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상실의 빛깔
강연오는 뚝배기를 열어 보았다. 자극적이고 매운 냄새가 더운 김과 함께 확 올라왔다. 숭덩숭덩 썬 앞다릿살을 왕창 넣은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숟가락으로 국을 떠 간을 봤다.
“음.”
이 정도면 괜찮은데?
연오가 느낀 만족감을 증명하듯, 뚜껑을 닫고 가스 불을 끈 뒤 뚝배기를 식탁으로 옮기는 몸짓이 경쾌했다. 그는 이미 차려져 있던 식탁 가운데에 찌개를 내려놓고 알록달록한 밥상을 구경했다.
된장 양념에 조물조물 무친 세발나물과 달걀 물을 묻혀 부친 애호박전, 노릇노릇 잘 구워진 삼겹살, 깨끗하게 씻어 물기까지 탁탁 털어 낸 상추와 깻잎, 풋고추, 집에 있는 고추장과 된장을 섞어 만든 쌈장…….
거실에 걸린 디지털 시계를 확인하자, 시간은 일곱 시 삼 분. 동거인이자 애인인 정태헌은 보통 일곱 시에서 일곱 시 십 분 사이에 돌아오니, 딱 맞게 상이 차려진 셈이었다.
‘물론 내가 한 요리는 아니지만.’
김치찌개도, 세발나물도, 애호박전도, 심지어 쌈장까지도 정태헌이 오전에 미리 해놓고 간 것이었다. 그러니 아까 느낀 만족감은 정태헌의 뛰어난 요리 실력에 대한 만족인 셈이다. 기실 연오가 한 일은 삼겹살을 굽고 쌈 채소를 씻은 게 전부였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꽤 뿌듯했다.
식탁을 등지고 넓은 거실로 나갔다. 탁 트인 전망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 주었다. 한강은 멀지 않은 곳에서 도도하게 흐르고, 다리의 알록달록한 조명이 까만 물에 별처럼 부서졌다. 그 주위로 라이트를 켠 차들이 빼곡하게 오갔다. 저 차들 중 하나는 태헌의 차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늘은 어느새 검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구름의 윤곽이 유난히 선명해서, 하늘은 더 깊고 어두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으면서도 달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맑은, 이상한 풍경이었다.
갑자기 기묘한 불길함이 밀려왔다. 연오는 커튼을 쳐 방금까지 흡족하게 감상하던 풍경을 가려 버렸다. 태헌이 빨리 왔으면 싶었다.
다시 시계를 보니 어느새 일곱 시 십이 분이었다.
‘늦네.’
그 생각과 동시에 핸드폰이 울렸다. 태헌이다! 연오는 반갑게, 또 조금은 불안하게 식탁으로 가 핸드폰을 들었다. 메시지가 두 개나 와 있었다. 하나는 재난 문자였고, 하나는 예상대로 태헌이 보낸 것이었다.
태헌이 보낸 것을 먼저 확인했다. 길이 막혀서 조금 늦을 것 같아, 미안해. 그런 내용을 예상했지만 메시지 내용은 전혀 달랐다.
[대형이야. 저녁 먼저 먹어. 미안.]
대형이라. 그렇다면, 재난 문자는 보지 않아도 무슨 내용일지 알 만했다. 연오가 툭툭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 대형 균열 발생. 해당 구역 주민들은 도시 방공호로 대피 바랍니다.]
연오의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처졌다. 그는 슬리퍼 신은 발을 질질 끌고 식탁으로 가 자기 밥그릇에만 밥을 펐다. 그런 다음 정태헌이 앉을 자리에 뒀던 그릇을 찬장에 집어넣었는데, 그 손길이 제법 거칠었다. 본래 실망의 크기는 기대의 강도에 비례하는 법이었다.
그렇지만 연오는 갑자기 늦는다고 통보하는 애인 때문에 투덜거릴 수 없었다. 그들의 관계가 그만큼 다정하거나 질척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연오의 애인, ‘정태헌’이 너무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세상 곳곳에 나타나는 균열, 끔찍한 괴생명체를 쏟아내는 기괴한 구멍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에스퍼. 인류의 구원자, 현실의 슈퍼 히어로. 정태헌 같은 존재를 수식하는 말은 많았지만, 연오에게 의미 있는 정의는 딱 하나였다.
‘공공재 영웅.’
연오는 애인을 세상과 공유했다. 정태헌에 대한 우선 소유권을 갖는 쪽은 항상 세상이었다. 연인 사이의 저녁 약속 같은 건 공공의 안전에 비하면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연오는 이런 일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연오의 부모님이 균열에 휘말려 죽은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연오도 죽을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당연했고. ‘균열 생존자’인 그는 지금까지 스무 번도 넘게, 미안해하는 태헌의 등을 떠밀어 사회의 안전을 지키게 했다.
연오는 식어가는 찌개를 떠먹으며 새벽에나 돌아올 정태헌이 얼마나 미안해할지 상상해 보았다. 그는 자주 연오에게 미안해했기 때문에 상상은 수월했다.
상상을 반찬 삼아 밥을 푹 떠먹었다. 역시 상상만으로는 좀 심심해서, 애호박전에 세발나물을 얹어 먹자 부드러운 식감과 짠맛이 동시에 번졌다. 그때부터, 연오는 태헌이 제 입맛에 딱 맞게 해놓은 음식을 본격적으로 먹어치웠다.
2인분에 가까운 반찬을 전부 배 속으로 밀어 넣고 나자 엄청난 포만감이 몰려왔고, 딱 그만큼의 공허감도 찾아왔다.
빈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내내 연오는 어찌할 수 없는 섭섭함을 꾹꾹 눌렀다. 태헌에게 내색해서는 안 된다. 안 그래도 에스퍼인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한없이 미안한데.
‘내가 가이드이기라도 했다면…….’
상념을 지워내려고 더 열심히 뒷정리를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식탁을 북북 닦고, 의자까지 원래 모양대로 잘 밀어 넣은 후에는 더 할 일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아까 쳐놓은 거실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이끌린 듯 그리로 다가가는 걸음이 묵직했다. 슬리퍼 쓸리는 소리만 고요한 실내를 채웠다. 드르륵, 커튼 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늘은 아까보다 더 짙은 검보라색으로 물든 뒤였고 구름도 한층 커진 듯했다. 유난스럽게 환한 달 때문에 밝은 곳은 극적으로 밝고 어두운 곳은 한없이 어두웠다. 빛과 어둠이 마구 뒤엉킨 살풍경에 어지럽고 아찔했다.
연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고, 그런 다음에야 아까 느낀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부모님과 함께 균열에 휘말리던 날이 꼭 이랬다. 하늘이 예쁘고 특이하다고, 구름이 무서워 보인다고,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댔던 것까지 떠올린 연오는 황급히 다시 커튼을 쳤다. 그렇게 하면 과거와 단절될 수 있기라도 한 듯.
그렇지만 잊기 어려운 슬픔의 흔적은 연오를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한 속삭임마저 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나쁜 징조야, 안 그래? 이 하늘 아래서 넌 혼자가 됐잖아. 태헌이가 구원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영원히 혼자였겠지. 태헌이가 아니고서야, 누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균열 생존자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치유해 주겠어. 그런데 이제 그마저 사라지고 나면 너는…….
“그만. 그만 생각해.”
연오는 마치 주문을 외우듯 혼잣말을 했다. 대체로 그랬듯 주문은 효과를 발휘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저지하자마자 머리가 살짝 맑아지며 현실감이 돌아왔다. 연오는 일부러 큰 동작으로 창문을 등졌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늘 그랬듯 태헌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 테고, 지나칠 정도로 미안해하는 그를 보며 익숙한 난처함을 느낄 것이다. 태헌이 끓인 찌개를 먹으며 어제 하늘이 이상해서 불안했다고 재잘거리고 나면 지금의 찜찜함 따위는 싹 날아갈 게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신에게 그렇게 변명하며, 연오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침대로 들어갔다. 암막 커튼까지 쳐서 사방이 캄캄한데도 그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태헌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균열에 들어갔으니 당연한 일임을 잘 알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그러다 아주 잠깐, 잠들었던 것 같다.
우웅―.
연오는 갑작스러운 진동에 파드득 놀라 깨어났다. 반쯤 일어나 앉은 채로 눈을 비비며 핸드폰 메신저를 켰다.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그 탓에 잠깐 기다려야 했지만, 연인의 연락이리라는 기대감에 벌써 반가워졌다.
[연오야, 정태헌 당분간 집에 못 갈 거야. 여기도 정신없어서 길게 설명 못 해. 뉴스 확인해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화면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니, ‘한주연 본부장님’이라는 발신자 이름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메신저 프로필을 눌러 곧바로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통화 환경을 스피커 모드로 바꿔놓은 후, 연오는 핸드폰을 꼭 쥔 채 정신없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정태헌과 커플로 맞춘 잠옷을 벗고 청바지에 다리를 끼웠다. 헐렁한 면티에 카디건까지 걸치며 부산스럽게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메시지를 보낸 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오는 막막한 어둠 속에 선 채로 인터넷 뉴스 창을 열었다. 신호음은 계속 가고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대형 균열… S급 에스퍼 빈사 상태]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콱 틀어막았다. 기사 제목을 클릭하는 손가락이 볼품없이 떨렸다. 정신없이 내용을 훑는 동안 신호음이 끊어졌다. 연오는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정신이 아닌 채로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한편 극심한 부상을 입은 후 폭주를 일으킨 정태헌 에스퍼(21세, S급)는 현재 빈사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센터 병원으로 응급 호송된 후 가이딩을 받고 있으나 차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연오는 자기가 집에서 나와 택시를 잡은 과정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핸드폰을 붙잡고 미친 사람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저씨, 저, 저예요. 태헌이 어때요? 빈사 상태라고, 가이딩 제대로 안 된다고 하던데. 저 지금 태헌이 볼 수 있나요? 잠깐이라도, 문밖에서라도, 가이딩 방해 안 할게요. 태헌이 많이, 많이 다쳤어요? 얼마나…… 어, 얼마나 다쳤는데 빈사라고, 막…….”
[연오야.]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묵직하고 축축했다.
연오와 통화하는 사람은 정태헌의 아버지로, 중년의 나이임에도 장난기가 많고 곰살궂을 정도로 상냥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진지한 말투로 연오를 부른 적이 없었다.
커다란 추가 심장으로 쿵 떨어지는 느낌에 연오는 숨까지 멈추고 말았다. 그는 진정하려고,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었다.
“네, 아저씨. 저, 저 듣고 있어요.”
[천천히 와. 다치지 않게.]
“네, 저 지금 택시거든요. 지금, 앞으로 한 십 분이면 도착해요. 태헌이 많이 다쳤어요? 많이 아파해요? 혹시 지금 정신 잃었어요?”
[연오야, 침착하고 아저씨 말 잘 들어.]
듣기 싫었다. 왠지 이 말을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연오는 전화를 끊어 버리는 대신 핸드폰만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붙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마음의 준비요?”
[너 놀랄까 봐 미리 말해주는 거야. 조심히 와.]
마지막 당부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전화가 끊어졌고, 연오는 통화 종료를 알리는 화면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손을 툭 떨궜다.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택시가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신호등 불빛과 여태 불이 꺼지지 않은 건물의 노란빛 너머로 펼쳐진, 짙은 검보라색 하늘이 무섭게 연오를 내려다보았다.
-
에스퍼와 가이드를 관리하는 국민 안전 센터.
까마득하게 높은 175층짜리 건물 앞에 선 건 처음이 아니었다. 어릴 때 견학 오기도 했고, 다 커서도 정태헌의 뒤를 따라 방문하기도 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오가며 자주 본 건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연오는 진땀을 닦으며 겨우 한 걸음을 옮겼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뿜어내는 거대한 건물로 들어가 안내 창구 앞에 서는 내내, 쉬지 않고 이마를 닦아내야 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로비는 오싹할 정도로 조용했다.
