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크흠.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 버렸지만, 아무튼 환아. 무서워도 희서와 이야기는 해야 해.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테니까.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지는 않지?”
부드럽게 저를 타이르는 그들을 보며 환은 제게 누이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당하는 게 무섭고 걱정이면, 차라리 만나서 얘기하는 건 어때?”
“그래. 우리 봐. 답답하니까 그냥 만나 버리잖아.”
“만나면 답이 나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쳐들어왔는데 뭐, 어쩔 거야? 걷어찰 거야, 뭐야?”
“…걔는 정말 걷어차.”
“오.”
“희서 박력 있네.”
그러면서 감탄하기도 잠시였다.
답이 나왔다 싶어지니 그들은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환을 보챘다.
“잠깐, 이 귀한 외출을 여기다 쓸 게 아니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희서한테 찾아가. 지금. 당장!”
“다, 당장? 나 희서네 집에 가 본 적 없는데? 그… 안 나오면 어떡해?”
그 어떤 준비도 없이 갑자기 ‘지금, 당장’을 외치니 환으로선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이 머뭇대며 또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니 더는 참아 줄 수 없다는 듯 원성이 자자했다.
“이놈의 자식, 겁도 참 많다!”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찾아가야지! 삼고초려 몰라?”
“평소엔 말려도 온갖 곳에서 막무가내로 굴더니 왜 이래?”
“지금 필요한 건 행동력이야!”
“명심해. 환희의 정원 정모까지 나온 사람이 이걸 못 풀어서 사이트 없앨 건 아니지?”
“그랬단 봐! 용서 안 해!”
시끌벅적해서 정신이 다 없었다. 누이가 있었다면 이랬을까 훈훈한 상상을 하던 때가 불과 조금 전인데, 이러다 까딱 잘못하면 멱살까지도 거뜬히 잡힐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그간 까맣게 속이 썩은 건 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알겠, 알겠으니까 다들 진정….”
그 맹렬한 기세들에 둘러싸인 환이 더듬더듬 알겠다고, 간다고 내뱉던 즈음이었다.
“그 녀석은 이미 찾아갔으면 어째?”
앞선 대화들처럼 왁왁 소리를 치던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조용히 그리 중얼거린 것이 하필이면 모두가 환의 답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던 타이밍에 또렷하게 들려와 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환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 녀석?”
최유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대번에 되묻는 말투부터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 느껴졌는데, 잠시 상상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환의 눈빛이 매서워지는 것을 그들이 모를 수가 없었다.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린 것 같지?’
그 바람에 모두가 말을 삼키며 눈치를 살피던 그때였다. 돌연 이를 꽉 문 환이 빽 소리를 치며 벌떡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건 절대로 안 되지! 어딜 아직도 찝쩍거려!”
어째 백 마디 말보다 ‘그 녀석’ 한 번에 더욱 자극을 받은 듯했다.
***
어쨌거나 이때다 싶었는지 냉큼 ‘옳소!’를 외친 사람들의 기세에 떠밀려 엉겁결에 희서의 집 앞으로 찾아오게 된 환은 뒤늦게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다듬었다.
늦은 밤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쓰고선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남의 집 앞을 서성거리니 영락없이 수상한 꼴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긴장이 되었다.
물론 궁인 숙소야 저 역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긴 했지만, 궁 밖에 있는 그의 본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잘못 찾아온 건 아니겠지, 강이 보내 준 문자를 괜히 몇 번이고 꺼내 보며 확인했다.
희서의 집 주소를 묻는 환의 연락에 기다렸다는 듯 냉큼 문자를 보내 주었던 것을 보면, 왁왁 소리쳤던 환희의 정원 사람들만큼이나 강도 내심 환이 이렇게 찾아가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여기까지 와서 더는 도망갈 수 없었다.
‘도망가면 가만히 안 둘 기세였고.’
그 형형한 눈빛들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떤 환은 다시 의지를 결연히 다졌다. 이젠 정말 결판을 볼 때였다. 어찌어찌 여기까지 와 버린 덕에 희서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은 덜 수 있었다.
[희서야 나 지금 너희 집 앞에 왔는데 잠깐 나올 수 있어?]
환은 일단 막힘없이 그리 메시지를 써 보냈다.
만약 희서가 확인을 하지 않거나, 확인하고도 답이 오지 않는다면 전화를, 그 전화도 받지 않는다면 초인종을 눌러 보고… 열심히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안에서 나는 우당탕탕, 요란한 기척이 환이 서 있는 밖까지 고스란히 다 들렸다.
‘우당탕탕?’
희서와 어울리지 않는 그 소리에 의아해하고 있을 즈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희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그가.
