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5/7)

에필로그

의정은 서울에 올라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엄마에겐 바로 내려가겠다고 했으나 그럴 짬이 나질 않았다. 당장 새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고, 복학 준비하기도 바빴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났더니 본가에 가는 건 8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 되어버렸다. 애매한 오후에 전철을 탔더니 빈자리는 없어도 객차 자체는 한적했다.

의정은 밖이 보이는 문가에 비스듬히 서서 핸드폰을 터치했다. 우재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가 도착한 건 점심때쯤. 그 이후로 잠잠한 걸 보니 계속 바쁜 듯했다. 그러게 하루쯤 더 미루고 같이 옮기자니까.

의정은 출발하기 전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던 우재를 떠올리곤 툭 입술을 내밀었다. 뭐, 주말 내내 혼자 고생해 보라지. 그렇게 모난 생각을 하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전철을 스쳐가는 모습도 한가로워졌다. 빽빽하던 풍경이 성기게 변하고 빌딩보다 주택이, 건물보단 나무나 논과 밭이 슬슬 늘어갔다. 전철역과 전철역 사이의 간격도 벌어져서 멍하니 구경하며 몇 정거장 지나고 나니 어느덧 다음 역이 내려야 할 곳이었다.

의정은 열리는 문틈으로 빠져나왔다. 내리는 손님은 고작해야 그를 포함해서 달랑 셋뿐이었다.

의정은 전철역에서 나와 쨍쨍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티셔츠 깃을 잡고 펄럭여 보았다. 더위는 쉬이 가시지 않았고, 살에 달라붙는 끈적거림도 그대로였다. 벌써 가을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여름은 쉬이 물러갈 기미가 없었다.

띄엄띄엄 서있는 가로수 밑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그늘을 지나칠 때면 시원한 기운이 느껴져서 다행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시지를 보낸 상대를 확인한 의정의 표정이 달라졌다.

―잘 도착했어?

―아니. 아직 가는 중.

―아직? 두 시간은 더 지난 거 같은데.

곧바로 도착한 메시지에 의정도 빠르게 답신을 보냈다.

―어, 거의 다 왔어. 너는 점심 먹었어?

―아직 못 먹었어. 오전에는 내내 정리하고, 업체랑은 이제 미팅 끝나서 점심 먹으려고 나가는 중이야.

의정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좌우를 살폈다. 워낙 한적한 동네인데다 한낮이어서 2차선 도로가 썰렁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서 미처 보내지 못했던 답장을 썼다.

―거기 근처에 함흥냉면 괜찮아.

메시지를 날리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 그러더니 곧바로 핸드폰 전체가 부르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

의정은 서둘러 진동을 끊어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수화기 너머로 시원한 웃음이 들려왔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찾아간 비밀의 장소에서 쏟아지던 폭포처럼 청량하고 맑은 소리였다.

의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보았다. ‘어때, 근사하지?’ 그렇게 말하던 우재. 햇살처럼 웃던 미소도 동시에 떠올랐다.

―어떻게 알았어? 지금 막 들어가던 중인데.

즐거워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의정은 짐짓 모른 척 ‘그래?’ 하고 놀란 반응을 보였다. 수화기 너머가 와글와글했다.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손님이 많은 듯했다.

―어, 더우니까 냉면 얘기가 나왔거든. 마침 눈에 딱 뜨이더라고 간판이.

“통했네.”

―그러게. 기분 좋은데?

어, 나도. 참 별것 아닌 일인데. 이런 것으로 통했다고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또 그걸 핑계 삼아 본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통화를 했다. 우재가 다른 사람들과 있다는 걸 아는데도 전화를 끊자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아까는 너무 더워서 얼른 집에 갔으면 했는데, 이제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가 아쉬워졌다. 의정은 멀지 않은 곳에 본가가 보이자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음식 나왔어. 넌 얼마나 남았어?

“나도 거의 다 왔어. 맛있게 먹어.”

―응, 너도. 엄마가 해준 밥이라니, 부러운데?

다음에 같이 먹으러 오자. 아직 그 말은 차마 내보내지 못하고 우물우물하다가 삼켜버렸다. 대신 의정은 다른 소리를 했다.

“네가 해준 게 더 맛있어.”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더 부끄러워졌다. 얼굴에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거 같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또 쾌활한 웃음이 들려왔다. 의정은 손을 파닥이면서 부채질을 하며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도 보고 싶다.

기어이 우재는 전화로 하지 못한 말을 보내왔다. 의정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나도 그렇다고.

핸드폰을 넣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는 온갖 과실수와 조경수부터 과꽃과 접시꽃, 해바라기를 비롯한 여러 화초가 옹기종기 피어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의정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새파랗게 돋아난 잔디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가 현관 앞 계단을 올라갔다. 앞에도 아기자기한 꽃을 심은 화분이 조르륵 놓여있었다.

의정은 그중 하나를 반쯤 들고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곧 납작하고 딱딱한 게 만져졌다. 밖으로 꺼낸 건 열쇠였다.

예전부터 집으로 들어가는 키의 보관 장소는 한결같았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떻게 하느냐 말해도 부모님은 가져갈 것도 없으니 괜찮다고 큰소리쳤다.

