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저기, 쟤 오메가잖아.”
같은 테이블에 있던 남학생이 멀찍이 떨어진 자리를 눈짓했다. 여러 눈동자가 우르르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들과 서너 테이블 떨어진 곳에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상당한 미모의 학생이 앉아있었다. 외모만 봐서는 형질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나 저 정도라면 딱 오메가겠거니 짐작할 만했다.
“어쩐지. 처음부터 눈에 확 뜨이더라니.”
“그러면 뭐 하냐. 이미 학기 초부터 곽기준이 낚아챘는데.”
“끼리끼리 노는 거지. 그 자식 알파라는 거 모르는 사람 있나.”
그렇긴 하지. 그 둘이 진짜 사귀는 건가. 근데 서로 페로몬으로 딱 알아봤다던데 진짜 그럴까.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들리는 말을 안주 삼아 의정은 술을 홀짝였다. 누가 누구랑 사귄다느니 한다는 주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소리에는 자연히 귀가 열렸다.
예전에는 애써 모른 척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고. 오메가가 되었다곤 해도 여전히 열성에 가까워서 딱히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아챌 걱정이 없다는 이유도 있어서.
“쟨 곽기준이랑 있을 때 꽃향기가 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던데. 그거 너희들은 느껴봤어?”
꽃향기라는 말에 의정도 그쪽 테이블로 잠깐 눈길을 던졌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긴 바로 옆 테이블에 있다는 알파의 페로몬도 느끼지 못했는데 무슨. 종강 기념으로 과 전체가 고깃집을 빌린 덕분에 평소에는 잘 보지 못했던 알파나 오메가가 여럿 끼어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갈무리하고 있으니 겉으로야 티가 잘 안 난다지만 가끔 취했을 때나 아니면 과시할 때 페로몬을 향수처럼 발산하기도 한다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 의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여름 전에는 열성 오메가라 그런 줄 알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히트 사이클 이후에는 오로지 우재의 페로몬만 느낄 수 있었다. 의정에겐 도리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평생 우재 외에 다른 알파를 만날 생각이 없으니까.
“그래 봐야 우리가 맡을 수나 있냐.”
의정의 반대쪽에 앉은 남학생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곧이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껏해야 맡을 수 있는 건 고기 냄새뿐이었다.
“하긴 그렇긴 하다.”
의정이 혼자 생각에 빠진 사이 같은 테이블에 앉은 녀석들이 그렇게 낄낄거리면서 한동안 페로몬이 어쩌고저쩌고 술기운이 잔뜩 들어간 토론을 벌였다. 벌겋게 익다 못해 타들어 가는 고기, 대체 몇 개비를 피우고 온 건지 독하게 밴 담배 냄새, 시끄럽게 쏟아지는 말소리를 무심히 넘기며 의정은 앞에 있는 오이를 집어 들었다가 문득 코에 가져갔다.
“윤의정, 뭐 하냐?”
옆자리 친구가 게게하게 풀린 눈으로 의정을 보았다. 언뜻 어이없어하는 빛도 비쳤다. 의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오이를 씹었다. 아삭 소리와 함께 오이 특유의 상큼한 향이 느껴졌다. 그뿐이었다. 몇 테이블에 떨어진 오메가의 페로몬은 역시 느낄 수 없었다.
“취했냐?”
맞은편에서 들려온 핀잔에 의정은 그저 웃었다. 어느새 가득 찬 술잔을 비우고 슬쩍 핸드폰을 봤다. 아직 우재에겐 연락이 없었다. 9시쯤 장사를 끝내고 돌아간다고 했으니 내일 쓸 음식을 준비 중인지 몰랐다.
의정은 의자가 끌리지 않게 조용히 일어났다. 다들 얼큰하게 취했고, 시간도 제법 늦었으니 이만하면 귀가해도 붙잡을 사람은 없을 듯했다.
“어디 가?”
옆에 있던 친구가 묻는 말에 의정은 대충 손만 한 번 저어주고 의자에 걸어두었던 점퍼를 껴입은 후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따듯했던 실내를 벗어난 순간 시큰하게 매운 기가 코끝을 스쳤다. 의정은 목을 잔뜩 움츠리고 점퍼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도 얼얼하게 닿아오는 바람을 전부 막을 순 없었다. 목이 시리니 목도리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게 후회됐다.
“으으… 춥다. 올겨울은 별로 안 추울 거라 그러더니. 순 거짓말인가 봐.”
기어이 의정을 뒤따라 나온 친구가 몸을 부르르 떨며 불평했다. 의정은 그런가 하며 덤덤하게 대꾸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부터 점차 늘어나던 구름은 어느덧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껍게 드리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발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눈이 내린 걸 본 적이 없구나.
“먼저 간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과 동시에 마음이 급해졌다.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우재가 이미 정리를 끝내고 씻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의정은 대충 손을 흔들며 인사를 대신하고는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모임 장소도 후문이 아니라 정문인 탓에 오피스텔까지 거리도 한참이었다.
대학가 주변에 술집이 밀집된 동네는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인데도 여전히 시끌시끌했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에, 종강에, 또 연말까지 겹치면서 더 유난한 분위기였다.
골목을 가득 채운 사람들 틈을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요령 좋게 빠지며 걸어가던 의정의 걸음이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의정은 이제 막 바뀐 신호를 확인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뜻밖에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의정아, 아직 거기야? 난 정리 끝났는데. 데리러 갈까?
불과 1분 전, 보낸 사람은 우재였다. 의정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음악만 흘러나올 뿐 기대했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로 바닥을 툭툭 치며 한 번 더 시도했다. 여전히 통화음은 반응이 없었다.
