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우재는 저 멀리 숲 속으로 사라지는 의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우민에게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언제 온 것인지. 왔으면 저부터 찾을 것이지 왜 눈길도 안 주고 가버린 걸까, 궁금했다.
그러다 뒤늦게 핸드폰을 생각했다. 연락했는데 바빠서 몰랐던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우재가 막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였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재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멈칫하며 상대를 보았다. 그쪽은 눈을 마주치니 생긋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캠핑 장비를 대여해 직접 설치한다고 하더니 처음부터 붙들고 계속 도와주길 바라는 손님이었다.
“아까 설명해 드린 거랑 같아요.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음……. 어려운데.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는 모습에는 나긋함이 묻어났다. 우재가 알파인 것을 알아차리고, 본인이 오메가임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우재는 눈앞의 오메가보다 당장 숲으로 들어가 버린 의정이 더 신경 쓰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일도 있어서. 여기서부터는 충분히 혼자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소 무성의하게 대답한 우재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뒤에서 ‘이봐요.’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도리어 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숲으로 들어서며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부재중 표시 여러 건이 찍혀있었다. 진동으로 해둔다는 게 무음으로 바뀌어 있어서 울리지 않았던 듯했다.
설마 연락이 안 된다고 오해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까지 들던 때, 우민이 전화를 걸어왔다.
“어, 형. 무슨 일이야.”
―아까 의정이가 왔는데. 그만둔다고 하더라.
우민이 대뜸 꺼낸 말에 바쁘게 움직이던 우재가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소리야, 그게?”
―베타라고 속여서 미안하다면서 더 못 하겠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그래서 그때, 너 아팠을 때 형질에 관해서 우연히 알게 됐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했는데…….
우재는 거기까지 듣고는 알았다면서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지금은 우민과의 대화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주변은 돌아보지도 않고 숲으로 사라지던 의정이 떠올랐다. 역시 전화 때문이 아니었다.
우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비밀 장소에 가까워지자 옹송그리듯 앉은 의정이 보였다. 물에 반사된 얼굴에는 침울한 빛이 가득했다.
우재는 조금 거칠어진 숨을 다스리려 잠시 멈추었다가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몇 걸음 앞으로 가까워졌을 때였다.
“왜 숨겼어?”
기척을 알아챈 것일까. 의정이 수면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걸었다. 우재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다시 멈추어 섰다.
“네가 원하지 않을 거 같았어.”
의정이 뜬금없이 던진 질문에 우재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그럴 거 같긴 했다. 의정이 그간 알아온 우재는 남이 곤란할 일은 침묵으로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 그러니 서운해하거나 화낼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만 속이 울컥거리는 건, 자신이 애써 감추려 했던 진실을 우재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걸, 처음부터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는 걸 네가 알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네가 동갑이 아니라 연하라고 했을 때 그걸 빌미로 어떻게든 진실을 숨기려 했던 내 치졸함이, 너에게 까발려졌기 때문에.
차라리 끝까지 몰랐으면.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내가 밝히게 되었다면. 이보다는 괜찮았을 텐데.
그런데 그러기 전에 이미 네게 전부 들켰다는 걸, 그걸 또 배려한답시고 네가 내게 숨겼다는 게.
“말하지 그랬어.”
“너한테 예의가 아니잖아, 그런 거.”
“그래도. 물어볼 수 있었잖아.”
무언가 상황이 뒤바뀐 거 같았다. 추궁해야 할 사람은 우재인데, 도리어 의정은 제가 억울하다는 투였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데 자꾸만 그렇게 말이 나갔다.
“응, 의정이 네가 말하면 그러려고 했어.”
우재는 이 상황이 이상하지도 않은지 그저 침착하기만 했다. 그게 도리어 의정을 삐딱하게 만들었다.
“그러냐. 그럼 지금 말하면 될까. 미안했다. 내가 숨기고 있었어, 오메가라는 거.”
“왜 그렇게 말해. 네가 뭐가 미안해.”
“베타라고 거짓말했으니까!”
네 그런 태도가 나를 점점 더 치졸하게 만든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의정은 눈을 부릅뜨고 우재를 노려보았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도리어 애처로워 보인다는 걸 의정은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그만둔다고 했어? 거짓말한 게 미안해서?”
의정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우재가 푹, 한숨을 쉬며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왜 그렇게 무책임해.”
비난하는 말에도 의정은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꾹꾹 눌러놓은 투정 같은 말들이 그대로 쏟아져 나올 거 같았다.
나도 알고 있다고.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지금까지는 페로몬이 없어서, 히트 사이클을 겪지 않아, 열성이라 베타처럼 행세했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그럴 수 없다고.
얼굴도 모르는 알파가 페로몬을 느끼고 접근했으니 앞으로도 모르는 거 아니냐고. 그러면 캠핑장에도 피해가 갈 텐데 어떻게 계속 다닐 수 있겠느냐고.
차마 그렇게 전부 털어놓을 수 없으니 의정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침묵밖에 없었다.
“아니면 피해가 될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야?”
의정이 속으로 무엇을 삼켰는지 알아차린 것처럼 우재가 물었다.
“왜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 건데.”
도와달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고개를 든 의정의 눈은 평소보다 더 검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재의 표정도 달라졌다. 낯빛은 단단하게 굳었고 눈빛도 차가워졌다. 의정의 그런 모습에 화라도 난 거 같았다.
“도움을 청하라니. 어떻게 그래? 너랑 나랑 뭐라고.”
서로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 도리어 서로를 알아가는 지금이 더욱 조심스러울 때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의정은 그에게 가장 큰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차라리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이미 기회는 지나가 버린 지 오래고, 남은 건 저토록 싸늘해진 우재였다.
그래, 이렇게 될까 봐 그랬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재가 실망한 표정을 지을까 봐. 그 때문에 상처 입을 게 무서웠으니까.
의정은 쓰게 웃고 말았다.
“뭐야, 지금 그 말은. 너랑 나랑 아무 관계 아니라는 거야?”
우재의 목소리도 달라졌다. 잔뜩 낮아지고 거칠어져 정말 화가 난 투였다.
“그럼 나랑 키스는 왜 했어?”
뒤이은 말은 더더욱 어이없는 소리였다. 의정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하고 우재를 보았다. 의아해하는 눈빛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우재의 목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아무 사이 아닌데 왜 내가 입 맞췄을 때 밀어내지 않았어?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랬는데 왜 부정하지 않았느냐고!”
“아냐. 그게 아니라…….”
우재가 화를 내는 포인트가 이상했다. 그는 의정이 베타라고 속인 것보다 도리어 두 사람이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는 말에 더 분노하고 있었다.
의정은 제멋대로 휘어버린 대화의 방향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 우재가 의정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몰아쳤다.
“그렇게 마음 연 것처럼 그래 놓고. 지금 와서 아니라고 그러는 거야?”
“그건 내가 오메가라…….”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해서 고민했을 뿐 그런 게 아니었는데. 간신히 의정이 대화의 본질을 살려 어물어물 꺼내는 말은 다 끝나기도 전에 잘려 나갔다.
“오메가면 뭐. 네가 오메가든 베타든 상관없이 좋았어, 나는. 그런데 넌 내 마음도 무시하겠다는 거야? 단지 네가 말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아냐. 아냐. 아냐, 우재야. 아냐. 그게 아냐. 나도 좋아해. 나도 너 좋아하는데.”
우재를 좋아하는 것을, 그와 함께하고 싶은 것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 감추고 있는 게 괴로웠을 뿐.
점점 저를 몰아붙이는 말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황한 의정이 우재의 팔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도리어 우재가 먼저 의정의 팔을 낚아챘다.
몸이 훅 앞으로 끌어당겨지고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한 뼘 앞으로 다가온 우재의 눈동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거봐, 거짓말쟁이. 아무 사이 아닌 것도 아닌데 왜 그만둔다는 소리를 해.”
일렁이는 늪을 망연히 보고 있으려니 그보다 더 진득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정은 제대로 반박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입술을 덜컥 우재가 삼켜버린 탓이었다.
키스는 폭우로 불어난 계곡처럼 불시에 의정을 휘어 감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혹은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그렇게 우재는 의정을 단단히 가둔 채 모두 휩쓸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호흡마저 가빠졌다. 소리도, 감각도, 시야마저 전부 먹먹해져 정말 물에라도 잠겨버린 것 같았다.
“봐. 이게 어떻게 아무 사이가 아니야, 너랑 내가.”
그렇게 의정의 전부를 침몰시켰던 우재가 부상하듯 말했다. 여전히 낮으나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의정의 젖은 입술을 닦아주는 손길조차 상냥했다.
의정은 가물가물한 눈으로 멀어지는 우재의 엄지를 보았다. 대체 무엇에 화를 낸 것인지 이제는 정말 헷갈렸다.
또,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질책하듯, 우재가 재차 입술을 겹쳐왔다. 마치 달래기라도 하듯 아까보다 더 부드럽고 상냥한 접촉이었다.
의정은 어색하게 내려놓은 손으로 우재의 어깨를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 우재도 커다란 손으로 의정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억세지 않은, 그러나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단단한 손길이었다.
그대로 뒤로 잡아당겨져 턱이 들리고 깊숙한 곳으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입천장의 굴곡이 혀에 문질러졌을 때는 ‘흐읏.’ 하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의정은 제가 낸 소리에 놀라 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한참 입 안을 노닐던 우재의 혀는 치열을 핥고, 흔적 없는 사랑니 안쪽을 더듬다가 어금니와 송곳니를 지나쳐 앞쪽으로 빠져나갔다.
“하아. 하. 하아. 하아…….”
한참을 물속에 있다가 다급히 밖으로 올라온 것처럼 의정에게서 거친 숨이 흩어져 나왔다. 어깨를 잡은 손도 힘이 빠져 아래로 흘러내렸다.
우재의 판판한 가슴에 얹어진 손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우재가 숨 쉴 때마다 쿵쿵, 뛰는.
“그만두지 마. 내가 책임질 테니까.”
뭘, 어떻게 책임진다는 것인지. 뭘 고민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의정은 차마 싫다고 밀어낼 수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뜨거운 눈동자에선 그것 외에는 다른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우재는 의정이 눈빛에 띄운 의문을 금세 알아차렸다.
“나도 페로몬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어.”
의정은 조금 놀란 눈으로 우재를 보았다. 믿기지 않아서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재는 뭐든 능숙해 보이는 알파였다. 심지어 알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우성. 그런 우재가 페로몬으로 고생했다니.
“나는 베타였다가 알파로 발현한 케이스였거든. 그 후로 내가 원치도 않은데 자꾸만 페로몬이 흘러나왔어. 덕분에 펜션에 찾아온 손님 중에 민감한 알파나 오메가가 곤란해했고, 부모님이나 형도 난감해했지. 그런데 주변에는 전부 베타뿐이라 마땅히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어.”
