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의 정원-77화 (76/145)

#77

“잘못했어.”

“…….”

“그 순간 나는, 네 말대로 내가 황자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고…. 그래서 황실을 위험하게 만든 게 맞아. 네가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던 것인데. 내가…. 다 엉망으로 만들 뻔했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환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려 이 시간에, 이곳까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장난일 리도, 진심이 아닐 리도 없었다. 희서가 이미 아는 그의 성정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눈앞에 잔뜩 상해 있는 환의 얼굴을 보자면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퉁퉁 부어 있는 얼굴을 보며 희서의 눈가가 다 떨렸다. 안쓰러웠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돌아가 봐야 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니까.’

그리 생각한 희서는 눈을 한 번 질끈 감더니 또 한 번 새침하게 덧붙였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적당히 달래서 데리고 들어가자 생각하셨다면 소용없어요.”

그 단호한 말에 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너는….”

아마 얄밉기 대회 같은 것이라도 있었다면, 그것마저 1등은 이 녀석이 떼 놓은 당상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환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함께한 세월이 길었던 만큼 환의 머릿속쯤이야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양이었다.

눈치도 빠른 녀석. 초를 쳐도 단단히 쳤다.

물론 이참에 데리고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진심 어린 사과에 돌아오는 반응이 저런 것뿐이면 역시 속상했다.

“…그냥 사과하는 거였는데.”

살짝 서운한 티를 내 보았지만 그래도 희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팔짱까지 끼고선 고개를 돌려 철저히 환을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사과를 했으니 너는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오만불손한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럴 것까진 없지 않을까?

몇 번 희서의 시선을 돌리려 애를 써 봤지만, 이 녀석이 고집스럽게 꿈쩍도 하지 않으니 마침내 환의 입술도 삐뚜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환희의 정원 사람들에게 심통 안 부리겠다고 약속했는데. 다 틀렸다. 얘 탓이라고 이르든가 해야지 별수 없었다.

마침내 환이 토라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도 뭐 하나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다신 안 그러겠다곤 안 했어.”

그러니 희서의 휘둥그레 커진 눈이 그제야 환을 향했다.

“뭐라고요?”

“들은 대로야.”

“하.”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인정하기에 그런 줄로 알았건만. 기가 막히게도 환은 아직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여긴 대체 왜 온 건데? 진짜로 싸워 보자 이건가? 희서의 눈빛에 그런 황당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때 환이 잽싸게 말을 했다.

“따지고 보면 그건 쌍방 과실 같은 거잖아?”

“…쌍방 과실?”

“너도 잘못했잖아.”

갑작스럽게 그리 몰아가는 말에 희서는 더더욱 당혹스러운 모양이었지만, 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렴. 물론 자신의 잘못이 훨씬 크긴 했다만, 따지고 보면 희서도 일을 그리 처리했던 것은 틀림없이 잘못이었다.

환과 상의도 하지 않고 멋대로 최유원과 거래를 해서, 터무니없는 걸 대가로 수습을 하려 들지 않나. 마찬가지로 환에겐 말도 하지 않고 궁을 뛰쳐나간 것도 그러했다. 아무리 환을 위한 것이었다지만 희서의 결정에 환의 의사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서운했겠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었어.”

“최선?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은 게? 그렇게 날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게?”

“헌신짝이라니 누가…!”

별안간 저는 변명을 하고 환은 당당하게 구는 모양새가 황당해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아닌 척해도 잔뜩 상처받은 환의 눈빛을 모를 수가 없어 희서의 입술이 다물렸다. 그 바람에 잠시 난처한 얼굴로 주저하던 희서는 또 한 번 눈을 질끈 감고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었어, 그런 거.”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찾아왔지.”

몰아세울 땐 언제고. 또 돌연 태도를 바꿔 안다고 단호히 답하는 환을, 희서가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뭘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내 탓을 해?”

그리 묻는 그의 목소리가 얼핏 서럽기까지 했다.

그러니 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없지 않다… 이거지.”

“하. 끝까지 이렇게 까분다 이거지.”

“어쩌겠어. 네가 이리 오냐오냐 막무가내로 키운 것을.”

