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희의 정원-138화 (137/145)

#138

분명 의심스러운데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다.

그러니 환은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희서를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희서는 또 한 번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환을 다독였다.

“괜찮아. 이제 여기 왔으니까.”

그 말 역시 의미심장하게 들렸지만, 틀린 구석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어 딱히 그에 더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환은 또 희서의 고집에 이기지 못하고 못 말린다는 듯한 한숨만 내뱉었다.

“이젠 고집 안 부린다더니, 온 지 하루 만에 어길 줄은 몰랐다. 진짜.”

“이건 나쁜 고집이 아니야. 너랑 더 같이 있으려고 그런 거니까.”

“참 나.”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내뱉었지만, 환 역시 아닌 척해도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는 게 다 보였다. 정말로, 말하는 거 예뻐서 한 번 봐줬다.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훤히 다 보였다.

“그럼 얼른 해. 방해 안 하고 옆에 있을 테니까.”

“너야말로 피곤할 텐데 가서 쉬지.”

“너 없이 어떻게?”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물음에 희서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서 먹이라도 갈아줄까?”

“옛날 사람. 요즘 붓펜 잘 나와.”

“요즘 애들은 붓펜조차 안 쓸걸?”

“…볼펜으론 이 맛이 안 나는데?”

어둠을 밝히는 호롱불 곁에서 두 사람의 우스운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동기 부여로 이건 어때? 한 페이지 끝낼 때마다 뽀뽀 한 번씩 하기.”

“…나 이미 5페이지 넘게 했는데.”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고 펄쩍 뛸 줄 알았던 희서가 순순히 이미 끝낸 페이지 수를 말하니, 그 모습이 또 놀랍고 사랑스러워서 환은 유쾌한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해야지. 다섯 번.”

두 사람의 자그만 웃음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궁 안에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

그의 정치 인생에서 이처럼 커다란 위기는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지지율이 주저앉다 못해 소위 박살이 나고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간 어렵게 쌓아 놓은 그의 모든 것이 썰물 한 번에 휩쓸려 나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조그만 녀석, 정희서 하나로 인해 여기까지 몰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작 보통이 아닌 녀석이라고는 짐작을 했지만,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도 제 뒤통수를 노리고 덤벼 올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분명 황실과 모든 연락을 끊은 것을 확인했다 들었건만. 기가 막혔다.

그 긴 시간을 이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 실은 애초부터 찜찜했다.

‘그래서 안 된다고 그렇게 반대를 했던 것인데.’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어도 곁에 두겠다며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린 못난 자식 놈 때문에 결국 일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다.

그렇다. 사실 진짜 문제는 바로 그 녀석이었다.

“김태훈, 이 미친 새끼….”

나가서 최대한 숨죽이고 살라 했건만, 망나니짓도 정도가 있어야지.

“표절도 모자라서, 뭐? 마약?”

그 정도로 사고를 쳐 버리면 그의 선에서는 도저히 수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언론에 보도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지만, 역시 선거를 앞두고 가장 치명적인 것을 꼽으라 하면 언론만 한 것이 없었다. 신나서 제멋대로 살을 붙이고 끼워 맞춰 떠들어 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뻔한 이야기이지만, 막을 수 없는 보도에 대한 대처는 단 하나뿐이었다.

더 자극적인 소식으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는 것.

과연 마약보다 더욱 자극적인 소식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총리의 태도는 단호했다.

“덮어. 뭐든 좋으니까.”

인기 연예인들의 열애설도 좋고, 음주 운전이나 폭행, 과거 논란, 그 외 다른 사건 사고 무엇이든지 좋았다. 그간 비상용으로 묵혀 놓았던 것들을 모조리 풀어도 상관없었다. 단, 오히려 더 싸잡혀 불을 지필 수 있는 마약 관련 사안은 절대로 안 되었다.

제 보좌관들에게 그리 가이드라인을 잡아 주던 총리는 이내 눈을 번뜩였다.

‘그래. 모조리.’

아무래도 숨겨 놓은 비장의 카드 역시 이번에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정희서, 그 녀석 찾아내.”

대단하지, 정희서.

정말로 대단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6년이라는 시간을 오로지 저를 잡기 위해 쓰다니,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짓이었다. 그래, 보통 사람들은. 그렇단 말이다. 그래서 총리는 참 의아하고 또 의아했다.

차라리 자신에게 한이 맺힌 황실 사람, 예를 들어 황자 중 하나가 이리 덤벼든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고작해야 ‘비서실장의 아들’, ‘3황자의 소꿉친구’인 것이 황실과 관련된 전부 아니던가? 그게 제 인생까지 걸고 덤벼 올 만한 이유가 되던가?

아니, 그럴 리가.

‘그렇다면… 적어도 녀석의 위치가 그 이상이라는 소리겠지.’