“아.”
그건 의정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발현 자체를 혼자 겪었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상황이 아니었다. 오로지 홀로 견뎌야 했던 혼란과 걱정, 불안, 두려움. 누구에게도 섣불리 털어놓지 못하고 꽁꽁 감추어야 했던 건 그런 갈등이 지층처럼 쌓이고 쌓여 굳어진 결과였다.
그런 비슷한 일을 우재 역시 겪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그러더라고. 그런 건 능숙하게 페로몬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우재는 의정보다 더 용감했다. 어쩌면 그는 알파였기 때문에 좀 더 당당했는지도 몰랐다. 아니, 의정은 이렇게 삐딱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가 용기 있었다는 것만 알자.
의정이 두서없이 생각하는 동안 우재도 무얼 기억했는지 미소를 띠었다. 순간 의정의 머릿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페로몬을 다룰 수 있는 사람. 그 말이 신발 속 가시처럼 콕, 박혀 들어왔다.
“조언을 받기는 했는데 막상 그런 상대를 찾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형이 대학 때 알던 동창에게 연락해서 소개해 줬고,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았지.”
그게 누구냐고. 알파였느냐고. 혹은 오메가였느냐고. 자꾸만 묻고 싶은 충동 때문에 배까지 싸해져 왔다.
그런 의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우재는 여전히 누군가를 떠올리듯 먼눈을 하고 마저 말했다.
“처음 페로몬을 느꼈을 때는 혼자 제어하기 힘들어.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마침내 제게 돌아온 믿음직한 눈동자를 보며 의정은 간신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 가장 알고 싶은 건 페로몬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아니라 그걸 우재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정은 차마 솔직하게 물어볼 수 없었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이건 빼도 박도 못할 못난 질투였다.
제 마음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의정을 이끌고 우재는 곧장 비밀 장소를 벗어났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의정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말도 붙이지 못했다.
숲을 내려와 캠핑장을 지나치고, 계곡 사이로 놓인 다리를 건너고, 관리실마저 스친 둘은 금세 숙소로 돌아왔다.
의정은 다스려지지 않는 호흡을 헐떡이며 그때까지도 우재에게 붙들린 제 손을 보았다. 잡힌 부분에서 뜨거운 기운이 전해져 왔다. 그만 놓아달라고 말해도 될 텐데 이상하게도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지금 페로몬 흘러나오는 건, 알고 있어?”
머뭇거리는 의정을 대신해 우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의정은 머뭇거리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알파라던 손님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향이 난다기에 그저 우재 탓으로 돌렸는데, 손님은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정이 모르는 줄 알고 친절하게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그것조차 오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사조차 의정이 오메가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쯤 되니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페로몬을 흘리고 있다는 걸.
그렇다고 또 자기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우재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응이 나오고 말았다.
“약은?”
“받아 왔어. 먹진 않았고.”
실은 너무 많은 고민이 한꺼번에 몰려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굳이 그런 말까진 할 필요 없을 거 같았다.
“그래? 그럼 그건 식사한 후에 먹고 약이라도 바르자. 아직 부었네.”
우재가 의정의 부은 손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의정의 시선도 그리 향했다. 병원에서부터 워낙 정신이 없었던 터라 아픈 것도 잊고 있었는데, 그제야 제가 다쳤다는 게 다시 생각났다. 당연히 관리실로 갈 줄 알았는데, 우재의 걸음은 방갈로로 향했다.
“앉아봐.”
의정은 얌전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마주 앉은 우재를 보았다. 우재는 아주 신중한 얼굴로 의정의 손을 잡고 손등에 연고를 펴 발랐다. 어찌나 조심조심하는지 손등에 간질간질한 감각마저 느껴졌다.
“붕대는 안 감아도 될 거 같고. 그것보다 의정아, 페로몬을 제어하는 법 알아?”
우재가 의정의 손목 안쪽을 검지로 느리게 문지르며 물었다. 손등에 약을 바를 때와 또 다른, 어딘지 모르게 야릇한 기분에 의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페로몬을 제어한다고? 어떻게?”
우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귀엽다는 듯 보며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 웃음조차 또 달랐다. 언제나 쨍하고 밝기만 하더니 왜 그리 관능적이게 느껴지는지.
“지금부터 내가 알려줄게. 잘 따라올 수 있지?”
느낌 탓인지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점성을 띤 것 같았다. 어쩐지 긴장이 되어 의정은 마주 보지도 못하고 은근히 눈을 내렸다.
그때, 길고 매끄러운 검지가 턱을 받치고 의정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의정은 직시해 오는 눈빛에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기분 탓인지 공기마저 밀도가 달라진 것 같았다. 좀 더 농밀하고 녹진하게.
“아…….”
불현듯 이것이 우재가 드러낸 그의 페로몬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 향도, 형태도 없으나 주변을 부드럽게 휘감는 기운.
“느껴져?”
의정은 신기한 눈으로 우재를 올려다보았다. 우재가 눈꼬리를 휘며 빙긋이 웃었다.
“좋아. 그럼 어느 정도로 느낄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자.”
느낌뿐이던 페로몬에 서서히 향이 배어들었다. 비에 젖은 땅에서 맡을 수 있었던 달착지근하면서도 약간 비릿했던. 언젠가 맡아보았던 향기.
“아…….”
어느새 방 안은 우재의 페로몬으로 가득해졌다. 마치 깊고 혼탁한 물에 잠기는 듯 시야가 좁아지고 숨이 차오르는 기분이 느껴졌다. 아니, 어느 순간 의정은 온몸에 힘이 쑥 빠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우재가 비틀거리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의정을 붙잡았다. 의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저를 지탱한 알파를 보았다.
낯설어 보였다, 우재가.
처음으로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다름 아닌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을.
“의정아, 괜찮아?”
“어… 어……. 괜찮아.”
실은 아직도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의정은 넋 놓은 대답을 꺼내놓고서야 자신이 바닥에 주저앉은 걸 알았다. 알파의 페로몬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치 그건 한여름에 쏟아지는 폭우처럼 순식간에 저를 푹 잠기게 했다. 페로몬에 노출된 몸 역시 한기가 든 것처럼 계속 떨렸다.
“아, 확실히 갈무리됐네.”
먹먹해진 귓가에 우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정은 다소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우재는 진단을 내리는 의사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페로몬.”
“…그래?”
의정은 괜히 제 몸을 이리저리 보면서 코를 움찔거렸다. 페로몬이 향수도 아니니 맡을 수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보아야 소용도 없는데 무의식중에 한 일이었다.
우재는 강아지처럼 두리번거리는 의정의 머리를 붙들고 다시 제게로 가져왔다.
“페로몬은 키스랑 같은 거야.”
비로소 내려진 처방은 엉뚱했다. 의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뗐다.
“뭐?”
“처음엔 누구나 서툴잖아. 그럴 땐 능숙한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게 필요하거든. 페로몬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우재가 눈빛으로 의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어 한 손으로 의정의 허리, 다른 손으로는 의정의 옆얼굴을 살며시 감싸고 그대로 몸을 당겼다.
곧 입술이 닿았다. 동시에 우재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분명 몇 번이나 있어온 일인데 유독 긴장되었다.
의정이 저도 모르게 힘을 준 입술을 우재가 가볍게 터치했다. 마치 긴장하지 말라는 듯 그야말로 살짝씩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각은 어딘지 모르게 의정의 기분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어깨에 손 올려.”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간지러움을 참던 의정은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순순히 손을 들었다. 몇 번이나 입맞춤이 이어지는 동안 우재가 발산하는 페로몬의 파고도 높아졌다가 잦아지길 반복했다.
그사이 어색하게 끌려가기만 하던 의정도 조금씩 우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입술을 비비다가 턱을 조금 비틀어 안으로 혀를 밀어 넣는 것까지.
호흡과 호흡을 나누고, 감정과 감정이 얽히고, 두 사람이 서로 흘리는 페로몬이 천천히 뒤섞이고 있다는 것을 아직 의정은 알지 못했다.
“하아.”
의정은 조금 거칠어진 숨을 뱉으며 우재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시선은 촉촉하게 젖은 우재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적응 좀 됐어?”
그게 키스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페로몬을 말하는 것인지.
“원래 그런 건 안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냐.”
의정이 퉁명스럽게 말하는데도 마주 앉은 우재는 기분 좋은 듯 웃음을 띠었다.
“아니. 우린 공부 중이니까.”
공부 중이었던 걸까. 사실 지금 어떤 게 맞는 것인지 의정은 그걸 판단할 정신이 없었다. 입술은 온통 물기로 번들거렸고, 몸은 열기로 가득했다. 우재의 어깨에 올라간 줄 알았던 손은 왜인지 그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둘은 틈 없이 바짝 밀착한 채였다.
다시 우재의 얼굴이 다가왔다. 의정은 그게 키스를 시작할 신호라는 걸 알 만큼은 되었다. 이번엔 의정이 먼저 우재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어디선가 은은한 향이 풍겨 나왔다. 나무가 풍기는 청량하고도 차분한 냄새와 여름풀이 뿜어내는 달콤하고도 싱그러운 향기. 그게 우재와 제가 발산한 페로몬이라는 걸 의정은 조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재의 말대로 키스는 페로몬과 같았다. 처음엔 그저 우재가 하는 대로 따라가느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나 어느 순간 자신에게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 * *
다음 날 아침에 만난 우민은 우재에게 먼저 소식을 들었는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맙다, 의정아!”
의정은 자신의 두 손을 덥석 쥐고 붕붕 흔드는 우민을 보면서 도리어 미안하고 한편으론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어젯밤 페로몬을 제어하는 법을 배운다는 핑계로 내내 우재와 키스를 나누었다. 눈빛과 숨소리, 입술의 감촉, 혀의 얽힘, 페로몬까지 모든 걸 그와 나누었다.
어느 순간엔 무엇이 먼저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빠져들어서 하반신에까지 열이 몰리는 바람에 곤란한 지경이 되었었다.
과연 우재는 우민에게 자신이 그만두지 않기로 한 이유를 무어라고 설명했을지 궁금했다. 또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했을지도.
“아니에요. 저야말로 그간 숨겨서 죄송해요. 걱정시켜 드린 것도 그렇고.”
의정이 푹 고개를 숙이며 우민에게 사과했다.
“그래. 내가 얼마나 속을 태웠다고! 봐라. 밤새 고민하느라 시꺼먼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온 거. 그러니까 끝까지 책임져야 해.”
우민이 장난스럽게 눈 밑을 검지로 쿡, 찍었다. 아무래도 다른 낌새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의정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맡겨주세요.”
믿음직스럽다는 듯 의정을 본 우민이 돌연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우재는 벌써 관리실에 들어갔고, 이른 시간이라 손님도 없었다. 우민은 음모를 꾸미는 듯한 은밀한 얼굴로 의정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절대 우재한테는 말하지 말고 혼자만 알고 있어.”
