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천적 가이드 2권-3장. 현실 (2) (4/23)

3장. 현실 (2)

며칠이 지난 5월 7일. 폭주 후 첫 매칭률 측정일이 될 때까지 태헌은 자신의 혼란을 정리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센터로 가는 길에 어머니 이정우는 뜻을 알 수 없는 메시지까지 보냈다.

[연오가 답장이 없네. 연오한테 별일 없어?]

[오늘 같은 날 답장 없으니까 걱정돼서 그래. 너 부담 주려는 게 아니라.]

오늘이 무슨 날인데. 그냥 5월 7일 아닌가.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순간 진한 두통이 밀려왔다. 태헌이 갑자기 댕댕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날카로운 끌로 머리를 갉작이는 듯한 느낌은, 매칭률 측정실에 도착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대충 팽개치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연오가 측정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조용조용한 움직임을 보자 통증이 조금 옅어지는가 싶었다.

그런데 연오는 혼자가 아니었다.

연오 뒤에는 태헌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남자 가이드가 서 있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습은 다분히 의욕적이었지만 태헌은 그쪽에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답장 좀 해요. 나한테까지 연락 오게 하지 말고.”

“……네?”

성의 없이 뱉은 말에 연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눈가가 조금 붉은 것을 확인한 태헌이 슬그머니 인상을 썼다. 울었나 의심한 건데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일에 대한 짜증이라고 느꼈는지 연오가 서둘러 말을 고쳤다.

“무슨 답장이요?”

“당신 때문에 어머니한테 연락 오잖아요. 오늘이 무슨 날인데?”

“아, 그거.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도 아닌데 고개까지 꾸벅 숙여 보인 연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뒤에 선 가이드를 자리로 안내했다. 이름 모를 가이드가 맞은편에 앉아 살그머니 눈인사를 건넸지만 태헌은 연오의 붉은 눈가만 노려보았다. 또 이상한 에스퍼에게 당하고 혼자 울기라도 했나 상상하다가 그런 자신이 한심해지고 말았다.

그사이, 연오는 아침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 준 이정우에게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태헌 없이 보내야 하는 생일이라 괜히 서러웠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자, 그럼.”

얼른 마음을 정리한 연오가 태헌과 새 가이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태헌이 허락한 가이드 소개팅’이라 그런지 연오의 표정이 지난번보다 훨씬 당당했다. 어쩌면 태헌이 그때와는 달리 얌전히 앉아 있어 주어서인지도 모른다.

“시작할까요? 매칭률 측정보다는 서로 가까워지는 게 먼저인 것 같아서 직원 없이…….”

“강연오 가이드.”

대뜸 말을 끊자 연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네.”

붉어진 눈을 하고 경직된 꼴을 보자 태헌의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졌다. 강연오가 ‘좀 색다른 매칭률 측정’이라고 부득불 주장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유쾌하지 않은데 저런 처량 맞은 꼴까지 지켜봐야 한다니.

말이 비딱하게 나간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답 안 해요? 오늘 무슨 날이냐고 물었잖아.”

“아무 날도 아닙니다.”

대답은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튀어나왔다. 태헌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간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근데 왜 어머니가 나한테 연락까지 하셨지.”

“그 문제는 제가 연락드렸습니다. 정태헌 에스퍼와는 상관없는 날이고, 굳이 무슨 날인지 말해야 한다면.”

연오가 빙긋 웃었다. 전혀 웃고 싶지 않은 얼굴로, 그림처럼.

“정태헌 에스퍼가 자유로워지는 날이면 좋겠네요. 진심으로.”

“무슨 개소리야.”

간지러운 소리라는 것을 잘 안다는 듯 연오의 얼굴에 민망함이 피어올랐다. 태헌은 그 변화까지도 빠짐없이 관찰했다. 말끝마다 ‘태헌이’만 찾아대는 가이드라 남처럼 대하기로 했는데 시선이 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직 이 사람만이 코 아래까지 차오른 물의 수위를 낮춰주니까.

태헌의 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오는 다소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로 태헌과 새로운 가이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시작하겠습니다.”