요즘은 시골이어도 보안이 예전만 못한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집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앉은 자리만큼 조금 꺼진 가죽 소파, 크고 납작한 TV 아래 놓인 선반과 몇 안 되는 공간을 채운 자질구레한 물건들, 온 가족이 함께 촬영했던 사진. 한낮의 햇살을 가득 품은 크림색 커튼과 그 아래 놓인 알록달록한 화초까지.

의정은 변하지 않은 것들을 천천히 살피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사용하던 방은 계단 오른쪽에 있었다. 오늘 갈 거라고 했더니 청소를 해놓았는지 문이 반쯤 열린 채였다.

방 역시 기억과 달라진 게 없었다. 더워서 땀으로 흠뻑 젖었을 텐데도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를 보니 저절로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풀썩.

그대로 침대로 직행했다. 잘 말린 햇볕 냄새가 풍겨왔다. 눈을 끔뻑끔뻑하다가 곧 감았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마도 환기를 시킬 겸 창문을 열어두고 간 듯했다.

의정은 머리와 목덜미, 등을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가는 시원함을 느끼면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방 안으로 주홍색 빛이 비스듬히 스며들고 있었다. 뜨겁고 쨍하던 기세가 기운 것으로 보아 저녁에 가까운 시간인 듯했다.

핸드폰을 어디에 뒀더라,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꺼내지도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의정은 뒤적거리며 손에 들고는 화면을 터치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7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일어났어? 곤히 자길래 안 깨웠어.”

눈을 비비고 1층으로 내려오니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아빠가 의정을 반겼다. 의정은 잠시 멈칫했다가 곁으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독서 중이었는지 아빠는 반듯한 하드커버를 덮어 아래로 내려놓았다. 외국인 학자가 쓴 나무와 관련된 서적이었다.

“엄마는요?”

“장 보러. 너 온다고 어제도 뭘 한가득 사더니 그거로도 모자랐나 봐.”

“앞에 마트 가신 거죠?”

의정은 엄마가 자주 가는 마트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가서 장바구니라도 좀 들어줄 생각이었다.

“어, 의성이가 같이 갔어.”

“아아.”

쌍둥이 동생 중 하나가 엄마를 따라갔다는 소리에 엉거주춤하던 몸을 도로 소파에 묻었다. 손을 거드는 건 하나로도 충분하지 싶어서였다.

부자간에 정적이 흘렀다. 의정도, 아빠도 썩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니 당연했다. 그런데도 어째 어색하다고 느껴지는 건 너무 오랜만에 집에 찾아와서인지도 몰랐다.

“얘기는, 네 엄마한테 들었다.”

배가 고픈데 우유라도 꺼내 마실까, 아니면 아까 잠깐 잠든 바람에 미처 하지 못한 샤워라도 할까 고민하던 의정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간 혼자 맘고생 했지?”

책 표지를 손으로 매만진 아빠가 눈을 들어 올리고 의정을 보았다. 울컥하고 무언가가 가슴을 꽉 채우는 기분이었다. 코끝까지 시큰해져서 의정은 괜히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고생은요.”

의정이 애써 덤덤한 척 꺼내놓은 대답에 아빠는 그저 툭, 하고 어깨만 한 번 두드려주었다. 말 없는 위로에 또 괜스레 눈가가 뜨거워졌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는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얼른 저녁을 차리겠다는 의지가 보여서 의정은 차마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엄마를 따라 들어온 의성이가 눈을 짝짝이로 만들고는 제 형을 내려다보았다.

“형, 몇 년 사이에 좀 작아졌다?”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아주 건방졌다.

“이게 어디서 하늘 같은 형님한테.”

어렸을 적 제 기저귀를 갈아준 은혜도 모르는 놈에게 응징을 가하고 싶었지만, 성인이라 해도 믿을 만큼 훌쩍 자란 동생을 이겨낼 순 없었다.

요리조리 도망치는 의성이와 한참 실랑이하다 보니 쌍둥이 중 형인 의준까지 나타났다. 의성이 큰 만큼 의준도 자라서 둘은 이제 의정보다 반 뼘이나 컸다.

대체 언제 이렇게들 자란 걸까. 의정이 새삼스럽게 동생들을 보는 사이 쌍둥이도 저들보다 작아진 형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아직 교복도 벗지 않은 의준이 말했다.

“이제 우리, 형 집에 놀러 가도 되는 거지?”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걸 보니 차마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녀석들도 엄마에게 이야기를 미리 들은 것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동안 왜 의정이 오지 못하게 했는지 알아차렸을지도.

사실은 가족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내내 고민했다. 엄마에게 털어놓을 때와는 또 다른 고민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빠도, 동생들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걸 보니 더 고맙고, 그래서 또 미안했다. 이렇게 누구보다 자신을 감싸줄 사람들인데 그간 숨겨왔다는 게.

“다들 식사해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세 형제는 나란히 주방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TV 앞에 앉았다. 성인인 부모님과 의정은 맥주를 마시고, 동생 둘은 콜라 하나씩을 쥔 채였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나누는 얘기는 식사 자리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한다던?”

쌍둥이 둘이 나란히 자러 들어간 후 엄마가 물었다.

“그냥 오메가가 되었을 뿐이지 예전과 크게 달라질 건 없대. 페로몬 관리만 잘하면 되고. 얼마 전까지는 히트 사이클도 없었다고 했잖아.”

“그럼 지금은 생겼고?”

엄마는 이번에도 의정이 어물쩍 넘어가려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어…….”

