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의 정원-83화 (82/145)

#83

이어지는 의미심장한 웃음에서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희서는 다급히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쪽에서 두 걸음 희서에게 다가갈 뿐이었다.

‘이게 아닌데.’

의도치 않게 더욱 가까워져 버린 거리에 희서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내가, 내가 기다리긴 뭘 기다렸다고 그래?”

“내가 눈치를 다 챘어. 그러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하냐고…!”

“쉿, 알아. 희서야.”

이젠 아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밀어붙이는 작전인 모양이었다.

마침내 희서가 욕까지 섞어 반박해 올 기세이자, 환은 냉큼 희서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술을 꾹 찍어 버렸다. 그런데 그게 금방 쪽, 하고 떨어져 나가던 이전까지와는 어쩐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앞선 터무니없는 대화에서 정말 무슨 자신감이라도 얻은 걸까. 머무는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싶어 희서의 눈썹이 찡그려지던 그때였다.

“…읍!”

돌연 환이 제 몸을 희서에게 더욱 붙여 오더니 고개까지 틀며 그의 입술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실컷 아기가 어쩌고 개수작을 부리더니, 그것도 아니란 소리였다. 그 바람에 발끈한 희서가 곧장 눈을 번쩍 뜨니, 뒤이어 머리채를 잡힌 환의 비명이 그의 처소에 울려 퍼졌다.

***

우여곡절 끝에 강녕전으로 인사를 온 희서와 환의 얼굴이 아닌 척해도 붉으락푸르락했다.

마치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두 사람을 마주한 황실 어른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래서 서로 덩실덩실 붙들고 춤을 추든 어쩌든 회포를 좀 풀라고 시간을 따로 준 것인데, 그새 이렇게 싸우고 온 것인가 싶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이유는 안 봐도 분명 환이 주체 못 하고 선 넘는 장난을 친 것일 터였다.

은근슬쩍 계속 희서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각 처소에 일일이 인사 돌아다니면 오래 걸리고 희서만 피곤하다며, 폐하 아래로는 싹 다 강녕전에 집합해서 한꺼번에 인사받으라고 그리 유난을 떨더니 정작 본인은 저런 꼴이었다. 정말이지 우스워 고개를 젓고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으이구.’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런 못난 녀석이라도 아들이고 동생이니, 수습을 해 주어야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정말 요즘만 같으면 더할 나위 없이 잘해 주고 있는 녀석이지만, 희서와의 사이가 또 틀어지면 어찌 어깃장을 놓을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황실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건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였다.

안 그래도 희서가 오랜만에 온다는 소리에 희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잔뜩 힘을 준 다과상이었다. 거기에 앞서 사정을 알음알음 전해 들은 궁인들 역시 같은 마음으로 하나라도 더 올리려 노력하니, 푸짐한 상이 어느 귀빈 부럽지 않았다.

마치 모두 희서를 달래란 특명이라도 받은 듯한 비장한 모습들이었다.

“그래, 나가서 별일은 없었느냐?”

“어디 아픈 데는 없었고?”

“먹는 거 부실하다고 환이가 한걱정을 하더라.”

애정 어린 안부 인사가 앞다투어 이어졌다.

“마음 써 주신 덕분에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따르는 그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을 하고 있으니 어느새 희서의 굳어 있던 표정도 조금씩 풀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 희서를 둘러싸고 앉아 그가 무슨 답을 하든 아이 어르듯 둥개둥개 어화둥둥 하고 있으니, 어쩐지 조금만 더 하면 친히 그의 입에 다과를 물려 주기까지 할 기세였다.

아이고, 그래, 우리 희서 예쁘다.

그런 분위기를 희서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의 두 볼이 그만 발갛게 물들고 말았다.

정말이지, 황실 사람들에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뒤에야 희서는 마침내 자신이 궁에 온 진짜 용건에 대해 입을 뗄 수 있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제게 이르실 말씀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 용건이란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환이 방송 촬영 중 밝혔던 바와 같이, 서란의 주선으로 희서가 대학 교수님께 직접 연구와 진로 상담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졸업 후의 진로를 탐색 중인 지금의 희서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희서는 선뜻 그러겠다는 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너무 빤히 보이는 탓이었다.

“…윤친왕 전하께서 억지를 부리신 것은 아닌지.”

