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의정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택시에서 내리니 에어컨과는 다른 맑고 시원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냄새도 느껴졌다.
숲, 숲이 내뿜는 맑고 상쾌한 향이었다.
숲은 의정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부모님이 커다란 묘목 농원을 운영하고 있어 어렸을 적부터 보고 놀던 것들이 전부 나무와 꽃인 탓이었다. 구인 사이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찾을 때, 이곳이 눈에 띈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의정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느리게 뱉으며 자갈이 깔린 길을 따라 좀 더 안으로 걸어갔다.
긴 다리가 놓인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펜션 건물 두 채가 있고, 반대쪽에는 곧고 우람한 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었다. 그 나무와 나무 사이사이로 텐트가 알록달록하게 군락을 이룬 게 보였다.
의정을 사로잡은 건 풍경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맑은 웃음과 사람들의 유쾌한 말소리가 한데 어울려 들려왔다. 다행히 제대로 찾아온 거 같았다.
그럼 이제 이곳 주인을 찾아야겠는데…….
의정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막 걸음을 뗄 때였다.
“어서 오세요.”
의정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펜션과 이어진 돌계단에서 후덕한 인상을 한 남자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직접 얼굴을 본 적 없는 상대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오늘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오전에 전화했던 윤의정이라고 합니다.”
의정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 윤의정 씨! 반가워요. 그렇잖아도 올 때가 된 거 같아서 나오는 중이었어요. 제가 송 펜션&캠핑 사장 송우민입니다.”
성큼성큼 다가온 송우민도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외진 곳까지 오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요. 헤매진 않았어요?”
“네. 알려주신 대로 터미널 바로 앞에서 택시 타니까 금방이었습니다.”
의정은 송우민이 내민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사실 금방도, 쉽게 찾은 것도 아니었다. 터미널에서 여기까지 택시로만 30여 분 거리인 데다, 고불고불한 도로를 지나온 탓에 제대로 가는 것인지 고민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굳이 그런 사정을 전부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날도 더운데 시원한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얘기 나누도록 할까요?”
송우민은 웃으며 계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컨테이너 건물로 의정을 안내했다. 입구에는 ‘관리실’이라는 글자가 적힌 나무 팻말이 팔랑팔랑 흔들리고 있었다.
“의정 씨, 이쪽에 앉으세요.”
의정은 송우민이 가리킨 의자에 앉으며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았다. 컵에 가득 커피를 타 온 송우민은 의정의 발치에 놓인 28리터짜리 배낭을 잠시 보았다가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내렸다.
“6월 말이라 그런가. 날이 많이 후텁지근하죠?”
“네. 그래도 여기는 시원하네요.”
“그렇긴 하죠? 주변이 전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서울이랑은 무려 3도 차이가 나거든요. 그래서 좀 외지긴 하지만 여름에 제법 손님이 많이 찾는 편이에요.”
그렇게 대화의 물꼬를 튼 송우민은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의정 씨에게 전화로도 설명했지만, 저희는 펜션과 캠핑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펜션은 제가 담당할 거고, 의정 씨가 맡아줄 곳은 캠핑장입니다.”
송우민이 검지를 쭉 펴서 창 너머를 가리켰다. 의정도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큼지막한 창문 너머로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숲은 곧게 뻗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적당히 섞여있었고, 안쪽에 드문드문 텐트가 눈에 띄었다.
“의정 씨 할 일은 손님이 오면 예약했는지, 캠핑용품을 대여했는지 확인하고 자리를 안내하는 거예요. 그 외에 체크아웃 시간에는 두고 간 장비를 정리하고요. 어렵지는 않죠?”
송우민은 별것 아니라는 듯 술술 할 일을 설명했다. 그러나 의정이 듣기에는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알바가 저 혼자인가요?”
손님 응대, 장비 점검, 자리 안내, 거기에 뒷정리까지. 손님이 한 팀만 오지는 않을 터. 만약 여러 팀이 한 번에 몰리면 분명 정신이 없을 텐데 그걸 과연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예약자 확인은 관리실에서 하고, 손님을 다리 건너 캠핑장까지 안내해 주어야 하는 것 같은데.
의정의 말뜻을 이해한 송우민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아, 아뇨. 그럴 리가요. 의정 씨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어요. 힘 좋은 알파라서 일도 제법 잘하는 친구가.”
의정을 안심시키려는 듯 나온 말 속에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생의 형질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아마도 우민은 의정이 베타라 생각하기 때문일 터였다. 여기 오기 전 통화할 때 그렇게 소개했으니까. 그래도 알파라…….
잠시 고민하던 의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일반적인 오메가였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정은 페로몬도 없었고 히트 사이클마저 겪어본 적 없는 열성이었다. 의정 본인도 가끔은 자신이 정말 발현한 게 맞나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그러니 알파와 함께 일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듯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의정 씨, 함께 일해보시겠어요?”
우민이 한 번 더 의정의 의사를 물었다. 의정은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네. 근로 계약서 주세요.”
“알았어요. 잠시만요. 금방 뽑아 올게요.”
의정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컴퓨터가 비치된 책상으로 향하는 송우민의 뒷모습을 보았다. 물론 일을 할 생각이 있어 요구한 건 맞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정 나름으로 필요한 확인 절차였다.
종종 급여가 센 단기 아르바이트의 경우 나중에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불이익을 받는 일이 생기곤 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근로 계약서였다.
일단 그런 면에서는 제대로 된 곳 같았다.
“일은 언제부터 가능해요?”
금방 서류 한 장을 뽑아 온 송우민이 의정 앞에 쓱 가져다 놓으며 물었다. 의정은 일단 대답을 미룬 채 서류부터 천천히 읽었다. 근로 장소, 계약 기간, 임금 계산 방법, 기본급과 특별 수당, 근로 시간 등이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이 정도라면 믿을 만했다.
“오늘부터 할 수 있습니다.”
의정이 무심하게 대꾸한 소리에 도리어 송우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부터요? 8월까지 있으려면 옷이나 이런저런 짐도 가지고 와야 할 텐데…….”
캠핑장에서 일하는 기간은 약 두 달. 그러니 옷이나 세면도구 같은 게 필요하지 않겠느냐, 말하던 송우민은 의정의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곳에는 아까 스치듯 보았던 배낭이 얌전히 놓여있었다. 송우민은 그저 허허, 웃고 말았다.
“그럼 짐도 풀 겸 숙소부터 안내할까요?”
의정으로서는 거절할 필요 없는 제안이었다.
“여기예요.”
송우민이 안내한 건 펜션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통나무 방갈로였다. 근사한 외관이 의정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러나 겉과 달리 문을 열자마자 눅진한 공기와 습한 나무 냄새가 동시에 의정을 맞이했다.
“줄곧 비어있던 데라.”
송우민은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아 켜켜이 쌓인 시간의 냄새를 민망한 웃음으로 설명했다. 송우민이 얼른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환한 햇살에 노출된 먼지가 부슬비처럼 흩날리는 게 보였다.
과연 빈방이었던 티가 났다. 어차피 그렇게 깔끔한 걸 따지는 성격도 아니니 의정은 그냥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방은 의정이 입대 전에 사용하던 원룸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주방이 포함된 구조로 욕실로 통할 법한 문 하나가 보였다.
“두 사람이 같이 쓸 이부자리를 준비해 뒀어요. 아, 혹시 불편하면 접이식 매트리스로 바꿔줄게요.”
의정은 송우민이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두툼한 요와 여름 이불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게 보였다. 저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뇨. 괜찮아요.”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딱딱한 바닥에서 얇은 이불만 덮고 자는 데도 이력이 났다. 그러니 이부자리만 있어도 충분했다. 다만 아까 송우민이 한 말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둘이 자나요?”
“네. 혹시 불편해요?”
의정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래, 군대에선 열댓 명이 한데 모여 자기도 했다. 거긴 이렇게 큰 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까다로운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불편하지 않아요.”
괜찮을 거다. 의정은 베타에 한없이 가까운 자신의 형질을 굳게 믿으면서 껄끄러움을 내려놓았다.
“그래요. 그럼 짐 풀고 쉬다가 나오세요. 저는 잠깐 펜션 좀 둘러보고 있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송우민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 의정은 배낭을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에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옷가지 몇 개와 세면도구뿐이라 딱히 정리할 건 없었다.
방을 쓱 둘러보다가 주방에 있는 큼지막한 양문형 냉장고를 발견했다. 보통 펜션에는 이만한 크기는 없을 텐데 좀 의외였다. 상하부장이며, 작지만 식탁도 있고.
주방 가구도 어딘지 모르게 좀 고급스러운 느낌이 났다. 아무래도 여긴 아르바이트생에게 제공해 주기엔 지나치게 좋아 보였다.
이리저리 방을 둘러보다가 욕실 앞에 개어놓은 걸레를 발견했다. 창문을 열자마자 먼지가 빛을 따라 보얗게 흩날렸다. 사용한 지 오래되었으니 바닥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의정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청소를 시작했다. 물걸레로 바닥이며 몇 없는 가구를 전부 닦고 났더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송우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지 않아 일단 밖으로 나왔다.
태양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그래도 볕이 뜨거운 데에 반해 확실히 공기는 크게 덥지 않았다.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돌계단을 내려가 관리실을 지나쳐 아까 눈으로만 보았던 계곡 사이의 다리에 올라갔다. 눈앞에 근사한 풍경이 펼쳐졌다.
“멋지네.”
계곡은 독특한 모습이었다. 회색 바위가 굴곡지고 파인 지형을 전부 뒤덮었고, 그 사이로 맑고 깨끗한 물이 흘렀다. 물살은 빠른 편인데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있어서 그곳에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여름 더위를 식히거나 물놀이를 즐겼다.
아까 크게 울려 퍼지던 웃음과 말소리의 근원이 저곳이었던 듯했다. 온 얼굴에 환히 퍼진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한가롭게 구경하던 의정의 뒤로 돌연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정은 의아한 눈으로 위로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막 뒤를 돌아설 때였다. 마치 비를 머금은 흙처럼 촉촉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냄새가 코에 스며들어 왔다.
페로몬?
그럴 리가.
의정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속으로 웃으며 부정했다.
뒤이어 보인 건 얇은 셔츠 안쪽에 있는 굴곡진 가슴. 단단하고 판판한 상반신은 잘 자라난 굴참나무의 기둥을 보는 듯했다.
의정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목의 각도를 높였다. 거의 70도쯤 젖혀서야 비로소 상대가 보였다.
음영이 풍부한 얼굴이었다. 비옥한 갈색 피부, 나무가 빽빽한 산맥처럼 곧게 뻗은 눈썹, 깎아지른 바위처럼 날카롭게 솟은 코. 조금 전 맡았던 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건 시각적인 느낌뿐이었다.
“누구세요?”
“새 알바가 오메가였어?”
혼잣말치고는 목소리가 컸다. 거기에 말투도 아주 무례했다.
의정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 역시 곧은 눈썹을 까딱이더니 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얄팍해진 눈이 의정을 샅샅이 살폈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페로몬이라도 방출한 것 같았다. 의정이 그걸 느끼리라 생각한 걸까.
하여간 알파란 너무 저 자신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열성?”
“베타입니다.”
의정이 딱 잘라 답했다.
“그래요? 흐음… 미안해요. 형이 아르바이트생이 온다고만 알려줘서 꼼짝없이 오메가라고 생각했어요.”
오메가라고 생각했다니. 의정이 지금까지 만나온 누구도 첫눈에 그걸 알아챈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군대에서조차도.
자신은 보통 오메가, 하면 떠오르는 여리고 아름다운 외모도,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가냘픈 외형도 아니니까. 그런데 어떻게?
의정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설마 하는 의구심으로 남자를 보았다.
“반가워요. 나도 오늘부터 일하러 왔어요.”
마찬가지로 의정을 가만히 살피던 남자가 표정을 달리했다. 눈빛이 부드러워지고,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건 마치 한여름 태양처럼 제법 눈이 부셨다.
“송우재라고 합니다.”