그러고 보니 전(前) 재정부 장관이 쓰려다 못 쓴 패에 대한 것이 새삼 떠올랐다. 그 두 녀석에 대한 추문을 만들어 보려다 실패했던가? 당시엔 우스웠지만, 이제 와 보니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닌 듯도 싶었다.

희서의 지나치게 헌신적인 태도로 미루어 짐작 가능한, 합리적 의심이었다.

아니, 실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설령 잘못 짚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제 손으로 사실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사람들이 믿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증거를 함께 내어놓아서 말이다.

“진짜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적당히 만들어진 가짜라도 상관없다고 전해.”

재정부 장관은 그 증거라는 것을 내어 놓지 못해 맥없이 당했지만, 총리는 달랐다. 그에게는 그것을 얻어 낼 방법이 있었다.

그가 얼마 전 궁에 심어 놓은 자를 통해서.

총리의 메마른 입술이 악의를 품고 비틀렸다.

***

오늘 오전 희서가 파견될 곳은 바로 자경전이었다.

자경전의 다른 이름은 황태후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황태후께서 온양행을 하셔 현재는 비어 있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투루 관리할 수는 없었다. 이때 더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 열심히 쓸고 닦고 빛을 내야 했다.

요즘 궁에서 희서의 취급은 그야말로 ‘청소 용병’이었다.

환은 유학까지 다녀온 고급 인력을 왜 이렇게 쓰냐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희서가 이유 없는 벌이 아니라며 할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싶다고 간곡히 부탁하니 일단은 참았다.

‘아니, 그런데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하잖아.’

밤늦도록 필사를 하는데 또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문안 인사를 드리고, 곧장 이동해선 마른걸레 한 장 들고 낮 동안 꼬박 매달려 있어야 했다. 게다가 요즘은 희서가 오는 날엔 부러 대청소처럼 밀린 일을 벌이는 짓궂은 상궁들도 있다고 들었다.

“시집살이도 이렇게는 안 하겠는데!”

우리 희서는 나 이런 거 절대 안 시켰는데!

손에 걸레 한 장만 들어도 정색을 했는데! 정말로 면목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 결국 내가 널 안 지키면 누가 지키겠냐고, 또 곧장 강녕전에 쳐들어가려 했다. 그런 환을 희서가 또 한 번 누르고 말리는,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희서야. 이것들 밖으로 내놓으려고 하거든? “

“어디로 옮기면 될까요?”

철이 지나 고개를 숙이고 지기 시작하는 꽃들은 제때 교체를 해 주어야 했다.

특히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신 황태후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이입하며 예민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라, 자경전 궁인들이 특별히 더 철저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물론 환궁하시는 날이 아직 멀었음을 모를 리야 없지만,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시든 꽃들을 방치해 두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그러하여 희서는 상궁의 지시에 따라 크고 작은 화분들을 부지런히 밖으로 나르고 또 들였다.

“응, 이제 그것들만 버리고 오면 되겠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쓰레기봉투 두 개를 양손 가득 들고서 자경전 문턱을 나섰을 때였다. 돌연 한 손에 들린 봉투를 덥석 빼앗아 가는 재빠른 손길이 있었다.

황궁에 도적 따위 있을 리 없지만, 왜 쓰레기를 빼앗아 가지?

화들짝 놀라 돌아본 곳엔 다름 아닌 환이 있었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일정 있다고 나간다고 했었잖아?”

“선수 보러 갔던 건데, 경기 취소되어서 일찍 들어왔지.”

“그럼 쉬고 있지, 뭘 여기까지 와. 거의 다 끝났는데.”

“쪼그만 녀석이 제 몸만 한 걸 들고 뛰어다니고 있는데 어떻게 안 와 봐? 김 상궁님 진짜 너무하시네.”

“그, 그 정도는 아니야!”

뭐가 쪼그맣고 뭐가 몸만 하다는 것인지. 아무리 콩깍지가 씌었다지만, 환의 눈에 자신이 어찌 보이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더는 어리지도 않은데,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누가 들으면 욕이라도 할까 봐 희서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몸부림을 쳤다.

“이 정도는 완전 거뜬해! 별일 아니라고 했잖아!”

“응. 그래서 사실 나도 데이트나 하자는 심정으로 가볍게 나왔어.”

“…데이트?”

이제까지처럼 또 강녕전으로 쳐들어가니 마니 하는 입씨름이 이어지려나 했는데, 난데없이 환의 깜찍한 답이 이어지자 희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괜히 미안해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을 가져 줬으면 했던 것은 맞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가벼워져도 되려나?

소리 없이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희서를 향해 환이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나 말 잘 듣지? 잘했어?”

“뭘 또 잘하기까지 했대.”

기막혀 웃음을 터뜨리는 희서를 보곤 환이 은근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희서의 입술 위로 후다닥 쪽, 하고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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