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의 정원-133화 (132/145)

#133

그러했던 상황이 반전된 것은, 위기 속 기회라고, 어렵게 계약했던 첫 번째 선수가 불의의 부상을 당했던 순간이 계기가 되었다.

“뭔 소리야! 우리 정우 나중에 올림픽 금메달 따야 하는데…!”

이때 환은 눈이 뒤집혀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자신이 발을 벗고 나섰다.

국내외로 선수들 부상 관리에 좋다는 병원을 수소문하여 모조리 보낸 것은 물론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족들이 검진을 받는 황실 지정병원과 심지어는 황궁에까지 데리고 들어가 내의원에서 침과 뜸 치료까지 모조리 동원했다.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환은 오래간만에 철없는 말썽꾸러기 황자의 면모를 마음껏 보여 주었다. 다행히도 선수들에게는 그 모습이 좋게 보인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해 준다고?’

“믿어 주신다면 정우 선수 생활 끝나는 날까지도, 그 이후도 함께 책임질 자신이 있습니다.”

계약 전 정우의 조부모님을 설득할 때 내뱉던 환의 말이, 그저 환심을 사기 위해서만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그때 모두 알게 되었다. 어떻게든 나아질 수 있도록, 정우가 안심할 수 있도록 헌신하는 환의 모습을 보고 선수 본인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감동한 눈치였다.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어린 정우가 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그리 수줍게 중얼거렸다.

그래서일까. 피나는 재활 기간을 거쳐 부상에서 회복한 정우는 오히려 전보다 더 향상된 기록을 보였다. 원래도 재능이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력까지 하니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심지어 비공식 신기록까지 세워 모두의 눈을 휘둥그레 커지게도 만들었다.

운동선수에게 기록 향상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 있을까?

잘하는 선수의 점심 메뉴, 운동화 끈 매는 방법까지도 따라 하고 싶은 것이 선수들의 절박한 마음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눈을 번뜩이는 부모님들을 시작으로 입소문이 퍼졌다.

“이번에 정우 인터뷰한 거 봤어요?”

“황실에서 뭔가 특별한 걸 해 준 모양이야.”

“황궁 내의원이 염좌를 그렇게 잘 다룬다면서요?”

“3황자가 몸에 좋다는 건 전국 방방곡곡을 뒤져서 찾아다 준대요.”

그러자 차츰 황실과의 계약을 원하는 선수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중엔 심지어 프로에 막 지명된 신인 선수들도 있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때에 비하자면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

지나온 발자취가 뿌듯했고, 또 앞으로 얼마나 더 해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희서가 돌아오면 그것들을 전부 늘어놓고 한 가지도 빠짐없이 자랑을 하고 싶었다.

너의 속을 바짝바짝 태웠던 그 말썽꾸러기가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른이 되어 피곤한 점도 있었다.

‘아니, 이건 황자라서 더 그런 것이겠지만….’

요즘 세상에 스물다섯이라 하면 아직 어린 축에 속하는 나이였지만, 애석하게도 황자로서는 지나치게 많은 나이였다. 다시 말해 진작 결혼하고 출궁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환이 저리 황실 사업을 하나 맡아 일을 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쫓겨나듯 나서야 했을 터였다.

둘째 형 호는 결국 먼저 결혼을 했다.

그래도 걱정하던 바와 달리,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출궁한 황자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물론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없고, 받을 수 있는 연봉의 상한도 정해져 있지만, 그게 어디인가 싶었다.

적어도 예쁜데 딱히 쓸모는 없는 인형으로서의 불행한 삶은 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많이 노력해 준 것 안다. 고맙다.”

호는 궁을 떠나기 전 환에게 그리 말하며 후련한 웃음을 남겼다.

황태자의 바로 다음 서열인 점으로 인하여, 강처럼 어디 그룹이니 하는 권세 있는 집안과의 결혼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호는 오히려 대를 이은 교육자 집안과 연을 맺게 된 것을 더욱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사돈댁의 영향일까, 조금 더 공부를 하여 그 역시 같은 방면으로의 일을 찾을 것으로 보였다.

그처럼 환도 어느 정도는 현실과의 타협이 필요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내 차례가 되었으니.’

물론 결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제겐 희서가 있으니.

그러나 환은 주말마다 호텔 레스토랑, 카페, 한정식집 등 일종의 ‘맞선’을 보러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언제까지 세금 잡아먹고 철없이 살 작정이냐는 듯 점점 날카로워지는 시선에, 적어도 노력은 하고 있다는 모습을 가장해야 하는 탓이었다.

‘아니, 결혼을 하긴 할 건데, 적당한 상대가 없는걸?’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희서가 올 때까지.