나무 잎새처럼 선명한 핏줄이 보이는 손바닥이 의정에게 불쑥 다가왔다. 손가락도 키만큼이나 길쭉하고 마디가 굵었다. 얼굴만큼 손마저도 참 잘생겼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송우재라. 아까 형이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송우민 사장과 형제가 아닐까 했다.
의정이 시선을 남자의 손에서 다시 얼굴로 막 옮기려는 찰나였다.
“어? 송우재! 언제 왔냐!”
어디선가 나타난 송우민이 반가운 목소리로 다가와 우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방금.”
“그래. 잘 왔다. 두 사람, 인사는 했나?”
송우민이 묻자 우재는 의정에게 악수를 청했던 빈손을 도로 거둬들이며 또 미소를 띠었다.
“응. 이제 막 소개하려던 참이었어.”
웃는 게 습관 같은 남자였다. 그러나 의정은 눈앞의 알파에게 썩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오메가냐고 물어보며 페로몬이나 뿜어대는 사람이니까. 의정은 그런 부류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껄끄러운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송우민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의정 씨, 이쪽이 이번에 같이 일할 송우재예요. 저랑 많이 닮았죠? 보시다시피 동생입니다.”
의정은 새삼스럽게 두 사람을 나란히 보았다. 솔직히 형제라고 볼 만큼 닮은 구석은 별로 없었다. 송우재는 178cm인 의정이 고개를 젖히고 봐야 할 정도로 장신이었고, 체격도 제법 좋아서 일견 운동선수 같았다. 거기에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시원시원한 미남.
그에 반해 송우민은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 턱도 두툼하게 살이 붙어있어서 그저 인상 좋은 아저씨로 보였다.
잘 봐줘야 사촌이나 되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가까워 보이진 않았다. 입에 발린 소리로도 차마 닮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윤의정입니다.”
의정은 그냥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화제를 전환했다. 우재는 날렵하게 뻗은 눈썹을 세우고 눈마저 조금 크게 키운 채 의정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여전히 오메가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의정이 조금 서먹서먹하게 생각하는데 돌연 우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저도 다시 소개할게요. 송우재라고 합니다. 아까의 무례는 사과드립니다.”
시원시원하게 잘못을 반성한 우재가 이번엔 적당하게 그을려 건강해 보이는 손을 의정 앞으로 뻗었다. 너무 깔끔하게 사과하는 태도에 의정이 도리어 멋쩍어졌다. 어설프게 손을 내미니 우재가 단단한 손아귀로 한 번 꽉 붙잡았다가 손을 놓았다.
“형한테 듣기로 동갑이라던데. 말 편히 해도 되죠?”
아무래도 저렇게 불쑥불쑥 말하는 게 웃는 것만큼 몸에 밴 습관인 듯했다. 그래도 아까처럼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나이가 같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그랬구나, 그런 생각만 들었다.
의정은 다시금 우재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외관만 봐서는 이쪽이 자신보다 더 연상 같았다.
“네, 뭐.”
의정은 본래 썩 낯을 가리거나 경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재는 일하는 내내 함께할 동료. 의정은 첫 만남에서의 못마땅함을 털어버리며 짧게 대답했다.
우재의 얼굴에 또 활짝 미소가 걸렸다.
“어. 잘 부탁해, 의정아.”
성도 없이 불린 이름에 생각의 고리가 탁 끊어졌다. 의정아, 라니. 그거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게 부르는 호칭이긴 했다. 그런데도 왜인지 우재에게 불리는 건 어딘지 모르게 간질간질한 기분을 일으켰다.
왜 그러느냐, 묻는다면 딱히 이거다 싶은 것도 없는데도. 그렇다고 이제 와 성을 붙여서 불러달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정은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 좋아. 그럼 나도 딱딱하게 사장님! 이렇게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해, 우민 형.”
두 사람을 지켜보던 우민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럼 둘이 친해질 겸, 우재가 의정이한테 예약 관리 사이트 사용법이랑 관리실에 있는 캠핑 장비들, 그리고 캠핑장 자리 어떻게 되는지 좀 알려줄래? 나는 펜션 정리하러 갈 테니까.”
그러곤 날름 자신이 할 일을 우재에게 넘겼다.
“어, 알았어. 가자, 의정아.”
우재가 흔쾌히 답하며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의정을 보았다.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이름을 불렀다. 역시나 성을 빼고 불리는 건 영 낯간지러웠다. 더더군다나 아직 우재와의 심적인 거리도 제대로 좁혀지지 않았는데.
의정의 어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재가 생긋 웃으며 관리실로 걸어갔다.
* * *
“손님이 오면 여기에서 예약을 확인해.”
우재가 마우스를 클릭하며 설명했다. 화면에는 고객명, 객실명, 숙박 일수, 결제 상태 등 제목이 쭉 적힌 게시판이 열린 채였다.
“펜션에서 사용하던 거라 좀 헷갈리지? 그래도 보다 보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야. 일단 여기 객실명이 각각 사이트를 의미해.”
“사이트?”
“어, 쉽게 말하면 캠핑할 수 있는 지정석.”
그런 걸 사이트라고 하는구나. 의정은 모니터를 유심히 보았다. A1에서부터 A20까지 쓰여있는데 이것만 봐서는 당장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지? 그럴 때는 여기 이걸 누르면 확인할 수 있어.”
마치 의정의 의문을 짐작했다는 듯 우재가 다른 메뉴를 클릭했다. 게시판에는 객실명과 사진이 나란히 기재되어 있었다.
“앉아봐 봐.”
책상 의자에 앉아있던 우재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서는 옆에 서있던 의정의 팔을 붙잡았다. 의정은 끌어당기는 힘에 어어, 하고 그대로 주저앉혀졌다.
“이거 눌러봐.”
이번엔 어깨 위로 불쑥 팔이 스쳐 지나갔다. 우재가 검지로 모니터를 콕, 찍고 있었다. 의정은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베타와 다르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곤 해도 막상 이런 일이 생기면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자격 조건에 베타든, 오메가든 상관없다고 적혀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 베타를 더 우선순위에 두는 걸 알기에 형질을 속였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형질을 따질 일도 아니었다. 의정은 게이였고, 키가 크고 몸도 좋은 데다 얼굴까지 잘생긴 남자가 이상형인데, 하필 우재는 그 조건을 기가 막히게 갖추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니다. 첫 만남부터 대뜸 오메가니 어쩌느니 하면서 말하는 걸 보니 성격은 영 별로 같았다.
의정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을 좋아했다. 본인이 워낙 어려서부터 동생 둘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던 터라…….
“의정아?”
“어.”
의식의 흐름이 끝 간 데 없이 뻗어가던 의정은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른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화면을 보았다. 다행히 우재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다시 설명을 이었다.
“여기 보면 객실 전체라고 쓰여있지?”
의정이 우재가 말한 제목을 누르니 곧 화면이 바뀌었다.
“이건 뭐야.”
“캠핑장 전체 지도야. 거기 빨간 원 안에 A1부터 A20까지 적힌 거 보이지?”
우재는 색연필로 알록달록하게 숲을 그리고 그 위에 나무 모양으로 표시된 숫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헷갈리면 이거 보고 확인해 보면 돼. 어때,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지?”
“어.”
우재의 말대로 예약을 확인하고 자리를 지정하는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정은 몇 개의 사진을 더 클릭하고, 예약 게시판까지 한 번 더 살핀 후에 우재를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치니 잘생긴 눈꼬리가 살며시 휘었다.
“다 봤어? 그럼 이제 캠핑용품 어떤 게 있는지 알려줄게.”
웃음이 헤픈 남자라니. 이것도 좋아하지 않는 면 중 하나였다. 의정은 무심한 표정을 만들며 목을 까닥였다.
“그래.”
캠핑 장비는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선반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선반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들어찬 형태였는데, 가장 꼭대기는 의정보다 더 큰 우재도 턱을 들어 올려야 할 정도였다.
의정은 우재를 따라 천천히 살펴보았다. 텐트부터 시작하여 매트리스, 간이침대, 테이블, 그늘막, 심지어 식기와 조리 도구까지 눈에 띄었다.
“엄청 많네.”
캠핑 도구가 이렇게 많았던가.
“텐트는 2~3인용부터 8~10인용까지 있어. 2~3인용은 보통 커플이나 혼자 온 손님용이고, 3인 가족이면 4~5인용이 적당해. 짐이나 이런 것도 들어가야 하니까.”
의정의 순수한 감탄에 우재는 웃음을 흘리며 텐트에 턱 손을 올렸다. 민소매에서 쭉 뻗어 나온 갈색 팔은 적당하게 그을려서 튼튼하게 자란 나뭇가지를 연상하게 했다.
“그럼 4인이면 6인용?”
의정이 우재의 팔을 관찰하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물었다.
“어, 그렇지.”
우재는 텐트를 꼼꼼하게 살피는 의정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해력도 빠르고 눈치도 제법 좋으니 일하는 것도 기대됐다. 이제 6월도 막바지. 그런데 아르바이트생이 뽑히지 않아 우민이 안달복달하더니 다행이었다.
베타라고 했던가.
확실히 눈에 확 뜨이는 그런 미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피부가 깨끗하고 하얀 데다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차분한 분위기라 처음 봤을 때는 영락없이 오메가인 줄 알았다. 무엇보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풀처럼 싱그럽게 풍기던 아주 미미한 향 때문에.
우민에겐 베타라고 했다는데, 그것도 거짓 같았다. 열성이면 모를 줄 알았던 걸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면 될 텐데.
작년에도 본인이 베타라고 우기던 오메가가 히트 사이클이 온 줄도 몰라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으면 대비라도 했을 텐데. 아무런 준비 없이 터진 일에 우민도, 우재도 크게 고생했다.
그런 탓으로 조금 까칠하게 말을 붙이고 말았다. 그런데 자신이 내보낸 페로몬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 보고 착각이라는 걸 알았다. 덕분에 우재는 의정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었다.
“텐트 치는 연습도 해야 하긴 하는데. 일단 해 떨어지기 전에 캠핑장부터 둘러보자.”
우재의 말에 의정은 관리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시침이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둘은 나란히 관리실을 나와 다리를 건넜다. 캠핑장은 전나무와 잣나무가 많은 숲이었다. 위로 쭉쭉 뻗은 줄기며 활짝 펼쳐진 잎들 덕분에 반대편보다 더 서늘하고 상쾌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좋지?”
어느덧 걸음을 멈추고 선 의정을 돌아본 우재가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어, 진짜 좋네.”
의정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코뿐만 아니라 폐와 그보다 더 안쪽인 배 속까지 다 시원해졌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나무 냄새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캠핑장 군데군데 납작하게 나무 데크가 놓인 게 보였다. 거기가 우재가 말했던 사이트였다.
“여기는 3인용까지만 가능해. 그래서 이렇게 크기가 다른 건 선택 못 하게 되어있어.”
우재는 핸드폰을 꺼내 예약 관리 사이트를 열어서 각각 사이트마다 예약이 가능한 인원수까지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놓고 이제는 그런 모습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의정은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우재를 따라다녔다.
캠핑장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관리실로 돌아와 텐트를 크기별로 펼쳐보았다. 이미 군대에서 지겹도록 야영을 해봐서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손에 익히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의정은 그렇게 우재와 업무를 파악하느라 날이 저물도록 함께 있다가 우민이 연락해 와서 펜션으로 향했다.
앞마당에는 거나하게 바비큐가 준비되어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준비한 저녁 파티였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어느덧 9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우재는 그제야 가져온 짐 정리를 시작했다.
“그게 다 뭐야.”
의정이 우재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우재는 씩 웃으며 여러 가방 중 하나를 활짝 펼쳤다.
“이거? 내 보물들.”
그 안에서 줄줄이 나온 건 뜻밖에도 여러 종류의 양념 통이었다. 간장, 소금, 후추, 설탕, 들기름, 참기름, 올리브유 등 의정이 알 만한 것들부터 용도도, 정체도 파악할 수 없는 각종 소스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용기들이 끊임없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재는 계속해서 가방을 하나씩 열었고 그때마다 의정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대체 왜 방갈로에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고, 주방 가구가 심상찮았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너. 정체가 뭐야?”
넋 놓고 구경하던 의정이 물었다.