아예 사회자로 나서지 그래요. 태헌이 다리를 꼬고 이죽거리려던 순간 태헌의 핸드폰과 맞은편 가이드의 단말기가 동시에 울렸다. 연오는 손에 든 핸드폰을 아래로 내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태헌 에스퍼의 센터 어플로, 이범석 가이드의 단말기로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전송했습니다. 관리지원실 허가하에 센터 전산에 공개된 정보만 드렸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한 번 훑어보시고 공통 관심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태헌은 핸드폰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어설프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강연오의 ‘주선자 노릇’을 지켜보았다. 팔짱까지 끼고 앉아 호응하지 않으니 연오가 어서 핸드폰을 확인해 보라며 분주히 눈짓했다. 그러나 협조를 약속했던 태헌이 꼼짝도 하지 않자 자기 단말기를 꺼내 이범석 가이드의 정보창을 열었다. 그런 다음에는 나서서 상대 가이드의 정보를 읊어 주기 시작했다.

“이분은 이범석 가이드님이고요, 초등학생 때 가이드로 각성하셨다고 합니다. 정태헌 에스퍼도 아시겠지만 미성년자일 땐 실제 활동이 금지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유 요가원 청담점’에서 요가와 명상을 수련하셨고…….”

“요가원?”

기가 차서 되물은 것인데 대답은 이범석으로부터 나왔다.

“명상이 가이딩의 기본이거든요. 잡념을 없애고 차분히 앉아서 자신의 에너지 순환을 느끼는 것. 그래야 에스퍼의 에너지도 잘 느낄 수 있고 가이딩도 더 잘 되고요. 전 좋은 가이드가 되고 싶어서 어릴 때부터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웬만한 에스퍼들은 제 가이딩을 다 좋아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연오가 두 손을 모으며 진심 어린 감탄을 표현했다. 만사를 다 비딱하게 보는 정태헌 눈에는 괜한 아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박이정 에스퍼가 말해 줬는데, 가이딩 만족도 조사가 있을 때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셨다면서요. 지금이야 가이딩 만족도 조사가 없지만 그때는 엄청나게 유명했다고 들었어요.”

“이정이 형이 그런 얘기도 해요? 민망하네요.”

이범석 가이드가 콧잔등을 긁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스물여섯 살의 청년다운 건실함과 무해함, 청량함이 동시에 담긴 표정이었다. 나직한 목소리와 차분한 말투마저 매력적이었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요가로 단련한 몸은 낭창하게 쭉쭉 뻗어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강인해 보였다.

연오의 가슴이 희망으로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가이딩의 질을 월등히 높여 주는 명상을 초등학생 때부터 지속해 온 능력 있는 가이드가 지금 태헌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이다. 거기에 깔끔하고 시원한 외모, 정중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나긋한 태도까지! 이 정도면 태헌의 마음도 움직이지 않았을까!

한마디 말도 없는 태헌에게 고개를 돌린 연오가 환하게 웃었다.

“박이정 에스퍼가 정말 훌륭한 가이드님을 소개해…….”

“…….”

“……주셨네요.”

마주친 눈이 시베리아 벌판보다 싸늘하고 얼음으로 만든 칼처럼 살벌해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 덕에 정태헌은 나불대는 입 닥치라고 말하는 수고를 덜었다.

흥미나 관심 대신 살의만 번뜩이는 태헌의 반응에 놀란 연오가 침묵하자 갑작스러운 정적이 닥쳐 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범석 가이드가 경력자로서의 성숙함을 발휘했다.

“정태헌 에스퍼 마음 이해해요. 저도 이런 매칭률 측정 과정이 익숙하지 않은데 에스퍼님도 당황스럽겠죠. 지금까지 결벽증이었다니 가이딩이 무섭기도 할 테고. 비슷한 에스퍼들도 몇 명 봤는데 나중에는 다 저랑 잘 맞았고요, 다른 사람 가이딩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괜찮아졌어요.”

당황한 기색도 없이 태헌을 달래는 이범석의 노련함에 연오는 존경심마저 느꼈다. 단 하나의 문제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짝거리는 연오의 눈빛이 태헌의 성질을 건드렸다는 것뿐이었다.

태헌은 드디어 연오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범석을 바라보았다. 무감한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여 이범석을 훑었다.