그 후로도 질문은 몇 번 이어졌다. 히트 사이클이 언제냐, 그 동안 어떻게 보냈느냐 등등. 의정은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숨기는 것 없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몇 년간 꾹꾹 담아왔던 걸 하나씩 말을 꺼낼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의정은 한참 망설인 끝에 우재에 관해서도 입에 올렸다.

“실은 도와준 친구가 있어.”

차마 사귀는 사이라고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건 나중에 다시 기회가 있을 때 하려고 했으나 엄마는 역시나 의정의 예상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래. 다음에 같이 와. 소개해 줄 거지?”

“…어.”

아니, 뭐. 딱히 엄마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아차리고 꺼낸 말은 아니었을 텐데. 의정은 괜히 찔려서 어설프게 대답하고 말았다. 엄마가 그런 의정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아무래도 우재와 어떤 사이인지 알아차린 거 같다는 기분이 물씬 들었다.

다음 날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채 보냈다. 느지막이 일어나 우재와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웹서핑도 잠깐 하고, 점심을 먹고 또 한참 자다가 일어나 TV를 보고 동생들과 외출하고 돌아오니 하루가 훌쩍 흘러버렸다.

저녁을 먹고 또 부모님과 술 한잔을 하고 나니 금세 밤이었다.

의정은 술기운이 오른 얼굴을 하고 밤 산책을 핑계로 집을 나섰다. 산책도 산책이지만 온종일 메신저로만 얘기했던 우재와 통화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밤은 좀 시원해진 거 같지?

“아직 모르겠는데. 벌써 9월도 코앞인데 아직 더워. 캠핑장은 지금 이 시각이면 시원했는데.”

의정은 슬쩍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공장도 없고, 인구 밀도도 높지 않아서 밤이면 별이 몇 개 총총 하늘에 떠있는 게 보이곤 했다. 캠핑장에서라면 그야말로 소금처럼 알알이 흩어진 별들이 보였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비하면 덥지. 도시니까.

“그렇지.”

―너 시간 될 때 가자.

“어, 그러자.”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의정은 그게 언제쯤 가능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바쁜 건 의정뿐 아니라 우재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도리어 우재가 더 정신이 없었다. 캠핑장에서 줄곧 말했던 장사 준비가 한창이었으니까.

“이제 오픈 얼마 안 남았겠네.”

―다음 주에 가오픈 할 거야.

“가오픈?”

―응. 일단 일주일 정도 반응 좀 살펴보려고. 마침 개강 시즌이니까.

의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빈손으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확실히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길목에 놓인 8월 말 바람은 습습해서 피부마저 산뜻했다.

“장소는 정했어?”

―응.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우재는 어디라고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의정도 굳이 더 캐묻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말았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의정은 집으로 향했다.

타박타박.

조용한 거리에 제 발소리만 들렸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작게 우재의 호흡도 느껴지는 듯했다. 아니, 어디선가 희미하게 그리운 향이 느껴졌다.

네가 너무 보고 싶은 밤이었다.

“내일 봐.”

―응, 잘 자고. 조심해서 올라와.

“어, 너도.”

* * *

의정은 일요일 아침을 먹자마자 곧바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월요일부터 개강이라 서둘러야 한다는 소리에 부모님도, 동생들도 아쉬워했으나 더 붙잡지는 않았다.

여전히 한적한 플랫폼에 앉아서 전철을 기다리다가 마침 도착한 걸 타고 서울로 향했다.

대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승객이 부쩍 늘어서 어느샌가 객차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졌다. 의정은 전광판에 뜬 역을 확인하고는 미리 일어나 입구로 다가갔다.

문이 열리고 곧바로 전철에서 내렸다. 어제 맑았던 게 거짓말인 듯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잔뜩 찌푸린 채였다.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은 전철역에서는 걸어서 15분이고, 학교 후문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주변이 상가나 편의 시설, 비슷한 구조를 가진 원룸이나 오피스텔이 밀집한 골목이라서 주말에도 비교적 활기찬 편이었다.

걸어가는 길에 편의점을 보니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는 게 생각났다. 의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터치해서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의정아. 어디야?

“거의 다 왔어. 혹시 냉장고에 마실 거 있나?”

―잠깐만.

수화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나더니 곧 우재가 말했다.

―응, 있어. 그냥 와.

“알았어.”

전화를 끊고 편의점을 지나치는 동안 마음이 급해지며 자연스레 의정의 보폭이 넓어졌다. 오피스텔까지는 한달음에 왔건만 정작 현관문 앞에서 한참 망설였다. 분명 자기 집에 들어가는 건데 심장이 간지러울 정도로 살랑거렸다.

깊게 호흡을 마셨다가 뱉고 전자키 커버를 올렸다. 막 숫자를 누르려는데 그보다 안쪽에서 잠금이 해제되면서 문이 열리는 게 먼저였다.

“얼른 들어와.”

우재가 문을 붙잡은 채 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정도 씩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어, 다녀왔어.”

가까워진 거리만큼 그리웠던 페로몬이 물씬 풍겨왔다. 의정은 오늘부터 둘이 함께할 공간으로 들어섰다.

* * *

교정이 온통 시끌벅적했다. 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첫 수업이어서 그런지, 상기된 분위기는 의정마저 설레게 했다. 전공 필수가 끼어있어 개강부터 거의 풀로 시간을 채워야 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의정. 올 거지?”

