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초입, 새로운 시작
올해는 유독 더위가 이르게 시작되었다. 4월에 벌써 한낮 기온이 20도 후반대를 찍더니 5월에는 30도를 심심찮게 넘나들었고, 6월에 들어서니 한여름처럼 느껴졌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 연파랑 하늘에 점점이 뜬 흰 구름, 뜨겁게 달아오른 검은 아스팔트와 그 위로 아스라이 피어난 아지랑이.
의정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마가 따끈따끈해서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내리는데 문득 갈증이 났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주위를 둘러봤다. 외부에서 미팅 있어 정장을 입은 탓에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길 건너에 편의점이 보였다. 의정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 서서 좌우를 살피고 도로에 발을 디뎠다. 첫발을 미처 바닥에 딛기도 전에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오며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중심을 잡아야지, 생각하기도 전에 의정의 몸이 휘청하며 갸우뚱 기울어지는 느낌이 났다.
빠아아아아앙.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반쯤 의식이 날아간 의정은 미처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의정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유독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고 밋밋한 벽을 보며 의정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하는 생각했다.
“정신이 좀 들어요?”
의정이 두어 번 눈을 깜박였을 때쯤. 옆에서 불쑥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의정은 아직 흐릿한 눈을 돌렸다. 큼지막한 그림자가 앞에 있었다. 좀 더 시선을 올렸다. 조명을 받은 얼굴이 보였지만,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구세요?”
간신히 내뱉은 제 목소리가 마른 흙처럼 버석버석했다. 의정은 미간을 좁히며 무의식중에 손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손등에 긴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걸 따라가니 폴대에 투명한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의정이 잠시 한눈판 사이 남자가 휙 돌아섰다.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불러보려고 했지만, 이미 남자는 저만치 걸어간 후였다. 키가 아주 크고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순간 우재인가, 했다가 의정은 곧 그럴 리 없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그런 착각을 한 게 민망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요즘 바쁘다고 오래 못 봐서 그런가. 이런 순간에 왜 우재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정은 멀뚱히 천장을 보고 있다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벌떡 일어나 앉으려니 어지럼증이 훅 밀려와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자신이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도 떠올랐다. 목이 말라서 편의점을 찾다가 맞은편에 있는 걸 보고 길을 건너려던 차에 의식을 놓친 것 같았다.
“환자분, 잠시만 진찰하겠습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정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의정에게 이것저것 묻고 안색을 살피는 의사 옆에는 예의 낯선 남자도 함께 서 있었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고 아주 뚜렷한 미남이었다. 분위기며 체격을 보니 전형적인 알파였다.
‘대체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모르는 얼굴인데. 심지어 낯선 남자는 마치 의정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의사와 대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조 증상 같은데, 평소 복용하시는 억제제 가지고 계십니까?”
잠깐 남자에게 한눈을 판 사이 의사가 묻는 말을 놓친 의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 오메가죠? 히트 사이클 전조 증상 같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설명은 의사가 아니라 그 옆에 선 남자에게 나왔다. 의정은 ‘아.’ 하고 멍한 반응을 보였다.
어질어질하고 어딘지 모르게 나른하고 갈증이 나기에 일사병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히트 사이클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던가. 의정은 여전히 몽롱한 정신으로 날을 셈해봤다. 요즘 야근에 주말 출근도 불사하는 바쁜 시간을 보냈더니 시간이 가는 걸 제대로 못 느끼긴 했다.
‘하긴 그게 아니었어도 잘 모르긴 했겠구나.’
요즘은 좀 주기가 일정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성이어서 그런지 기간도 길고, 날짜가 딱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다 또 의정은 남자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의정과 눈을 마주친 남자가 씩 웃어 보였다.
“제가 좀 예민해서 알아챘습니다. 아마 웬만한 알파는 모를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어투는 좀 거만하게 들렸다. 저 사람이 우재랑 비슷해 보였다니, 히트 사이클이 임박하자 제 알파를 찾는 오메가의 본능이 일었던 것인가 보다. 민망한 기분에 뺨을 쓸어내린 의정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런 김에 제 소지품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침대 옆 수납장에 가방과 재킷이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핸드폰은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꺼내려면 팔을 쭉 빼야 하는데 하필이면 손등에 링거가 꽂혀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불쑥, 팔 하나가 재킷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스스로 알파라고 밝힌 남자가 안쪽 주머니에 들었던 핸드폰을 꺼내 내밀었다.
“자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손길에 의정은 멀뚱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때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지 않게 억제제 복용하시고, 수액 다 맞으시면 퇴원하셔도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정이 얌전히 끄덕이자 의사는 더 할 말이 없는 듯 바삐 사라졌다.
의정은 그 뒤를 눈으로 좇다가 다시 남자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봤다. 어쨌든 계속 저기에 둘 순 없었다. 의정은 남자에게 휴대폰을 건네받아 화면을 터치했다.
회사 사람들과 우재에게 온 연락들이 부재중 목록에 남아 있었다. 어디에 먼저 전화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일단 회사에 연락했다.
“네, 팀장님. 병원에 잠시 왔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네, 네.”
의정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병원에 온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히트 사이클에 관한 것도 말해야 하는데 그건 전화로 전달할 사항은 아니었다.
일단 회사에 연락했으니 이제는 우재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옆얼굴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가 병원에 옮겨준 것 같은데,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구나.
“인사가 늦었습니다. 병원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의정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하곤 이내 피식 웃었다.
“아뇨, 뭐. 제 차 앞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데리고 온 겁니다. 크게 문제없다고 하니 안심이네요.”
“아……. 그건, 죄송합니다.”
의정은 다시금 사과했다. 자신이어도 놀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쩡히 운전하다가 사람이 쓰러지는 걸 봤으니 내가 친 건가 싶었겠지.
근데 길 건널 땐 차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제대로 못 봤을 수도 있지. 일사병처럼 어질어질하게 현기증이 올라왔으니까.
“괜찮아요. 죄송할 일도 아니죠. 그보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윤의정입니다.”
엉겁결에 제 이름을 밝힌 의정은 뒤이어 들린 말에 어이없다는 눈을 하고 말았다.
“그래요, 의정 씨. 그럼 나한테 미안하고 고마우니까 밥 한 끼 살래요?”
“네?”
밥을 먹자니. 뭔가 대화의 흐름이 이상한 것 같은데.
“지금은 나도 가봐야 하니까 안 될 것 같고. 의정 씨도 당분간은 어렵겠죠. 잠깐 핸드폰 좀 주세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의정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지고 갔다.
이내 어디선가 부드러운 음악이 들렸다. 남자의 주머니에서 흐르고 있었다. 남자가 제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하더니 이번엔 의정의 핸드폰 액정을 꾹꾹 눌렀다.
“이따가 연락할 테니까 받으세요. 알겠죠?”
남자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아직 파악도 못 한 의정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씩 웃고는 휙 돌아섰다.
“저기요!”
멀거니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의정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불렀지만, 이미 남자는 문을 나가고 있었다. 의정은 얼른 액정을 터치했다. 최신 통화 목록 제일 위쪽에 낯선 이름이 떠 있었다.
[알파남 최명훈]
본인의 형질을 이렇게 대놓고 밝히는 알파라니.
“이게 뭐야…….”
어이가 없어서 한참 내려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의정은 한 번 더 걸어볼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뭐 꼭 연락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도 아니고. 그보다는 우재에게 전화하는 게 먼저였다.
―의정아!
“응.”
―너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연락 안 된다고 회사에서 나한테 연락이 왔었어.
“별거 아냐. 병원 와서 진료받느라 연락 온 걸 몰랐어.”
―병원? 무슨 일인데?
걱정을 담은 우재의 다정한 목소리에 안심이 됐다. 의정은 침대에 몸을 늘어뜨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고 몸이 안 좋길래. 일사병인 줄 알고 왔거든. 근데 히트 사이클 같다고 그러네.”
의정은 굳이 쓰러졌었다거나 다른 사람이 데려다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바쁜 우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다른 기색은 느끼지 못했는지 우재도 그대로 넘어갔다.
―이런…… 내가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해.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데리러 갈 테니까.
그래도 우재는 본인이 알아채지 못한 걸 자책하며 미안해했다.
“아냐. 수액도 다 맞았고 이제 퇴원하면 돼. 회사에도 돌아가 봐야 하고. 걱정하지 말고 일 봐. 너도 요즘 많이 바쁘잖아.”
의정만큼이나 우재도 요즘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푸드 트럭으로 시작했던 요식 사업은 점차 번창해서 의정에 취직했을 땐 번듯한 레스토랑으로 변했다.
그러던 사업은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서울에 지점까지 열 정도로 커졌다. 최근에는 온라인으로도 눈을 돌려 판매를 준비 중이라, 한창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우재를 병원까지 부르는 건 의정으로서는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도…….
“걱정시켜서 미안해. 진짜 안 와도 돼.”
때마침 바닥을 보이는 수액을 보며 의정이 우재를 다독였다. 그래도 오고 싶다는 우재를 달래고 통화를 마친 뒤 간호사를 불러 주삿바늘을 뺐다.
물 한 잔을 부탁해 건네받고 가방에 챙겨두었던 억제제를 찾아 먹었다. 그대로 잠시 누워 있었더니 현기증이 차츰 가라앉았다. 대신 이마며 목덜미, 귀 주변에 미열이 느껴졌다. 곧 히트 사이클이 올 것 같았다.
‘복귀하면 곧장 병가 써야겠네.’
원무과에 가서 계산을 마친 후에 병원 건물을 나섰다. 여전히 해는 쨍쨍했다. 도로에서 기절하고 응급실에 실려 와 누워 있었는데도 다행히 시간은 많이 지나 있지 않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의정은 승강장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를 보고 그리로 가기 위해 걸음을 뗐다.
“이제 나왔어요? 한참 걸렸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불쑥 들리는 음성에 도로 멈추어 섰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최명훈 씨.”
의정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상대를 바라봤다. 최명훈이 눈매를 접으며 씩 웃는 게 보였다. 마치 친근한 사이를 만났을 때 같은 반응이었다.
저 사람이랑 그런 친분은 없는데? 본래도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의정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지거나 말거나 최명훈이 가까이 다가왔다.
“가요.”
“네?”
갑작스럽게 어디를 가자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의정은 손목이 붙들렸다.
비록 저쪽이 자신보다 크고 체격도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 역시 다 큰 성인 남성이 아니던가. 의정은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끌려가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의정은 속절없이 최명훈에게 잡혀서 주차장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한참 걷던 최명훈이 마침내 멈추어 섰다. 차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의정이 보기에도 제법 값이 나가 보일 법한 새빨간 스포츠카 앞이었다.
“타요.”
“앗!”
그야말로 아차, 하는 사이였다. 대체 무슨 조화인지 스포츠카 문이 위로 올라가 있었고, 어느새 의정은 조수석 시트에 밀어 넣어진 후였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생각해보니까 그냥 가면 안 되겠더라고요. 히트 사이클 앞둔 오메가를 그냥 두고 간다니. 알파로서 예의가 아니지. 어차피 가는 길이니 모셔다드리죠.”