안내 창구 앞에 서자 컴퓨터로 무언가 하고 있던 직원이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연오는 이미 축축해진 소매로 다시 한번 이마를 닦았다.
“아, 안녕하세요. 저…… 정태헌 에스퍼 보러 왔는데요. 센터 병원에 있다고 해서.”
“담당 가이드세요?”
“아니요, 저…….”
애인이에요. 동거인이에요.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친한 친구예요. 수많은 대답이 떠올랐다가 땅밑으로 쑥 사라졌다. 친절한 미소를 짓고 기다려주던 직원의 얼굴에 약간의 의문이 번질 무렵, 창구의 전화기가 울렸다.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직원이 수화기를 드는 모습을, 연오는 약간 멍해진 채 응시했다.
“네, 알겠습니다. 마침 지금 와 계신 것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은 수화기를 살짝 막은 후 연오에게 눈길을 두었다. 확인차 묻는 목소리가 속닥거리듯 작았다.
“혹시 강연오 씨?”
“맞아요.”
“네, 보호자님. 강연오 씨 지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금방 도착할 거예요.”
통화를 마무리한 직원이 수화기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가시죠.”
팔을 들며 방향을 가리킨 직원이 성큼성큼 데스크를 돌아 나왔다. 어쩐지 아까보다 태도가 좀 더 정중해진 것 같았다.
건물 깊은 곳으로 진입하는 입구의 경비가 제법 삼엄했다. 검은 가드복을 입은 남자들이 넷씩이나 서서 지키고 있는 풍경은 꽤 위협적이었지만, 그들은 직원과 연오를 위해 곧바로 길을 트며 문을 열어 주었다. 연오는 어깨를 움츠린 채 그들 사이를 지났다.
화려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13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연오는 나머지 엘리베이터가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10층, 99층, 127층…….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한 대뿐이었다. 늘 분주한 센터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그리 바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고요가 기묘하게 희망적이었다. 귀한 S급 에스퍼가 죽어가는데 센터가 이렇게 조용할 리 없지 않으냔 말이다. 어쩌면 뉴스가 과장되었을지도 모르고, 정태헌의 아버지도 잘 모르고 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래, 분명 그랬을 것이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연오는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탄 직원이 140층 버튼을 누르자,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몸이 잠깐 붕 뜨는 것 같았지만 그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고속 엘리베이터일 텐데 속도가 느렸다. 연오는 마르는 입술을 혀로 적시며 층수 안내판만 노려보았다. 목덜미에 흐른 땀을 닦고,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지르고, 심호흡을 거듭해 봐도 140층은 까마득하게 멀었다.
띵.
아까와 똑같은 소리와 함께 드디어 문이 열렸다. 연오는 직원보다 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층이었지만, 정태헌이 데려가 줬던 에스퍼 라운지와 같은 구조라면 가운데 아름다운 인공 정원이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졸 들려오며…….
“어.”
연오는 엘리베이터 앞에 우뚝 선 모양 그대로 굳어 버렸다.
평화롭고 예쁜 정원이나 인공 시내 따위는 없었다. 층 전체가 기계투성이였다. 사방에 굵은 전선이 늘어져 있었고, 천장에는 커다란 총 같은 장치가 빽빽하게 매달려 있었다. 차가운 기계에서 튀어나온 주둥이는 전부 방 가운데를 겨냥하고 있었다. 비린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니, 쇠 냄새가 아니다.
피 냄새…….
안내원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연오는 곧 쓰러질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그제야 시야로 뛰어들었다. 덩그러니 외롭게 놓인 침대, 붉게 젖은 시트, 생체 그래프를 표시하는 작은 화면, 짧게 늘어진 인공호흡기 줄.
그 투명한 줄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그것’이 누워 있었다.
연오는 그게 자기 연인이라고, 정태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그냥 잔혹하게 망가진 구체 관절 인형 같았다. 가죽이 벗겨지기라도 한 양 온몸이 시뻘건 데다, 관절이 불가능한 방향으로 마구 꺾여 있었다. 허리가 홱 돌아가고 팔다리가 뚝뚝 부러진 채 어긋나 있어서 도저히 사람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거대한 손을 가진 괴물이 태헌을 움켜쥐기라도 한 걸까.
연오는 두려움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끼며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갔다. 자세한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등을 돌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네 발로 엎드린 연오가 심하게 구역질을 했다. 저녁에 혼자 먹은 음식 대신 멀건 위액만 나왔다.
“연오야.”
있는 줄도 몰랐던 남자의 손이 그의 등을 몇 차례 두드려 주었다. 연오는 엎드린 채로 그 손길을 받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서, 몇 번이나 침을 삼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저녁에 먹은 걸 게워낼 것 같았다.
간신히 진정한 후에야, 연오는 자기에게 온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정태헌과 꼭 닮은 중년 사내가 화면의 빛을 등진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역광 때문에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지만, 연오는 그의 괴로움을 본 것 같았다.
“아, 아니죠?”
“연오야, 진정해.”
“저, 저거 태헌이 아니죠. 태헌이 안, 안 죽었다면서요. 저건…… 저 사람은 죽었잖아요. 태헌이 어딨어요?”
“아직 안 죽었어. 오래 버티진 못할 거다.”
자기 입으로 자식의 생명이 얼마 안 남았다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덤덤했다. 아니, 그 역시 연오만큼이나 지금 상황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혼절하지 않고 여기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억지스러운 견고함이 연오의 이성도 일깨웠다. 망연히 입만 벌리고 있던 연오는, 이 자리에 정태헌의 보호자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부상으로 죽어가는 에스퍼에게 필요한 건 부모가 아니지 않은가.
“가이드는요? 아저씨, 태헌이 에스퍼잖아요. 가이드만 있으면 막, 주, 죽었다가도 살아나고, 그런 거 아니에요?”
“소용없어. 매칭률이 너무 낮아.”
“그게 무슨…….”
“너도 알잖니. 태헌이는 가장 잘 맞는 가이드와의 매칭률도 18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어. 그 정도 매칭률 가지고는…… 이 상태의 태헌이를 살릴 수가 없다.”
침통한 목소리가 최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태헌은 ‘가이드 결벽증’ 환자였다. 그는 애인이 아닌 가이드와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 삽입 섹스를 하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즉, 그는 연오가 아닌 다른 이들과의 신체 접촉을 병적으로 꺼렸다. 이 지독한 결벽증은 가이딩 수치에 크나큰 영향을 미쳐서, 이제껏 정태헌은 어떤 가이드와도 18퍼센트 이상의 매칭률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점막을 통한 접촉이 있을 경우를 ‘가정’해서 나온 매칭률이니, 사실상 기계 가이딩보다 못한 수치였다.
S급 에스퍼인 그가 지금 이 꼴로 누워 있어야 하는 이유도 부실한 가이딩 때문일 것이다. 열여덟 살에 에스퍼로 각성한 이후 스물한 살이 된 지금까지 제대로 된 가이드 없이 버텨 왔으니 약해질 대로 약해진 게 당연했다.
“기계 가이딩은요? 약은요? 아, 아니, 자기가 죽어가는 상황이니까 가이드 결벽증도 없어졌을 거예요. 죽어가는 사람이 뭘 가리겠어요?”
“이미 대기하던 가이드들이 전부 왔다 갔어. 매칭률은 전보다 더 낮아. 에너지 자체를 흡수하지 못하고 있어.”
“그럼…… 그럼 이제 어떡해요. 이렇게 기다려요?”
“연오야.”
“이렇게, 그냥 두는 거예요?”
죽어가는 자식을 보는 부모 앞에서 요란 떨면 안 된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연오는 남자의 품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다른 나라 가이드들도 있잖아요. 오고 있는 거죠? 태헌이 S급인데, 그럼 최우선 순위 아니에요? 여기서 기다리다 보면 엄청난 가이드가 와서 태헌이를 살리고…… 그리고…….”
“연오야, 여긴 연명실이야.”
연명. 잔인한 단어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남자가 연오의 두 팔을 꽉 움켜쥐었다. 연오가 넘어지지 않게 받쳐 주려는 듯도 했고, 본인이 연오에게 의지하고 싶은 듯도 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며칠은 버틸 테고, 그사이 다른 가이드들이 계속 오겠지만…… 아마 소용없을 거다.”
눈을 깜빡거리자 눈물이 후드득 쏟아져 손등을 적셨다. 연오는 절망적인 선고를 뱉은 남자의 입술을 보다가, 그에게서 벗어나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닥을 지탱하고 서니 세상이 요동치는 느낌이어서, 침대 난간을 힘껏 붙들어 균형을 잡아야 했다.
보자마자 구역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참혹한 모습의 정태헌이 여전히 거기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뼈와 내장 사이로 피가 찼다가 흘러내리기를 반복했다. 해부 모형을 보고 있는 듯한 비현실감이 연오를 덮쳤지만, 눈앞의 모든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태헌아.”
혼미한 정신을 붙잡고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마침내 우는 모양이었다.
“태헌아. 태헌아……. 나 왔어. 너, 너 저녁 먹으러 안 와서 나 혼자 먹었다? 너랑 먹으려고 삼겹살도 엄청 많이 구웠는데 내가 다 먹었어. 네가 맨날 너 늦는 날에 저녁 제대로 안 챙겨 먹는다고 혼냈잖아. 잔소리 듣기 싫어서 많이 먹었는데.”
연오는 혼자 마주했던 식탁을 떠올렸다. 거기 태헌과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그러다가 나란히 서서 사이좋게 설거지를 하고, 소파에 누워 시시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같이 꾸벅꾸벅 졸고.
매일의 일상. 매일의 행복.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매일’ 끝에 정태헌이 고통스럽게 누워 있었다. 피도 닦아내지 못한 얼굴에 호흡기를 댄 채.
잘못 만지면 아플까 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손을 잡으며 죽지 말라고 통곡하고 싶은데 그것조차 할 수 없다니. 지독한 무력감 때문인지,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쑤시듯 아파 왔다. 폐에 커터칼 조각이 가득 찬 것 같았다. 그 고통이 연오를 재촉했다. 뭐든 해. 뭐든 해야지. 어서 움직여.
그런데 정작 움직인 건 연오가 아니라 태헌이었다. 물방울이 맺힌 호흡기 너머에서 피에 젖은 입술이 움찔움찔 떨렸다. 폐와 성대가 모조리 망가진지라 바람 소리만 쉭쉭 샜지만, 연오는 간신히 그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약속 못 지켜서 미안.
울지 마. 잘 살아.
연오의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둑 터진 듯 쏟아졌다. 애달픈 유언마저 들었으니, 이제 태헌의 손을 애틋하게 감싸 쥐며 편히 쉬라고 말할 차례였다. 그러나 연오는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싫어. 잘 안 살 거야.”
끝까지 말 안 들어. 그렇게 생각한 듯, 태헌이 고통 속에서나마 희미하게 웃은 것 같았다. 마음껏 웃으라지. 정말 말 안 듣는 게 뭔지 보여줄 작정이니까.
“아저씨, 저 가이드 수술 받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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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수술은 무슨 가이드 수술이야.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마.”
“태헌아, 근데 내가 듣기론 그거 생각보다 위험한 수술 아니…….”
탁. 태헌이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았다. 정갈한 식탁 너머로 연오를 쏘아보는 눈이 평소와는 달리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빨갛게 무친 진미채를 씹던 연오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그 수술은 불법 된 지 오래야. 연오, 너도 잘 알겠지만.”
“그래도 암암리에 많이들 한다고 들었…….”
“부작용도 심해. 평생을 비실거리게 된다더라. 너 안 그래도 그렇게 건강한 편도 아니잖아. 그런 수술 받으면 수명 깎여.”
“…….”
“몸에 손톱만 한 기계장치 하나만 심으면 되는 것 같지? 그 기계는 너 대신 가이딩해 주는 게 아니라, 네 안의 에너지를 쥐어짜서 널 가이드로 만들어 버려. 그래서 나중에 기계를 제거해도 수술 후유증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태헌이 말을 끝낸 후에도 연오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침묵의 대치 상태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한숨을 꾹 참은 태헌이 연오의 밥그릇에 잘 바른 조기 살을 얹어 주었다.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진 상태였다.
