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3/7)

2장

의정은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아주 잠깐 잠이 든 것 같은데 창밖으로 날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옆자리를 보았다. 우재는 여전히 세상 편안한 얼굴로 쿨쿨 잠들어 있었다.

그럼 우재가 부른 건 아닐 텐데.

그때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의정은 핸드폰을 낚아채고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우재는 깨지 않았다. 뜻밖에도 발신자는 우민이었다. 의정은 통화 버튼을 터치하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의정아, 혹시 깼니? 괜찮으면 밖으로 나와줄래.

막 귀에 핸드폰을 가져가는데 우민이 대뜸 그렇게 말했다.

“네.”

의정은 짧게 대답하고 곧바로 문을 열었다. 우민이 초조한 얼굴로 손을 모아 쥔 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보였다.

“우민 형, 무슨 일이 있어요?”

의정도 덩달아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의정아, 이른 시간에 미안한데 잠깐만 도와줄 수 있을까?”

의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민은 곧바로 몸을 돌려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펜션에 있는 관리 사무실이었다. 우민은 의정을 컴퓨터가 놓인 책상으로 안내했다.

“새벽에 임시 점검을 한다고 떴었거든. 그러고 나서는 예약 페이지만 열려고 하면 이렇게 메시지가 뜨고 멈춰버리는 거야.”

우민은 반쯤 울상이 된 얼굴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의정은 컴퓨터로 다가가 흰 화면에 뜬 오류 메시지를 쭉 훑었다. 이건 여기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혹시 관리해 주는 업체랑 통화하셨어요?”

“응. 방금 했는데, 문제를 파악 중이니 기다려달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얼마나 걸리냐니까 최소 반나절이라고 하네. 근데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혹시 캠핑장 예약 사이트도 이런 상황이에요?”

“응.”

펜션이라면 그래도 체크아웃 전까지만 해결해도 괜찮겠지만 캠핑장은 체크인이 8시부터였다. 그나마도 지금은 한창 손님이 몰리는 성수기라서 이른 아침부터 문의도 끊이질 않았다. 우민이 일어나지도 않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그 때문인 듯했다.

“제가 통화해 볼게요. 혹시 업체 연락처 있으면 주시겠어요?”

“정말? 고맙다, 의정아. 진짜 고마워. 여기 있어.”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게 아닌데 우민은 한결 안심한 얼굴로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의정은 곧바로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 직원과 통화하면서 오류로 의심되는 부분을 말하고, 양해를 구해서 FTP 서버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오류가 난 페이지를 열었다.

군대에 있으면서 아예 손을 떼고 있었던 터라 처음에는 조금 헤매긴 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오히려 한동안 멀리했던 소스가 눈에 보이니 반갑기까지 했다. 어느덧 의정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창으로 아침 햇살이 살그머니 스며들어 왔다. 푸른색을 띠던 빛은 어느덧 크림색으로 바뀌어 실내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컴퓨터 앞에 앉은 의정의 반듯한 어깨와 등에도 내려왔다. 제 몸을 어루만지는 햇살을 모르는 듯 의정은 모니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됐다.”

의정이 빠르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며 탄성을 질렀다. 악령처럼 계속 열리던 오류 메시지가 비로소 사라지고 예약 페이지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짝짝짝.

의정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손뼉을 치는 소리에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우재가 입구에 기대어 선 채 요란하게 손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언제 왔어?”

“아까.”

우재가 짧게 대답하고는 기댄 몸을 바로 세우고 가까이 다가와 의정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보았다.

실은 30분도 전에 왔는데 의정이 워낙 집중하고 있어서 말을 걸지 못했다. 물가에서 온몸으로 햇볕을 받던 의정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였는데, 컴퓨터에 앉아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엔가 야근하느라 피로에 지친 네게 맛있는 식사를 주러 찾아갔을 때, 내가 볼 풍경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너 진짜 실력 좋다.”

눈꺼풀에 나붙은 상상을 떼어내며 우재는 부러 의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뭘, 이런 걸. 그냥 업데이트하기 전의 거랑 비교해서 바꾸기만 한 건데.”

의정은 제 어깨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애써 모른 척하면서 키보드를 눌렀다. 화면이 한 번 더 새로 고침이 되면서 예약 페이지가 떴다. 오류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확실하게 해결된 듯했다.

“일어나자마자 고생했어, 의정아. 가서 아침 먹자. 오늘은 우민 형이 준비했어.”

우재가 의정을 칭찬하며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단단하면서도 어딘지 부드럽게 느껴지는 곡선은, 왜인지 조금 떨린 듯했다.

의정은 여전히 의식한 티도 못 내고 모니터만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다행히 어색함은 업체에서 걸려온 전화로 사라졌다.

“잠시만. 통화 좀 하고 갈게.”

의정은 핸드폰을 귀에 대며 의자를 살짝 돌렸다. 자연히 어깨에 올라가 있던 우재의 손도 사라졌다. 우재는 제 빈손을 한 번, 전화하는 의정을 한 번 보고는 아무것도 없는 손가락을 느리게 움켜쥐었다가 폈다.

의정은 우재와 서너 걸음 떨어져 통화했다.

―학생, 정말 고마워. 덕분에 우리도 곤란한 상황을 면했네.

“아닙니다.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죠.”

―시간 될 때 꼭 연락해 줘. 밥이든, 술이든 살 테니까.

“네. 그럴게요.”

관리 업체 직원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면서 의정의 연락처를 받아갔다. 의정으로서는 민망할 정도의 칭찬이었다.

우재에게 말했던 대로 기존 소스와 바뀐 소스를 비교해서 오류를 찾아낸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보답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덕분에 의정도 오랜만에 손을 대면서 잊었던 감각도 살려볼 수 있었으니.

“진짜 고맙다, 의정아. 네 덕분에 살았어.”

칭찬 릴레이는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도 이어졌다. 오늘은 특별히 우민이 식사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무려 비싸디비싼 갈치였다. 우민은 가장 실하고 빛깔이 좋은 갈치를 의정 앞에 내려놓았다.

“운 좋게 문제점을 찾은 건데요.”

“운은 무슨. 업체에서는 끙끙거리면서도 발견 못 해서 해결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너 아니었으면 아직도 그랬을걸.”

우민은 민망하게 웃는 의정을 보다가 불쑥, 한 손을 제 허리에 얹으며 우렁차게 말했다.

“좋아! 오늘 저녁은 바비큐다!!”

생선을 바르는 건지, 헤집는 건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젓가락으로 살을 분해하던 의정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우민을 보았다. 그리고 그사이 깔끔하게 가시를 바른 우재는 의정 앞에 놓인 접시를 가로채 제 갈치와 위치를 바꾸었다.

의정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입만 벌리고 있다가 도르륵 눈을 굴려서 우재를 보았다. 우재는 무심하게 밥을 뜨고 있었다.

“얼른 먹어.”

재촉하는 목소리도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어, 고맙다.”

지금까지 겪어본 우재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말투도 어른스럽고, 또 챙겨주는 것도 잘했고. 그러니까 이것도 그러려니 해야 할 텐데, 어쩐지 시간이 갈수록 친절함의 강도가 점점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친구로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절 어린 동생쯤으로 여기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아니, 깊이 생각하지 말자. 괜한 착각도 하지 말자.

어차피 여름이 끝나면 헤어질 사이였다. 마땅히 그래야 했고, 앞으로 기대하지도 말아야 했다. 그러니까 우재가 제게 보인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했다.

의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상념을 끊고 접시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우재가 해서 그런지 발라놓은 생선은 모양도, 맛도 좋았다.

* * *

점심을 막 지날 때쯤 시커먼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급작스럽게 비가 떨어졌다.

툭. 툭.

엄지손톱만 한 물방울이 땅을 축축하게 물들였고, 어느새 굵직한 장대비로 바뀌었다. 숲은 어두침침한 색으로 변하고, 계곡마저 무시무시한 황톳물을 토해냈다.

캠핑장은 난데없는 물난리에 소란스러워졌다. 손님들은 놀라 우왕좌왕하고, 현장을 감독하던 우재도 쫄딱 젖은 채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계속된 문의 전화를 받으면서 CCTV로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던 의정은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우비만 챙겨 입고 바로 관리실을 나섰다.

온몸을 때려대는 빗줄기가 제법 매서웠다. 어찌나 거세게 내리꽂히는지 세 발짝 앞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뭐 하러 왔어. 안에 있지.”

우재는 기껏 도와주러 간 사람에게 김빠지는 소리를 했다. 이런 말에 물러설 거면 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됐고. 나 뭐 할까?”

의정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대충 훔치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우재도 의정이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한숨을 푹 쉬고는 한쪽을 가리켰다. 여기저기 캠핑 장비를 해체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손님들이 눈에 띄었다.

“그럼 철수하는 손님 좀 도와줘.”

“알았어.”

의정은 곧바로 몸을 돌려 나무 아래에서 텐트를 걷는 남자에게 뛰어갔다. 때마침 남자도 의정을 발견했는지 손을 저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여기요! 이쪽 좀 잡아주세요!”

텐트는 지붕이 우묵하게 파여있었다. 고작 10여 분도 되지 않아 폭우가 되어버린 비가 잔뜩 고인 탓이었다.

물이 들어찬 텐트는 무거웠고 걷어내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가까스로 철수하고 나니 남자는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펜션으로 가버렸다.

의정은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철수한 장비를 모아둘 곳이 보이지 않았다. 워낙 비가 거세서 비탈 곳곳에 물줄기가 생긴 탓이었다. 그냥 두면 전부 쓸려가 버릴 거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이고 지고 다리를 건너 관리실까지 가지고 왔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리함 역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일단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의정은 잔뜩 젖은 얼굴을 훔쳐내고 다시 캠핑장으로 달려갔다. 허둥지둥하는 손님들을 돕고,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치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어디로 갔는지 우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송우재! 어디에 있어!”

의정은 우재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탈진 길 여기저기 작은 내가 되어 물이 흘렀다. 우재는 그중에 한 군데를 막고 서서 삽으로 흙탕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다 철수했어. 우리도 돌아가자!”

“이거 그냥 두면 다 파이고 난리 나. 지금 해야 해.”

의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재는 돌아갈 기미가 없어 보였다. 하여간 미련하기는.

“감기 걸려. 먼저 들어가.”

우재가 한 삽 가득 흙을 담아 반대쪽으로 내던지며 못마땅한 얼굴로 선 의정에게 말했다. 의정은 마뜩잖은 눈으로 우재를 보았다. 자신이야 우비라도 입고 있다지만 우재는 맨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으니.

“넌 뭐 괜찮냐?”

의정은 불퉁하게 내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도울 만한 도구가 없었다. 더 고집부리지 않고 입고 있던 우비를 훌렁 벗어 우재에게 내밀었다.

“입어. 그럼 먼저 갈 테니까.”

우재는 우비를 한 번, 잔뜩 젖어가는 의정을 한 번 보고는 다시 한숨을 쉬며 우비를 받았다. 잠깐 사이에 그것마저 척척히 젖고 있었다.

“얼른 와.”

의정은 그제야 우재를 두고 돌아섰다.

시야를 꽉 막는 비를 뚫고 숙소로 돌아온 의정은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가자마자 옷부터 전부 벗어버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대로 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의정은 젖은 옷을 꽉꽉 짜서 대충 몸을 훔치고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뜨거운 물 아래에 서니 몸이 노곤하게 풀리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목 안쪽도 간질간질하고 어깨가 으슬으슬한 게 아무래도 감기 기운도 있는 듯했다.

