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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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경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귀빈석에서 누군가 자리를 뜨려고 하면 귀신같이 카메라가 따라붙었다. 미리 사전에 계획된 대로 교육을 아주 잘 받은 궁인들의 활약이었다.
“어디 가시나요?”
“재미있게 보고 있으신가요?”
“계속 앉아만 계시기 심심하시면 활쏘기 한 번 체험해 보시겠어요?”
마치 인터뷰라도 따듯이 그리 카메라를 들이대며 다다다 물어보니 좀처럼 어딜 갈 수도, 함부로 말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 바람에 부쩍 핼쑥해진 듯한 재정부 직원은 질린다는 듯이 답을 했다.
“화장실 갑니다. 화장실.”
뭐, 거기까지 따라붙을 수는 없으니까. 친절히 화장실 방향을 알려 주며 보내 드렸다.
재정부 사람들의 속은 지금 말이 아니었다.
유치한 짓이지만, 뭐는 있냐, 없냐 따지며 황실의 기를 죽이려던 것이 오늘 한 일의 전부였다. 정말 기가 죽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평소 궁 안에서 소란을 피워 댔던 것처럼 행사 중 술판을 벌이든 뭐든 시끄럽게 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다 저 스토커 같은 카메라들 때문에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버릴 테니 말이다.
‘저 어리숙한 황실 녀석들이 설마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은 것인가?’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대책이었으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도 황실이라면 고리타분함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에겐 놀랍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했다.
어쨌거나 규모가 지나치게 큰 점 등을 들어 나중에 내년 예산을 줄이겠다 엄포를 놓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그 외엔 당장 이곳에서 무언가를 해 볼 방법이 영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분명히 심기가 불편하실 분이 계시니 역시 문제였다.
‘뉴스 한 꼭지에서라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런 이야기가 나도는 건 절대로 안 돼.’
아마 불같이, 얼음같이, 극과 극을 오가며 길길이 화를 내고 짓뭉갤 것이었다. 그 불똥이 고스란히 재정부 장관인 그에게 튀어, 그가 속한 재정부 전체에 번질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다.
‘뭐든 해야 해.’
그러니 다소 무리한 수를 두지 않을 수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상식선에서 안 되면 비상식이라도 동원해야지 별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조금 전 화장실을 안내받은 재정부 직원의 발걸음은 몰래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영화당 근처에 와글와글 몰려 있는 사람들과 떨어져 그늘진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해! 어떻게든 좀 해 봐!’
구체적으로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려오고 내려오다 대뜸 막내인 제게 그리 다 맡겨 버리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탓이었다. 사실 그 막막한 심정은 핸드폰 너머의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핸드폰 너머로 두 사람은 한 번씩 깊은 한숨을 주고받았다.
대화는 그 뒤에 이어졌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어쨌거나 시끄럽게 하는 게 목적이니까.
“소란을 피우라는 말씀이세요? 어, 어떻게요?”
-예를 들자면, 제공되는 음식을 먹고 배가 아프다든가.
“…아, 그러니까 관리 소홀로 인한 식중독, 그런 쪽으로 몰고 가자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사람들 특히 먹는 것에 예민하니까. 그런 식으로 가면 며칠은 뉴스 만들기 쉽겠네.
통화 중인 사수는 명쾌하게 답이 나왔다는 듯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람을 매수하기엔 당장 시간도 여건도 되지 않아 졸지에 직접 자신이 배를 잡고 굴러야 할 형편이 되어 버린 그는 조금도 개운하지 못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따르는 걱정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병원에 실려 가면 꾀병이라는 게 들통이 나지 않을까요?”
-진료 기록은 어떻게든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건 나중 일이야. 당장 현장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네, 네.”
그렇게 몰아치니 얼떨결에 ‘네’만 반복하다 전화를 끊고 말았다.
그의 입술 새로 떨리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사실 이런 짓을 하려고 그렇게 밤을 새우고 코피 터뜨려 가며 공부한 끝에 합격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안 잘리는 만큼 남들도 안 잘리는 이 숨 막히는 공무원 서열 사회에서 제게 달리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만둘 생각이 아니면 말단은 그냥 까라면 까는 것이었다.
‘…간단한 일이야.’
그는 애써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였다.
그러고는 곧장 쭈뼛거리며 야외에 마련된 연회장을 찾았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음식 외에도 사람들이 다양하게 맛볼 수 있도록 장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물론 맛있어 보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절로 긴장이 되는 탓이었다.
