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는 않고 있지만, 눈치껏 희서가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또한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까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환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이 상황이 조금은, 아니 사실 많이… 괴로웠다.
‘답답해.’
황실만 건드렸다 하면 튀어나오는 희서의 저 불같은 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거기에 뛰어난 자신을 향한 높은 자존감까지 더하자면, 아마 불합리한 이 상황을 마냥 참고 견디기가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환에게 희서가 황실이나 그 어떠한 것보다 중요한 것처럼, 희서도 그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적어도, 한 번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희서는 어쩐지 항상 자신보다 황실이 먼저인 듯해서, 불쑥 참을 수 없이 섭섭한 마음이 튀어나오고 만 것이었다.
“꼭 해야겠어?”
나랑 떨어지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뒷수습이다, 가야 한다, 희서의 설명을 듣고도 환은 혼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또 어떤 말썽을 부릴지, 하겠다는 그 일을 해내면 정말 끝은 나는지, 이런저런 걱정들로 불안한 가슴이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어쩌면 지금처럼, 일이 자꾸만 더 커질 수도 있지 않을까?’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환은 아직 어린 자신들이 이번 일보다 더 대단한 어떤 것을 이룰 수 있을 리 없다고도 여겼다.
‘그럴 바엔 그냥 함께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아?’
그리 생각해 주지 않는 희서가, 자꾸만 자신이 아닌 저의 뒤로 더 크고 넓은 광경만 보려는 희서가 야속하고 서운했다. 그런 마음에 나온, 평소와 같은 투정이고 하소연이었다.
“…그냥 내 곁에 얌전히 있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러나 그 말은 곧 희서의 심기가 틀어지게 하는 방아쇠가 되고 말았다.
“…얌전히?”
심상치 않게 되묻는 희서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일그러져 있는 것에서 환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땐 이미 늦어 있었다.
“네가 원하는 그게 대체 뭔데?”
“희서야. 내 말은….”
“무너지는 황실을 순리처럼 받아들이고, 팔려 가듯 결혼하고 궁에서 쫓겨나는 황자를 그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면 되는 거야?”
“희서야!”
“그래도 가끔씩 몰래 만나 네 마음을 받아 내고? 너는 내가 그러기를 바라? 정말로?”
내가 그러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야말로 날 바보로 만들지 마!”
별안간 토해지는 희서의 울분에 환은 솔직한 심정으론 몹시 당황스러웠다. 맹세코 저런 이야기까지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환은 그저, 이제 간신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차인데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길 바란 것뿐이었다.
그런데 희서는 벌써부터 두 사람이 만들어낼 최악의 미래를 가정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널 두고 무슨 결혼을 해?”
“안 하면 어쩔 건데? 계획 있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태평한 소리 말고!”
“지금부터도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어, 대체 왜 벌써 그런 생각을 해!”
“어떻게 안 해! 뭐가 벌써야! 금방이야! 하루하루 목을 죄듯 다가오는 중이라고!”
“희서야…!”
“우스워? 무모해? 나도 나름대로 있는 힘껏 발버둥 치는 거야! 싫어서, 그런 네 모습 못 보겠어서, 미치겠어서!”
아니라고,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하고 싶었지만.
환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사실 지금까지의 황실의 역사를 놓고 보자면,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은 오히려 환이었으니까 말이다.
“얌전히? 네가 말하는 대로 얌전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잡고 있던 손까지 내치며 하는 희서의 말에, 이번에 말문이 막히는 쪽은 환이 되고 말았다.
목이 죄어 온다는 표현을 했다. 희서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가정하는 최악의 상황들을, 환도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간 환희의 정원 사람들이 그러한 내용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이 비단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걸 환은 빠짐없이 모두 지켜보았고 말이다.
자신이 환도 되고, 희서도 되어 울고 화내고 슬퍼하고 좌절했다. 수십 번 가슴이 찢어져도 봤다. 그러니 지금 희서의 심정을 짐작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나도 싫어, 그런 건.”
환도 마찬가지의 마음이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에도 심히 공감했다.
다만 환은 ‘희서의 방법’에 희서가 가진 것만큼의 확신이 없는 것뿐이었다. 정말 그걸로 되는 걸까? 희서가 유학을 가면? 하겠다는 그 일을 하면? 그럼 다 해결되는 거야? 아니, 오히려 우리가 마음 편히 함께 있을 수 있는 이 적고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니고?