“연오야, 너한테 화내기 싫어.”
“……이미 화냈잖아.”
“한 번만 더 가이드 수술 얘기하면 진짜 화낼 거야.”
“나도 다 알아봤어. 가이드 수술한 사람 중에 몇 달 있다가 진짜 가이드로 각성한 사람도 꽤 많대. 확실하진 않지만 가이딩을 반복하면 자연 각성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 들었어.”
“그럴 수도 있겠지.”
내내 반대만 하던 태헌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근데 그렇게 각성한 사람들은 다 죽기 직전까지 가이딩한 경험이 있다더라. 몇 번이나 죽을 뻔한 다음에 몸이 살려고 각성하는 거야. 살려고.”
조금만 토라진 척을 해도 쩔쩔매던 정태헌이 낯설게 굴고 있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애를 핀잔주는 부모 같았다. 심지어 연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온몸으로 불만을 표현하고 있는데도 달래 주지 않았다. 달래기는커녕, 은근히 정보의 출처를 캐려 들었다.
“아버지한테 들었어? 가이드 수술 얘기. 자연 각성 얘기까지 들었으면 되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건데.”
“…….”
“너한테 수술받으래? 내 가이드 결벽증이 너 때문이라고 탓했어?”
“말 되는 소릴 해. 아저씨가 나한테 그런 말씀 하실 리가 없잖아.”
“그럼 어머니가 그랬나? 친척들이? 네 번호는 어떻게 알고? 누군지 말해 봐, 응?”
“……그냥 혼자 기사 찾아본 거야.”
“아버지네.”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태헌이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연오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헌의 상대가 전화를 받았고, 태헌은 경쾌하기까지 한 음성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저 내일 센터장님 뵈러 가요. 왜냐니요,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아버지가 고등학교 졸업도 안 한 미성년자 일반인한테 불법 수술 강요하셨잖아요. 신고하려고요.”
“태헌아, 그만해. 아저씨가 말씀하신 거 아니라니까!”
“꼭 칼 들고 위협해야만 강요 아니에요. 연오는 보호자도 없는 고등학생인데, 아버지가 수술 언급한 것만으로도 압박 느끼지 않겠어요?”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먼저 여쭤본 거라고. 야, 정태헌!”
“가이드 수술이 무슨 맹장 수술도 아니고, 물어본다고 줄줄 말해주시면 어떡해요. 눈물 쏙 빠지게 혼내주고 다시는 그런 위험한 얘기 하지 말라고 못을 박으셨어야죠. 아버지도 은근히 원하신 거잖아요, 연오 수술하는 거. 체면상 말 못 했는데, 연오가 먼저 얘기해 주니까 내심 반가웠죠?”
“야……. 너는 아버지한테 무슨 막말을…….”
“파렴치해요, 정말.”
나긋한 음성으로 진짜 막말을 뱉은 태헌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가 핸드폰을 곱게 식탁에 내려놓자 작게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연오는 아연실색하여 태헌을 보았지만, 태헌은 황당함이 끓어 넘치는 눈빛 앞에서도 더없이 태연했다.
“밥 먹자.”
“혼자 먹어.”
연오가 벌떡 일어나자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듣기 싫게 울렸다. 잘 차려진 밥상 너머에 앉은 태헌을 노려보는 눈이 서운함을 품고 일렁거렸다.
“난 너 걱정해서 한 소리야. 네가 가이드 결벽증이라고 하니까 혹시 힘쓰다가 쓰러질까 봐. 가이딩 제대로 못 받아서 폭주하기라도 하면 진짜 큰일이니까. 그런데 넌 왜 들어보지도 않고 성질부터 내?”
“힘은 내가 알아서 조절하고 있고, 요즘은 기계나 약도 워낙 잘 되어 있어서 굳이 사람한테 가이딩 안 받아도 돼. 그리고 네가 가이드 수술 받아서 가이드가 된다고 쳐. 너랑 나랑 매칭률 높을지 안 높을지 어떻게 알아? 매칭률 높을 거라고 장담 못 하잖아.”
“그래도 심리적인 요인이 중요하다잖아.”
물러날 생각조차 없는 연오를 응시하던 태헌이 낮은 한숨을 뱉어냈다. 이어진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단순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야. 넌 센터가 어떤지, 에스퍼랑 가이드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잖아.”
연오의 낯빛이 확 변했다. 태헌이 속한 세계 밖으로 밀쳐진 느낌, 그와 자신 사이에 선이 그인 느낌이 억울하고 서러웠다.
“정태헌, 너 내가 몰라서 쉽게 말했다 이거야?”
“그게 아니라…… 그런 거 신경 쓰지 말라는 거지. 수능이 반년도 안 남았어. 너 한국대 가고 싶어 했으니까…….”
“아빠처럼 말하지 마. 하나도 안 고맙고 질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쏘아붙인 연오는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쾅! 바람 때문에 문이 세게 닫혔다. 연오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깐 기다렸다.
똑똑.
예상한 타이밍에 태헌이 왔다.
“연오야, 네 마음 몰라 줘서 미안해. 너 요즘 몸도 안 좋은데 가이드 수술 얘기하니까 잠깐 욱해서 그랬어.”
“그냥 빈혈이야. 고등학생치고 빈혈 없는 사람 없어.”
“그러게. 내가 좀 유난스럽잖아.”
“…….”
“들어가도 돼?”
그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달칵 문이 열렸다. 연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자기 발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태헌이 커플 양말이랍시고 사 온 줄무늬 양말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걱정 같기도 했고 섭섭함 같기도 했다.
“연오야아.”
말끝을 길게 끌며 애교스럽게 다가온 태헌이 연오를 안다시피 하며 나란히 앉았다. 하지 마, 연오는 성질을 부리듯 그를 뿌리쳤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함께 침대로 쓰러졌다. 태헌의 몸 아래 깔린 연오는 한참 버둥거리다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 좀! 무겁다고, 정태헌!”
“그러니까 화내지 마.”
조르듯 하는 말에 연오가 흥 코웃음을 쳤다. 형광등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셨고,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 때문에 속이 더부룩했다.
“화낸 건 너잖아.”
“그래, 나도 화 안 낼게. 그 수술 얘기만 안 하면. 다시는 그런 수술 생각도 하지 마.”
따뜻하고 말랑한 입술이 보드라운 솜털 위로 꾹 내려앉았다. 가뿐히 몸을 일으킨 태헌은 연오도 일어나 앉게 도와주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앞에 두니, 연오도 더는 성을 낼 수 없었다. 태헌은 어색하게 앉은 연오를 이끌었다.
“가서 밥 마저 먹자. 빈혈은 잘 먹어야 된대.”
“정태헌, 너 진짜 오버 심해.”
톡 쏘듯 핀잔주면서도 못 이기는 척 일어나자 그가 드러내 놓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진짜 화도 오래 못 내게 한다. 그렇게 생각한 연오가 자기도 모르게 픽 웃었고, 그들은 언제 실랑이를 했냐는 듯 식탁으로 돌아가 사이좋게 밥을 먹었다.
그런 날이 있었다.
열아홉의 여름이었다.
-
깜빡, 깜빡.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점점 선명해졌다. 처음에는 뿌옇게 번진 빛 덩어리들만 보였고, 나중에는 그게 입원실 조명이라는 걸 분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입을 벌려 보며 상태를 확인하는 사람은 흰 가운을 입은 의사였다.
“강연오 씨, 정신 드세요?”
대답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의사는 연오의 턱을 잡아 입을 벌리게 했다. 덕분에 발음이 샜다.
“에에…….”
“혀가 잘 안 움직여요?”
“아이어.”
“이런. 마취가 덜 풀렸나?”
연오는 더 참지 못하고 제 입을 붙잡은 의사의 손을 떼어냈다. 제 손목 안쪽에 붙은 링거 줄이 눈에 들어왔다.
“턱을 잡고 계셔서 그래요.”
“아.”
의사는 무안하게 허공에 뜬 손을 내렸다.
너무 바보 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일까, 연오는 지금의 상황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왜 병실에 누워 있는 거지. 마취는 또 무슨 소리고, 이 링거 줄은 또 뭐고. 잠깐 고민한 후에야 먼 기억이 머리를 쳤다.
“저 수술 잘된 거예요? 이제 가이드가 된 건가요?”
“네, 일단 수치는 안정적이네요. 칩 이식도 잘 됐고.”
“시간 얼마나 지났어요?”
“수술은 두 시간 정도 걸렸고, 한 시간 정도 주무셨네요.”
고작 세 시간이 지났을 뿐이라니. 이렇게 간단한 수술인 줄 알았으면 태헌이 반대하든 말든 진작 받을 걸 그랬다. 태헌은 무척 오랫동안, 무척 심하게 화를 냈겠지만 결국 가이드가 된 자신을 받아들였을 텐데. 그랬다면 그렇게 다친 채로 누워 있을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후회를 곱씹는 연오의 표정이 쓰디썼다.
“통증은 없을 거예요. 나노 로봇 수술이라 살을 째지도 않았거든요. 흉터 안 남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흉터가 남든 안 남든 상관없었지만, 살을 째지 않았다니 움직이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반가웠다. 연오가 곧장 태헌에게 가려고 몸을 들썩인 순간, 사무적인 태도로 손에 든 차트를 들여다보던 의사가 갑자기 미간을 좁혔다.
“근데, 원래 빈혈이 심했습니까?”
“심한 건 아니고요. 일단 빨리 태헌이한테 가야겠어요. 가이딩 잘 되나 확인 좀 해 보고.”
연오가 링거 줄을 뜯다시피 하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어,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이 두 바퀴쯤 핑 돌았다. 잠깐의 어지럼증인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니 다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웠다기보다는 엎어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의사가 혀를 차며 연오를 앉혀 주었다. 이윽고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원래 빈혈이 심했으니 부작용도 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고, 당분간 어지러움이 심할 거라 이렇게 벌떡벌떡 일어나선 안 된다. 밥 많이 먹고 운동 많이 해야만 가이드로서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다. 체질이 다 바뀐 후에 칩을 제거한다 해도 상태가 크게 호전되지는 않을 테니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연오는 의사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진 않았지만, 천천히 일어나라는 말만큼은 새겨들었다. 느릿느릿 일어서 보니 다리가 약간 후들거리긴 했지만 현기증은 전혀 없었다.
“연오야!”
때마침 정태헌의 아버지가 들어왔다. 그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연오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연오는 자신의 멀쩡함을 주장하듯 어깨를 펴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렇지만 부축이 필요할 것 같긴 해서, 잡아 달라는 뜻으로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억지로 웃었더니 뺨 근육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어서 가요, 아저씨. 태헌이랑 매칭률 어떤지 봐야죠.”
-
태헌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끔찍한 몰골로 누워 있었다. 연명실에 가만히 머물렀을 텐데 괴물과 한 번 더 싸운 것처럼 출혈이 심했다. 영문을 모르는 연오가 정태헌의 아버지, 정한철을 돌아보았다. 그는 소매로 식은땀을 닦으며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너 수술 받는 동안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어. 손댈 수가 없다 보니 꼴이 이렇구나. 일단 측정 준비부터 하자.”
정한철은 정체 모를 선을 태헌과 연오의 손목에 붙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가 준비되었음을 알리자, 연오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조심스럽게 태헌의 손을 잡았다. 끔찍하게 꺾인 팔의 각도를 무시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으면서. 피가 다 말라붙은 태헌의 손은 몹시 건조했다.
어둠 속에서 기계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삑, 삑, 삑, 삑.
측정 중임을 알리는 규칙적인 기계음에 연오는 비로소 눈을 떴다. 측정기 화면을 응시하는 그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자유로운 손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정한철 역시 똑같이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잡고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일단은.”
측정기의 검은 화면 한가운데서 녹색 숫자가 더디게 올라갔다.
“십칠, 십팔, 십구……. 됐다, 일단 넘었어!”