정리는 다 했다면서 아직도 씻고 있는 걸까. 아니면 피곤해서 벌써 잠들어 버렸나. 오늘 새벽까지 같이 뒹군 나는 밖에 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의정은 섭섭한 마음에 반응 없는 핸드폰을 엄지로 꾹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막 신호가 바뀌면서 건너편에 서있던 몇몇 사람이 길을 건너는 게 보였다. 의정의 시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키가 크고 제일 눈에 뜨이는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고작해야 가로등이 비치는 도로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것에 불과한 데도 너는 왜 그렇게 빛이 나 보이는지. 아니 유독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보이는 네 미소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듯했다. 마치 그 언젠가 한낮의 햇살처럼 웃던 널 보았을 때처럼.
의정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대신 우재가 긴 다리를 성큼성큼 디디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한 치 망설임 없이 두 팔을 활짝 펼치곤 의정을 덥석 껴안았다. 온몸을 감싸는 온기에 의정은 눈을 감고 푹 안겨들었다. 우재도 응석 부리듯 이마를 비비적거리는 의정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쓸었다.
길을 건너던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시선을 주었다가 스쳐 가기를 몇 번. 예전이라면 따끔따끔한 시선을 신경 쓰느라 이런 건 꿈도 꾸지 못했을 텐데, 이제는 아니었다. 의정은 도리어 좀 더 우재에게 파고들었다. 바짝 닿은 만큼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 고기와 담배와 술과 알 수 없는 오묘한 냄새 속에 진탕되었던 속이 점차 편안해졌다.
“재미있게 놀다 왔어?”
“춥다. 가자.”
다정한 물음에 의정은 딴소리를 했다. 네 생각만 했다고 할 수 없어서. 다행히 우재는 더 묻지 않고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빼 의정의 목에 둘러주었다. 싸늘했던 몸이 그것만으로도 금방 따듯해졌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턱까지 둘둘 말린 목도리에 얼굴을 묻듯이 하고 말하느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의정은 괜히 민망해져서 더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코끝에 보풀이 닿았는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막 핸드폰을 꺼내는데 마침 네가 보이더라.”
아니 어쩌면 우재가 너무 부드럽게 웃어서 그런지 몰랐다. 그게 마치 네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여서. 마주 보고 있기 부끄러워져 의정은 시선을 멀찍이 던졌다.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도망친 눈길 대신에 손이 잡혔다. 핸드폰을 쥐고 있느라 조금 식었던 의정과 달리 계속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우재의 손은 품만큼이나 따끈따끈했다. 그러고 보면 우재는 날이 쌀쌀해지면서 늘 이렇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다. 덕분에 마주 잡을 때면 늘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의정도 좋았다.
길을 건너니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의정과 우재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우재는 아예 한 손으로 의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평소였다면 얼른 떨어졌을 의정도 얌전하게 몸을 기댔다. 술집을 지나는데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뜻밖에도 캐럴이었다.
여름이 물러가고 짧은 가을을 보내고.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두 주 남겨놓은 겨울. 두 사람은 이렇게 손을 잡은 채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의정은 새삼스럽게 저와 나란히 걷는 우재를 보았다.
“왜?”
“아냐.”
곧바로 눈을 마주해 오며 묻는 말에 의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갑자기 이렇게 함께 있는 게 믿기지 않아서라고 한다면 조금 이상할까. 그저 여름 한철 지나고 말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형질을 숨기며 알파에겐 곁을 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런 내 곁에 네가 있다는 게 가끔은 정말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의정의 고민을 알 리 없는 우재는 그저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 손님 많았지?”
의정이 목도리에 묻었던 얼굴을 슬쩍 들고 물었다. 우재의 푸드 트럭은 매일 손님이 붐볐다.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맛있다는 입소문이 금세 퍼졌고, 유명 유튜버가 본인 대학교 근처에 정말 안 먹으면 억울할 끝내주는 덮밥이 있다며 소개한 덕분이었다.
“평소랑 비슷했어.”
특히나 주말이나 휴일을 앞둔 날엔 유독 손님이 더 많다는 걸 아는데 우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의정의 머리를 만지던 손은 아래로 내려와 귓불을 문질렀다. 별것 아닌 손장난인데 괜히 등줄기가 떨렸다. 사람도 많은 대로에서 이러면 곤란한데.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 반, 우재가 데리러 와서인지 한층 들뜬 기분 반.
“그럼 안 되는데. 나 오늘부터 백수잖아. 먹여 살려줘야지.”
의정이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물론 일주일 쉬고 나면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지만 어쨌거나 당분간 백수는 백수. 의정은 실실 웃으며 우재의 반응을 살피려 고개를 들었다. 우재는 굉장히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여름과 가을을 같이 보내고 또 겨울까지 나란히 걷고 있는데도 의정은 송우재라는 사람이 어떤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저런 말을 하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니. 우재는 의정의 작은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가 작게 속삭였다.
“지금 그 말 하면 좀 위험한데?”
위험하다니 뭐가. 의정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몸을 바로 세운 우재가 시선을 어디론가 이동했다. 의정도 그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금색으로 된 HOTEL.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있는 곳은 놀랍게도 호텔 앞이었다. 정말 이게 무슨 엄청난 우연이란 말인가. 의정은 난감한 눈으로 호텔로 들어서는 입구를 보았다. 어쩐지 이마며 볼이 따끔따끔했다. 굳이 눈을 돌리지 않아도 우재가 어찌 보고 있을지 익히 짐작이 갔다. 그러니 더더욱 돌아보기 두려웠다.
이대로 그냥 모른 척 지나가 버릴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마치 의정의 의도를 읽기라도 한 듯 우재가 손목을 낚아챘다. 동시에 휙 하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의정은 우재에게 붙들린 채 속수무책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우재야! 송우재! 야, 아파. 아! 아프다고.”