고작해야 몇 분 비를 맞았다고 이런 반응이라니. 아무래도 보일러를 잔뜩 지피고 있어야 할 거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수납장에서 수건을 꺼내 뒤집어쓰면서 옷은 고사하고 속옷 하나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던 의정은 그냥 문을 열어젖혔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싶었건만, 현관엔 뜻밖에도 우재가 서있었다.

“…….”

젖어서일까. 아니면 흐려서 어두워졌기 때문일까. 유독 짙어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의정의 몸에 부딪쳤다. 마치 얼마 전 비밀 장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의정은 머리에 뒤집어썼던 수건을 슬그머니 내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가져갔다. 몸이 홧홧한 게 뜨거운 물로 씻어서인지, 우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왔어? 너도 홀딱 젖었네. 얼른 씻어!”

의정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얼른 한마디를 던져놓고 몸을 돌려 옷이 걸린 행거로 향했다. 고작 서너 걸음 거리인데 그게 유독 멀게만 느껴졌다.

의정은 눈에 보이는 아무 티셔츠나 낚아채 머리부터 꿰어 넣었다. 착각인지 아닌지, 등 뒤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힐끗 돌아보았다. 우재는 의정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의정이 아닌 허물처럼 벗어놓은 젖은 옷가지에 머물러 있었다.

대체 왜, 아니 민망하게 저건 왜 보고 있는 거야.

의정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 슬금슬금 그리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우재와 같은 숙소를 이용하면서 이렇게 대놓고 나체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며칠 전 옷을 홀랑 벗고 욕실을 나온 우재를 보았던 그때뿐.

물론 그 후로 더 필사적으로 피한 건 맞았다. 우재야 아무 생각이 없었겠으나 의정은 달랐으니까.

오메가 판정을 받았을 때 자조적으로 든 생각은 그거였다. 이제는 남자를 보아도 변명거리가 생겼구나. 오메가의 시선이었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금방 이해할 테니까. 물론 자신이 나서서 형질을 떠벌리지는 않겠지만.

한편으로 부모님께는 말 못 할 비밀이 또 하나 늘어나게 되었다. 예전에는 게이라는 걸 감추었는데, 이제는 형질까지 숨겨야 했으니. 언젠가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는데도 그게 쉽지가 않았다.

의정은 우울한 생각을 뚝 잘라내고 축 늘어진 티셔츠와 척척하게 젖은 청바지를 한데 모아 쥐었다.

“헉.”

막 고개를 들어 올리던 의정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정면에 우재의 아랫도리가 보인 탓이었다.

딱 달라붙은 바지마저 입체적으로 만드는 크기는 대체 무얼까. 분명 흥분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크게 존재감을 나타내는 물건에 의정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의정은 애써 눈길을 피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관심 없는 척해야 할 텐데 자꾸만 시선이 그리로 움직였다. 곤란하고, 난감한 일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재는 의정을 지나쳐서 젖은 옷을 훌렁훌렁 벗기까지 했다. 의정은 그제야 비겁하게 숨겼던 관심을 꺼내놓았다.

군더더기 없이 꽉 조여진 등이며 곧게 내리뻗은 척추. 군살 하나 없는 허리와 쫙 달라붙은 엉덩이와 허벅지.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비율로 만들어진 몸.

확실히 알파는 다르구나.

우재가 욕실로 들어서기 위해 다리를 드는 바람에 아까는 볼 수 없었던 물건이 조금 드러났다. 의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술도 멍하니 벌렸다.

저건 흉기지. 저런 걸 어떻게 달고 다녀.

“아니. 뭐래.”

의정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어처구니없이 떠오른 생각을 끊어냈다. 다행히 우재는 이쪽 말을 듣지 못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의정은 쯧쯧, 혀를 차고는 바구니에 어설프게 걸쳐진 우재의 옷을 보았다.

“아, 진짜 미치겠네.”

몸에 이상이 온 게 분명했다. 아니면 정말 감기라도 제대로 왔든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제멋대로 체열이 오르락내리락할 리가 없었다.

의정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꾹 내리누르며 젖은 빨래를 세탁기에 집어넣고 사납게 닫아버렸다.

제멋대로 튀어나오려는 제 심장도 이렇게 꽉 막아버리면 좋으련만.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 * *

갑작스럽게 쏟아진 집중 호우로 예약이 전부 취소된 덕분에 뜻하지 않게 오후가 한가해졌다. 의정도, 우재도 딱히 할 일이 없으니 TV를 켜놓고 뒹굴뒹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바닥은 뜨끈하게 만들고, 공기는 에어컨으로 서늘하게 식히는 호사까지 누렸다.

쏴아아.

문을 꼭꼭 닫아놓았는데도 요란한 소리가 스며들어 왔다. 하늘은 여전히 새까맸고, 빗줄기도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이미 충분히 어둑했던 방은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한층 더 깜깜해졌다. 이대로라면 우민이 약속했던 바비큐도 어려울 듯했다.

그럼 저녁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의정은 나른하게 풀린 눈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가 옆자리를 곁눈질했다. 우재는 팔 위에 머리를 괸 채 잠들어 있었다. 자세가 영 불편해 보였다.

의정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계속 누워있어서인지 머리가 무겁고 멍했다. 슬렁슬렁 걸음을 떼어 이불과 베개를 들고 왔다. 한 달 넘게 지내다 보니 알게 된 건, 우재는 빨리 잠이 드는 편이고, 그렇게 한 번 자면 중간에 절대 깨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새벽에 우민이 찾아와 이름을 불러도, 핸드폰 진동이 요란하고 의정이 나가는데도 전혀 몰랐겠지.

의정은 이불을 덮어주고, 베개를 괴어주기 위해 우재의 머리를 살그머니 들었다.

“흐음…….”

목 아래로 손을 넣던 의정의 표정이 확 굳었다. 혹시 숨소리라도 들릴까 봐 목구멍에 꾹 내리누른 채 굳어있다가 아래를 보았다. 다행히 깬 건 아닌 듯했다.

의정은 아까보다 더 신중하게 베개를 받쳐주고 천천히 손을 뗐다. 몸마저 조심조심 물리려는데 때마침 우재의 등 뒤에 있는 리모컨이 눈에 들어왔다. 뒤척이다가 그대로 누를 수 있는 위치였다.

다시 자는 얼굴을 슬쩍 보았다. 꼭 감긴 눈을 보니 금방 깰 것 같진 않았다. 의정은 허리를 띄우고 우재의 위를 덮듯이 하며 팔을 뻗었다.

의정의 손끝에 막 리모컨이 닿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낯선 팔이 허리를 휘어 감았다.

“으악!”

의정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꽉 옥죄인 터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도리어 잔뜩 밀착된 몸에 두 사람분의 두근거림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의정은 당황한 얼굴로 리모컨을 꽉 움켜쥐었다.

우재는 불규칙하게 숨을 들썩이는 의정을 끌어안은 채 감은 눈을 한 차례 들썩였다. 옅은 비누향만 풍겨왔다.

역시 착각한 걸까. 벌써 두 번이나 느꼈는데. 하긴 자신이 내보낸 페로몬도 느끼지 못했는데 하물며 스스로 흘려보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오메가니 알파니 하는 건 우재에겐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윤의정이 제 안으로 스며들어 전부 물들여 놓았으니.

우재는 제가 가진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더는 망설이지 않겠노라고. 의정의 곁에 있겠다고.

그러니 이제부터 중요한 건 의정이 어떤 형질이라거나, 페로몬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보다 그를 어떻게 설득하느냐였다.

우재가 꽉 옭아맸던 팔을 풀자마자 의정은 도망치듯 몸을 일으켰다. 우재를 내려다보는 의정의 눈동자는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우재는 침묵했고, 의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둘 사이에는 어둠보다 더 까만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정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지켜보던 우재가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그러곤 말을 하기 위해서 막 입술을 떼던 찰나였다.

“우민 형한테 다녀올게.”

우재가 미처 무어라 하기도 전에 의정이 먼저 시선을 피하며 훌쩍 몸을 돌려버렸다.

서둘러 숙소를 나가버리는 등을 보면서 우재는 생각했다. 어쩌면 의정도 저와 같지 않을까, 하고.

* * *

저녁 메뉴는 고기였다. 폭우로 인해서 바비큐장을 이용하는 대신 숙소에서 구워 먹기로 했다.

우민은 고생한 의정과 우재를 위해서 고이고이 모셔두었던 한우를 꺼내고 소주와 맥주도 한가득 준비했다.

“둘 다 오늘 진짜 수고 많았어. 자, 받아.”

갈빗살 하나를 입에 넣던 의정은 제 앞에 불쑥 다가온 소주병을 난감한 눈으로 보았다. 식사를 시작한 지 이제 고작 10분이나 지났을까. 그런데 벌써 한 병이 훌쩍 사라지고, 두 병째도 반 이상 빈 채였다.

술은 좋아하는데 잘 마시는 건 아니었다. 거기다 아까부터 몸이 무거운 게 영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우민이 수고했다며 주는 잔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번 잔만 받고 그다음에는 사실대로 말해야 할 거 같았다.

“의정이 소주 못 마셔.”

생각을 정리한 의정이 막 잔을 내미는데 고기를 굽던 우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 그래?”

우민이 동그란 눈으로 의정을 보았다.

“그럼 맥주는 괜찮아?”

“네. 그건.”

우민이 미안한 얼굴로 묻는 말에 의정도 얼른 대답했다. 그러곤 또 옆에 앉은 우재를 보았다. 불판에 올린 고기를 뒤집던 우재도 눈을 들면서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많은 말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밤이라서 착각한 걸 거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면서 의정은 얼른 눈을 피하며 우민이 가득 따라준 술을 마셨다. 목으로 넘어가는 맥주가 오늘따라 유독 톡 쏘는 거 같았다.

“의정아, 곤란한 건 감추지 말고 알려줘. 네 도움도 크게 받았는데 내가 못 해줄 게 뭐가 있다고. 알겠지?”

“…네.”

아마 우민은 의정이 소주를 마시지 못하면서 분위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은 걸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또 일하는 중에도 부탁할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라는 의미겠지만.

의정은 쓴웃음을 맥주 한 모금과 함께 넘겼다. 의정이 감춘 곤란함은 우민에겐 절대 밝힐 수 없는 일이었다.

술자리 대화는 우민의 가족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펜션 사업까지 이어졌다가 우재가 준비 중인 장사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다.

대화가 끊이지 않는 사이 늦은 밤이 찾아왔다.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몰랐고, 빗소리와 마시는 술은 달고 달았다. 어쩌면 우재가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의정의 흰 얼굴은 잘 익은 봉숭아처럼 발그레해졌고, 볼은 그보다 더 붉게 물이 올랐다. 구부정한 자세로 밥상에 턱을 괴고, 눈을 반쯤 뜬 나른한 얼굴에는 취기가 가득했다.

우민이 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의정은 멍한 눈으로 잘생긴 알파를 바라보다가 불쑥 그를 불렀다.

“송우재.”

“어?”

“너… 아까 왜 그랬어.”

우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리모컨 잡는데 왜 꽉 안고 그랬느냐고. 사람 깜짝 놀라게.”