“‘지금까지’ 결벽증이었던 게 아니라 아직도 그렇고. 그리고 난 가이딩 무서운 게 아닌데.”

“네?”

“무서운 게 아니라 역겨운 거라고요. 그쪽이.”

툭 튀어나온 무례한 공격에 이범석의 표정마저 일변했다. 성격 좋아 보이던 얼굴에 불쾌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태헌은 이범석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가이드님,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태헌이 연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빙긋 웃었다. 이범석을 흉내라도 내듯 싱그럽고 쾌청한 미소였지만 연오는 그 뒤에 감춰진 칼날을 본 것 같았다.

“나 눈 높아요.”

“……네?”

또 무슨 살벌한 소리를 하려나 긴장했는데 맥이 탁 풀렸다. 물론 태헌은 너무 일찍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닫게 해 주었다.

“뭉치다 만 반죽 같은 가이드랑 손 못 잡는다고.”

연오의 눈이 한계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을 나무라려고 했지만 놀라움이 목소리마저 앗아가 버린 뒤였다. 다행히 연오보다는 이범석 가이드가 좀 더 노련했다.

“이해해요. 가이딩이 부족한 에스퍼는 점점 예민해질 수밖에 없죠. 많은 에스퍼가 정신질환을 겪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에너지가 진정되고 나면 난폭한 행동이나 절제 없는 말 습관도 한결 나아집니다. 사례도 많아요.”

“가이드님…….”

연오는 성자라도 만난 듯 감격하고 고마워하며 이범석을 불렀다. 두 가이드 사이에 깊은 이해와 공감, 지지의 눈빛이 오간 순간.

퍽!

정태헌이 걷어찬 책상이 심하게 들썩거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덜컹거린 책상 너머에서 태헌이 이범석 가이드를 노려보았다.

“미친개 취급하지 말고 눈치껏 꺼져, 새끼야. 네 역겨운 면상 때문에 토하기 전에.”

“정태헌 에스퍼!”

도무지 선을 모르는 유치한 짓에 연오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태헌의 반응보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먼저였다. 연오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 이범석을 붙잡았다.

“가이드님, 잠깐만요.”

“정태헌 에스퍼, 아무리 가이딩 부족이라도 그런 태도로는 아무한테도 이해 못 받아요.”

이렇다 할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어조는 차라리 선고에 가까웠다. 물론 태헌은 연상의 가이드가 내뱉은 무서운 선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랄하네.”

“어떤 가이드한테도 사랑 못 받을 거고요. 에스퍼는 가이드의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요.”

“네, 목사님. 아멘.”

이범석은 끝까지 빈정거리는 태헌을 내버려 두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면서 연오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욕당했음에도 중간에 낀 상대를 배려하는 탁월한 심성에 연오의 속이 더 타들어 갔다. 태헌에게는 이런 가이드가 필요하다. 능력 있고 잘생기고 성격까지 좋은.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 순간 연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무리 정태헌이 중요해도 역겨운 사람 취급당한 이범석에게 한 번만 참아 달라고 부탁할 염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안 된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대신 사과하고 청해 보면 또 모를까.

연오는 주먹을 꽉 쥔 채 태헌을 돌아보았다. 책망마저 어른거리는 표정을 본 태헌이 코웃음을 쳤다.

“왜요. 난 가이드님이 데려오면 넙죽 받아먹어야 해요?”

“왜 그렇게 예의가 없어요. 저한테 가이딩 계속 받는 대신 새 가이드 찾는 일에 협조하겠다고 했잖아요. 본인도 나한테 묶이는 거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고, 새 가이드 원한 거 아니었어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태헌의 마음이 전과 달라졌다.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각하지는 못했으나, 이대로 연오의 뜻에 맞춰 주기가 싫었다. 그래서 태헌은 연오를 가장 잘 자극할 수 있는 말을 골라 무기처럼 손에 쥐었다.

“가이딩이 부족해서 그런가?”

연오가 어깨를 움찔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가가 또 조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포착한 태헌의 미간이 좁아지며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의 약점을 발견했을 때의 비틀린 쾌감이 온몸으로 번졌다.

“아까 저 가이드가 그러던데. 가이딩 부족하면 예민해진다고.”

“……그랬죠.”

