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현실 (1) (3/23)

3장. 현실 (1)

“정신이 드세요?”

눈을 몇 차례 깜빡거리기도 전에 물음이 들렸다. 욱신거리는 몸을 의식하며 겨우 고개를 돌리자 간호사가 서 있었다.

“제 말 잘 들리세요?”

“네…….”

연오는 중얼거리듯 겨우 대답했다. 간호사는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연오는 잠시 자기가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푹신한데도 묘하게 불편한 침대와 소독약 냄새. 병실이었다.

지나간 일이 아득하게 떠올랐다. 안전 구역까지 가서 흥분한 태헌을 진정시킨 일은 꼭 오래된 악몽 같았다.

몸이 휘둘린 것보다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게 더 힘들고 무서웠다. 누가 하반신을 잡아 쑥 뽑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정말로 생명이 깎여나간다면 그런 느낌일까.

‘무리하지 않으면 가이드 수술 후유증 없이 살 수 있다.’ 한때는 희망이었던 그 말은, 무리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구나.

몸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하지 않았다. 어쨌든 태헌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일단은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는 폭주 중이었다. 폭주하다가 가이드를 죽이는 에스퍼도 있다던데…… 이 정도면 약과지.

연오는 억지스럽게 자신을 위로하며 푸른 멍이 올라온 손목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뼈를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움켜쥐던 태헌의 손이 환각처럼 겹쳐졌다.

“연오야.”

퍼뜩 정신을 차리자 한주연과 김현철이 보였다. 연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본부장님.”

환각에 골몰하느라 문이 열린 줄도 몰랐다. 연오 옆에 앉는 두 사람의 얼굴이 무척이나 심각했다. 김현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때요. 의사는 별문제 없다고 했지만 본인이 느끼는 건 또 다르니까.”

“그냥 힘이 좀 없는 것 같은데 그것 말고는 괜찮아요. 태헌이는요?”

김현철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정태헌의 안위를 먼저 확인하는 연오가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옆에서 지켜봐 온 한주연의 반응은 달랐다.

“나아졌어. 폭주 위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전보단 훨씬 좋아.”

“다행이네요…….”

“연오야.”

한주연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서류 가방을 무릎으로 옮겼다. 가방을 보지도 못했던 연오는 그녀가 꺼내는 종이 뭉치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걸 너한테 말해주는 게 맞나 싶어서 망설였는데, 이런 일까지 겪었으니 너도 상황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게 뭔데요?”

“정태헌 가이딩 기록이야. 가이딩만 기록된 건 아니지만.”

한주연이 깔끔하게 묶인 종이 뭉치를 연오의 무릎에 올려 주었다. 첫 장을 넘기는 연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기록은 태헌이 에스퍼로 각성한 바로 당일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어떤 가이드와 어느 정도의 매칭률을 기록했는지부터 평소 에너지의 흐름이 어떠한지까지 세세하게 기록된 종이에는 숫자와 그래프 등으로 표현된 통계가 넘쳐났다.

연오는 빠른 속도로 종이를 넘기며 통계가 전하는 바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파일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꽤 많았다. 태헌이 각성한 직후부터 가이드 결벽증을 호소했다는 점이나 가이딩 약을 남용에 가까울 정도로 들이부으며 살아왔다는 점, 어떤 가이딩 기계와 ‘그나마’ 잘 맞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수도 없이 실험에 임했다는 점.

그러다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연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날은 왜 이렇게 약을 많이 먹었지?’

매년 5월 7일.

복용한 약의 수도 가장 많고, 가이딩 기계를 사용한 시간도 제일 길었다. 도드라지게 솟아 있는 막대 그래프를 응시하는 연오의 얼굴이 고민에 빠진 듯 심각해졌다.

“아.”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왔다.

5월 7일, 연오 자신의 생일이었다.

