그러니 더욱 일부러 약을 올리기 위한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결국 한다는 이야기가 형편없다는 비난이었나?
그런 건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건만. 마침내 환이 지금 뭐 하자는 거냐며 왈칵 성을 내고 일어서자 강이 말을 조금 고쳐서 다시 물었다.
“그럼 희서는 그 형편없는 네가 싫어서 나간 걸까?”
그러니 순간 강을 보는 환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까지처럼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같았지만, 곧이어 달싹거리는 그의 입술을 보니 분명 원하는 답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될까. 내가 감히… 분명 또 그런 식으로 땅굴을 파고 내려가는 생각에 주저하는 것이 보였단 말이다.
그런데 잠시 뒤, 사뭇 다른 눈빛을 한 환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뻔뻔하게도 그런 답이 입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확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그랬다. 이게 무슨 말이야. 스스로도 의문스러워하는 우스꽝스러운 환의 모습을 강도 못 말린다는 듯 바라봤다. 그 표정이 꼭 그 역시 우는 듯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아는 녀석이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희서가 그러라고 나갔겠어?”
그리 묻는다면, 당연히 아닐 터였다.
환도 알았다. 희서가 나간 뒤 벌어진 일들을 보면 사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우선 김이 빠진 최유원부터 주먹질한 환에게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환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게 하려고.
희서가 궁을 나간 이유는 틀림없이 그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