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그렇다고 해서 희서에게 황실 경호 인력을 사적으로 붙여 주는 건 역시 곤란했다. 마음 같아서야 얼마든지 그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차후에 트집 잡히고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러다 희서가 ‘불법 의전’ 등의 이름이 붙은 논란의 중심이 되어서는 곤란했다.
그러니 이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간신히 떠올린 일종의 ‘편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당분간 환을 희서의 집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하여 공식적으로는 환을 경호하는 것이지만, 곁에서 희서가 함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간 환이 방송 활동을 핑계로 오며 가며 희서의 집에 수도 없이 들락거린 것은 맞았다. 그러나 아예 자리까지 깔고 함께 지내겠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아무리 희서네 집이라지만, 미혼에 미성년인 황자 환이 궁을 나서 외부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견학’이니, ‘체험’이니 온갖 되지도 않는 소리를 다 끌어다 A4 용지 5장을 가득 채우며 구색을 갖췄다. 물론 강이 밤을 꼴딱 새우며 한 일이었다. 일단 그 정도는 준비를 해 놓아야 나중에 트집 잡히더라도 싸울 명분이 있었다.
물론 계속 그렇게 지낼 수 없음은 알았다.
그러나 다만 며칠만이라도 주위를 살피며 안심할 수 있게 조처를 하려는 것이었다.
희서를 다시 궁에 들어와 지내게 강제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어려운 결심을 하고 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또 제 나름대로 밖에서 준비를 하고 있던 것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최대한 되는 데까지는 존중을 해 주고 싶었다.
하룻밤 새 일이 급박하게 진행되다 보니 정작 이 상황에선 존중은커녕 상의도 제대로 못 하고 들이닥친 것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뭐, 엄밀히 말해서 이 집은 정 실장님 집이고, 정 실장님은 허락을 하셨고….”
“그래서 내 허락은 필요 없다?”
“…아니요. 허락해 주세요. 쫓아내시면 갈 곳이 없어요.”
“없기는 왜 없어. 궁으로 돌아가면 되지.”
“거기가 어딘데요?”
“…하.”
뻔뻔한 낯으로 잘도 그런 우스운 소리를 했다.
환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터였다. 희서와 같이 지낼 수 있게 해 준다는데 이게 웬 횡재인가? 신나서 별생각 하지 않고 뛰다 못해 날아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날 무려 한참을 그러고 쪽쪽대다 헤어졌는데, 날 밝자마자 곧장 들이닥쳐 이제부터 둘이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하면 희서는 난처하고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도저히 마음을 다잡을 시간을 주질 않았다.
“…일단은, 들어와.”
그래도 우선은 다른 사람들 눈도 있는데 계속 현관 앞에서 대치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안으로 들였다. 하지만 희서는 곧장 환을 거실에 방치해 두고는 제 방에 쏙 들어가 버렸다. 다름이 아니라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지, 나름대로 애를 써 보려 했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보류. 일단 보류였다.
환이 조금 전 말하기로는 이미 허락을 하셨다 하는 소리까지도 들렸다. 그게 아니더라도 전화를 걸어 이러쿵저러쿵 사정을 이야기해 봤자, 비서실장인 그의 아버지는 ‘황자 전하께서 그리하시겠다 하면 당연히 네가 모셔야지, 무슨 말대꾸냐.’ 하는 꾸지람만 늘어놓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희서는 그나마 말이라도 통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강에게 전화를 거는 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여기도 썩 믿을 만하지는 않은데.”
애초에 환이 저렇게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건 강 선에서도 허락이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전화를 걸어보는 것은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러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전화를 받자마자 강이 내뱉는 한마디에 맥없이 흩어져 버렸다.
-응, 그래. 희서야. 환이 잘 도착했어?
꼭 선물이라도 보냈다는 듯한 산뜻한 말투였다.
“전하, 이게 대체 무슨…. 환이가 여기서 지내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위험하기도 위험하고,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그 말도 안 되는 걸 해내려고 내가 밤을 새워서 사유서를 썼어. 희서야. 어휴, 그래서 그런가. 오늘 영 몸이 좋지 않고 피곤하네.
어쩐지 전화한 이유를 훤히 꿰뚫어라도 본 듯, 그리 콕 집어 강조하여 말하는 강 때문에 희서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여기서 결정을 물러 달라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감히 황태자의 뼈를 깎는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역적이라도 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아니, 그게.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그런데…. 근데요.”