‘그냥 아무거나 먹고, 아프다고 구급차 좀 불러 달라고 데굴데굴 구르면 되겠지.’
그 뒤의 일은 알아서 해 주신다고 하니까.
그 사실만을 되뇌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다가서던 그 순간이었다. 그는 목표로 하던 음식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름이 아니라 난데없이 곁으로 지나가던 누군가와 세게 부딪치고 만 탓이었다.
설상가상 상대가 손에 들고 있던 음료가 그대로 그의 앞섶에 왈칵 쏟아져 버렸다. 그 와중에 추운 날씨임에도 뜨거운 음료가 아니길 천만다행이었다.
“어엇….”
“아휴, 이걸 어떡해.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당황스러워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그리 말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뒤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희서?’
왜 여기 있지?
분명 조금 전까지 활을 쏘던 곳에서 치근대는 환을 수치스러워하고 있던 것을 보았었는데. 어느새 이곳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경기 중일 텐데. 안 끝났을 텐데. 그는 조금 혼란스러운 듯이 희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조금 전 희서의 손에 음료가 들려 있었던 걸 보면, 목이 말라서 잠깐 이곳에 왔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하려던 짓이 있다 보니 황실과 가까운 사람을 보자 괜히 찔린 그는 한시바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괜찮,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냥 가세요.”
“괜찮기는요. 옷이 이렇게 다 젖었는데. 이거 단호박 식혜였어요. 끈적거려서 안 돼요.”
“네?”
과연 이 노랗고 축축한 것이….
그가 잠시 젖은 옷을 보며 넋을 놓고 있자, 희서가 잽싸게 말을 했다.
“다행히 제가 아는 궁인들이 많으니까, 씻으실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볼게요.”
“아니, 저기, 정말로 괜찮거든요. 제가 지금….”
“제가 잘못한 거니까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씻고 갈아입을 옷도 챙겨 드릴게요. 부담 갖지 마시고 저만 따라오세요.”
연거푸 됐다고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하려 들었지만, 희서는 그의 말을 조금도 들어 주질 않았다. 이렇게 막무가내인 성격이었나? 놀라울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거의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로 그를 따라가게 되고 말았다.
‘아니, 나는 할 일이 있는데…!’
멀어지는 먹거리 장터 쪽을 연신 돌아보며,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결국 희서의 고집대로 끌려와 싹 씻기까지 한 그는 일단 급한 대로 궁인들의 근무복을 입게 되었다. 기존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은 급히 세탁을 맡겼는데 그게 올 때까지만 참아 달라니 별수 없었다. 어차피 그걸 계속 입고 돌아다니기도 어려웠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고 있어서도 안 될 것 같은데.’
저도. 제 앞의 이 정희서도 말이다.
찾는 사람들이 아마 많을 것이었다.
그리 생각을 했지만, 제 앞에 놓인 따뜻한 차 한 잔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어찌 생긴 핑계에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일이 생겨서 못 했다고 그러면 이해해 주실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그의 앞에 희서가 웃으며 마주 앉았다.
“기다리시기 적적할 텐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요?”
“어떤….”
“옛말에, 낮에는 새가 듣고 밤에는 쥐가 듣는다는 말이 하나 있거든요.”
“…네?”
뜻밖에 나온 의미심장한 말에, 그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런데도 희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가는 것이었다. 그가 찻잔 안에 든 티백을 흔들며 웃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
“어디 새나 쥐뿐일까. 황궁엔, 담벼락에도 귀가 있답니다.”
일순 희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
대기실에서 환과 인사를 마친 희서는 곧장 초청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앞서 환은 자리 배치를 두고 희서가 귀빈이 아니면 대체 누가 귀빈이냐며 당연히 귀빈석으로 자리를 내어 줘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지만, 활을 쏘는 곳과 초청석이 조금 더 가깝다는 소리에 그제야 못이기는 척 ‘그렇다면.’ 하고 수긍을 했다.
제 멋진 모습을 더 잘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일 터였다.
그렇게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서 널따란 행사장을 둘러보던 희서는 무심코 귀빈석까지 돌아보았다가 한 광경을 보곤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다름이 아니라 그곳에 몰려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된 탓이었다.
그러하여 단번에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오늘 행사가 쉬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