답답하다는 듯 말하는 의정의 말투는 평소보다 느리고 조금은 나른하게 느껴졌다. 우재는 반짝거리는 것처럼 물이 잔뜩 맺힌 의정의 눈동자를 가만히 보았다. 그러곤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놀랐어?”

“당연하지! 너 같으면 안 놀라겠냐? 어? 어? 사람 그렇게 신경 쓰이게 하더니, 저는 아예 아무 생각 없었다, 그거지?”

“신경 쓰였어?”

은근한 물음에 의정이 주춤했다. 우재의 눈 속으로 열에 들뜬 얼굴이 보였다. 의정은 눈동자를 크게 열고 그게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다. 그때 다시 질문이 들려왔다.

“왜?”

왜일까. 평소였다면 의정은 좀 더 신중하게 말을 골랐을 터였다. 그러나 술에 취한 정신은 의정을 물렁물렁하게 만들었다.

“왜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들킬까 봐 그렇지.”

술기운이 잔뜩 올라 물기가 많아진 눈동자가 돌연 우재를 노려보았다. 목소리마저 토라진 아이처럼 나왔다. 그제야 우재도 의정이 술에 취했다는 걸 눈치챘다.

“왜 심장이 뛰는데.”

우재는 집게를 내려놓으며 아예 의정이 앉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워낙 가까운 거리였던 터라 자연히 두 무릎이 닿았다.

“어?”

뭉툭한 끝에 느껴지는 온기에 아래로 뚝 시선을 떨어뜨렸던 의정이 멍하니 되물었다.

“여기가 왜 이렇게 뛰느냐고.”

이번엔 우재의 팔이 앞으로 쭉 뻗어왔다. 한여름 볕을 쐬는 가지처럼 쫙 펼쳐진 손바닥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의정의 가슴이었다.

의정은 마주한 무릎을 한 번, 제 가슴에 얹은 손을 한 번 보고 더 시선을 올렸다. 알파가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의정은 문득 제 안에 꾹꾹 담아왔던 말을 그대로 꺼내놓고 싶어졌다. 아마 취하지 않았다면 잘 단속했을 텐데. 아니, 어쩌면 술주정을 핑계 삼아 말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의정은 물기가 잔뜩 오른 입술을 몇 번이나 붙였다가 떼었다가 반복하다가 마침내 입 안에서 계속 맴돌던 말을 꺼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우재가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제자리로 되돌렸다. 의정은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변하는 우재의 표정을 살폈다.

“의정아.”

이윽고 우재가 눈매를 반달처럼 만들며 의정을 불렀다. 분명 다정한 음색인데도 의정은 이상하게 신경이 바짝 조여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

“정말이야?”

“응?”

“날 좋아한다면서.”

“어…….”

“못 믿겠어.”

의정은 눈썹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못 믿겠다니.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릎에 올려놓은 두 손이 어쩔 줄을 모르고 쥐였다가 펴졌다가 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우재에게 얼마나 귀엽게 보이는 줄도 모르고.

혼란에 빠진 의정을 보는 우재의 미소도 달라졌다. 평소에는 구김살 없이 환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다른 어디로 한눈팔지도 못하게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증명해 봐.”

우재가 의정에게 가까이 몸을 숙이며 나직이 속삭였다.

“증명?”

“응, 진짜 날 좋아하는지.”

이미 꾹꾹 담아놓았던 말을 꺼내놓았는데 그것 말고 더 증명할 수 있는 게 있는 걸까.

의정이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맬 때였다. 우재가 나뭇가지처럼 곧고 단단한 손가락을 펴 물기를 머금은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의정의 열 오른 눈도 그곳을 보았다.

술은 정말로 사람을 무모하게 만드는 걸까. 아니, 어쩌면 불안감을 무감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그게 무엇이었든.

의정은 홀린 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는 만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매끄럽고도 말랑말랑한 두 입술이 서로에게 포개졌다.

우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순간 풍겨오는 은은한 향을 들이마셨다. 또, 또다. 이제는 착각할 수가 없었다.

풀잎처럼 싱그럽고도 향기로운, 이건 오메가의, 아니 의정이 지닌 페로몬이었다.

얄팍해진 눈동자에 일순 갈등이 스며들었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은 사실을 따지기보다 간신히 제 마음을 꺼내놓은 의정을 꽉 붙들고 싶었다.

우재는 두 팔을 뻗어 의정의 얼굴을 붙들고 더 깊숙이 입을 맞췄다. 의정이 감았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에 힘을 바짝 주는 게 느껴졌다.

우재는 물러나지 않았다. 도리어 손을 의정의 뒷머리로 움직여 뜨거운 살덩이를 더 안쪽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우민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것도, 아직 밤이 깊지 않았다는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했다. 한참 키스를 이어간 우재가 멀어졌는데도 의정은 도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의정아.”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눈꺼풀을 보며 우재가 다정하게 의정을 불렀다. 그러나 감긴 눈꺼풀은 열리지 않았다. 대담하게 먼저 입을 맞춰놓고 부끄러워하기는.

우재는 슬며시 웃음을 피우며 의정의 귓불을 만지고, 볼을 문질렀다. 순간 푸, 하고 단내 나는 숨이 젖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우재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잠들어 버린 의정을 보았다. 사람을 잔뜩 흔들어놓을 때는 언제고. 이렇게 긴장감도 없이.

“윤의정. 너, 내일 일어나면 보자.”

우재는 어이없이 웃으며 의정의 매끈한 이마를 콕, 찍었다. 내일 일어나면 제대로 확인해 볼 터였다. 오늘 저에게 내보인 마음이 진짜인지. 정말 자신과 마찬가지였는지.

만약 기회가 된다면 왜 오메가인 걸 숨겼으며, 그렇게 감추고 감춘 페로몬을 제게 내보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듣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말해주리라.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네 페로몬을 맡기 전부터 네게서 눈을 떼지 못했노라고.

우재를 내팽개치고 잠들어 버린 의정은 그날 밤 묘한 꿈을 꾸었다. 나무처럼 키가 큰 남자에게 키스했고, 옷을 벗었고, 이어 두 다리를 활짝 열어 허리에 매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맞춤은 농밀해지고 두 사람의 행위도 점점 더 질척해졌다.

그에 따라 잠든 의정의 표정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졌다. 의정은 그런 제 얼굴을 우재가 낱낱이 관찰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술에 취한 밤이 가고 서서히 사위가 밝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였다.

다행히 억수같이 떨어지던 빗줄기는 가늘어졌으나 아직 완전하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구름의 두께로 봐서는 또 언제 장대비로 바뀔지 알 수 없었다.

우재는 어둑어둑한 바깥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돌렸다. 빛 한 자락 없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인데 방은 도리어 요람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긴 잠에 빠진 의정 때문인지 몰랐다.

평소라면 먼저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을 텐데. 어제 종일 비를 맞고 뛰어다닌 데다 마지막에는 우비를 벗어주고, 그도 모자라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도통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어차피 큰 비가 내려 손님도 많지 않을 것 같으니 굳이 깨우지 않아도 괜찮을 듯했다.

우재는 유심한 눈으로 벌어진 의정의 입술을 보았다. 그러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순간 물오른 복숭아처럼 확 단내가 전해졌다. 어젯밤 맡았던 청량하고도 싱그러웠던 향이 아니었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페로몬은 점점 더 진해졌다. 이래서야 의정이 스스로 숨겼던 비밀마저 다 알려질 판이었다.

“의정아. 의정아, 일어나 봐.”

우재는 의정을 깨우려 볼에 손을 올렸다가 깜짝 놀랐다. 얼른 이마를 짚어보았다. 얼굴 전체가 열이 올라있었다.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까 목덜미며 머릿속이 온통 땀으로 축축했다.

“의정아! 눈 떠봐.”

우재가 다급하게 의정을 불렀다. 그러나 꽉 감긴 눈은 도통 떠질 기미가 없었다. 도리어 의정은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입술을 벌리고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다디단 페로몬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설마…….”

우재는 어두워진 눈으로 의정을 내려다보았다. 감기와 비슷하면서 오메가가 자신의 페로몬을 주체하지 못할 때,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히트 사이클.

아침이 오면서 평소보다 더 발갛게 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우재는 가라앉은 눈으로 의정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옷장으로 달려갔다. 안에는 의정이 가지고 온 배낭이 놓여있었다.

의정이 자신의 형질을 숨기고 있었다면, 만약을 대비해서 상비약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종종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오는 경우가 있으니.

그러나 깊숙한 안쪽부터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져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우재는 낭패한 얼굴로 배낭을 내려놓았다가 관리실에 보관해 둔 의약품을 떠올렸다.

“의정아! 약 찾아올게. 조금만 참아, 알았지?”

우재는 땀이 잔뜩 밴 의정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단단하게 문도 걸어 잠근 후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 * *

열탕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몸은 축축 늘어지고, 눈은 무언가 들러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감기인가. 멍한 머리가 생각한 건 그것이었다.

어제 몸이 아프도록 때리는 장대비를 맞으며 캠핑장을 뛰어다녔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할 때도 한기가 들고, 저녁에도 어쩐지 좀 나른하고 무거운 기분이 느껴져서 설마 했건만.

“하아, 하.”

입을 벌리니 열에 들뜬 숨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듣기에도 버겁게 느껴지는 호흡이었다. 이불에 닿는 살갗마저 쓰리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신경도 예민하게 곤두섰다. 아무래도 정말 지독한 몸살에 걸린 거 같았다.

의정은 딱 달라붙어 잘 올라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떼었다. 벌어진 틈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마저 뜨겁게 느껴졌다.

의정은 혼곤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것마저 어질어질한 현기증을 가져왔다. 아찔한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고는 먹먹한 시야로 옆을 보았다. 이부자리도 없이 깨끗한 바닥이었다.

우재는 벌써 일어나 나가버린 듯했다.

“나쁜 놈…….”

바짝 마른 흙처럼 거슬거슬한 목소리가 나왔다. 콜록, 하고 기침하는 것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저보다 늦게 일어나면서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없다니. 괜스레 자리를 비운 우재가 원망스러웠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허리까지 흘러내린 이불을 움켜쥐었다. 일단 오한이 드는 몸이라도 덮고 싶었다.

“이거, 뭐야.”

그러나 의정은 넋 나간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고는 딱 멈추고 말았다. 다리 사이에 있는 물건이 눈치도 없이 부풀어 오른 탓이었다. 어이가 없어도 유분수지. 열이 펄펄 끓어오르고 온몸은 발발 떨면서 이게 대체 무슨.

…설마, 꿈 때문일까.

순간 의정은 키가 큰 남자에게 매달려 키스하던 꿈을 떠올렸다. 그러고 나니 아래쪽에 더더욱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미쳤다. 미쳤어, 윤의정.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의정은 도저히 자신의 상태가 믿기지 않았다. 아픈 와중에 대체 서기는 왜 서고, 꿈은 또 왜 그렇게 야한 걸 꾸고 그러는 거냐며.

의정은 눈에 힘을 주며 아래를 보았다가 머뭇머뭇하며 손을 바지 안으로 넣었다. 손 안에 뚜렷하게 드러내는 존재가 느껴졌다.

나, 욕구 불만이었나.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의정은 동성을 좋아했지만 한 번도 고백해 본 적도, 사귀어 본 적도 없었다. 누군가와 자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으나 막상 그럴 용기도 없었다.