우민은 신중하게 손으로 입까지 가렸다.
“우재가 처음 알파로 발현한 게 막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였어. 하필 그때 또 사춘기까지 같이 왔지 뭐야. 그래서 부모님이나 나나 얼마나 고생했다고. 애는 한없이 삐딱하지, 말은 또 어찌나 안 하는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
“우재가요?”
성실과 다정함의 상징 같은 우재가? 물론 의정은 어제 그때 일을 우재에게 듣긴 했다. 그렇지만 도저히 반항기 다분한 우재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어, 의정이 넌 상상도 못 할걸. 무슨 말을 해도 대꾸도 없고 뚱하니 앉아있기만 하고, 대체 왜 그런지 알 수가 있어야지. 혹시 갑작스러운 발현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건가 해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그 후로는 아예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 거야. 그러더니 어느 날 나보고 친구 중에 알파 있지 않느냐면서 당장 소개해 달라고 닦달하는 거 있지.”
어제 우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같은 상황인 거 같은데, 두 사람이 말하는 게 전혀 달랐다.
“그래서 전화 열심히 돌려서 간신히 대학 동창 중에 하나랑 연결해 줬지. 그랬더니 이 녀석이 대뜸 만나겠다고 서울로 가버린 거 있지?”
“우재가 왜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어요?”
“알려줬어. 한참이 지난 후에. 페로몬 때문이었다고. 자기 딴에는 그렇게 생각했나 봐. 나나 부모님은 베타니까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거라고. 정말 딱, 사춘기 같지?”
그렇게 말한 우민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흠흠, 헛기침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쑥스러워하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의정은 차마 우재에게는 묻지 못했던 궁금증을 내비쳤다.
“소개해 준 분은, 오메가였어요?”
“응? 아니! 당연히 알파지. 우재는 제 형질 때문에 고민했잖아? 그러니까 같은 알파가 좋을 거 같았거든.”
우민은 의정이 감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의정은 여러모로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슬며시 웃었다. 그걸 또 어떻게 해석했는지 우민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턱턱, 두드렸다.
“그러니까 의정이 너도. 만약에 그런 일 때문에 고민이라면 우재처럼 속으로 꽁꽁 감추지 말고 알려줘. 알겠지? 이래 봬도 내가 해결사야.”
또 툭, 하고 의정의 어깨를 도닥인 우민이 씩 웃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라고. 그게 뭐든.”
어쩐지 솜이라도 삼킨 듯 목 안쪽이 간질간질해졌다. 의정은 크게 말하면 재채기라도 할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가족도 아니고, 그저 한 계절의 인연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해해 주고 도와주려 하는 우민이 고맙고도 미안했다.
“뭘, 이런 거로. 그럼 난 간다. 오늘도 잘 부탁하고, 수고해.”
“네. 형도요.”
우민이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먼저 돌아섰다. 의정은 우민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우재가 기다리고 있을 관리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공기와 함께 그보다 더 훤하게 생긴 알파가 보였다.
“형이 뭐래?”
의정은 눈을 가늘게 만들고 우재를 보았다. 한여름 우람하게 자란 굴참나무 같다고 생각했다. 우재가 내보이는 페로몬 역시 본인에게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 단단하고 든든하다고 느꼈다. 그런 우재에게도 그를 이해해 주고 곁을 지켜준 가족이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재가 이렇게 굳건하게 서있을 수 있다는 것을. 또 우민이 사춘기 반항처럼 방황했던 그의 이야기를 해준 덕분에 자신 역시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
“끝까지 책임지고 열심히 하래. 네가 괴롭히면 도움 청하고.”
의정이 뻔뻔하게 내뱉은 거짓말을 우재는 그저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아니, 어느새 가까워진 그가 의정의 양 뺨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입을 맞추고 물러갔다.
* * *
“자, 먹자.”
우재가 쟁반을 가져왔다. 노란 냄비에는 라면이 담겨있었고 둥글고 흰 접시에는 김밥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성수기가 지나면서 손님이 조금 줄기 시작하니 우재의 퇴근도 빨라졌다. 어쩌면 그건 핑계고 둘이 보낼 시간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닐까 했다. 뭐든 간에 의정도 썩 나쁘지 않았다.
“얼른 먹어.”
“어.”
의정은 고슬고슬한 면발을 얼른 건졌다. 고작 인스턴트 주제에 맛이 끝내줬다.
저녁을 먹고는 으레 그렇듯 맥주 하나씩을 손에 쥐고 TV를 켰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도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었다. 본래 드라마나 예능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그나마 우재가 보던 것도 방영하지 않으니 더 그랬다.
의미 없이 채널을 옮겨 다니던 의정의 손가락이 떡하니 멈췄다.
비 내리는 어두운 골목.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벽에 세운 채 키스하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주인공은 열성 오메가인데 히트 사이클 때문에 페로몬이 제멋대로 날뛰어 여러 알파의 표적이 되어있었다. 도망치던 오메가는 점점 위험해졌고, 절체절명의 순간 알파 주인공에게 구출되었다.
입맞춤은 오메가를 구한 알파가 요구한 대가였다. 또 알파가 오메가의 페로몬을 갈무리해 주는 방법이었다.
부슬비가 내리고, 주변은 어두웠으며 음악마저 끈적끈적하니 점점 더 분위기는 에로틱해져 갔다. 바짝 몸을 붙이고 서로의 입술을 격정적으로 탐했다. 알파의 손이 오메가의 셔츠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적나라하게 나오지는 않았으나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헉!”
의정이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꽉 쥐었다. 영화가 19금도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저런 장면이 왜. 눈길이 저절로 옆에 앉은 우재에게 향했다. 우재는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뭐야, 나만 이래?’
의정이 속으로 구시렁거릴 때였다.
“해볼래?”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퍼뜩 뛰었다. 의정은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놀라서 우재를 보았다.
“뭐, 뭘?”
“어떤 느낌인지.”
“어…….”
의정은 우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사실은 반쯤 알아차리긴 했다. 그게 페로몬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키스 이상의 어떤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이라는 걸.
“이렇게 말이야.”
우재가 목소리를 낮추고 의정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질감이 느껴지는 네 개의 손가락이 배를 느리게 쓸었다. 의정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꾹 내리눌렀다.
때마침 영화 역시 좀 더 농밀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메가는 알파의 허리에 한 다리를 엮은 채 매달리다시피 했고, 알파는 오메가의 뒷머리를 헤집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알파의 어깨에 걸쳐진 오메가는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젖은 입술, 촉촉해진 눈. 마치 무언가에 취한 듯한.
영화를 보고 있는데도 의정의 의식은 모두 제 몸을 쓰다듬는 손길에 몰렸다. 우재의 손은 배를 지나쳐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여기를 만져주면.”
우재가 손가락으로 갈비뼈를 하나씩 세면서 올라갔다. 그때마다 의정은 견딜 수 없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가장 위에 있는 선을 따라 움직인 손가락이 차츰 멀어진다고 느껴질 때쯤 이번엔 입술이 겹쳐졌다. 맥주의 씁쓸하고도 촉촉한 맛이 느껴졌다.
우재는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의정의 몸 곳곳을 더듬었다. 키스가 그랬듯, 의정도 손으로 우재의 몸을 더듬었다. 서로를 그렇게 탐하면서 조금씩 페로몬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섞여들어 또 다른 향기가 되었다는 것까진, 아직 의정은 알지 못했다.
* * *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가 이어졌다. 우재와 연습한 덕분인지, 아니면 마음에 편안해져서인지 모르겠으나 제멋대로 나오던 페로몬도 안정을 찾았다.
아니, 그렇다고 우재가 알려주었다. 예전의 그 알파처럼 의정이 오메가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말복이 지나면서 캠핑장에 오는 손님이 성수기보다 줄었다. 덕분에 의정은 일하는 시간보다 비밀 장소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의정뿐만이 아니었다. 우재도 오후에 틈이 나면 의정이 유유자적하고 있는 폭포에 나타났다.
그러면서 부쩍 스킨십도 잦아졌다. 입을 맞추는 건 기본이고 서로의 몸을 더듬거나 간지러움을 태우듯 겨드랑이나 허벅지 안쪽, 심지어는 엉덩이나 아랫도리도 은근슬쩍 만졌다.
“우, 우재야. 잠시만. 잠시만…….”
의정은 제 척추를 하나하나 더듬다가 바지 안으로 들어서는 우재의 손길을 느끼고 얼른 뒤로 손을 뻗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우재는 엉덩이를 주무르는 척하면서 더 안쪽으로 침입해 들어왔을지도 몰랐다.
“왜?”
우재가 그렇게 물으면서도 의정의 입술에 도장을 찍고 교묘하게 손의 방향을 비틀었다. 너무 능숙한 손놀림에 기분이 좋아져 의정이 주춤주춤 망설이는 사이 어느덧 우재는 엉덩이를 쓰다듬고 은근슬쩍 골 사이로 손을 넣어 지분거리기까지 했다.
이 이상 진도가 나가는 건 정말 안 됐다. 이건 더는 페로몬을 핑계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이젠 애당초 이 일을 시작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하는 경계도 흐릿해지긴 했지만.
“손 좀. 야, 그만하라고.”
의정은 가까스로 우재의 손을 붙잡아 바지 밖으로 꺼냈다. 잠깐 닿았을 뿐인데 계속 그 감각이 선연했다. 줄곧 물고 빨았던 입술은 물기로 반짝였고, 눈가에도 열이 오른 듯 발긋했다.
그런 주제에 거부하는 의정은 귀엽기만 했다. 우재는 모른 척하면서 좀 더 손을 써볼까, 하다가 말았다.
의정이 뭘 망설이는지 알고 있으니 더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반쯤 올라간 티셔츠를 내려주며 볼과 코, 입술에 한 번씩 도장을 찍고 일어섰다.
“좋아. 나머지는 이따가 마저 하자.”
아니, 뭘 또 더 해, 하기는. 의정은 열이 오른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우재를 노려보았다.
그런 모습도 그냥 예뻐 보이기만 하니 이것도 큰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우재는 의정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우재에겐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의정은 이제 우재가 기분 좋을 때 페로몬을 흘린다는 걸 알았다. 눈매까지 예쁘게 접으면서 웃고 있는데, 모를 수도 없고.
“먼저 내려갈게.”
우재가 소리도 없이 또 한 번 입술에 도장을 찍고 일어섰다. 돌아서는 뒷모습까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있었다.
“어, 수고.”
의정은 주책맞게 떠오르는 생각을 떠내려 보내려 물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때였다. 바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발신자를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누구지?
“여보세요?”
―윤의정 씨 핸드폰인가요?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전화를 건 상대는 놀랍게도 부동산이었고, 지금 사는 사람이 다음 주 주말에 이사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면 캠핑장 아르바이트도 마침 끝날 때였다.