정한철이 숨죽인 소리로 안도했다. 태헌이 어떤 가이드와도 18퍼센트 이상의 매칭률을 기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는 연오 역시,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안심했다.
숫자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30, 40, 45……. 그때마다 정한철은 태헌이 이미 회복하기라도 한 듯 입을 틀어막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어찌나 울었는지 코 먹는 소리가 요란할 정도였다. 연오 역시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눈앞이 뿌연 것을 보니 자신도 우는 모양이었다.
살았어. 이제 살았어. 살릴 수 있어.
“태헌아.”
그냥 손을 잡고 있을 뿐이라 가이딩이 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매칭률이 올라가고 있으니 희망이 있는 셈이었다.
혹시 백 퍼센트를 기록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상상한 순간, 삐 소리가 길게 이어지며 화면의 숫자가 깜빡거렸다. 연오와 정한철이 동시에 화면을 확인했다.
50%.
둘의 최종 매칭률이었다.
“이런.”
탄식하듯 중얼거린 정한철은 아쉬운 듯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연오는 태헌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급히 물었다.
“왜요? 모자라요?”
“모자라는 건 아니지만, 매칭률이 생각보다 낮아. 태헌이를 살리려면 네가 힘들 거야.”
매칭률이 생각보다 낮다. 악의 없이 했을 말이 가슴에 꽂혔다.
센터 의사들은 태헌의 가이드 결벽증이 그의 애인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매칭률은 심리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 결벽적인 태헌이 애인 아닌 가이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라고. 그들은 그 애인이 운 좋게 가이드로 각성하면 이례적인 매칭률을 기록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진단도 함께 내놓았다.
기대가 컸던 것일까. 연오는 잠깐 입술을 깨물었지만, 일단은 좋은 쪽을 먼저 보기로 했다.
“그래도 살릴 수 있는 거네요. 다행이다.”
긴장으로 솟았던 어깨가 그제야 내려앉았다. 정한철 역시 배부른 불평을 할 때가 아니라 여겼는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벅벅 문질렀다. 그런 다음 태헌 옆에 앉은 연오의 어깨를 턱 잡았다.
“그럼 부탁한다. 부탁한다, 연오야.”
“어떻게 하는지 알려 주세요. 바로 시도해 볼게요.”
정한철은 에스퍼 출신이었지만 나름대로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연오는 그가 가르쳐주는 대로 깊이 심호흡을 하면서 발끝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 올리려고 노력해 보았다. 가득 찬 에너지를 순환시키다가 태헌에게 보내 줘야 했는데, 연오가 느끼기엔 명상이나 요가와도 비슷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 요가 수련을 했었다. 산만하던 열일곱 살 때라 힘들었는데 이렇게 써먹을 수 있다니 참 다행이었다. 그 요가 수련도 태헌이 함께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면 진작 그만뒀을 텐데. 태헌에게로 생각이 튀니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연오야, 평정심.”
“네, 아저씨.”
연오는 몸을 흔들거나 흐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몇 분 내내 비지땀을 쏟아 가며 노력하자, 마침내 몸에 가득 찬 에너지의 꼬리를 잡아챌 수 있었다. 그건 아주 따뜻하고 미끌미끌한, 긴 사슬 같았다. 미역 같은 게 몸 안을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긴 숨과 함께 그것을 태헌에게 인도했다. 정확히는 그와 얽은 손 방향으로. 손가락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식은땀이 나도록 애썼다. 구토하는 것도 아닌데 구역질이 났다. 마치 입으로 미역 줄기를 토해내는 것처럼.
“세상에.”
정한철의 감탄사에 비로소 눈을 떴다.
그가 왜 감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망가진 장난감처럼 뒤틀려 있던 태헌의 몸이, 피부 안쪽부터 서서히 수복되고 있었다. 사라졌던 조직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며 촘촘해졌고, 너덜너덜 찢어졌던 근육이 시뻘겋게 자라며 봉합되고, 그 모습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피부가 덮였다.
뼈와 관절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을 때는 우두둑거리는 살벌한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태헌은 분명 살아나고 있었다.
“우욱…….”
연오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심하게 울렁거리는데도 회복 중인 태헌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환부를 메우다시피 했던 균열 벌레들, 굼실거리는 구더기 같은 것들이 빠르게 녹아내리며 증발하듯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 위로 다시 근육과 살과 피부가 뿌리처럼 자라났다.
경이로운 마법이었다.
태헌이 빠르게 나아질수록 연오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온몸의 피가 발가락 끝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애를 썼는데도 몸이 휘청했다. 재빨리 연오를 부축한 정한철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된다. 나눠서 하면 돼.”
“아니에요, 저 끝까지 할래요.”
강하게 부인하자마자 연오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가만히 앉아 태헌을 가이딩했을 뿐인데 몇 시간 내내 악을 쓴 듯 목이 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연오는 이대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첫 가이딩이다. 균열 괴물과 싸우고 지쳐서 돌아온 태헌을 볼 때마다, 자신이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가슴 저렸던가. 태헌이 제대로 된 가이드 없이 버텨야 하는 상황이 자기 탓인 것 같아서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던가.
그렇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연오도 태헌을 위해 뭔가 할 수 있었다. 연오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몸을 돌고 돌던 사슬이 손끝을 통해 주르륵 빠져나갔다. 이게 마지막이야. 본능처럼 힘이 거의 다 소진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오는 태헌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세게 움켜쥐며 잇새로 새는 신음을 참았다.
태헌아, 나중에 너무 화내지 마.
내가 널 살렸잖아.
뱉을 수 없는 말과 함께 연오의 몸이 기울었다. 세상이 막을 내린 듯 암전되었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혼자였다. 누운 장소도 바뀌어 있었다. 수술 후에 회복했던 곳과 똑같은 구조의 병실인 걸 보니, 여전히 센터 안에 있는 듯했다.
거기까지 파악한 연오가 끙 소리와 함께 일어나 앉았다. 아픈 데도 없었고 어지럽지도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난 듯 개운했고, 어쩐지 몸도 가볍게 느껴졌다. 가이드 수술을 받으면 부작용이 어쩌고 후유증이 어쩌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일단 나가서 태헌이든 그의 아버지든 찾아볼 요량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곧바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어?”
핑핑 도는 천장이 이제 익숙했다. 저번처럼 침대에 쓰러지는 운 좋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연오는 맨바닥에서 미끄러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듯 바닥에 쓰러졌다. 쿵! 머리가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처박히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어어…….”
비명보다 얼빠진 소리가 먼저 나왔다. 시야가 갑자기 옆으로 기울었고 머리와 엉덩이는 심하게 욱신거렸는데 이유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축축한 느낌이 들어 누운 채로 바닥에 찍힌 옆통수를 더듬거리자 손가락 끝에 시뻘건 피가 묻어났다. 어쩐지 피를 보니 더 아픈 것 같았다.
놀랄 틈을 주지 않고 문이 열렸다. 병실로 들어온 정한철은 혼자 엎어져 있는 연오와 그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연오야!”
뛰어오다시피 다가온 정한철이 연오를 부축했다. 왜 넘어졌느냐며 걱정하는 정한철의 손목을, 연오가 가만히 잡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올려다보는 눈이 절박했다.
“아저씨, 태헌이는요? 태헌이 살았죠?”
“태헌이 걱정은 마라. 나도 눈 떴다는 얘기 듣고 만나러 가는 길이야. 너 깼으면 같이 가려고 했는데 몸이 이 지경이니 일단은 여기서 치료받고 쉬다가…….”
“아니에요! 저 갈 수 있어요.”
연오는 머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도 쓰러질 뻔했지만, 정한철이 잡아 주어 괜찮았다. 연오는 그에게 기대다시피 한 채 들뜬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몇 번 더 말리던 정한철도 이내 포기하고 연오를 부축하는 일에 집중했다.
“태헌이는 회복실로 옮겼어. 지금 아내가 지키고 있다. 네가 가이딩을 너무 잘 해줘서 오늘 바로 눈을 뜬 거야. 너도 밤새 내내 쓰러져 있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깨어나 다행이다. 그런데 널 이렇게 만든 걸 알면 그 자식이 뭐라고 할지…….”
“태헌이는 이해해 줄 거예요.”
“그래,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다 네 덕분이다, 연오야.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연오는 대답을 피하며 조금 웃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부모님을 잃은 후 이제껏 태헌과 그의 가족에게 기대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일로 감사 인사를 받다니 민망했다.
그들은 어느새 회복실 앞에 도착했다. 132층, 개인 병실.
두꺼운 미닫이문 앞에 선 연오는 정한철에게 기댄 채 잠깐 심호흡을 했다. 태헌은 정말 무시무시하게 화를 낼 것이다. 아니지, 어쩌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멀쩡히 눈만 뜨고 있으면 다 고마울 것 같았다.
연오는 직접 손잡이를 잡았다.
문은 부드럽게, 소리도 없이 열렸다. 병실 안쪽을 아낌없이 보여주면서.
태헌이 거기 있었다.
창을 등진 그의 뒤통수로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뺨과 귓불, 목덜미의 솜털까지 새하얗게 빛났다. 피범벅이던 온몸은 물로 닦아낸 듯 깨끗했고, 옷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이나 손에도 흉터 하나 없었다.
상념에 잠긴 듯 고요히 눈을 내리깐 모습이 조각상처럼 진중하고 도도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데도 후줄근하거나 아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멀쩡했다. 연오가 보았던 어느 때보다도 더.
그때, 옆에 서 있던 정한철이 헛기침을 했다. 사람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생각에 빠진 아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그의 의도대로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정한철이 감격과 슬픔에 잠겨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태헌의 눈동자가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깊고 검은 눈이 연오를 온전히 담아냈다. 그 눈이 살짝 가늘어진 순간, 연오는 자신을 부축하는 한철의 팔을 밀어내며 스스로 한 발짝 나아갔다. 마음이 벅차올라 목소리까지 떨렸다.
“태헌아…….”
“이건 뭐예요?”
성의 없는 질문에 감격의 포옹을 준비하던 연오의 움직임이 멎었다. 잠시 그쪽에 머물렀던 태헌의 시선이 다시 정한철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지극히 무미건조한 태도로, 연오를 향해 턱만 까딱했다.
“이 사람 누구냐고요.”
-
한주연은 국민 안전 센터 에스퍼 본부의 본부장이라는 직함을 떼고 봐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대형 균열을 혼자 정리하곤 했다는 젊은 시절의 무용담은 아직도 그녀의 후광이었다. 그녀는 정태헌이 빈사 상태에 빠졌던 날, 연오에게 가장 먼저 연락해 상황을 알린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와 만나면 연오는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려고 했다. S급 에스퍼가 죽어가는 다급한 상황에 연오에게 연락할 생각을 해준 건 굉장한 호의였다. 평소에도 태헌을 사이에 두고 가깝게 지내긴 했지만 친분과 상관없이 고마운 건 고마운 거 아닌가.
그러니까 꼭 인사부터 하려고 했는데. 이런 심각한 분위기로 서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드문 일은 아니야. 사선을 넘은 데다 센터로 이송된 후 곧바로 가이딩을 받지도 못했으니 뇌 손상을 입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발작 일으켰을 때가 의심스러운데……. 정밀 검사를 해 보고는 있지만 곧장 회복되긴 어려울 거야.”
“가이딩을 받아도요?”
“가이딩이 만능은 아니니까.”
한주연이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노려보는 얼굴이 복잡했다.
“상황이 좋지는 않아. 정태헌은 거의 5년에서 6년 정도의 기억을 통째로 잃은 것 같거든. 열여덟 살에 에스퍼로 각성한 걸 생각해 보면, 능력만 남고 전투 경험은 죄다 사라졌다고 봐야 해. 게다가 정신 연령을 생각해 보면 중학교 2학년 수준이야.”
“…….”
“사춘기나 안 오면 다행이지. 안 그래?”