기어이 호텔 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번쩍 정신이 든 의정이 다급하게 우재를 불렀다. 일부러 아프다면서 엄살도 피웠다. 그러나 우재는 대꾸도 없이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갈 뿐이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프런트에 섰다. 직원이 침착하게 응대하는 가운데 우재도 망설임 없이 카드를 꺼내 결제를 마쳤다. 그러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의정을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객실은 크지도 않아서 곧장 더블 침대로 이어진 덕분에 어디로 도망치거나 할 새가 없었다. 의정은 우재에게 떠밀려 침대로 추락했다. 털썩 소리를 내며 넘어진 의정의 위로 우재가 길게 드리워졌다.
“야. 나 씻어야 해.”
“괜찮아.”
“안 괜찮거든?”
친구에게 끌려가 참여한 술자리는 갈빗집이었다. 고기 탄내에 온갖 음식 냄새와 술 특유의 쉰내, 땀내 거기에 골초들 사이에 앉아있느라 배어든 담배까지 생각하자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의정의 절박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재가 입술을 꽉 눌렀다. 동시에 훅 우재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의정은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타인의 페로몬은 여전히 느끼지 못하면서 우재의 것은 이토록 생생했다.
순식간에 몸이 나른해지고 아래쪽에 반응이 왔다. 우재는 의정이 엉겁결에 벌린 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혀에 혀를 얽어 앞으로 당겨 쪽쪽 빨고, 내리눌러 문지르는 감각에 허리가 자르르하게 떨렸다. 찌르고, 비비고, 문지르고, 얼얼해질 정도로 빨았다가 입천장이며 혀뿌리까지 전부 핥아대는 사이 두 사람의 입과 주변이 흥건해졌다.
한참 의정을 탐하던 우재가 입술을 뗐다. 그냥 그대로 멀어지면 좋았을 텐데, 기어이 츄읍 하고 야한 소리까지 흘러나온 탓에 의정의 얼굴이 더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야. 아닌 거 같아. 진짜 아닌 거 같아.”
의정이 눈길을 피하면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씻고, 씻고 하자. 어?”
왜일까. 꼭 맹수를 앞에 둔 것처럼 긴장이 되는 이유는. 아니 알고 있었다. 이대로 우재에게 휩쓸렸다가는 그야말로 뼈도 못 추리게 되리라는 강한 예감 때문이라는 걸. 일단은 확 달아오른 불을 좀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의정은 제 위를 덮친 몸을 밀어내려 팔을 뻗었다. 그러나 앞을 막아선 어깨를 잡기도 전에 허공에 있던 손목이 휙 낚이며 다시 침대로 추락했다. 큼지막한 손아귀에 짓눌린 아픔에 미간 사이를 좁히며 잘생긴 알파를 노려보았다. 우재는 웃지도 않은 채 그대로 의정의 입술을 삼켜버렸다.
이미 축축하게 젖었던 아랫입술을 빨아 당기는 힘에 의정은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접근을 허락했다. 순간 우재의 입꼬리가 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정은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괜히 우재의 어깨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웃음을 흘리는데 안으로 들어온 혀가 파르르 떨리는 느껴졌다. 이상하게 입 안이 간지러웠다.
“씻고 하자. 어? 고깃집에서 바로 와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냄새도 나고, 땀도 흘렸고. 입 안과 입술 주변까지 잔뜩 젖도록 키스를 나눈 후 나온 첫 마디가 그랬다. 우재는 주섬주섬 변명을 내놓는 의정을 가만히 보다가 둥근 눈동자 주변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을 해주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본인이 말하고서도 의외라고 생각했던지, 의정은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우재의 눈치를 보았다.
“씻고 온다며?”
“어? 어…….”
우재는 아예 침대 아래로 내려가서는 태연하게 외투까지 벗기 시작했다. 그제야 의정은 제가 점퍼를 다 풀어 헤친 채 배까지 까놓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조금만 더 넋을 놓고 있었다면 정말 홀랑 벗고 우재에게 고스란히 먹혔을지 몰랐다.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우재는 능숙했고 손이 빨랐다.
괜히 분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보다 지금은 샤워가 중요했다. 의정은 위로 기어 올라간 셔츠를 끌어 내리고, 점퍼만 대충 벗어 던진 후에 욕실로 직행했다. 문을 닫자마자 뺨에 손을 올렸다. 페로몬 때문인지 키스 때문인지 아니면 술기운인지 얼굴에 잔뜩 열이 올라있었다.
세면대에 서서 거울을 봤다. 조금 불긋해진 뺨을 쓰다듬다가 뜨끔해서 손을 뗐다. 이제 보니까 입술 주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물고 빨고 해놓고 씻겠다고 도망쳤으니 우재가 그대로 쫓아 들어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젖은 입술 주위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고, 옷을 마저 벗은 후에 물을 틀었다. 좋은 호텔은 달라서 20초도 되지 않아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온도를 적당하게 맞추고 잠깐 고민했다. 이대로 한 30분만 버티면 흥분한 우재도 좀 진정되지 않을까. 아니 그럴 리가.
지금이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지만 오래 지체했다간 그대로 쳐들어올지 몰랐다. 의정은 픽 웃으며 샤워 헤드 아래에 섰다. 정수리에서부터 온몸을 적셔 들어갔다. 눈을 감고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려 할 때였다.
대체 언제 온 것일까. 물소리 때문이었는지 뒤늦게 등 뒤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물에 젖은 흙처럼 습하면서도 달뜬 향을 모를 수 없었다. 그거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쫓아왔나. 의정이 속으로 혀를 차면서 물을 잠그려 손을 뻗는데 그보다 급소가 붙들린 게 먼저였다.
“악!”