“나? 요리사.”
우재에게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요리사라. 그래, 어쩐지. 저런 심상찮은 물건이 나올 때부터 어림짐작하긴 했다. 그런데도 냉장고를 꽉 채울 듯 연달아 등장하는 먹을 것이며 주방 도구를 보고 있으려니 질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의정은 먹는 건 잘해도 음식을 만드는 거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식당에서 먹거나 배달해 먹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성격. 의정은 우재가 바쁘게 움직이는 걸 관찰하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맥주 마실래?”
막 냉장고를 닫던 우재가 막 욕실 밖으로 나오는 의정을 보고 물었다. 의정은 젖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아직 자기엔 일렀다.
“어, 좋지.”
온종일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고, 씻고 나왔더니 시원한 게 생각났다.
우재는 캔 맥주 두 개에 참외와 오이 하나를 꺼내어 먹기 좋게 잘랐다. 요리사라더니 칼 쓰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식간에 안주와 술을 준비한 우재가 의정의 맞은편에 앉으며 맥주를 건넸다.
“잘 마실게.”
캔을 손에 쥐니 손바닥 전체가 서늘해졌다. 의정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풀탭을 당겼다. 달칵, 하고 열리는 소리마저 시원했다.
우재가 내민 캔에 탁, 하고 부딪치곤 꼴깍꼴깍 두어 모금 목으로 넘겼다. 탄산이 몸속에 싸하게 퍼지면서 피로도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역시 열심히 일한 밤에는 맥주가 필수였다.
“여긴 어떻게 지원했어?”
맛있게 술을 마시는 의정을 구경하던 우재가 그사이 반이나 비운 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의정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당장 잘 데가 없었거든.”
“뭐?”
의정은 목소리가 조금 커진 우재를 보고 웃었다. 무슨 큰일이 있는 줄 아는 듯한 얼굴이 이제야 동갑 같아 보였다. 일을 알려줄 때나, 캠핑장 곳곳을 소개할 때, 저녁을 먹을 때도 마치 제가 연상이라도 되는 듯 챙기려고 하더니.
의정은 입술 끝에 웃음을 매달고 맥주도 한 모금 마신 뒤에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계약한 집이 8월이 되어야 비거든. 그러려면 친구 집에서 최소 두 달은 신세를 져야 하는데 그럴 수 없잖아. 그렇다고 본가에 내려가려니 그것도 영 내키지 않더라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여기가 보인 거지. 돈도 벌고, 숙식도 제공받고.”
그제야 이해한 듯 우재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실은 아까 형이 그러더라고. 너 왔을 때 배낭을 메고 있는 걸 봤는데 무슨 사연이 있나 싶다고. 거기다 당장 일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래서 궁금했어.”
그렇게 말하는 데는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혹시나 제 말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게 느껴졌다.
사람이 초면에 호감을 느끼는 기준은 3초면 결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평가가 한 번 이루어지면 그게 잘 바뀌지 않는다고.
의정에게 우재의 첫인상은 잘생겼지만 다소 무례한 알파였다. 그런데 불과 반나절 만에 조금이나마 호감으로 바뀌게 된 건, 이런 뜻하지 않은 배려 때문이었다.
과연 어떤 게 우재가 가진 본모습인지는 더 겪어봐야겠지만, 어쨌거나 낮에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호감이 들었다.
“사연은 무슨.”
의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아직 송우재라는 사람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벌써 너무 후하게 점수를 주는 것 같아서 스스로 거는 브레이크였다.
다행히 우재는 의정의 삐딱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눈매만 부드럽게 접으면서 또 웃을 뿐이었다.
“넌 매년 여기 와?”
고작 세 번쯤 마셨는데 벌써 가벼워진 캔을 흔들며 의정이 물었다. 방갈로를 보았을 때 빌려주는 데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런데 익숙하게 움직이는 우재를 보니 누가 사용하는 곳인지 짐작이 갔다.
“응. 여기가 원래 펜션만 했는데 형이 2년 전에 물려받으면서 캠핑장도 운영하기 시작했거든. 형수님은 다른 일 하시고, 조카들도 봐야 하니까 성수기에만 내가 도와줬지.”
“아아.”
과연 여긴 우재가 캠핑장에 일을 도와주러 오면 사용하는 곳이었던 듯했다. 의정은 이제야 방갈로치고 시설이 좋았던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근데 그것도 올해까지만이야.”
“올해? 왜?”
“장사 준비 중이라.”
“장사?”
“응.”
“대단하네.”
의정은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남은 맥주를 털어 넣었다. 우재는 그런 의정을 잠깐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돌아온 우재의 손에는 새 맥주가 들려있었다.
“고마워.”
의정은 제 코앞에 바짝 다가온 캔을 받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 눈을 마주친 우재는 그저 씩 웃으며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호감이 갈 만한 상대이긴 했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고, 무엇보다 웃는 게 정말 매력적이었다.
의정은 또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에 고삐를 걸듯이 벌컥벌컥 술을 넘겼다. 시원하고 알싸한 알코올이 넘어가며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맥주 한 캔씩 더 마시며 TV를 보고 얘기를 나누다가 자리를 정리하고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옆자리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숨결이 느껴지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친구와 여행이라도 온 듯한.
발현하고 나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역시 나쁘지 않았다.
* * *
잠에서 깨자마자 창을 올려다보았다. 밖이 훤했다. 놀라서 얼른 바닥을 더듬어 핸드폰을 켰다. 시간은 이제 고작 6시였다.
힐끗 옆을 보았다. 먼저 잠들었던 우재는 아직도 꿈나라에 있었다. 의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어차피 아직 이르니 괜히 움직여서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7시였다. 아주 잠깐 졸았던 거 같은데 언제 이만큼이나.
근데 얜 어딜 간 거야? 기다려준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혼자 어디론가 가버리다니.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구수한 밥 냄새가 났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으니 밖에서 들어오는 건가.
의정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덜 깬 얼굴로 막 몸을 일으켜 앉을 때였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우재가 나타났다.
“잘 잤어?”
“어, 넌 어디 갔다 와?”
잠기운이 하나도 없는 우재에게선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잠깐 산책하고 왔어. 밥 되는 데 시간도 좀 걸리니까. 배고프지? 잠깐만 기다려봐, 금방 차려줄게.”
밥 익는 냄새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나는 거였나 보다. 의정은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몽롱한 표정으로 잘빠진 알파가 움직이는 모습을 눈으로 따라갔다. 우재는 냉장고를 열어 밑반찬을 꺼내고, 인덕션에 국을 데우면서 식탁을 하나둘 채워갔다.
아침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의정은 반찬이며 밥, 국을 보고 감탄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놀러라도 온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랑 놀러 가본 게 언제였더라. 의정은 눈을 가늘게 만들며 과거를 더듬었다.
스무 살 여름, 이상 반응이 왔을 때를 떠올렸다.
열이 펄펄 끓고 온몸이 다 아팠다. 처음에는 독한 감기인 줄 알고 버티려고 했으나 새벽녘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에 갔다. 그리고 그날 의정은 통보를 받았다. 오메가로 발현하였다고.
믿을 수가 없어 세 번이나 다른 병원을 찾아가 유전자 형질 검사를 해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칠까 봐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고, 친한 친구에게마저 비밀을 만들게 되니 모임도 피하게 되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도 사실대로 밝힐 수가 없었다. 덕분에 군대 가기 전까지 누구와 잘 어울리지 못한 탓에 주변에는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형질이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데 괜히 숨겼나 싶기도 하지만.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지 오메가라는 이유로 어떤 불이익을 받을까 그랬다는 걸. 그 때문에 이곳에 지원할 때도 베타라고 속였으니까.
아마 알파인 우재는 알지 못할 고민일 터였다. 의정도 자신이 오메가가 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왜?”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반찬을 집던 우재가 고개를 들었다.
“아냐. 맛있어서.”
의정은 그렇게 말하면서 숟가락으로 밥을 푹 퍼서 입에 넣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느껴졌다.
식사를 끝내고 관리실까지 걸어오는 동안 몸에 척척하게 땀이 뱄다. 우재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리모컨을 찾아서 에어컨을 작동했다.
“더우면 고민하지 말고 바로 틀어.”
냉기가 금세 실내를 감쌌다. 조금 끈적끈적해졌던 피부도 조금씩 말라갔다.
의정은 매끄러워진 팔을 두어 번 쓸고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다. 간밤에 예약이 들어온 게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자.”
의정의 앞으로 불쑥 긴 팔이 나타났다. 움찔 놀라 바라보니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잔이 보였다. 안에는 굵은 얼음이 동동 뜬 믹스 커피가 가득 담겨있었다.
슬쩍 고개를 더 들어보았다. 우재가 늘 그렇듯 웃는 낯으로 서있었다.
“고마워.”
의정은 도로 시선을 내리고 잔을 쥐었다. 어제 마셨던 맥주처럼 차고 시린 기운이 금세 손바닥에 퍼져 나갔다. 덕분에 더위도 모두 물러간 거 같았다.
“좀 쉬다가 나가자.”
의정이 뒤에 선 우재를 돌아보았다. 왜? 하고 묻는 눈동자를 보며 우재는 선반에 정리해 놓은 캠핑 장비를 가리켰다.
“복습 한번 해봐야지.”
“아아.”
의정은 쉽게 수긍하고 우재가 건넨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찬 기운이 순식간에 몸에 퍼지며 배 속까지 시원해졌다.
“가자.”
커피를 비우는 사이 빠르게 예약 사이트를 확인한 의정이 벌떡 일어섰다. 좀 더 여유를 부려도 될 텐데. 어제도 느낀 거지만, 의정은 어지간히 부지런했다.
우재는 벌써 입구까지 가버린 의정을 보곤 작게 웃으며 걸어갔다.
우재는 굴참나무를 닮았다. 텐트를 세우기 위해 쭉 뻗은 팔은 길고 튼튼한 나뭇가지였고, 탄탄한 몸은 어떤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기둥 같았다. 그런 우재는 뜨거운 볕을 가려주고, 세찬 비를 막아줄 것처럼 의젓해 보였다.
“이렇게 해서 형태를 만들고 나면 바닥에 고정만 하면 돼. 어렵지 않지? 해봐.”
의정이 우재를 보며 아름드리나무를 생각할 때, 숙련된 솜씨로 6인용 텐트를 뚝딱 설치한 우재가 옆에 준비한 장비를 가리켰다.
땅에 주저앉아 있던 의정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우산처럼 접힌 텐트를 잡았다. 어제 4인용까지 연습을 해보면서 좀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이건 부피부터가 달랐다.
역시나 우재가 망설임 없이 단번에 끝내는 걸, 의정은 펼치는 것부터 버벅거렸다. 워낙 크기도 큰 데다 접은 폴대도 무게가 상당해서 여기를 펴면 저기가 접히고, 저쪽을 세우면 이쪽이 기울어져 애를 먹였다.
보기엔 답답할 텐데 우재는 핀잔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묵묵하게 의정이 씨름하는 걸 지켜보았다.
한 시간 반가량 텐트 치는 연습을 하고 나서는 체크아웃에 맞춰 손님들이 두고 간 캠핑 장비를 정리했다. 수거 장소는 관리실 옆 벽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선반이나 수납함 등으로 구분된 게 아니라 그런지 텐트나 그늘막, 테이블 세트 등이 어수선하게 놓여있었다.
“이런 건 반납할 때 미리미리 정리해 주면 편할 거 같은데, 분리수거처럼.”
의정이 테이블 아래 깔린 텐트 가방을 열면서 불쑥 말했다. 제멋대로 쑤셔 넣은 터라 시트가 구깃구깃하게 구겨져 있었다.
“뭘 굳이 그렇게 해. 여기에서 하나씩 정리하면 금방인데.”
우재는 의정이 건넨 텐트를 받아 쫙 펼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라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의정은 달랐다. 부모님이 묘목 농원을 해서 워낙 바쁜 탓에 집안일이며 동생들 보살피는 것도 책임져야 했기에 이렇게 어수선한 걸 보면 그냥 두지 못했다.