생일은 늘 비슷하게 보냈다. 자정이 되면 기다리고 있던 태헌이 생일 축하한다며 입을 맞춰 주고 안아 주고 아낌없이 사랑해 주었다. 침대에서 행복하게 뒹굴고 뒤엉켜 노는 강아지들처럼 장난을 치다가 스르르 잠들었다. 아침이 밝으면 태헌과 마주 앉아 미역국을 먹고, 센터로 가는 그를 배웅하고, 정한철과 이정우의 집으로 가서 생일 선물도 받았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태헌이 돌아온다. 만성 가이딩 부족에 시달리는 에스퍼답지 않게 멀쩡한 모습으로, 선물과 꽃다발까지 들고. 그러면 가족이 다 같이 모여 근사한 식사를 했다. 일찍 부모를 잃은 연오에게 그 저녁은 너무나 특별했다. 집에서 먹든 외식을 하든 불평한 적은 없었다. 어떻게 하든 항상 완벽한 하루였으니까.

지금도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행복한 날이었다.

그런데 매해 그날 태헌은 위험할 정도로 많은 약을 삼키고 집으로 돌아오기 직전까지 기계에 매달려 가이딩을 받았다. 이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오와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멀쩡한 정신으로, 멀쩡한 몸 상태로. 매일매일 가이딩 걱정을 하며 태헌의 안색이 나빠지지 않나 전전긍긍하던 연오를 그날 하루라도 안심시켜 주고 싶어서.

“아.”

연오는 고개를 번쩍 들어 흐르려는 눈물을 막았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환한 형광등 불빛이 번져 보였다.

기록지를 보면 태헌은 약이나 기계와도 잘 맞지 않았다. 약은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기계 가이딩은 크고 작은 신체적 고통이나 과흥분 상태를 유발했다. 그런데 태헌은 5월 7일마다 스스로 요청해 약을 타고 가이딩 기계 아래 누웠다.

연오는 가장 행복했던 생일의 태헌을 선명히 그려볼 수 있었다. 온종일 약과 기계를 견디고 센터 화장실에서 자신의 얼굴이 멀쩡한가 확인했을 태헌을. 뺨을 두드려 혈색이 돌게 하고, 미리 준비한 선물과 꽃다발을 정성스레 챙겨 연오에게 돌아오는 길에 그가 곱씹었을 고단한 한숨을.

그러고서는 세상에서 가장 멀쩡한 사람처럼 활기차게 걸어 들어와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던 태헌이…….

연오는 소매로 눈을 꾹 눌렀다. 훌쩍거리는 꼴을 두 본부장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생일일 뿐인데. 안 챙겨도 아무 상관 없었는데.’

생일 때마다 기운 넘치는 태헌의 모습을 보고 오늘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5월 7일만 되면 정태헌이 마법처럼 멀쩡해질 리도 없는데 순진하고 한심하게 그냥 우연의 일치로 여겼다. 오늘은 태헌이의 컨디션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그렇게만 생각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선물을 풀었다.

정작 태헌은 임시방편으로 견디며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 사랑하긴 했던 것일까?

사랑했다면 이렇게 모를 수 있나. 태헌이 아무리 철저히 숨겼다 해도 몇 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어떤 이상한 낌새도 잡아채지 못했다니, 이건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 아닌가.

또한, 사랑했다면 이렇게 감출 수 있나.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 정도까지 숨길 수 있나. 자신은 태헌에게 무엇이었을까. 밥을 챙겨 주고 정신을 돌봐 줘야 할 가여운 애완동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둑한 상념을 떨치기 위해 억지로 자료에 눈을 고정했다. 그러나 아픔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호소 증상: 호흡 곤란, 과호흡, 현기증, 두통, 구토감, 위경련, 불면증, 환시, 환청]

태헌이 복용하는 약의 양이 해가 거듭될수록 많이 늘어난 것을 확인할 때마다, 그런데도 늘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태헌을 떠올릴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태헌은 멀쩡한 표정을 만들기 위해 현관문 앞에서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을 것이다. 지속되는 고통과 갈증을 완벽히 감춘 채 연오를 꽉 안아 주기 위해 몇 번이나 속입술을 깨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이드 결벽증에 대해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연오에게 털끝만큼의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아…….”