“뭘?”

막 강의실을 나서는데 뒤에서 의정을 붙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몇몇이 모여있었다. 의정이 낯이 익은 건 검은 모자를 쓴 남학생뿐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개강했다는 핑계로 술이라도 마시러 가자는 말이 나올 거 같았다.

“개강 기념 한잔하러 가기로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남학생은 예상과 다르지 않게 물어왔다. 의정은 안 간다고 딱 자를 수가 없었다. 하필 물어보는 저 남학생이 휴학하기 전 여러 수업을 같이 듣던 동기였던 탓이었다. 의정은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장소를 물었다.

“어디서?”

“후문에 있는 맥줏집.”

먼 곳이라면 좀 망설여졌을 텐데 집에 가는 방향이었다. 잠깐 얼굴 비치고, 앉아있다가 나오면 될 거 같았다.

“알았어. 갈 때 연락할게.”

“꼭이다? 안 오면 올 때까지 전화한다?”

의정은 알았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뒤늦게 생각났다. 저 동기가 얼마나 끈질긴 성격인지.

우르르 몰려나가는 무리를 지켜보다가 의정도 느릿하게 강의실을 나섰다.

막 강의실 옆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아래쪽에서 두 여학생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의정은 그들을 피해 옆으로 조금 물러섰다.

“진짜 잘생겼더라.”

“그니까. 머리에 수건 두르고 있는데 무슨 영화배우인 줄. 이따가 가보자.”

“그래. 좋지. 오늘 저녁은 그럼 덮밥!”

스쳐 지나가며 들리는 대화에 슬쩍 옆을 보았다. 한 여자의 손에 알록달록한 전단이 들려있었다. 오픈 행사를 진행한다는 큼지막한 글씨가 보였다.

우재도 오늘 연다고 했는데. 의정은 곧바로 떠오른 생각에 풀썩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술자리도 술자리지만 어디서 하는지 물어보고 일단 거기부터 들를 생각이었다.

그전에 먼저 연락을 해야 했다. 어제 우재와 동거 기념으로 술자리를 가지면서 내내 물어보아도 도통 알려주지 않아 아직도 주소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기껏 메신저를 보냈는데 읽었다는 표시가 없었다. 아무래도 막바지 준비로 바쁜 듯했다.

의정은 잠시 전화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맥줏집부터 먼저 들러야 할 거 같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서도 훌쩍 큰 키에, 머리에 수건을 두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의정이 아는 누군가도 저런 모습을 종종 했다.

호기심에 그 앞으로 다가갔다. 때마침 두 사람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며 공간이 비었다. 그 틈으로 바쁘게 전단을 나눠 주는 남자가 보였다. 역시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의정이 걸음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눈을 들었다. 의정을 본 남자가 온 얼굴이 환해지도록 웃었다.

“의정아.”

의정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홀린 듯한 얼굴로 다가갔다. 우재가 덥석 의정의 손목을 붙들었다.

“나올 때 기다렸어. 가자.”

의정은 우재에게 끌린 채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뒤에서 여러 시선이 느껴졌으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내일이면 우재와 어떤 관계냐는 소리가 들려오겠지만 그것도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우재가 의정을 데리고 향한 곳은 후문에 줄지어 놓인 푸드 트럭 중 하나였다. 검은색으로 세련되게 칠하고 앞쪽에 불투명한 천막을 쳐 시야를 가린 구조였다.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 형태로 된 테이블에 의자 다섯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앉아.”

우재는 가장 가운데 의자에 의정을 앉히고 트럭 위로 올라갔다. 워낙 키가 큰 탓에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 아슬아슬했다.

“네가 첫 손님이야.”

그렇게 웃으면서 조리를 시작한 우재는 덮밥 한 그릇을 뚝딱 만들어내어 의정이 앉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언젠가 먹어보았던 것처럼, 고슬고슬한 밥 위에 간장 소스를 얹고, 불고기를 수북이 쌓은 덮밥이었다.

“잘 먹을게.”

“어, 먹고 감상 부탁해.”

의정은 눈웃음을 그리며 숟가락으로 밥을 가득 떴다.

불고기 덮밥은 우재가 의정에게 만들어준 여러 음식 중에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처음엔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 방갈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가 넘치도록 식재료를 꽉꽉 채워 넣는 모습이 괴짜 같아 보여서.

하긴 첫 만남도 썩 좋지 못했다. 의정에게 대뜸 오메가냐고 불쾌하게 묻곤 페로몬으로 사람을 시험하려 했던 터라. 물론 오해했다는 걸 알고 사과하는 모습이나 구김살 없이 웃던 미소에 조금 풀리긴 했지만.

그날, 방갈로에서 우재가 만들어준 덮밥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걸 알려준 신호이자, 의정이 우재를 그저 알파가 아닌 우재라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던 계기였다. 그렇게 특별한 음식이었다.

그릇은 금세 비워졌다.

“잘 먹었어.”

의정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기대에 찬 눈으로 저를 지켜본 우재를 올려다보았다.

“맛은?”

“늘 맛있지.”

엄지까지 치켜들자 우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의정을 시작으로 푸드 트럭에는 손님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대부분 대학생이었고, 퇴근길에 들른 직장인도 있었다.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다. 덮밥이 저렴하고 맛있다는 칭찬을 들으며 의정은 본인이 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걸 누가 만들었는데. 못 알아보면 더 섭섭할 일이었다.