이렇게 그냥 두어서야 분명 손님이 더더욱 몰리는 성수기에는 아수라장이 될 게 뻔했다. 아무래도 뭔가 조처가 필요해 보였다.
“혹시 남는 박스 없어?”
“박스?”
“어, 라면 박스 같은 거.”
그런 걸 왜? 그렇게 궁금해하던 눈이 놀라는 빛을 띠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의정은 우재가 가져다준 박스를 이리저리 만지고, 테이프로 이어 붙이더니 순식간에 대형 정리함 몇 개를 만들어냈다.
“매직이랑 종이도 좀.”
“어어.”
의정이 뚝딱뚝딱 정리함을 만들어내는 걸 신기하게 구경하던 우재가 얼른 안에서 종이와 매직펜을 가지고 나왔다. 의정은 종이에 텐트와 그늘막, 매트리스와 침낭, 테이블 세트와 식기 등등을 적고는 관리실 벽에 하나하나 붙이고 그 아래에 나란히 배치했다.
“의정아, 너 진짜 대단하다. 손재주가 보통이 아닌데?”
우재는 깔끔하게 정리된 정리함을 보면서 감탄했다. 의정은 정리함을 놀란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는 우재의 뒷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이 정도야, 뭘.”
나오는 목소리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덤덤했다.
“아니, 정말. 정리함을 종류별로 분류해 이렇게 뚝딱 만들어낼 줄도 알고,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그거. 워낙 익숙해서 그래.”
“익숙해?”
의정은 궁금증이 인 우재의 눈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 부모님이 일 때문에 워낙 바빠서 늦게 들어오시는 경우가 많았거든. 그래서 집안일이나 동생들 돌보는 건 늘 내 몫이었어.”
“동생이 있어?”
“어어, 말썽꾸러기 쌍둥이들.”
“쌍둥이?”
우재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해졌다. 웃는 것도 눈길을 어지간히 사로잡더니 저렇게 반짝반짝 빛내는 건 다른 매력이 있었다. 쟤는 정말 인기가 많았겠구나.
의정이 지금 대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을 내놓으며 대답했다.
“어, 기저귀도 내가 갈아줬어.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엄마였네, 엄마.”
우재가 웃으며 하는 말에 의정은 바로 반박했다.
“엄마라니! 유능하신 형님이지.”
처음 만났을 때도 오메가니 뭐니 하더니. 의정은 제가 한 일을 그런 것으로 규정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형질을 숨기고 있어서 더욱 과민하게 반응하는지도 몰랐다.
“하여간 그 녀석들, 또 물건을 늘어놓는 데 일가견이 있었거든. 잠시만 한눈팔면 끝도 없이 늘어나니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리함을 만들었지.”
의정은 곤란한 듯 말하면서도 동생들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재는 그런 의정을 가만가만 보다가 눈을 접으며 미소를 띠었다.
“네 동생 녀석들이 복 받았네.”
“그럼, 내가 또 능력이 좋잖아?”
바라보는 우재의 눈빛은 어쩐지 아침 햇살처럼 간질간질한 데가 있었다. 의정은 쑥스러움을 감추듯 부러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일견 젠체하는 듯한 모습인데도 우재는 또 한술 더 떠서 엄지까지 치켜세웠다.
“그래. 인정.”
* * *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 막 7월이 시작됐을 뿐인데도 주말은 속속 모여오는 손님들로 분주했다.
목요일까지는 그래도 여유가 있어서 오전에는 텐트를 치는 연습도 하고 점심을 같이 먹곤 했다. 그러고 나서는 우재와 캠핑장을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금요일은 아침부터 그럴 시간도 없었다.
의정은 출근하자마자 걸려오기 시작한 문의 전화를 받거나 그게 아니면 캠핑용품을 점검하는 데 정신이 없었고, 우재는 현장을 감독하고 손님을 도와주느라 관리실까지 올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점심때였다.
“여기가 천국이네.”
관리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정은 선반에 장비를 올리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으로 들어온 우재는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길쭉하고 건강한 팔이 전부 보이도록 어깨까지 소매를 걷어붙인 모습이 마치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 같았다.
“왔어? 밖에 꽤 덥지?”
“응, 아침부터 훅훅 찌는 거 같더니 지금은 진짜 찜통 같다.”
우재는 땀 때문인지 옷마저 착 달라붙어서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의정은 그쪽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천천히 떼고는 들고 있던 물건을 마저 정리했다.
등 뒤에서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재가 더위를 식히려 상의를 들썩거리고 있는 듯했다. 보지 않아도 눈에 그려질 것처럼 선하게 상상됐다.
아니, 지금 그런 걸 떠올려 뭘, 어쩌겠다고. 의정은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 틈만 나면 엉뚱한 생각이 나오려고 하니 단단하게 단속해야 했다.
“배 안 고파? 밥 먹고 하자.”
의정이 머릿속으로 무얼 상상하는지 알 길이 없는 우재가 물었다.
“어, 그래야지.”
의정은 괜스레 눈앞에 있던 텐트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다행히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은 거 같았다.
“뭐 먹을래?”
“음… 냉면?”
우재가 의정이 조금 고민하듯이 내놓은 대답에 웃음을 흘렸다. 냉면이라니. 지난 일주일간 점심 메뉴를 물으면 나오는 답이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의정과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몇 가지. 가리는 음식이 없이 뭐든 잘 먹는다는 것과 요리는 썩 솜씨가 없다는 것.
그리고 또 밥보다는 면을 더 좋아한다는 것.
벌써 냉면은 두 번이나 먹었고, 어제는 냉국수를 해먹었으니…….
“오늘은 그럼 비빔국수 할까?”
우재는 일주일간 의정이 먹은 음식을 복기한 후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그래. 그것도 좋고.”
의정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꾸했다. 우재는 또 습관처럼 웃어 보이곤 관리실에서 바로 점심 준비에 들어갔다. 굳이 숙소까지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이미 코펠부터 음식 재료와 양념까지 다 마련되어 있었으니.
스테인리스 그릇에 고추장 양념을 잔뜩 두른 국수가 한 움큼 담겼다. 그 위에 신선한 오이와 깨소금으로 마무리한 비빔국수는 잘 찍은 사진 한 컷처럼 보였다.
“넌 국수만 팔아도 대박 나겠다.”
의정은 테이블에 젓가락을 놓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
“어, 그러고 보니 무슨 장사 한다고 했지?”
말이 나온 김에 지난번에는 자세히 묻지 않았던 메뉴에 관심을 보였다. 의정은 내심 독특한 퓨전 음식이나 아니면 서양 요리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으나, 우재의 답변은 달랐다.
“불고기 덮밥.”
“불고기 덮밥?”
그건 너무 뜻밖의 메뉴였다. 의정이 놀란 눈으로 묻자 우재가 웃으며 물었다.
“어, 이따가 저녁에 먹어볼래?”
“오, 좋지. 나야.”
의정은 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불고기 덮밥이라. 고슬고슬한 밥 위에 수북이 쌓인 불고기가 떠올랐다. 근데 그게 어떤 맛인 거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거라 딱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래도 뭐, 우재가 만든 음식이니까 맛있겠지.
우재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비빔국수를 먹는 의정을 구경했다. 애써서 만든 음식을 이렇게 먹는 모습을 보면 의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생각하는 것 대부분이 그랬다. 의정이 뭘 잘 먹을지, 어떤 걸 해주면 더 좋아할지.
고기도, 생선도 다 좋아하지만 그래도 고기를 더 많이 먹고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를 선호한다는 거. 술은 맥주를 더 좋아하고 소주는 약한 편이라는 거. 안주는 잘 먹지 않는데 과일에는 의외로 손이 자주 간다는 거.
우재가 그렇게 한창 의정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궁리할 때였다.
“어디서 장사해?”
국수를 오물거리던 의정이 재차 물었다.
“요즘은 안 해.”
우재는 연이어 떠오르던 생각을 접고, 젓가락으로 국숫발을 감으며 대답했다.
“왜?”
“두 달간 쉬기도 해야 하고 또 장소도 고민 중이라.”
“장소? 식당 운영하는 거 아냐?”
“아니. 푸드 트럭을 하고 있거든.”
푸드 트럭이라니 그건 또 그거대로 우재에게 잘 어울리는 거 같았다. 흰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어깨까지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으로 환히 웃으며 맞이해 주는 주인이라니.
“그럼 어디 고민 중인데?”
의정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상상을 얼른 잡아채며 물었다. 요즘 뭐만 하면 자꾸 제 의지와 상관없이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게 문제였다.
“장소는 글쎄… 아직 고민 중이야. 대학가나 회사 밀집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어.”
하긴 덮밥이라면 간단하면서도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니 학생이나 직장인에게 인기가 많을 법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다 보니 금세 그릇이 비었다. 의정은 잘게 썬 오이 하나까지 싹싹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곳에 와서 가장 좋은 일이라면 이렇게 매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의정은 우재가 저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뿌듯한 얼굴로 물까지 벌컥벌컥 마셨다.
“배부르다. 잘 먹었어.”
의정이 빈 잔을 내려놓는 것까지 지켜본 우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여유를 부리며 의정과 있고 싶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수고해.”
“어, 너도.”
설거지는 의정의 몫이었다. 어차피 큰 것들은 우재가 요리하면서 다 정리해 둔 터라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시원하게 커피 한 잔을 타서 막 책상에 앉으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네. 송 캠핑장입니다.”
의정은 수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예약자 이름을 확인하면서 장비를 빌렸는지, 아닌지를 빠르게 살폈다.
―30분 후면 도착할 거 같아요.
막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는데 들려온 목소리에 의정이 멈칫했다.
“아, 30분 후요?”
예상보다 도착 시간이 빨랐다. 전화를 건 상대는 커플 손님으로 캠핑 장비를 대여한 것뿐만 아니라 설치까지 요청해 둔 상태였다. 30분이면 장비를 꺼내고 지정된 자리까지 가지고 가서 설치하는 데만도 빠듯했다. 심지어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예약한 사이트는 안쪽에 있었다.
의정은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구석에 있는 손수레를 끌어다가 무게가 무겁고 부피가 큰 것부터 빠르게 옮겼다. 3인용 텐트, 그늘막 텐트, 매트리스, 테이블, 코펠 등. 장비를 차곡차곡 쌓고는 탄성이 좋은 로프로 단단하게 고정하고 혹시 풀리지 않을까 한 번 더 확인했다.
관리실 문을 여니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왔다. 햇볕도 뜨겁지만, 무엇보다 후텁지근한 공기 때문에 몸이 금세 더워졌다.
“예약 손님?”
의정이 끙끙거리면서 다리를 건너니 때마침 캠핑장 입구에서 계곡을 지켜보던 우재가 의정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더위 때문인지 우재의 이마며 목덜미에 땀이 가득했다.
“어, 설치해 달라고.”
의정은 우재의 곳곳으로 향하는 시선을 간신히 붙들어 두고 짧게 대꾸했다.
“언제 오는데?”
“20분 후에.”
“얼마 안 남았네. 이리 줘, 내가 가져갈게.”
대답을 들은 우재가 눈을 찌푸리며 손을 내밀었다. 워낙 손이 크고 손가락이 길쭉해서 그런지 불쑥 다가온 손길은 금세 의정에게 닿아왔다.
“아냐.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같이 일하는데, 이런 것까지 맡길 순 없었다. 의정은 우재가 내민 손을 거절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우재도 더 막지 않는 대신 의정의 뒤를 따라갔다.
의정은 그만 가보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우재가 일주일간 의정의 성격을 파악했듯 의정도 마찬가지였다. 의정은 우재가 보기보다 고집이 세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무가 빽빽한 숲에 들어와서인지 그래도 관리실에서 막 나왔을 때처럼 숨 막히는 더위는 느껴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예약된 사이트는 좀 더 높고 외진 지대에 있어서 비탈을 올라가야 했다.
“어어!”
끙끙거리며 무거운 수레를 끌고 올라가던 의정이 돌연 비명을 질렀다. 급한 마음에 제대로 바닥을 보지 않고 가다가 지면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보지 못하고 발이 걸린 탓이었다.
“조심해!”