연오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꽉 누르며 몸을 숙였다. 김현철이 연오의 야윈 어깨를 꽉 잡아 주었다.

“죄책감 느끼라고 준 자료가 아니에요.”

“흐으…….”

“우리는 정태헌 에스퍼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강연오 가이드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야 강연오 가이드가 앞으로의 일을 결정하겠죠.”

“…….”

“수술 가이드인 만큼 만성 가이딩 부족을 단숨에 해결하긴 어려워요. 지속적인 가이딩이 필요한데, 보다시피 정태헌 에스퍼는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정신 연령이 어려지기까지 했으니 안전 구역에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어요. 센터의 보호도 솔직히 말하자면 한계가 많습니다.”

김현철의 말이 무의미하게 귓가를 스쳤다.

태헌을 가이딩한다는 소식을 듣고 동정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동료 가이드들이 떠올랐다. 성격이 더럽다, 예민하고 유난스럽다, 하나같이 부정적이던 평가도 기억났다.

늘 아프고 힘들고 피곤하니 까칠하고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헌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를 욕했을 것이고. 그러니 소문이 좋게 났을 리 없지 않은가.

그래, 내가 알던 태헌이는 아직 살아 있어.

“혹시 앞으로 정태헌 에스퍼를 담당하고 싶지 않다면…….”

“아니요.”

연오가 곧바로 김현철의 말을 끊었다. 똑바로 든 얼굴에 박힌 눈이 눈물에 젖어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는 연약하거나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또렷한 눈빛과 힘이 들어간 턱에서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저 계속할게요.”

“강연오 가이드,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가이딩이 의지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현실적인 이야기에 김현철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연오의 말이 옳기는 했다.

정태헌은 현재 연오 아닌 다른 가이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연오를 당장 멀리 보내버리면 정태헌의 상태는 점점 불안정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균열이 자주 나타나는 상황에 태헌을 임무에서 뺄 수도 없었다. 소형이나 중형 균열은 A급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대형 균열에는 반드시 S급 에스퍼를 투입해야 한다. 전국에 S급 에스퍼는 열 명뿐이라 한 명 한 명이 귀중했다. 불안정한 태헌을 내내 현장에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연오야.”

한주연이 연오에게 줬던 자료를 챙기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가이딩을 제대로 못 받은 에스퍼들은 자연히 난폭해져. 어쩔 수 없지, 늘 코 바로 아래까지 물에 잠긴 채 사는 기분일 테니. 눈에 뵈는 게 없어지고 아무에게나 화풀이를 하고, 세상 제일가는 모범생인 것처럼 조용하다가 갑자기 각인 가이드가 죽을 때까지 에너지 뺏는 놈도 있고.”

어째서인지 박이정 에스퍼가 떠올랐다. 훤칠한 키에 잘 다듬어진 표정,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태도, 각인 가이드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고백까지. 연오가 무례한 추측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고 꿀꺽 삼켜버리는 사이 한주연이 부연했다.

“내가 그놈들을 대신해 변명하는 게 아니라 너한테 현실을 알려주는 거야. 의지나 사랑 같은 걸로 돌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정태헌도 각성 직후에는 저러지 않았어. 점점 심해진 거지.”

“그래도 저한테는 늘 한결같았어요.”

“그랬겠지, 걔 결벽증이잖아. 가이딩 문제만이 아니라 사랑도 그런 식으로 했겠지. 흠 없이, 완벽하게, 철저하게.”

한주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태헌의 결벽을 조금 징그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센터에서는 자기도 자기를 제어 못 해서 개판이었어. 지금은 너한테도 개판이고. 정태헌은 정말로 널 죽일 수도 있어. 에스퍼는 원래 그래.”

담담하게 선고한 한주연이 연오를 직시했다.

“그런데도 각오 됐어?”

