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의 정원-127화 (126/145)

#127

‘그렇게는 죽어도 못해.’

따지고 보면 자신이 수습하겠다고 나서서 벌였던 일이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울며 애원하라니, 희서의 자존심이 그러한 짓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희서는 아직도 자신이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 못 가게 하는 게 뭐?’

어디 대학이 국내에 있는 것뿐이던가. 이 글로벌한 세상에! 더 좋은 학위를 따내며, 이런 건 타격 축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나아가 황실 상대로 자꾸 까불면,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이참에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그 뻔뻔한 낯짝에 제대로 똥물을 부어줄 생각이 가득했다.

‘해낼 거야. 이 정도는.’

희서는 잔뜩 독기 오른 눈빛으로 그리 다짐하며 제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나름대로 제 아버지를 비롯해 황실 어른들을 설득할 방책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유학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그러나 조금 전 유원과의 만남을 통해, 명운 그룹의 후원 형식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제 문제 될 사항은 전혀 없다는 것이 희서의 판단이었다.

지금 당장은 갑작스러워서 벌컥 화를 내시지만, 이러한 금전적 이득을 이야기하면 충분히 이해하시지 않을까?

물론 어른들이 걱정하고 화를 내는 부분은 그 때문이 아닌지라, 당연히 크게 혼쭐이 났다. 그러나 희서의 고집스러운 눈빛은 여전했다.

“정희서! 너 이 녀석 정말 끝까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 참 골치가 아팠다.

***

그 기막힌 이야기는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던 환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어갔다.

“유학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째선지 들려오는 이야기가 갈수록 더욱 황당해졌다. 유학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애써 태연한 척 웃음까지 터뜨렸지만, 못내 불안해진 환은 아직 강녕전 안에서 어른들과 함께 있는 희서를 끌어내 따져 묻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아니라고 그랬단 말이야….”

아니지? 그렇지?

그처럼 환의 인내심이 빠르게 닳아 없어지는 것을 안에서 눈치챈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희서는 머지않아 몸을 일으켜 강녕전을 나설 수 있었다. 좀처럼 어느 한쪽도 뜻을 굽히지 않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는데,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라 조금은 뜻밖이었다.

그 사정은 다름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더는 진전이 없을 것이라 여긴 황제가 먼저 한발 물러서듯 이야기한 까닭이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꾸나.”

“제 뜻엔 변함이 없습니다.”

“생각해, 더!”

그렇게 쫓겨났다는 표현이 좋을 터였다.

어쩌면 안에서도 차라리 막무가내인 환의 생떼가 더 통하지 않을까 생각한 탓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선수를 교체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 강녕전 월대 아래로 발이 닿기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 온 환과의 2차전이 시작되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황실 어른들의 예상과 달리, 환은 생떼가 아닌 희서의 말을 조목조목 따지고 든 것이 조금 의외였다. 희서의 성향상 그와 같은 방법이 더 효과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말해 봐. 갑자기 왜 유학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필요해졌어.”

“그러니까 왜. 그게 왜 필요해졌는지를 묻는 거잖아.”

“…그건.”

“넌 나한테 분명히 안 간다고 말했었어. 그런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는 건,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는 거잖아. 왜냐고 묻는 건 그 일을 말해 달라는 거야.”

난처한 듯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희서에게 환은 또박또박 차분하게 그리 말을 했다. 그런데 이게 참, 틀린 말 하나 없어서 파고들 틈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저리 확신에 가득 찬 두 눈을 보고 차마 다른 소리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서가 곧장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앞서 어른들의 앞에서와 같은 이유였다.

아니, 오히려 환이기에 더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 면도 없지 않았다. 정작 환은 그에 협조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잠시 먼 산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고 서 있던 희서는 나름대로 최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일은 무슨 일이야. 너 몰라? 나 공부 욕심 많은 거? 꿈은 크게 가지는 게 좋다고들 하잖아. 나도 더 넓은 곳으로 가서 더 많은 걸….”

“아니, 그럴 리 없어.”

“뭐?”

제법 그럴듯하지 않았나?

희서의 생각은 그러했지만, 환은 단호하게 아니라며 말을 뚝 끊어 버리기까지 했다.

“뭐가 그럴 리 없어?”