어느덧 아르바이트도 일주일여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럴 때 새집에서도 연락이 오니 정말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나면, 우재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요즘은 둘만 있을 때 페로몬을 핑계로 붙어 지내느라 그런 이야기를 나눌 새가 없었다.
자신이야 서울로 돌아갈 텐데, 우재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들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이대로 끝인지, 아니면 그 이후가 있는 것인지. 슬슬 이야기를 나눠야 할 거 같았다.
한참 생각하던 의정은 다시 핸드폰을 터치했다. 우재와의 관계 못지않게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어쩐지 지금이라면 그토록 망설이던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아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오랜 기다림 끝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늘 그렇듯 활기가 넘치는 엄마였다.
“어. 나야, 뭐. 엄마는?”
―요즘 사과, 대추 묘목 때문에 방문이 부쩍 늘어서 정신이 없어. 너는 어때, 일은 할 만해?
발현한 이후로 본가에 내려가지 못한 게 벌써 몇 년이었다. 제대하고도 아르바이트를 한다면서 집에 오지 않는 아들이 원망스럽지도 않은지 엄마는 안부를 물어왔다.
묘목을 판매하는 부모님은 계절마다 바빴다. 의정은 제 주변을 둘러싼 나무와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넘칠 듯 말 듯 찰랑거리는 물웅덩이를 보았다. 뙤약볕 아래 일하고 계실 엄마를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어, 요즘은 성수기도 지나서 손님도 많이 빠진 덕분에 여유로워졌어.”
―그래, 다행이네. 그럼 아르바이트 끝나면 얼굴 좀 볼 수 있어?
“어, 끝나면 바로 내려갈게요.”
―알았어. 그럼 수고하고, 끊을게.
엄마는 그걸로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하는지 바로 통화를 종료하려고 했다. 물론 의정이 전화한 목적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엄마! 잠깐만.”
수화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의정이 다급하게 엄마를 불렀다. 성격 급한 엄마가 듣지도 못하고 끊을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응? 왜?
의정은 젖은 머리칼을 쓸었다. 막상 엄마를 부르긴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긴 몇 년이나 속으로만 담아두었는데 그게 쉽게 나올까.
“나 실은 할 말이 있어.”
―뭔데 그래. 왜? 등록금이 올랐어?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바로 말하라니까.
의정이 한참 뜸을 들이다 꺼낸 소리에 엄마가 대뜸 말했다. 의정은 픽, 웃고 말았다. 발현이 대학 등록금 인상보다 더 가능성 없는 일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냐. 그건 괜찮아.”
수화기 너머가 또 어수선해졌다. 등록금이 올랐다는 게 아니라는 말에 엄마가 별로 어렵지 않은 고민이라고 생각하는지 다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오징어 열 마리에 만 원, 고등어 한 손에 만 원’ 하는 방송이 들려왔다. 짬이 생기니 아마 농원이 아니라 마트라도 가신 거 같았다.
의정은 생활감 넘치는 소리에 용기를 냈다.
“다른 건 아니고. 엄마 아들, 오메가 됐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툭, 그 말이 굴러떨어졌다.
―그러니?
아마도 엄마는 오징어를 살까, 고등어를 살까 고민 중이지 않을까 싶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무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어, 그렇게 됐어. 그럼 엄마, 바쁜 거 같은데 끊을게.”
―그래. 몸 챙기고. 집에 올 때 연락하고, 맛있는 거 해둘게.
엄마는 정말 의정이 한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듯했다. 아들의 폭탄선언에도 놀라는 기색이 없는 것을 보니.
의정은 굳이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 말을 꺼냈으니 나중에 생각나면 그때 연락하겠지 싶어서였다. 아마 지금보다 덜 충격을 받으실지 모르고. 스스로 비겁하게 변명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솔직히 다시 말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곧바로 벨이 울렸다. 의정은 발신자가 엄마라는 걸 확인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엄마의 반응이 예상보다 빨랐다.
“어, 엄마.”
―너!! 아까 무슨 말 했어?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오메가?
의정은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수화기 너머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귀까지 얼얼해졌다.
“엄마, 주변에 누구 없어?”
엄마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마도 얼른 주위를 둘러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도 한참 걷는 소리가 이어졌다.
의정은 그사이 스리슬쩍 움직여서 물에 발을 담갔다. 늦여름이라 그런지 물이 제법 차가워졌다. 덕분에 좀 더 차분해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울렸다. 화장실에라도 가셨나. 의정은 조금 웃음기를 섞어 말투를 가볍게 만들려고 애썼다. 굳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감기에 걸린 줄 알고 병원에 갔더니 검사해 보자, 그러더라고. 그래서 해봤는데 오메가로 발현했다지 뭐야.”
의정은 은근슬쩍 언제 그랬는지는 숨겼다. 이미 몇 년 전에 그랬는데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게 조금 미안해서였다.
―언제?
그러나 엄마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의정은 잠깐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1학년 여름에.”
―그걸 혼자 끙끙 앓았어?
엄마의 말투에는 질책이나 분노가 없었다. 그렇다고 걱정하는 투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기만 해서 의정은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미련하긴. 넌 옛날부터 너무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 탈이야, 얘.
수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긴, 내 잘못이지.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으니까.
“아냐, 엄마.”
―됐고. 아들, 아르바이트 끝나면 집으로 바로 와. 알았지? 나머지는 그때 들을 테니까.
됐고. 엄마가 다른 말은 듣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의사를 보였다. 의정이 대답할 말도 하나뿐이었다.
“응, 엄마. 미안해.”
―미안은 무슨. 됐고. 아프지만 마. 혹시 뭐, 그거 때문에 문제 생긴 건 아니지?
“어, 아냐. 그런 거 없어.”
―그럼 됐어. 엄마 이제 끊는다. 애들 밥해줘야 해.
엄마, 사랑해. 엄마가 좀 더 감동적으로 말했다면 아마 의정은 낯부끄럽게 그런 말도 할 수 있었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무심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는 엄마 덕분에 그 소리는 하지 않아도 됐다.
하긴 평생 해보지 못한 말인데. 그게 그렇게 쉽게 나올 리가. 하다못해 우재에게도…….
“어?”
뭐지. 의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껄끄러운 무언가가 느껴졌는데. 그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의정은 핸드폰을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았다. 역시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하긴 지금은 그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마음이 가벼운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아니, 지금 제가 한 일을 우재에게 당장 말하고 싶어졌다. 의정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메신저를 열었다.
―손님 많아?
보내자마자 바로 답이 왔다.
―아니.
의정은 벌떡 일어나 바위를 내려왔다. 비밀 장소를 벗어나 캠핑장으로 가니 빈 사이트를 둘러보는 우재가 보였다. 의정은 한달음에 그 앞까지 달려갔다.
“더 있다가 오지.”
우재가 의정이 가까워지기도 전에 먼저 기척을 알아챘는지 웃는 얼굴로 반겼다.
“아까 엄마랑 통화했어.”
생뚱맞은 소리였다. 우재는 의정의 사정을 알지 못하니까. 그런데도 무슨 말이냐고 묻는 대신에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의정이 더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거였다.
이런 우재가 좋았다. 아름드리나무처럼 모두 다 품어줄 것처럼 과묵하게 서있는 모습이. 자신이 무엇을 해도, 어떤 상황이어도 든든하게 지켜줄 것 같은 단단함이.
아마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눈길이 갔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우재는 딱 자신이 품고 있는 페로몬 같은 남자였다.
“실은 부모님한테도 말씀 못 드렸었거든.”
“발현했다는 거?”
의정이 꺼내지 않은 말을 우재는 바로 알아차렸다.
“응.”
“힘들었겠네, 혼자서.”
왜 그랬는지 설명하려던 의정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우재를 보았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재도 담담했다. 그때도 정말 울컥한 마음에 아무 소리도 못 했는데. 다정한 눈을 마주한 채 의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그냥 아프기만 했지. 이유도 모르고 감기가 너무 심해서 병원에 갔는데 오메가라잖아. 좀 혼란스러웠던 거 같아, 믿기지도 않고.”
내가 정말? 어쩌다가?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그렇게 혼돈 속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 말할 기회를 잃었다. 그러고 나니 더더욱 부모님께 이야기할 용기가 없어졌다. 괜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럴 분들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단지 형질이 바뀌었다는 것 때문에 의정은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마침 방학이라 바로 휴학했어. 그러고는 계속 집 밖에 안 나갔어. 어차피 군대 갔다고들 생각하니까 연락도 없어서.”
문득 우재가 손을 뻗어 의정의 머리칼을 쓰다듬더니 좀 더 아래로 이동시켜 귀를 어루만졌다. 위로해 주는 듯한 손길이었다.
의정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이렇게 전해지는 마음이 따듯했다. 어쩌면 이걸 바라고 우재를 찾았나 보다. 그간 꽁꽁 싸매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이미 우재는 의정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있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내가 있을 테니까.”
우재의 다정한 목소리가 한낮 햇볕처럼 내려앉았다.
“어.”
“예쁘네.”
따스한 눈으로 귀며 뺨을 쓰다듬는 우재의 손길을 느끼던 의정이 돌연 눈을 찌푸렸다.
“야, 근데 생각해 보니 내가 너보다 한 살 많거든? 근데 너 하는 짓 보면 은근슬쩍 맞먹는 거 같다?”
든든한 내 편이 있는 것도 좋고, 위로해 줄 사람이라는 것도 좋기는 한데. 이럴 때 보면 은근슬쩍 저보다 형인 척하려는 거 같았다. 물론 남들 보기에 키도 더 크고, 덩치도 더 좋고, 액면가도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지만.
“편하게 이름 부르라며?”
우재는 이제 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말했다. 의정도 질 수 없다는 듯 바락 외쳤다.
“야, 그게 맞먹어도 된다는 건 아니거든?”
목덜미 아래를 어루만지던 우재의 손이 돌연 의정의 귓불을 꽉 움켜쥐었다. ‘아야.’ 소리를 내며 벌어진 입술에 이번에도 무례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의정이 황당한 눈으로 우재를 노려보았으나 사고 친 당사자는 저 멀리 도망가 버린 후였다.
“야! 송우재!”
의정은 분한 얼굴로 뻔뻔한 알파를 뒤따라갔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함께 캠핑장을 정리했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인지 늘 수북하게 쌓여있던 분리수거함은 반 조금 넘게 차있었다.
의정은 미리 준비해 온 커다란 봉투에 플라스틱 용기를 담다가 옆에서 청소 중인 우재의 눈치를 보았다. 우재는 버려진 텐트를 분리하느라 제 눈길도 모르는 듯했다.
* * *
에휴.
의정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일모레면 아르바이트도 끝이었다. 두 달이 제법 길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났더니 정말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마치 지금이 계속될 것처럼 그 이후에 관하여 입에 담지 않았다.