무슨 농담을 해도 웃지 않는 연오를 보며 한주연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연오는 억지웃음을 지을 기운도 없는 듯,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봤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기억을 되찾을 거야. 가이딩 없이도 몇 년을 버틴 괴물 아니냐.”
“네…….”
“근데 너, 가이드 수술은 잘못한 거야.”
한주연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온기가 머물던 자리는 다른 곳보다 더 빨리 차가워졌다. 따뜻한 위로를 받다가 갑자기 질책과 마주한 연오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한주연은 엄격한 사감 선생 같은 얼굴로 돌변해 있었다.
“그건 불법이야. 넌 직접 안 겪어서 이해 못 하겠지만, 그 수술이 불법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수많은 일반인이 희생당했어. 정태헌 상황이 아무리 급했어도 수술은 생각도 말았어야 해.”
연오는 대답 없이 한주연을 빤히 보기만 했다.
가이드 수술과 가이드 인권 투쟁 역사라면 연오도 잘 알았다. 원래 교과 과정에 충실한 모범생이기도 했고, 애인이 에스퍼라 그쪽 공부도 많이 했으니까.
‘에스퍼는 만들어낼 수 없지만 가이드는 만들 수 있다.’ 실험을 통해 밝혀진 명제 아래 수백 명에 달하는 일반인이 가이드 수술을 받았다. 그때는 직접 배를 갈라 칩을 삽입했다고 들었다. 초기였던 만큼 수술 안전성이 현저히 낮았기에 수술에 응한 일반인 중 반 이상이 사망했다.
백 명 넘는 사람이 죽어간 후에도 가이드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자 브로커들은 납치까지 감행했다. 수백 일에 걸친 시위 끝에야, 국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벌어지던 위험한 수술이 불법으로 지정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지만 연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럼 태헌이 죽어가게 내버려 둬야 옳았단 말인가? 흉터조차 남지 않는 간단한 수술을 피하려고?
“신고하실 거예요?”
“뭐?”
맹랑한 물음에 한주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쓰디썼다.
“어떻게 그러겠어. 네 수술은 센터 병원에서 이뤄졌는데. 센터가 관리하던 의사가 네 수술을 집도했고……. 아마 정태헌 아버지도 일을 크게 만들 수 없다는 걸 알고 이런 짓을 벌였겠지. 어른이 되어선, 파렴치하게.”
파렴치하다. 그 말을 들으니 어느 날의 정태헌이 떠올라, 연오는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저도 동의한 거예요.”
“정태헌이 멀쩡했으면 길길이 날뛰었을걸. 전부터 너한테 피해가 갈까 봐 얼마나 싸고돌았는데. 동거까지 하는데 연애 사실도 언론에 안 알려진 거, 정태헌 성질머리 때문이야.”
그녀 말대로 정태헌은 연오와의 연애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오죽하면 삼 년 넘게 사귀었는데 센터 내에 그들의 연애를 아는 이가 한주연밖에 없을 정도였다. 태헌은 연오가 ‘가이드 결벽증’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상황을 죽기보다 싫어했고, 세상으로부터 연오를 보호하려 애썼다.
“그렇게 애지중지했는데 위험한 수술 받은 거 알면 속이 문드러질 거다.”
“어차피 기억 못 하는데요, 뭐.”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연오가 자세를 바꾸기 위해 잠깐 움직였다. 그런데 소파에서 살짝 일어나자마자 천장이 홱 회전했다. 익숙한 반전과 함께 몸이 다시 가죽에 파묻혔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당사자인 연오는 태연했다. 이런 일이 벌써 세 번째, 벌써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물론 연오가 얻어맞은 듯 주저앉는 꼴을 본 한주연은 그만큼 태평스러울 수 없었다.
“너 뭐야, 어지러워?”
“빈혈인가 봐요.”
“수술 후유증이겠지. 미치겠네, 이 지경이 됐는데 정태헌은 널 기억도 못 하고…….”
“태헌이랑 좀 더 얘기해 볼게요. 얘기하면 뭔가 생각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지금쯤이면 걔도 진정 좀 됐겠지. 근데 연오야, 지금 정태헌 상태가 썩 안정적이지는 않아서 예민할 거야.”
“괜찮아요.”
“보통이 아닐 텐데.”
한주연은 골치 아픈 일을 만났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연오에게 다가왔다. 연오는 그녀의 부축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가이드 수술 후유증인지, 몸에 힘이 없고 자꾸 넘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주연에게 기대어 도착한 병실 앞에 서니 연오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뭐예요?’
‘이 사람 누구냐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나 고통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완전한 타인을 대하는 듯하던 무미건조한 태헌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처럼 까맣고 무서웠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기에, 연오는 용기를 내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그 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
열다섯 살 전까지, 태헌은 입원한 적이 없었다. 넘어져서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크게 앓은 적도 없었다. 돌도 씹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팔팔했던 그로서는 하루아침에 병실 신세를 지게 된 자기 처지가 한없이 기막힐 뿐이었다.
게다가 옆에서 한탄하는 부모님은 또 어떻고. 그의 부모님은 에스퍼와 가이드로 활동하느라 내내 바빴다. 그런데 이제 은퇴해서 옆에 있을 수 있단다. 그리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얼굴 보는 일도 별로 없었던 이들이 갑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상황이 낯설고 거북했다.
그뿐이었으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아까부터 묘하게 온몸이 욱신거렸다. 두통도 심했다. 태헌으로서는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신체의 불편감이었다.
“태헌이 너, 정말 연오 기억 안 나?”
제발 가만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아버지 정한철이 초조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까부터 저 질문을 몇 번이나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 태헌의 어조가 저절로 사나워졌다.
“안 난다고요. 걔가 누군지 알 게 뭐예요.”
“그러지 말고 녹음 파일 다시 들어 봐. 뭔가 떠오를 수도…….”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요!”
찡하게 울리는 두통에 잔소리까지 겹치니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한철은 한숨을 내쉬며 아내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쟤 지금 너무 예민하네. 듣기 싫은 소리가 귀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짜증 나.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몸은 또 왜 이래. 키도 엄청 크고 손발도 크고, 불쾌한 에너지까지 느껴졌다. 혈관을 타고 빙빙 도는 에너지가 에스퍼의 힘이라고 했다. 에스퍼고 뭐고 됐으니 평범하고 아프지 않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태헌아……. 기억 안 나도, 너 연오한테 잘해야 돼.”
조용히 서 있던 어머니 이정우가 태헌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미 다 설명했지만, 연오가 너 살린 거야. 가이드 결벽증이라 많이 힘들어했는데 연오가 수술까지 받아 가면서 애썼어. 말 나쁘게 하지 말고 고맙다고 하고 연오 잘 다독거려 줘. 응?”
연오, 연오, 연오.
반복되는 이름 때문에 더 머리가 아팠다. ‘연오’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송곳으로 머리를 쑤시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기억에 없는 성인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동안의 걱정을 알리듯 흐트러진 머리 모양과 옷차림, 걱정 때문에 어두워진 얼굴이 태헌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저 자식 때문에.
태헌은 모든 화살을 연오에게 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연오야!”
태헌의 생각을 모르는 연오는 자신을 부르는 이정우를 바라보았다. 늘 우아하게 다듬던 머리가 다 헝클어져 있어서, 그간의 마음고생이 환히 보였다. 고아가 된 연오를 남편과 함께 살뜰히 챙겨 준 이라 연오의 얼굴에도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그녀는 재빠르게 다가와 한주연에게서 연오를 넘겨받았다. 그러고는 간이침대에 편하게 앉혀 주었다. 연오의 마른 손등을 연신 쓸어내리는 그녀의 눈가가 붉었다.
“연오야,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태헌이가…….”
“아니에요. 당연히 할 일을 한 걸요.”
“그런데 어쩌면 좋니. 어쩌면 좋아.”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이정우의 낯빛이 창백했다.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태헌에게 가더니 사정없는 손길로 그의 어깨를 갈겼다.
“잊어버리면 어떡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오를 잊어버리면! 너 살려 준 사람인데, 너랑 얼마나 잘 지냈는데!”
태헌 눈에는 모든 상황이 우스운 연극 같았다. 이정우의 재촉도 그저 강연오의 비위를 맞추려는 몸짓 같아 속이 뒤틀렸다.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 살 수 없으니 미리 가이드 기분을 풀어 주려는 모양이지. 태헌이 입을 꾹 다물며 연오를 노려보던 그때.
“아, 아줌마, 저 괜찮아요.”
연오가 허둥지둥 그녀를 말렸다. 조용히 앉아 있던 정한철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었고, 한주연은 아연한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태헌은 연오를 기억해 내라고 강요하는 어머니를 조용히 밀어냈다. 요구하는 목소리는 낮고 분명했다.
“둘이 얘기하게 해주세요.”
“…….”
“다들 나가 주시라고요. 저거만 남고.”
태헌의 손가락이 정확히 연오를 가리켰다. 물건처럼 지목당한 연오보다 이정우가 훨씬 더 흥분했다.
“너 어떻게 사람한테 이거 저거야. 기억이 안 나도 널 구해준 사람이야! 너 때문에 위험한 수술까지 받았어. 사람이 염치는 있어야지!”
“제가 부탁했어요?”
“뭐?”
“제가 구해달라고 부탁했느냐고요. 자기가 좋아서 한 거잖아요.”
“너, 너!”
“아니에요?”
덤덤한 시선이 연오를 찔렀다. 연오는 정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자 대답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태헌과 대화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이정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줌마, 제가 태헌이랑 둘이 얘기해 볼게요.”
잔뜩 흥분한 이정우와 충격에 빠진 정한철, 한숨짓는 한주연을 밖으로 내보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연오는 태헌과 단둘이 남을 수 있었다. 방금까지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병실은 숨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연오는 뭐라도 말하기 위해 일단 간이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연 건 태헌이었다.
“내가 파일을 하나 받았거든요. 음성 파일인데, 들어 봐요.”
툭툭, 핸드폰을 조작하는 손길이 무성의했다. 파일을 재생한 태헌이 핸드폰을 가볍게 던졌다. 푹신한 침대에 떨어진 핸드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뭔가가 펑 하고 폭발했다.
난데없는 굉음에 놀란 연오가 어깨를 움찔했다. 무슨 소리였나 추측하기도 전에 핸드폰에서 급박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증식하는 균열이에요. 지금 당장 핵을 파괴해야 한다고요! 철수 명령 내리시면 어떡합니까!]
절박한 외침의 주인은 다름 아닌 태헌이었다. 균열에서의 긴급 통신 녹음본인 게 분명했다.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숨까지 죽이고 집중했다. 헤드에 기댄 태헌은 그 동요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십 분이 지나기도 전에 새 균열을 낳을 거예요. 예상 경로가 서대문구 방향이라 진짜 위험해요! 그때 가서 새 에스퍼를 투입한다고요? 본부장님, 연오 죽은 뒤에 에스퍼 투입하면 무슨 소용인데요!]
연오. 갑자기 나온 제 이름에 연오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눈을 감고 있던 태헌의 미간만 못마땅한 듯 꿈틀 움직였다.
한주연 본부장이 에스퍼들이 많이 다친 상황이니 가이딩 후에 균열에 재진입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녹음본 속 태헌은 그녀의 합리적인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좋아요, 저 혼자 갑니다. 핵 안으로 직접 침투하겠어요.]
[연희동 쪽으로 번져도 연오 잘 대피시키면 되잖아! 정태헌, 당장 나와!]
[씨발, 연오 균열 보면 패닉 일으켜요. 혼자서는 대피 못 한다고요!]
급하게 달리는 발소리, 괴물의 가죽을 부욱 찢어버리는 소리, 피와 체액이 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드득, 닭 뼈 부러뜨릴 때나 나던 소리에 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알 수 있었다. 정태헌의 뼈가 부러지고 관절이 사방으로 뒤틀리는, 바로 그 소리라는 걸.
아무 예고도 없이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태헌은 핸드폰을 다시 쥘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요히 눈만 떴다. 연오는 눈을 부릅뜬 채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연오에게 고정된 태헌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잔인하고 시렸다.