의정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프다기보다는 놀라서였다. 불시에 그렇게 잡으면 어떡하느냐고 항의하려는데 우재가 먼저 손에 힘을 풀고 의정의 성기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다른 손이 의정의 턱을 잡아 뒤로 얼굴을 돌렸다. 쏟아지는 물 아래 있느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입술이 먹혔다. 숨이 차서 입을 벌리니 입술을 아플 정도로 빨던 우재가 안으로 쑥 들어왔다.
물과 함께 밀려 들어온 혀가 한참 입 안 여기저기를 비비고 문지르다가 빠져나가니 어느새 뜨겁게 쏟아지던 물이 멎은 상태였다. 의정은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끙끙거리기만 했다.
우재는 힘이 빠져 제게 기대듯 선 의정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손을 움직였다. 몇 번이나 위아래로 쓰다듬는 사이에 말랑말랑하던 의정의 성기는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기둥을 가볍게 붙들고 상하로 쓱쓱 움직이면서, 엄지로 벌써 끈끈한 점액질을 흘리는 요도를 문질렀다.
의정은 잠깐 입술이 떨어진 사이, 다스려지지 않는 숨을 꿀꺽 삼키고는 한참 늦은 저지를 위해 팔을 내리고 힘줄이 돋은 우재의 손등에 손을 덮었다.
우재는 떼어낼 생각도 없이 겹쳐진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점차 절정감이 높아갔다. 결국에 참지 못한 의정이 우재의 손을 쥐어뜯으며 하얀 사정액을 토해냈다. 의정이 쏟아낸 정액은 타일 벽에 점점이 묻어났다.
“후우, 후…….”
의정이 밭은 숨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사이, 우재는 조금 숨이 죽은 의정의 성기를 만지면서 재빠르게 욕실용품을 훑었다. 샴푸, 컨디셔너와 함께 보디로션이 눈에 들어왔다. 망설일 것도 없이 얼른 손을 뻗었다. 힘 조절에 실패하여 보디로션이 질질 흐르는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로 가져갔다.
아직 빡빡한 입구 주변을 문지르다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우재는 의정의 성기를 붙든 손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기둥을 가볍게 쥐고 마찰하면서, 엄지로 젖은 귀두와 요도 구멍을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함께 살면서 틈만 나면 몸을 붙이고, 눈만 마주치면 물고 빨고 해서 그런지 얼마 만지지 않았는데도 의정의 입구는 어느덧 손가락 두 개쯤은 어렵지 않게 삼키고 있었다. 우재는 중지를 더 깊숙이 넣어 의정이 느끼는 곳을 찾아내 쿡 찔렀다.
“하읏!”
입구가 확 줄어들고 내벽이 좁아지며 압박감이 느껴졌다. 맞닿은 등이 바르르 떨리는 것도 느껴졌다. 우재는 몇 번 더 같은 부분을 문지르고 찔러 알아서 젖도록 하고는 미끌미끌해진 입구로 손가락 세 개를 한꺼번에 밀어 넣고 둥글게 휘저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일시에 쪼그라들며 손가락을 압박했다. 그건 거부보단 도리어 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그냥, 넣어!”
마침내 의정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희고 마른 등줄기가 떨리는 게 보였다. 동시에 풀잎처럼 여리고 싱그러운 향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의정의 페로몬이었다. 우재는 갈증을 느끼는 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다쳐.”
다치긴. 이미 제 아래가 어떤 상태인지 뻔히 알고 있는데. 의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휙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에는 네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냐는 기색이 가득했다. 우재는 그런 의정이 귀엽다는 듯 웃고는 둥그런 눈가 주변과 입술 주변에 쪽쪽 짧은 키스를 남겼다.
“아, 거기, 읏, 그만 눌러! 아!”
의정은 연신 신음을 흘리며 우재의 손등을 쥐어뜯었다. 어느새 욕실은 의정과 우재가 서로 발산한 페로몬으로 가득 찼다.
가끔은 우재가 얄미울 때가 있었다. 대체로 다정하고 상냥한데, 때때로 막무가내로 덤빌 때. 그래 놓고는 또 이렇게 사람을 애태우듯 굴 때. 앞으로 연신 주물럭거리고, 뒤로는 휘젓고 쑤셔대는 통에 견딜 수 없어진 의정이 최후의 수단을 썼다. 이대로는 우재가 들어오기도 전에 또 사정해 버릴지 몰랐다. 그건 사양이었다.
“아.”
우재가 짧게 신음하며 아래를 보았다. 흥분해서 일어선 성기가 의정의 손아귀에 잡혀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손바닥으로 고환을 문지르고, 손가락으로 기둥을 훑기까지 했다. 우재만큼 능수능란하진 못해도 의정도 그간 익혀둔 게 있었다.
“좀… 들어오라고.”
이렇게까지 하는데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우재는 잔뜩 젖은 손가락을 쑥 빼냈다. 이미 서로 달아오른 터라 실은 더 시간을 끌 것도 없었다. 의정은 우재의 성기를 잡았던 손을 떼고 벽을 짚고 섰다. 하으으, 하아, 하. 제가 뱉는 숨이 미끈한 타일 벽에 닿았다가 부옇게 흐트러졌다. 아니 실제로 불투명한 액체가 맺힌 게 눈에 보였다.
설마, 저거 내 거야?
뜨악한 눈으로 벽을 살피는 그때. 우재가 한 손으로 의정의 둥근 엉덩이를 죽 잡아당겼다. 안쪽에 감춰졌던 은밀한 입구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주변은 이미 흥건하게 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재는 입술을 핥으며 아직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아 성성하게 일어난 성기를 입구로 가져갔다. 그러고도 바로 밀고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은 애를 태우듯이 입구를 두드리듯 문지르듯 했다. 그때마다 의정의 입구가 성을 내는 것처럼 좁아졌다가 넓어지기를 반복했다.
“…좀!”