“한주연. 너 지금…….”

김현철이 한주연의 팔을 붙잡으며 말렸다. 그러나 한주연은 김현철의 손을 떨쳐내며 연오의 결정을 기다렸다.

연오의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한주연을 한 번, 김현철을 한 번 본 연오가 두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쓰러져 있는 동안 제대로 자르지 못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초승달 모양의 자국을 냈다.

“전 태헌이 때문에 가이드 수술받은 거예요.”

“…….”

“나중에 어떻게 되든 저렇게 불안정한 태헌이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그럼 저, 나중에 정말 많이 후회할 것 같아요. 게다가 만성 가이딩 부족은 결국 가이딩을 꾸준히 받아야 해결되는 거 아니에요?”

“…….”

“저만 태헌이 가이딩할 수 있잖아요. 다른 가이드 나타날 때까지 돕겠다고 약속했어요. 저 각오 됐어요.”

연오 자신이 균열 생존자로서의 트라우마만 겪지 않았어도 태헌은 그렇게 무리한 희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이서 발생한 균열을 보면 패닉에 빠지는 연오를 알기에 그는 균열의 핵으로 들어가야 했고, 거기서 온몸이 으스러져 죽을 뻔했다.

연오는 태헌이 들려줬던 녹음 파일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연오 균열 보면 패닉 일으켜요. 혼자서는 대피 못 한다고요!’

기억 잃은 태헌이 자신을 가리켜 등신이라고 욕할 만도 했다. 사고 후 몇 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균열만 보면 선 채로 벌벌 떨 줄밖에 모르는 등신이 맞으니까.

태헌은 그 등신을 구하기 위해 위험에 몸을 던졌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였다.

한주연과 김현철 역시 연오의 굳건한 뜻을 읽었다. 한주연의 얼굴에는 희미한 안도마저 스쳐 갔다. 에스퍼 본부장으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S급 에스퍼 가이딩에 이렇게까지 열의를 보여주는 연오가 고마웠다. 김현철은 적극적으로 연오를 말리지 않는 한주연에게 책망하는 시선을 던졌지만.

“네 마음이 그러면, 정태헌 전담 가이드로 붙여 줄게. 다른 에스퍼들 가이딩이라도 안 하면 조금이라도 나을 거야. 진작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정태헌이 하도 거절해서 못 했어. 지금이라도 설득해서 전담 등록하자.”

“아니에요. 태헌이가 저 부담스럽대요. 전담까지 하자고 하면 그땐 정말 싫어할 거예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말에 도리어 한주연이 움찔했다. ‘부담스럽다’고 했다니, 그 정태헌이, 강연오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하던 정태헌이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그때 김현철이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가이드 본부에서도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정태헌 에스퍼랑 맞는 가이드 찾아볼게요. 그때까지 몸 잘 챙겨야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김현철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핏기가 없는 연오의 뺨을 보고선 모든 말을 삼켜 버렸다. 그는 자료를 다 챙긴 한주연에게 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타 본부장실이 있는 층을 누르는 김현철의 손짓이 제법 거칠었다.

“강연오 가이드, 너무 섣불리 결정한 것 같아.”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될 거 알고서 자료 보여준 거야.”

“뭐?”

김현철이 인상을 쓰며 한주연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한주연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둘이 인연이 깊어. 정태헌도 강연오도, 서로를 포기하기 어렵겠지. 일단은 연오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고 하루라도 빨리 다른 가이드 찾는 수밖에 없어. 연오를 돕거나 대신할 가이드만 나타나면 상황이 해결될 거야.”

“매칭률은 높은데 가이딩 에너지는 못 받아들여. 이제까지 보고된 바가 없는 새로운 질병이야. 새 가이드 찾는 게 쉽겠어?”

“일단은 그 수밖에 없잖아.”

한주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띵,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무거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

연오와 격리 조치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며칠 전인데, 한주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센터 에스퍼 라운지에 멍하게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태헌은 한참 후에야 핸드폰 진동을 알아차렸다.