“이제 말해 봐요.”
“…….”
“내가 누구 때문에 죽을 뻔한 것 같아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한 어투라, 연오는 태헌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연오는 그의 원망에 놀라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아는 연인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태헌 자체에 놀랐다.
정태헌은 고등학생 때부터 어른스럽고 상냥했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시껄렁한 야한 얘기나 하는 다른 학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부드럽고 느슨하면서도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했고,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 아마 그의 다정함과 조숙함은 그 여유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연오에게만 그랬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는 만나는 사람 대부분에게 딱 적당한 선의 친절을 지켰다.
그러니 적어도 연오가 아는 정태헌이라면, 자기 목숨을 구한 가이드를 원망할 리 없었다.
“입이 붙었어요? 가이드 수술이 아니라 등신 되는 수술을 받은 건가?”
갑자기 튀어나온 욕설에 연오가 맞은 듯 움찔했다. 태헌이 욕하는 건 처음 봤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상스러운 말은 하지 않던 그였는데.
그러나 혼란스러울 태헌의 입장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까. 게다가 그의 정신 연령은 고작해야 15살. 그 생각을 하자 코끝이 찡하게 아파 왔다.
“귓구멍 막힌 거 아니면 대답해 봐요. 내가 누구 때문에 죽을 뻔한 것 같냐고요.”
“…….”
“당신 없는 동안 부모님한테 대충 들었어요. 저 음성 파일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기억해 내라면서 얻어다 준 거고. 근데 내가 그 얘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요?”
“…….”
“아, 나 존나 호구 잡혔던 건가?”
마구 쏟아지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연오의 귀에도 ‘호구’라는 단어만큼은 뾰족하게 박혔다. 호구라니, 누가 호구 잡혔단 말인가. 태헌이? 한 학기 내내 절절하게 자신을 따라다니며 구애했던 정태헌이?
태헌은 연오의 혼란에 관심도 없었다. 그는 치미는 짜증 때문에 자기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연오가 답답한 모양이었다.
“고아라면서요.”
“……뭐?”
“도움받을 친척도 없었는데 나랑 내 부모한테 빌붙어 살았다면서. 내가 나가 살 집 구해서 당신 데리고 나갔고. 성인 될 때까지 우리 집에서 생활비 지원받았다던데, 틀려요?”
연오는 그대로 망연해졌다.
무슨 오해를 받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천애 고아가 된 자신이 부잣집 도련님인 태헌을 의도적으로 ‘물었다’는 오해였다. 한동안 정태헌의 본가에서 살았던 것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헌의 부모가 구해 준 집에서 그와 둘이 살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과정은 ‘빌붙었다’는 단어로 요약될 수 없었다.
연오는 급하게 자기 핸드폰을 꺼냈다. 은행 앱을 여는 손이 어째서인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갚으려고 했어. 한국대 합격 발표 나자마자 과외했고, 학교에서 근로장학생 활동도 꾸준히 했고, 그래서 벌써 이만큼이나 모았다고.”
연오는 혼이 나간 듯 부산한 동작으로 태헌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관심 없는 태도로 연오의 핸드폰을 받아 통장 잔액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비린 조소가 번졌다. 불길한 느낌이 연오를 짓눌렀다.
“바로 아저씨, 아줌마한테 드리려고 했는데 안 받으셨어. 너, 너는 기억 안 나겠지만 너한테라도 돈 주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화를 냈거든. 그래도 나 이거 하나도 안 쓰고 모아서 나중에 너희 부모님 드리려고…….”
“됐고. 그럼 돈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절절하게 사랑해서 동거했다, 그거예요?”
태헌이 연오의 핸드폰을 툭 던졌다. 연오는 침대에 나란히 던져진 핸드폰 두 개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동거의 이유를 정확히 대라면, 태헌의 부탁 때문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태헌은 네가 좋다고, 우울증을 앓는 너를 혼자 두는 게 불안하다고 말하며 몇 번이나 같이 살자고 부탁했다. 연오는 여러모로 눈치가 보이고 염치가 없어 거절했지만, 태헌은 줄기차게 연오를 몰아붙여 뜻을 이뤄냈다.
당시의 연오는 그의 막무가내 강요를 여러 번 거절할 정도로 기운차지 못했다. 세상이 밉고 무기력했으며 삶에 활력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사랑으로 치유하는 중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연오는 태헌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않았다. 죽을 힘이 없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연오는 저항할 힘이 없어 태헌에게 끌려갔다.
구질구질한 과거를 몇 문장으로 거칠게 요약해 보았지만, 연오는 그 말을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동거하다가 열여덟 살 때 내가 에스퍼로 각성했다더라고요. 그런데 당신은 가이드로 각성하지 못했고, 난 당신 아닌 사람하고는 섹스는커녕 손잡기도 싫어해서 가이드 결벽증 증상까지 보였고.”
“태헌아, 일단…….”
“씨발, 자꾸 반말하지 말고요. 기분 더러우니까.”
일단 진정하라고 말하려 했던 연오의 입이 굳게 닫혔다. 너무 기막힌 상황이라 슬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깊은 물에 잠긴 듯 무감각하고 얼떨떨했는데, 태헌은 숨 쉴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나는 가이드도 아닌 애인과의 의리를 지킨답시고 가이딩도 안 받고 버텼다는 거죠. 그러다 균열에서 죽을 뻔한 거고.”
태헌의 가라앉은 눈이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연오는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입을 열었지만, 흘러나가는 목소리는 타인의 것인 양 낯설게만 느껴졌다.
“가이드 결벽증 때문에 가이딩을 받을 수 없었던 거예요. 심리적인 요인 때문에 매칭률이 너무 낮았고 가이딩 에너지 흡수 자체를 못…….”
“어쨌든, 내가 정절 지키다 죽을 뻔했다 이거잖아요.”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선 연오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건조했다. 연오는 그의 감정을 낱낱이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본 물건의 값을 어림짐작해볼 때의 호기심, 뒤이어 스치는 가벼운 실망.
“별 볼 일 없는, 고아 남자 애인 때문에.”
“…….”
“심지어 고작 몇천 모았다고 유세 떠는 거지네.”
연오는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속이 메스꺼웠다. 고아에 거지. 맞는 말뿐인데 왜 이렇게 어지러운지 모를 노릇이었다. 늘 자신을 치켜세워 주던 태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쓰러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연오를 관찰하던 태헌의 어조가 다소 누그러진 건 그때였다.
“날 좋아했던 건 맞아요? 솔직히 말해 봐요. 화 안 낼 테니까.”
연오가 이를 사리물었다. 거지라는 소리도 이렇게 끔찍하진 않았는데, 마음 자체를 의심받자 입 안 가득 진흙이 차는 느낌이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화를 내며 고함이라도 치면 개운해질까.
그러나 짧게 숨을 들이마신 연오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고함이 아니라 애원조의 고백이었다.
“정말 좋아해서 같이 살았던 거예요.”
간절하기까지 한 고백에도 태헌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유치하고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양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근데 왜 이제야 가이드 수술 받았어요? 에스퍼는 가이드 없이 못 사는 거 알면서. 내가 정절 지키느라 죽어가면, 당신이 알아서 수술받아야 했던 거 아닌가?”
“나도 진작 받겠다고 얘기했는데…….”
“당신을 너무 사랑한 내가 말렸다? 그리고 당신은 그 말을 그냥 받아들였다 이거죠. 에스퍼인 내가 몇 년을 가이딩 없이 버티는 꼴을 보고도.”
“…….”
“그게 무슨 사랑이에요? 진짜 사랑했으면 나 몰래라도 수술받았겠지.”
태헌의 말이 단숨에 연오의 목을 졸랐다.
억울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태헌은 가이드 수술이 화두에 오를 때마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반응했다. 연오는 그때의 두려움과 슬픔을 기억해 내고 마른침을 삼켰다.
“수술받으면 헤어진다고 했어요. 내가 위험한 일 하는 거 싫다고, 자기 때문에 수술대 오르는 걸 보느니 그냥 헤어지자고 하면서 엄청 울어서, 그래서…….”
“그것도 변명이네요.”
태헌은 이어지는 연오의 말을 간단히 일축했다. 온몸을 떠는 연오를 담은 눈에는 희미한 경멸마저 어른거렸다.
“죽어가는 날 보고서야 수술할 결심이 선 거잖아요? 멀쩡할 땐 힘들든 말든 혼자 대학 다니면서 외면하더니.”
극심한 혼란이 연오를 뒤흔들었다. 계속 저런 비난을 듣고 있으니 자기가 정말 그렇게 비열한 인간이었나 의심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런 의심은 금세 사라졌다. 정태헌을 향한 애정, 죽어가는 그를 보며 느낀 절망이 여전히 생생했으므로.
연오는 한 치의 가책도 없이 제 사랑을 모욕하고 짓밟고 매도하고 폄하하는 정태헌을 노려보았다. 몇천 모아놓고 유세 떠는 거지라는 모욕을 받았을 때도 화가 나지 않았는데, 지금만큼은 분노가 들끓었다.
“기억 못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요.”
태헌은 그 나직한 경고조차 쉽게 비웃었다.
“그래요, 나도 길게 대화할 생각 없었으니까. 이만큼 했으면 서로 할 말은 다 한 것 같고,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할게요.”
할 말은 다 했다. 마지막 부탁. 몇 개의 어절이 연오의 가슴에 구멍을 냈다. 그러나 정태헌은 뻥 뚫린 검은 구멍을 볼 수 없었다.
“앞으로 서로 볼 일 없었으면 해요.”
연오의 뺨과 입술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태헌은 거의 보랏빛으로 변한 입술을 슬쩍 눈에 담았다. 뭐, 입술 정도는 봐줄 만한 듯도 하고. 한가한 감상을 비집고 들어온 연오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헤어지자고?”
“우리가 연인 사이였던 게 맞다면요.”
태헌은 침대 헤드에 기댄 후 허공의 한 점을 여유롭게 응시했다. 연오를 보지 않은 채로, 그는 느리게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계속 붙어 있다 보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난 가이드 결벽증인지 뭔지 그게 또 생기겠죠? 수술해서 비실비실해진 당신한테만 가이딩 받다가 당신이 죽기라도 하면, 나도 새 가이드 못 구해서 죽겠네?”
“…….”
“그렇게 되느니 기억 잃은 채로 사는 게 낫죠. 그러려면 당신이 옆에서 날 자극하지 말아야 할 거고.”
“…….”
“날 사랑한다는 말이 진짜라면, 날 위해서 조용히 사라져 줘요.”
태헌의 눈이 다시 연오에게 고정되었다. 목 졸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본 태헌이, 선심 쓰듯 아량 있게 덧붙였다.
“돈 걱정은 말고요. 갚으라고 안 할 테니까.”
힘껏 말려 있던 연오의 손이 스르르 풀어졌다.
위와 폐, 목구멍을 가득 메우고 입까지 들어찼던 진흙이 갑자기 쑥 빠져나갔다. 무게가 없는 유령이 된 느낌이었다. 연오는 살면서 이런 공허감을 딱 한 번 느껴 보았는데, 부모님이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그래, 이건 혼자가 된 느낌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태헌이, 혼자 남지 않도록 손을 잡아 주었던 정태헌이, 자신을 짓밟고 짓뭉개 다 쓴 휴지처럼 길바닥에 내던지려 하고 있었다.
마땅히 밉고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렇진 않았다.
그냥 미안했다.
친구에게 빈대 붙은 쓰레기 취급받은 자신의 상처보다 정태헌의 마음이 더 이해됐다. 깨어나 보니 기억은 사라졌고, 난데없이 애인이 나타났고, 그 사람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슈퍼 모델이 애인이랍시고 등장해도 이해가 안 갈 판인데 대학교 빼고는 내세울 게 없는 자신이 나타났으니 황당할 법도 하다.
“어떡할 거예요. 그렇게 평생 서 있을 거예요?”