물론 몽정이나 자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작 정체도 모를 누군가와 입을 맞대고 부둥켜안았다는 꿈 하나로 이렇게 되었다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의정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반들반들하게 젖은 제 것을 막 쥘 때였다.

현관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리면서 온 원망을 받았던 우재가 나타났다. 우재는 우산도 쓰지 않았었는지 머리부터 옷까지 온통 젖은 채였다. 슬리퍼를 벗고 올라온 발에도 흙이며 나뭇잎이 잔뜩 묻어있었다.

우재는 의정이 깨어난 줄도 모르고 그대로 냉장고로 직행했다. 그러곤 안에서 물을 꺼내 돌아섰다가 우뚝 멈추었다. 잔뜩 당황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의정을 알아챈 탓이었다.

의정은 조심스럽게 바지에 넣었던 손을 빼내었다. 허리 아래로 이불을 덮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우재에게 정통으로 걸렸을 테니. 그걸 들킨다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의정이 어떤 상태였는지 알 길 없는 우재가 다가왔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는 상냥한 손길로 의정을 일으켜 앉혔다.

“아…….”

갑작스럽게 자세가 바뀌며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의정이 제 머리를 짚으며 신음하는 것과 동시에 달콤한 과일향이 물씬 풍겨 나왔다.

의정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앞에 앉은 우재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막 비가 내릴 때 맡을 수 있었던 흙냄새같이 편안했는데 이건 너무 달아서 혀가 마비될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은 페로몬을 느끼지도 못하는 열성인데. 이 향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이것 때문인지 아랫도리에 피가 더 뜨겁게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난감하고도 난처했다.

“이거 먹어.”

우재는 의정의 동요도 알아채지 못하고 준비해 온 약을 친절하게 입으로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우재가 가져온 건 분홍색과 흰색이 반반 섞인 타원형으로 된 캡슐이었다.

“감기약이야?”

의정이 까슬까슬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본인의 상태를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재가 들고 있는 건 ‘그’ 약이었다. 의정이 오메가라면 모를 리가 없을.

우재는 추궁하는 대신에 아무 말 없이 약을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의정도 얌전하게 입을 벌렸다. 물과 함께 넘어가니 쓴 내가 진동했다. 어지간히 독한 약이구나 싶었다.

우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의정을 다시 요 위에 눕혔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열은 더욱 올랐고, 몸은 땀범벅이었다.

밤이 새도록 지켜보았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니. 새삼스러운 죄책감이 그를 덮쳤다.

“기다려. 땀 좀 닦아줄게.”

의정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우재는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욕실로 들어가는 우재의 얼굴은 복잡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의정은 감춘 게 아니라 스스로 자각이 없던 건 아닐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형질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아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우재도 베타였다가 사춘기 때 갑작스럽게 알파로 발현했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인척, 친구 등 주변에 누구도 알파가 없었던 터라 알아챈 것도 늦었다.

호르몬 불균형, 날뛰는 페로몬, 뒤늦은 러트와 갑작스러운 성장. 우재에겐 모든 게 태풍처럼 몰아닥쳤다.

문제는 이런 고통과 두려움을 주변에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우재에게 그들은 소인국에 떨어진 거인 같은 존재였다. 공감하고 싶어도 너무 달라서 그것조차 어려운.

우재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그들을 통해 페로몬을 다스리고, 러트를 넘기고, 같은 이상 형질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위로와 공감을 받았다.

만약 의정이 스스로 오메가라는 걸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면, 이번이 첫 히트 사이클이라면, 우재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의정도 함께 극복하길 바랐다.

수건을 적셔 나오니 의정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약효가 제대로 발휘한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도 페로몬 역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땀에 젖은 얼굴과 습해진 목덜미를 닦아주고 이불을 걷었다. 열에 펄펄 끓던 몸도 축축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조심스럽게 등 아래로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켰다. 축 늘어진 무게가 그대로 느껴졌다.

천천히 티셔츠를 끌어 올려 가슴과 배를 닦고는 본래대로 돌려놓고 이번엔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니, 그러려다 멈칫하고 아래를 보았다. 어쩐지 평소보다 좀 더 부풀어 올라 보였다. 우재는 눈을 들어 세상모르고 잠든 의정의 얼굴로 향했다.

“의정아.”

조용한 부름에도 의정은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우재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막 손끝이 닿기 전 한 번 더 잠든 얼굴을 보았다. 꼭 감긴 눈꺼풀은 여전히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바지를 잡아 끌어내렸다. 순간 막혔던 단내가 확 풍겨 나왔다. 아니, 그렇다고 느꼈다.

다리 사이에는 우재가 예상했던 대로 잔뜩 힘을 받은 의정의 물건이 보였다. 끝은 벌써 미끌미끌하게 젖은 채였다.

그때였다. 의정이 자그마하게 입을 벌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정말로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달큼한 향내가 풍겨왔다.

우재는 애써 눈길을 떼고 주변을 깨끗이 닦아준 후에 도로 바지를 추어올려 주었다. 정성을 알아주었는지 의정의 얼굴이 더 편하게 바뀌었다.

반대로 우재는 조금 복잡한 눈으로 의정을 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욕실로 향했다. 우재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까지는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 * *

그로부터 이틀간 비는 내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했다. 덕분에 의정도 방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우재는 일하다가 쉬는 틈틈이 의정을 보러 왔고, 그때마다 민망할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의정은 제가 감기라고 굳게 믿는 눈치여서 우재도 굳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민감해진 몸은 많이 나아졌지만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의정에겐 그보다 더 난감한 일이 있었다.

잠이 들면 꿈을 꿨고, 그러고 나면 자꾸만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나타났다. 둘은 꼭 입을 맞췄고, 그러고 나면 점점 노골적으로 행위가 이어졌다.

“헉!”

의정은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지 어둑했다.

“왜 그래, 의정아?”

곁에서 자고 있던 우재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 아냐.”

의정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는데도 우재가 걱정되는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의정은 우재의 어깨를 붙잡아 내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불도 켜지 않은 욕실로 들어와 양변기 뚜껑을 닫고 철퍼덕 걸터앉았다.

멍하니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다가 아래로 눈을 내렸다. 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어둠 속인데도 바짝 서있는 게 확 티가 났다.

“미쳤어.”

또 꿈을 꾸었고, 어김없이 남자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시작이 키스가 아닌 뒤로 안긴 자세였다. 남자는 의정의 어깨에 턱을 괸 채 무어라 속삭이면서 손을 바지춤으로 집어넣었다.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쓸어내리는 감촉이나 문지르고 비비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의정은 가쁘게 숨 쉬면서 남자의 손길에 조금씩 흥분을 키워갔다. 순간 귓가에 남자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낮고 조용하게.

절정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남자가 돌연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의정은 그러지 말라고, 얼른 끝내달라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몸을 비비적거렸다. 남자가 웃으면서 다른 손으로 의정의 턱을 붙들어 살며시 올리고, 뒤로 돌렸다.

키스하려나 보다.

의정은 얼굴의 각도를 달리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보게 된 남자는…….

뜻밖에도 우재였다.

의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꿈을 꿔도 그런 걸. 앞으로 우재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그것도 고민이지만…….

의정은 바지를 아래로 내렸다가 축축해진 팬티에 더 절망했다. 이건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니, 몸살이 걸렸는데 대체 왜 몸이 난리가 난 것인지. 감기약이 흥분제라도 되는지. 멋대로 벌떡벌떡 일어서 있었다.

“하아아…….”

의정은 허공을 향해 긴 한숨을 토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그렇게 지극한 간호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스무 살 때의 이상 반응도, 발현도 혼자서 끙끙 앓으며 견뎌왔으니. 어렸을 적에도 누구에게 아프다고 할 수 없어 내색도 못 하고 넘어간 적도 많았는데.

이렇게 다 커서, 고작해야 여름 한철이 끝나면 헤어질, 다른 누구도 아닌 우재의 간호를 받는 게 좋은지, 아닌지.

아니다. 뭐, 같이 있었으니까 당연한 거지. 나였어도, 나였어도…….

불현듯 얼마 전 일이 생각났다. 잠든 우재가 불편할까 봐 리모컨을 집어 들 때 자신을 휘감던 단단한 팔을. 그러고 나니 연쇄적으로, 저를 뒤에서 감싸던 남자의 팔도…….

“아, 뭐, 또!”

의정은 속절없이 떠오른 기억들을 싹둑 잘라내며 얼른 바지 버클을 풀었다. 일단은 이 난감한 팬티부터 벗어서 빨아놓고 우재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 같았다. 의정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막 일어날 때였다.

“괜찮아?”

욕실 밖에서 우재가 걱정스럽게 건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정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어설프게 잡고 있던 바지춤을 놓쳐버렸다. 바지는 그대로 흘러내려 발목에 걸려버렸다.

그냥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나 기세 좋게 몸을 일으켰는지 양변기 뚜껑이 덜커덩거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의정아! 무슨 일이야!”

순식간에 욕실에 불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온 우재는 곧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낸 채 서있는 의정을 발견했다.

순간 둘 사이에 숙연한 정적이 흘렀다.

우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의정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으아악!”

먼저 침묵을 깬 건 의정이었다. 의정은 비명을 지르며 헐레벌떡 바지를 끌어올렸다. 팬티가 젖어서 축축해도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봤을 거다, 분명.

젖은 아래와 반쯤 일어난 제 것을.

얼굴이 홧홧해지고 목 뒤까지 띵해졌다. 이틀 전에는 몸살로 딱 죽을 만큼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죽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쪽팔려서.

의정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클어져서 이 사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우재가 이대로 물러가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게 통했던 걸까.

“무슨 일 생겼나 해서 들어왔어. 갑자기 들어와서 미안해. 먼저 나가있을 테니, 볼일 봐.”

우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차분하게 말하고는 욕실 밖으로 사라졌다. 의정은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물기 하나 없는 타일 바닥만 내리 째려볼 뿐이었다.

달칵.

예민해진 귀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의정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진짜, 미치겠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우재의 꿈을 꾸면서 몽정한 것도 감당이 안 되는데, 이런 모습까지 보였으니.

의정은 제 아랫도리를 우울하게 보다가 체념하듯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우재가 지금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단 점이었다.

…아니, 그랬겠지? 그런 거 맞지?

아주 잠깐 우재의 흔들리던 눈빛이 떠올랐지만, 얼른 털어내 버렸다. 일단, 빨자. 빨고,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자.

의정이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도로 바지를 내리고 팬티를 벗을 때, 욕실을 나온 우재는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반쯤 가려진 눈 주변이 화끈화끈하니 열이 오른 거 같았다.

히트 사이클이 오면 원래 저런 걸까. 하긴 러트 때의 자신도 비슷하긴 했다. 발정이라도 난 듯 자꾸만 몸이 달아올랐고, 온통 야한 생각만 떠올랐다. 아래는 늘 축축했고, 아플 정도로 꼿꼿해서 어쩔 줄을 모른 채 끙끙거렸다.

마셔도,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갈증 같은 욕망.

그래도 의정은 그런 저와 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이니 더 당황스러웠다.

하긴 억제제를 먹어도 전부 제어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첫날 의정이 의식을 잃고도 잔뜩 흥분한 걸 보지 않았던가.

그때 생각이 떠오르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졌다. 우재는 버클을 풀고 안에 수납되어 있던 제 것을 끄집어냈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단단해져 있었다.