의정은 내내 어떻게 말을 꺼내야 우재의 속내를 알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속 시원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럴 때는 우재가 먼저 말해주면 고마울 텐데. 평소에는 제법 눈치도 좋으면서 이번에는 영 반응이 없었다.
매애애앰, 맴, 맴, 매…….
늦여름이 되면서 매미만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고작 이 짧은 계절을 살다 가기 위한 가열한 외침.
어쩌면 우재에게 그들의 관계도 여름 같은 게 아니었을까. 헤어지면 그대로 지나가 버릴. 그걸 모르고 혼자 고민하는 건 아닐까. 이렇게 끙끙 고민해 봐야 답이 없다는 걸 아는데, 이상하게 묻기가 힘들었다.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고.
안절부절못하던 의정은 맥주 네 캔을 마신 술기운을 빌어서야 비로소 용기를 냈다.
“아르바이트 끝나면 어떻게 할 거야? 장사는 어디서 할지 정했어?”
힐끔. 우재를 곁눈질했다.
사실 의정은 우재가 당연히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이라는 물음의 의도를 알 리라 생각했다. 정말 듣고 싶은 대답은 ‘우리의 행방이 어떻게 될지’였으니까.
“아직 고민하고 있어.”
하지만 우재는 미적지근한 답변을 내놓았다. 의정이 무어라 덧붙이길 기다렸으나 우재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의정은 들고 있던 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시원함이 가신 술은 훨씬 쓰고 더 텁텁했다.
결국, 그렇게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의정에게도, 우재에게도 특별했던 아르바이트가 끝났다.
* * *
“그간 수고 많았어. 자.”
우민이 불쑥 쇼핑백을 내밀었다. 의정이 뭐냐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자, 우민은 그걸 좀 더 가까이에 붙였다.
의정은 어쩔 수 없이 받아 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납작한 일회용 도시락과 생수 한 통이 보였다.
“별건 아니고 김밥 좀 싸놨어. 올라가면서 먹으라고. 아예 점심까지 먹고 가면 좋은데 그건 어려우니까.”
우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도 쑥스러운지 검지로 코밑을 쓱쓱 문질렀다.
“우민 형,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의정은 부끄러워하는 우민을 보곤 그냥 고맙다는 인사만 했다. 괜히 다른 말까지 했다가는 저 우직한 사람이 눈시울이라도 붉힐 거 같았다.
“어, 나도. 의정이 네 덕분에 올 여름 정말 잘 넘겼어. 아니었으면 우재랑 둘이서 손님들 상대하느라고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간 수고 많았다.”
그렇게 말한 우민이 사람 좋게 웃으면서 의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른 가봐.”
“네. 다음에 또 뵐게요.”
“어, 내년에도 여름에 연락하면 와주는 거다?”
“그럴게요.”
정말 그러고 싶었다. 여러 복잡한 이유로 이곳에 오긴 했으나 많은 추억을 남겼고, 좋은 사람들 만났으니. 무엇보다…….
의정은 곁에 서있는 우재를 힐끔 곁눈질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을 마주친 우재는 입술만 올려 웃었다. 어딘가 그늘지고 어색해 보이는 미소였다. 뭐야, 왜 그렇게 웃는 건데.
의정은 입 안에 맴도는 물음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눈을 피했다. 우민이 바라는 대로 다시 이곳에 돌아오려면 이대로 우재와 헤어지면 안 됐다. 그러나 웃는 것도 평소와 다른 우재를 보니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어쩌면 정말 우재는 지금 만남을 여름 한철 지나가는 일처럼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말해봐야, 뭐.
의정은 어제도 내내 그 생각을 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평소라면 그것도 알아주었을 우재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가보겠습니다.”
“응. 조심히 가.”
의정은 우민에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고 주차된 차에 올랐다. 이미 시동을 켜둔 상태여서인지 안이 서늘했다.
에어컨 온도를 조금 올리고 있으려니 우민과 몇 마디 나눈 우재가 운전석에 앉았다. 여전히 우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갈을 굴리며 출발한 차는 금세 매끄러운 도로 위에 올라섰다.
시내로 가는 동안 의정도, 우재도 별말 없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와 게스트로 나온 연예인의 말소리만 차 안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났다는 것도, 이렇게 헤어지면 앞으로 우재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약속도 되지 않았다는 것도.
의정은 답답한 눈으로 창밖을 한 번, 사이드미러를 한 번 보곤 시트에 머리를 붙이고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말도 못 할 거라면 잠이나 자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어젯밤 잠을 설쳐서인지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천천히 수면 속으로 잠기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줄어드는 걸 느꼈다.
그러게. 이렇게 다정하면서 넌 왜.
이제 곧 헤어질 텐데 왜 아무 말 없는 거냐고.
의정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차는 시내를 달리고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터미널이 보였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며 사거리에서 차가 멈추어 섰다. 여전히 우재는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말을 붙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의정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따라 메신저는 조용하기만 했다. 의미 없이 목록만 살피다가 닫아버리고, 인터넷 창을 열어 서핑하다가 말고. 그러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우재와 신호등 사이를 오갔다.
이 신호만 지나면 이제 정말 끝이었다. 우재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마디도 하지 못했는데.
생각하자마자 빨간색이던 불빛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우재는 가속 페달을 밟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의정을 잠깐 돌아보곤 다시 정면을 보았다.
오후여서인지, 아니면 버스가 도착할 때여서인지 터미널 앞은 혼잡했다. 도롯가에 줄지어 세워놓은 차들을 훑으면서 우재는 천천히 이동하다가 가까스로 정차할 만한 곳을 찾아 차를 세웠다.
“조심히 가.”
긴 침묵 끝에 우재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그것도 짧고 간단한 작별 인사였다.
“어.”
거기에 맞추어 같이 담담하게 말하면 좋을 텐데. 하도 말을 안 하고 있어서인지 목이 막힌 듯한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의정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러곤 벨트를 풀면서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까운 거리에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의정은 훅, 하고 거칠게 숨을 뱉고는 운전석으로 휙 몸을 돌렸다.
우재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의정은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면서 얼른 엉덩이를 떼고 상체를 기울이며 우재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의정은 가까워지는 눈동자가 놀란 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며 그대로 잡아당겨서 입을 맞췄다. 아니, 그건 그냥 부딪쳤다는 게 맞았다.
입술에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무식하게 밀어붙이면서 입술이 아니라 치아까지 닿아서 벌어진 참사였다. 그간 우재와 제법 키스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어설프기만 한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의정은 우재가 제게 했던 것처럼 아직 아린 느낌이 남은 입술을 몇 번이고 비비고 문질렀다.
우재는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본래대로 되돌리고 한쪽 팔로는 의정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았다.
어느새 차 안에는 청량한 향이 감돌기 시작했다. 두 개의 입술이 몇 번이고 맞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하고, 혀와 혀가 얽혔다가 풀렸다.
축축하게 젖은 소리가 연신 들려오고, 습한 열기가 고여 둘 사이를 맴돌았다. 바짝 밀착된 몸 덕분에 의정은 우재가 흥분했다는 것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맞닿은 아랫도리에서 우재의 것이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으니까.
이곳이 길거리라는 것도, 차 안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의정도, 우재도 서로의 입을 탐하고 또 탐했다. 의정이 물러서려고 하면 우재가 다시 끌어당겼고, 우재가 입술을 떼면 의정이 쫓아왔다.
그렇게 한참을 우재를 먹어 삼킨 의정은 잔뜩 젖은 입술을 떼어내고, 우재의 잘생긴 이마에 제 것을 콩, 하니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정말 이대로 가?”
은근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우재가 잔뜩 흥분한 게 보였다. 이런 모습을 하고도 너, 모른 척할 거야?
“아니.”
대답하는 우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거칠거칠하고 사납게 느껴졌다. 의정이 씩 웃는 것과 동시에 이번엔 우재가 의정의 어깨를 낚아채듯 붙들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탐스럽게 익은 의정의 입술을 그대로 집어삼키려는 찰나였다. 우재는 사이드미러에 쨍하니 비친 빛에 눈을 찡그렸다가 거울에 비친 풍경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이곳이 캠핑장도, 비밀 장소도 아닌 터미널 근처 도롯가라는 것을. 우재는 천천히 몸을 떼었다.
“하아. 하.”
흐트러진 숨을 내뱉는 의정은 너무 야했다. 이대로 어디라도 데려가서 끝까지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있으라고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망설이는 우재를 보면서 의정도 차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길 건너에 모텔이 눈에 딱 들어왔다.
“나, 오늘 안 가도 돼.”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 우재의 시선이 의정을 따라 건너편으로 향했다. 담갈색 눈동자가 순간 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우재도 의정이 의도하는 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우재는 그대로 차를 출발시키고 급하게 회전했다.
모텔 주차장까지 들어가는 데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가장 좋은 방을 선택해서 체크인하고 객실로 들어오기까지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먼저 씻어.”
언제 여기까지 들어왔지. 의정은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우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텔은 크고 널찍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열 사람은 너끈히 바닥에 누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재와 두 달간 생활한 방보다도 넓었다.
가구라고는 침대와 TV, 콘솔 수납장, 작은 테이블 세트뿐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긴장해서인지 두서없는 생각이 마구 떠올랐다.
“어어.”
의정은 얼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고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막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이번엔 ‘헉’ 소리를 내며 덜컥 멈추고 말았다.
아니, 문이 왜 이래.
분명 욕실과 이어지는 문인데.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이럴 거면 대체 뭐 하러 달아놓은 것인지. 도리어 더 민망한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의정은 소리 없이 절규하면서 슬쩍 우재를 보았다. 우재는 TV를 켜느라 이쪽은 신경 쓰지도 않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의정은 입술만 살짝 물었다가 놓으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괜히 소리가 나서 우재가 이쪽을 보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쏴.
물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우재는 일없이 채널만 돌리던 TV를 끄고 서랍을 열었다. 비상시 행동 요령과 관련된 안내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힐끗 고개를 욕실로 돌렸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의정의 실루엣이 보였다.
아까 모텔 입구에 있던 자판기를 확인해 둔 터였다. 의정이 민망해할까 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꼭 필요한 게 있었다. 의정이 오메가인 만큼 준비가 필요했다.
어차피 바로 나올 수는 없을 테니까. 우재는 결심을 굳히고 곧바로 객실을 나섰다.
* * *
의정은 복잡한 얼굴로 샤워 헤드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온수를 맞았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이게 정말 잘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물을 한가득 손에 담아서 세수하고 아래도 꼼꼼하게 닦아냈다. 손가락도 하나 넣어봤다가 이게 대체 뭐 하는 건가 싶어서 도로 빼고 푹푹,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나 오늘 안 가도 돼, 라니. 무슨 그런 유치찬란한 소리를.”
의정은 욕조 턱에 앉아서 허, 하고 길게 숨을 뱉었다. 이대로 아무 말도 없이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덤비긴 했는데 막상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까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졌다.