그대로 문을 닫을 때까지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아까부터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에 우재가 먼저 의정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봐. 여긴 나 혼자서도 되니까.”

“안 가도 되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또 벨이 울려 의정이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벌써 세 번째잖아. 개강 파티라면서, 그런 데는 가야지.”

우재가 차분하게 달래는 소리에 의정은 결국 푸드 트럭 한쪽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었다.

“다녀올게.”

그러고도 미적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는 의정을 보며 우재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응, 재미있게 놀아.”

글쎄다. 이미 후회하는 중이라 그럴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올 생각이었고.

“끝나기 전에 올게.”

의정은 푸드 트럭을 나서면서 아쉬움에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불투명한 천막 안에서는 우재가 바쁘게 음식을 만들고 있을 터였다. 우재는 뭘 해도 멋있었지만 역시 저렇게 요리할 때가 제일이었다.

몸을 완전히 돌려서 정면으로 걸어갔다. 맥줏집은 푸드 트럭이 보이는 2층 건물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테이블이 거의 다 차서 시끌시끌했다.

의정은 적당하게 인사를 받아주면서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운이 좋게도 맞은편에 우재의 푸드 트럭이 보였다.

워낙 인원이 많다 보니 딴짓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의정은 개강 파티 내내 우재의 푸드 트럭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손님을 구경하는 재미를 누렸다.

“2차 가자!”

10시가 넘어가서야 술자리가 정리되었다. 이미 잔뜩 취한 무리는 다른 장소로 옮기자고 우르르 내려갔다.

그들을 따라서 밖으로 나온 의정은 은근슬쩍 술 취한 무리에서 멀어졌다. 곧장 푸드 트럭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괜히 발목이 잡힐 수 있었다.

의정은 근처 편의점에 들러 콜라 한 잔을 마시면서 맥줏집 입구가 빈 걸 확인한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푸드 트럭 천막을 걷고 들어갔다. 손님은 없고, 우재 혼자였다.

“끝났어?”

“응, 방금 마지막 손님 가셨어. 재료도 다 소진했다.”

“오, 완판이야?”

우재가 뿌듯한 얼굴을 하고는 대답 대신에 텅 빈 스테인리스 재료 통을 보여주었다. 불고기가 가득 담겨있던 곳이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첫날 매출이 이 정도라니. 의정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재미있었어?”

“어.”

의정은 개강 파티 말고 푸드 트럭을 드나드는 손님 구경이 그랬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이 정리했다. 처음에는 하지 말라고 말리던 우재도 의정이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치우자 주방 청소에 박차를 가했다. 펼쳐두었던 물건까지 전부 안에 넣고 트럭을 접고 나니 일은 끝이었다.

문이 잠긴 걸 함께 확인하고 차는 그 자리에 세워두고 집으로 향했다. 밤이 늦었는데도 거리는 여전히 시끌시끌했다. 우재와 함께 걸으니 이런 들뜬 분위기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상가 거리를 지나치는 길목에 큼지막한 마트가 있었다. 우재가 그쪽을 보더니 의정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마트 들렀다 가자.”

의정도 냉장고가 텅 빈 것을 떠올리고 순순히 몸을 돌렸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우재가 카트를 끌고 식료품 코너에 진입하면서 의정에게 물었다. 의정도 주변을 둘러보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 네가 해주는 거.”

의정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카트 손잡이를 잡는 척 우재의 손등을 덮었다. 우재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일부러 보지 않았다.

다 떨어져 가는 쌀부터 고기와 채소, 맥주 등을 한가득 산 후 마트를 나섰다. 같이 먹을 걸 사 들고 걸어가니 우재와 함께 산다는 게 또 실감이 났다.

“좋네.”

의정이 우재와 반반 나눠 든 장바구니를 보면서 불쑥 말했다.

“응, 나도.”

우재도 의정과 같은 곳을 보면서 웃었다. 별 얘기도 없이 같이 걷기만 하는 것뿐인데도 모든 게 정말 그냥 좋았다.

우재가 서울에 왔다고 연락했을 때, 의정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제안했다. 같이 사는 거 어떠냐고. 어차피 집에 방도 두 개고, 너도 장사 준비하기 바쁠 테니까 함께 지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의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꺼내놓는 말에 우재는 시원스럽게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니, 우재는 네가 먼저 말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안 그랬으면 무작정 찾아갔어야 했다고.

“먼저 씻어.”

“어.”

의정은 우재에게 욕실을 양보하고 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재가 보던 음식 관련 잡지나 의정의 책들. 두 사람의 옷이나 자질구레한 물건들.

처음엔 의정만이 쓰던 공간에는 어느새 우재의 것이 하나씩 늘어갔고 어느 순간에는 어떤 게 누구의 것인지 구분 없이 뒤섞였다.

내가 네게로 갈게. 네가 있는 곳으로 따라갈게.

의정은 우재가 그 말을 했을 때부터 함께 살겠다고 작정했다. 우재가 망설임 없이 와주어 다행이었다.

“야, 잠깐만.”

소파에 걸쳐놓은 속옷을 집어 드는데 불쑥 뒤에서부터 감싼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바짝 달라붙은 몸이 시원했다. 찬물로 씻어서 그런 거 같은데, 우재야 방금 샤워를 마쳤다지만 의정은 아직이었다.