기어이 의정이 뒤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발개진 눈가로 노려보는 게 어찌나 귀엽고 섹시한지. 우재가 웃으며 그제야 의정의 안으로 제 성기를 넣었다.
“아으윽……!”
진입은 더뎠다. 차라리 단번에 깊숙하게 쑤시고 들어오면 덜 힘들 텐데. 우재가 들어왔다가 뒤로 빠지기를 번갈아 하는 통에 더 괴로웠다. 의정은 잡을 데도 없는 타일을 손이 새하얘지도록 움켜쥐었다.
“하아, 학.”
의정이 버거워하거나 말거나 우재는 긴 숨을 뱉으며 땀에 젖은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땀인지 물인지로 촉촉해진 피부에선 좋은 맛이 났다. 의정은 그저 이만 악물며 우재가 전부 들어오기까지 버티고만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안으로 쑤시고 들어오는 질량감이 어마어마했다. 대체 얼마나 더 들어오느냐고. 의정이 속으로 한가득 욕을 물어 삼키는데, 우재가 돌연 허리를 퉁 퉁기며 제 것을 쑥 쑤셔 넣었다.
“아!”
의정은 벽을 짚은 손가락에 꽉 힘을 주었다. 깊숙이 들어갔던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다 도로 쑥 하고 짓쳐 들었다. 툭툭. 우재는 힘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몇 번 허릿짓만 했을 따름이었다. 하필이면 거기가 가장 느끼는 부분이라서. 못 견디게 야릇한 감각이 연신 느껴졌다.
“읏, 아!”
그거 몇 번 움직였다고 속절없이 나오는 신음에 의정이 다시금 입술을 깨어 물었다. 잘게 허리를 흔드는 우재에게 휩쓸려 의정이 휘청였다. 힘을 잃은 몸이 주룩 흘려 내리려는 걸 우재가 두 손으로 단단하게 붙들었다. 그대로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아, 천천히, 윽, 아, 천 천천, 히……!”
천천히 하란다고 천천히 될 리가 없었다. 우재는 도리어 허리를 잡은 손아귀에 더 힘을 주고 더더욱 속도를 올렸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힘에 의정은 버티고 버티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상체까지 벽에 기댔다.
서늘한 기운 때문인지 흥분해서인지 만져주지도 않은 유두가 뾰족하게 서있었다. 깜짝 놀라서 몸을 떼려는데 엉덩이에 철썩 소리가 나게 거세게 부딪치는 우재 때문에 도리어 벽에 문질러졌다.
의정이 참지 못하고 끙 하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허리를 잡은 우재의 손에 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숫제 아프기까지 하건만 의정은 그마저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으앗!”
엉덩이가 뒤로 쑥 빠지면서 결합이 깊어졌다. 주르륵 흘러내린 손 때문에 타일 벽에 자국이 남는지 안 남는지 신경 쓸 새도 없이 우재가 또 거침없이 허리를 놀렸다. 콧속을 파고드는 페로몬을 느끼면서 의정은 오늘 밤도 길겠다고 예감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욕실에서 시작된 정사는 침대에서 더욱 불이 올랐다.
“헉. 아, 아파, 아! 아프다고.”
악을 쓰듯이 소리치는 게 들리지도 않는지 우재는 인정사정없이 허리를 놀렸다. 힘이 빠진 다리가 흘러내리자 발목을 붙들어서는 제 어깨에 걸치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졸지에 의정은 엉덩이가 뜨고 몸이 반대로 솟구치는 자세가 되었다.
불편해진 몸 때문에 이리저리 비트는데 그걸 또 저한테 맞춘다고 생각했는지. 우재의 허리 놀림이 더 격렬해졌다. 이제는 사정하는 것도 아니고 줄줄 흘리기만 해대는 제 성기와 달리 잔뜩 부풀어 오른 우재는 아직 한 번도 절정에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흐, 흐앗. 아, 아!”
위에서 아래로 찍듯이 내리꽂히는 성기에 의정이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어댔다. 점점 속도를 올리던 우재가 돌연 멈춰 섰다. 진하고 강하게 퍼져 나오는 페로몬에 의정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바짝 굳혔다. 우재를 품은 입구가 확 조이고, 허벅지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안구 안쪽에 하얀빛이 번쩍였다가 꺼지고, 배 속 어딘가에 열이 훅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의식이 잠깐 멀어졌다가 서서히 돌아왔다.
“허억!”
의정은 침대에 널브러진 채 헐떡거렸다. 사정한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휘몰아친 절정 때문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우재는 물러가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것도 상관없었다.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는데. 어쩐 일인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몸과 달리 정신은 여전히 쌩쌩했다. 우재가 이마며 뺨, 귓불, 턱에 연신 입을 맞추는 사이 의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직 밝지 않은 걸 보니까 아침은 멀어 보였다.
“몇… 시야.”
고작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그것도 힘들었다. 목감기라도 걸린 듯 잔뜩 가라앉은 데다가 퍽퍽하게까지 느껴졌다. 목에서 따끔따끔 통증이 느껴져서 눈살을 찌푸리는데, 우재가 그제야 의정을 놓으며 침대로 내려갔다. 안을 가득 채우던 게 물러가면서 내벽을 자극했다. 끄응 하고 나오는 신음엔 아직 열기가 묻어났다.
철퍽. 작은 소리를 내며 늘어진 콘돔이 휴지통에 직행하는 게 보였다. 자신이 네 번이나 사정하고 그도 모자라 마른 절정에 오를 동안 우재는 두 번뿐이었다. 억울하기도 억울하고 질리기도 질리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의정이 복잡한 눈으로 저를 내내 괴롭힌 알파를 바라보는 사이, 우재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의정은 일어서지도 않은 채 손만 뻗었다. 아니 그럴 기력도 없었다. 우재도 그걸 아는지 의정의 등에 팔을 받치고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벌어진 입술에 생수를 가져갔다. 의정은 거부하지 않고 물을 마셨다. 냉수가 속으로 들어가자 아까보다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피곤할 텐데, 자.”