의정은 기막힌 얼굴로 최명훈을 올려다봤다. 화가 나는데, 어느 부분에서부터 화를 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왜 멋대로 태웠느냐 따지고 싶었고, 남의 성은 왜 함부로 떼고 부르느냐 항의하고 싶고 그 외에도 나올 말이 너무 많아서 턱 막힌 기분이었다.
의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차 문이 냉큼 닫혔다. 재빨리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은 최명훈이 액셀을 밟았다.
스포츠카답지 않게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하지만 난데없이 남의 차를 얻어타게 된 의정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문을 열어보려고 해도 대체 뭘 눌러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고, 최명훈이라는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난감했다.
“셀바스에서 일하죠?”
내내 조용하던 최명훈이 우측으로 코너링하며 물었다.
의정은 창밖으로 익숙한 건물들을 확인하다가 운전석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좋은 회사 다니네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최명훈이 말한 셀바스는 의정이 근무하는 IT 회사였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안 걸까. 아까 핸드폰을 멋대로 가지고 갔을 때? 아니면 쓰러졌을 때 소지품을 함부로 뒤져본 건가? 이제는 아예 딱딱해진 의정의 얼굴을 최명훈이 힐끔 한 번 보고는 씩 웃었다.
“그냥 뭐, 그런 게 잘 어울려 보여서?”
제대로 이야기해줄 마음이 없다는 소리였다. 의정은 두 팔을 엮어 단단히 팔짱을 꼈다. 최명훈은 경계심이 들어간 의정의 자세를 보고도 별말 하지 않았다.
그사이 빠르게 달리던 차가 회색 빌딩의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의정의 얼굴은 한층 더 굳어졌다. 최명훈이 차를 몰아 들어선 곳은 의정이 일하고 있는 회사 빌딩이었다.
널찍한 지하 주차장을 달리던 빨간 스포츠카가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주차 라인에 안착했다.
“자, 도착!”
최명훈이 경쾌하게 외치며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의정을 돌아봤다.
“당신 대체 누굽니까? 내 정보는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제 짐에 손댔습니까?”
만약 가방을 열어봤다면 회사가 어딘지 알아볼 수 있었을 거다. 오늘 외부 미팅이 있던 터라 명함을 케이스에 넣어서 몇 장 챙겨 가지고 갔었으니까. 하지만 부득이하게 그걸 봤다고 대답하더라도 불쾌감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 아니에요. 그냥 좀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알게 된 거지.”
최명훈이 장난기 섞인 눈을 찡긋했다. 의정의 표정은 더욱 딱딱해졌다.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봐요. 이따가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입술을 꽉 물었다가 놓은 의정이 최명훈의 말을 따지려 막 입을 열던 찰나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차 문이 열렸다. 의정의 시선이 열린 문과 운전석을 차례로 훑었다.
의정은 최명훈을 상대하는 것보다 돌아가는 걸 택했다. 어차피 지금 헤어지면 다시 안 볼 사이였다. 저쪽이 자신의 회사도 알고 이름도 알고 있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연락할게요! 꼭 받아요!”
운전석에 앉은 최명훈이 능청스럽게 외치는 게 들렸다. 의정은 대꾸도 안 하고 그대로 걸어갔다. 연락할 테니 받으라니. 절대 그럴 일 없었다.
의정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진동이 울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터치했다. 다행히 우재의 전화였다.
“응, 우재야.”
―회사 도착했어?
“응. 지금 막 엘리베이터 탔어.”
거울에 비친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하고 초췌해 보였다. IT 회사에 근무하며 야근과 휴일 출근이야 인이 박였다고 생각했지만, 히트 사이클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시간 채우지 말고, 반차 쓰고 나와.
의정이 성실하고 아픈 티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인 걸 잘 아는 우재의 염려가 담긴 말이었다. 의정은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아무래도 병가를 며칠 써야 할 거 같아.”
―그렇게 해.
“도착했다, 끊을게.”
수화기 너머로 알았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의정은 통화를 종료하고 밖으로 나왔다.
조용한 사무실에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잔잔한 음악만 흘러나왔다. 그대로 팀장에게 다가갔다. 한가로운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던 팀장이 의정을 돌아봤다.
“왔어? 안색이 영 안 좋네.”
쯧쯧. 혀를 차는 팀장에게 의정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네. 팀장님, 저 오늘부터 병가 좀 내야 할 것 같아요.”
팀장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대꾸했다.
“이틀이면 될까?”
“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의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이틀이면 충분했다.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팀장은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의정이 오메가라는 걸 아는 만큼 히트 사이클 때문이려니 생각하는 듯했다.
“응. 더 쉬게 해주고 싶은데, 미안.”
“아니에요.”
아마 오늘부터 히트 사이클이 온다면, 내일이 가장 절정이겠지. 주말에 여유 있게 쉬면 월요일에는 출근할 수 있었다.
“그래. 얼른 가봐. 약은 먹었어?”
“네. 아까 병원에서요.”
“응, 응. 잘했어, 잘했어. 가봐.”
팀장이 얼른 가라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가벼우리만치 경쾌한 태도였다.
“저, 보고는…….”
팀장이야 얼른 가라고 했지만, 의정은 그럴 수 없었다. 오늘 외부에서 진행된 미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달하고 가야 했다.
“아아, 그건 내가 연락받았어. 진행하기로 했다면서?”
하지만 의정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팀장이 선수를 쳤다.
“그 건은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 월요일에 회의하자고.”
의정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곧장 돌아섰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았는지 기다릴 것도 없이 열려 그대로 올랐다.
“의정아.”
로비에 멈추어 열리는 문을 멍하니 보다가 막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굴참나무처럼 든든한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일까. 코끝이 찡해지는 이유는. 히트 사이클이 다가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의정이 빠른 걸음으로 우재에게 걸어갔다. 어느 순간에는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커다란 품에 푹 감기듯 안겼다. 축축한 흙에서 나는 기분 좋은 냄새를 맡고 나자 뭉클함이 더욱 커졌다. 그립고 애틋한 제 알파의 향이었다.
여기가 회사 로비라는 것도, 누군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안심되고 진정이 되는 이 품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우재는 아무 말 없이 의정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가자.”
한참 안겨 있던 의정의 몸을 떼어낸 우재가 낮게 말했다. 의정은 고개만 끄덕여 우재와 발을 맞춰 밖으로 나왔다. 곧장 건물 앞에 대기 중인 택시를 탔다.
“일은 어떻게 하고?”
우재의 어깨에 기대듯 앉으며 물었다. 말투에 약간 투정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바쁠 텐데 왜 왔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다.
의정의 어깨를 감싸듯 안은 우재가 옆 이마에 입술을 댔다. 평소보다 살결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열 있네?”
물어본 말에는 대답 없이 다른 소리였다. 하지만 의정은 별말 없이 우재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히트 사이클이 다가오니 스스로 어리광이 생기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도 아니었다. 우재와 만나고 몇 년째 함께 히트 사이클을 보내면서 생긴 습관 같은 거니까.
“좀 자. 도착하면 깨워줄게.”
분명 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다정한 목소리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까무룩 의식이 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우재는 제게 기대어 잠든 의정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따끈한 피부가 좋기도 했지만, 좀 걱정도 됐다. 요즘 너무 소홀했다고 후회도 했다.
우재는 요즘 고민이 많았다. 푸드 트럭으로 시작된 사업이 프랜차이즈로 자리 잡혔고, 이제는 온라인 시장으로도 진출을 앞두고 있었다.
분명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우재는 점점 더 자신이 지쳐간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음식도 하고 장사도 하고 손님도 상대하면서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의정과 저녁을 함께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생활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건 우재에게 불안감과 초조를 넘어서 피로감으로 돌아왔다. 그냥 다 정리하고 예전처럼 작은 식당이나 하면서 의정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철없는 소리라고 하겠지.’
책임감도 강하고 무엇보다 우재가 일하는 모습을 좋아하는 의정이라면. 다 그만두고 너랑만 있고 싶다는 말에 그렇게 말할지 몰랐다.
사실은 너도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일했으면 한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안 되겠지?
자신은 다른 알파들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아닌 듯했다. 자신의 오메가가 가만히 제 품에서만 있었으면 하니까. 우재는 따뜻한 이마에서 입술을 떼고, 부드럽고 여린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어느덧 택시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빌라 입구에 멈추어 섰다. 계산을 마친 우재가 의정을 품에 안아 내렸다. 도착하면 깨우겠다고 했지만, 애초에 그런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전실을 지나쳐 중문을 통과했다. 복도를 걸어가 잠시 널찍한 거실에 시선을 주었다가, 그대로 가장 안쪽에 있는 메인 룸으로 들어왔다.
방 가운데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후 정리를 했는지 위는 말끔했다. 우재는 한쪽 팔로 의정을 고쳐 안고 이불을 살짝 들추었다.
“어…….”
푹신한 매트리스에 등이 닿고서야 의정이 혼곤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천장을 확인한 후 시선이 곧장 우재에게 향했다.
“깨우라니까.”
우재가 잔잔히 웃으며 의정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은 이마를 스치고 콧날을 훑더니 어느덧 입술로 내려왔다.
“좀 더 자. 이따가 깨워줄게.”
어쩌면 우재의 목소리에는 수면제 성분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아까 택시에서도 그러더니, 지금도 고작 자라는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의정은 거부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우재는 고르게 변한 의정의 숨소리를 듣다가 그 옆에 앉았다. 공기 중에 천천히 그의 페로몬이 흐르기 시작했다.
의정은 몰랐겠지만, 우재는 아까부터 미미하게 전해지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에 느껴지던 풋풋한 향은 달착지근하고 농밀하게 변해 있었다. 억제제를 먹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오늘 밤부터는 본격적으로 히트 사이클이 올 것 같았다. 우재는 다정한 손길로 의정의 열이 오른 이마와 목을 쓸어주고 일어섰다.
* * *
의정은 코에 감도는 촉촉한 단내를 맡고 설핏 미소 지으며 눈을 떴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위가 어두운 것으로 봐서는 해가 진 것 같았다.
조용한 실내에는 제 알파의 잔향만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간 거야.’
향만 남겨 놓고. 괜히 투덜거리며 침대를 내려왔다.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이 ‘지잉’ 하고 진동했다. 한 번이 아니라 연달아 ‘지잉, 지잉’ 하고 울리는 걸 봐서는 전화인 모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액정을 확인한 의정의 눈이 찌푸려졌다. 발신자는 ‘최명훈’이었다. 아까 바로 차단을 걸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전화가 오는 것도 몰랐을 텐데.
“누군데 안 받아?”
원수라도 만난 듯 액정을 노려보던 의정이 휙 고개를 들었다. 우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도 들려 있었다.
“스팸이라서.”
의정은 단호하게 빨간 버튼을 엄지로 쭉 밀었다. 동시에 상대의 번호를 그대로 차단해 버렸다. 우재의 시선이 잠시 핸드폰을 향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차 마시려고?”
찻잔에서 은은하게 번져오는 향이 제법 좋았다. 우재가 일할 때 즐겨 마시는 보이차였다.
