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이리 빠르게 쓰일 줄은 정말로 몰랐지만.’
자신들을 좀처럼 가만히 두지 않는 기막힌 현실 탓에 희서는 조소를 삼켰다.
“따지고 보면 저지르지도 않은 일인데, 그걸 혼자 뒤집어쓰는 게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요.”
분명 과거에 환이 누명을 썼던 일과 지금의 일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또 아직이나마 저지르지도 않은 일이라는 저 한마디를 놓고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아 그럴까, 희서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듯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제대로 다시 생각해 보자고요. 누가 진짜 아군이고, 적인지.”
지금까지는 그를 정신없이 절벽으로 몰아세우기 바빴다면, 이젠 또 전혀 다른 태도로 그의 숨통을 틔워 주려 들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그는 틀림없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 와중에 흔들린다면 더더욱 좋았다.
자칫 발 한 번 잘못 디뎠다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그에게 남은 길은 오직 제 손을 잡는 것뿐이니 말이다. 희서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척 선한 얼굴을 꾸며 냈다.
“우리가 정말로 적일까요? 꼬리 자르는 걸 원치 않는 건 황실도 마찬가지일 텐데?”
앞서 희서는 당장이라도 이 파일을 만천하에 폭로하겠다는 듯이 그에게 겁을 줬지만, 사실 냉정히 말해서 황실은 곧장 이 일을 공론화하여 어찌하지는 못할 터였다. 괜히 어설프게 덤볐다가는 꼬리만 바뀌고, 핍박은 앞으로도 계속 그대로일 테니 말이다.
아니, 차라리 그대로면 다행이지, 괘씸죄까지 더하여 목까지 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희서가 제안하는 것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황실의 입장에선 기존에 지닌 증거의 힘을 키워 줄 또 하나의 증거를 얻게 되는 셈이고, 재정부 막내 직원의 입장에선 적어도 자신만 당하지 않을 증거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안전하게 숨겨 두는 것이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기 위해 희서가 물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 당신이 이대로 돌아가 일에 실패했다, 심지어는 들켜서 협박까지 받았다, 순순히 이야기한다면 그건 또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비교적 담담한 물음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하얗게 질려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냐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은 물론이었다. 그다음 상황 역시 굳이 입 아프게 떠드는 것이 더욱 우스울 지경이었다.
‘들켰다고?’
그렇다면 가장 먼저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이것저것 없애려 들 텐데. 그 이것저것에 과연 자신이 들어가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통화 녹음 파일이 있다는 걸 알아채면 또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에 비하자면 지금 제 앞에서 이 맑고 고운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의 뒤에선 마치 후광이라도 비치는 듯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조금 전까지도 꼼짝없이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니, 어쩌니 하며 혀를 찼었지만, 이 녀석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진짜’ 정치인들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잔인해지자면 끝도 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 탓에 염치없게도 그는 이 어린 구원자의 손을 잡고 애걸복걸이라도 하고 싶어지고 말았다. 제발 살려 달라고 빌고 싶었다.
“…제발, 한 번만.”
그러다 간절히 내뱉은 그 한마디는 아무래도 내심 이 일을 자신들끼리 덮고 넘어갈 수는 없는가 하는 애원인 듯했다. 사실 그것이 그에겐 가장 좋은 일일 테니 말이다. 그럴 수 있다면 그는 간이든 쓸개든 원하는 건 무엇이든 꺼내 줄 수 있을 듯 보였지만, 그런 걸 줘 봤자 쓸모도 없는 희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가 덮고 말고를 판단하기엔 사안이 너무 컸다. 그리고 위험했다.
“감당할 수 없으면… 도망치는 것도 방법 아니겠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좌절하고 있는 그에게 희서가 달콤한 유혹처럼 그리 속삭였다.
***
조금 전까지 그와 함께 있던 곳에 홀로 남은 희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이다 무언가를 꺼내는데, 가만 보니 웬 핸드폰이었다.
조금 전 대화를 나누며 희서가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던 핸드폰은 내내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제 와 말하자면 사실 그것은 그가 씻는 사이 급히 다른 궁인에게서 빌린 핸드폰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방심시킨 사이 진짜 희서의 핸드폰은 그의 주머니에서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 핸드폰 액정 위로 마침내 불이 들어오며,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시간과 함께 ‘녹음 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희서는 그 작고 네모난 화면을 건조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정지 버튼을 톡 하고 눌렀다.