태헌은 성가신 표정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제야 연오는 자기가 한참을 붙박인 듯 서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치미는 눈물을 꾹 참으며 태헌을 바라보다가, 겨우 웃어 보였다. 그와 얼굴을 맞대는 마지막 날이니 우는 꼴을 보이긴 싫었다.
“아니요. 갈 거예요.”
“앞으로 얼굴 볼 일 없으면 좋겠네요.”
“태헌이한테 인사는 해도 되죠?”
정태헌은 불쾌함을 감출 마음도 없는 듯 오만상을 썼다. 마구 구겨진 얼굴마저도 연오 눈에는 잘생기고 멋져 보였다. 태헌이가 저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본다, 때에 어울리지 않는 아련한 생각마저 들었다.
“신파 찍지 말고 그냥 가요.”
“태헌아.”
정태헌의 말을 무시한 연오는, 제 애인의 이름을 혀끝으로 정답게 굴려 보았다. 태헌아, 태헌아. 거듭 부르는 동안에도 할 말은 정리되지 않았다. 정태헌이 오래 기다려 줄 것 같진 않아서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야 했다.
“나 구해주려고 해서 고마워. 너 에스퍼로 각성하고 나한테 약속했던 거 기억나? 네가 강한 에스퍼니까 오랫동안 내 옆에서 나 지켜준다고 했잖아.”
투명하고 맑게 이어지는 음성을 가만 듣고 있던 정태헌이 뻔한 신파 영화를 혹평하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연오는 꿋꿋했다. 침대에 앉은 정태헌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또 다른 사람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정확한 발음과 또렷한 음성으로 인사를 이어나갔다.
“너, 그 약속 지킨 거야.”
“…….”
“나도 너 지키려고 떠나는 거고. 그러니까 화내지 마.”
햇빛이 내려앉은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빛이 어룽진 눈썹이 조금 떨리는가 싶더니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연오는 훌쩍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말을 발음하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잘 살아, 태헌아.”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림처럼 돌아선 연오는 조금도 휘청거리지 않고 곧장 문으로 갔다. 달칵. 지독한 침묵 속에서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만 튀어 올랐다.
서늘하고 고요한 복도로 나온 연오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그는 혀끝에서 자신의 말을 되풀이해 보았다.
잘 살아.
그것은 죽어가던 태헌이 연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그때의 태헌은 죽었다. 저기 있는 건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연오 역시 태헌의 인생에서 죽어 줘야 하리라.
연오는 이제야 최후의 태헌을 이해했다. ‘사랑해’라는 말 대신 ‘잘 살아’라는 유언을 남겼던 그의 심정을. 이별의 순간에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자신 없는 세상에서도 그가 행복하기를 힘껏 바랄 뿐인데.
눈물을 닦아내고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자, 병원 특유의 약 냄새가 콧속에 스몄다. 그러자 세상을 향한 모든 감각이 열리며 움직일 힘이 생겼다. 연오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가누며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 아주 천천히.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정한철과 이정우는 한주연의 본부장실에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핏기 없는 얼굴로 돌아온 연오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정우는 재빠르게 연오를 의자에 앉혀 주었다.
궁금해하는 세 사람을 위해, 연오는 방금 태헌과 나눈 대화의 결론을 짤막하게 옮겨 주었다. 헤어지기로 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정우는 기겁하며 연오의 손을 붙들었다.
“안 돼. 가지 마, 연오야. 쟤 금방 정신 차려. 널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했는데, 너만 옆에 붙어 있으면 금방 기억 찾을 거야.”
연오는 자신의 손을 잡은 이정우를 떨쳐내지 않았다. 아들이 애인이랍시고 데려온 자신을 싫어할 법도 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친어머니처럼 살가웠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도 이제는 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손 정도는 조금이라도 더 잡고 있고 싶었다.
“그래, 좀 기다려 봐. 아저씨가 태헌이 잘 설득해 볼 테니까.”
정한철까지 나서서 연오를 말렸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한주연뿐이었다. 팔짱을 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연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쓰러져 있는 동안 몇몇 가이드랑 정태헌 매칭률 측정 시도해 봤어. 결과는 나쁘지 않아. 70퍼센트 넘는 가이드도 한 명 있었고.”
“아니, 한주연.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한때 그녀와 에스퍼 동료였던 정한철이 놀란 얼굴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동요하는 그와는 달리 한주연은 냉정했다.
“연오가 들어야 할 말을 해 주는 거야. 헤어지기로 했다면 정태헌 걱정에 발목 잡히지 않는 게 좋잖아.”
연오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잠깐 홀로 침묵하던 그가 힘겹게 웃었다.
“그럼 태헌이한테 저는 필요 없는 거네요.”
“아직 가이딩이 얼마나 잘 될지는 모르는 거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지.”
“다행이에요.”
혼잣말을 읊조리는 연오는 덤덤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 어딘가가 마비된 듯 아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너무 큰 사고를 당하면 머릿속이 멍해지듯.
“가이드가 됐으니 일단 센터에 등록은 해야 해. 원한다면 정태헌과 겹치지 않는 곳으로 배치해 줄게.”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연오야!”
정한철이 연오를 말리려 했지만 한주연이 그에게 매서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
“애들 연애에 참견하지 마. 당사자들이 결정했다잖아.”
입술을 질근질근 씹던 이정우가 연오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어조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럼 멀리 가지 말고 아줌마 집에 가자. 너 혼자 먼 데 보내면 걱정돼.”
“저 이제 괜찮아요. 우울증 약 끊은 지도 꽤 됐고.”
“밥은 어떻게 먹으려고? 수술 때문에 몸도 약해졌는데 혼자 지내다가 욕실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누가 발견해줘? 혼자 사는 애들은 화장실에 갇혀서 죽기도 한다더라.”
연오가 멈칫했다. 그녀가 가정한 상황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정말 친어머니처럼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녀에게 감동해서였다. 태헌과는 헤어진다 해도 그의 가족과는 계속 만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유혹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연오는 유혹에 넘어가는 대신 조용히 이정우의 손을 밀어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을 거예요.”
“이렇게 정들었는데 어떻게 보내. 네가 태헌이 살려주기까지 했는데 널 이렇게 보내면 아줌마 마음이 너무 아파.”
“그동안 저한테 너무 잘해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가끔…… 연락 드릴게요.”
연오의 확고한 결심을 확인한 이정우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였다. 정한철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서울 가까운 곳에 있어. 멀리 가면 너무 걱정될 것 같다, 연오야.”
“가능하다면 그럴게요, 아저씨.”
“연락 자주 하고. 응?”
“네…….”
힘없는 웃음과 함께 나온 대답에 본부장실의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작별의 슬픔에 잠긴 그들을 보던 한주연이 짝 손뼉을 쳐 분위기를 바꾸었다.
“누가 보면 서로 죽어서 헤어지는 줄 알겠네. 이만 일어납시다.”
연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한주연이 고마웠다. 태헌과 가까운 사이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세상 무너진 듯 굴면 그건 그것대로 머쓱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연오에게는 슬픔을 되새기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태헌과 함께 살던 집에 가서 자기 짐을 챙겨 오는 것.
태워다준다는 정한철과 이정우를 만류한 연오는 센터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주 오랜만에 밖에 나온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청승맞게 택시에서 훌쩍거리며 울면 어쩌나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파트 앞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 때까지 연오는 침착했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괜찮은 자기 상태에 내심 놀랐다. 태헌과 헤어졌으니 세상이 무너질 듯 슬프고 힘들어야 하는데, 실감이 안 나서 그런지 그렇게 힘들지는 않은…….
“아.”
썰렁한 현관에 우뚝 선 채, 연오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무언가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올라왔다.
집은 무서운 공간이다. 며칠만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도 티가 난다. 태헌과 함께 살았던 이 집에도 부재의 공기가 가득했다.
깨끗하게 닦아 놓은 아일랜드 바와 식탁. 쿠션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말끔히 정돈된 거실. 활짝 열린 침실 문만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태헌의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나가느라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날 느낀 공포와 슬픔이 열린 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십 분 넘게 현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연오는 평생 이대로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고 자신을 다독거리며 억지로 신발을 벗었다. 양말 신은 발로 밟는 바닥은 차가웠다.
연오는 갑자기 결심이 선 사람처럼 의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용도실로 가 커다란 캐리어부터 꺼냈다. 옷가지, 책상에 놓인 전공 서적과 필기구, 칫솔, 커플 슬리퍼, 심지어 잘 마른 우산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자신의 흔적이 묻은 물건은 모두 가져가야 했다. 그게 태헌이 원하는 바일 테니까.
신발까지 비닐에 잘 싸서 캐리어에 넣은 연오는 손으로 허리를 짚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지독한 고요 속에서, 혹시 빼먹은 것은 없나 살피는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아, 그거.”
혼잣말로 중얼거린 연오가 주방 찬장을 열었다. 찾는 물건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 둔 거야?”
조용히 중얼거리며 식탁 의자를 질질 끌고 왔다. 여유 있는 높이에서 찬장 깊은 곳까지 팔을 넣어 보니 마침내 차갑고 단단하고 가벼운 것이 손끝에 걸렸다. 안전을 위해 바깥쪽 그릇을 전부 빼내야 했다. 그렇게 고군분투한 끝에야, 연오는 찾던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식판이었다. 막 둘만 같이 살게 되었을 때 태헌이 인터넷에서 산 물건이었다.
‘연오야, 너 이제 여기에 밥 줄 거야.’
‘왜?’
‘식판에 먹으면 식사량을 가늠하기가 쉽다더라. 오늘 저녁부터 이 식판에 꽉 채워줄 거니까 다 먹어. 정신과 약도 밥 제대로 안 먹으면 소용없댔어.’
‘네가 우리 엄마야?’
연오가 뭐라고 타박하든 태헌은 자기 말을 지켰다. 식판의 음식을 다 먹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일은 없었지만, 연오가 매일 조금씩 먹는 양을 늘려 갈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연오 입장에서는 보호자 노릇을 하는 동갑내기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그래서 그 웃기는 식판 놀이를 그만두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자 연오는 저녁마다 식판을 깨끗이 비울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내내 새 모이 먹듯 음식을 깨작거리던 연오의 놀라운 변화였다. 특별히 한 것도 없고 그냥 태헌이 주는 대로 먹었을 뿐인데.
제대로 된 음식은, 그리고 그걸 목구멍으로 넘기게 하는 건강한 허기는 때때로 정신과 약보다 나았다. 어쨌든 태헌의 지극정성과 그가 차린 음식, 그리고 정신과 약이 굉장한 시너지를 낸 것만큼은 분명했다.
‘배 터질 것 같은데 디저트 먹고 싶어. 딸기 생크림 크로플……. 인터넷에서 봤는데.’
‘너 그거 진짜 웃긴 말인 거 알지?’
빈 식판을 싱크대로 가져가며 그렇게 묻는 태헌의 얼굴에는 뿌듯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기어이 딸기 생크림 크로플을 배달시켜 먹었다. 생전 처음 먹어 본 그 디저트는 혀가 아플 정도로 달았다.
과거의 추억은 반짝반짝한 식판처럼 선명했다. 두개골 안쪽에 껌처럼 달라붙은 기억을 갉작갉작 건드리던 연오는 검지로 금속 표면을 쓸어 보았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미지근했다.
식판 위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작은 눈물 한 방울이 목 끝까지 차오른 감정을 넘쳐흐르게 했는지, 둑이 터진 양 울음이 터져 나왔다. 허엉, 하는 메마른 소리로 시작된 울음은 연오가 자기 짐을 다 정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우는 유령처럼 집 안을 돌아다니며 사랑과 행복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웠다.
그러다 보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느꼈던 기묘한 감정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연오와 태헌의 보금자리였다. 밖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슬픔도 여기서는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태헌의 품에서라면, 그와 함께 꾸민 이 둥지에서라면.