속셈이 그러하니 선 자리에 나와서도 환의 태도가 좋을 리 없었다. 미안하지만 어떻게든 퇴짜를 맞아야 하니 그러했다. 제 처지에 상대의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하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예의가 없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지금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는, 앞에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태블릿 PC 위에서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기가 막히게도 환은 이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맞은편에 누가 앉아 있는지는 하등 관심이 없다는 티를 풀풀 내고 있었다.

“…하.”

그런 환의 모습을 보며 상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집안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어디 가서 이런 식으로 무시당할 사람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네.”

“이럴 거면 대체 왜 나왔어요?”

“나가라고 하니까 나왔겠죠?”

성난 물음에 환은 너무도 태연하게 능글맞은 답을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말이다. 어쭈, 설상가상 늘어지는 하품도 했다.

사실 환의 이처럼 성의 없는 태도는 모두 알음알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동안 환의 맞은편에 수없이 많은 상대가 앉아 있다 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점은 다들 ‘나는 다르다, 자신 있다.’ 하며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도전 정신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었다. 물론 환의 가지각색 철벽에 하나같이 나가떨어졌다.

오늘도 역시 예외 없는 참패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진짜.”

그녀는 분한 듯 그리 중얼거렸다.

어떻게 눈길을 한 번 안 줄 수가 있는가?

‘내가 이렇게 예쁜데?’

세련되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새카만 비단 같은 머리칼,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객관적으로 봐도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는 잘난 외모였다. 어디 그뿐인가, 내리 부장 판사를 지낸 법조계 집안에서 어화둥둥 키워진 막내딸인 것도 더없이 매력적인 장점이건만,

‘그게 뭐?’ 하고 묻는 듯한 환의 심드렁한 태도가 몹시 자존심 상했다.

설상가상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곧장 오는 저 계획적으로 보이는 연락에 이가 뿌득 갈렸다.

“잠시만요. 예. 정우 선수요? 왜? 무슨 문제 생겼어요? 어디 다쳤어요?”

그러더니 알겠다고, 지금 가겠다고 몸까지 일으키지 뭔가. 그렇게 됐다는 듯 저를 보는 시선이 마치 약이라도 올리는 기분이었다.

‘가긴 어딜 가.’

무참히 짓밟힌 자존심에 더 가릴 것이 없는 그녀는 결국 만인이 아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아쉽네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참 많았는데.”

“죄송하게 되었….”

“사촌 오빠가 미국에서 유학 중이거든요. 공교롭게도 그곳에 전하께서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만 말했을 뿐인데 이미 완전히 들렸던 환의 엉덩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의자 위로 다시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이제까지와는 태도가 정반대로 돌변해선 정중하게도 말을 했다.

“아, 이게 그렇게까지 급한 일은 아닐 거라서요. 그 정도는 듣고 가도 되지 않을까….”

그게 참 얄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놈의 정희서. 정희서.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저게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맞선 상대는 자신인데. 결국 이렇게 불러 세웠어도, 소원대로 도로 앉혔어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래도 실은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그러나 다혈질인 그녀는 앞에 놓인 물컵을 쥔 손아귀에 그만 힘을 싣고 말았다.

그러자 곧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

아무리 황실의 권위가 옛날 같지 않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자의 얼굴 위로 감히 물을 뿌리는 행위가 용납될 수는 없었다.

자리도 자리이고, 상대도 상대이니만큼, 처음 거친 간단한 몸수색 등의 절차만으로 다소 안심을 하곤 오히려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던 경호팀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들을 대신해 뛰어들어 환의 상태를 살핀 것은 다름 아닌 궁인 성현이었다.

자칫 황족 테러 혐의로도 문제가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걸 모르는 것인지 덤벼든 맞선 상대도, 그런 상황에서 굳어버린 경호팀도. 혼쭐을 내야 하는 정신 빠진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라며 성현은 노발대발해선 일갈을 했다.

그러나 환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러고는 차분히 젖은 물기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거짓말이었어요?”

황자인 제 얼굴에 물을 뿌린 모욕적인 행동보다 환에겐 그 문제가 더욱 중요한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정신이 빠진 녀석은 이 녀석이 아닐까. 그쯤 되니 상대도 이제 질린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곧장 가방과 핸드폰 따위를 챙겨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마치 충고처럼 말을 남겼다.

“아주 큰 사고를 쳤다죠. 거기 사람들은 다 안다던데요. 정희서가 제대로 엿 먹인 거라고. 뭐, 그렇게 끌고 다니고 괴롭혀 댔다니 당연하려나 싶지만. 그래도 무모하지, 상대가 상대인데. 뒷감당 되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