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의 정원-130화 (129/145)

#130

***

그 뒤 희서의 유학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희서의 완강한 고집과, 유원도 얌전히 따라가는 조건이 붙은 명운 그룹의 공식적 지원, 게다가 절대로 안 된다고 울며불며 광화문 광장까지 나가 굴러다닐 줄 알았던 환의 담담한 찬성까지 있었으니 어른들도 더는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결국 허락이 떨어졌다. 다만 희서에게도 조건이 붙었다.

“최대한 빨리 마치고 돌아와야 한다. 방학 때는 꼬박꼬박 들어와야 하고.”

“예, 폐하.”

“명심하거라.”

아무래도 뒤에 붙은 조건은 못 지키게 될 것 같지만, 순순히 그리 이야기했다간 또다시 무작정 반대하던 처음으로 돌아가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하여 희서는 뻔뻔하게도 멀끔한 얼굴로 그리하겠노라 넙죽 답을 했다.

“…그래. 어디 네 녀석 마음대로 해 보거라.”

결국 허락을 하게 되었음에도 아직 서운함이 남아 있는 황제는 토라진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한 나라의 지존으로서 평소의 지엄하고 인자한 모습과 달리, 처음 마주하는 아이 같은 면모였다. 그만큼 희서를 아끼기 때문이겠지만.

그런 그에게 한없이 죄송하고 감사하여 희서는 천천히 큰절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겠어?”

그런 준비 과정 속에서 유원은 매번 확인을 받고자 하는 듯 희서에게 그리 물어 왔다. 우습게도 그러다 희서가 더는 못 버티겠다는 듯 돌아서는 걸 누구보다 두려워하면서도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처럼 참 복잡하고 이상한 것이었다.

“괜찮아.”

다행히도 그럴 때마다 희서의 답은 언제나 담담하고 같았다.

마침내 떠나는 날의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늘 고분고분 그처럼 유원이 원하는 답을 해 주던 희서는, 공항 수속까지 마치고 마침내 비행기에 몸만 실으면 되는 순간이 오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원에게 경고를 했다.

“이제 더는 묻지 마. 약한 소리 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

“…응.”

해낼 거야.

“그러니까 너도 총리 아들, 김태훈 그 녀석 곁에 날 데려다 놓는 것만 생각해.”

그리 말하는 희서의 눈이 형형히 빛났다.

그 눈을 보며 유원은 희서가 유학 이야기를 꺼내 놓았던 첫날의 기억을 되짚었다. 갑작스럽고 놀라운 이야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앞에서도 희서는 이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좋아. 좋다고. 갈 수야 있어. 하지만 가서 대체 뭘 어쩌려는 건데?’

‘말했잖아. 뒤통수를 치겠다고.’

‘뒤통수… 그것도 일단 상대를 믿기부터 해야 얻어맞는 거 아니야?’

너는 그게 될 거라고 봐?

그 녀석이, 또 총리가 널 믿을 것 같아?

유원이 생각하기에는 희서의 계획이라는 게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그 녀석이 아무리 유학 중이라고 하더라도 희서와 황실의 관계를 모를까? 아버지가 총리인데?

또한 이번 소란에 희서의 지분이 크다는 걸 총리도 뻔히 아는 상황에서, 제정신이라면 저 위험한 녀석을 아들 곁에 순순히 둘리가 없었다. 자칫 희서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건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였다.

‘또 모르지.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면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정희서, 너 정말 대책 없이 그럴 거야?’

‘필요하다면 황실과 갈라선 것처럼 보이게도 할 수 있어.’

‘…뭐?’

유원의 놀란 듯한 되물음엔 ‘네가 정말 그럴 수가 있다고?’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황실에 죽고 못 사는 녀석이?

그렇게 설득하려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히던 녀석이 제 입으로 갈라서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그제야 유원도 새삼 희서가 장난삼아 하는 소리가 아닌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당해 보니,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번쩍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수도 있잖아.’

말하자면,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짜 힘을.

성공하려면…. 아니, 최소한 이번 일과 같은 불이익을 겪지 않으려면 앞으로 어떻게 처신을 하고 또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잖아? 안 속을 수가 있겠어?’

너부터도 그게 백번 옳다고 생각할 텐데.

희서가 그리 물으니 유원은 제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리 물으면… 그래, 그동안 희서를 보면서 자신부터 쭉 답답해하고, 심지어는 정신 차리라고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그리 생각하니 말이 안 되기는커녕 너무도 당연한 소리로까지 느껴졌다.