객관적으로 자신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니 어느 정도 회유할 자신은 있었지만, 혹시 몰라 이중으로 설치한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끝까지 버티며 통화 녹음 파일을 건네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당당히 나갔던 것은, 조금 전 나눈 대화 자체가 또 다른 증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어리석은 사람.’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기존에 한 녹음도 확인을 안 해, 그렇게 당하고도 달리 또 녹음 중인지도 확인도 안 해. 뻔뻔하게 아니라고 버티지도 못해서 이렇게 새로운 증거까지 남겨 주고 말았다.
운이 좋았다.
만약 장관이 직접 나서거나 그보다 조금만 더 영악하고 철저한 사람이었더라면 이리 쉽게 통화 녹음 파일을 얻어 낼 수도 없었을 터였다.
“…….”
그에겐 새삼 황실을 다시 공격할 동기도 없고, 그러니 이제 더는 그가 어찌하든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내심 희서는 부디 그가 제 충고대로 하루빨리 도망가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부서든, 다른 회사든. 최대한 그가 다치지 않을 만한 곳으로 말이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라는 것이 참 무력하고 처량하니 말이다. 심약한 그가 버틸 만한 처지가 아니어 보이기도 했다.
‘뭐, 누가 누구 걱정을 하냐 싶겠지만.’
희서의 입술 새로 또 한 번의 한숨이 터졌다.
어찌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일은 아직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좋았다. 곧 상대할 사람들은 조금 전의 그처럼 어리숙하고 만만하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그도 황실도 아직 그 파일로 언제 무엇을 어찌하겠다고 정확히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파일을 넘겨주면서 그래도 두 사람이 앞서 말한 ‘아군’과도 같은 그 무언가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희서는 오늘 일을 무사히 마무리하는 성의를 보여 주고자 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도, 희서는 재정부 막내 직원이 그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시나리오는 바로 그와 자신 간의 ‘시비’였다.
‘고작?’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게 또 그렇게 귀엽게 투덕거리는 시비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로 인해 다 큰 어른들이 목청 높여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기 위해서 조금 전 희서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궁인을 불러 그에게 다소 해괴한 부탁을 했다.
“이분을 좀 적당한 곳에 가둬 주세요.”
그러니 궁인과 재정부 막내 직원의 눈이 똑같이 휘둥그레 커졌다.
“…가, 가둬?”
“…저를요?”
“네. 지금 당장.”
당황하는 두 사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희서는 살포시 웃으며 그리 답을 했다. 뭐? 왜? 살길을 마련해 주니 어쩌니 하더니 이제 파일 받았으니 끝이라 이건가? 그는 당혹스러움을 넘어 조금의 배신감까지 느끼는 듯했지만, 희서는 서둘러 그들을 재촉할 뿐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엔 적당히, 눈치껏 장단을 잘 맞춰야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무슨… 설명을 해 줘야 장단을 맞추든 말든 하지…!”
“시간 없습니다.”
“하…!”
의미심장한 말이 저리 불친절하기까지 하니 대책이 서질 않았다. 곁에 선 궁인 역시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으나, 희서가 생각이 있어 그러는 것이겠거니 사정은 뒤에 듣기로 하고 일단 시키는 대로 그를 안내했다.
졸지에 또 궁 안 어딘가로 끌려가 갇히게 생긴 그만이 혹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두려워 몸을 떨 뿐이었다.
‘자, 이제 황실 쪽부터 알려야 하겠는데 말이야.’
그 뒤, 잠시 혼자 앉아 생각의 정리를 마친 희서는 이제 정말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 직접 고하기까진 절차도 그렇고 어렵다 보니, 이런 상황에 희서는 항상 자연스럽게 황태자인 강을 먼저 떠올렸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그에게 서둘러 이야기를 전하려 했는데, 어쩐지 그의 마음 안에 돋아난 가시처럼 까슬하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어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환이었다.
‘적어도 너한테 다신 그런 일이 없도록, 적어도 나한테… 상의 정도는 할 수 있도록.’
그의 절절했던 한마디가 새삼 귓가에 다시 들리는 듯했다. 또 자신의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울며 애원했던 그 모습 역시 눈에 밟혔다. 그 바람에 희서는 이야기를 전할 궁인을 앞에 세워 두고도 다시 또 한참을 고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