뻔뻔한 소리에 눈물이 나오려다가도 쏙 들어갔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로 제 죄인가 싶기도 했다. 강의 말대로 적당히 응석을 받아 줬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온 게 사과를 빙자한 비난을 하기 위한 것인가 하니, 환이 그건 또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둘이 벌을 나눠서 받자 이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벌을 뭐, 어떻게 나눠서 받아.”

“일단 나는, 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안 할 테니까.”

큰 결심이라도 한 듯 그리 내뱉는 말에 희서가 잠시 말없이 환을 바라보았다.

실은 조금 전, 저 뻔뻔한 소리를 듣고선 오늘 밤 환이 쓸 떼가 눈앞에 보여 잠시 아득했던 탓이었다. 어쩌면 거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들어앉아 같이 안 가면 궁에 안 돌아가겠다고 버틸지도 모른다고 반쯤 각오도 했다.

그런데 선뜻 저리 굽히니 그게 놀랍기도 하고, 반대로 다른 무슨 꿍꿍이라도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곧장 이어지는 환의 말로 알 수 있었다.

“…그런다고 안 돌아올 거 아니까.”

화난다고 그날로 당장 궁을 뛰쳐나가는 것도 모자라, 냅다 졸업까지 해 버리겠다는 성질머리를 어떻게 이기겠냐는 말이었다. 또 의도치 않게 궁을 나갔다고 전국에 방송까지 빵빵 터져 나갔는데, 곧장 되돌아가는 것도 우스운 꼴이라 아마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환도 그 정도는 알았다.

“이대로 보쌈을 해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버티면 내가 널 어떻게 이겨.”

환이 혀를 차듯 그리 말하니 희서가 달리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환은 희서가 밖에서 지내는 것에 동의하겠다고 했다. 비록 ‘당분간’이라고 단서를 붙였지만 말이다. 더 참겠다고. 그게 자신에게 주어지는 벌이라고 환은 주장했다.

그렇다면 나누어 받겠다는 희서의 벌은 무엇일까.

그건 또 무엇이라 말할 텐가 가만 지켜보았더니, 환이 잠시 숨을 고르다 마침내 말을 했다.

“그러니까, 너도 멋대로 날 버리면 안 되는 거야.”

날 버리지 마.

그게 너의 벌이라 하는 환의 말에 희서의 표정이 흐려졌다.

“네가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이성적으로 대처할 자신이 없어.”

앞서 막무가내로 같이 벌을 받자는 둥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던 것과 달리, 이후의 이야기에서 환은 제법 차분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 말은 아무래도 희서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것일 터였다.

“…그러니 다신 안 그러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어.”

그리 말하며 환은 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희서의 마음을 달래기엔, 아마 평소처럼 다신 안 그러겠다며 납작 엎드려 싹싹 비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었다.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환은 적어도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그건 분명 이 상황을 빨리 모면하고 싶어 마지못해 하는 거짓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입에 발린 거짓말로 또 희서를 상처 입히고, 나아가 체념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환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결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달라져 볼게.”

그의 시선과 말투가 전에 없이 단단했다.

“적어도 너한테 다신 그런 일이 없도록, 적어도 나한테… 상의 정도는 할 수 있도록.”

이번 일로 그도 반성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환은 희서가 제게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무리한 상황을 혼자 감수하고 있었다는 것에 크게 좌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은 했어야지. 잠시 희서를 원망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그건 분명 희서가 아닌 자신의 잘못이었다.

같은 상황을 다신 겪고 싶지 않은 환의 다짐은 그러했다.

“내가 노력할게. 너에게 조금이라도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러면서 환은 용기를 내어 손을 뻗어 희서의 손을 단단히 쥐었다. 저를 보는 희서의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그만큼 진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약해져선 안 된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희서라고 하더라도 환을 달리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렇게 붙들고 있을게.”

환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더는 어쩔 수 없다며 두 손 놓고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희서를 마주하기까지, 말 한마디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로 환은 참 많은 겁을 냈다. 그가 다소 유난스럽게 굴긴 했다. 그래, 인정한다. 하지만 거절에 면역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는 희서가 혹 자신의 손을 뿌리치진 않을까 가슴이 쿵쾅댔다.

그러나 마침내 희서를 앞에 두자 환은 다시 한번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겐 희서가 전부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못 할 것이 없다고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