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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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을 향한 압박이 또 이렇게 들어오고 나니, 호는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곧 자신의 차례가 다가온다는 것을 말이다.
강이 그러했듯이.
‘…나도 결혼을 해야 할 거야.’
다만 황태자인 강과 그 아래 황자인 호의 결혼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황자인 그는 결혼과 함께 궁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그게 황실의 법도였다. 쉽게 말하자면 황태자가 아닌 황자들은 황실 후원의 대가로 궁 밖에서 ‘데릴사위’가 되어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호 역시 황실의 일원으로 태어나 새삼 그런 정략적인 결혼에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이 들고 한 해 한 해 나이가 더 들면서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또 얼마 전 강의 혼례를 지켜보면서는 더욱 피부로 느꼈다.
‘형도 저리 하는데.’
자신이라고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평생 궁에 갇히다시피 살아왔는데, 궁을 나가 살아야 한다는 점은 역시 두려웠다. 그래도 대학도 다니고 바깥과 제법 교류하며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궁을 나섰을 때 자신이 잘 적응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또 그리 살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서 막막한 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밖으로 나간 황자들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선례도 드문 점이 호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대사례를 오히려 더욱 크게 벌여 보겠다는 강과 환의 뜻에 반대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도 한 번쯤은 이런 일탈 아닌 일탈을 저질러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호는 마침내 자신의 코앞까지 그러한 운명이 들이닥친 것 같아 착잡하고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처소 건물 뒤편에서 홀로 이렇게 담배를 입에 물고 청승을 떨고 있던 이유였다.
그렇게 제 코가 석자지만, 그러다 환을 보니 새삼 이 녀석도 걱정이었다.
‘여러모로 아직 너무 어린 녀석이라.’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리 궁을 나서고 나면, 그다음은 누구겠는가.
당연히 환의 차례였다.
그래서 호는 앞서 이야기한 자신의 사정을 환의 앞에서 제법 솔직히 털어놓았다. 좀처럼 떨쳐 내기 어려운, 미래에 대한 걱정들까지도 함께 말이다.
어쩌면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환을 괜히 일찍부터 불안하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겠으나, 형인 그 역시 이러한 고민을 했던 것을 알면 나중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니까 너도 미리 각오를 해 두라는 말이야.”
그런데 곁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환은 대뜸 엉뚱한 말을 해선 호를 당황시켰다.
“형 마음은 알겠어. 그런데 나는 안 할 건데?”
“뭐? 뭐를 안 해?”
“결혼. 희서가 있는데, 내가 왜?”
그 기가 막힌 소리에 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여기서 갑자기 왜 희서가 나오고….”
나름대로 걱정해서 건네는 진지한 충고에 이게 대체 무슨 장난인가 싶었는데, 저 진지한 눈빛과 표정을 보아하니 제 딴엔 너무도 진심인 게 눈에 보였다. 그러니 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숨을 터뜨리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넌…. 그래, 어쩔 땐 부럽기까지 하다니까. 머리가 참 시종일관 꽃밭이어서.”
“뭔 소리야? 욕하는 거지? 나 장난하는 거 아닌데?”
“그래, 그래.”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녀석에게 괜히 입 아픈 소리를 했다는 듯 호가 대충 그리 성의 없이 마무리를 짓고 들어가려 하자, 환으로서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농담으로 하는 소리 아닌데. 진짠데.
“형. 나 정말이야.”
그리 부르며 붙잡아 보지만 귓등으로 흘리는 듯한 호의 태도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약이 오른 환이 이를 악물고 이야기했다.
“형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러니 그제야 호가 발걸음을 멈추고 환을 돌아봤다.
이것 역시 정말로 재미있는 농담이다 싶었는데 씩씩 거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정말로 진심인 모양이었다. 호는 그게 조금 기가 막혀 잠시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쩌면 네 말대로 그럴 수도 있겠지.”
환이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이라, 그런 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제겐 꿈 같은 생각이지만, 환이라면 진짜로 말도 안 되게 그런 짓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어쩌면.
“…하지만 그건 너라서 할 수 있는 소리야.”
호가 씁쓸히 그리 중얼거렸다.
환에게 따지고자 하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요즘 세상에 누군들 안 그러고 싶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황실은? 남아 있는 가족들은? 다른 대책이 없는데. 호는 황실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등지고 그처럼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성정이 되지 못했다.
“환아. 나는 못 한다.”
그리 말하는 호의 얼굴이 어쩐지 슬프게도 보였다.