왜 그렇게 예의가 없느냐며 핀잔줄 때는 언제고 연오는 어딘지 기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시선까지 바닥으로 떨구는 의기소침한 모습은 누구의 마음이라도 아프게 했겠지만 태헌은 더한 갈증만 느꼈다.

“그럼 내가 예의 없는 건 누구 잘못일까요.”

연오는 가만히 선 채로 태헌을 바라보기만 했다.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에 처진 어깨와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는 모습, 그리고 커튼 같은 얼굴 사이로 언뜻 엿보이는 ‘태헌이’에 대한 사랑이 정태헌의 기분을 제대로 망쳐 놓았다.

연오를 알기 전에는 사람의 얼굴에서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지 몰랐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일 뿐인 눈동자가 이토록 여러 가지 단서를 품고 있는 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니 정태헌에게 있어 연오의 얼굴은 처음 배우는 상형문자나 다름없었다.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계속해서 눈길이 갔다. 게다가 이범석을 바라보던 연오의 간절한 눈빛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코 아래서 찰랑거리던 물이 이마 위까지 훅 올라왔다가 떨어졌다. 정말 물을 먹은 것처럼 코가 찡하고 목구멍이 뻐근했다.

그때 연오가 속삭였다.

“지금도 아파요?”

“뭐라고요? 크게 좀 말해요.”

“지금도 아프냐고요.”

태헌의 웃음이 날카로웠다. 그는 ‘아프지 않다’는 느낌이 뭔지 잊어버릴 정도로 늘 아팠다. 개운하다고 느낀 날은 딱 하루뿐이었는데, 안전 구역에서 연오를 샌드백처럼 휘둘러 가이딩을 받은 직후였다. 만성 결핍이 무섭긴 무서운지 다음 날이 되자마자 개운함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도 아프냐고?

“왜요.”

“…….”

“당신이 그렇게 좋아했다는 ‘태헌이’도 아팠을까 봐?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면 막 가슴이 찢어지고 그래요?”

연오가 입을 꾹 다물고 태헌을 노려보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프니까 지금 가이딩 해줘요.”

“네?”

“아까 저 가이드가 그랬잖아요. 난 만성 가이딩 부족이에요. 애인과의 정절 어쩌고 때문에.”

“…….”

“싫어요?”

“아니요, 할게요.”

예상한 대답을 내놓은 연오가 서두르는 동작으로 태헌 맞은편에 앉으려 했다. 연오가 등받이를 쥔 순간 태헌이 발을 뻗어 의자를 세게 걷어찼다.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가며 요란한 소음이 튀었다.

그 소리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놀란 연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위협적인 상황에 지난 가이딩 때의 기억이 우르르 몰려왔다. 저절로 손이 떨려서, 연오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키스로요, 가이드님. 매칭률 50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손잡고 하는 가이딩은 의미 없잖아요.”

연오를 흔들고 싶었던 그는 소기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숨은 멎고 손은 방황하는 연오의 모습이 이상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순간 현기증을 느낀 연오가 급히 테이블을 짚었다.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연약한 손가락을, 태헌은 부러뜨릴 듯 응시했다.

“어서.”

강연오는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태헌이’를 위해서 가이딩을 하겠다고 나서던 그라면 절대.

흡, 하고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태헌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연오의 숨소리는 하얗고 부드러운 포말 같았다. 귓바퀴에 고이는 미지근한 소리를 느끼며 기다리자 체온과 그림자가 동시에 가까워졌다. 그때까지도 태헌은 테이블에 놓인 연오의 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꽃가지처럼 제법 먹음직했다.

그때 연오의 반대편 손이 태헌의 뺨에 닿았다. 테이블을 보느라 틀어진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리려는 손짓은 무력하고 애처로웠다. 박물관의 유물이라도 만지는 듯 조심스러운 손이 잘게 떨리고 있어서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손을 낚아챘다.

작은 손을 제 뺨에 대고 꾹 누른 순간 따뜻하고 말랑한 입술이 태헌을 머금었다. 살짝 닿기만 하고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진짜 키스였다. 입술이 겹쳐졌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지독하게 선정적이어서 태헌은 주먹을 세게 말아쥐어야 했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과 열리지 않는 입 앞에서 머뭇거리는 말캉한 혀가 갑자기 그의 안에 불을 지폈다.