눈을 감으니 의정의 희고 깨끗한 몸이 떠올랐다. 꼭 제 입술 색 같은 볼록한 돌기는 마른 가슴 때문에 유독 더 눈에 띄었다. 당황한 채 흔들리던 눈동자와 발갛게 달아올랐던 뺨과 멍하니 벌렸던 입, 습윤하게 바뀌었던 아래 등이 마구잡이로 머릿속에 부유했다.

“아!”

절정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우재는 벽에 기댄 채 머리를 뒤로 젖혔다. 어두운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하, 하.”

제가 뱉어낸 거친 숨소리가 고스란히 귀로 흘러 들어왔다. 다행히 욕실 안에서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재는 젖은 손을 위로 올리고 쓰게 웃었다.

“이거 들키면 큰일 나겠네.”

아직 의정과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했는데, 도둑처럼 몰래 이런 짓이나 하고 있다니. 아니, 이것뿐인가. 의정이 잠들었을 때 그의 얼굴을 보면서 자꾸만 치미는 유혹 때문에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드나들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나니 더 안달이 났다.

이제는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정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고.

아니, 더 솔직해져야 했다. 의정이 좋았다. 그와 모든 날을 함께하고 싶었다. 이 짧은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나서도, 덥고 바빴던 여름이 지나도.

맑고 청명한 가을과 시리고 춥지만 아름다운 겨울과 온갖 꽃과 새잎이 돋아나는 봄과 다시 찾아올 여름에도 늘 곁에 의정이 있었으면 했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도로 이불에 누웠다. 우재가 막 눈을 감았을 때 욕실 문이 열렸다.

의정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우재의 얼굴부터 살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잠든 듯했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후다닥 속옷을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우재의 잠든 얼굴과 딱 마주쳤다.

순간 머릿속에 원치 않은 장면이 떠올랐다. 저를 휘감았던 커다란 손과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놀림, 끈적끈적했던 입맞춤.

“으으으!”

도저히 옆에서 잘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의정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 이불을 붙잡았다. 오늘 밤은 뚝 떨어져서 잘 생각이었다.

슬금슬금 이불을 끌면서 물러나는데 어느 순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래.

의정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헉!”

정말로 헉, 소리 나게 놀라고 말았다. 자는 줄 알았던 우재가 이불을 붙잡고 저를 보고 있었다.

“어디 가?”

우재는 잠든 적 없는 듯 목소리마저 깨끗했다. 의정은 후다닥 이불자락을 놓았다. 마치 대단한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렸다.

“어, 어, 어. 감기 걸릴까 봐…….”

저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이 나왔다. 우재가 피식, 실소하고는 이불을 놓으며 일어나는 게 보였다. 길쭉한 몸이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어둠 속에서 우뚝 섰다.

의정은 우재를 따라서 얼굴을 들었다가 도로 뚝 떨어뜨렸다. 의도치 않게 또 꿈속의 장면이 떠올라서였다.

하필 키도 나무같이 우뚝 솟아서는.

우재의 긴 그림자가 의정을 천천히 덮어갔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가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팔을 벌리면 닿을 정도로, 손만 내밀면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어둠 속에서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의정의 시선은 커피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에 얽매였다. 곧 나뭇가지처럼 길고 곧은 손가락이 이마에 닿았다. 의정은 순간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열, 없는데. 괜찮아.”

우재는 이마에 머물렀던 손길을 무심하게 떼어내고,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잡아서 처음 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때까지 멍하니 서있는 의정의 손을 붙잡아 데려갔다.

“그냥 자.”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건데.

의정은 한숨을 쉬면서 일단 자리에 누웠다. 잠이 올 거 같진 않지만 자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았다. 아니, 자면 더 곤란했다. 옆에 우재가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꿈을 꾸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어쩐지 불면의 밤이 될 거 같았다.

* * *

아니, 분명 그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약 기운이 의정의 의지보다 더 강했던 듯했다.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가 눈을 뜨니 어느새 사위가 훤하게 밝아있었다.

의정은 후다닥 옆을 보았다가 댕그랗게 눈을 떴다.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우재의 얼굴이 있었다. 아침부터 심장에 좋지 않은 거리였다.

의정은 얼굴부터 뒤로 쭉 밀고 슬금슬금 물러서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개운하고 몸도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틀 내내 열이 오르고, 어지럽고, 이불만 스쳐도 예민하게 자극되던 게 전부 정상으로 돌아온 거 같았다. 며칠간 내린 비로 맑게 갠 하늘도 보였다. 어쩐지 아침 공기를 잔뜩 마시고 싶어졌다.

의정은 슬쩍 잠든 우재를 한 번 더 보고 슬리퍼를 꿰어 신은 채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아니면 주중이어서인지 주변이 조용했다. 하긴 연일 내린 폭우 덕분에 손님이 뚝 끊어졌으니 당연했다.

펜션을 벗어나 관리실로 향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아프기 전에 고쳐놨던 예약 사이트가 잘 돌아가나 궁금해졌다.

문을 여니 더운 기운이 확 끼쳐왔다. 창문을 열어놓을까 하다가 문만 그냥 둔 채 컴퓨터로 향했다.

예약 사이트는 문제없이 실행되었다. 오늘 예약은 두 팀. 체크아웃할 게 없어 오전은 여유가 있을 거 같았다. 이럴 땐 비밀 장소에서 멱이라도 감아야 하는데.

의정은 계곡 상태도 궁금하고 캠핑장도 괜찮은지 확인도 해볼 겸 관리실을 나와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다리 중간쯤에 섰다. 흙탕물이 되었던 계곡은 본래 맑고 투명한 물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물살이 세서 안에 들어가서 물장구를 치면서 놀 상황은 아니었다.

의정은 다리를 건너가 캠핑장도 둘러보았다. 우재가 비를 맞으며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흉하게 파이거나 파손된 부분은 없었다.

그대로 캠핑장 뒤에 있는 숲으로 들어섰다. 비가 온 다음 날이라 그런지 유독 흙이며 나무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의정은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마셨다. 싱그럽고 맑은 공기가 들어와 온몸 곳곳을 깨우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뜨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길 양쪽으로 자라난 풀잎엔 물방울이 맺혀있었고, 덕분에 금세 발목이며 발등이 젖어버렸다. 그러나 서늘한 바람이 묻어나는 것 같아 썩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의정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산길을 따라가다가 조금 방향을 틀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거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이마며 목 주변이 땀으로 촉촉했다. 손바닥으로 닦아내고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물가가 보였다. 폭포는 평소보다 더 우렁찬 소리를 냈고, 수심도 더욱 깊어졌다.

의정은 뭍에 와 닿는 물의 경계면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뻗어 부드럽게 출렁이는 수면 위에 가져다 댔다. 뒷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찬 기운이 느껴졌다. 안에 들어가서 노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물에 반쯤 잠긴 흰 바위 위로 올라가 신발을 벗고 발을 넣었다. 서늘한 기운이 짜르르하게 올라왔다. 땀마저 단숨에 식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녹색 잎들이 파란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의정은 저도 모르게 손을 쭉 뻗었다.

하강하던 나뭇잎이 그대로 손바닥에 안착했다. 타원 형태에 테두리가 톱니처럼 난 모양이었다. 진한 잎새를 보니 커다랬던 우재의 손이 생각났다.

의정은 녹색 나뭇잎을 검지와 엄지 손끝으로 아슬아슬하게 쥔 채 발장구를 쳤다. 한 번씩 휘저을 때마다 물이 부드럽게 휘었다가 찰박거리며 흩어졌다.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것도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니 음악처럼 들리기도 했다.

눈을 감았다. 소리는 더욱 선명해지고 숲이 내어주는 향도 좀 더 뚜렷해졌다.

눈과 귀, 코로 주변을 한껏 삼키던 그때, 불쑥 다가온 손이 어깨에 닿았다.

“……!!”

의정은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 우재가 서서 의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의정!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어디 갈 거면 간다고 말을 해야지.”

“어, 미안.”

의정이 사과하면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심장이 발랑거리며 뛰는 게 다 느껴졌다.

우재는 의정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팔까지 쭉 끌어내렸다가 천천히 떼어내며 바로 옆에 앉았다. 의정 역시 제 살갗을 스치는 낯선 온기에 긴장했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뜩이나 요즘 들어 점점 신경 쓰이고 있는데, 이런 접촉은 난감했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짜 매끈매끈하네. 털도 별로 없고.”

복잡한 마음에 폭포로 눈길을 돌렸던 의정이 무슨 소린가, 하고 우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작 우재의 시선은 이쪽이 아닌 아래를 향해있었다. 의정도 그리로 눈을 내렸다.

우재가 보는 건 뜻밖에도 자신의 다리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의정은 괜스레 발을 크게 구르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으로 하늘을 가리던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물보라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면서 우재의 얼굴도 환하게 비췄다.

의정은 저도 모르게 그런 우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너무 깊어서 마치 늪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우재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오해한 거면 밀어내.”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우재가 말했다.

“뭐?”

“아니면 더 좋고.”

무슨 말이냐, 물으려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의정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확장됐다. 고작해야 꿈속에서나 접해보았던 바로 그 입술이 저와 맞닿아 있었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의정은 다급하게 우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건 밀어내려는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의지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키스는 무슨 맛일까.

풋내 나는 사춘기 시절, 그런 걸 잠시 상상한 적이 있었다. 누구는 사탕처럼 달다고 했고, 누구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흥분했다고 말했다.

의정은 비에 젖은 나무와 흙과 풀 냄새를 맡았다. 그건 아주 희미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향이었다. 언젠가 맡아보았던 듯도 싶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리는 그때,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의정아.”

낮은 목소리가 의정의 시선을 이끌었다. 의정은 조금 몽롱해진 눈을 움직였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감도는 향과 생각보다 말랑말랑했던 우재의 입술에 사로잡혔을 뿐.

“다시 해도 되지?”

의정은 이번 역시 대답도, 끄덕임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우재만 볼 따름이었다.

우재는 그걸 대답으로 알아들었는지 도로 입을 겹쳐왔다. 말랑한 혀가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부드러운 입술이 의정의 윗입술을 가볍게 빨아 당겼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경험에 의정의 등이 움찔, 하고 떨렸다. 아니다. 처음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이런 일을 겪어본 거 같은데.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던 의정은 덜컥, 스스로 제동을 걸었다. 왜인지 알 것 같았다. 그게 언제인지.

하다하다 이제는 꿈이랑 헷갈리다니. 민망함에 슬쩍 뒤로 몸을 물렸는데 그걸 도망친다고 생각했는지 우재가 얼른 팔을 뻗어 의정을 붙잡았다.

아프지 않지만 강하게, 하지만 도망치지는 못하게.

우재는 다른 손으로 목 뒤를 감싸며 의정을 끌어당겼다. 저절로 키스가 깊어졌다. 한참 의정의 입술을 탐하던 우재가 조금 틈을 벌렸다.

“의정아, 숨 쉬어.”

“허어어.”

의정은 그제야 제가 호흡까지 잃은 채 휩쓸렸다는 걸 알아챘다. 얼굴도 복숭아처럼 발갛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몰랐다.

우재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의정은 취한 듯 아득한 눈으로 환히 웃고 있는 우재를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여름을 닮은 미소였다. 다시 뜨거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의정이 상상했던 첫 키스와는 분명 달랐다. 그는 좀 더 어설프고 긴장된, 그러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그런 접촉을 생각했다. 하지만 우재와의 입맞춤은 그게 아니었다.

이건 정말, 정말…….