연오는 다 싼 캐리어를 끌어안고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몸속에서 울음이 파도쳤다. 눈물은 높은 파고로 몰려와 가슴께에 부딪히며 하얀 포말로 죽었다. 연오는 사나운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자기 자신을 한 움큼씩 바다에 내어주는 모래사장처럼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띠띠띠띠.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났다. 물론 연오는 듣지 못했다. 그가 태헌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태헌이 가까운 곳에 우뚝 섰을 때였다.
깨끗한 운동화가 연오의 시야 끝에 걸렸다. 연오는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통곡하면서,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태헌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두워진 거실 한가운데 선 태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병실에서는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뱉고야 만 것은.
“아, 안 헤어질래…….”
“…….”
“나 너랑 안 헤어질래, 태헌아…….”
힘겨운 애원을 뱉어 놓자마자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어쩌면 태헌이 병실에서처럼 비웃거나 비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어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는 사람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흔한 배려였다. 적어도 연오는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태헌은 한숨과 함께 비수를 꽂았다.
“난 툭하면 우는 등신 같은 새끼를 좋아했나 보네요.”
연오의 울음이 뚝 멎었다. 더는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놀라움 때문이었다. 부릅뜬 눈이 태헌에게 고정되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만 으쓱했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지독히도 무감정했다.
“울 거면 계속 울어요.”
성의 없는 한마디를 뱉어 놓은 그가 현관으로 가더니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다시 나타났다. 그는 아까 연오가 했던 것처럼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 주저앉아 신중하게 자기 짐을 챙겼던 연오와는 달리, 그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움직이며 꼭 필요한 물건만 캐리어에 던져 넣었다.
십 분. 정태헌이 짐을 챙기는 데 걸린 시간은 그만큼 짧았다. 대부분의 물건을 기억하지 못하는지라 추억의 물건을 분류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었다.
반도 차지 않은 캐리어를 거실로 가지고 나온 태헌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에 든 물건이 많지 않아 캐리어 지퍼는 쉽게 잠겼다. 지이익, 경쾌하기까지 한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갈랐다.
연오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지도 못하고 멍하게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받아주는 이가 없으니 눈물이 거짓말처럼 쑥 들어갔다. 연오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보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뿐이었다.
“앨범…… 챙겼어?”
이런 상황에 하는 질문이 고작 ‘앨범 챙겼어?’라니. 연오는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캐리어를 들고 일어나려던 태헌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황당하게 연오를 응시했다.
“뭐요?”
“앨범. 너랑 너희 집에서 나올 때 아줌마, 아저씨가 챙겨 주신 건데. 안 챙기면 섭섭해하실 거야.”
“이건 무슨 컨셉이에요? 당신, 우리 집 며느리라도 돼요? 울다 뚝 그치고 앨범 챙기게.”
“정태헌.”
지나친 빈정거림에 연오의 얼굴도 설핏 굳었다. 물론 태헌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그마저도 연오에게는 무척 낯설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태헌은 연오가 조금만 화를 내도 금세 살살거리며 달래 주곤 했으니까. 그때의 태헌과 지금의 그를 비교해선 안 되겠지만 자꾸 예전 일이 떠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말 그런 식으로 하지 마. 네가 아무것도 기억 못 할 테니까 도와주는 거잖아.”
“봤어요, 앨범. 알아서 잘 챙겼고.”
“…….”
“이제 참견 끝났죠?”
헤어지지 않겠다고 매달렸던 십 분 전이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황당하고 기가 막혔다.
태헌은 연오가 느끼는 감정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얼이 쑥 빠져나간 시체 같은 낯을 보았을 텐데도 털끝만큼의 동정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데 집은 팔 거예요. 어차피 내 명의로 되어 있던데. 이 집 살 때 돈 보탠 거 있으면 지금 말해요, 돌려줄 테니까.”
“……없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태헌의 본가에서 살다가 2학년이 되자마자 이 집으로 나왔다. 열여덟 살 소년에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부모님의 유산이 있긴 했지만, 태헌과 태헌의 부모는 연오에게서 천 원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권유대로 했을 뿐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끔찍한 수치심이 연오를 들쑤셨다. 이별의 슬픔과 돈 때문에 느낀 창피함이 동시에 턱밑까지 치받았다. 태헌이 계속해서 그 부분을 자극하니 이제는 슬픔과 창피함 중 어느 쪽이 큰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답한 태헌이 잠깐 연오를 살폈다.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이 사람 때문에 가이딩도 제대로 못 받고 기억까지 잃었다고 하니 고운 말이 나가질 않았는데, 저렇게 넋 나간 꼴을 보니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히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머리도 지끈거렸다.
“너무 처량 맞은 표정 짓지 말고요. 앞으로 얼굴 안 보고 사는 건 서로 동의한 거잖아요. 참, 그리고 핸드폰 번호도 바꿀 거예요. 괜히 전화하지 마요.”
연오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함께 지내던 집을 처분하는 거야 이해하지만, 오랫동안 쓴 번호를 바꾸면 너무 불편하지 않을까.
“전화 안 걸 테니까 번호 바꾸지 마. 성인 돼서 만난 친구는 어쩌려고?”
“어차피 그 사람들도 기억 못 하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냉정한 대답에 연오는 희미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나만 끊어내는 건 아니구나. 자기가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부 정리할 생각이구나. 혼자 버려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이런 걸 위안 삼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감은 논외로 쳤다.
태헌이 정말 가려는 듯 일어나 캐리어를 챙겼다. 이대로 헤어지면 영원히 끝이라는 불안이 연오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아 머릿속을 뒤졌다. 한마디라도 더 해서 그를 좀 더 보고 있을 수 있다면…….
“가이딩 필요하면 연락해.”
한 발을 떼려던 태헌이 멈칫하고 연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긍정의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매칭률 그다지 높지도 않던데요. 50퍼센트였던가.”
“그래도 혹시 위급한 상황 생길지도 모르니까 내 번호는 지우지…….”
“센터에서 알아서 하겠죠. 아,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요, 좀.”
태헌이 귓가에 맴도는 모기라도 쫓아내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실제로 구질구질하게 굴고 있었던 연오는 아까처럼 화도 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태헌은 그런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숨까지 죽인 연오에게 건조한 지시가 날아들었다.
“기다렸다가 나중에 내려와요. 밖에서 부모님이 기다려서.”
“…….”
“당신 보면 두 분 다 유난 떨 테니까.”
긴 다리와 운동화가 연오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연오는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멀어지는 발소리만 듣고 있었다. 한때 그토록 소중했던 둘의 집을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들쑤신 정태헌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곧 완전한 침묵이 연오를 감쌌다.
얼마나 기다렸다가 내려가면 될까. 태헌은 부모의 차를 타고 곧장 떠날 테니, 십 분 정도 기다리면 넉넉할 것이다. 그때까지 여기 잠깐만 앉아 있자.
분명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순간 연오는 소중하게 챙겼던 캐리어도 내버리고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정신없이 엘리베이터까지 뛰었다. 태헌이 타고 있을 엘리베이터는 이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숫자를 초조하게 바라보던 연오가 냅다 튀어 나가 비상구 문을 열어젖혔다.
차갑고 딱딱한 계단을 마구 밟고 내려가는 연오의 움직임에 맞춰 센서등이 켜졌다. 마음이 급해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코너를 돌 때의 반동을 이기고자 난간을 꽉 잡고 몸을 휙 돌렸다.
그러자마자 세상이 뒤집혔다.
“아악!”
텅 빈 비상구에 짤막한 비명이 울렸다. 극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발을 헛디딘 연오의 몸이 일곱 개가 넘는 계단 아래로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어깨와 팔꿈치, 무릎을 번갈아 쿵쿵 찧었고 마지막에는 등과 뒤통수였다.
퍽 소리와 함께 머리에 뜨끈한 충격이 전해졌다. 통증을 참아내고 겨우겨우 눈을 뜨자 흐린 센서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연오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자기가 왜 바닥에 누워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잠시 그대로 머물렀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센서등이 꺼졌다. 사위가 어둠에 잠기며 시각이 차단되자 신체의 아픔이 더욱 생생하게 밀려왔다. 등을 부딪힌 탓인지 가슴이 심하게 결렸고, 팔꿈치와 무릎은 아예 감각이 없었다. 넘어지며 바닥을 잘못 짚었는지 오른쪽 손목이 무척 시큰거렸다.
“아…….”
신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흘린 연오는 왼팔을 휘저어 센서등을 켜려 했다. 하지만 센서등은 반응하지 않았다. 캄캄한 정적 속에 앉은 연오는 자기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 가늠해 보려고 잠깐 애쓰다가, 맥이 탁 풀려 그만두었다.
어차피 태헌은 진작 떠났을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와의 헤어짐도, 조금만 달리면 픽픽 쓰러져 버리는 연약한 몸도.
연오는 혼자 앉아서 그렇게 이별을 실감했다. 태헌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현실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연인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기 위해’ 맨발로 달려나가는 청승을 떠는 대신,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캐리어를 챙기고, 신발을 제대로 챙겨 신고, 엘리베이터를 타 1층으로 내려가 택시까지 잡았다.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해 나가는 연오의 얼굴 위를 덮은 덤덤한 표정이 가면 같았다.
센터 병원에 도착한 후에도 연오는 침착했다. 다친 이유와 아픈 곳을 설명하고 진찰을 받았다. 팔꿈치와 무릎에 퍼렇게 올라온 피멍을 봤을 땐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뿐이었다. 손목은 염좌 진단을 받았다. 간단한 처치가 끝날 때까지 연오는 조용히 기다렸다.
치료가 끝난 후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은 건물에 있는 센터 관리지원실로 내려갔다. 야간 근무를 하던 직원이 피곤한 눈으로 연오를 바라보았다. 연오는 파티션 앞에 붙어 섰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등록한 가이드인데요, 기숙사 신청할 수 있나 여쭤보려고요.”
“강연오 가이드님이세요?”
바로 되돌아온 질문에 연오가 잠시 멈칫했다.
“네.”
“본부장님이 미리 말씀해 주셨어요. 인천지부 가이드 기숙사 일인실이고요, 오늘 바로 가셔도 방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가서 성함 말씀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이드 신분증도 나왔어요. 인천지부 출입하실 때 사용하시면 됩니다.”
직원이 한쪽에 빼놓았던 새로운 신분증을 파티션 너머로 건네주었다. 태헌의 에스퍼 신분증을 많이 봤던 연오에게는 생소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사원증처럼 생긴 신분증 한가운데 자신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사진을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된 걸까 잠깐 궁금했다. 아마 한주연 본부장이 알아서 했을 것이다.
“가이드 각성 축하드립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직원이 미소를 만들어 걸었다. 연오 역시 억지로나마 입꼬리를 끌어 올린 후 고맙다고 답례했다.
“인천지부로 가는 셔틀버스가 지하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아홉 시에 출발하는 버스 있을 텐데…… 좀 서둘러 내려가셔야겠네요.”
“감사합니다.”
기계처럼 고개를 숙여 보인 연오는 캐리어를 끌고 몸을 돌렸다. 관리지원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는 그리 먼 길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캐리어가 무겁게 느껴졌다. 어쩌면 캐리어가 무거운 게 아니라 몸이 그만큼 지친 것인지도 몰랐다.
셔틀버스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캐리어를 맡기고 높은 계단을 올라 의자에 몸을 묻으니, 갑자기 정신까지 땅으로 쑥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띄엄띄엄 앉아 있던 낯선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멀미하는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연오는 뒤집히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꾹 감고 의식적으로 호흡을 길게 했다. 아주 잠깐 그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버스가 덜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부드럽게 출발했다.
이마를 댄 유리창이 가볍게 떨렸다. 규칙적인 진동을 느끼던 연오가 눈을 뜨자 한강 풍경이 휘황찬란하게 펼쳐졌다. 태헌을 기다리던 그날 보았던 야경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하늘은 익숙한 검보라색. 넘실거리며 밀려오는 상실의 빛깔.
눈물도 다 말라 버린 눈으로 그 풍경을 응시하던 연오가 덤덤한 손길로 커튼을 쳤다. 그는 서울을, 태헌의 곁을 완전히 떠나고 있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렇게 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