“응. 너도 마실래?”
의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계속 자서 그런지 조금 출출했다. 차라리 뭐라도 먹는 게 나을 듯했다.
“배고파?”
“응. 좀.”
우재가 웃으며 의정의 손목을 잡고 주방으로 데려갔다.
“앉아. 뭐 좀 해줄게.”
“그냥 콘플레이크에 우유 말아먹어도 되는데.”
“아예 식사하자.”
의정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시곗바늘은 5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우정의 말마따나 좀 이른 저녁을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소화시킬 겸 반신욕도 하고, 그러고 오늘은 내내 같이 누워 있자.”
왜 그 말에 몸이 후끈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긴, 히트 사이클이 오니 본능이 강해져서지. 소화를 시키는 건 반신욕이 아니라 아마 다른 일이 되겠지. 의정은 괜히 우재를 흘겨보고는 식탁에 있는 물병을 가져와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우재가 그런 의정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고 몸을 돌렸다. 이런저런 식재료와 식기를 찾아내는 손놀림이 능숙하고 빨랐다. 의정은 멍하니 물 잔만 빙글빙글 돌리며 우재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항상 볼 때마다 참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우재의 모든 면이 멋졌지만 역시 가장 눈길이 가는 건 요리를 하는 뒷모습이었다.
“뭐 할 거야?”
“농어 좋은 게 있어서 준비해 뒀거든. 스테이크로 하려고 하는데, 어때?”
“농어 스테이크? 좋지.”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함께 주는 농어는 횟감으로도 인기가 많았지만, 스테이크나 매운탕 재료로도 많이 쓰였다.
물론 워낙 비싼 생선이라서 레스토랑에서 먹기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의정에겐 집에서 얼마든지 고급 요리를 해줄 요리사가 있지 않던가.
우재는 이미 손질을 마치고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로 밑간을 해둔 농어를 꺼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팔팔 끓을 때 소금과 아스파라거스를 툭툭 넣어 데치고 찬물에 헹궜다.
미리 준비해 둔 방울토마토는 꼭지만 제거해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굽고, 아까 아스파라거스를 데친 냄비에 오렌지 주스를 한 컵 부었다.
오렌지 주스가 끓어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냄새가 주방에 폴폴 풍기기 시작하자 양을 확인한 우재가 버터를 첨가해 녹이고, 후추와 소금으로 소스를 마무리했다.
치이이익.
널찍한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자 맛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미리 재둔 농어살이 팬 위에 놓였다. 아까보다 더 입맛을 돋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냄새 좋다.”
“그래?”
노릇노릇하게 익은 농어를 가운데가 우묵하게 들어간 널찍한 접시에 옮기던 우재가 의정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열이 잔뜩 오른 팬 앞에 있어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응.”
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서 일어섰다. 저렇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줬는데, 그냥 먹기에는 좀 아쉬웠다.
5시라고는 해도 아직 해도 저물지 않았다. 여름의 초입. 어둠이 내리려면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했지만.
의정은 농어 스테이크에 어울릴 법한 와인을 고르려 와인 셀러를 살폈다. 종류는 많지 않지만, 우재가 일하면서 선물 받은 것들이 몇 가지 꽂혀 있었다. 레드와 화이트가 대부분이었지만 스파클링도 몇 개 됐다. 의정은 그중에서 청량하면서도 단맛이 덜한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식탁으로 돌아오니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오렌지 소스를 입힌 농어 스테이크와 여린 새싹을 골라 드레싱한 샐러드. 의정이 와인을 가지고 간 걸 알아챈 우재가 미리 준비해둔 목이 긴 와인글라스까지.
“잘 먹을게.”
의정이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오렌지 소스에 적셔진 농어는 새콤달콤한 맛이 났다.
“진짜 맛있다. 농어가 이런 식감이었구나.”
그간 우재 덕분에 이런저런 맛있는 음식을 제법 먹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농어 스테이크는 생선으로 만든 것 중에서도 단연 첫손으로 꼽힐 만했다.
“다음번에는 회도 먹으러 가자. 아무래도 배송을 받아야 해서 회로 뜰 수는 없더라고.”
“응, 좋아. 지난번에 갔던 통영 정말 좋았는데. 거기 해안 길 따라 드라이브했던 거 기억난다. 해질 때 풍경이 참 인상적이었잖아.”
의정이 떠올린 건 2년 전 대학을 졸업한 기념으로 우재와 함께했던 통영 여행이었다. 둘이서 처음 같이 간 여행이어서 더욱 특별했던 시간들.
“달아공원에서 본 풍경도 좋았지? 초코케이크처럼 동글동글한 섬들이 와인빛 바다에 찰랑거리는 게 참 예뻤어.”
누가 요리사 아니랄까 봐. 표현도 꼭 저같이 한다고 생각하며 의정이 피식 웃었다.
“응. 거기도 좋았어. 특히 전망대 가는 길에 동백꽃 핀 것도 예뻤고. 그래도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바다가 보이는 호텔이었어!”
“호텔이 좋았던 거야 그날 밤이 좋았던 거야?”
“얘가 뭐라는 거야!”
의정이 기겁하며 포크로 우재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요즘 일하면서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을 상대해서 그런가 능글맞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냥 객실도 그렇고 밖 풍경이 좋았다는 거거든?”
“음…… 기억나네. 의정이 너 거기 욕실 좋아했지. 욕조가 밖으로 나와 있어서 노천욕을 할 수 있는 게 시원해서 마음에 든다고. 우리 거기서…….”
우재가 마치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듯 은근한 눈으로 의정을 바라봤다.
아무리 요리하는 우재를 보고 살짝 흥분했다고는 해도 밥 먹다가 말고 야릇한 분위기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야! 하지 마! 밥 먹는데 무슨 얘길 하려고 그래!”
의정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켤 때였다. 테이블에 올려둔 우재의 핸드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먼저 시선을 움직인 건 의정이었다. 까만 액정에 ‘명훈 형’이라는 이름이 뜬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저쪽도 명훈이었구나. 순간 의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필이면 오늘 만난 알파남도 최명훈이지 않았던가. 달갑지 않은 우연이었다.
하지만 저쪽은 우재에게 각별한 인연이었다. 갑작스러운 발현으로 방황하던 우재를 붙잡아주고 페로몬을 제어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 아직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의정은 그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제법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 반하여 오늘 만난 알파는 제멋대로에 황당한 남자였다.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갈취해 가고, 별로 바라지도 않았는데 회사 앞까지 태워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심지어는 밥까지 사라고 하면서 연락을 받으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번호를 차단하길 잘한 것 같았다.
“형,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우재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무어라 말했는지 우재의 입가에 픽 실소가 흘렀다. 의정은 들고 있던 와인글라스를 내려놓고 포크로 손을 옮기며 그런 우재를 구경했다.
“지금? 저녁 먹고 있어. 이르긴. 벌써 5시가 넘었는데. 아니, 의정이랑 같이. 일이 좀 있어서 집에 일찍 들어왔거든.”
대화는 특별할 게 없었다. 아마 우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물었다가 식사 중이라는 얘기에 누구랑 먹느냐는 말까지 나온 듯했다. 의정은 포크로 농어 살을 찍었다. 얼마 남지 않아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벌써 6월. 직원들은 여름 휴가를 잡아두고 날짜를 세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이 밀린 의정이나 우재는 휴가를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단 우재의 일이 일단락되어야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농어회는 안 될 것 같은데.
‘음…… 난 다음 주에는 될 것 같긴 한데. 주말에 쉴 수 있을 거 같고. 우재는 금요일, 토요일이 가장 바쁘니까… 일요일 껴서 이틀만 다녀올까?’
그래도 남해까지는 가야 하는데, 1박 2일은 아쉬울 것 같은데. 하루 연차를 써서 2박도 가능할까.
“어, 나야 괜찮은데. 의정이한테 물어봐야지.”
같이 날짜를 맞출 수 있을까 궁리하던 의정은 제 이름이 들려와 눈을 돌렸다. 우재가 의아해하는 의정을 보고는 통화 상대에게 “잠시만.” 하고 양해를 구했다.
“명훈이 형이 시간 괜찮으면 같이 식사하면 좋겠다는데.”
“아, 그래? 언제?”
의정이 일정을 묻자, 우재가 명훈에게 날짜를 물었다.
“형은 네 시간에 맞출 수 있다고 하네. 요즘 바쁘다더니 그것도 아닌가 봐. 형? 요즘 놀아? 전에 뭐 한다고 하지 않았어?”
수화기 너머에서 시원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듣는 사람도 유쾌해질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그런 건 나랑 상의할 게 아닌데. 알았어. 그럼 의정이랑 얘기해보고 형한테 다시 연락할게. 지금은 안 된다니까.”
의정은 당장 정해도 상관없는데, 우재는 식사 중이니 좀 기다리라며 딱 잘라 말했다. 명훈이 그에게 좋은 형이기는 해도 의정보다 더 먼저 신경 쓸 상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편으로는 오늘부터 시작될 의정의 히트 사이클 상황을 보고 날짜를 정하겠다는 의도도 있을 터였다. 의정은 제 사정부터 챙기는 우재에게 포크를 내밀었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농어가 촉촉한 오렌지 소스를 바른 채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우재는 기꺼이 입을 열었다. 농어살이 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왔다. 아랫니에 살짝 닿았다가 혀에까지 감겨 들어온 농어에서 새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우재는 포크를 이로 살짝 물어 당겼다.
은색 포크에 미끄러지는 우재의 윗입술을 보던 의정이 꼴깍 침을 삼켰다. 식욕 때문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농염하고 질척한 욕망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랫배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걸 봐선 아마 다른 이유겠지.
의정은 포크를 거두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손목이 붙들리는 게 먼저였다. 눈이 크게 뜨였다. 우재가 씩 웃으며 얼굴을 제 쪽으로 가까이하는 게 보였다. 입술이 꾹 눌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가벼운 접촉은 더 깊어지지 않고 그대로 끝났지만, 도리어 그게 의정을 한층 흥분하게 했다. 더는 식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히트 사이클을 앞에 둔 오메가한테 고작 뽀뽀만 하고 끝내려고 했다니.
의정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직 손목은 우재에게 붙들려 있었다. 남은 와인을 단번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의정을 따라 우재도 몸을 일으켰다.
입술이 다시 포개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로의 여리고 말랑한 살갗을 핥고 비볐다. 물기가 도는 윗입술을 빨아당기고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허리가 파르르 떨리고 아래에 더욱 열기가 고이는 게 느껴졌다.
“하아…….”
의정은 다디단 숨을 흘리며 우재의 어깨를 쓸었다. 다른 손으로는 판판한 허리를 매만졌다. 까슬까슬한 천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약간 축축한 살결이 만져졌다. 좀 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밴딩 바지 안으로 진입하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우재가 의정을 따라 했다.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바닥이 날씬한 허리 라인을 훑더니 굴곡진 골반을 쓰다듬다가 차가운 느낌이 나는 가죽 벨트를 따라 앞으로 이동했다.
달칵.