뒤따라오던 우재가 갸우뚱하게 기운 의정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러나 미처 손수레마저 챙길 정신은 없었다. 손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지면서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장비가 순식간에 쏟아지고 말았다.
“아, 이런.”
가뜩이나 시간도 별로 없는데 이런 일까지. 의정은 난감한 얼굴로 어질러진 바닥을 보았다가 뒤늦게 제 자세를 알아챘다. 등에는 우재가 바짝 붙어있었고, 배는 단단한 팔에 감겨있었다.
그야말로 둘은 틈 없이 딱 달라붙은 모양새였다. 남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백허그라니.
“괜찮아?”
의정이 어색해하며 딱 굳어있는데, 바로 뒤에서 걱정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어, 고마워. 하마터면 진짜 넘어질 뻔했네.”
의정은 그제야 어색하게 웃으면서 우재의 팔을 풀고는 후다닥 거리를 벌리고 허리를 굽혔다. 어쩐지 우재를 마주 보기가 부끄러웠다. 저쪽이야 그냥 넘어질 뻔해서 붙잡아준 건데 의식했다고 티를 낼 수도 없고…….
의정이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의정아.”
우재가 다시 이름을 불렀다. 의정은 ‘어?’ 하고 대답하면서도 계속 시선은 피했다.
“예약 손님이 도착한 거 같아.”
“뭐?”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말에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우재가 팔을 뻗어 계곡 너머를 가리켰다.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멈추는 게 보였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가봐. 내가 설치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의정은 정리 중이던 장비를 걱정스레 보다가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둘인 걸 보고는 결국 일어섰다. 여기보다는 손님맞이가 더 중요했다.
“어어, 미안한데 좀 부탁할게.”
“미안은 무슨. 얼른 가봐.”
우재의 입가에 늘 그렇듯 구김살 하나 없는 미소가 걸렸다. 하필 웃는 것도 예뻐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의정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손수레를 끌었을 때보다 한결 빨라서 캠핑장 입구까지는 금방이었다.
다리 위에 오르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막 텐트를 펼치고 있는 우재의 뒷모습이 보였다. 워낙 키가 큰 데다 몸이 좋아서 처음엔 운동선수인 줄 알았다. 각이 딱 잡힌 팔 근육이며 쫙 벌어진 어깨선을 보면 수영을 했을 법도 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맞아. 고등학교 때까지 수영했었어.”
9시가 다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와서는 불고기 덮밥을 뚝딱 만들어낸 우재가 의정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래?”
의정은 덮밥이 담긴 그릇을 받다 말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응. 여기 계곡이 깊고 넓잖아.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헤엄치고 노는 걸 좋아했거든. 학교에 가니까 수영부가 있어서 바로 등록했지. 그러고 바로 선생님 눈에 띄어서 대회도 나가고 그랬어.”
우재가 별스럽지 않다는 투로 말하면서 밥상에 주저앉았다. 상 밑으로 우재의 길쭉한 다리가 불쑥 들어왔다. 그대로 무릎이 닿아서 의정은 손가락을 움찔하고는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럼 선수 생활도 했었어?”
의정은 괜히 어색하게 군 것이 아닌가 싶어 얼른 다른 질문을 꺼냈다.
“아니.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다가 그만뒀어.”
왜 그만뒀는지 물어보는 건 실례일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우재가 바로 이어 말했다.
“그것보단 음식 장사를 하고 싶었거든.”
“이거?”
의정이 우재가 만들어준 덮밥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릇에는 밥이 안 보일 정도로 불고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아까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는데 거기에 고소하고 단내를 풀풀 풍겨서 군침이 돌았다.
“아니. 이건 일본에서 덮밥을 배우면서 결정한 거야. 그전에는 어떤 걸 할지 계속 고민했었어.”
“일본에서 배웠다고?”
막 불고기를 집던 의정이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물었다. 어지간히 놀란 듯한 반응에 우재가 웃는 얼굴로 ‘응.’ 하고 대답했다.
“원래는 여행 간 거였는데. 거기서 처음 먹어본 덮밥이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거든. 장어도, 새우도, 튀김도.”
우재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입에 넣었다. 어찌나 먹음직스럽던지 의정도 따라서 덮밥을 푹 퍼서 먹었다. 고기는 쫄깃쫄깃했고, 간장을 베이스로 한 밥은 짭조름하고 단맛이 났다.
역시.
“이거 진짜 맛있네.”
의정은 눈이 가늘어질 정도로 웃고는 또 한가득 펐다. 그냥 나온 칭찬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우재는 움직이던 손도 멈추고 야무지게 식사하는 의정을 보았다. 얼굴은 작고 몸은 말라서는 입도 짧은 게 아닌지 내심 걱정했는데 정말 크나큰 착각이었다.
의정은 먹성도 좋을 뿐만 아니라 가리는 음식도 없어서 정말 만들어 먹이는 보람을 느끼게 했다. 우재가 오물오물하면서 움직이는 입술을 한참 보다가 물었다.
“맛있어?”
“어. 너 진짜, 이거 빈말이 아니라 대박 날 거 같아.”
“그래? 다행이네.”
우재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이렇게 잘 먹는 걸 보니 내일 아침에는 파를 넣은 불고기로 반찬을 하고 갓 지은 밥을 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으로는 얼큰하게 김치 콩나물국이 좋을까?
“아… 진짜 배부르다.”
“괜찮았어?”
“어, 완전. 난 매일매일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우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비스듬하게 앉은 의정을 보았다. 평소에는 납작한 배가 볼록해져서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귀엽게 보였다. 손을 뻗어 자꾸만 들썩거리는 배 위에 올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왜?”
제게 닿은 지긋한 시선을 느꼈는지 의정이 강아지처럼 둥그스름한 눈을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우재를 가득 담고 있었다.
“넌 진짜 먹이는 보람이 있어.”
씩 웃는 입꼬리가 눈매만큼이나 곱게 휘었다. 우재는 가만한 눈으로 의정을 보다가 슬쩍 눈길을 돌렸다. 창 너머 보이는 밤하늘마저 의정의 눈동자처럼 까매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건 의정도 마찬가지였다. 형광등을 등에 지고 있어 조금 그림자가 졌는데도 우재의 미소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으로 보였다.
“…치워야겠다.”
의정은 허둥지둥 그릇을 정리했다. 그 많던 덮밥은 그새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깔끔하게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일어날 핑계가 좋았다. 우재도 달리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부탁해. 난 그럼 마실 것 좀 꺼내놓을게.”
설거지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캠핑장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차를 끌고 시내까지 가기에도 멀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껌껌한데 밤 산책을 하기에도 마땅치 않으니 가장 만만한 건 TV를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였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야식이나 간단한 안주도 생각나기 마련. 우재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집어 들고 수납장을 열어 라면을 꺼냈다.
“반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의정이 우재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생라면에 들어갈 분말 스프를 반만 넣으란 주문이었다.
“당근.”
우재가 두 손에 팍 힘을 주었다. 봉투가 보스락 소리를 내며 단번에 쪼그라들었다. 그러고도 몇 번 면발을 이리저리 바스러뜨리다가 입구를 벌렸다. 구불구불하게 겹쳐있던 라면이 먹기 좋은 크기가 됐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스프를 밖으로 빼내어 반만 털어 넣고 입구를 모아 쥔 채 서너 번 빠르게 흔들었다. 다시 봉투를 열어서 안을 확인하니, 뽀얬던 라면이 스프를 둘러 먹음직스럽게 바뀌었다.
우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맥주와 안주를 들고 돌아서다가 TV에서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거 보자.”
의정은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리모컨 버튼을 누르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러곤 가까이 다가오는 우재를 올려다보았다.
“좋아하는 프로야?”
TV를 볼 때면 우재는 늘 의정이 하는 대로 그대로 두는 편이었다. 예능이면 예능, 드라마면 드라마, 영화면 영화, 스포츠면 스포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두루두루 잘 보기 때문이라고. 그런 우재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는 게 신기했다.
“응, 도움이 많이 되거든.”
더더군다나 우재는 확실하게 관심이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의정은 ‘오호.’ 하고 웃으면서 우재의 눈길을 사로잡은 프로그램을 보았다.
막 바뀐 화면에 연예인 한 명과 낯선 중년 남자 한 명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무슨 맛집 탐방 예능 같았다.
“무슨 내용인데?”
의정이 관심을 보이니 우재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저 사람이 유명한 요리 연구가야. 지금 들어간 식당에 솔루션을 해주는 거고.”
“솔루션?”
누가 출연하는지, 무얼 하는 예능인지 설명하는 우재는 척 보기에도 푹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또 우재가 말하는 게 좋기도 해서 의정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너도 신청했었어?”
한참 듣기만 하던 의정이 문득 물었다. 우재도 장사하니까 본인도 참여해 보고 싶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우재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고민은 했었는데 그냥 혼자 해보려고. 나야 메뉴도 이미 정했고 또 장사도 계속했으니까. 장소만 정하면 되고.”
하긴 의정이 보기에도 우재는 굳이 누군가에게 조언을 받거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맛있는 음식을 파는 게 더 중요했지.
“그러고 보니 아직 장소 못 정했다고 했지? 어디에 할지 생각해 둔 데는 있어?”
“응, 몇 군데 있긴 해. 일단 아르바이트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정하려고.”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라. 벌써 그런 걸 고민하는구나. 자신은 고작 내일 할 일을 떠올렸을 뿐인데.
의정은 정말 성실하다고 생각하며, 힐끔 우재를 보았다. 좋아하는 예능을 집중해서 보고 있어서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의정은 말없이 맥주를 홀짝이다가 조용히 핸드폰으로 관심을 돌렸다. 단체방에 메시지가 제법 있었지만 대부분 중요하지 않은 잡다한 말들이라 대충 훑을 때였다.
“연구를 안 해서 그래.”
한참 예능을 보고 있던 우재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딴짓하던 의정은 괜히 찔려서 ‘응?’ 하고 얼른 눈을 들었다.
핸드폰을 잠깐 본 사이에 요리 연구가는 다른 식당으로 이동해 있었다. 의정이 조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보고 있자니 우재가 다시 말했다.
“음식이라는 게 그냥 뚝딱 만들면 될 거 같은데 아니거든. 특히 파는 건 집에서 만드는 거랑 또 달라서 문을 열기 전까지도 많은 고민과 테스트가 필요해.”
마치 그 말을 들었다는 듯 TV 속 요리 연구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 음식을 하기 전에 얼마나 많이 먹어보았느냐고. 의정은 덮밥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서 일했다던 우재의 말을 떠올렸다.
“너도 연구 많이 했어?”
알파라면 뭐든 잘하니 크게 노력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타고난 유전자. 우월한 신체와 지능. 남들이 쉬이 따라갈 수 없을 월등한 재능까지.
학교 다닐 때 만났던 몇 안 되는 알파는 그랬다.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고, 모든 스포츠에서도 뛰어났다. 그러니 우재도 그런 줄 알았다.
“응. 연구라기보다는 많이 먹고, 고민하고, 만들어봤지. 덮밥도 종류가 워낙 많으니까. 매일매일 질리지 않고 먹을 게 뭐가 있을지 고민도 했어.”
우재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노력을 말했다. 정말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런 걸 보면 정말 참 멋진 녀석이구나 싶었다. 하루하루가 갈수록 늘 새롭게 괜찮은 면모를 보이기도 쉽지 않은데. 더더군다나 첫인상이 썩 좋지 못했던 우재의 평가가 나날이 좋아지는 게 불안해서 의정은 괜히 핸드폰만 한 번 쓰다듬었다.
“불고기 덮밥을 하겠다는 것도, 그래서였어?”
“응, 가장 익숙하고 맛도 있잖아. 장어나 튀김도 그렇긴 한데, 그런 건 뭔가 별미 같은 느낌이랄까. 난 그런 것보다 익숙하면서 정말 집밥처럼 편히 먹을 수 있는 걸 팔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하는 우재는 자신감도 가득했다.
“사람도 그렇지만 음식도 특별한 분위기를 내는 것보다 편안한 사람과 더 오래 있고 싶은 것처럼.”