그러니 환은 잠시 할 말을 잃고 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커다란 덩치가, 몹시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 나름대로 그를 위해서 한 소리였건만 제 철없는 소리가 혹시 그를 상처 입힌 것은 아닐까. 숨이라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의 환을, 호가 씁쓸하게 바라봤다.
“…들어간다.”
그 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호의 뒷모습을 환이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대사례 날이 다가왔다.
원래는 방송국 측에서 준비 과정부터 행사 당일까지 쭉 따라붙어 다큐멘터리로 제작을 하자는 이야기 역시 오고 갔었는데 말이다. 송출은커녕 방송국 캐비닛 안에 곧장 처박히게 될 확률이 높으니 그것도 함께 다 무산되어 버렸다.
그래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던지, 뉴스 꼭지에 잠깐 쓸 영상을 찍으러 두셋 정도 온 것이 보였다.
‘…이게 참 역사적으로도 큰 기록이 될 텐데.’
그게 단지 정치적 의도 때문에 외면받아 버리니 몹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황실에서 이번에 가장 크게 신경을 쓴 것이 바로 카메라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처음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은 지난번 비현각 회의 때, 괜히 허튼짓 못 하게 귀빈석에 카메라를 놓자는 의견부터였지만. 결국 이를 더욱 확대하여 전체 과정을 기록하자는 방향으로 뜻이 모였다.
참석하겠다며 통보를 해 온 재정부에선 아예 작정하고 사람들을 끌고 온 모양이었다. 장관은 물론이고, 제2차관, 예산 실장, 심의관까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말겠다는 의지가 너무 투명하게 보여서 기가 막힐 정도였다.
“업무 강도 세기로 유명한 분들이 웬일로 시간도 많으신지 아주 단체로 나들이들을 오셨네.”
뒤에서 환이 그리 비꼬며 혀를 차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고서는 역시, 괜히 이것저것 놓고 궁인들에게 트집 잡고 투덜거렸다. 뭐래. 준비하는데 보태 준 것 있나. 다들 그런 속마음이었겠지만 침착한 표정들이 역시 프로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장관 일행은 자신들을 밀접하게 따라다니는 카메라에도 역시 불만이 큰 모양이었다.
“무슨, 카메라가 이렇게 많습니까?”
증거 수집용이다.
강 역시 속마음은 그러했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다른 어느 때보다 더욱 방긋 웃는 화사한 얼굴로 답을 했다.
“좋은 일이니까요. 오늘 이 행사를 빛내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많이 와 주신 것도 감사한데, 요청하시면 재정부 영상은 더욱 열심히 찍어 따로 편집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고…. 흠.”
이렇게 많이 끌고 온 것 보니 역시 수상한데, 너희 재정부 계속해서 따라다닐 테니 허튼짓하지 말라는 산뜻한 경고였다. 지레 찔린 재정부 사람들이 크흠, 흠, 연신 헛기침을 하며 자신들의 자리를 찾으니, 일단은 기선 제압을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 뒤 대기실로 다시 돌아간 환은 꽃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행사에서 또 특별히 신경 쓴 것이 있다면 바로 황자들의 복장이었다. 철릭의 색과 디자인은 물론이거니와 옷소매를 간편하게 해 주는 팔찌와 깍지까지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고른 것이 없었다.
그러한 이유는 단지 하나, 최대한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사람들의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의 것, 우리의 황실이 이렇게 건재하다.
그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오늘 행사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반짝거리는 모습을 하게 된 환은 희서를 기다리며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대기실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메신저로 어디쯤인가 벌써 백 번쯤은 물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희서가 궁을 나서기 전엔 그를 기다리는 시간에 언제나 고통만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 그때의 두려움은 막연함에서 비롯되었던 것일 뿐 나름대로 이처럼 가슴이 두근대고 기쁜 일도 얼마든지 있었다.
‘희서가 오면.’
미뤄 두었던, 함께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가는 것도 보람찼다.
오늘은 그가 오면 곧장 ‘나 예뻐?’ 하고 묻고 싶었다.
그럼 희서가 어찌 반응을 할지, 생각만 해도 몸이 달아 벌써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더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에, 거울에서 눈을 못 떼던 그는 끝내 메이크업을 해 주시는 분께 슬쩍 다가가 수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귤을 뇌물이랍시고 손수 쥐여 주면서 말이다.
“저 조금만 더 날렵하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 콧대랑 턱선 조금만. 아, 눈매도 살짝만 고칠까.”
어찌나 유난스러운지, 그런 환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현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