“뭘. 됐어. 가자, 가!”
불현듯 의정은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이제 와 무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대로 욕실을 나서니 우재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분명 TV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껐는지 객실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너도 씻어.”
괜히 어색하게 느껴져서 의정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우물거리듯 말했다.
“응.”
의정과 달리 우재는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의정을 지나치면서 젖은 머리며 귀를 만지작거렸다. 덕분에 기껏 끌어올렸던 용기가 열기가 되어 얼굴이 훅 달아오르고 말았다.
의정은 얄미운 우재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푹, 한숨을 쉬고 침대로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동시에 이불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야?”
의정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엉거주춤 일어나 이불을 걷었다. 웬 검은색 봉투가 안에 있었다. 분명 아까는 없었는데.
‘이런 게 왜 여기에 있지?’
봉투를 집어서 틈을 벌리고 안을 보았다. 튜브와 납작한 상자가 보였다. 어쩐지 더 자세히 보지 않아도 뭔지 알 거 같았다. 의정은 차마 더 손대지 못하고 얌전히 검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아까보다도 더 열이 올랐는지 몸이 덥게 느껴졌다. 손으로 부채질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멀찍이 떨어진 리모컨을 발견했다. 의정은 버튼을 꾹꾹 눌러 에어컨 온도를 23도까지 내렸다.
무릎을 끌어와 웅크리듯 앉았다. 지금 이 상황은 의정이 바라서 벌어진 거였다. 우재가 나오면 그 후에 이어질 일도 의정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우재와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입을 맞추고 잔뜩 흥분한 게 전부일 뿐.
의정의 생각이 점점 깊어질 때였다. 돌연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끊어졌다.
의정이 턱을 들어 올린 찰나, 욕실 문이 열리면서 수증기와 함께 우재가 나타났다. 순간 연이어 떠오르던 상념의 고리가 탁, 소리 나게 끊어졌다.
의정은 크고 튼튼한 우재를 바라보다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간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역시 알파는 달랐다.
“왜?”
목소리에마저 물기가 느껴진다고 하면 이상한 걸까.
의정은 그저 도리도리 고개만 내저었다. 왜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킬 따름이었다.
우재는 그런 의정이 싱겁다는 듯 픽 웃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수건으로 채 털지 않은 물기가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섹시한 거야. 의정은 속으로 꿀꺽, 침을 삼키며 주춤주춤 몸을 뒤로 물렸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은 바스락하는 소리에 턱 멈췄다.
의정은 휙,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침대를 짚은 손바닥에 검은색 비닐이 눌려있었다.
“히익.”
저절로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왔다. 의정이 후다닥 손을 떼는 사이 우재가 침대까지 걸어와서 몸을 숙였다. 졸지에 바짝 붙게 된 상황에 의정은 들이마신 숨을 뱉을 줄도 모르고 바르르 입술만 떨었다.
부스럭.
우재는 의정의 손에 깔린 봉투를 끌어갔다. 그러고는 입구를 벌려서 안에 들어있는 것을 하나씩 꺼내었다. 튜브형으로 된 것은 젤이었다. 납작한 상자에 들어있는 건 굳이 꺼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처음엔 적응도 안 되고, 잘 못 찾을 수도 있으니까 준비한 거야. 긴장하지 않아도 돼.”
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인지, 또 무얼 못 찾는다는 것인지. 우재가 태연하게 말한 걸 의정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의정은 차마 자세하게 물을 순 없었다.
우재는 그저 고개만 가만히 끄덕거리고 있는 의정을 보며 입술을 부드럽게 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이 한 점 그늘 없이 맑은 게 아니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한 늪 같은 웃음이었다.
툭.
아마 그런 소리가 났을 거다. 우재가 비닐에서 꺼낸 젤과 납작한 종이 상자를 침대에 던질 때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의정이 들은 소리는 아니었다. 도리어 보다 선연하게 느낀 건 그윽하게 변한 우재의 눈동자와 서서히 가까워지던 붉은 입술이었다.
의정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우재는 왼쪽 엄지로 의정의 보드라운 뺨을 고정하고 나머지 네 손가락을 뒤쪽 머리카락에 넣었다. 워낙 작다 보니 그의 커다란 손에 얼굴 전체가 감싸질 듯했다. 다른 손으로는 등을 받쳤다. 곧고 딱딱한 뼈가 고스란히 만져질 정도로 마른 몸이었다.
지금까지 나눈 게 그저 교감일 뿐이었다는 듯 키스는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이었다. 아랫입술이 힘껏 빨아 당겨지고, 그 틈에 벌어진 입 안으로 우재가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침입해 들어온 그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치열 사이사이와 잇몸 하나하나가 전부 우재에게 정복당했고, 아치형 입천장을 더듬고 혀를 문지르는 감각에 의정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우재는 입 안뿐 아니라 입술과 입가 모두를 저의 색으로 물들여 갔다. 아니, 그것뿐이 아니었다. 등을 받치던 손은 어느새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그보다 살집이 많은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으면서 의정의 전부를 확인하려 들었다.
온몸이 간지러웠고, 떨렸고, 어쩔 줄 모르는 감각으로 뒤덮였다. 의정은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우재를 붙잡았고, 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침대에 비비적거렸다. 몸이 제 통제를 벗어난 거 같았다.
그간 페로몬 제어를 핑계로 키스를 배우고, 여기저기를 만지는 것과는 분위기 자체가 너무 달라진 거 같았다. 이제 페로몬에 취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재가 능숙해서 그런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참 몸을 더듬던 손이 마침내 아래로 향하자 의정의 눈동자에 긴장한 기색이 어렸다. 등이 조금 뻣뻣해진 걸 느낀 우재가 맞물려 있던 입술을 조금 떼어냈다. 의정도 숨을 헐떡이면서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초점에 야해빠진 얼굴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괜찮아. 천천히 할게.”
우재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말로 의정을 달랬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길이 사뭇 다정했다. 전적으로 우재를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정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얌전히 수긍하는 것뿐이었다.
키스가 다시 이어지고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길도 점점 노골적인 색을 띠어갔다. 여린 허벅지와 오금을 주무르고, 아래를 바짝 붙여서 문질러 댔다.
그때마다 의정은 안달이 난 듯 몇 번이고 허리를 들었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우재의 몸에 저를 비벼댔다. 이미 하체는 반쯤 흥분한 상태였고 축축해져 있다는 것도 스스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우재는 입맞춤과 손장난으로 의정을 녹여놓고, 옷마저 홀랑 벗겨버렸다. 입술을 물었다가 놓고, 혀로 빨아들였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너, 진짜 얄미워.”
잠시 입술이 놓여난 사이 의정이 숨을 씨근거리면서 말했다. 어쩐지 말투도 토라진 아이같이 불퉁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잔뜩 심술이 난 눈으로 우재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만할까?”
우재가 웃는 낯을 하고 또 얄미운 소리를 했다. 지금 와서 물러서겠다니. 그런 게 대체 어디에 있어!
의정은 도망치지 못하게 우재의 목에 얼른 팔을 둘렀다. 어찌나 힘을 줘서 덤볐는지 우재가 몸을 들썩이다가 졸지에 갸우뚱하고 기울어졌다.
우재는 촉촉하게 젖은 의정의 어깨에 턱을 괴고는 두 팔로 의정을 가득 안았다. 잔뜩 달아오른 체온과 기분 좋은 두근거림, 의정이 흘려보내는 싱그러운 페로몬이 느껴졌다.
우재는 좀 더 몸을 깊숙이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의정의 페로몬은 여름의 청량함과 달콤함을 닮아있었다.
“아아… 좋네.”
의정은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몸을 더욱 바짝 붙였다. 우재 안으로 파고들듯이 해서인지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아니, 아까부터 주변을 감싼 것은 우재가 가지고 있는 그의 페로몬이었다. 한없이 안락하고, 포근한.
넓은 가슴에 귀를 가져가니 쿵쿵, 뛰는 맥박도 들려오는 거 같았다.
우재는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고 느리게 숨을 마셨다가 뱉고는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다시 드러난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던 빛은 사라지고 선연하게 바뀌어 있었다.
의정이 나무둥치처럼 단단한 우재를 보았다. 매끈매끈한 살결은 나무 중에서도 가장 잘 자라기로 소문난 오동나무 같았다. 쭉쭉 뻗은 사지나 커다랗고 든든한 몸체만 보아선 굴참나무인데, 딱 살결만 그랬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의정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건데.”
일부러 말투도 딱딱하게 만들고 우재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며칠 사이에 안달복달한 것도,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도, 전부 의정의 의지였다. 우재는 그저 의정이 하자는 대로 따라왔을 뿐 아직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이대로 흘러가 버리면 영영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끝날 터였다. 의정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둘은 그간 서로의 몸만 탐한 게 아니었다. 페로몬을 핑계로 했으나 그사이엔 분명 감정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디 우재가 지금이라도 말해주길 바랐다.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어.”
고민이라니? 무엇을? 의정이 의문을 띄운 채 우재의 눈을 보았다. 우재는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망설이다가 답지 않게 답답해 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한 게 없으니까. 과연 이대로 너한테 가도 되는지.”
“온다고?”
“응.”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의정은 거기까지 고민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우재와 앞으로 어떻게 할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뿐.
그래, 그랬구나. 너는 내게 오는 방법을 생각 중이었구나.
“왜 그걸 혼자 고민한 건데. 왜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그 후에 물어보려고 했어. 나는 너와 계속 함께하고 싶지만, 네가 아니라면 보내줘야 하니까.”
“바보 같네.”
“그렇지?”
아니. 너 말고 나 말이야. 대체 왜 혼자 끙끙 앓고 있었을까. 너도 나처럼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한 번쯤은 내가 먼저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사이에 우재도 같은 걸 고민할 줄 알았다면.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네가 가겠다면 내가 따라가면 되는 건데. 괜한 고민이었어.”
우재는 의정의 뺨에 손을 올려 느리게 쓰다듬었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한없이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러게. 정말 뭐 하러 그랬을까. 솔직하게 말하고 데려가라고 말했으면 될걸.”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의정은 그저 제게 닿아있는 우재의 팔을 붙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뭉툭한 엄지를 혀로 쓸고, 불룩한 윗면에 쪽, 소리를 내어 키스했다. 또 검지와 중지, 약지와 새끼손가락 하나씩 입을 맞추면서 우재와 눈을 마주했다.
네게 내가 그렇듯, 나 또한 너를 고민했노라고.
말하지 않은 고백이 부디 이 입맞춤 하나하나에 담겨있기를 바랐다.
우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의정을 꽉 껴안았다. 의정 역시 너른 품에 푹 잠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었다. 며칠 내내 속으로 끓어오르던 온갖 근심과 갈등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어서. 또 다행이었다. 우재와 나누었던 시간이 혼자만 소중했던 게 아니라서.