버클이 열리며 벨트가 풀어졌다. 지퍼를 단숨에 내린 우재가 벌어진 틈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얇은 천 안에 얌전히 수납되어 있을 의정의 성기를 손바닥 전체로 감쌌다.
“하……!”
동시에 입술에 의정의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우재는 혀를 의정의 입 안으로 밀어 넣어 단단한 치열을 쓱 훑었다. 동시에 천에 감싸인 성기를 어루만졌다.
우재의 엉덩이를 쓰다듬던 의정이 손가락에 꽉 힘을 줬다. 어깨를 붙든 손에도 절로 힘이 들어갔다.
치아와 잇몸을 공략하던 우재의 혀가 굴곡진 입천장을 훑었다. 간지럽고 짜릿한 감각에 의정이 퍼뜩 몸을 떨었다. 우재의 손안에 잡힌 의정의 성기가 흥분하여 더 바짝 일어섰다.
우재가 의정의 드로즈를 끌어 내렸다. 벌어진 틈으로 손을 밀어 넣자 뜨끈한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아직 힘이 덜 들어가 말랑말랑한 기둥을 누르듯이 문지르자 의정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떨림은 잡힌 성기 기둥부터 우재의 혀에 점령당한 입 안에까지 전부 전해졌다. 의정의 말랑한 혀가 복수라도 하듯 우재의 살덩이를 밀어냈다. 하지만 밀리기는커녕 그대로 휘감겨 아릴 정도로 쭉쭉 빨리고 말았다.
목 안에서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우재가 달래듯 혀를 풀어주고 바닥을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동시에 기둥을 감싼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열에 들뜬 의정의 숨이 맞붙은 우재의 입 안으로 흩어졌다. 의정은 우재의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붙이고 저를 자극하는 감각에 집중했다. 어느덧 꼿꼿해진 성기에서 미끌미끌한 점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재의 손길은 더욱 빨라졌다.
마찰열이 일어날 만큼 바쁘게 손바닥을 상하로 움직이며 다른 손으로는 의정의 아랫배를 쓰다듬다, 가슴 위에 돌출된 유두를 문질렀다. 불룩하게 솟아난 유두가 눌리는 느낌에 의정이 다시 한번 허리를 떨었다.
잠시 떨어진 입술 새에서 연신 달아오른 호흡이 흩어져 나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의정의 눈가에 우재가 쪽쪽 입을 맞춰 주었다.
“읏!”
기둥을 옥죄고, 귀두를 엄지로 꾹 누르는 압박감에 마침내 의정이 사정했다. 흰 점액이 툭툭 터져 나와 우재의 옷과 의정의 바지에 흔적을 남겼다.
우재가 축축해진 제 바지와 의정의 바지를 차례로 끌어 내렸다. 이미 그의 성기는 크게 부풀어 있었다. 우재는 한번 절정에 올라 물기가 어린 의정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를 커다란 손으로 한 번에 잡았다. 의정은 제 성기에 닿는 뜨거운 기운에 밭은 숨을 내쉬며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응, 으응, 아, 하아, 하…….”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비벼지며 적나라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두 입술도 겹쳐져 서로의 혀를 빨고 호흡을 나누었다. 서로가 본능적으로 내보내는 페로몬이 끈적하게 얽혔다.
등과 허리, 아랫배, 유두를 만지는 손길은 욕망과 애정이 함께 묻어났다. 의정이 우재에게 더 몸을 바짝 밀착시키고 먼저 절정에 올랐다.
우재가 그런 의정의 입술 주변에 쪼는 듯한 키스를 남기더니 몸을 떼어냈다. 우재에겐 이 정도 자극은 사정하기엔 좀 미진했다.
의정이 살짝 웃더니 몸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우재는 점점 눈높이가 낮아지다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의정을 내려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펠라가 싫지는 않았다. 도리어 의정의 성기를 삼켜 흥분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건 우재 쪽이었다.
의정은 금방이라도 절 일으키고 싶어 하는 우재를 힐끗 올려 보고 입술을 벌려 성기 끝을 혀로 싹 핥았다. 점액질이 조금 묻어 있어 약간 씁쓸했다. 야하고 적나라한 맛. 의정이 입을 좀 더 벌려 성기를 삼켰다.
우재는 힘이 풀리지 않도록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줬다. 의정이 아랫니가 기둥을 긁으며 지나갔다. 그 날카롭고도 선명한 자극이 인내심 강한 알파를 자극했다.
의정이 혀를 움직이며 좀 더 깊이 성기를 삼키려 노력했다. 워낙 부피가 큰 탓에 그것만으로도 버겁게 느껴졌다. 두 팔로 우재의 다리를 붙잡았다. 입술에 힘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뒤로 조금씩 뺐다.
붙든 허벅지가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의정은 제가 성기를 문 것만으로 흥분하는 우재를 다시 한번 힐끗 올려다봤다. 삭삭 혀로 성기 끝을 핥자 곤란한 눈빛이 돌아왔다.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어 그대로 성기를 깊숙이 삼켰다.
분명 처음에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은 벌써 두 번이나 사정하지 않았나. 우재도 제 안에서 싸기를 바랐다. 의정의 고갯짓이 더 빨라졌다. 입술을 조이고, 혀를 놀리는 게 키스를 할 때와는 또 달랐다.
조금 어설프기는 해도 최선을 다하는 의정을 우재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응원했다. 조금씩 성기가 절정을 향해 나아갔다.
“의정아, 이제 빼.”
우재가 의정의 귓불을 살짝 문지르며 다정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의정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더 깊숙이 우재의 성기를 몰아넣었다. 압박감이 강해지며 기어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의정아……. 읏!”
고집을 부리듯 저를 더 자극하는 의정 때문에 우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강제로 떼어내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우재는 부드럽게 감기는 의정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결국 그 안에서 사정했다.
“하아, 하아, 하.”
우재의 성기를 뱉어낸 의정의 입술이 축축했다. 우재는 그런 의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팔을 붙들어 위로 잡아당겼다. 의아한 얼굴로 저를 보는 의정의 뒷머리를 감싸 고정하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의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직 입 안에는 채 삼키지 못한 우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손아귀에 들어찬 머리를 빼낼 새도 없었다. 혀가 감기고 질척한 타액이 서로 엉겨 붙었다. 쓰고 비리던 맛은 어느덧 숨과 함께 녹아들어 달고 야한 맛으로 변질하였다.
“윽!”
돌연 몸이 공중으로 뜬 의정이 비명을 질렀다. 버둥거리던 두 다리가 우재의 단단한 허리에 감겨들었다. 두 팔로 목까지 감싸 안은 의정이 고개만 들어서 우재를 노려보려다가, 그가 저보다 더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발견하고 또 왜 그런가 하는 시선을 보냈다.
“다음엔 먹지 마.”
“왜?”
“맛없잖아.”
“야, 네 거거든?”
무어라 따지려던 우재는 마치 제 모든 걸 다 삼킬 수 있다는 듯한 의정의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신 다시 한번 뜨거운 입맞춤을 선사해줬다.
의정을 감싸 안은 우재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메인 룸으로 향했다.
털썩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인 의정의 머리 양쪽에 팔을 받치고 다시 키스를 이어갔다. 의정은 숫제 열까지 오른 기분에 고개를 이리 빼고 저리 빼며 피하려 했지만, 자세가 자세인지라 도망엔 한계가 있었다.
“입술 좀 그만 먹어.”
“왜?”
“아프잖아.”
“내 거라 괜찮아.”
의정이 황당한 표정으로 우재를 올려다봤다. 그러다 방금의 대화가 메인 룸에 오기 전에 오갔던 것과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피식 웃었다.
우재가 한 건 유치한 복수였다. 제 말대로 안 따라주고 내 멋대로 한 데 대한 복수.
하여간 어른스럽게 굴다가도 꼭 한 번씩 이렇게 애같이 군다니까.
의정은 다시 또 저를 집어삼킬 듯 덤벼오는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그거 말고 다른 거나 해.”
“다른 거 뭐?”
입술이 짓눌린 우재가 불분명한 투로 물어왔다. 의정은 슬쩍 제 허리를 움직였다. 자연히 밀착된 우재의 하체에 성기가 비벼졌다. 우재는 그것만으로 의정이 원하는 걸 단숨에 알아챘다.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아졌다.
“하……!”
나른하면서도 기가 막힌다는 듯한 한숨도 새어 나왔다.
“윤의정, 언제 이렇게 야하고 영악해졌지?”
커다란 손이 의정의 발긋해진 뺨을 어루만졌다. 말은 장난스럽게 했으면서 그 속에는 애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의정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덕분에 뺨이 우재의 손바닥에 더 밀착되었다.
“너랑 지내면서 많이 발전했지.”
벌써 함께 살기 시작한 지 5년. 뜨거운 여름, 청량하고 조용했던 캠핑장에서 만나 대학 캠퍼스에서 재회한 후 내내 우재는 의정을 사랑했고, 의정 역시 우재와 같이하는 모든 게 소중했다.
“말도 예쁘게 할 줄 알고.”
우재가 의정의 뺨에 올렸던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의정이 무릎을 세우고 좌우로 활짝 열었다. 엉덩이까지 들어 올린 탓에 아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두 번이나 사정해서 물기가 도는 성기 주변과 약간 도톰해진 회음부. 그보다 더 안쪽에 은밀하게 자리 잡은 입구까지.
우재는 손을 아래로 내려 깨끗하고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 살결을 쓸었다. 의정이 간지러운 손길에 움찔했다. 이미 흥분해 있던 몸은 자잘한 접촉에도 금세 반응했다. 절로 두 다리의 간격이 더 벌어졌다.
“그럼 더 잘 보이게 해 봐.”
우재가 허벅지 안쪽을 느리게 매만지며 말했다. 어리둥절하게 올려다보던 의정의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 뒤늦게 말뜻을 알아듣고 나온 반응이었다. 입술을 꼭 말아 물었다가 놓은 의정이 주춤주춤 제 다리 사이로 두 손을 가져갔다.
아직 우재의 손들이 주무르고 있는 허벅지 안쪽을 붙잡아 제 몸쪽으로 당겼다. 엉덩이가 더 위로 들어 올려지고 내밀한 입구가 더 드러났다. 의정은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듯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멀찍이 던지고 있었다.
아까는 대담하게 굴어놓고 또 이런 부분에서는 못 견뎌 하는 게 귀엽고 예뻤다. 우재는 잘했다는 뜻으로 잠깐 사이 땀이 배어난 의정의 옆 이마에 키스했다. 의정이 노력했으니 이제 자신이 그에 보답할 때였다. 우재가 고개를 수그렸다.
“야! 송우…… 앗!”
허벅지를 붙잡은 채 우재를 기다리던 의정이 놀라 소리쳤다. 아직 꽉 다물린 주름에 뜨끈하고 물컹한 게 느껴진 탓이었다. 의정의 엉덩이가 퍼뜩 튀어 올랐다.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 하나가 힘이 풀려 아래로 툭 떨어졌다.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오밀조밀한 주름을 핥던 우재가 제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다리를 힐끗 봤다가 도로 제 일에 집중했다.