혹여 그래서 무리하게 만들어진 자리는 아닐지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환이 그의 입버릇처럼 동궁 앞마당에서 좌로 우로 굴렀던 건 아니겠지? 그것까진 안 했더라도 만약 다소간 그의 억지와 응석이 섞인 것이라면 희서의 입장에선 받기에 영 낯뜨거웠다.

“그건 맞아.”

그런데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대한 답이 서란에게서 너무 시원하게 나오고 말았다.

그녀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성정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에도 또 지나치게 여과 없이 나와 버렸다. 그 답에 당혹스러운 것은 희서만이 아니었다. 황실 사람들 모두 낭패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죽하면 곁에서 차를 마시던 강은 커흑, 하고 자칫 사레까지 들릴 뻔하고 말았다.

간신히 분위기를 풀어 놨는데, 또 이렇게 된다고?

황실의 대표 말썽꾸러기 두 명이 돌아가며 사고를 쳤다.

‘어쩌지?’

‘2차 어화둥둥을 할까요?’

눈짓으로 그런 대화를 바쁘게 주고받느라 순간 어색해진 그 분위기를 깬 것은 다름 아닌 환이었다. 반성이라도 하는 듯 내내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그가 그즈음엔 참지 못하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비전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걱정하지 말라 하시고서는!”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환이 강을 찾아가 떼를 쓴 건 맞았다.

그날 밤 희서를 찾아가 그렇게 화해를 하며 당분간 그가 밖에서 지내는 데에 동의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약 없이 계속 떨어져 지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턴 희서를 보려면 어떤 식으로든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지난번처럼 자신이 찾아가면야 좋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니 어떻게든 희서를 궁에 불러들일, 아니 잠시 들르게라도 할 나름의 궁리를 한 것이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형? 응? 형이 할 말 있다고 하면 안 돼?’

‘부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불러서 무슨 말을 하라고?’

‘뭐, 잘 지내냐. 그런 건?’

‘그건 전화로도 하고 있는데?’

‘얼굴 보는 거랑은 다르…! 잠깐, 왜 형이 희서랑 전화를 해?’

그렇게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어쨌거나 환의 부탁을 들어주려 고민하는 강의 곁에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서란이 그럼 이런 건 어떻겠냐 먼저 제안한 것이 바로 지금에 이르게 된 상황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환이 무작정 억지를 부렸다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환이 저리 펄쩍 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희서를 궁에 찾아오게 하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희서가 괜히 오해해서 안 받겠다 나오는 건 역시 싫었다.

그에게 좋은 기회가 아닌가.

비록 환이 직접 주는 것은 못 되었지만, 황실 차원에서 줄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실은 줄곧 그도 희서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들이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최유원 그 녀석처럼 말이다.

그러는 사이 다시 서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맞긴 하지요. 희서가 아니라면 아무리 억지 부리셔도 그렇게 나서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환의 억지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런 답을 듣고 나서야 희서는 조금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그 뒤엔 수줍게 볼을 붉혔다.

“너무 잘 봐주셔도 곤란한데요…. 혹 부족해서 비전하께 누가 될까 겁이 납니다.”

막상 가서 이야기 나누면 교수조차 홀딱 반하게 할 녀석이, 아닌 척 귀엽게도 내숭을 떨었다. 겸손도 적당해야지. 그 작은 속삭임에 황실 사람들은 제각각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은 서란은 뒤이어 희서에게 너무 그렇게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고도 당부를 했다.

“결국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이번에 그녀가 추진한 만남도 앞으로 희서의 진로를 그쪽으로 하리라 확정하여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부터 해 보자, 상대에게도 그리 일러둔 상태였다. 면접도 아니고, 말 그대로 소개일 뿐인 것에 희서가 괜히 기가 죽어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재미있게 떠들다 와.”

또한 그러다 성에 차지 않아 거절하게 되더라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고도 말을 했다.

“뒤에 줄 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기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서란이 다름 아닌 곁에 있는 강을 가리켰다. 그러자 직접 지목당한 강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호와 심지어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까지도 차례로 뿌듯한 한편으로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희서는 그 의미를 곧장 파악하지 못해 잠시 눈만 천천히 깜빡이며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뜻이 아니었다.

‘희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나간 희서에게 마음이 쓰여서 황실 사람들이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애를 쓴 것이었다. 각자 혈연, 지연, 학연, 필요하다면 몇 다리를 건너서라도 아는 이를 총동원을 해 끌어모았다. 희서의 관심사야 워낙 다양하니 최대한 여러 분야의 선생님들을 챙겼다.

뒤에 줄을 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서란의 말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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