“몇 신데?”
우재는 반쯤 남은 생수를 내려놓고, 침대 한쪽에 뒹굴고 있는 핸드폰을 끌어와 화면을 터치했다. 의정도 환해진 화면을 보았다. 아직 바깥이 어두우니 서너 시쯤 될까 했는데 웬걸. 7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세상에……. 여기 들어온 게, 그러니까 자정을 넘긴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무려 7시간이나 마라톤처럼 우재랑 붙어먹었다는 의미였다. 물론 놀랍진 않았다. 실은 동거를 하면서 키스가 섹스가 되고, 어쩌다 밤을 새우는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
다만 밖에서 홀딱 밤을 지새운 건 캠핑장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헤어질 때, 충동적으로 찾아갔던 모텔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감회가 새롭네.”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의정을 도로 눕히던 우재가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랑 이렇게 밖에서 자는 거. 그때 모텔에서 이후로 첨이라서.”
우재도 바로 그때를 떠올렸는지 아 하고 입을 벌렸다가 치아가 훤히 보이도록 웃었다. 방금까지 짐승처럼 덤비던 알파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늘 생각하는 거지만 참 밝고 환한 미소였다. 의정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는 다정한 우재를 보며 복잡한 눈빛을 했다. 아니 뭐 그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닌데.
“내가 안 잡았으면 너 어떻게 하려고 했어?”
의정은 제 뺨에 닿았던 손을 가닥가닥 깍지를 껴 맞잡았다. 우재는 터미널에 도착해서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의정이 먼저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헤어질 수도 있었을 일. 정말 그랬던 걸까.
“어쩌기는, 여름 끝나기 전에 쫓아가려고 했지. 말했잖아. 너한테 가려고 했다고.”
우재가 마주 잡은 손을 가져가 제 입술에 꾹 눌렀다.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진 손등을 보던 의정은 웃으면서 우재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재는 순순하게 의정의 곁에 누웠다. 적당하게 촉촉하고 따끈따끈한 베개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대로 잠들면 될 거 같다고 생각하는데, 우재가 제 팔을 벤 의정의 반듯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도로 팔을 빼내고는 대신에 베개를 받쳤다.
“왜?”
“자고 있어.”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노곤해진 몸이 잠을 불러와서 막 눈꺼풀을 닫던 의정이 도로 눈을 반짝 뜨면서 우재를 올려다보았다.
“재료 정리만 하고 나온 길이라.”
“아…….”
긴말은 없었으나 의정도 바로 알아챘다. 장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우재는 다음 날 쓸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게 일과였다. 어제는 금요일이라 손님이 더 많아서 그만큼 시간도 더 걸렸을 텐데 정리를 하자마자 마중 나왔을 테니 청소까지는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도 그런 거야 이따가 같이하면 될 텐데. 우재는 의정이 쉬는 사이에 정리하고 올 생각인 듯했다. 딱 보아하니 말려도 소용없을 듯하고. 잠깐 고민하던 의정이 끙 소리를 내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몸은 후들후들하고, 손끝도 발발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같이 가, 그럼.”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의정이 덮고 있던 이불까지 걷었다. 몸이 고되고 당장이라도 자고 싶긴 했지만 혼자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럼 잠은 집에서 편하게 늦게까지 자는 게 낫지.
“넌 더 쉬라니까.”
“됐어.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오후까지 뒹굴뒹굴하려면 집이 좋아.”
그렇게 핑계를 댄 의정이 끙끙거리면서도 기어이 침대를 내려가려고 하자 우재는 더 말리지 않았다. 여러 계절을 함께하면서 의정이 제법 고집이 세다는 걸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려봐, 그럼.”
다만 우재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일어섰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고 잠깐 호흡하던 의정은 우재가 욕실로 들어가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고집을 부리기는 했는데 좀 난감하기는 했다. 우재야 의정을 생각해서 꼬박꼬박 콘돔을 낀 덕분에 괜찮다지만 의정의 몸에는 제가 흘려놓은 땀과 체액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탓이었다.
욕실에서 나온 우재의 손에는 젖은 수건이 들려있었다.
“이리 줘.”
의정이 손을 내밀었다. 우재는 수건 대신에 의정의 손을 잡고는 데운 수건으로 꼼꼼하게 닦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가는 손목을 거쳐 여린 팔 안쪽을 닦고 겨드랑이로 올라가니 기어이 의정이 픽픽 웃음을 흘렸다.
“간지러워.”
“참아.”
“아, 좀, 내가 한다니까?”
의정은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려고 했다. 물론 우재에게 붙들린 걸 빼내지 못하니 시도는 시도로 불발되었다. 우재는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거리는 의정을 쑥 잡아당겼다. 걸터앉은 데다 실은 힘이 빠진 채였던 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입술이 닿은 건 순식간이었다.
재주도 좋은 놈 같으니라고.
의정은 얌전히 입술을 맡기며 투덜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재는 의정을 물고 빨면서 용케 수건을 움직여서 등이며 엉덩이, 아랫도리, 허벅지 등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의정이 거칠어진 숨을 헉헉거릴 때 우재는 태연하게 욕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타난 우재는 작정한 듯 의정을 애 다루듯 했다. 속옷을 입히고 바지며 티셔츠, 점퍼 심지어 목도리까지 둘둘 말아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게 준비를 마쳤다. 그때까지도 우재는 홀딱 벗은 채였다.
의정의 시선이 잘빠진 알파의 몸을 훑었다. 군살도 없이 꽉 짜인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매일같이 살을 부딪치고 만져본 의정만 알았다.