히트 사이클이 온 오메가의 농밀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체향과는 또 다른, 그야말로 제 알파를 유혹하는 야릇하고 유혹적인 향이었다. 우재는 다물린 주변을 혀로 싹 문질렀다.
꼭 물려있던 입구가 화들짝 놀라 확 벌어졌다가 재빨리 닫히는 게 보였다. 우재의 혀가 주변을 자극할 때마다 구멍은 그에 반응하듯 오므라들었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으응, 응. 아, 하, 하지 마! 우재, 우재야.”
당황한 의정이 우재의 이름을 부르며 애원했다. 성기를 빨리는 것도 부끄럽고 민망하고 어쩔 줄 모르겠는데 어떻게 거기를 빨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기어이 다른 쪽 다리마저 놓친 의정이 발끝으로 시트를 밀었다. 견딜 수 없는 자극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였다.
우재가 즉각 저지에 나섰다. 의정의 두 다리를 번쩍 들더니 제 양쪽 겨드랑이에 끼워버렸다. 그대로 다리를 허리 높이까지 올린 탓에 자세가 불안정해진 의정은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우재의 혀에 농락당했다.
“아응, 읏, 아, 흐읏…….”
아래에서 연신 물기 어린 소리가 들려왔다. 질척거리고 적나라한 혀 놀림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온몸이 불타오를 듯 뜨거워지고, 간지러운 감각이 연신 피어 올라왔다.
의정이 도망치려 몸을 들썩일 때마다 구멍이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풀어지는 입구에 우재의 혀가 더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송, 아아, 흐……!”
내벽을 문지르는 직접적인 자극에 의정이 진저리쳤다. 우재의 겨드랑이에 끼인 허벅지가 뻣뻣하게 조여들었다. 만져주지도 않은 요도에서 다시 또 맑고 미끌미끌한 액이 흘러나왔다. 오메가의 안쪽도 제 알파를 받아들이기 위해 향긋한 액체를 조금씩 내뿜기 시작했다.
우재는 감로에 취한 짐승처럼 의정의 아래에 코를 박고 혀를 움직였다.
“흐앗, 하, 흐아, 아.”
의정은 뭉그러진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비틀어댔다. 두 다리를 바르작거리다 결국 시트를 손가락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 그만, 흐…, 우재야, 좀…….”
이대로는 아래가 빨린 채로 또 사정하고 말 것 같았다. 그건 진짜 사양이었다. 의정은 온 힘을 다해 우재의 이마를 쓱 밀었다.
“아으으응……!”
혀가 구멍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기어이 의정이 세 번째 절정을 느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의정의 입구 주변이 온통 질척질척하게 변해 있었다. 우재가 빨고, 의정이 그를 받아들이려 하면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우재는 그제야 뻣뻣하게 일어선 제 성기를 의정의 입구에 가져다 댔다. 주름이 버겁게 벌어지는 게 보였다.
“으응!”
늘 생각하지만 참 버거운 크기였다. 그런데도 평소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의정은 제가 본격적으로 히트 사이클에 들어섰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몸이 도리어 알파의 진입을 반기고 있는 것 같았다. 우재의 촉촉하면서도 안정적인 페로몬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의정은 나른해진 눈으로 제 알파를 바라보며 저 역시 천천히 페로몬을 풀어냈다.
우재가 느리게 제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볼이며 입술 주변, 코끝, 관자놀이, 이마와 정수리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우재의 성기가 가장 안쪽에 안착했을 때, 두 사람 주변에는 서로가 피워낸 페로몬이 짙은 안개처럼 퍼져 있었다.
“하아, 하, 하…….”
의정이 입술을 벌려 거친 숨을 뱉었다. 하도 물고 빨아서 부어오른 살갗 안쪽에 그보다 더 먹음직스럽게 익은 살덩이가 보였다. 우재가 평소보다 짙어진 눈으로 의정의 혀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자세가 바뀌며 안에 들어온 성기가 더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그만, 읍!”
더 들어오지 말라는 항의는 입술이 겹쳐지며 그대로 사그라졌다. 우재는 의정의 혀를 빨아당기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우로 흔들고 적당하게 찌르며 자극하는 행위에 페로몬이 더욱 짙어졌다.
지금이야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하게 행동한다고 해도 조금만 더 지나면 또 모를 일이었다.
조금씩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의정은 들썩임을 견뎌보고자 우재의 등에 두 다리를 바짝 붙였다. 아래쪽에서 퍽퍽 하며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이 다 들썩일 정도로 격렬한 몸짓이었다.
“아앗, 아, 앗!”
입술이 놓여나자 의정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우재의 성기가 쑤시는 내벽이 부풀어 올라 의정을 더욱 달아오르게 했다. 점차 사정감이 치솟았다. 의정이 두 다리에 꽉 힘을 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중심부에 고여 있던 열기가 일시에 터져 나갔다.
“흐으응……! 아, 야, 읏, 좀, 천천히, 야!”
이미 절정이 오른 의정과 달리 아직 사정하지 못한 우재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의정의 허리를 붙잡은 우재는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의정을 밀어 붙었다.
어설프게 들린 몸이 속절없이 뒤로 밀리고 밀리다가 기어이 침대 헤드 근처까지 가고 말았다. 몸이 구겨지다시피 한 의정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우재를 노려봤다.
“아프다고! 야!”
페로몬에 취하고, 본능에 잔뜩 흥분한 알파의 눈이 위험했다. 의정이 우재를 절박하게 불렀다. 하지만 그건 사정이 아닌 알파의 흥분을 지피는 부름에 불과했다.
“흐앗, 아! 악! 아!”
의정은 불편한 자세로 들쑤시는 삽입을 견뎌야 했다. 아래가 불로 지진 듯 뜨겁게 느껴졌다. 쓰리고 아픈 거 같은데, 이상하게 야릇한 쾌감이 밀려오는 게 환장할 일이었다. 짙고 농밀하게 흘러들어오는 페로몬 탓에 의정은 고통마저 쾌락으로 인식하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흉포한 성기가 안의 안까지 진입했다.
아직 한 번도 개방된 적 없는, 오메가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
“싫……!”
의정은 지금껏 그 누구도 들여놓은 적 없는 공간까지 침입한 성기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본능적으로 어떤 선을 넘어섰다는 걸 알아차렸다. 살짝 벌어진 눈자위에 눈물이 고여 후드득 떨어졌다.
검게 변한 알파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우재는 홀린 듯이 얼굴을 들이밀어 젖어 든 의정의 눈가 주변을 혀로 핥았다. 달았다. 마치 천연 꿀이라도 마신 듯.
“흐응…….”
의정이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그런 우재의 몸을 끌어안았다. 우재가 몸을 숙인 탓에 성기가 더 들어와 안쪽을 자극한 탓이었다. 눈가를 삭삭 핥는 혀의 감촉 역시 그를 자극했다.
의정이 울음 섞인 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우재의 성기가 더더욱 부피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그냥 커진다는 것과 달랐다. 귀두가 확 펼쳐지고 단단하게 심이 일어나 의정의 안에 갈고리처럼 박혀 꽉꽉 압박했다.
“흐으, 야, 야! 이거 뭐야……!”
의정이 울먹임이 섞인 소리로 항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엉덩이를 흔들어서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해도 안에 들어찬 성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쩌지.”
문득 귓가에 우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를 힘들게 한 건 그이면서 왜 그러는 걸까.
“왜 무슨 일인데……?”
의정이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우재는 드물게 정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의정을 더더욱 떨리게 했다.
“노팅 같아.”
“뭐?!”
야 이, 새끼야!
의정이 미쳐 된소리를 쏟아낼 새도 없었다. 우재가 살인적으로 커진 제 성기를 인정사정없이 들쑤시기 시작했다.
의정은 입을 떡 벌리고 헉헉 거친 숨을 쏟아냈다. 고작 그거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노팅을 준비하는 알파가 뿜어내는 숨 막히는 페로몬에 노출된 오메가 역시 이성을 잃었다.
방 안에선 온통 뜨겁게 달아오른 호흡만이 들려왔다. 거친 마찰음과 헉헉거리는 숨, 들끓는 페로몬. 잔뜩 성이 난 성기가 오메가의 구멍을 찢을 듯이 쫙 확장된 상태로 우뚝 멈추어 섰다.
“흐아아앗.”
의정은 제 속으로 쏟아지는 알파의 사정액에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우재의 등을 옥죄려는 양 허벅지에도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뒤로 휙 젖혀진 목덜미 역시 바르르 떨렸다. 눈을 크게 뜨고 있었지만, 시야가 하얗게 날아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재는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겨냥하듯, 길고 곧게 뻗은 목덜미를 보다 이를 콱 박았다.
“아읏.”
의정에게는 그 아픔마저도 쾌락으로 돌아왔다. 우재를 품은 내벽이 꽉 조여들며 남은 정액까지 전부 쭉쭉 빨아당겼다.
의식이 머리 뒤로 쭉 밀려났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힘이 쭉 빠진 두 다리가 먼저 풀어지고, 허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오로지 우재의 힘으로만 지탱하고 있던 의정은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졌다.
“야.”
하지만 결합을 풀어지지 않았다. 의정이 경악한 눈으로 우재를 올려봤다. 분명 사정했는데 대체 왜 그대로란 말인가.
우재가 곤란한 눈으로 웃었다.
“더 해야 풀릴 거 같은데.”
“뭐……?”
의정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우재는 그런 의정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빼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애초 노팅을 했다는 게 그랬다. 최소 1시간, 최대 3시간까지도 이어지는 결합.
우재는 사죄의 의미를 담아 진득하고 열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동시에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의정은 제가 그간 우재에 관하여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5년이나 같이 살았지만, 착각한 거다.
밤새도록 시달리고 시달려 아침이 새하얗게 밝아오고,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야한 냄새가 나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서야 의정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했다.
송우재도 역시 절제를 모르는 알파라는 짐승이었다.
* * *
숨을 쉴 때마다 열기가 느껴졌다. 의정은 팔을 들어 이마에 올렸다. 들끓듯이 뜨거웠다. 히트 사이클 때문이기도 했고, 몸살이 와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우재와의 관계가 끝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침까지 이어진 것 같은데, 그 후에는 반쯤 의식을 놓고 제가 울 듯이 헐떡거리는 소리만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으니까.
“이, 짐승 같은 새끼.”
그래, 그 외에는 더 정의할 말이 없었다.
어젯밤, 아니 오늘 아침까지 송우재는 그야말로 짐승이었다. 그만하라고, 힘들다고 죽겠다는 애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저 좋을 대로 이리 휘두르고 저리 휘두르며 박아대기만 했지. 그게 정말 짐승이 아니고 뭐람.
의정은 열이 올라 땀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쓸고 눈을 굴렸다. 저를 이렇게 뻗게 만든 짐승은 정작 보이지 않았다. 무릎 꿇고 앉아서 빌어도 용서해줄까 말까 한데!