“나도 좀 씻고…….”

“어차피 땀 흘릴 텐데.”

“그래도 싫어. 냄새난다고!”

땀뿐만 아니라 튀김에 맥주, 또 누군가가 피우고 오면서 밴 담배 냄새까지 뒤섞였을 텐데 그런 걸 다 맡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우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의정을 조금씩 조금씩 밀더니 기어이 소파에 주저앉게 했다. 어설프게 벌린 다리 사이로 들어온 둥근 무릎이 예민한 부분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항의의 뜻으로 세운 눈꼬리에 우재의 입술이 닿았다. 의정이 하지 말라고 어깨를 밀어내려 할 때는 알파의 페로몬으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의정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말려도 소용없었고, 무엇보다 그도 흥분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물론 이게 전부 페로몬 때문이라고 핑계 댈 것도 없었다. 느긋하게 보내고 싶었던 바람은 사라졌지만.

의정은 우재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움직여 잘생긴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적극적으로 부딪쳐 봐도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공간이, 서로가 흘린 페로몬으로 둘러싸였다.

페로몬에 취해 멍해진 사이에 허리가 붙들려 그대로 우재에게 끌려가 딱 달라붙었다. 동시에 입술도 그대로 삼켜졌다.

비비고 문지르고 가끔 깨물리는 감각에 움찔거리니 우재의 키스가 더 기세등등해졌다. 의정은 혼을 쏙 빼놓을 것처럼 덤비는 우재를 가까스로 받아내면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몽롱해지는 정신에 어딘가에 들어서고 있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방인 거 같았다.

“야, 잠……!”

의정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우재가 잠깐 입을 뗀 틈에 그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몸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뒤에 침대가 있다는 걸 미처 자각하지 못해 오금이 턱에 걸린 탓이었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의정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우재가 가랑이 사이에 제 무릎을 밀어 넣고 아래를 뭉근하게 문지르며 자극한 탓이었다.

의정이 당장 앓는 소리를 냈다. 실은 우재의 진한 키스를 받으며 이미 성기가 잔뜩 흥분했다. 잘못하다가는 그대로 사정하는 불상사가 일어날지 몰랐다.

“으… 바지는 벗자.”

우재는 난감한 얼굴을 한 의정의 뺨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고 당장 의정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의정이 그를 돕기 위해 허리를 띄우자 머리 위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아냐.”

아까는 그렇게 싫다고 하고는 순순하게 구는 게 귀여워서 그렇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욘 없었다. 우재는 그저 길게 혀를 빼내어 촉촉해진 의정의 윗입술을 핥고는 놀라 벌어진 틈으로 밀고 들었다.

입 안은 그가 한 차례 휩쓸고 간 덕분에 아직 뜨끈뜨끈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의정의 녹녹하게 젖은 혀가 당장 우재를 휩쓸어 갔다.

두 혀가 마주 비벼지고 얽히는 사이에 의정의 바지가 훌렁 벗겨졌다. 아래가 휑해졌다고 생각하는 찰나 사타구니 사이가 전부 우재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입술이 막혀있던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또 속절없이 신음이 흘러나올 뻔했으니까.

질척하고 야한 입맞춤만큼이나 우재는 능숙하게 손을 놀렸다. 마치 독립된 존재처럼 우재의 다섯 손가락이 각각 의정을 흥분으로 몰아갔다. 엄지와 검지가 왼쪽 고환을, 약지와 소지가 오른쪽 고환을 주물럭거리고, 기다란 중지가 기둥 밑단을 연신 문질러댔다.

이미 자극을 받았던 성기가 금세 바짝 일어섰다. 의정은 제가 우재의 손을 따라서 허리를 움찔거리고 엉덩이를 흔들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절정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우재가 너른 손바닥과 다섯 손가락으로 의정의 곧추선 기둥을 마구 마찰하며 열을 피워 올렸다.

“아앗!”

의정은 맞물린 입술을 떼며 달뜬 신음을 흘렸다. 의정이 쏟아낸 정액은 그대로 줄줄 흘러내려 아직 그의 성기를 붙들고 있는 우재의 손을 적셔갔다.

의정은 한참 진정되지 않은 호흡을 내던지다가 조심히 맞은편으로 눈을 굴렸다. 우재가 절정에 오른 자신의 성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제가 잡아낸 사냥감을 보는 포식자의 눈빛처럼 적나라한 색을 띠고 있었다.

와, 미치겠다.

순간 온몸에 열이 후끈하게 치고 올라왔다. 의정은 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리라고 예상했다.

다시 키스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옷을 벗어던진 우재는 잔뜩 흥분한 제 성기를 의정의 아랫도리에 대고 마주 문댔다. 거친 마찰에 의정의 성기가 다시 힘을 받는 게 느껴졌다.

우재는 속도를 줄이면서 양손으로 각각 의정의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그대로 무릎을 굽히고 위로 끌어올리는 힘에 하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로에게 맞댄 채 흥분을 피워 올리던 우재의 성기가 엉덩이 골과 입구 주변을 쑤시고 문지르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우재가 허리를 더 밀어 올리고 가랑이를 벌렸다.

“아, 아파.”

의정은 앓는 소리를 하면서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미 활짝 열린 채 우재를 받아들인 터라 다물 수가 없었다.