“하긴, 그것도 그래. 너, 좀 멋지다?”
대체 저런 말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의정은 좀 존경스러운 눈으로 우재를 보면서 엄지를 세웠다.
“내가 좀?”
우재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거만한 얼굴을 하더니 스스로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들고 있던 캔을 쭉 내밀었다. 건배하자는 의미였다. 의정은 기꺼이 제 맥주를 부딪쳐 주었다.
탕.
가볍게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어. 좀, 대단한 듯.”
정말로.
돌이켜 보면 의정은 자신의 미래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오메가로 발현했을 땐, 모든 게 너무 막연해서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 휴학한 것도, 군대에 간 것도, 본가가 아닌 여기에 온 것도. 당장 앞에 닥친 일만 해결하고 나머지는 계속 미루어두기만 했는데.
“넌 무슨 과라고 했지?”
목울대를 울리며 시원하게 맥주를 마신 우재가 이번엔 대화의 주제를 의정에게 돌렸다.
“응용소프트웨어학과.”
의정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뭔가 척척 계획대로 준비해 나가는 우재를 보니 괜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자신이 철이 없어 보였다. 다행히 우재는 그런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럼 졸업하면 IT 회사로 취직하는 거야? 요즘은 게임이 괜찮던데. 아니면 그쪽으로?”
“글쎄…….”
의정은 맥주를 비우면서 말을 흐렸다. 그것 역시 아직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의정이 관심 있는 건 솔루션 개발이었다. 그렇지만 우재의 말마따나 요즘은 워낙 게임이 강세라 수업이나 과제도 그런 쪽으로 택하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조별 과제는 늘 그런 문제로 고민이었다. 왜 나는 남들과 다른 걸까. 좀 더 대세를 따른다면 좋을 텐데. 이런 것마저 전부 달라져 버린 형질 때문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아니. 난 응용소프트웨어가 더 맞을 거 같아서 생각 중이야.”
그런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우재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원한다면 그걸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애써보지도 않고 포기부터 하는 건 정말이지 아니다 싶기도 하고.
“오, 멋진데?”
“내가 좀?”
의정도 어깨를 들어 위로 올렸다가 내리면서 건배를 청했다. 우재 역시 웃으면서 캔을 톡, 가져다 댔다.
* * *
비가 드문 장마 기간에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휴가를 즐길 사람들에겐 다행한 일인데, 알바생인 의정이나 우재에겐 가장 바쁜 시기가 왔다. 캠핑장은 이제 주말이고 주중이고 할 것 없이 손님이 몰려들었고, 그만큼 의정이나 우재 역시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두 사람의 기상도 빨라졌다. 의정은 5시에 일어나 우재랑 캠핑장을 둘러본 후 관리실로 돌아와 장비를 재정비했다. 그러고는 8시부터 체크인하는 손님을 맞이하거나 문의 전화를 받았다.
오전을 그렇게 정신없이 흘려보내고 나면 깜빡 점심을 거르는 일도 생겼다. 아쉬운 건 우재의 요리를 먹을 기회가 줄었다는 거였다. 둘이 번갈아 가면서 컵라면으로 때울 때도 많아졌다.
오늘은 우재가 먼저 식사하기로 해서 의정이 현장 감독을 자처했다. 계곡이 보이는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잔뜩 젖은 채 물을 헤집고 다니는 피서객을 보니 정말 시원해 보였다. 바람도 불지 않고 습하고 덥기만 하니 저 속에 뛰어들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발만 담가도 좋겠는데 그럴 짬도 없었다.
의정은 실행할 수 없는 일 대신에 손에 쥔 부채만 열심히 흔들었다. 워낙에 더워서인지 얼굴이며 목에 닿는 바람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괜히 눈길이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관리실로 향했다. 그렇다고 내내 더운 데서 고생하다가 식사할 때에야 간신히 찬바람을 쐬고 있을 우재보고 빨리 나오라고 빌 수도 없었다.
의정이 속으로 한 말을 들었을까.
“의정아, 나 왔어. 더운데 수고했어. 얼른 들어가 봐.”
펄럭거리면서 부채질을 하고 있으려니 커다란 그림자가 생겼다.
“뭘 벌써 왔어. 좀 더 쉬다가 오지?”
의정은 밥 먹으러 간 지 10분도 되지 않아 돌아온 우재를 못마땅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기껏 시원한 데를 양보해 줬으면 좀 즐기다 올 것이지. 그 마음을 너무 몰라주었다.
“괜찮아. 에어컨 빵빵하게 쐬고 시원한 커피까지 마시고 왔으니까. 얼른 들어가 봐, 너도 밥 먹어야지.”
“그래. 알았어.”
의정은 대답하면서도 부채를 우재가 서있는 방향으로 돌려 팔랑팔랑 흔들기만 했다. 우재는 미지근하게 와 닿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시원하네. 좋다.”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앉은 의정의 팔을 붙잡아 그대로 당겼다. 의정은 버티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이어진 팔에는 후끈한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 수고하고.”
의정은 마치 인수인계하듯 부채를 건네면서 슬쩍 몸을 틀었다. 자연히 우재의 손도 떨어져 나갔다. 본인이 의도한 건데 왜 그게 또 아쉬운지 모를 일이었다.
“어, 너도 맛있게 먹어.”
우재는 의정이 그랬던 것처럼 부채를 펄럭였다. 돌아선 의정도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어쩐지 등이 간지러운 기분이어서 슬쩍 돌아보았다. 우재가 한낮처럼 환히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있었다. 이제는 숫제 목덜미며 가슴 언저리까지 간질간질해졌다.
의정은 얼른 몸을 돌리고 다리를 건너 관리실로 뛰어갔다. 그거 잠깐 움직였다고 그새 목덜미며 뒷머리에 땀이 축축했다. 어쩐 일인지 심장도 평소보다 더 거세게 박동하는 듯했다.
아니다. 이건 전부 달려온 탓이었다.
의정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괜스레 관리실 문을 힘주어 열어젖혔다. 순간 냉기가 훅 끼쳐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컵라면 하나와 김치 통 그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놓은 수박이 눈에 들어왔다.
의정은 땀이 밴 목덜미를 한 번 쓸고는 메신저를 열어 우재의 이름을 클릭했다.
―잘 먹을게.
읽었다는 표시가 뜨자마자 우재에게 바로 답이 왔다.
―어, 맛있게 먹어.
별거 아닌 대답인데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의정은 빙긋이 웃으며 라면에 물을 부었다. 그러곤 익기를 기다리면서 관리실 여기저기를 훑었다. 고작 10여 분일 뿐이니 그다지 달라질 건 없을 테지만…….
바닥으로 막 시선을 내린 의정은 납작한 가죽 지갑 하나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손님이 흘린 건가?
“아차! 라면.”
의정은 지갑을 열어보려다가 뒤늦게 물을 부어놓은 라면을 떠올렸다. 지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둘러 뚜껑을 열었다. 젓가락을 두어 번 놀리며 면발을 흡입했다. 뜨거운 걸 잘 먹지 못하는 터라 비우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국물까지 마시고 나서 다시 지갑으로 눈을 돌렸다. 반 접힌 것을 펼치니 달랑 카드 한 장 끼어있는 게 보였다. 하긴 요즘 현금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지. 의정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시선을 움직이다가 본 건, 다름 아닌 신분증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반듯반듯 뚜렷하게 잘생긴 우재가 거기 있었다.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나 보네. 그러니까 이렇게 지갑이나 흘리고 다니지.”
의정은 실실 웃으면서 우재를 놀려줄 생각을 하며 신분증을 살피다가 눈을 크게 떴다.
“…….”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 시선을 다른 데 돌렸다가 재차 확인했다. 송우재라는 이름 밑에는 지갑의 주인이 언제 태어났는지, 성별은 어떻게 되고, 형질은 무엇인지, 또 본적이 어디인지를 나타내는 열세 자리 일련번호가 있었다.
그런데 생년월일 중에 생년을 나타내는 숫자가 달랐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자신보다 하나가 적은.
“이 자식.”
의정은 탁, 소리 나게 지갑을 닫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관리실을 빠져나와 득달같이 캠핑장으로 달려갔다. 우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알고서 피한 건 아닐 텐데 지금은 그것도 못마땅했다.
의정은 둥그런 눈을 세모꼴로 만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우재는 텐트를 치고 있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입가에 띤 미소가 어찌나 상냥한지 그걸 보자니 괜히 더 심술이 났다.
잔뜩 노려보고 있으려니 시선을 느꼈는지 우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손님에게 무어라 말하고 의정에게 다가왔다.
“왜? 뭐 두고 간 거 있어?”
의정은 대답하지 않고 뻔뻔한 얼굴에 지갑을 쫙 펼쳐 들이밀었다. 의정을 보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마주친 눈동자는 어리둥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직도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는 듯했다. 의정에겐 그것마저 뻔뻔한 시치미로 보였다.
“이거 안 보여?”
의정은 신분증에 적힌 숫자를 탁, 짚었다. 손길 하나에도 감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봐!”
그제야 우재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의정은 더더욱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생년월일을 읊으며 몰아붙였다.
“너 첫날에도 나한테 오메가니 뭐니 하면서 무례하게 굴어놓고, 정작 저는 나이를 속였다, 이거지?”
“속이다니. 아냐, 그런 거. 형이 그날 전화했을 때 나랑 생일이 같은 동갑이 일하러 온다고 알려줘서 그런 거지.”
의정은 우재가 처음 만났던 날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형한테 듣기로 동갑이라고 했다고. 그래, 어쩌면 그럴 거라는 생각은 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지금까지 겪어본 우재는 사교적이긴 해도 무턱대고 말을 놓자, 말자 할 성격은 아니었으니.
“미안해. 나는 정말 그런 줄 알았어. 그리고 오메가냐고 물었던 건…….”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사과하던 우재가 답지 않게 말을 망설였다.
“뭐? 왜?”
이미 오해라는 걸 안 상황이라 잔뜩 배 속을 채우던 열기는 가라앉았음에도 의정은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가시 돋친 모습을 보였다. 나이와 상관없는 말인데도 오메가니 뭐니 하면서 걸고넘어진 건 우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어서였다.
혹시 우재에게 자신이 오메가라는 단서를 흘린 적이 있는지. 아니면 그가 무언가 눈치챌 만한 게 있었는지.
아무래도 첫날 대뜸 자신에게 오메가냐고 물었던 게 계속 신경 쓰여서, 애써 괜찮은 척해도 문득문득 불안하곤 했다. 우재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우재에게 머무는 시선이 길어질수록, 그에게 향하는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낄수록.
내가 널 속이고 있으니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너와의 간격을 띄울 수 있는 게 필요했다.
“그냥. 네가 너무……. 그리고…….”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의정은 상념을 끊고 우재를 보았다. 무어라 듣긴 들었는데, 딴짓하느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물으려 했다. 그보다 우재가 뒷말을 내놓는 게 먼저였다.
“그럼 ‘의정 형’이라고 부를까, 지금부터?”
지금 뭐라고?
잔뜩 흔들리는 눈을 보면서 우재는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의정 형.”
그게 뭐라고. 고작 이름에 형이라는 글자 하나 붙었을 뿐인데. 성도 없이 이름만 불렸을 때처럼, 의정의 심장이 눈치 없이 설레발쳤다.
형, 형이라는 소리에 그런 거다. 그저 다른 이유는 없었던 거다. 기습적으로 호칭을 바꾸는 우재 때문에 당황해서 그런 거라고.
“됐, 됐어. 그냥 전처럼 해.”
의정은 괜히 떳떳지 못한 기분에 마주친 시선마저 뚝 바닥으로 떨구었다. 분명 거리를 벌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형이라고 불리니 그건 또 싫었다. 다행히 우재는 의정의 이기심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 그래도 돼? 그럴까, 의정아?”
우재의 어투가 다시 달라졌다. 한껏 다감해진 목소리였다.
의정은 멍해진 눈을 들었다. 눈앞의 알파는 여전히 한낮의 볕처럼 환하고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여름 더위 때문일 거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온몸에 열기가 차오를 리 없었다. 동시에 욱신욱신한 아픔이 느껴졌다. 대체 왜 이리 어수선한지 모를 일이었다.