횡설수설 그러고 있으니, 이윽고 핸드폰 너머로 쿡쿡거리는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하고 희서가 울상을 지으며 나무라듯 부르니 그제야 강은 희서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일주일만 데리고 있어 봐. 그사이에 혹시 위험한 것들은 없는지, 맴도는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려는 거니까 말이야.
“…그렇지만요. 죄송해서.”
-죄송한 줄 알면 다신 그런 위험한 행동 하지 마. 어디서 그렇게 겁 없이 굴어.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만약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어떻게든 궁에 다시 들어오게 할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어쩌다 보니 자진해서 강에게 꾸지람을 듣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물론 저렇게 엄포를 놓았지만 희서가 끝내 싫다고 버티면 그리 강요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만큼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리일 것이기에, 희서는 별다른 말대꾸를 하지 못하고 얌전히 “네.” 하는 답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렇게 거절할 명분도 모두 잃고, 오히려 강에게 설득을 당해선 쭈뼛쭈뼛 방을 나섰다. 그런 희서를 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맞이했다. 짐을 대충 풀어 두곤 소파에 앉아 있다가 폴짝 뛰어 일어나 쪼르르 다가오는데, 커다란 강아지처럼 보이는 모습이 참 여전했다.
“통화 다 끝났어?”
“뭐, 그럭저럭.”
“그렇게 됐지?”
“…그래.”
자신은 아직도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이 맞는지 걱정되고 의문스러운데, 환은 마치 이리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니 어쩐지 얄미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환은 더욱 크게 웃고 너스레를 떨며 그를 주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럼 얼른 이리 와 앉아 봐. 밥 아직 안 먹었지? 내가 궁에서 너 좋아하는 음식들 싸 왔으니까, 기다려. 금방 차려 줄게.”
그러더니 자신이 가져온 커다란 짐 꾸러미 중 하나를 자랑스럽게 꺼내 놓는데, 그게 바로 희서가 좋아한다는 궁 음식들인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 또 그런 걸 다 챙겨 왔냐며 희서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환이 말미에 내뱉은 저 ‘차려 준다’라는 말이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리 오래 함께 지냈지만 참으로 생소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태어나서부터 황자인 그에겐 소위 팔자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환이 그중엔 스스로 하는 일이 많은 편이라고 하더라도, 황족은 황족이었다. 그러니 특히 밥상 같은 걸 손수 차릴 일은 전혀 없었다고 봐야 했다. 소주방엔 출출해서 몰래 뭘 얻어먹으러나 다니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저리 선뜻, 무려 자신이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어쩐지 조금 전 통화에서 강이 장난스럽게 뱉던 말이 새삼 다시 생각이 났다.
‘모시고 있으라는 말 아니야. 걔 너 뒷바라지하겠다고 기세등등해선 나간 거니까. 소원대로 잘 부려 먹어 봐.’
뒷바라지라니.
누가? 환이? 나를?
그 말 자체도 너무 안 어울려 우습지만, 희서는 과연 지금 환과 저를 둘만 내버려 두는 이 상황이 제게 도움이 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아닌 것 같은데. 황실 어른들께선 저를 걱정해서 보내 주신 것이지만 오히려 이게 더 심장에 해롭고 치명적인 기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일주일 사이에 환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 희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은 그를 식탁 의자에 고이 앉혀 두고선 저 큰 덩치로 주방을 휘젓고 다녔다. 그래도 아르바이트 프로그램 몇 번 나가고서는 뭔가를 익히긴 익힌 모양인지 생각보단 덜 허둥대는 듯 보였다.
‘…대체 뭐가 뭔지.’
그런 환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착잡하면서도 마치 소꿉장난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간지러운 기분에 희서의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사실 난데없이 체험이라니, 희서는 그것이 단지 궁을 나와 이곳에 머무르기 위한 핑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장을 보러 간다고? 마트에?”
“어, 영상도 찍고 그걸로 보고서도 써야 해.”
무슨 그런 체험이 다 있나.
처음엔 농담인가 싶었는데, 이어서 폭 한숨을 내쉬는 환의 모습을 보아하니 정말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더니 머지않아 정말로 홍보팀 직원들이 찾아와서는 환을 데리고 나섰다.
이후에 듣게 된 사정으로는 황실 차원에서 제법 본격적으로 자체 제작 콘텐츠를 제작해 보려는 듯했다. 일전에 환이 몇 번 출연했던 아르바이트 방송이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것에서 영감을 얻은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세상 물정 모르는 황자의 엉망진창 세상 체험 브이로그’ 정도일까. 이를 통해 황실을 보다 친근하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겸사겸사 그럴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
그러더니 돌아온 이후에도 환은 정신없이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