“그렇게 보지 마. 큰일 나.”
맨살에 바지를 입던 우재가 의정을 보지 않고 툭 말했다. 어지간히 눈빛이 열렬하다 보니까 느껴진 듯했다. 하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노골적으로 본 게 맞긴 했다. 솔직히 이 정도면 그럴 만하지 않을까. 의정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슬슬 시선을 피했다. 우재가 여기서 더 덤벼들었다간 진짜로 꼼짝도 못 하고 쉬어야 할지 몰랐다.
순식간에 옷을 챙겨 입은 우재와 나란히 객실을 나섰다. 의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별생각 없이 비치된 거울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의정은 기겁해서 제 뺨이며 턱을 손으로 문질렸다. 모기에 물린 것도 아닌데 온통 불긋불긋했다. 아까 물고 핥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쓱 우재를 노려보았으나 돌아온 건 짧은 키스였다.
“야!”
아무리 밀폐된 공간이어도 엄연히 CCTV가 비치되어 있는데. 의정이 놀라거나 말거나 우재는 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곤 의정의 손을 가져가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웃는 얼굴이 기분 좋아 보여서 의정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질렀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가 민망해 그저 꾸벅 고개만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밖은 어두컴컴했다.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썰렁해진 길을 걸었다.
“어…….”
처음엔 그저 어디선가 먼지가 날려 오나 싶었다. 그러나 그게 하나둘 바람을 타고 날아와 얼굴에 부딪히고 옷깃에 달라붙으니 눈이라는 걸 알았다. 의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그저 먼지처럼 작았던 게 어느새 새끼손톱만 해지더니 지금은 솜을 뭉텅 떼어놓은 것처럼 복슬복슬하게 자라나 있었다.
“눈이네.”
들려온 목소리에 얼른 옆을 보았다. 우재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돌연 얼굴에 닿는 눈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졌다. 의정은 입술 끝을 당기고는 깍지 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거리엔 오직 두 사람뿐이었고,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첫눈치고는 풍성했다.
“그냥 가기 아쉽네. 좀 걸을까?”
우재가 나직이 물었다. 둘 다 밤을 새웠다는 것도, 실컷 침대에서 뒹굴다가 나와서 힘들다는 것도, 청소를 해야 하는 것도 잊었다는 듯. 의정도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둘이 함께 맞이한 겨울의 첫 번째 눈이 아니던가.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긴 아쉬웠다. 좀 더 단단하게 손을 잡고 큰길을 따라가다가 방향을 꺾어 상가가 밀집된 사잇길로 들어갔다. 24시간 운영하는 카페가 눈에 보여서 안으로 들어가 커피도 하나씩 사 들었다.
따듯한 음료를 홀짝이면서 나붓나붓 흩날리는 눈을 맞으려니 한여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뛰어다니던 일이 생각났다.
“만약에 그때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함께 있을 일이 없었으려나.”
의정도 모르게 온 히트 사이클. 그걸 먼저 눈치챈 건 우재였다. 우재는 의정이 끙끙 앓는 사이에 한참 떨어진 종합병원까지 가서 억제제를 받아오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의정을 추궁하지 않고 조용히 비밀을 지켜주었다. 만약 그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나란히 걸을 수 있었을까.
“아니.”
우재는 오래 고민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목소리는 단호하기까지 했다.
“내가 널 좋아한 건 오메가여서가 아니니까.”
“아…….”
그럼 언제였느냐고. 그렇게 묻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의정은 입술을 몇 번 뗐다가 붙였다가 하다가 결국 커피만 한 모금 마셨다. 뭔가 낯간지러워서 차마 그런 걸 물을 수 없었다.
“처음엔 오해했어.”
조금 쓴 듯한 커피를 막 목으로 넘기는데 우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해했다고? 뭘? 의정은 모르는 척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오메가인 줄 알았거든.”
“내가?”
그 소리는 그냥 넘길 수 없어서 의정이 결국 물었다. 한 번도 자신이 오메가라는 걸 알아챈 사람이 없었는데 우재는 달랐나 싶어서였다.
“응.”
“왜?”
오해인 줄 알았다고 해도 그런 오해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일 텐데. 그러고 보니 한 번은 우재가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의정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하느라 미처 듣지 못하고 지나갔었다. 아니 그때 우재가 의정 형, 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불쑥 떠오른 기억에 민망해하는데 우재가 또 담담히 말했다.
“너한테서 좋은 향이 났거든.”
“좋은 향?”
“응. 풀냄새 같은 그런 거. 근데 정말 아주 희미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잘 못 느끼는 거였고, 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나도 착각한 줄 알았던 거야.”
마치 그걸 다시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우재가 의정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가 마시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물론 페로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느껴진다는 걸 의정도 이제 알았다. 실은 향을 맡으려는 건 핑계였다. 우재는 의정의 목에 살짝 입을 맞추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때부터 향을 맡았다고?”
의정은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어쩐지 입술이 닿았던 곳이 간질간질해진 탓이었다.
“응.”
그럴 리가. 이건 전혀 생각지 못한 소리였다. 의정은 우재가 자신의 형질을 알아낸 건 당연히 비 오던 날 밤, 히트 사이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미 그 전부터 페로몬을 맡을 수 있었다니.
“왜?”
우재가 그제야 의정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듯 물었다.
“아니… 나 열성이란 말이야. 그것도 0%대 확률이었는데 발현한 케이스였고. 그래서 페로몬뿐만 아니라 히트 사이클도 없다고 했었어. 그러니까 그걸 맡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인연이라는 거지. 너랑, 나랑.”
“뭐?”
“아닌가? 남들은 맡지 못하는 페로몬을 내가 알았고, 너도 유일하게 내 페로몬만 아니까. 이게 운명이지 뭐야.”