“그럼, 다시 이어 해볼까?”
의정이 우재의 겨드랑이 사이로 넣었던 팔을 빼내며 힘차게 말했다. 눈꼬리가 잔뜩 휘어진 얼굴에는 장난기마저 보였다.
우재는 겁도 없이 저를 유혹하는 의정을 보다가 뒤로 물러나 앉으며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던 젤을 쥐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괜히 입에 침이 고였다. 의정은 점점 가까워지는 우재를 보다가 꼴깍, 침을 삼켰다.
“이리 와.”
마치 아이라도 부르듯 우재가 두 팔을 벌렸다. 의정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우재도 별말 없이 잔뜩 펼친 팔만 두어 번 흔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의정은 망설임을 접고 무릎걸음으로 우재에게 다가갔다.
“으앗!”
막 우재에게 안기려고 할 때였다. 의정은 부지불식간에 붙잡힌 채로 그대로 솟구쳤다. 위로 튀어 오른 몸은 순식간에 낙하했다.
졸지에 우재의 위에 엎드리게 된 의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친 알파는 짓궂게 웃고 있었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예뻐 보이긴 하는데.
“뭐야, 이거.”
대체 왜 이런 자세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배와 배가 맞닿아 있고, 두 다리는 어색하게 벌린 채로. 놀란 나머지 의정은 우재의 어깨를 꽉 붙들고 있었다.
“부끄러울 거 같으니까. 안 보이게 해주려고.”
그러니까 뭐가 부끄럽고, 뭘 안 보이게 해줄 건데. 그런 말은, 제 엉덩이를 강하게 쥐는 손아귀에 놀라 쏙 들어가고 말았다.
의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양쪽으로 벌어진 틈으로 드러난 입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 탓이었다. 두 개의 손가락이 물기 없는 주변을 더듬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괜찮아. 천천히 할게.”
당황한 의정과 달리, 우재는 한 점 동요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쭈욱, 소리가 났다. 아마도 우재가 손에 들고 있던 젤을 짜는 거 같았다. 의정은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우재만 주시했다.
“아!”
“별거 아냐.”
아냐. 별거 같아. 이상해. 야, 이상하다고.
의정은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입술을 꽉 깨무는 것으로 막았다. 보지 않아도 제 입구를 적시는 우재의 축축한 손이 상상되었다.
아직 메마른 주변을 적시고, 빡빡하게 다물린 입구를 터치하는 손길이 처음 나누던 키스를 떠올리게 했다. 그게 너무 생생해서 의정을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래를 넓히는 손은 느렸고 상냥했다. 아프진 않은데 어딘가 불편하고 이상했다. 의정이 몇 번이고 엉덩이를 들썩일 때마다 우재는 괜찮다는 듯 촉촉, 가볍게 키스했다.
그때였다. 우재의 손이 안에 있는 어떤 부분을 내리누르자 번쩍, 하고 몸이 튀었다.
“아읏!”
의정은 제가 보인 반응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이거?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불꽃이 튀듯 몸 안에 확 열이 오른 기분이었다. 이, 이게 뭐야.
의정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제 엉덩이 사이를 쑤시고 있는 우재의 손이 보였다. 고작 한 개일 뿐인데. 그런데도 느껴지는 생경한 이물감과 그걸 웃도는 어떤 감각.
의정의 경악한 심정을 알았을까.
“의정아.”
귓가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가 부어졌다. 의정은 퍼뜩 시선을 돌려 우재를 보았다. 늪처럼 깊어진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아득함이 느껴졌다. 입술이 통째로 먹혀들던 찰나, 같은 곳이 한 번 더 자극되었다.
의정은 몸을 파드득 떨며 눈을 크게 떴다.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머리에 섬광이 치고,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몇 번이고 같은 지점을 공략당하면서 어느새 아픔도, 괴리감도 사라졌다. 의정은 우재의 입속에 앓는 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다리를 더 넓게 벌리고 부풀어 오른 성기를 우재의 배에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의정은 우재의 손가락 개수가 어느덧 늘어났다는 것도, 제 안이 젖어가기 시작한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우재는 몇 번이고 의정이 느끼는 곳을 꾹꾹 눌러댔고, 그럴 때마다 뇌리에 번개가 치고 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어느새 선단과 안쪽에서 흐른 액체를 우재마저 느낄 정도가 되었다.
우재의 손놀림이 더 바빠졌다. 손가락 네 개가 마치 독립적인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빠져나갈 듯 다시 들어오고 좁힐 듯 넓게 벌리면서 의정을 더더욱 쾌락에 물들여 갔다. 꿀쩍거리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의정이 차마 견디지 못하고 새빨간 얼굴을 하고 숨을 할딱거리면서 막 귀를 막으려 할 때였다.
“흐악!”
안을 가득 채우던 손가락이 일시에 빠져나가며 아찔한 충격을 몰고 왔다. 그건 아픔이 아니었다. 그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정수리까지 쭈뼛하게 올라서는 것 같았다.
제가 낸 소리조차 너무 야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의정의 허벅지가 우재의 양손에 붙잡혀 더 크게 벌어지고 그대로 위로 들렸다. 우재는 그 자세 그대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졸지에 의정도 무릎을 세운 채 우재의 위에 걸친 자세가 되었다.
대체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의정이 경악한 얼굴로 우재를 바라볼 때였다.
“……!!”
엉덩이 사이에 뜨거운 게 느껴지던 그때, 우재가 의정의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감각은 손가락이 들쑤시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안은 우재가 길을 들여놓은 덕분에 질척질척하게 젖었는데도 경험이 없는 입구는 터무니없이 좁고 빡빡했다. 더더군다나 의정이 잔뜩 긴장한 탓에 우재의 목을 꽉 안으며 힘을 주고 있었다.
우재는 강한 압박감에 눈을 찌푸렸다. 의정의 입구는 그가 밀고 갈 수 없을 만큼 빠듯해져 있었다.
이대로는 둘 다 힘들었다.
“의정아, 나 봐봐.”
우재가 의정을 달래듯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우재에게 매달린 의정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도리어 두 팔에 힘을 주어 우재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잠시 방심했다간 우재가 도로 밀고 들어올 거 같았다.
“알았어. 그럼, 내가 기다릴게. 네가, 해볼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이며 턱 아랫면과 귓불에 따뜻한 감촉이 연달아 닿았다.
내가 하라고? 그제야 의정은 우재가 제게 속삭인 말을 떠올렸다. 그래. 저 무식한 게 들이치는 것보다는 자신이 넣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의정은 머뭇머뭇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파르라니 돋아난 굵직한 핏줄이 보였다. 자신만큼이나 괴로운 듯했다.
“읏!”
아주 살짝 아래로 움직였을 뿐인데도 들어찬 성기가 느껴졌다. 좀 더 용기를 내서 우재를 보았다. 이마에 잔뜩 땀이 밴 채로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고 있었다.
“천천히 하자.”
우재의 응원을 받으며, 의정은 엉거주춤하게 앉은 저를 살폈다. 우람한 성기가 제 엉덩이 사이에 자리한 걸 확인하고 눈을 찔끔 감았다가 떴다. 도저히 계속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의정은 다시 눈을 들고 다정한 검은 눈동자에 고정한 채로 조금씩 몸을 내리기 시작했다.
“……!!”
조금씩, 조금씩 주저앉을 때마다 아래쪽에서 전해지는 압박감이 점점 강해졌다.
“숨 쉬어. 길게 후, 하고 뱉는 거야.”
새빨간 얼굴로 진땀을 흘리는 의정에게 계속 키스하면서 우재는 페로몬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던 것처럼 친절하게 말했다.
의정은 가까스로 공기를 후욱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쉬면서 우재를 받아들였다. 아까보다 괴로움은 덜했지만, 안을 채운 이물감은 가시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넣어야 하는지, 이러다가 배까지 뚫는 건 아닌지 별걱정이 다 들었다.
아니, 실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의정은 알지 못했다.
“허억. 헉.”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호흡은 제가 듣기에도 너무 괴로워 보였다.
“잘했어.”
우재가 의정의 코끝을 비비며 속삭였다. 노고를 칭찬해 주는데도 별로 달갑지 않은 건 여전히 제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우재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두 사람이 오래전부터 한 몸이었다는 듯 아래를 이은 채로 이마와 뺨, 코, 입술 주변, 목덜미와 어깨 등에 자잘한 키스를 남길 뿐이었다.
종종 등줄기를 쓸고, 작게 솟은 젖꼭지 주변을 매만질 때는 왜인지 팔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앗!”
한참 뜸을 들이던 우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정은 우재를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아프지 않았다. 조금 괴롭긴 했으나 또 못 견딜 정도도 아니었다.
경험이 없어 잔뜩 긴장한 내벽이 안을 자극하는 우재를 따라서 조금씩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재가 내놓기 시작한 페로몬으로 다시 흥분이 피어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의정아, 아파?”
우재가 허리를 움직이면서 조용하게 물어왔다.
“아, 으, 으으, 아니, 안…….”
안 아프다고. 그 말을 끝까지 하고 싶은데 자꾸만 제멋대로 나오는 신음 때문에 전부 꺼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우재는 용케 알아들었나 보다. 조심스럽던 그의 몸놀림이 점차 빨라졌다.
잠재워 놓았던 페로몬도 그를 따라 조금씩 파도치기 시작했다. 평소 우재가 퍼뜨리는 페로몬이 나무처럼 한없이 포근하고 안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했다면, 지금은 한여름 뙤약볕처럼 뜨겁고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
우재가 손가락으로 자극했던 지점이 그의 성기로 강하게 문질러졌다. 의정은 입을 잔뜩 벌린 채 짧게 소리를 내질렀다. 크게 떠진 눈가 주변에 물기가 차는 게 느껴졌다.
폭풍을 만난 나룻배처럼 속절없이 흔들리다가 얼른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우재의 목을 꽉 붙들고 잘생긴 머리에 코를 묻은 채 ‘흐읏, 흑.’ 눈물 섞인 신음을 흘렸다.
쿵덕거리며 뛰는 게 제 심장인지, 뇌인지 알 수 없었다. 헐떡이는 호흡이 제 것인지, 우재의 것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으읏!”
우재가 한 번씩 허리를 들썩거릴 때마다 안쪽이 자극당했다. 하필이면 가장 느끼는 부분을 직접 때려대는 터라 의정의 성기는 속절없이 묽은 액을 흘려냈다.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는데 의정을 전부 헤집어놓은 우재가 먼저 알아차렸다.
비비고, 쑤시고, 문지르는 행위 하나하나가 끝없는 쾌락을 피워냈다.
“아…….”
우재가 커다란 손으로 의정의 젖은 기둥을 말아 쥐었다. 의정은 놀라 얼른 팔을 풀었다가 때맞춰 흔들리는 동작에 화들짝 놀라 도로 우재에게 매달렸다.