갑자기 연락도 없이 나타난 저를 보고, 정말로 몰랐다는 듯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자신마저도 이리 찾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희서가 저리 혼비백산하여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여길 대체 어떻게 오셨어요? 황제 폐하께선, 황태자 전하께선 아세요?”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럴까.
그 놀란 얼굴이, 놀라서 다 동그래진 눈, 코, 입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다. 뭐라 종알대는 것 같은데 귀엔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니, 희서는 오랜만에 안 봐도 원래 예쁘고 귀엽고 다 하지만….
희서를 보았다는 감동에, 속으로 그동안 못 떤 주접까지 실컷 부리고 있던 중이었다. 별안간 희서가 자신의 손을 붙들어 환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더니 희서는 환의 뒤와 양옆을 부지런히 두리번거리고 살폈다. 아무래도 그의 뒤로 누가 따라붙지는 않았나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잡은 환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소리를 내질렀다.
“못 살아, 정말!”
분명 저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환은 희서가 저를 내치지 않고 자신의 공간에 들여 준 것이 그저 기뻐서 눈물을 머금고 웃었다.
***
문이 쾅 닫히자 고요한 집안엔 환과 희서만이 남았다.
환을 급히 안으로 들이느라 뜻밖에도 현관에 바짝 붙어 서게 되어 버리자,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희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환은 그런 희서를 또 한참 내려다보다 마침내 그의 어깨를 붙들고 다정하게 물었다.
“…잘 지냈어?”
그러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희서의 입술이 삐죽였다.
그 모습을 보고 환은 저도 모르게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걸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거구나.’
그 사소한 모습에도 마음이 짜르르 울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숨도 못 쉬게 꽉 끌어안고 싶은 걸 간신히, 정말 간신히 참아 냈다. 안 그래도 놀란 희서가 더욱 놀랄까 걱정이 되어 말이다.
환희의 정원 사람들은 저를 이곳으로 보내며 뭐 궁 밖에서 지내니 좋니, 어쩌니 하며 희서에게 심통 부리면 가만 안 둔다고 엄포도 놓았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막상 희서의 얼굴을 보니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가 않았다.
좋아서.
그냥, 마냥 좋아서.
희서 얼굴을 이곳저곳 뜯어보기에만 바빴다. 사실 환이 그런 철없는 심통을 부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그곳에 있기도 했다. 얘는, 그동안 잠도 안 자고 틀어박혀서 공부만 했던 거야, 뭐야?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 속상하게.”
그러면서 환이 희서의 얼굴을 안쓰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니 순간 당황한 희서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이렇게 그의 뜻대로 얼렁뚱땅 넘어가 줄 수 없기에 희서는 제 볼에 닿아 있는 환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애써 매정하게 말을 했다.
“잊으셨나 본데, 우리 싸웠거든요.”
“그게 싸운 건가? 누가 일방적으로 말도 안 해 주고 도망가 버린 건 아니고?”
환이 그리 노골적으로 희서를 나무랐다. 그러니 희서의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라면 아마 이리 뻔뻔하게 나오는 환에게 크게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상황이 정리되며 끓어올랐던 머리도 다 식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각자 깊이 후회하던 바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화까진 아닌 새침한 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래서 싸우러 오셨나요?”
“그러려고 온 건 아닌데, 필요하다면 그럴 생각도 있어.”
“뭐?”
“차라리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될 바에야.
그 뒷말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희서도 그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그러니 내내 고집스럽게 다른 곳만을 보고 있던 희서의 시선이 다시 환에게 닿은 것일 터였다.
맞닿아 얽히는 환의 뜨거운 시선에 잠시 어쩔 줄을 모르던 희서가 이내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랬어야 했지.”
희서 역시 그리 순순히 인정을 하니, 이제야 조금은 두 사람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듯도 했다.
***
언제까지고 환을 현관에 세워 두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그를 안으로 들였건만.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환의 옆에, 희서는 다소 민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환을 집 안에 들인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앉혀 놓고 보니 딱히 대접할 만한 것이 집에 정말 아무것도 없던 탓이었다. 과일, 하다못해 주스 같은 것이라도 미리 사 놓았어야 했는데. 난데없이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보니 생수나 간신히 꺼내 놓게 되었다.
그걸 보며 환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홀로 나와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궁인 숙소에서 지내는 것도 혼자 지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거긴 밥은 꼬박꼬박 나왔다.
그런데 여기선 있는 게 고작 생수뿐이라니.
괜히 얼굴이 상한 게 아니라며 환은 입 안에서 소리 없이 혀를 찼다. 희서의 저 붉어진 얼굴이 아니었으면 자칫, ‘내어줄 건 이것뿐이니 빨리 마시고 꺼져라’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뻔도 했다.
‘역시 이렇게 궁 밖에 홀로 있는 건 안 될 것 같아.’
그래서 환은 더욱 진지하게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