운명이라니.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낯간지러운 소리에 의정은 괜스레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우재는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오메가 페로몬을 느끼지 못한 걸 아쉬워한 적이 없었다고.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데 굳이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네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싫더라고 말이다.
널 기다렸던 거 같아.
좀 느끼하긴 했으나 그 말에 마음이 좀 설렜다는 건 아직 의정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저 의정은 그때 속으로만 그랬다. 여름이 되기 전까지 너무나 달랐던 우리는 서로를 만나 한없이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고. 그게 운명이라면 운명이지 않겠냐고.
손에 쥐고 있던 커피가 다 식도록 골목을 뱅뱅 돌았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어느덧 곳곳을 하얗게 바꾸었다. 나뭇잎이 없어서 조금 외로워 보이던 가로수도, 시멘트 틈에 피어났다가 그대로 시들어 버린 잡초도,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도, 삐죽빼죽 세워놓은 불 꺼진 와인 바 앞 빈 병들도, 불 꺼진 옷가게 간판 위도.
아무도 걷지 않아 새하얀 골목길에 두 사람은 소리 없는 자국을 남겼다. 빈 커피 잔을 버리고 아무도 없다는 핑계로 손도 놓지 않은 채 느릿느릿 걸음을 뗐다. 별 이야기는 없었다.
어제 우재가 장사하면서 만난 손님이나 오늘 날씨에 관한 거나 혹은 의정이 쉬면서 무얼 할지에 관한 것이나 일주일 후 시작할 아르바이트나. 특별할 것도 없는 대화를 이으며 걷는 것도 또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함께 처음으로 맞는 눈이 아니던가.
“어.”
허리는 얼얼하고, 다리는 무겁고, 불편한 걸 핑계 삼아 아예 우재와 팔짱을 끼고 걷던 의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 섰다. 자연히 나란히 보폭을 맞추던 우재의 걸음도 멎었다.
“의정아, 왜?”
두 사람은 이제 막 오피스텔로 통하는 골목에 접어든 참이었다. 단층 주택이 이어진 사잇길이라 폭이 좁아 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도 둘이 걸으면 딱 맞고, 셋에게는 비좁은. 의정은 그 골목 안쪽을 바라보면서 놀란 눈을 한 거였다.
“무슨 일이야?”
아무리 봐도 특별할 게 없는데 왜 그럴까. 우재는 혹시 이상한 게 보였나 싶어서 다시 신중하게 앞을 살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우재의 눈동자가 차츰 의아하게 바뀌던 때였다. 돌연 멈췄던 것처럼 의정이 또 갑작스럽게 걸음을 뗐다. 우재 역시 의정과 발을 맞추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의정이 불 꺼진 가로등 아래 서서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팔짱을 끼고 있던 제 팔을 풀어내 우재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곤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가만히 내려다보는 우재에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어둡지 않아?”
“응?”
우재는 여전히 의정의 말뜻을 알지 못했다. 의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젓고 우재의 어깨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름드리나무처럼 높다란 우재가 순순히 몸을 굽혔다. 점점 가까워지는 눈동자가 비로소 웃음기를 머금어갔다. 이제 우재도 의정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눈치챈 듯했다.
상이 흐릿해질 정도로, 입술과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접근했을 때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향이 흘러나왔다. 아침이 막 다가오기 직전 가장 어둠이 깊어진 시간. 가로등이 꺼진 주택가. 소리 없이 내리는 첫눈과 함께 그들은 입을 맞췄다.
입술과 입술을 마주 댄, 더 깊어지지 않는 가벼운 접촉인데도 어쩐지 다디달게 느껴지는 건 지금 내가 이렇게 입술을 마주한 게 너라서 그런 걸지도. 의정은 아예 우재의 목에 두 팔을 꽉 두르며 더욱 깊이 입을 가져갔다.
우재가 턱을 조금 더 비틀어 깊이를 더했다. 숨이 차고, 조금씩 몸이 더워지는 게 느껴졌다. 어느덧 우재는 커다란 손으로 의정의 뒷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안은 채 서있었다. 서로가 닿은 가슴에서 쿵쿵 작게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싶었다.
그때였다.
바스락.
미약한 소음이 들렸다. 의정이 화들짝 놀라 우재의 어깨를 밀어내고 소리가 난 방향을 보았다. 얼룩덜룩한 고양이 한 마리가 누군가 버리고 간 과자 봉지를 밟다가 낸 소리였다. 의정은 무안한 기분에 괜히 입술만 훔쳤다.
“갈까?”
우재는 모른 척 의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정은 말없이 마주 잡았다. 골목을 걸어 오피스텔까지는 금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훈훈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 두꺼운 옷을 입으니 약간 덥다 싶을 정도였다. 이러고 밤새 돌아갔으면 전기세가…….
“따듯하네?”
아마 자신이 돌아왔을 때 추울까 봐 온도를 높였을 텐데. 차마 밤새 보일러를 돌렸느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삼킨 말을 당연히 우재가 모르리라 생각했다. 주방으로 향하던 우재가 돌아보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웃고 있어서 의정은 우재가 말뜻을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챘다.
“푹 쉬고 있어.”
“어.”
의정은 다른 말 없이 그냥 웃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밤새 돌아간 보일러 때문에 다툴 날이 있을지 모른다. 서로 빨래를 해놓지 않는 거로, 청소 문제로, 어쩌면 서로 가지고 있는 버릇 때문에. 때때로 외출하거나 약속이 잦아져 늦게 귀가하는 일로. 뭐 그러면 어떤가. 그렇게 싸우는 것도 애정이라고 또 웃으며 넘기는 날도 있을 테니까.
싸울 날보다 너와 웃고 행복해할 시간이 더 많기에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걸.
<한없이 가까운>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