우재는 손바닥으로 의정의 기둥을 빠르게 문지르면서 엄지로 선단을 꾹꾹, 눌러댔다. 안을 두들겨 맞는 것보다 그렇게 만져지는 게 더욱 안달을 나게 했다.
“아아.”
절정은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의정은 아래를 꽉 조인 채 사정했다. 새하얀 정액이 금세 우재의 손으로 흘렀다.
의정이 당황한 눈으로 고개를 내리려 했다. 우재는 의정이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끌어와 입을 맞추었다. 의정은 멍한 얼굴로 우재의 키스를 받으며 몇 번 더 정액을 토해냈다.
우재의 입술이 뺨을 지나서 귓불까지 향했다. 혀 대신 이가 두툼한 살집을 잘근 깨물었다. 의정이 갑작스럽게 몰려온 아픔에 목을 움츠리자 이번엔 다시 혀가 빠져나와 발갛게 된 부분을 삭삭 핥아댔다. 알싸한 아픔과 민망한 간지러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의정이 참지 못하고 제 귀를 감싸려 할 때였다. 우재가 더 들어올 수 없는 깊은 곳까지 쑤시고 들어왔다.
“하앗!”
의정은 목을 길게 빼며 고개를 젖혔다. 찢어질 듯 커진 눈가에 자글자글 눈물이 고였다. 도망치려는 듯 바닥에 무릎을 디뎠지만, 이미 우재에게 결박된 채였다.
의정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숨만 헐떡이다가 그대로 우재에게 무너졌다.
“자세 좀 바꾸자.”
돌연 우재가 그렇게 말하면서 의정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어엇!”
몸이 뒤로 밀리면서 등에 시트가 닿아왔다. 두 다리가 들리면서 묘한 자세가 되었다. 의정은 부지불식간에 제 위를 차지한 우재를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우재가 의정의 발목 양쪽을 움켜잡더니 무릎이 접힐 때까지 끌어올렸다. 허리가 들리자 자연히 아래가 훤하게 드러났다. 의정은 제 민망한 자세에 얼굴이 도로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질척해진 아래를 가만히 보던 우재가 다시 하체를 붙여왔다.
“야, 그만, 그만해.”
뒤늦게 우재의 의도를 알아챈 의정이 막아보려고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미 우재의 성기 끝은 의정 안으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아, 아!”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살덩이는 여전히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온몸에 짜르르한 감각이 퍼져 나갔다. 아픔이 아니라 그야말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콧속으로 우재의 페로몬이 스며들었다.
그쯤 되니 의정은 제가 지금 흥분한 것인지, 아니면 페로몬에 취한 것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예민한 곳을 자극당하면서 저도 다시 흥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뿐.
“야, 아, 입… 입 좀 맞춰봐.”
의정이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우재를 불렀다. 우재가 기꺼이 의정을 안으며 입을 겹쳤다. 서로의 숨을 나누고, 헐떡임과 타액과 혀가 섞였다. 의정은 온몸이 녹아내리는 거 같았다. 마치 취기가 잔뜩 오른 것처럼 기분도 붕붕 떴다.
아프고 힘들었다. 그러나 달아나고 싶지도, 이대로 끝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도리어 첫 상대가 우재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정은 숨이 넘어가는 키스를 온몸으로 받으면서 앞으로도 쭉 이렇게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우재를 꽉 껴안았다.
* * *
의정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새까만 어둠이 짙게 내려온 한밤이었다. 대체 언제 잠들었는지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정말 풍랑이라도 만난 듯 우재에게 매달리면서 그만 좀 하라고 애원하던 거였다. 그 이후는 암전이었다. 아마 그때 잠들어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팔다리에는 힘이 없고, 어깨며 목은 뻐근하고. 특히 허벅지나 오금은 욱신욱신했는데 그보다 엉덩이 안쪽에서 말 못 할 통증이 전해져 왔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아니까 더 부끄러웠다.
의정은 한숨을 꿀꺽, 목으로 넘기다가 몸의 상태와는 달리 피부가 끈적거리지 않고 마치 씻고 난 것처럼 산뜻하다는 걸 느꼈다.
설마……. 아무려면 우재가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생각을 안고 슬그머니 이불을 들췄다. 새 속옷이 얌전하게 하체를 가리고 있었다. 누가 입혀놓은 것인지 뻔했다.
혹시나 했더니.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의정은 난감한 눈을 슬쩍 돌렸다.
과잉 친절을 베푼 우재는 의정이 일어난 줄 모르는지, 작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TV에 심취해 있었다. 한 손에는 맥주가, 테이블에도 구긴 캔이 여럿 놓인 채였다. 소리를 죽여놓고 뭘 그렇게 집중해서 보고 있나 했더니 자동차 경주를 주제로 하는 영화였다.
의정도 알 만한 내용이 펼쳐지고 있었다. 액션답게 달리고 경쟁하고 밀치고 부수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인데 딱히 대사가 없으니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볼만하긴 했다.
그래도 불까지 꺼놓고 저러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안 자고 뭐 해.”
의정은 우재에게 말을 걸었다가 헛기침을 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쉬어있었다. TV를 보던 우재가 의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화려한 빛으로 물든 얼굴은 평소보다 더 화사해 보였다.
의정이 멍해진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우재는 아예 일어서서 침대로 다가왔다.
“몸은 괜찮아?”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 죽겠어.”
의정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아직 목소리도 걸걸했고, 몸도 정말 성한 데가 없었다.
그래도 버스를 타지 않은 걸, 우재와 끝까지 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이 같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앞으로도 함께할 거란 확신도 얻었으니까.
“더 자. 아침에 깨워줄게.”
TV가 꺼지니 방은 더욱 어둑해졌다. 의정은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에 눈을 감았다. 사실 정신이 몽롱하긴 했다. 눈가에 따듯한 손길이 느껴졌다.
우재는 의정의 눈꺼풀을 살며시 만지고는, 매끄러운 이마를 어루만지고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오후 볕처럼 나른하고 기분 좋은 감각에 가물가물 잠이 몰려왔다.
“올 여름에 가장 좋은 일은, 의정이 널 만난 거야.”
밤처럼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우재의 손길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볼륨 있는 뺨 위쪽을 쓰다듬고 귀를 가볍게 문지르고는 천천히 물러갔다.
의정은 눈을 뜨고 위를 보았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해도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말하고 났더니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의정은 우재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얼른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좋아해.”
기껏 용기를 내어 꺼내놓았건만, 우재는 대답이 없었다. 의정은 손을 뻗어 우재의 단단한 팔을 붙들고 다시 속삭였다.
“송우재, 좋아한다고.”
너는 어때? 기껏 말해놓고 떨리는 눈으로 숨을 죽였다. 불과 1분도 되지 않았을 시간이 억겁처럼 흘렀다.
“응, 나도. 나도 사랑해, 의정아.”
우재의 고백이 귓가를 간질거렸다. 동시에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혀와 혀를 섞고, 서로의 타액을 나누는 농밀하고 깊은 키스가 아니라 그저 서로의 입술을 맛보고 느끼는 교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의정은 우재가 내놓은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우재가 침대로 올라와 의정의 옆에 누웠다. 한 이불을 덮고,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깍지를 끼고 있으려니 새삼스럽게 마음이 설렜다.
“예전에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게 굳이 그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우재가 서로 맞물린 손을 끌어가 손가락 마디와 접합부 하나씩에 쪽쪽, 입을 맞췄다.
“지금 보면, 나 널 기다렸던 거 같아. 네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까 싫더라고. 이렇게 좋은걸.”
우재는 겹친 손을 뒤집어 의정의 손등에 키스했다.
“야, 너 좀 느끼해.”
의정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너무 낯간지러운 소리라 그냥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뭐야, 너도 그렇잖아. 나 만나고 페로몬도 나오고, 히트 사이클도 겪고 말이야. 솔직히 이 정도면 운명 아니냐?”
불퉁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의정은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면서도 수긍했다.
우재의 말이 맞았다.
이 여름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너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알파였고, 나는 페로몬이 없는 열성 오메가였으니.
그러나 나는 너를 만나 페로몬을 알게 되었고, 너는 나를 만나 네가 느낄 수 있는 오메가의 향을 맡게 되었다.
서로를 만난 우리는 이제야 서로에게 한없이 가까운 존재를 찾아냈다.
그러니까 이런 게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아침에 눈을 뜨고도 여전히 꼭 잡은 손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의정은 잠든 우재를 살피고는 맞잡은 손을 끌어와 우재가 했던 것처럼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그러곤 슬쩍 눈치를 보았다. 우재의 눈은 굳게 닫힌 채였다.
혼자 깨어있는 시간 동안 의정은 우재와 함께할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모든 게 부옇기만 하고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렇지만 어제처럼 너무 막막하지 않은 게 신기했다.
벽지 무늬 하나하나를 세다가 우재를 한 번, 천장과 마감재, 창문을 훑다가 또 우재를 한 번. 다시 가구를 하나씩 구경하다가 우재를 돌아보니, 검은 눈동자가 의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심했지?”
“아니. 좋았는데.”
“그래?”
의정은 우재의 예쁜 미소에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또 입술을 들이밀고 말았다. 창밖으로 날이 밝은 게 보이는데 이래도 되는지.
그런 생각은 몇 번이나 겹치고 겹치다, 깊어지고 깊어지다 혀까지 얽힌 후에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둘은 버스 시간이 임박해서야 헐레벌떡 모텔을 나왔다. 차는 그대로 주차장에 둔 채 길을 건너서 터미널로 왔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매표소는 한가했다. 서울행 버스표를 사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우재는 주변을 의식해서인지 툭, 하고 어깨만 두드렸다. 의정은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하고는 우재의 팔을 휙 붙잡아 유리문을 통과했다.
플랫폼에는 서울행 버스가 이미 도착해 있었고, 대기 중인 손님은 별로 없었다. 의정은 휙휙 주변을 둘러보고는 얼른 팔을 뻗어 우재를 꽉 안았다.
이 정도라면 그저 헤어지기 아쉬운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게 아니어도 뭐, 괜찮았다. 우재 역시 길고 너른 두 팔로 의정을 마주 안아주었다.
꼭 안긴 품은 따듯했고, 그의 향이 가득 느껴졌다. 굳이 페로몬을 발산하지 않아도 우재 자체가 가진 안온함이었다.
“내가 네게로 갈게. 네가 있는 곳으로 따라갈게.”
“어.”
고작 한마디 대답하는데도 왜 코끝이 찡한지 모를 일이었다.
의정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가 버스에 올랐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던 터라 좌석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칠 때마다 플랫폼에 선 우재가 조금씩 멀어졌다. 우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태양처럼 밝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의정은 뭉클해지는 가슴을 꾹 눌렀다. 찡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았다. 불안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이별이 우리의 끝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곧 네가 따라오리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기다림이 얼마나 두근두근 설레는 일일지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