‘…하.’

유원은 잠시 가늠하듯 희서를 바라보며 제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물론 희서가 정말로 그렇게 깨닫게 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런 ‘척’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유원은 그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지금은 그렇더라도, 잘만 하면 희서가 정말로 궁에서 벗어날 기회가 되지 않을까. 희서의 앞에선 동요하지 않은 척 덤덤한 표정을 애써 유지했지만, 유원의 가슴이 숨길 수 없이 쿵쿵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 유학은 희서와 유원, 두 사람 모두에게 기회였다.

그러니 그의 계획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 지킬 것이다.

“…내가, 너를.”

유원은 곁에 있는 희서가 듣지 못할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렇게 희서가 낯선 곳으로 비장하게 한 발 내딛던 그 순간에, 환은 제 둘째 형 호의 처소에 들이닥쳐 있었다.

오늘이 희서가 출국하는 날임을 알고 있었던 호는, 환이 꼼짝없이 제 방에 틀어박혀 침대를 눈물로 적시고 있을 줄만 알았건만 난데없이 자신을 찾아오자 몹시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뭐야? 왜 여길 왔어? 너 누구야?”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환은 오히려 자신이 더욱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려! 지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그래? 그게 뭘까?”

호의 질문에 환은 다부진 표정으로 거친 콧김을 푹 뿜어내었다.

희서를 제 곁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몇 마디 애원의 말로는 턱도 없음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던 지난날이었다. 희서는 그런 것으로 설득한다고 넘어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믿지 못하겠다니, 직접 눈앞에 보여 주는 수밖에 더 있겠어.’

희서가 떠나 있는 시간은 환에게 길다면 길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을 바꿔 놓을 생각을 하자면 또 짧게도 느껴졌다. 그러니 호의 예상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제게 기회라며, 환은 자신을 수없이 다독였다.

‘돌아오기만 해! 나랑 사귀어야 하니까!’

‘…너야말로 이렇게 말해 놓고 딴짓하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리 나누었던 대화는 언제 떠올려도 환의 입꼬리를 절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콩콩 뛰고 설레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암, 그래야지. 희서를 데려오려면, 정말로 돌아왔을 때 가만두지 않으려면 한시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쁜 녀석이 날 왜 찾아왔어?”

“그야 당연히, 형도 관련이 있는 일이니까 그렇지.”

환은 숨도 안 쉬고 ‘당연히’라고 이야기했지만, 호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물론 지금은 그럴 수 있지. 마치 애송이라도 보는 듯한 환의 건방진 표정을 눈치챈 호는 기막힌 탄성을 터뜨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환이 저를 저리 보는 건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무슨 꿍꿍이인 거야, 대체?”

***

그처럼 황실과 환은 희서가 떠났음에도 묵묵히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갑작스럽고 일방적으로 희서의 유학 이야기를 접하게 된 대중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뭔 유학이야 대체]

[간다고? 아니야? 벌써 갔다고?]

국내 대학 여러 곳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이 목격되어, 틀림없이 그중 하나를 골라서 갈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유학이라니, 그것도 벌써 비행기까지 탔다니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희서야 이게 무슨 일이야ㅠㅠㅠ]

[아니 애한테는 좋은 일이긴 한데ㅠ]

[이렇게 인사도 마음의 준비할 새도 없이 훌쩍 가버리는 게 어디있어ㅠㅜ]

그와 관련된 글에선 희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같이 눈물로 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희서는 막말로 황자도, 연예인도 아닌 정말 평범하고 소속된 곳이 없는 일반인이었던 터라 별달리 입장문 같은 것들을 요구할 방도가 없었다. 따로 개인 SNS가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이 황실이나 환의 SNS 등에 몰려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전하는 알고 계시지 않았어요?ㅠ]

[뭐라 한마디라도 해 주시면 안 되나요]

[황실 홈페이지 게시판 가서 글 쓰면 답변해주냐]

그러한 사람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진짜인지, 얼마나 걸릴지 해명 아닌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언제나와 같이 묵묵부답만 돌아올 뿐이니 점차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것을 넘어서 소위 ‘궁예’라 불리는 추측성 발언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환이랑 희서랑 완전히 틀어진 거 아니야?]

[그치 그치 궁에서 나갈 때부터 이상했다니까]

그러니 환희의 정원도 역시 소란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실은 환희의 정원이기에 더욱 그러한 면도 없지 않았다. 우선 ‘환희’라는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그곳은 환과 희서 두 사람이 함께인 것에 중요한 의의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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