“여보세요.”

[지금 병원으로 좀 내려와. 연오 만나게.]

“……강연오 가이드요?”

[그래. 얘기할 것도 있으니까.]

짧은 통보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태헌은 핸드폰에 나타난 통화 종료 화면을 보다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불유쾌하게 두근거렸다. 긴장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강연오와 영원히 분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으로 오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이유가 뭐였든 가이드를 그렇게 휘둘러 놨으니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 하나.

평소라면 늦게 온 가이드가 잘못이지 자신이 뭘 잘못했느냐고 뻔뻔하게 나갔을 태헌도 지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제3의 시선에서 자신의 행동을 지켜본 후유증은 그만큼 컸다.

그렇지만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은 강연오다. 딱 봐도 상태 나빠 보이는 에스퍼에게 접근하면서 비상 장치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그쪽이 허술한 거다. 균열을 정리하느라 에너지가 바닥나 폭주했는데 가이딩 좀 난폭하게 받았다고 죄인처럼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아니, 이게 맞나? 속이 메슥거리고 두통이 솟아서 침착하게 생각을 잇기가 어려웠다. 태헌은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병실에서 깨어난 후로 몸도 마음도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약으로도 누를 수 없는 통증을 견디며 병실 앞에 섰다. ‘강연오.’ 문 옆에 걸린 이름이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

식은땀이 밴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그런 다음 문고리를 돌렸다.

“정태헌.”

기다리고 있던 한주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태헌은 그쪽이 아닌 연오에게 시선을 두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지쳐 보이는 연오의 손목이 노랗게 멍들어 있었다. 시퍼렜던 멍이 이제야 빠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보기 흉한 건 마찬가지여서,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어딜 보고 있는지 깨달은 연오가 슬그머니 소매를 내려 멍을 감췄다. 그러느라고 반대편 소매가 올라가 또 다른 멍을 보이고 말았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연오 역시 태헌을 바라보았다. 그는 흰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운 모습이었다. 곧은 시선과 똑바로 선 자세,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이 완벽하면서도 예민한 인상을 자아냈다. 병실 내부를 딱 한 번 살펴보고 다시 연오에게로 돌아오는 눈은 유난히 검고 깊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깊은 침묵과 반짝거리며 날아다니는 먼지뿐이었다.

“정태헌, 앉아. 중요한 얘기니까.”

한주연의 딱딱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태헌은 그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면서도 계속 연오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두통이 약간 가셨다.

“연오가 너 계속 가이딩하기로 했어. 고맙게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들어.”

계속 가이딩하기로 했다.

단순한 문장이 태헌의 머리에 박혔다. 그렇게 심한 짓을 당해 놓고도 다시 가이딩하겠다고.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왜요?”

“뭐?”

“내가 미친놈인 거 알았을 텐데 왜.”

위협하려는 뜻은 아니었는데, 눈이 마주친 연오가 움찔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이불 아래로 감추는 움직임이 시야에 걸렸다. 연오가 시선을 조금 내리깔자 조급함과 갈증이 치밀었다. 억지로라도 자신을 보게 하고 싶었다. 대답이 듣고 싶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한주연이 가차 없이 끼어들었다.

“너랑 맞는 가이드 찾을 때까지 도와주는 거야. 앞으로 매칭률 측정이나 테스트 가이딩 제대로 해. 후보 가이드들이랑 친해지는 것부터 시작할 거야. 네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같잖다고 생각하지 말고.”

“난 강연오 가이드한테 물어봤는데요. 왜 나 계속 가이딩하냐고.”

“이 애새끼야!”

“본부장님.”

연오의 부름에 한주연이 멈칫했다. 이불 아래로 손을 감춘 연오가 힘겹게 웃었다.

“제가 얘기할게요.”

연오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을 난폭하게 대하고 거의 죽일 뻔한 태헌을 계속 가이딩하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에 대한 애정. 그러나 태헌은 바로 그 ‘애정’이 부담스럽다고 했고, 연오도 이제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사랑한다고 울면서 매달리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다른 이유를 대야 했다.