“흐으… 야, 좀, 아프, 아, 으, 아프다고.”

우재는 두 손에 꽉 힘을 주어 다리를 붙인 채 의정의 입구 주변을 잔뜩 적셨다. 삽입한 것도 아닌데 너무 노골적인 움직임에 몸이 발발 떨리고 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흐읏, 흐… 아아, 읏……!”

의정은 손가락이 새하얘지도록 우재를 움켜잡고, 발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가 하며 안달을 하다가 또 한 번 사정했다.

“허억. 헉. 헉.”

아직 삽입도 전인데 진 빠진 몸이 축 늘어졌다. 의정은 우재에게 놓여난 다리를 다물지도 못한 채 날뛰는 호흡을 그저 토해냈다.

벌써 두 번이나 정액을 쏟아낸 의정과 다르게 우재의 성기는 아직도 건재했다. 아랫도리가 흥건한 건 오로지 의정과 맞물렸던 흔적처럼 보였다.

우재가 제 아랫입술을 야하게 핥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얼 하려나 했더니 우재는 헐떡거리느라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의정의 가슴 한쪽을 입술로 쭉 빨아 당겼다.

“아!”

대체 그 작은 기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번도 자극당해 본 적 없던 젖꼭지가 단순히 우재가 물은 것만으로도 단번에 볼록해졌다.

우재도 의정의 반응을 바로 알아챘다. 그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오른쪽 젖꼭지를 혀로 핥고 이로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다가 의정이 아프다고 들썩이면 달래듯 또 쪽쪽, 입술로 도장을 찍었다.

입술이 차지하지 못한 반대쪽은 그의 엄지와 검지에 농락당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흥분에 의정은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막힌 듯한 신음을 터뜨렸다. 어느 순간엔 이로 깨물리는 것도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지경이 되었다.

어느새 우재의 다른 손이 엉덩이 사이로 들어왔다. 이미 아래는 우재가 제 귀두로 두드리고 건드리면서 질척하게 만들어놓은 탓에 손가락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진입했다.

“흐읍…….”

그런데도 의정은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프거나 이물감 때문이 아니라 이미 간질간질해진 안이 우재의 길고 매끈한 손가락을 기쁘게 반긴 탓이었다.

마치 내벽이 부푼 거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고작 슬쩍 미끄러지는 감촉만으로 흥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입구를 조였다가 풀었다가 하는 게 스스로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우재는 길을 내듯 의정의 안쪽을 둥글게 휘젓거나 마디를 굽혀 긁으면서 혀를 세워 꼿꼿하게 선 유두를 쿡쿡, 찔러댔다.

“아, 아아.”

예민하고 약한 분위가 위아래로 공략당하자 저절로 몸이 들썩거렸다. 눈에 열이 몰리고 눈물마저 맺히는 게 느껴졌다. 의정은 본능적으로 저를 몰아붙이는 자극에 도망치려 무릎을 모아 움츠리려 했다.

“싫어!”

우재가 사용하지 않은 손으로 의정의 다리를 붙잡았다. 무릎이 굽어지고 위로 들리다가 활짝 열렸다. 벌어진 다리로 질질 물을 흘려대고 있는 아래가 훤하게 보였다. 의정은 미칠 거 같은 자극에 어쩔 줄을 몰라 저를 괴롭혀대는 우재의 어깨만 쥐어뜯었다.

어느새 아래는 질척질척하게 젖고 무르게 벌어져 손가락 네 개를 삼키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가 되었다. 의정의 가슴과 흉곽, 배와 배꼽, 야트막한 둔덕이 진 아랫배와 치골에 연신 입술 도장을 찍던 우재가 손가락을 일시에 물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의정은 손 하나 까닥할 수 없이 풀어진 상태로 멀거니 우재를 올려다보았다.

지이익.

우재가 불투명한 비닐을 뜯고, 콘돔을 제 성기에 씌우는 게 보였다. 분명 신축성이 좋은 실리콘으로 만들었을 텐데 어쩐지 그의 성기를 전부 담지 못하고 압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정이 열기에 진탕이 된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사이 다시 다가온 우재가 의정의 날씬한 발목을 붙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혀가 잘록한 라인을 자랑하는 종아리부터 시작해 발목까지 내려왔다가 둥그런 뒤꿈치와 오목하게 들어간 발바닥을 핥았다.

“으하하!”

의정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구 몸을 비틀어댔지만 이미 허공에 다리가 뜬 채라 도망갈 곳이 없었다.

우재는 숫제 굳은살이 박인 엄지와 그 사이사이의 여린 피부까지 할짝거리면서 의정을 더더욱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의정은 제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고관절을 활짝 열어내어 우재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다시 우재가 제 성기를 입구에 가져갔다. 잔뜩 흥분한 귀두가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아으읏…….”

분명 흥분하여 뒤가 젖은 걸 알고 있는데도 버거운 기분이었다. 의정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면서 아래에 힘을 주었다.

우재는 더 밀어붙이지 않는 대신에 다시 말랑말랑하게 가라앉은 의정의 성기를 쥐었다. 그가 몇 번 흔들어 자극한 덕분에 아래가 압박감이 한결 나아졌다.

우재는 차근차근 의정의 앞을 자극하면서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의정이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달래듯이 입을 맞춰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

의정은 달리기라도 마친 것처럼 거친 숨을 토해냈다. 엉덩이 골 사이에 우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재는 저를 완전히 의정에게 묻은 채로 엄지로 귀두를 굴리고 손가락으로 기둥을 훑으면서 의정이 더 기분 좋아질 때를 기다렸다.