우재는 사과의 뜻으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워낙 바쁘기도 하고, 야간 순찰까지 하느라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는 날이 부지기수면서 뭘 만들겠다는 건가 싶었는데, 8시에 퇴근하는 의정보다 먼저 숙소로 돌아온 우재는 작은 밥상이 꽉 차도록 식사를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헉, 엄청난데.”
의정은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 거기엔 손바닥보다 큰 등심 스테이크와 함께 버섯과 아스파라거스, 단호박 샐러드가 놓여있었고, 그 외에도 자색 피클과 길고 볼록한 디자인의 잔도 함께였다. 그야말로 레스토랑에서나 볼 법한 비주얼.
“어서 와.”
“이걸 언제 다 했어?”
그것도 이런 재료는 또 어디서 구한 것인지, 신기하다 못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얼마 안 걸렸어. 앉아. 오늘은 맥주 대신 이거 마시자.”
우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음식 구경에 빠진 의정을 보곤 뿌듯해하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굴며 비장의 무기를 선보였다. 와인이었다.
“웬 거야?”
의정은 우재에게 병을 받아서 라벨을 유심히 보았다. 온통 외국어로 적혀있어서 알 수 있는 정보라곤 알코올 도수뿐이었다.
“제대로 대접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준비했는데, 혹시 와인 못 마셔?”
우재가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의정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와인 도수는 13.5도. 맥주보다는 높았으나 소주보단 괜찮았다. 그러니 취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실은 술이라곤 맥주와 소주를 마셔본 게 전부고 그나마도 소주는 잘 못 마셔서 맥주를 더 선호하지만, 굳이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음식을 준비한 우재의 성의도 있고 또 지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다가 의정은 괜히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이리 앉아. 와인 따라줄게.”
우재가 그림같이 웃으며 의정에게 자리를 건넸다. 그러고는 병을 들었다. 우재는 음식 만드는 손놀림만 예사롭지 않은 게 아니었다. 꽉 밀봉된 병을 개봉하는 모습도 남달랐다.
의정은 회오리 모양의 도구를 움켜쥔 단단한 손가락을, 힘줄이 선 손등을, 약간 비틀린 손목과 파르라니 돋아난 핏줄을, 능숙하게 회전하는 팔을,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어깨를, 어깨와 이어진 목 근육을 차례로 보았다.
펑.
멍하니 우재를 관찰하던 의정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어찌나 요란한지 심장까지 쿵쿵거리면서 요동치고 있었다.
“놀랐어?”
의정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목덜미를 긁적였다. 차마 널 훔쳐보다가 그랬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우재는 속도 모르고 마주 웃으며 의정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건배할까, 의정아?”
잔을 쥔 우재가 의정을 불렀다. 평소랑 다른 바가 없는데, 목소리가 묘하게 감기듯이 들려왔다. 아마 마셔보지 못한 술을 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 걸 터였다. 의정은 앞에 놓인 유리잔을 들었다.
챙, 하고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의정은 깨물면 파삭 하고 부서질 것 같은 얇고 투명한 표면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처음 마시는 와인은 견과류처럼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났다.
“어때. 마실 만해?”
“어, 맛있네.”
늘 그렇듯 사소한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했다. 비가 오지 않는 마른장마, 내일 있을 예약 손님, 일기 예보, 부쩍 많아진 모기 그리고 어쩌다가 나이를 착각했는지.
“근데 정말 생일이 같구나?”
“안 믿었던 거야?”
“아니, 뭐.”
실은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신에 의정은 그저 슬며시 웃었다. 그러고는 슬쩍 벽에 걸어놓은 큼지막한 달력으로 눈을 돌렸다.
의정의 생일은 막 봄이 시작되는 3월. 당연히 우재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생일에 우재와 이렇게 마주 앉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로 생일 축하해 주자. 선물로 어떤 거 해줄지 미리 고민해 둬?”
“앞으로 너 하는 거 봐서.”
어차피 의미 없는 소리겠으나 같이 생일을 보내자는 말에 기분이 조금 들떴다. 아니다. 술 때문인 거지, 들뜨기는 무슨. 그러면서도 의정은 그때쯤이면 장사하고 있을 우재를 위해 앞치마나 사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나서 뒷정리를 마친 후 맥주를 땄다. TV를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 야구 하이라이트를 방송하는 스포츠에 고정해 두었다. 낮에 뭔가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한바탕 다투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평온한 시간이었다.
의정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맥주를 마셨고, 우재는 피곤했는지 바닥에 눕다시피 한 채 TV를 시청했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어두어서인지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며 밤 벌레가 날개를 비비며 우는 소리가 TV 소리에 섞여서 간간이 들려왔다.
의정이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막 캔을 내려놓으려던 그때였다. 옆으로 누워있던 우재가 빙그르르 몸을 돌리는 듯하더니 의정의 허벅지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의정은 너무 놀라서 입만 멍하니 벌린 상대로 딱 굳어버렸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색…색…….
곧이어 차분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우재는 의정의 허벅지를 베개로 착각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린 거 같았다.
의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잔뜩 숨을 죽이고 잠이 든 우재를 내려다보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눈꺼풀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게 불편한지 우재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의정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손가락을 움질움질했다. 그러다 결국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호흡마저 꾹 내리누르고 신중하게 다가가 잠을 방해하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고작 몇 가닥 되지도 않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그만 떼야 하는데 이마에 닿은 손끝은 물러설 줄 몰랐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는 살금살금 매끄러운 피부를 쓸다가 거두었다. 우재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편하게 바뀌었다.
당장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의정은 캔을 쥐고 TV로 눈을 돌렸다. 그제야 제가 숨마저 잔뜩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조심조심 뱉어내는 호흡이 왜인지 여름밤 공기처럼 습하고 더웠다.
TV 화면 속에선 선수들이 실수하거나 멋지게 경기를 풀어가는 영상이 나왔다. 신나는 음악과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마저 신경 쓰였다.
의정은 혹시 몰라서 볼륨도 줄였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벅지에 닿은 온기만 존재감을 키웠다.
더워서 그런가.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도 목이 마른 기분이었다. 의정은 아랫입술을 핥고는 캔에 입을 댔다.
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끌리기 때문이라는 걸.
* * *
“어디 가?”
이른 시간이었다. 날은 밝았으나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이 더 어울릴 5시쯤, 의정은 잠도 깨지 않은 비몽사몽 상태로 숙소를 나섰다. 팔은 우재에게 붙들린 채였다.
둘은 펜션 단지를 벗어나 다리를 건너 캠핑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좋은 데 알려줄게.”
“그러니까 거기가 어딘데.”
우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의 귀중한 새벽잠을 앗아간 주제에 얼굴 가득 미소가 걸려있었다. 늘 환하던 웃음에는 약간의 장난기마저 보였다.
“비밀 장소?”
그건 또 뭐야. 의정이 도통 알 수 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해하거나 말거나, 우재는 성큼성큼 걸음을 뗐다.
캠핑장을 지나 좀 더 산속으로 들어오니 이곳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울창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비쳤다.
곧이어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쓸고, 청량하고도 맑은 공기가 숨을 편하게 만들었다. 땅은 폭신폭신했고, 발목을 스치는 풀잎에는 촉촉함이 묻어났다.
마치 어릴 적에 뛰어놀던, 부모님이 운영하는 묘목 농원을 떠올리게 했다. 의정의 표정도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우재는 힐끗 뒤를 돌아보고 슬쩍 웃었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지.
얼마나 걸어갔을까.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 폭포라도 있는 걸까. 의정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우재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백색 바위가 폭포와 물웅덩이를 두 손으로 감싸놓은 듯한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와, 여기 어디야.”
의정이 우뚝 멈춰 서며 감탄을 터트렸다. 폭포는 높지 않았는데 주위에 펼쳐진 풍경이 정말 예뻤다. 바위 위로는 크고 작은 나무 여러 그루가 가지를 뻗어 하늘을 가려 그늘을 만들었는데, 바람에 나뭇잎이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수면 위로 반짝이면서 그림을 그렸다.
“비밀 장소.”
주변을 살피던 시선이 우재에게 향했다. 우재는 뿌듯한 얼굴로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가득 찰랑거리는 웅덩이를 가리켰다.
“들어가 봐. 더위도 단번에 가실 테니까.”
아직 새벽이라거나 덥지 않다는 말 대신 의정은 고분고분 물가로 다가갔다.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의정은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물에 슬쩍 발을 담갔다.
“헉, 완전 차가운데?”
“그렇지?”
의정은 눈을 반짝이면서 그대로 발목까지 푹 들어갔다. 살갗에 으스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물을 휘휘 저으며 좀 더 안쪽으로 진입하고 두 손으로 가득 떠서 허공에 날려보았다. 투명한 물방울이 햇볕에 반짝이면서 후드득 쏟아졌다.
한참 그렇게 장난치던 의정이 휙 고개를 돌렸다. 우재는 팔짱을 낀 채 물가에 서있었다.
“뭐 하고 있어. 너도 들어와.”
바람이 불었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순간 햇살이 그대로 투과해 들어왔다. 빛은 수면을 반사하면서 아이처럼 웃으며 손짓하는 의정을 밝게 비췄다.
바람결에 은은한 향마저 풍겨오는 듯했다. 여린 풀에서 느껴지는 촉촉하고도 풋풋한. 눈을 감고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은밀한 향이.
잘생긴 눈이 크게 벌어졌다가 차츰 본래대로 돌아왔다. 이윽고 우재는 발을 떼고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빛 속에서 웃고 있는 의정을 향해서.
* * *
아,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싶다. 너무 시원하고 평화로웠다. 대체 이런 장소를 왜 이제야 알려준 거야. 바빠지기 전에 알았다면 더 알차게 쓸 수 있었을 텐데.
의정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물 위에 둥둥 뜬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기 손처럼 아기자기한 나뭇잎 사이로 빛이 갈라져 들어왔다. 눈이 부셔서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는데 돌연 팔뚝이 따끔했다.
“아.”
얼른 팔을 비틀어서 통증이 느껴진 부위를 보았다. 흰 살결에 붉은 자국이 딱 도드라졌다. 그 잠깐 사이, 모기가 물고 도망친 모양이었다.
“물렸네.”
옆에 있던 우재가 아무렇지도 않게 의정의 팔을 붙들었다. 딴에는 상태를 확인해 주려는 행동이었을 터였다.
“그런가 봐.”
의정은 태연한 척하며 슬그머니 팔을 뺐다. 얼마나 잡고 있었다고 그새 옮았는지 우재의 온기가 느껴졌다.
얼른 물속에 팔을 집어넣고 크게 숨을 마셨다가 훅, 하고 거칠게 뱉었다. 차가운 물에 들어갔다가 나와서인지 잠시 술렁거리던 것이 가라앉아 갔다.
“그만 돌아가자.”
아까는 분명 종일 있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사이에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모기에게 물린 데가 팔뚝이 아니라 어디 다른 곳이라도 되는 듯 계속 따끔거렸다.
다행히 우재는 의정의 변덕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휘적휘적 팔을 저으며 뭍으로 나가는 의정을 따라 몸을 일으켰을 뿐.
밖으로 나와보니 여기저기 꼬리가 새까만 산 모기 여러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분명 없었는데 언제 이렇게 많이 꼬였는지.
그런데 알고 보니 모기는 팔만 물어뜯은 게 아니었다.
“한두 군데가 아니네.”
숙소로 돌아와서 의정의 몸을 보던 우재가 그리 말했다. 피부가 하얀 편이라 그런지 붉은 자국은 유독 눈에 띄었다.
물론 의정만 피를 헌납한 건 아니었다. 우재 역시 팔뚝이며 종아리, 발등에 물린 자국이 보였다. 그래도 의정처럼 티가 나지는 않았다.
“나 여기, 여기 좀 발라줘.”
우재가 제 몸에 남긴 흔적을 두고 무슨 감상을 남기든 의정은 물파스를 들고 한참 씨름하다가 우재에게 도움을 청했다. 눈에 보이는 곳은 거의 발랐는데, 아무리 팔을 뻗어도 가려운 부분까지는 도저히 닿지 않았다.