나는 지금, 이 순간도 너무 소중한데….
“…그렇게 말하지만, 너는 항상 나를 가장 먼저 포기해.”
“뭐?”
“궁을 나갈 때도, 지금도 또.”
“누가 포기를 했다고 그래!”
“아니라고?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내 말은, 조금 더 크게 보자는 거잖아.”
“일을 점점 더 키우고 있는 건 아니고?”
“…그건.”
그와 같은 지적엔 희서도 자신이 없는 듯 주춤하며 입술만 달싹였다. 아니라고, 자신이 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들로는 크게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희서가 멈칫대는 사이, 환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함께할 수 있는 길을, 곁에서 같이 고민하는 방법도 있잖아.”
네가 두려워하는 그런 미래, 오지 않도록 내가 막을 수 있어. 기필코.
그가 놓아 버린 손까지 다시 붙들며 환은 온 마음을 다해 이야기했지만, 그럼에도 희서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못했다. 제 진심이 희서에겐 그저 듣기 좋은 꽃노래에 불과한 것일까. 아무래도 고작 이 정도 말로는 해일처럼 덮쳐 오는 그의 불안을 잠재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게 환은 참으로 속상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왜 우린 서로 다른 곳을 볼까.
각자의 뜻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상대방을 야속해하는 시선이 오래도록 얽혔지만, 끝없이 팽팽한 두 사람의 의견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각자의 증명이 필요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희서가 먼저 그와 같은 중재안을 꺼내 놓았다. 뜻밖의 이야기에 환은 미심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와중에도 증명 타령이라니 희서답다면 희서다운 소리이긴 하지만,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증명을? 어떻게?”
“각자의 방식이 옳다는 걸 보여 주는 거지.”
“보여 준다니….”
희서의 말을 가만히 곱씹던 환은 이내 그 말이 곧 ‘원래의 계획대로 유학을 가겠다’라는 의미임을 알아채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지금, 그냥 그럴듯한 소리로 달래고 넘어가겠다는 소리잖아?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기어코 가야겠다는 소리를 하는 매정한 그가 야속해서 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 낼 듯이 눈가를 붉혔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너무 그렇게 서운하게만 생각하지 마. 그래, 우리 자주 했던 내기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하자.”
“…내기?”
“만약 그사이에 네 말대로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면….”
“…….”
“그땐… 돌아와서는, 나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네 말대로 다 할 테니까.”
‘…내 말대로 다?’
환은 그 짧은 한마디에 순간 속절없이 솔깃해 버린 자신이 몹시도 우스워지고 말았다. 자신이 이럴 걸 너무 잘 알아서, 노리고서 하는 말 같아서, 희서가 더욱 야속하고 얄미워지는 것도 물론이었다. 어디 얄미울 뿐일까.
“…미워.”
“환아.”
“그렇게 부르지 마. 미워 죽겠으니까.”
사실 이건 애초에 환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말려는 보았으나, 희서가 끝까지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환은 그것을 꺾어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막말로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떠나겠다는 이를 어찌 막을 수가 있을까. 아니, 저 고집이라면 부러진 다리로도 절뚝이며 갈 테다.
도저히 희서를 눌러앉힐 방도가 없었다.
얘는 정말, 제멋대로인 걸 넘어서 너무 잔인했다.
“정말로 미워 죽겠어. 정희서, 너는 정말….”
어쩌다 이런 무지막지한 녀석을 좋아하게 되어서 이 마음고생을 하는 것일까.
수천 갈래로 찢어지는 이 마음을 어찌 추스르고, 어찌 보낼지, 환은 눈앞이 다 캄캄했다.
***
그날 그렇게 궁을 나선 희서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유원이었다.
함께 있던 자리에서 연락을 받았고, 또 그가 궁까지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했으니 희서의 행방을 아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언제 나올지도 모를 상황에서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실 조금 의외였다.
그러나 희서는 지금 그에 감동을 받고 할 기분도, 처지도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유원을 알아보기 무섭게 거친 숨을 한 번 크게 몰아 내쉰 희서는 냅다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황실 쪽은 자신이 어련히 알아서 정리할 것이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일러바친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아니, 실은 그냥 속상한 마음에 하는 화풀이인지도 몰랐다. 뒤이어 더욱 뾰족한 말들까지도 가감 없이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