태헌은 연오의 에너지를 바닥까지 긁어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눈까지 시뻘게졌다. 그는 제 뺨에 올라온 연오의 손을 꾹 누른 그대로 입을 열었다. 들어오고 싶다는 듯 입술 사이를 파고들던 연오의 혀가 갑자기 멈칫했다. 태헌은 그 혀를 빨아들인 후 세게 짓씹었다.

익숙하다, 이 행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

“흣!”

아파서 낸 소리인 줄 알면서도 흥분이 치밀었다. 태헌은 달아나려는 연오의 뒤통수를 감싼 채 그를 남김없이 삼키기 시작했다. 완전히 붙잡힌 연오가 움찔거리며 밀어내려 들 때마다 태헌의 움직임이 더욱 가차 없어졌다.

집요한 키스에 연오의 무릎이 푹 꺾이며 바닥에 부딪혔다. 둘의 높이가 뒤바뀐 순간 태헌의 악력이 더 강해졌다. 맨바닥에 꿇어앉은 연오와 그를 움켜쥔 태헌의 입맞춤은 가이딩과 키스 중간쯤으로 변질되었다.

연오에게 매달리는 태헌은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필사적으로 생명을 갈구하는, 구하러 온 이를 물 밑으로 끌어 내리는 조난자였다. 연오는 모든 것을 잊고 행위에 몰두한 태헌을 거부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숨이 막혔다. 버둥거리던 연오가 띄엄띄엄 단어를 뱉어냈다.

“태헌, 아, 그만……!”

거센 움직임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갑자기 숨이 탁 트이며 뿌옇던 시야가 맑게 갰다. 그러나 보는 것보다 듣는 게 먼저였다.

“나 ‘태헌이’ 아닌데.”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카락 끝을, 태헌이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것뿐이었는데 연오는 얻어맞은 사람처럼 움찔했다. 안전 구역에서의 일이 또다시 연오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정신이 나간 듯 에너지를 갈취하던 정태헌, 자신을 알약처럼 마구잡이로 씹어 삼키던 정태헌…….

지금도 태헌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러진 않았는데. 아까의 그가 조난자였다면 지금은 물귀신 같았다.

“가이드님.”

대답을 종용하듯 태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장이라도 전처럼 밀쳐질 것 같은 압박감이 연오를 움켜쥐었다. 태헌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알 길이 없는 연오는 달달 떨며 더듬거렸다.

“저, 정태헌 에스퍼.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잘못 불러서…….”

“재미없네.”

연오를 탁 놓아준 태헌이 물러났다. 그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나자 연오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연오는 뻐근하게 아파 오는 심장을 느끼며 팔을 교차해 스스로를 보호하듯 안았다. 본능적인 자세에 태헌의 눈에 기이한 쓰라림이 스쳤다.

괜히 기대했어.

당신이 언제든 가이딩해 준다고,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다고 했을 때.

괜히 기대하고 흠뻑 젖었어.

“가이드님이 나 살려줄 줄 알았는데.”

“…….”

“거짓말이었어.”

그림자가 물러난 후에야 연오는 태헌이 등을 돌렸음을 알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쓰러진 의자를 지나쳐 문을 여는 태헌을 내내 좇았다.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 후에도 연오는 같은 방향만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시달린 입술이 그새 부르트기 시작했다.

화끈거리는 입술 때문이었을까. 들릴 리 없는, 들어서는 안 되는 과거의 소리가 안개처럼 밀려와 그를 감쌌다.

‘연오야, 나 진짜 5분만 더…….’

‘안 돼, 정태헌. 빨리 일어나. 너 이러다 센터 늦어.’

‘나가기 싫어. 나가기 싫어, 연오야. 나 아파.’

‘꾀병 부리지 말고.’

‘그럼 키스로 깨워줘……. 나 잠자는 공주님 할래…….’

‘네가 무슨 공주야.’

‘뽀뽀 안 해주면 나 안 일어나. 세상 안 지켜.’

‘아, 진짜 유치해.’

연오는 축축한 뺨을 훔치며 소리를 참았다. 그러면서 자기가 왜 이렇게까지 우는 것인지 이해해 보려 했지만 생에는 주석을 달 수 없는 슬픔도 있는 법이어서, 그의 울음은 더욱 깊은 불가해로 빠져들었다.