의정은 입술을 꽉 물었다가 놓으며 아직도 거친 숨을 훅 내뱉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온통 땀과 체액으로 젖어 있던 시트는 보송보송한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벗고 있던 저도 보들보들한 잠옷을 입은 채였다. 물론 몸도 깨끗해졌고. 의정은 단추까지 얌전하게 채워진 제 옷을 보다가 침대를 내려왔다.
“아윽.”
단숨에 몸이 비틀거렸다. 허리 아래로 전혀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은 또 오랜만이라 의정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마에 손을 얹고 길게 한숨을 쉬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일어났네?”
우재가 말짱하다 못해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서 있었다. 일순 의정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야, 송우재! 너, 씨…….”
“괜찮아? 아픈 데 없어? 어디 불편한 데나.”
의정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단숨에 다가온 우재가 이리저리 안색을 살피고 상대를 점검했다. 얼굴을 만지고 목 뒤를 쓸어오는 손길이 쓸데없이 다정했다. 의정은 울컥한 눈으로 우재의 손을 붙들었다.
“잘도 그런 말 한다?”
“이런. 목이 완전히 갔네. 이거 마셔.”
의정의 입술에 컵 끝이 닿았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아릿한 향이 물씬 풍겨왔다. 의정은 눈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다봤다. 약간 진노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생강차야.”
얼른 마시라며 우재가 컵을 기울인 탓에 의정은 입만 벌려 꼴깍꼴깍 삼켜야 했다.
그사이 우재는 의정을 부드럽게 밀어서 다시 침대에 앉혔다. 안색을 살피는 시선이 아주 진지했다. 그제야 의정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뭐야? 왜 그래?”
“일단 그거 마저 마신 후에 얘기하자.”
우재가 대답을 피했다. 의정은 영 찝찝한 기분에 컵을 밀어냈다. 우재는 더 권하지 않고 생강차가 반쯤 남은 컵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놨다.
의정은 우재가 빈손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는 걸 가만 바라봤다. 절제도 모르는 짐승처럼 관계한 거야 황당하고 힘들기는 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나 우재나 서로의 페로몬에 취해 있었고, 의정 자신은 히트 사이클까지 겹쳐서 더 흥분하기도 했었으니까.
물론 우재가 노팅까지 한 건 좀 의외였고 잠깐 놀라긴 했는데…….
잠깐, 노팅?
“아까 너 잠든 사이에 혹시나 해서 좀 물어봤어.”
마침내 우재가 말문을 열었다.
“어, 어.”
하지만 의정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방금 무언가가 떠올랐는데 우재의 목소리가 들려와 사라진 탓이었다. 뭐였지. 뭔가가 생각이 나려고 했는데. 다시 상기해보려 했지만 한번 놓친 생각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도 그런 일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번이 처음이기도 했고, 갑작스러워서 미처 준비하지 못했잖아.”
“으응.”
우재는 또 평소답지 않게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제야 의정은 우재에게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생각이 안 나는 무언가보다는 일단 우재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미안하다.”
근데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미안하다니?”
대체 뭐가? 의정은 사과를 들어놓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더더욱 당혹감만 커졌다. 설마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그렇게 짐승처럼 군 걸 후회한다는 소리인가?
“아니, 그건 괜찮은데.”
“괜찮다고? 진짜?”
“어, 어… 뭐 너랑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지.”
일반 베타와 달리 알파와 오메가는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나. 그러다가 보면 좀 본능이 충실하게 되니까 그런 행위에 몰두할 수도 있지. 새삼스럽게 우재가 미안해할 일은 아닌 듯했다.
우재가 한결 안심된 얼굴로, 하지만 아직 염려가 섞인 눈을 한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정말 아이가 생긴 거면.”
“응? 뭐가 생겨?”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지? 의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우재를 봤다.
“너 졸업하고 취직할 때 그랬잖아. 어느 정도 자리가 좀 잡히면 그때 결혼하자고.”
“그래, 그랬지. 응, 그건 그런데. 그거보다 그 뒤에 뭐라고 했어?”
뭔가 다른 얘기를 들은 거 같은데.
그제야 우재는 의정과 제가 조금 엇나간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재가 ‘아.’ 하고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세수를 하는 얼굴에는 또 당황스러움이 맴돌았다.
“노팅 했잖아.”
“노팅…….”
아, 맞아. 아까 그 생각을 했었지! 우재가 꺼낸 말 덕분에 의정은 제가 놓쳤던 걸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 노팅. 알파와 관계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일. 만약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 주기까지 함께 겹치게 되면 거의 100%에 가깝게 임신이 된다고 했던가.
“헉.”
의정이 헛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제야 우재가 결혼 이야기 뒤에 붙였던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거 해봐.”
의정은 우재가 제 앞에 내민 걸 바라봤다. 말로만 듣고 광고에서만 보던 임신 테스트기였다. 의정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테스트기를 받아 들었다. 어쩐지 손이 바르르 떨렸다. 다시 일어서는데 몸이 휘청했다.
“괜찮아?”
우재가 얼른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졌을 터. 의정은 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거 바로 나오는 거야?”
그제야 우재도 아차 싶었다. 그저 의정이 걱정되어 무작정 약국에 달려가 사 왔던 거였다. 그런데 의정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렇게 곧장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하얗게 뜬 의정의 얼굴에 피식 실소가 걸렸다.
“너도 이럴 때가 다 있냐.”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이번에 참 여러모로 몇 년 함께하면서도 몰랐던 우재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게 됐다.
의정은 잘 보관하라고 말하며 우재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도로 돌려줬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해서는 결과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 더 쉬는 게 낫겠지. 의정은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몸이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리 와.”
몸을 돌려서 멀뚱히 서 있는 우재에게 손짓했다. 우재가 여전히 당황한 낯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내려다보다가 비척비척 침대로 올라왔다.
“언제가 좋을 거 같아?”
의정이 제게 몸을 붙이는 우재를 껴안으며 물었다. 우재가 그런 의정을 올려다봤다. 무슨 말이냐는 소리였다.
“진짜 임신일 수 있으니까 되도록 빨리 잡는 게 좋겠지?”
하지만 뒤에 이어진 말에 우재는 의정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의정은 결혼 날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배가 언제부터 불러오더라…….”
의정이 우재의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쓸며 골똘히 생각했다. 회계팀에서 근무하는 오메가가 떠올랐다. 임신 소식을 작년 겨울에 들었는데 최근 보니 배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셈을 해보니 대충 5개월에서 6개월쯤 된 거 같았다.
“올해는 안 남겨야겠다.”
“응.”
마침내 결론을 내린 의정의 말에 우재가 얌전히 대꾸했다. 고개까지 끄덕인 덕분에 손가락에 간질간질하게 머리칼이 감겨들었다. 의정이 웃으며 그런 우재의 머리통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안 미안해도 된다니까.”
우재는 여전히 제가 노팅한 걸 걱정하고 있었다. 진짜 안 그래도 괜찮은데.
우재의 말마따나 두 사람은 각자 일이 안정권에 접어들면 그때 결혼을 논의해보자고 했다. 부모님과도, 우재의 형 우민과도 그렇게 얘기가 끝났다. 양쪽 집안 어른들은 본인들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해줬기에 그 이후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언젠가 하겠지. 아직은 바쁘니까. 그렇게 미루고 미뤄오기는 했는데. 어쩌면 때가 된 게 아니었을까. 의정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미루라고 이런 일이 생긴 건지도 몰랐다.
너무 안일하게 구는 걸까?
근데 애초 삶이란 게 다 그런 게 아닐까. 자신에게 몸살감기처럼 갑작스럽게 발현이 찾아왔을 때도, 깊은 산속 캠핑장에서 하필 알파인 우재를 만난 것도, 그런 우재 앞에서 그간 한 번도 겪지 않았던 히트 사이클을 내보이게 된 것도. 전부 의정이 계획하지 않은, 뜻밖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혼하자, 우재야.”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때가 온 걸 거다. 너와 내가 이제는 정말 함께 살아가기로 했노라고 모두의 앞에서 맹세할 때가. 의정의 입술이 우재의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우재는 제 피부에 느껴지는 온기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풋풋하면서도 따스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처음 의정을 만난 이래로 그에게서 떠난 적 없는 향이었다.
“응, 하자, 우리.”
우재가 의정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의정의 말이 맞았다. 이제는 미안해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할 때였다.
“그럼 부모님이랑 우민 형한테 연락해야겠다.”
“그래야지. 상견례도 해야겠지?”
“으음…… 아마?”
상견례라니. 그렇게 본격적인 말이 나오자 또 이상하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의정은 열이 오른뺨을 쓱쓱 문질렀다.
“일단 너희 부모님께 먼저 말씀드려.”
“형한테는?”
“형이야 뭐 언제든 올 수 있으니까. 부모님 시간 되실 때로 맞추면 돼.”
그럴 리가 있나. 6월이면 슬슬 휴가철 준비로 바빠질 때였다.
“형 바쁠 때잖아. 이 김에 부모님이랑 그쪽으로 가는 건 어떨까?”
“괜찮겠어?”
의정의 말에 우재는 약간 놀란 듯 물었다.
“응. 사실 너 시간 좀 괜찮으면 바다나 보러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거기 가도 좋을 거 같아. 가서 일손도 도우면 좋고.”
이것도 이미 우민의 가족과 의정의 가족이 서로 안면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밤까지 같이 보낸다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의정의 부모님이 묘목 농원을 한다고 했을 때, 우민은 큰 관심을 보였고 몇 번 직접 나무를 사러 들르기도 했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펜션과 캠핑장 부지에 심을 나무를 그곳에서 구매하겠다고.
“그것까진 형도 바라지 않을 거고. 그래, 알았어. 그럼 부모님께 물어봐. 괜찮다고 하시면 나도 형한테 전달할게.”
“그래. 참, 어제 연락 온 것도 있었잖아. 그건 어떻게 할 거야?”
의정은 어제 저녁을 먹으며 우재가 통화했던 것도 떠올렸다. 시간을 정하면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다른 일에 몰두하느라 두 사람 다 새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았나. 다시 생각해보니 상대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어차피 너 히트 사이클 지나야 만날 수 있으니까 그건 괜찮아.”
의정은 잠시 제 몸 상태를 살폈다. 몸살 기운이 좀 있었다. 기운이 없는 건 밤새 내내 우재에게 시달려서 그런 거였다. 하지만 히트 사이클 기간에 생기는 다른 증상은 미약했다. 몸이 발발 떨리고 열이 오르고 아래가 간지럽고 무얼 어떻게 해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그런 것들.
“저기, 진짜 그거 맞는 거 같아.”
“응?”
우재는 약속 얘기를 하다 말고 다른 소리를 하는 의정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봤다. 갈색 머리칼이 살짝 일어난 게 귀여워 보여서 의정이 그랬던 것처럼 살짝 입술을 묻었다. 초여름처럼 싱그러운 향이 코를 간질거렸다. 어제는 달짝지근하고 농밀하게 느껴지던 게 밤사이에 안정이 된 것 같았다.
“벌써 안정됐어. 이거 진짜 임신해서 그런 것 같지 않아?”