“아아……!”

의정은 제 머리를 움켜쥐며 탄식했다. 벌써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머릿속에는 우재와 아침에 있었던 일이 되새김질되고 있었다.

대체 걔는 그런 걸 어디서 배우는 걸까. 원래 알파들은 다 그렇게 능수능란한 걸까. 나는 첫 키스인데. 대체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온 것인지. 괜히 억울하기까지 했다.

아마 매혹적인 페로몬을 풍기는 오메가도 있었을 거다. 그들과 쌓아온 경험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의정의 표정이 점차 가라앉았다. 아니, 실은 조금 울적했다. 그냥 친구처럼 지내다가 끝날 여름인 줄 알았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그간 수고 많았다고 종종 연락하자며 헤어질 줄 알았다.

그러다 보면 가끔 생각이 나고, 몇 번 연락하다가 서서히 멀어지는. 한여름에 잠시 즐기던 휴가처럼 그런 관계이길 바랐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우재가 먼저 사이를 좁히고 들어왔다. 예상치 못했던 키스와 함께.

이제 와 오메가라고 밝힐 수 없었다. 애초 페로몬도 모르고, 히트 사이클도 겪지 않는 열성인데 일해도 되느냐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베타라고 거짓말한 상황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재가 실망하는 걸 볼 자신도 없었다.

과거에는 남자를 좋아하니 차라리 오메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정말이지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하던 그때의 자신을 때려주고 싶었다. 그게 이런 상황을 낳을 줄도 몰랐다니.

달칵달칵.

의정은 일없이 마우스를 클릭하며 이런저런 메뉴를 눌렀다. 마음이 복잡하니 대체 뭘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미 입도 맞춘 판국에 지금에 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 * *

지이잉.

마우스 옆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의정은 퍼뜩 떨면서 밝아진 화면을 보았다.

―언제 끝나? 난 오늘 좀 일찍 정리할 거 같은데.

연락한 사람은 우재였다. 와, 이거 어떡하지? 진짜 어떻게 봐야 해.

점점 붉어지는 얼굴로, 난감해하는 의정처럼 우재도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누군가 두고 간 찢어진 튜브를 주웠다.

폭포에서 의정에게 키스했던 건 다소 충동적이었다. 하얗게 반사되는 빛 속에 앉은 모습이 너무 어여뻐서, 홀린 듯이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어서. 꾹꾹 담아왔던 마음이 흘러넘쳐 버렸다.

한편으로 내심 기대했다. 술에 취한 채로 고백하며 먼저 입을 맞췄던 게 의정이었다. 그래 놓고 며칠 아픈 사이에 그걸 홀랑 까먹은 것인지 모른 체하고 있으니 이제는 그만 기억하라는 의미로.

그러나 의정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반응만 보일 뿐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은 끝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게 아쉬우면서도 또 다행스럽기도 했다. 기억이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대신에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말할 터였다. 너를 좋아한다고.

우재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불을 밝힌 관리실을 보았다.

여러 표정을 한 의정이 떠올랐다. 미소를 띠고, 얼굴을 찌푸리고, 당황하고, 입술을 삐죽이고, 물을 찰방거리고, 눈을 꾹 감은 채 키스를 따라오던 모습도.

과연 언제쯤이면 의정은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까.

우재는 아쉬운 눈을 돌려 산 너머로 사라지는 해를 보았다. 그때 의정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난 칼퇴지. 너는?

―나도 한 시간만 정리하고 갈게. 저녁 먹지 말고 기다려.

―어, 알았어.

우재는 짤막한 답변을 확인한 후 정리에 박차를 가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빨리 끝낼 생각이었다. 늘 맞이하던 저녁이었지만 더 특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의정은 문을 잠그고 난 후 다리 건너 캠핑장을 살폈다. 막 저녁이 내리기 시작한 숲에는 텐트 몇 개가 반딧불이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난 후라 손님이 많지는 않았다. 아니었으면 휴가의 절정인 8월 초이니 훨씬 환했을 텐데.

덕분에 우재도 평소보다 퇴근이 빨라졌다. 그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고민도 되었다.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제 마음을 어쩌지도 못했건만. 하긴 그렇게 쉽게 정리가 될 일이었으면 지금까지 헤매고 있지도 않았겠지.

의정이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펜션 단지로 들어설 때였다. 마당에서 시끌시끌한 말소리와 함께 고기 굽는 냄새가 흘러왔다. 슬쩍 안을 보니 여러 손님이 저녁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허기가 훅 몰려왔다. 우재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간단한 과일이라도 먹으며 기다려야 할 거 같았다.

“의정아!”

의정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민이 커다란 바비큐 통에 번개탄을 피우다 말고 휘휘 팔을 젓고 있었다. 손에는 기다란 쇠 집게도 들려있었다. 인사가 아니라 도와달라는 신호 같아서 얼른 그리로 다가갔다.

“네, 형. 부르셨어요?”

“어어, 마침 잘 왔다. 이것 좀 잠깐 봐줄래? 객실에서 손님이 찾고 있어서 잠깐 자리 좀 비워야 하는데.”

“다녀오세요. 제가 하고 있을게요. 그거 이리 주시고.”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의정은 흔쾌하게 대답하면서 우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 금방 다녀올게!”

우민이 반색하며 쇠 집게를 의정에게 건네고 펜션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우민은 큼지막한 수박 반 통을 들고 있었다.

“이거 손님이 주신 건데 좀 가져가. 금방 썰어줄 테니까.”

배가 고팠던 의정에겐 더없이 반가운 소리였다. 우민은 먹기 좋은 크기로 수박을 썰어선 큰 접시에 가득 담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어, 오늘 수고 많았어. 들어가서 쉬어.”

“네. 형도요.”

의정은 우민이 내민 수박을 받아 들고 꾸벅 인사했다. 코끝에서 단내가 물씬 풍겼다.

의정은 수박을 들고 방갈로로 돌아와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빨갛게 익은 게 정말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입 안에서 침이 살살 고이고 있었다.

딱 세 개만 먹자.

우재도 일찍 온다고 했으니까 남겨뒀다가 같이 먹으면 좋을 터. 의정은 우선 가장 작은 수박 한 쪽을 집어 들었다.

아삭.

한입 베어 무니 입 안에 물씬 단맛이 감돌았다. 냄새만 그런 줄 알았는데 맛도 아주 좋았다. 워낙에 조그마한 걸 선택해서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금방 사라져버렸다.

앉아서 먹을 생각도 못 하고, 의정은 순식간에 수박 세 조각을 해치워 버렸다. 워낙에 수분도 많아서 손뿐만 아니라 입 주변까지 젖어있었다. 물을 틀어 끈적끈적해진 입을 헹구고, 손마저 닦은 후에 탈탈 털며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 언제 왔어?”

의정이 현관에 서있는 우재를 발견했다.

“방금. 뭘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

“아, 수박! 우민 형이 준 건데. 진짜 달고 맛있어. 너도 하나 줄까?”

괜히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서 의정은 대답도 듣기 전에 수박 하나를 휙 들었다. 덕분에 수박 물이 손뿐만 아니라 손목까지 흘러내렸다.

의정은 미처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직 신발도 벗지 않은 우재에게 가져갔다.

“자.”

우재가 손을 들었다. 당연히 수박을 집을 줄 알았는데 막상 손길이 닿은 건 의정의 손목이었다. 여린 살갗이 문질러지는 감각에 의정은 흠칫, 하고 팔을 물리려 했다. 아니, 그러기도 전에 우재가 손목을 감싸 쥐더니 고개를 숙이며 수박을 크게 베어 물었다.

타이밍을 놓친 의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제 손에 들린 수박이 우재의 입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봐야 했다.

평소였다면 별것 아닌 광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불과 몇 시간 전 둘 사이에 있었던 접촉이 떠올라 의정의 얼굴이 후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고작해야 입을 우물거리고, 목울대가 움직이는 거뿐인데. 그게 왜 이렇게 외설적으로 보이는 거냐고. 정말 유혹이라도 하는 거냐고.

그렇게 난감해하던 찰나. 불쑥 우재가 눈을 들어 올리고는 의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서있는 곳이 방이 아니라 우주 저 어딘가라도 되는 듯 숨이 막히고 귀가 먹먹해졌다.

우재는 의정의 시선을 사로잡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평소와 달리 어딘지 야릇하고 위험한 미소가 그려졌다. 새빨갛고 짙은, 농밀하게 익은 과일 같은.

우재가 의정의 입술을 훔친 건 순식간이었다. 강하게 빨린 입술이 놓여나며 얼얼한 감각을 가져왔다. 너무 찰나에 벌어진 입맞춤이라 의정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네, 잘 먹었어.”

달다니. 잘 먹었다니. 그게 수박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걸 의미하는 것인지.

사람을 잔뜩 헷갈리게 해놓고 우재는 의정이 들고 있던 수박 껍질을 가져가며 몸을 물렸다. 바짝 조여졌던 긴장감이 느슨해지고, 붙들렸던 손목이 풀렸다.

의정은 떨리는 손으로 축축해진 제 입술을 만졌다. 어째서인지 아픔은 뜨끈뜨끈한 열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다려. 금방 저녁 해줄게.”

우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의정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심장을 뚝 떨어뜨려 놓은 알파의 뒷모습은 얄미울 정도로 태평해 보였다.

그러나 차마 다시 불러 따질 용기는 없었다. 그랬다가 저를 돌아보는 눈빛이, 방금 전 자신에게 보였던 미소처럼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저녁으로 안주를 겸해서 제육볶음과 쌈 그리고 맥주가 놓였다. 늘 그렇듯 푸짐한 식사였다. 우재가 좋아하는 요리 연구가가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켜놓은 것도 평소와 같았다.

둘 다 본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니 종종 침묵이 생길 때도 있었고, 그럴 때면 각자 시간을 죽이다가 대화를 이어갔으니 어색할 것도 없건만, 의정은 안절부절못한 채 우재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실은 아까부터 이런 상태였다.

“의정아.”

상추로 쌈을 만들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의정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뭐? 하는 눈으로 우재를 보았다.

“입술 아래 뭐 묻었어.”

우재가 불쑥 손을 내밀어 의정의 입술 아래를 문질렀다. 그대로 물러가도 될 텐데. 우재의 엄지는 기어이 입술 위까지 올라와 말랑말랑한 살갗을 부드럽게 쓸었다. 의정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눈동자만 도르륵도르륵 굴렸다.

민망했고, 어색했다. 그냥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땐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왜 그랬느냐고 물어야 하는 건지.

애매한 스킨십은 의정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그렇다고 거부할 생각이 들진 않는데, 또 그렇다고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런 걸 허락하는 것도 안 될 것 같고.

“다, 다 마셨다! 나 하나 더 마실 건데, 우재 넌?”

복잡한 생각에 도망치듯 의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가 봐도 피하는 모습인데 우재는 모른 척 ‘나도 하나 더 줘.’라고만 말했다.

의정은 제 얼굴이 붉어진 것도 모르고 후다닥 냉장고로 달려갔다가 시원한 바람을 맞고서야 제 뺨에 열이 올랐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다. 이건 전부 여름 더위 때문인 거다. 의정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맥주 두 캔을 꺼냈다.

다 먹은 상을 치우고 번갈아 가면서 씻고 나오니 또 이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나란히 놓인 이불을 보는 것도 마음이 심란해졌다.

“왜 그래?”