-

“가이드님!”

기숙사 관리인이 작은 창문을 열고 연오를 불렀다. 머리가 희끗희끗 센 그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느긋한 걸음으로 관리실에서 나왔다. 일 분이라도 빨리 돌아가 쉬고 싶었던 연오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잠깐 서서 기다려야 했다.

관리인의 손에는 종이봉투 하나와 작은 케이크 박스가 들려 있었다. 양손으로 물건을 들고나온 그가 사람 좋게 허허 웃었다.

“이거 박이정 에스퍼가 맡기고 간 거예요. 가이드님 멘토라던데?”

“아…….”

연오는 엉겁결에 받아든 선물을 내려다보며 박이정을 떠올렸다. 그가 소개해 준 새로운 가이드가 오늘도 무례한 말을 들었으니 새삼 그에게 면목이 없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지라 더욱 미안했다.

“감사해요.”

“얼굴이 안 좋네. 얼른 들어가요,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간 연오는 선물을 풀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엎어졌다. 아침부터 태헌을 생각하며 울고, 그에게 키스한 후 또 울고, 그렇게 하루에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아서 그런지 머리가 무거웠다. 연오는 유난히 뜨겁게 느껴지는 날숨을 토한 후 이불도 덮지 않은 채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초저녁의 어슴푸레한 빛조차 사라진 방은 심해처럼 어둡고 딱 그만큼 고요했다. 연오는 긴 낮잠을 자고 일어나 갑자기 달라진 세상에 얼떨떨해하는 여느 사람들처럼 한동안 멍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지잉……. 박이정의 선물과 함께 식탁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한 차례 진동했다. 묵직한 정적을 깨는 그 소리가 연오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늘씬하게 얻어맞은 듯 욱신거리는 몸을 짐짝처럼 끌고 식탁으로 가는 연오의 걸음이 무거웠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을 드니 이정우의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연오야, 오늘 못 봐서 너무 아쉽네. 태헌이 그렇게 되고 너랑 한 번도 밥을 못 먹었어. 아줌마가 미역국이라도 끓여서 기숙사에 갖다 주고 싶은데 너 부담스러울까 봐 사무실로 선물만 보냈어. 건강 잘 챙기고 언제든 너 마음 편할 때 연락해.]

메시지에 사진도 한 장 첨부되어 있었다. 스틱형 홍삼과 공진단 사진이었다. 아마 내일쯤 사무실로 도착할 ‘선물’이 이것인 모양이었다.

연오의 입술 사이로 엷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태헌과 헤어졌으니 그의 가족과도 더 관계되지 말아야 할 텐데 자꾸만 챙겨 주니 난감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선물은 올해 생일까지만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연오가 감사 인사를 전송했다.

그런 후에야 박이정의 선물을 정리할 기운이 생겼다. 핸드폰을 식탁에 내려놓은 연오가 스위치를 누르자 어둡던 방이 곧바로 환해졌다. 핸드폰 불빛보다 더 아프게 눈을 찌르는 형광등 아래서 잠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연오가 곧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각 케이크가 든 종이 상자부터 옮기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얀빛이 연오의 얼굴을 물들였다. 냉장고에 든 거라곤 생수 세 병과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도시락 하나뿐이어서 작은 종이 상자가 들어갈 공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연오는 상자를 곧장 집어넣는 대신 냉장고 문을 잡고 잠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잘 챙겨 먹으라는 박이정 에스퍼의 말을 무시했다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먹는 것에 소홀해진 것이다. 그때처럼 태헌을 가이딩하러 가다 쓰러지지 않으려면 뭐라도 입에 넣고 기운을 차려야 했다.

‘이제 진짜 잘 챙겨 먹어야지.’

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케이크와 함께 먹으려고 도시락을 꺼냈다. 그런데 사다 둔 지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하얗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입맛이 뚝 떨어진 연오는 그것을 모르는 척 냉장고에 넣어버린 후 케이크만 챙겨 식탁으로 돌아왔다.