도리어 그게 의정을 안달하게 했다.

“으으, 그냥… 그냥 움직여도 돼.”

의정은 열기가 몰려 발긋해진 눈으로 우재를 재촉했다. 안쪽을 차지하고 있던 우재가 천천히 물러갔다가 또 느리게 몰려들었다.

빠르게 쑤시고 들어올 때보다 그건 더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저 들어왔다가 빠지기만 하는 동작인데도 미칠 것 같은 쾌감이 의정을 잠식해 갔다.

“빨, 빨리!”

차라리 저를 온통 뒤흔들어 주었으면 했다. 그러면 이렇게 간질간질한 느낌 대신 좀 더 강하고 자극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우재가 퍽, 소리 나게 안으로 들이쳤다. 엉덩이뼈에 그의 고환이 철썩,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아핫!”

의정은 날것 그대로 느껴지는 감각에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젖혔다. 우재는 몇 번이나 물러섰다가 쑤시고 들어오면서 의정의 안을 팍팍, 찔려댔다.

눈 안쪽에 번쩍거리며 섬광이 비쳤다. 숨도 쉴 수 없이 미칠 듯한 흥분이 몰려왔다. 아득하게 정신이 멀어지고 제멋대로 내벽이 수축했다가 벌어지며 우재에게 맞추는 게 느껴졌다.

“아! 아앗! 아, 아! 흐읏! 읏! 아읏!”

마구잡이로 쑤셔지는데도 미칠 것 같았다. 깊숙하게 얕게,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자극당하는 것에 안쪽이 우재를 조르듯이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 그간 그와 했던 섹스를 웃도는 극도의 감각이었다.

어느덧 의정의 성기가 바짝 일어났다. 우재가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그저 안을 자극한 것만으로도 선단이 미끈미끈한 물을 흘려대고 있었다. 아래쪽에서도 찰박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우재는 의정을 몰아세우듯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의정이 매달릴 곳은 우재의 단단한 두 팔뿐이었다.

“아, 흐윽! 윽, 아! 잠, 잠깐, 아아!”

의정은 아이처럼 울고 흐느끼며 애원했다. 우재는 활짝 벌린 다리를 반으로 접듯이 하고 숫제 내리찍듯이 움직였다. 어찌나 거친지 그가 마찰하는 아래가 불쏘시개로 쑤시듯이 열을 뿜어댔다.

“아으읏!”

정신없이 박아대던 그가 안쪽 깊숙한 곳에 저를 처박고 그대로 멈추었다. 의정도 사정하면서 온몸을 떨어댔다. 끝 간 데 없이 밀어붙여진 쾌감에 정신까지 녹아내린 거 같았다. 잔뜩 벌어진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우재는 꽉 붙잡고 있던 의정의 다리를 내려주며 멍하게 풀어진 그의 눈가와 이마, 뺨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의정아.”

“으응…….”

“너한테서 고소한 맛이 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에 의정이 힘 빠진 눈을 움직였다. 우재는 정말로 맛을 보듯이 혀를 내어 의정의 턱과 목덜미, 빗장뼈, 겨드랑이의 여린 살과 갈비뼈를 차근차근 핥았다.

“튀김 냄새겠지.”

의정은 쉬어빠진 목소리로 무드 없는 소리를 뱉어냈다. 씻지도 못했으니 제 몸에 밴 냄새라고 생각해서였다.

“쿡쿡쿡.”

배에 닿은 우재의 입술에서 웃음이 튕겨 나왔다. 우재는 쪽, 소리 나게 배꼽 근처에 도장을 찍고 얼굴을 들었다.

“그럼 내가 씻겨줄까?”

분명 수작이 빤하게 느껴지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삽입은 고작 한 번인데 세 번이나 사정해서 몸이 노곤하게 풀려버린 탓이었다.

“어, 극진히 모셔라.”

우재는 기쁜 얼굴로 의정의 허벅지와 등에 팔을 걸고 일어섰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들어 올리는 통에 도리어 의정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욕조에 물을 받는다는 핑계로 온몸을 애무당하다가 반쯤 찰랑거리는 물속에서 또 삽입당했다. 이미 흐물흐물해진 데다 잔뜩 벌어진 탓에 우재가 안을 찌를 때마다 의정은 흐느끼는 듯한 교성을 흘렸다.

신음은 욕실 타일에 닿아 웅웅 울렸다가 쏟아지는 물소리에 그대로 사라졌다.

“죽겠다… 진짜.”

의정은 끈질기고 격렬하고 멈출 줄 모르는 우재를 받아들이다가 문득 두려움이 들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체력이 좋은 우재가 러트 때는 얼마나 더 무시무시해질지. 자신이 그걸 감당할 수는 있을지. 그 엄청나다는 노팅까지 되어버리면 그때는 또 어찌 될지.

스멀스멀 밀려오는 불안감에 의정은 우재를 꽉 껴안았다. 부디 지금보다 더 우재가 짐승 같아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물론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었고, 제 곁에 있는 알파를 잠시나마 과소평가했던 대가를 의정은 머지않은 미래에 톡톡히 치러야 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길목. 두 사람의 동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없이 가까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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