“어.”
우재는 물파스를 건네받고 의정의 뒤에 쭈그려 앉아 상의를 걷어 올렸다. 마른 등을 타고 자란 뼈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그 선을 따라 옷을 추켜올렸다. 잡티 없이 하얀 피부 위에 콕 하니 찍힌 불그스름한 자국이 보였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날개뼈 바로 아래였다.
모기가 물고 간 자리라는 걸 아는데 왜 입 안에 침이 고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재의 눈빛이 또 묘하게 바뀌었다.
“뭐 해?”
기다리다 못한 의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재는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물파스로 눈을 돌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물파스 대신에 검지를 혀로 가져갔다. 촉촉하게 젖은 검지가 모기가 물고 간 자리에 닿았다.
의정은 움찔하고 등을 떨었다. 시원해야 할 물파스가 왜 미적지근하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이미 여기저기 살에 닿았으니 그러려나 싶으면서도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런 동요를 우재는 몰랐으면 했다.
“간지러워?”
그런 의정의 마음과 달리 우재는 일부러 봉긋이 올라온 살 주변을 빙그르르 문지르며 물었다.
“아, 하지 마!”
원래도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의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고작해야 물린 자리에 약을 바르는 것뿐인데.
간지러움과 왜인지 모를 부끄러움이 자꾸만 높아갔다. 참다못한 의정은 얼른 몸을 비틀어서 도망치려 했다.
“이리 와. 다른 데도 발라줄게.”
우재가 얼른 의정의 어깨를 붙들고 물파스를 들었다. 입가에는 어쩐지 짓궂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야! 됐거든!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의정은 질색하면서 얼른 일어섰다. 다행히 잡힌 팔은 풀렸으나 우재는 단단히 약점을 잡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치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물파스를 무기로 공격하는 우재와 질겁을 하고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의정.
짓궂은 장난 끝에 먼저 바닥에 널브러진 건 의정이었다.
“하아, 하아, 와… 힘들어!”
체격도, 체력도 완벽한 패배였다. 물론 그렇다고 패배감을 느낄 일은 아니었다.
의정은 바닥에 누운 채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재도 벽에 기대어 앉았다. 무릎을 세운 채 얹은 손에서는 모기약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우재의 시선은 회전하는 모기약을 향했다가 티셔츠 사이로 보이는 의정의 납작한 배에 머물렀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정작 의정은 여전히 다스리지 못한 웃음과 씨름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 * *
그날 이후로 의정은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비밀 장소를 찾았다. 한낮에 찾아가도 그곳은 아침처럼 시원해서 물에 들어가 있으면 금방 더위가 식었다. 물론 첫날의 경험으로 기피제와 모기향을 챙겨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정은 잠이 올 것 같은 나른한 기분으로 여유를 즐기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우재가 서있는 게 보였다. 나무가 만들어낸 그림자 때문인지 분위기가 평소와 좀 달라 보였다.
“왔어?”
의정의 알은척에 우재는 대답도 없이 걸음을 뗐다. 어두웠던 얼굴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밝아졌고, 물가에 가까워졌을 때는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왔다.
역시 그늘 때문이었나 보다.
“입술이 파래.”
의정을 가만히 내려다본 우재가 눈썹을 모으듯 찡그렸다.
“그래?”
의정은 못마땅해하는 우재를 올려다보며 민망한 얼굴로 엄지로 제 입술을 문질렀다.
“대체 얼마나 여기 있었던 거야.”
불쑥 다가온 손이 엄지가 물러간 자리에 닿았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접촉에 도리어 의정은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뻑였다. 아니,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우재에게 팔이 붙들리고 그대로 물 밖으로 끌려 나갔다.
촤악.
거친 소리와 함께 후드득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건 마치 한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요란스러웠다.
우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의정을 보았다. 옷을 입고 그대로 물에 들어간 터라 흰 티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어 고스란히 속살이 비쳤다. 우재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정은 두 팔로 제 어깨를 마구 비벼댔다.
“추워?”
“어. 나오니까, 좀.”
우재는 망설이지 않고 제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서 의정의 어깨에 걸쳤다.
“아냐. 괜찮아.”
“괜찮긴. 여기 닭살도 잔뜩 돋았거든.”
우재는 물러나려는 의정의 팔을 단단히 잡고는 소름을 쓱 쓸었다. 의정으로선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는데 왜 더더욱 바짝 긴장하게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근데 여긴 웬일이야? 시간 괜찮아? 너도 좀 쉬려고?”
의정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러곤 슬그머니 우재의 팔을 떼어냈다.
“어, 너 맨날 푹 젖어서 오는 거 보니까 부러워서.”
“그래? 하긴 내가 좀 양심이 없었다. 좋아. 내가 대신 지키고 있을게. 너도 더위 좀 식히고 와.”
의정이 인심 쓰듯 말하며 씩 웃었다. 평소에도 맑아 보이는 얼굴이 물기 때문인지 유독 더 윤이 나는 듯했다.
우재의 가만한 시선이 계속 의정에게 머물렀다. 그쯤 되니 어색해지는 건 의정이었다. 의정은 더 버티지 못하고 흠흠, 헛기침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우재는 물 발자국을 남기며 멀어지는 의정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또 싱그럽고도 풋풋한 여름 냄새가 풍겨왔다.
“의정아.”
불현듯 우재가 멀어지는 의정을 불렀다. 막 비탈을 내려가던 의정이 우재를 돌아보았다. 불투명하게 비치는 옷 안으로 적당하게 굴곡진 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왜?”
기껏 사람을 불러놓고 왜 말이 없는지. 의정이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옷 제대로 입고 가. 아직 떨고 있잖아.”
“잔소리는.”
의정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우재가 어깨에 걸쳐주었던 옷에 팔을 꿰었다. 그러곤 도망치듯이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고 있노라니 몸이 도로 후끈해졌다. 아니, 그건 더위 때문이 아니었다. 의정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어느덧 멈춰버렸다. 동시에 꾹꾹 담아두었던 기억이 우후죽순 치고 올라왔다.
제 입술을 만지던 손길과 잡아끌던 팔과 상의를 올리며 드러났던 상체.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의정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졌다. 심장이 발딱거리고 손끝과 발끝도 뜨거워졌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어떻게든 열기를 몰아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도리어 더 의식되고 말았다.
알파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오메가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좀 더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오메가라는 걸 숨기고 구한 자리였다. 밝혀지면 그건 더 곤란했다.
“하아아…….”
의정은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한숨으로 흘려보내며 다시 걸음을 뗐다.
어차피 드러내지도 못할 거였다. 그러니 끝까지 모른 척해야 했다.
* * *
7월 성수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정신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그건 그것대로 의정에게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어떻게 우재를 피해야 하나 줄곧 고민했을 테니까.
우재가 야간 순찰까지 하느라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오는 것마저 반가웠다. 그전에 얼른 잠들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
그런데 오늘따라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퇴근길에 우민에게 붙들려 소주도 얻어 마셨는데도 그랬다.
어두운 천장을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의정은 잠들지 않은 걸 걸릴세라 얼른 눈을 감았다. 곁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의정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우재는 의정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지 살금살금 걸어서 곧장 욕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의정은 욕실만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더 자기는 그른 거 같았다.
벽에 등을 붙이고,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얹은 의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며칠 사이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켜갔다.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왜 더더욱 생각이 나는 건지.
뜨거운 볕에 몸이 조금씩 타듯이 어느 순간부터 우재의 모든 행동이 의정을 변하게 했다. 그저 살갗을 데우는 햇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속을 달구고, 피부색까지 바꾸는 열기였다. 그걸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니.
욕실 안이 조용해지더니 곧 우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정은 숨을 덜컥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밖으로 나온 우재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머리에 수건만 하나 얹고 있었다.
“어? 안 잤어?”
불을 끈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우재는 바로 눈치챘을지 몰랐다. 의정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또 얼마나 어쩔 줄 모르고 저를 보는지.
우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냉장고로 향했다. 주홍빛이 흘러나오며 우재의 맨몸을 환하게 비췄다. 의정의 시선은 그곳에 붙박여 떨어질 줄 몰랐다. 바닷물이라도 마신 듯 자꾸만 입이 말랐다.
“나 맥주 하나 마실 건데. 너도 줄까?”
반가운 소리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목마름을 어떻게든 해갈하고 싶었다.
“어.”
고작 한마디 뱉는데도 목이 졸린 듯한 소리가 나왔다. 의정은 꿀꺽, 침을 삼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벽에 걸린 티셔츠와 바지를 낚아채어 우재에게 건넸다. 더 훔쳐보다간 괜히 사고라도 칠 거 같았다.
“입어.”
“아아, 고마워.”
우재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받아 들고 입기 시작했다. 의정은 그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탁, 소리와 함께 어둠이 물러가고 방이 온통 환하게 변했다. 다행히 우재는 옷을 전부 껴입은 상태였다.
“너, 요즘 밥 제대로 안 먹지?”
우재가 맥주 캔을 내밀면서 의정의 몸을 쓱 훑었다.
“어?”
혼자서 안도하던 의정은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멀거니 우재를 바라보았다.
“이거 봐라. 배가 아주 바짝 달라붙었잖아.”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손이 배에 닿았다. 의정은 또 호흡을 잃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우재는 어색하게 웃는 의정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스스로 제대로 된 알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매력적인 페로몬을 풍기는 오메가가 곁에 있어도 길가의 꽃 냄새를 맡듯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그러니 평생 누군가를 각별하게 생각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의정은 오메가가 아니라고 했다. 몇 번 페로몬을 방출하면서 테스트해 본 결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간 걸까.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만들어준 음식을 먹는 모습, 본인이 만든 정리함을 보면서 뿌듯해하는 얼굴에 먼저 눈이 갔다.
의정이 짓는 표정, 행동이 하나씩 하나씩 제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가랑비에 옷이 젖어 들듯이 서서히 윤의정이라는 존재가 스며들었을 뿐.
그게 페로몬 때문이 아니라 가까이 지내면서 차근차근 쌓이기 시작한 감정이라서 자꾸만 더 생각하게 되었다.
“밥 굶지 마.”
우재는 아직 이게 어떤 감정인지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단순한 호감인지, 아니면 정말 어떤 마음이 있는 것인지.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의정이 곁에 있었으면 한다는 것.
“어.”
“피하지도 말고.”
“…….”
어떻게 알았을까. 일부러 그랬다는 걸. 의정은 맥주를 마시는 척 제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우재는 의정의 순순한 대꾸에 만족했는지 씩 웃으며 일어섰다. 이 늦은 시간에 또 뭘 하려나 했더니 냉장고에서 재료 몇 개를 고르고, 수납장을 열어 라면을 꺼내고는 뚝딱 음식을 만들어 왔다. 간장과 약간의 해산물, 싱싱한 채소가 들어간 볶음면이었다.
“이게 뭐야?”
“팟타이. 우리나라식으로 하자면 볶음 국수야. 태국 음식인데 먹어봐, 맛있을 테니까.”
짧게 설명한 우재가 의정 앞에 작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어, 잘 먹을게.”
의정은 얌전히 대답하면서 포크로 면을 쿡 찍은 후에 앞 접시에 가득 떴다. 달고 짠 맛이 채소와 어우러지니 이것 또한 별미였다. 분명 점심에도 라면, 저녁에도 라면으로 해결했는데 이건 또 왜 이렇게 맛있는 건지.
“맛있네! 야, 너랑 살면 진짜 굶어 죽진 않겠다.”
“응.”
농담처럼 던진 말이 무뚝뚝한 한마디로 돌아왔다. 의정은 어? 하는 얼굴로 우재를 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순간 오고 간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른 먹어.”
우재가 의정의 접시에 팟타이를 가득 덜어주었다. 그러곤 맥주를 마셨다. 위로 고개가 들리면서 길어진 목에 울대가 도드라졌다.
“어.”
의정은 면으로 눈을 돌리고는 얼른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시야를 사로잡은 우재의 목 때문에 짧은 의문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긴 어차피 실없이 던진 말이었으니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