제가 좋아하는 향을 맡으며 코를 비비던 우재가 휙 얼굴을 들었다.
“뭐?”
“그게 아니면 이렇게 괜찮아질 리가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우재는 거의 확신하는 의정을 보다가 제 페로몬을 조금씩 풀어봤다.
제 알파의 기척을 알아챈 의정도 살금살금 페로몬을 내뿜었다. 히트 사이클이 오면 더 짙어지고 약간 단내를 풍기던 것과 확실히 달랐다.
정말 임신 때문인지, 아니면 밤사이 관계로 전부 쏟아내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정말 하루 만에 히트 사이클이 끝났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의정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러네. 확실히 안정됐다. 그럼 하루 더 쉬고 내일 만날까?”
“토요일인데 괜찮겠어?”
우재가 운영하는 식당은 주말에 늘 붐볐다. 근데 토요일에 만나도 되는 걸까.
“응. 점심 같이하자. 저녁엔 아무래도 바쁘니까.”
“그래, 그럼.”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겠지. 의정도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를 정하고 나서 우재는 곧장 의정의 아침을 차려주고 먹기를 기다렸다가 뒷정리까지 끝내고서야 출근했다. 본인은 하루 더 의정의 곁에 있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의정은 혼자가 되고 나서 핸드폰을 들었다. 긴 신호음이 이어졌다. 한참 단조로운 멜로디가 흘러도 무심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니?
이대로 안내 멘트랑 마주하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신호음이 멎었다. 마치 조금 전 헤어진 것처럼 엄마가 툭하니 질문했다.
“아……. 엄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지. 넌 무슨 일인데?
안부를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엄마도 참 변함이 없으시다니까. 하긴 이런 분이라서 자신이 갑자기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받아주셨지.
의정은 엄마가 마트에서 장을 보느라 정신을 다른 쪽으로 파는 사이에 슬그머니 큰 비밀을 털어놓았던 그때를 잠깐 떠올렸다.
“나 우재랑 결혼하려고.”
의정은 이번에도 별일 아닌 것처럼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런저런 서론을 붙이지 않고 단번에 본론을 꺼내는 건,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 엄마처럼 무심하고 그래서 대범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본인은 잘 몰랐다.
―그래? 언제로 날 잡았는데?
“그건 같이 정해야지. 일단 우재네 형 가족이랑 같이 만나면 좋을 거 같은데 언제 괜찮아요?”
―우리야 남는 게 시간 아니니. 그쪽에 맞춰.
아직도 묘목 농원을 하면서 바쁘게 지내는 분들이었다. 그나마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 묘목 시장이 비수기라 찾아오는 손님이 봄가을에 비해 적다고는 해도 일까지 한가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를 배려해 나오는 말에 의정은 가만 웃었다.
“응. 그것 때문에 엄마랑 아버지께 양해를 좀 구하고 싶어요. 우민 형이 운영하는 펜션이랑 캠핑장이 벌써 휴가철 준비 들어가서 바쁘거든.”
―그렇겠네. 네가 거기 일하러 간 것도 이맘때였지, 아마.
“그랬죠. 그래서 두 분만 괜찮으면 아예 거기서 1박을 하면 어떨까 하는데 어떠세요?”
―좋네. 그렇지 않아도 네 아버지가 거기 다녀오고서 정말 마음에 든다고 어찌나 자랑하던지. 나도 꼭 가고 싶었어. 우린 언제든 좋으니 날짜 정해서 알려줘.
“그럴게요.”
―우재는 출근 잘 했니?
“응. 아까 했죠. 엄마 우재랑 통화하셨어요?”
무심한 성격답게 제 부모님에게 한 달에 한두 번 전화를 걸까 말까 하는 자신과 달리 우재는 매일 안부 겸해서 통화하는 걸 알고 있기에, 의정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그럼. 넌 네 주기도 제대로 체크를 못 해서 우재 놀라게 하니. 다음번에는 미리미리 챙겨.
의정은 엄마가 나무라는 소리에 옆 이마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주기가 딱 맞지 않아서 미리 챙기기는 어렵지만, 그런 사정이야 엄마가 알 리 없었다. 그보다는 엄마가 저보다 우재와 더 모자같이 친근하게 통화하는 것 같은 게 웃겨서 픽 웃고 말았다.
‘걘 대체 엄마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
그렇다고 그게 뭐 또 기분이 나쁜 건 아니고. 도리어 고맙고 좋은 쪽에 가깝지만.
“다음부터는 꼭 그럴게요. 저기, 그, 다른 얘기도 들으셨어요?”
혹시 그것 때문에 이제 결혼한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얘기? 아, 너 주말까지 쉰다는 거? 들었지. 그래도 당장 내일 송 사장네 가는 건 좀 서로 무리일 것 같아서 다음 주나 다음다음 주로 생각하고 있는데?
“아, 아아. 네. 그렇죠. 그럼 우민 형이랑 얘기하고 말씀드릴게요.”
임신했을지 모른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구나. 하기는 자신이나 우재도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니까. 안 됐을 가능성도 있고. 물론 히트 사이클 주간에 노팅까지 했다면 거의 확실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형질 발현이 늦은 열성이니까.
―참 초기에는 움직이는 것도 조심하고,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해. 무리해서 일하지 말고 잘 먹고 푹 자고 잘 쉬어. 그럼 끊는다.
의정이 안심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엄마는 폭탄 발언을 툭 던져놓고 먼저 통화를 종료했다.
이건 아무리 들어도 의정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헉, 엄마!”
의정의 다급한 외침은 허무하게 허공 중에 흩어졌다. 의정은 당황한 눈으로 액정을 보다가 뺨을 쓸어내렸다.
“우리 엄마 사람 놀라게 하는데 뭐 있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의정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보다 더 짙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세상에, 그것도 알고 계시다니. 민망해서 어떡하지. 아 진짜! 뭔가 부모님께 내밀한 부부 사이의 일을 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아직 부부 아니거든?”
제가 한 생각에 지레 찔린 의정이 파드득 몸을 떨고는 핸드폰을 툭 던졌다. 전화까지 끝내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회사에서 회의하거나 바쁘게 일하고 있을 때인데. 어제 미팅했던 건은 어떻게 되는 건지.
제대로 꼬여버린 코딩 때문에 애먹던 옆자리 동기는 잘 해결했는지. 전형적인 일 중독자 같은 생각을 하던 의정은 청소라도 할까 하는 싶어서 벌떡 일어섰다가 도로 소파에 앉았다. 초기에는 뭘 하든 조심하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의정은 잠시 고민 끝에 리모컨을 들었다. 주말도 아닌 평일에, 그것도 오전에 이러고 있는 게 과연 괜찮은 건지 어떤지 하는 생각은 결국 의미 없이 TV 채널을 옮기는 것으로 이어지다가 잠이나 자자는 것으로 끝났다.
오전을 심심하게 보낸 의정은 기어이 일하는 동료에게 메신저를 날렸다. 혹시 도와줄 일 없느냐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기꺼이 네 도움을 받겠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덕분에 의정은 저녁이 될 때까지 텍스트로 가득한 화면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것도 나름 쉬는 건 쉬는 거지. 그렇게 일에 절제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저녁쯤에는 우재가 야근한다는 소리에 식사도 거르고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퇴근하고 돌아온 그에게 걸려서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의정에겐 출근했을 때보다 분주하지 않은, 나름대로 휴가 같은 하루였다.
* * *
다음 날, 의정과 우재는 평소보다 좀 더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간단히 먹고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마신 후, 외출 준비를 마치고서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타는 우재의 큼지막하고 널찍한 SUV 뒤에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어수선할 법한데 워낙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런 느낌은 없었다. 이게 다 자신에게 잘 배워서 그런 거라며 의정은 혼자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왜?”
의정의 손 하나를 제 무릎에 올리고, 왼손으로 느긋이 핸들을 조작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우재가 물었다.
“뒤에. 물건도 많은데 용케 정리 잘 해뒀길래.”
우재의 시선이 뒤에 잠깐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눈꼬리에 장난기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마 그도 의정과 같은 걸 떠올린 듯했다.
“그럼. 누구한테 배운 건데.”
아니나 다를까 우재에게 나오는 대답이 그랬다. 의정은 제 손등을 간질이던 우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니 어지간해서는 빠지지 않을 듯 단단해졌다.
지하 주차장을 나선 차가 도로를 달렸다. 우재가 운영하는 식당까지는 차로 약 20여 분이 걸리는데, 오른쪽으로 한강이 보이는 덕분에 약간 드라이브하는 기분이 들었다.
햇볕을 받아서 은빛으로 출렁이는 강물을 감상하고 있으려니 더 널찍하게 펼쳐진 바다가 보고 싶었다. 올여름은 휴가 가기 아무래도 어렵겠지. 상견례를 하고, 결혼 준비를 하고, 회사 일도 하고. 통영에 가서 농어를 먹자고 했지만 어쩐지 더욱 요원해진 것 같았다.
“태훈 형이랑 만날 게 아니라 이대로 바다라도 보러 가면 좋겠다.”
우재가 마치 의정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툭 던졌다.
“바쁜 것 끝나고 가면 되지.”
“그러자.”
둘 다 그 외에 말은 없었지만, 함께 다짐했다. 결혼식이 끝나면 반드시 길게 휴가를 가겠다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을 따라 달리던 차는 여의도 방향으로 진입했다.
높고 빽빽한 빌딩 사이에 있는 다각형 건물이 보였다. 구조도 특이했지만, 한 면이 주홍색 조명을 이용해 망사처럼 표현된 재미있는 디자인이 눈에 띄는 곳이었다. 건물 안에는 우재가 운영하는 식당 외에 몇 개의 쇼핑몰과 호텔이 같이 자리해 있었다.
널찍한 지하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식당이 있는 3층에 내리니 우재와 의정을 알아본 매니저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의정 씨, 오랜만에 봬요.”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의정 씨도 잘 지냈죠? 어쩜 볼 때마다 더 멋있어지는 거 같아.”
의정은 매니저가 건네는 인사치레에 그냥 웃기만 했다.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좀 난감했다. 숫기 없는 의정의 태도에도 매니저는 살가운 모습을 보였다.
“두 분은 제가 안내할게요. 이쪽으로.”
매니저를 따라 들어간 곳은 몇 없는 룸 중에서도 가장 안쪽이었다. 빌딩 사이로 푸른 생태 숲이 우거진 여의도 공원이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가끔 의정이 오면 식사를 하던 룸이기도 했다. 사실 굳이 매니저가 안내해 주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로 익숙했다.
“일행분도 금방 도착한다고 하셨습니다.”
우재가 의정에게 의자를 빼내 주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정은 매니저의 말에서 그녀도 상대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받았다. 하긴 우재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 그럴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자신이 만나지 못한 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여러 가지 일로 대부분 해외에서 지낼 때가 많아서 그렇다고는 해도.
우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매니저가 예의 상냥한 미소를 걸고 누군가를 안내해 안으로 들어왔다. 상대를 확인한 의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형, 왔어?”