뭘 해도 부자연스럽게 구는 의정과 다르게 우재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의정은 머리를 감싸고 있던 수건을 툭 바구니에 던져놓고 주춤주춤 이불로 향했다.

“뭘?”

“뭘 그렇게 신경 쓰느냐고.”

“신경 안 썼거든?”

“안 쓰긴. 아까부터 내 눈치도 엄청나게 보고 있으면서.”

“아, 아니라고!”

큰소리쳤지만, 아닌 게 아니었다. 의정은 우재가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도 또 움찔하고 말았다.

“왜, 또 이럴까 봐?”

뭐? 하고 물으려던 질문은 채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쏙 들어가고 말았다. 콧잔등에 쪽, 소리를 내고 멀어진 입술 때문이었다. 우재는 경악한 의정을 보며 짓궂게 웃더니 도로 다가왔다.

이번엔 입이 통째로 삼켜져 버렸다. 등줄기가 바짝 굳고, 허리가 꼿꼿하게 섰다. 두 손이 꽉 오므라져 주먹을 움켜쥐었고, 젖은 머리칼에도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의정은 꽉 숨구멍을 조이며 제 입 안에서 멋대로 움직이는 혀를 느꼈다. 꼭 감긴 의정의 눈꺼풀이 도르륵도르륵 굴러다녔다. 안쪽에 감추어진 눈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움직인 탓이었다.

우재는 귀엽게 구는 의정을 보고 눈웃음을 지으며 혀를 빼내어 의정의 촉촉해진 표피를 핥았다. 느리고 느긋하게, 정말 맛이라도 보듯이.

마지막으로 우재는 쪽, 소리를 내며 도장을 찍듯 입을 맞추고 몸을 물렸다. 그때까지도 의정은 눈을 꾹 감은 채로 입만 살짝 벌리고 있었다.

“아쉽네. 네가 느끼지 못해서.”

의정이 눈을 번쩍 떴다. 아쉽다니 뭐가 아쉽다는 건지. 느끼지 못한다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인지.

요즘 우재가 하는 말은 너무 헷갈리는 게 많았다. 마치 오해하기를 바란다는 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우재와 키스하기 전부터 고뇌의 밤을 보내온 의정에겐 참으로 억울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네가 아느냐고. 내가 밤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욕실에서는 또 무얼 하느라 그리 시간이 늦어지는지. 그렇게 항의하고 싶었다.

의정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재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형광등을 꺼버렸다. 어두워진 시야로 서서히 다가오는 우재가 보였다.

“뭐, 뭐야.”

우재가 멈춘 곳은 제 이불이 아니었다.

“손만 잡고 자자.”

의정은 당황한 눈으로 바짝 다가온 우재를 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어쩐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뜨겁게 느껴졌다. 우재는 혼란스러워하는 의정을 둔 채 제 베개까지 끌어와 누웠다.

“의정 형, 얼른.”

한 손으로 제 머리를 받친 우재가 의정을 불렀다. 아니 근데 형이라니. 또 낯설지 않은 호칭에 심장이 술렁거렸다.

의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표면이 젖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왜 그러지? 생각하니 곧바로 이유가 떠올랐다. 동시에 뺨에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의정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려버렸다.

진짜 어쩌지.

너는 내가 오메가라는 걸 모르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의정아?”

의정은 못 들은 척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우재에게 등을 돌렸다.

덕분에 저를 바라보는 우재의 눈동자가 달라졌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언제 퇴근하세요?”

“예?”

의정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상대를 보았다.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잘생겼고, 키도 크고, 자신감도 있어 보이는 게 딱 보기에도 알파였다. 10분 전, 친구들과 캠핑을 왔다면서 예약을 확인하던 손님이었다.

“이따가 저녁에 시간 되시나 해서요.”

남자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건 왜?”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여전히 어리둥절한 의정을 본 남자의 눈매가 더욱 부드럽게 휘었다.

“아까부터 좋은 향이 난다 했더니 그쪽 페로몬이더라고요. 물론 나만 맡은 거예요. 워낙 은은해서 다른 친구들은 못 느꼈어요.”

난데없는 페로몬 소리와 제 자랑에 의정은 더더욱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휙휙 바뀌는 대화의 흐름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아니, 그보다.

“페로몬이요?”

페로몬이라니. 그런 게 저한테 있을 턱이 있나. 아무래도 남자가 무언가를 단단하게 착각한 거 같았다.

대체 왜?

“아…….”

불쑥 떠오른 생각에 의정은 겸연쩍게 웃고 말았다. 요즘 자꾸만 우재가 치근덕거리는 바람에 그가 발산하는 페로몬이 제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해서였다.

어색하게 남자를 보던 의정은 불현듯 처음 키스했던 날 밤, 우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느끼지 못해서 아쉽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가 했더니……. 송우재, 이 엉큼한 놈 같으니라고.

그렇게 말해놓고 이렇게 제 페로몬을 은근슬쩍 묻혀놓았단 말이지.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이따가 따져 묻더라도 먼저 남자의 오해를 풀어줘야 할 거 같았다.

“아니에요. 착각하신 겁니다. 전 베타입니다.”

의정은 좀 더 분명하게 부정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도통 믿으려 하지 않았다.

“에이,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얘기나 좀 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굳이 아닌 척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말 아니에요. 이건… 같이 지내는 알파 때문인 거 같은데.”

차마 그 알파랑 입술을 물고 빠는 사이라는 말은 할 수 없어서 의정은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한편으로 이 사람에게 굳이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의정을 보는 남자의 표정이 더욱 묘하게 바뀌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발현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래서 모르시는 건가. 이건 절대 알파 페로몬이 아닌데. 알파의 것이었다면 말을 걸지도 않았겠죠.”

나는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라고. 당신이 착각한 거라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말이 막히고 말았다. 당황한 의정을 본 남자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밝히고 싶지 않았다면 사과할게요. 근데 정말 몰랐으면, 가까운 시일 내에 꼭 병원에 가보세요. 지금은 나 같은 감 좋은 알파만 좀 알아차릴 정도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질 거니까.”

남자는 그렇게 충고하고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면서 관리실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의정은 황망한 얼굴로 남자가 사라진 문을 보았다. 오해일 거다. 페로몬이라니.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오메가로 발현되었을 때, 의사는 의정이 페로몬을 갖게 될 확률을 0%대로 보았다. 그건 거의 일어날 일이 없다고 봐야 했다. 스스로 발산할 능력이 없는 만큼 마찬가지로 맡을 수도 없다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정말 그렇다면 우재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래.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차라리 우재가 제 페로몬을 치덕치덕 발라놓았다고 하는 게 더 믿을 만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종일토록 남자가 했던 말이 툭툭 튀어 올라왔다. 만약 정말로 다시 이상 반응이 일어난 거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손수레에 가득 짐을 실어와 막 줄을 풀던 의정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아!”

팽팽하게 당겨졌던 줄이 순식간에 손을 치고 지나가며 날카로운 고통이 전해졌다. 의정은 얼른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벌건 줄이 굵게 그어져 있었다.

“의정아, 괜찮아?”

의정이 짐을 내리는 동안 사이트를 정리하던 우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가왔다. 줄을 놓치는 바람에 바닥에 쏟아진 장비를 줍기 위해 몸을 숙이던 의정은 우재를 보려다가 그의 뒤에 선 남자를 발견했다. 하필이면 오늘 저를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둘이 같은 자리에 있다니.

“어.”

의정은 낭패한 표정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감추었다. 그러곤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떨어진 물건을 집어 올렸다. 태연한 의정과 달리 우재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두고 가. 내가 마저 할 테니까. 가서 냉찜질이라도 해.”

의정은 아니라고 하려던 말을 삼키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남자가 상황을 지켜보면서 무어라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듯 입술을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물론 괜찮은 척하긴 했으나 손등이 점점 아프기 시작한 탓도 있었다.

“어, 알았어. 부탁할게.”

“부탁은. 가.”

불쑥, 우재의 큰 손이 의정의 정수리를 쓱쓱 빗겼다. 의정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퍼뜩 어깨를 떨면서 우재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그대로 끌고 내려와 코에 가져다 댔다.

희미한 섬유 유연제 향만 맡을 수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우재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해.”

“아니… 그냥.”

차마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해서 그랬다는 소리는 하지도 못하고 의정은 어물어물 말을 삼켰다.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왔다. 아니, 대체 이 무슨 황당한 생각인지. 페로몬이 향수도 아니고, 쓰다듬는다고 손에 밸 리가.

너무 그쪽으로만 생각하다가 보니까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의정은 잡고 있던 우재의 손을 내려놓고 빈 수레를 움켜잡았다.

“갈게.”

“어, 이따가 봐.”

의정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아예 바닥을 보며 걸어갔다. 다행히 남자가 알은척하거나 붙잡지는 않았다. 괜히 긴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실로 돌아와 빈 수레를 세워놓고 손등을 보았다. 홧홧한 게 정말 냉찜질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러나 선반이며 보관함, 서랍 등을 뒤져보아도 아이스 팩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민에게 빌려야 할 듯했다.

의정은 다시 밖으로 나와 펜션으로 향했다. 북적북적한 캠핑장이나 계곡과 달리 이곳은 조용했다. 우민은 사무실에 있었다.

“우민 형.”

“어, 의정아. 무슨 일이야.”

의자를 빙글 돌려 앉은 우민이 의정을 돌아보았다. 의정은 영화가 실행 중인 모니터를 힐끔 보았다가 용건을 꺼냈다.

“혹시 아이스 팩이 있을까요?”

“아이스 팩. 응, 있지. 어디에 쓰려고?”

의정은 대답 대신에 손을 보여주었다. 우민이 그사이 더욱 부어오른 손등을 보더니 ‘헉’ 소리를 냈다.

“그거 찜질할 게 아니라 병원에 갔다 와야 할 거 같은데.”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긴. 우재가 안 바쁘면 태워다 주라고 할 텐데…….”

우민은 그렇게 말하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이제 막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행이다. 버스 올 때가 됐네. 당장 가봐. 참, 여기가 동네가 작아서 종합병원이 없어. 터미널 건너에 의원 있거든. 거기로 가봐.”

우민이 아예 일어서서는 의정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고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아예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올 때는 돈 아낄 생각하지 말고 택시 타고 와.”

외진 계곡에 있는 캠핑장이라 버스는 하루에 다섯 번만 운행했고, 그나마도 막차가 5시 20분인 터라 병원에 갔다 오려면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네. 그럴게요.”

의정은 우민이 내민 돈을 순순히 받아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밤나무 아래 세워진 정류장에선 매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아니, 매미뿐 아니라 새가 지저귀는 소리며 풀벌레가 날개를 비비적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도시에선 들을 수 없는, 오로지 이곳에서만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의정은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 상태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 한 대가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며 의정 앞에 멈춰 섰다.

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길 건너에 있는, 우민이 말한 의원을 찾았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손님은 많지 않았다. 접수를 마치고 벤치에 앉아 벽에 걸린 TV를 보았다.

세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가깝지만 의정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일본이 나왔다.

일본이라. 우재가 일했던 곳인데.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일본의 한 식당에서 덮밥을 먹는 장면이 나왔다.

“우재가 만들어준 것도 맛있는데.”

하긴 덮밥뿐인가. 우재가 해준 건 뭐든 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 여름이 끝나면 어디에서 장사를 시작할지 결정할 거라고 했는데 아직도 묻지 못했다.