그럴듯한 이유를.

“태헌이를 위해서예요, 정태헌 에스퍼.”

“……태헌이?”

알아듣지 못한 정태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기억 잃은 지금의 정태헌 에스퍼 말고요. 제가 예전에 사귀었던 그 사람.”

“…….”

“가이드 결벽증 때문에 태헌이가 많이 아팠다니까 나도 책임은 지고 싶어서 그래요. 지금의 정태헌 에스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잠자코 듣던 태헌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연오는 일이 잘 되어가는지 분간하려고 애썼지만, 태헌의 속을 읽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밀어붙이는 수밖에. 이러다가 전처럼 또 가이딩을 안 받겠다고 하면 큰일이니까.

“새 가이드 찾을 때까지 도와줄게요. 저도 예전 같지 않은 정태헌 에스퍼 오래 붙들 생각 없어요.”

그 순간, 태헌이 코웃음을 쳤다.

태헌이. 그리고 정태헌 에스퍼.

그래, 강연오는 이제 ‘태헌이’와 ‘정태헌 에스퍼’를 구분하려는 것이다. ‘정태헌 에스퍼’ 안에 있는 자기 연인을 구하기 위해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춰 가며 새 가이드를 찾아 주겠다고 한 것이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진정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연오는 사실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연인을 위해 온몸을 부숴가며 희생한 ‘태헌이’에게만 온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이다.

강연오의 애정 따위 바란 적 없는데도 기분이 더러웠다.

얼마든지 가이딩해 주겠다고 장담할 때는 언제고. 정말 당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는 말로 사람을 안심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정태헌 에스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태헌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가슴이 답답하고 기분이 나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는데, 움찔거리는 둥근 어깨가 눈에 박혔다. 어째서인지 더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졌다.

“알겠어요, 씨발.”

욕을 해도 막힌 속이 뚫리지 않았다.

“빨리 새 가이드 찾고 꺼져 줄게요.”

연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태헌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휙 돌아섰다. 기가 막힌 한주연이 부르는 소리도 무시했다.

병원 복도를 가로지르는 내내, 애틋하게 태헌이를 부르던 연오의 음성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의식조차 못 하는 사이 가늘게 떨리던 두 손도 잊고 싶었다. 그런데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또다시 두통이 밀려오며 숨쉬기가 갑갑해졌다. 통증이 뇌를 뭉개 깊고 섬세한 생각이 어려웠다.

어느새 해가 졌는지 하늘은 높고 아득한 검보라색이었다. 태헌은 그 하늘 아래로 혼자 달려 나갔다.

한편, 연오와 병실에 남은 한주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또라이 새끼. 저 새끼 상대하려면 너 푹 쉬어야겠다.”

거친 말에 연오가 살짝 웃었다. 한주연이 몇 마디 격려를 남기고 병실을 떠난 후에야 연오는 온전히 혼자 남았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그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인지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손가락 마디에도 진득하게 땀이 차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태헌을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 거리를 둔 건데 태헌은 잔뜩 기분이 상한 얼굴로 나가 버렸으니. 사랑한다고 해도 싫다, 안 사랑한다고 해도 싫다,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태헌의 다정함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기에 그의 차가운 면면이 날카로운 고드름처럼 더욱 예리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또 그를 화나게 한 걸까. 아니면 한 번 폭주하더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걸까.

알 수가 없었다.

‘태헌아, 나는 내가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안다’도 모두 부질없는 것뿐이었다. 아이보리색을 좋아하고, 어릴 때 부모님이 먹지 못하게 했던 패스트푸드를 성인이 된 후에는 욕심껏 사다 먹고,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예민해지고, 클래식이나 뉴에이지처럼 가사 없는 음악을 즐겨 듣고…….

차라리 이런 것 말고 그가 가이딩 부족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알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결국은 또 끝없는 자책이었다.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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