의정과 마찬가지로 문 쪽을 보고 있던 우재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런 우재에게 마주 인사하기도 전, 남자가 의정을 보며 씩 웃었다.
알파남 최명훈이었다.
동시에 의정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정의 돌발적인 행동에 우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우재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반가워요, 윤의정 씨.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그죠?”
명훈이 좀 더 진하게 웃으며 의정에게 인사했다. 의정의 눈은 찌푸려졌고, 우재는 의아한 얼굴로 문에 서 있는 명훈과 제 옆에 선 의정을 번갈아 봤다.
“뭐야, 두 사람. 구면이야?”
우재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의정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어. 의정 씨가 나한테 저녁 사주기로 해놓고 퇴짜를 놓았지.”
“뭐?”
명훈이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우재의 고개가 휙 의정에게 돌아갔다.
의정이 눈을 더 팍 찡그렸다. 우재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도로에서 기절했다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재가 괜한 오해를 하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틀 전 병원에 갈 때 도움을 받았었어.”
“명훈 형한테?”
“응.”
“저녁 사주기로 한 건?”
“그건……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약속해서 굳이 만날 필요 없을 것 같았거든.”
의정은 그렇게 말하며 명훈을 봤다. 태도가 영 의뭉스럽다고 했더니 저쪽에서는 자신을 알고 있었나 보다.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아까 들어왔을 때 자신을 보고서도 놀랐다기보다는 재미있어하며 웃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근데 하필 그런 남자가 우재와 잘 아는 데다 그의 절친한 형이라는 게 문제였다.
눈치가 빠른 우재는 의정이 명훈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병원에 갈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인데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의정답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사실 늘 궁금했던 분을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만나게 돼서 반가운 마음에 제가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뜻밖에도 명훈이 장난스럽던 태도를 바꾸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의정은 얼떨떨한 눈을 했다. 갑작스러운 데다 별안간 저렇게 나오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명훈은 어색하게 선 의정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할까요. 최명훈이라고 합니다. 우민이랑 친구이고, 우재랑은 뭐, 아시다시피 좀 특별한 사이죠. 반갑습니다.”
심지어 손까지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의정은 제 앞에 다가온 손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우재에게 눈을 돌렸다.
“명훈 형. 의정이 놀리지 마.”
우재가 나무라는 눈으로 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친분을 쌓아온 만큼 명훈이 보이는 태도에 장난이 묻어 있다는 걸 간파한 거였다.
“장난하는 거 아닌데. 딱 보자마자 알았다고. 진짭니다. 윤의정 씨, 미리 아는 척 안 한 건 미안했어요. 우재가 하도 안 보여줘서 좀 삐친 게 있었거든.”
삐쳐……. 입술까지 삐쭉거리는 모양새가 남자를 더욱 짓궂어 보이게 만들었다. 의정은 제멋대로에 능글스러운 명훈에게 더는 색안경을 끼지 않기로 했다.
“네. 그래도 그날은 지나치셨습니다.”
의정은 그때까지도 제 앞에 있던 명훈의 손을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음……. 그럼 제가 오늘은 사과의 뜻으로 저녁까지 근사하게 대접할게요. 그때 못 먹은 것도 포함해서.”
“아뇨. 그렇게까진…….”
의정이 보기에 명훈은 오해를 풀었다고는 해도 별로 그렇게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우재는 바쁘니까 저랑 같이해요. 이래 봬도 저도 입맛 까다로운 알파입니다? 좋은 곳 잘 아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근사한 곳에서 술도 한잔 살게요.”
근데 심지어 저녁 식사에 술까지 사겠다고 막무가내로 구는 탓에 의정은 좀 질린 표정을 했다. 병원에서 잠깐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어지간해서는 상대할 수 없을 사람 같았다. 우재는 대체 저런 성격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의정은 다시금 우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우재는 처음 캠핑장에서 만났을 때도 그를 경계하고 살갑지 못하게 대하던 자신과 금세 가까워졌으니까.
“형한테는 미안한데, 술도 안 되고 오늘 약속도 안 돼.”
의정이 거절하려고 입을 여는데, 그보다 우재가 말하는 게 먼저였다.
“왜? 너 바쁘니까 내가 대신 놀아주겠다는데. 의정 씨 뭐,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해요?”
“그거 아니어도 안 돼. 의정이 당분간 조심해야 하거든.”
의정이 놀란 얼굴로 얼른 우재의 손을 낚아채 잡았다.
하지 마.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의정을 보며 우재가 씩 웃었다. 불안한데?
“축하해줘. 우리 결혼 준비 시작했거든.”
다행이었다. 의정은 절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 조심하네 어쩌네 하기에 임신 어쩌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명훈이 “오.” 하고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놀라움보다는 또 장난기가 묻어났다. 어쩐지 의정은 저 남자가 어떤 성격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축하해요, 의정 씨. 너도 축하한다. 이야. 이런 좋은 소식 들으려고 내가 귀국했나 보다. 그래, 언제 하는데?”
명훈이 손뼉을 짝 치며 유쾌하게 축하와 일정을 동시에 이야기했다.
“고마워, 형. 형한테 가장 먼저 축하받네. 의정이 부모님들이랑 우민 형이랑 만나서 날짜 잡으려고.”
“그래. 날 잡히면 연락 꼭 해. 선물은 뭐 필요해요, 의정 씨? 비싸고 좋은 거로 말해 봐요.”
“아뇨. 괜찮습니다.”
의정은 어쩐지 좀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우재가 그간 굳이 저 사람을 소개해주지 않은 이유를 좀 알 것도 같고.
식사 내내 대화는 명훈과 우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의정이야 원래 그다지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밥을 먹기도 전에 기운이 빠져서 그런지 좀 멍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선물 좋은 거로 생각해두시고. 의정 씨.”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며 명훈이 의정에게 윙크해 보였다.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겠다더니 그런 건 전부 잊은 듯한 태도였다. 그보다 선물이라니, 굳이 그런 걸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차단 걸어두신 것도 풀어주면 고맙겠고.”
의정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명훈이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기어이 의정의 눈이 또 찌푸려졌다.
“그건 내가 보낼게. 나랑 통화해.”
이번에는 우재가 나섰다. 아무리 명훈이 그에게 친하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해도 의정을 휘둘러대는 걸 계속 두고 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명훈은 눈을 크게 키웠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송우재도 이런 면이 있네. 이야… 그래, 알았어. 하하, 이야……. 그럼 간다. 의정 씨, 다음에 또 봐요.”
명훈은 끝까지 장난스러운 태도를 고수하며 사라졌다.
정말이지 어디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의정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뭔가 큰일 하나를 치른 것처럼 탈력감이 느껴졌다.
“속 괜찮아?”
“응.”
의정은 제 손을 잡아 다정하게 쓸어주는 손길에 가만히 웃었다. 좀 정신이 없기는 했어도 얹히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우재는 그런 의정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뺨을 어루만졌다.
“바로 돌아가서 쉬어. 같이 가면 좋겠는데 저녁에 바로 퇴근하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뛰어야 해서 안 되겠다.”
“알아서 갈게 신경 쓰지 마.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바쁘다고 하면서도 우재는 의정이 택시를 타는 것까지 지켜봤다. 의정은 제가 떠나고서도 한참 한자리에 서 있는 우재를 사이드 미러로 살펴보다가 눈을 감았다.
집에 도착해선 곧장 침대로 다이빙했다. 피로감이 몰려와서 그런지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 * *
우우웅.
옅은 의식 끝으로 진동이 들려왔다. 의정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뻗었다. 화면에 우재의 이름이 보였다.
“응…….”
―자고 있었어?
“응…….”
어설픈 대답에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금 데리러 갈게.
곧이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의정은 그렇게 대답하고도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실내 온도가 좀 높아서 그런지 나른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와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맑아졌다.
“피곤해 보이네.”
“어…….”
언제 왔어. 의정은 통화를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집에 와 있는 우재를 얼떨떨하게 쳐다봤다.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준비해 나가자.”
“아.”
그제야 의정은 아까 우재와 통화할 때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의정은 다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우재에게 이끌려 같은 차에 올랐다.
“어디 가는 건데?”
기껏 물어봤는데 우재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덧 저녁이 된 하늘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모를 걸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다시 한강이 보였고, 낮에 왔던 건물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아, 뭐 두고 나왔어?”
집으로 곧장 오면서 깜빡한 게 있던 걸까. 의정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먼저 차에서 내린 우재가 보닛을 돌아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내리시죠.”
의정은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밖으로 내려왔다. 우재가 그런 의정을 손을 꼭 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도착한 곳은 역시나 우재의 식당이었다.
“어?”
근데 아까와 달리 테이블엔 손님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주말 저녁인데 이렇게 아무도 없다고? 그럴 리 없는데. 우재에게 이끌려 가면서도 의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마침내 도착한 방 역시 아까와 같았다.
“들어가.”
우재가 의정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얼떨결에 먼저 들어서게 된 의정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머리 위에서 알록달록한 색종이가 꽃처럼 눈처럼 휘날렸다.
“의정 형! 결혼 축하해!”
“의정 씨, 결혼 축하해요!”
“결혼 축하합니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결혼을 축하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정의 부모님과 두 동생, 우재의 형 부부가 손뼉을 치면서 웃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결혼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게…….”
의정이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과 현수막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까 어머니랑 형이랑 통화했는데 두 분 다 오늘 아예 만나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축하도 같이 해주고 싶으시다고. 그래서 준비했어.”
뒤에 서 있던 우재가 의정의 어깨를 감쌌다가 풀어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의정이 그런 우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재는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의정은 괜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장난스럽고, 유쾌하고, 한껏 들뜬 얼굴들. 그러면서도 우재에게 얼른 하지 않겠느냐고 재촉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네, 그럼…… 흠. 흠!”
헛기침 소리에 다시 눈을 돌렸던 의정은 우재의 손에 들린 작고 검은 케이스를 발견했다. 안에 들어있는 건 세련된 디자인의 반지였다. 어쩐지 이럴 것 같긴 했는데.
“언제 준비했어. 이런 건?”
“오래전에.”
반지를 꺼내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던 우재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웃으려고 한 것 같은데, 긴장 때문인지 입꼬리가 떨리는 게 보였다.
“나한테 말도 없이 말이지.”
“언제든 네가 하겠다고 하면 재빨리 끼워줄 생각이었거든.”
받아줄 거지? 우재가 손 하나를 내밀며 눈으로 물었다.
의정은 다시 제 부모님과 동생들, 우민의 가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들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재와 함께하면서 언젠가 결혼하겠지, 생각했다. 그때면 프로포즈도 받겠구나 어렴풋이 상상하기는 했는데. 이런 건 예상도 못 했지만, 얼떨떨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의정아, 나랑 결혼해 줄래?”
긴장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우재가 물었다. 반지를 끼워주려고 내민 손끝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천하의 송우재도 긴장했네.
“응. 너도 나랑 평생 살아줄 거지?”
의정은 속으로 생각하며 우재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손으로 의정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준 우재가 냉큼 대답했다.
“당연하지!”
여름의 초입, 두 사람의 인연이 다시금 새로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한없이 가까운 (특별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