어쩐지 일이 끝나고 난 후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함께하는 지금이 좋기도 했지만, 아직 우재에게 밝히지 못한 것도 있으니.

“윤의정 님, 들어오세요.”

진료실에서 나온 간호사가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정은 벌떡 일어나서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억제제 처방받으러 왔어?”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 지긋한 의사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힐끗 의정을 보더니 말했다. 다친 손을 내밀려던 의정이 멈칫했다.

“놀러 왔지? 그런 건 미리미리 챙겨 다녀야지, 젊은 사람이. 그러다가 히트 사이클 오면 본인만 고생하는 것도 아닌데. 요즘 휴가철이라 그런가. 왜들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부주의해.”

마치 이런 환자를 몇 번이나 받아보았다는 듯 의사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선생님, 환자분 민망하게 왜 그러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보다 못한 간호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간호사는 의정에게 미안하다는 듯 웃으면서 의자를 가리켰다.

의정은 아무 말 없이 의사 앞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주먹을 쥔 손에 땀이 차는 거 같았다. 손등을 치료하러 온 것이었는데.

“혹시 제 페로몬 수치가 달라졌는지 검사 좀 해볼 수 있을까요?”

과연 이렇게 작은 병원에서도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의정은 꺼끌꺼끌하게 올라온 의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페로몬 검사?”

의사는 의정을 돌아보았다. 왜 그런 귀찮은 걸 하려고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예. 스무 살 때 처음 판정받고 나서는 한 번도 안 해봐서요.”

“굳이 다시 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 페로몬이 그다지 강한 것도 아니고. 열성이지? 왜 불균형이라도 왔어? 그런 거야 히트 사이클 전후로 생기는 거고. 이 정도면 약만 잘 먹으면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잖아?”

“아뇨…….”

히트 사이클 전이나 후로 겪는 불균형이 뭔지도 모르는 의정은 고개를 젓다가 말고 멈칫했다.

지금 의사가 뭐라고 했지?

“페로몬이요? 지금 저한테 그게 나오나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의사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의정은 주먹을 쥔 손에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부어오른 손등이 아픈 것도 몰랐다.

“내가 여든 줄이긴 해도 아직 정정하다고. 그런 것도 모를까. 검사해 봐, 그럼.”

의사가 불퉁하게 말하고는 의정 뒤에 서있는 간호사에게 눈짓했다.

“지하 1층에 가시면 검사실 있어요. 그쪽에 가셔서 받고 오세요.”

간호사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바깥을 가리켰다. 의정은 진료실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갔다.

오래된 건물이어서인지 지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났다. 벽도 제대로 닦지 않아 먼지가 보이고, 천장에는 거미줄까지 보였다. 이런 데서 제대로 검사나 되려나.

“뭐 하러 오셨어요?”

흰색 의사복을 입은 의사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물었다. 의정은 간호사에게 받은 검진표를 보여주었다.

“페로몬 수치 검사하려고요.”

검사는 빠르고 간단했다. 그냥 주사로 피를 뽑더니 잠시 밖에서 기다려보라는 게 전부였다. 그 후 3분도 되지 않아서 종이를 되돌려 받았다.

“1.5%네. 진짜 열성이구만.”

의정이 내민 걸 받아 든 의사가 무심하게 내뱉었다. 의정으로서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1.5%요?”

스무 살, 처음 오메가 판정을 받았을 때 받은 페로몬 수치를 한참 웃도는 기록이었다.

“다시 해줘? 그래봐야 더 올라갈 것도 없는데. 유전자 형질이 뭐, 원한다고 마음대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자꾸 이상한 연구니 약이니 나오면서 헛된 생각 많이 하는 거 같은데, 그런 거 믿지 마.”

의사는 그것으로 진료가 끝났다며 나가보라고 눈짓했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 넋이 나간 의정은 멍한 얼굴로 진료실을 나와 수납 창구로 향했다. 직원은 의정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처방전을 발행해 주었다.

“이건 뭔가요?”

“억제제 처방받으셨네요.”

종이를 힐끗 올려다본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억제제라니. 정말로 나한테 페로몬이 나온다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염두에 둔 적 없었다. 그런 낌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도통 답을 낼 수 없었다.

의정은 답답한 얼굴로 처방전을 쥔 채 병원을 나섰다. 약국은 병원 정문에서 3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달랑 그거 하나뿐이라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어서 오세요.”

의정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약사에게 처방전을 주었고, 약사는 1분도 되지 않아 약이 여러 개 담긴 봉투를 가지고 나왔다.

“증상이 나타날 때 즉시 드시고요. 괜찮겠지, 하면서 방심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약사가 미소를 띠며 설명하고 약 봉지를 하얀 겉봉에 밀어 넣었다. 의정은 카드를 건네며 안을 슬쩍 보았다. 평생 먹을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오메가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안에 담긴 약을 살피던 의정이 눈을 찌푸렸다.

약이 낯설지 않았다.

의정은 손을 넣어서 약 봉지를 집어 들었다. 분홍색과 흰색이 반씩 나뉜 캡슐이 들어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며칠 전 우재가 먹여준 약과 같은 것이었다.

“카드 받으세요.”

의정은 약사가 내민 카드를 받으면서 물었다.

“이렇게 생긴 감기약이 있나요?”

“아뇨. 이거 하나뿐이죠. 억제제가 감기약이랑 비슷하게 생기면 큰일 아니겠어요?”

감기 걸렸을 때 잘못 먹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약사가 친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긴 그렇겠지. 오메가도 아닌 베타가 이걸 먹어봐야 효과도 없을 테니. 도리어 독한 약제 때문에 탈이 날지도 몰랐다.

의정은 수고하시라고 인사하며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약 봉지를 움켜쥐고 터미널 앞에 줄지어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탔다. 그러곤 은근히 룸미러로 기사를 살폈다. 기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베타인 듯했다. 하긴 알파나 오메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돌아가는 내내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우재가 왜 저를 속였는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갑작스럽게 접근했던 게 히트 사이클 때문이었는지.

정말 무의식중에 흘린 페로몬 때문에 그런 거라면, 실망이 클 것 같았다. 아니, 그것도 우습긴 했다. 고작 입맞춤 몇 번일 뿐이었는데.

자신이야 처음이니 의미를 둔다고 해도 우재도 그랬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먹이 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 알파가 아니던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시간이 갈수록 우울감만 쌓여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길마저 제 혼란스러운 마음같이 느껴졌다.

어느덧 캠핑장이 보였다. 그쯤 되니 도리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정은 그저 침울하게 내려앉은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우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으나 연결이 되지는 않았다. 끊고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하.”

바빠서 그럴 터였다. 출발 전에도 손님이 있었고, 오후에 체크인하는 팀도 확인했으니. 이유가 있다는 걸 아는데도 괜히 짜증이 났다.

의정은 날카로워진 숨을 훅, 뱉어내고 일단 우민부터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어쨌건 사실대로 털어놔야 했다. 그로 인해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돌아오는 동안 기껏 정리한 건 그것뿐이었다.

“의정이 왔구나. 손은 괜찮대?”

막 사무실을 나서던 우민이 먼저 의정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손으로 향했다. 병원에 다녀왔는데 붕대도 감지 않았으니 의아해하는 눈빛이었다.

“네. 보기만 이렇지 크게 다치진 않아서 약만 처방받아 왔어요.”

의정은 손등을 올려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실은 계속 욱신거리고 아팠으나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은 외적인 상처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다행이네. 고생했어. 배고프겠다. 라면 좀 끓여줄까?”

“아뇨. 그보다 형, 저 할 말 있어요.”

“그래. 뭔데?”

금방이라도 라면을 끓여줄 듯 반쯤 몸을 돌렸던 우민이 다시 의정에게 돌아섰다. 그러나 막상 우민을 불러 세운 의정은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오면서 충분히 결론을 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한참 그렇게 손가락만 공연히 꼼지락하던 의정은 말 대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약 봉지를 꺼냈다. 우민이 밖으로 나온 약을 확인하곤 ‘아.’ 하고 탄식 같은 한마디를 흘렸다. 그도 이게 어떤 약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억제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였다. 그러니 베타인 우민이라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제가 베타라고 속였습니다.”

의정은 사실을 털어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캠핑장에 오면서 몇 번이고 결심해서인지 망설임도 없었다. 그런 의정을 바라보는 우민의 눈빛이 복잡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채용 공고에도 형질 무관이라고 적었는데.”

“죄송합니다.”

“아냐. 미안해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그냥 진작 말을 해줬으면, 그날 우재가 급하게 약을 찾을 일이 없었을 텐데, 싶어서 그런 거지.”

“네?”

아니라고.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의정이 얼굴을 들었다. 의정의 의아해하는 눈빛을 본 우민은 뒤늦게 제가 한 말을 되짚어 보곤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모른 척하기로 했는데.”

“모른 척하다뇨?”

대체 무엇을.

의정이 의문스럽게 묻자 우민이 대답을 망설이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의 시선은 의정을, 펜션을, 그보다 더 먼 캠핑장을 어지러이 헤맸다. 그쯤 되니 의정도 그가 감추려고 한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민 형, 알려주세요.”

머뭇거리던 우민은 의정이 물러설 기미가 없는 걸 알아차린 듯 한숨과 함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어, 그러니까 그날, 비 많이 오고 나서 너 감기 걸렸잖아. 그때 말이야…….”

우민은 그날 밤 일을 떠듬떠듬 털어놓았다.

관리실에 갔던 우재가 억제제를 찾지 못해서 우민을 찾아간 것. 우민이 그게 왜 필요했는지 물었다는 것. 우재가 한참 망설이다가 네가 히트 사이클이 왔다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것.

그리고 상비약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우재가 한 시간 반이나 떨어진 시외에 있는 종합병원까지 가서 약을 받아 왔다는 것도.

우민의 말을 듣던 의정은 점차 표정을 잃었고, 어느 순간 아예 사라져버렸다.

“우재는 네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절대 알은척하지 말라고 했어. 괜히 이런 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만두는 거 싫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까 의정아. 정말, 그만두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알겠지?”

성수기라고 해봐야 이제는 거의 막바지였다. 지금 그만둔다고 해서 어려울 것도 없는데 우민은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정을 달랬다.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의정은 우민이 사실대로 말해준 덕분에 마음을 굳혔다.

“죄송해요, 우민 형.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요. 무책임한 소리지만, 그만두고 싶습니다.”

“의정아.”

“부탁드립니다.”

허리까지 숙인 의정은 단호해 보였다. 우민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만, 하루만 더 고민해 봐. 응?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아직 여름 시즌도 안 끝났는데 네가 이대로 그만두면 우리도 이래저래 곤란하고. 응?”

책임감을 상기시키는 말 속에 들어있는 간절함에 의정도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의정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돌아섰다. 벌써 7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날이 밝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숙소로 향하던 걸음을 돌렸다. 속이 답답하니 실내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의정은 곧장 숲으로 향했다. 항상 이리로 올 때면 혹시나 우재와 마주칠까, 하는 기대로 두리번거렸는데 이번엔 도리어 만나고 싶지 않았다.

비밀 장소까지는 금방이었다. 지정석처럼 된 흰 바위는 해가 기울어서인지 주변보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딱 지금 제 기분 같았다.

의정은 바위에 올라가 무릎을 세운 채 그 위에 턱을 괴고 앉아, 폭포가 떨어질 때마다 크고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