사실 그렇지 않은가. 본인이 그리 판단을 했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뭐라 반대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환이라도… 미안하지만 저를 아끼고 좋아하는 환이라서 더 반박할 수 없는 논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탓에 희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뭐, 나는 내가 원하는 공부도 못 해?”

그러다 보니 마음과 달리 조금은 날 선 물음도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장 이어지는 환의 반박에 말문을 잃고 쏙 들어가 버렸다.

“만약 그랬다면 너, 최유원이랑 같이 갈 리가 없으니까.”

여기서 최유원의 이름이 왜 나오는 것인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환의 말에, 희서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걸 대체… 네가 어떻게 알아?”

너무 놀라 시치미도 떼지 못했다.

환이 희한하게 자신의 행적을 꿰고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엔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몰래 사람이라도 붙여 놓은 것인가? 대체 무슨 재주로? 아니, 그렇더라도 이처럼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기 어려울 텐데.

‘도청이라도 하니?’

혼란스러워하는 희서가 궁금해하는 답은 환의 입에서 곧장 이어졌다.

“…최유원한테 연락이 왔으니까.”

뭐가 와?

“…걔가 왜? 뭐라는데?”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있으니, 보내 달래.”

“그게 대체 무슨….”

“지키는 건 자신이 하겠다나.”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기가 막힌 희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환이 예고도 없이 대뜸 그러한 연락을 받았을 때 느꼈던 심정에는 감히 비할 바가 되지 못할 터였다.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제까짓 게 뭔데, 희서를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잔뜩 꼬이고 억눌린 그의 마음이 무참히 짓이겨진 그의 입술을 통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며 희서 역시 난처한 낯으로 제 아랫입술을 말아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최유원, 이 자식이 진짜.’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쳤다.

당장 들어오라는 궁으로부터의 급한 호출에 미처 입단속을 못 시킨 탓이었다. 정리는 알아서 할 테니, 당분간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을 해야 했건만. 그걸 놓쳤다고 당일에 이리 일을 쳐 올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둘러대라고.’

말문이 막힌 희서에게 환은 더욱 날카롭게 추궁을 해 왔다.

“네 입으로 말했었지. 정 필요하면 넌 네 힘으로 갈 거라고. 네가 못 할 것 같냐고. 그런데 이러면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그건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무리야? 혼자서는 못 하겠어?”

“…야.”

그런데 보자 보자 하니까 환의 질문들이 점점 날카롭다 못해 나아가 희서를 할퀴려고까지 들었다. 뭐지? 놀란 희서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지만, 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희서의 자존심을 더욱 건드려 가며 그를 몰아세웠다.

사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내가 너를 몰라?’

다소 극단적이지만, 어떻게든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듯한 희서가 더는 거짓말을 못 하게 하기 위한 환의 계책이었다. 그의 의도대로 평소 가지런하고 반듯한 희서의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혼자서는 못 하겠어?’

그의 자존심상 아마 죽어도 제 입으로 그렇다는 답은 못 할 터였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거잖아. 그렇지?”

다 알고 있으니 솔직하게 이야기하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턱을 세우고 있는 환이 얄미워서, 희서는 제 주먹에 꾹 힘을 실어 쥐었다. 그러나 뒤이어 환이 태도를 바꿔 그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자, 결국 희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바보로 만들지 마. 희서야.”

“…내가 뭘 또 바보로 만들었다고 그래.”

“나만 아무것도 모르게 숨기고, 감추고….”

“…….”

“이제 그런 건 안 하기로 했잖아.”

“…정말, 이환. 너는.”

그렇게 말을 하면 도저히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주저하던 희서도 더는 모르겠다는 듯 머리칼을 헝클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고 저기고 정말로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이번 일이 좀 꼬여서… 마무리로 더 해야 할 일이 생긴 것뿐이야.”

“그게 유학이야? 그래서 꼭 유학을 가야 해?”

“…그래.”

“…그걸, 꼭 해야 하겠어?”

“뭐?”

그러나 마찬가지로 조금 주저하던 환이 마침내 건넨 물음에, 희서는 또 한 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지 지금 저 물음이 환이 저를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질문이야?”

“말 그대로야.”

희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환은 앞선 그 질문을 거두지도, 고치지도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희서의 두 손을 꼭 붙들고, 마주 선 그와 고집스럽게 눈을 맞추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