하얀 슈거 파우더를 눈처럼 살살 뿌린 초콜릿 케이크였다. 연오는 한눈에 보기에도 꾸덕꾸덕한 케이크를 입맛 없이 바라보다가, 나선형으로 돌돌 말린 초콜릿 장식부터 엄지와 검지로 살짝 들어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씁쓸한 맛이 혀끝을 자극했지만 식욕이 일지는 않았다.

먹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포크를 들어 뾰족한 부분부터 조금씩 잘라 먹었다. 새 모이 먹듯 깨작거리며 의무적으로 턱을 움직이던 연오는 왼손을 뻗어 종이봉투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박이정이 제 생일은 어떻게 알았을까. 선물을 보면 이 뒤늦은 의문도 해결되기를 바라면서.

종이봉투를 당길 때 들은 자르륵 소리로 이미 짐작했지만 박이정의 선물은 영양제였다. 심지어 아까 이정우가 보낸 사진에서 본 것도 있었다. 종합비타민, 비타민D, 오메가3, 마그네슘…….

‘내가 그렇게 아파 보이나?’

두 사람 모두에게서 건강 제품을 선물 받으니 멋쩍었다. 조금만 무리해도 픽픽 쓰러지긴 하지만 이만한 걱정을 받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은 것 같은데.

종이봉투 바닥에 작은 엽서도 한 장 들어 있었다. 연오는 케이크를 아주 조금씩 잘라 먹으며 길지 않은 편지를 읽어나갔다.

[관리지원실에서 오늘이 가이드님 생일이라고 알려 줬어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약소합니다. 나이 먹은 내 참견이 귀찮을 텐데도 늘 너그럽게 받아주는 강연오 가이드님, 가끔은 짐을 내게 나눠 주세요. 생일 축하해요.]

네 개의 귀퉁이가 모두 동그랗게 잘린 엽서는 연오의 손을 찌르지 않았다. 둥글게 다듬어진 엽서의 모양마저도 박이정 에스퍼 같아서 연오는 힘겨운 중에도 조금 미소를 지었다. 서른이 조금 넘었으면서 대단히 나이 많은 사람처럼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짐을 나눠 달라는 말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자신의 짐을 그와 나눌 생각은 전혀 없지만.

연오는 핸드폰을 들어 박이정에게 보낼 메시지를 적어나갔다.

[에스퍼님, 선물 잘 받았어요. 케이크도 지금 먹고 있습니다. 항상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까지만 적을까 싶어 멈칫했던 연오의 손가락이 곧 새로운 문장을 지어 나갔다.

[이범석 가이드님 일은 제가 정태헌 에스퍼를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정태헌 에스퍼가 만성 가이딩 부족이라 많이 아프대요. 원래 너무 아프면 화도 쉽게 나잖아요. 걔가 원래는 그런 성격이 아닌]

연오는 입술을 꾹 깨물고 새로 쓴 문장을 전부 지웠다. 챙겨 줘서 고맙다는 얘기까지만 하는 게 깔끔할 것 같았다. 태헌을 대신해서 사과하고 그를 변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자신과 태헌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한때는 서로가 서로를 대변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강렬한 일체감, 사랑하는 사람과 오묘한 방법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느끼는 충만감, 그런 것들이 연오 안에 가득하던 때에는.

하지만 그때는 지나갔으니 이제부터는 태헌이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야 했다. 아직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태헌을 대변하려 들지만, 시간이 연오를 도와줄 것이었다.

연오는 3분의 1도 먹지 못한 케이크를 내려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일단 밥부터 잘 먹어야 새 삶에 적응하든 말든, 태헌을 돕든 말든 할 게 아니겠는가.

“아.”

뭔가 생각난 듯 천천히 일어난 연오가 싱크대 위쪽 선반을 열었다. 깊숙한 곳까지 팔을 집어넣자 차갑고 단단한 게 손에 걸렸다. 그렇게 까치발까지 들어 꺼낸 것은 과거의 태헌이 사 왔던 식판이었다.

연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케이크를 식판으로 옮겼다. 그러자 갑자기 케이크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세련된 판에 있을 때보다 투박한 식판에 있을 때가 더 근사하다니 웃기는 일이었지만 연오는 말없이 포크를 쥐었다.

케이크를 굳이 식판으로 옮겨 오고, 진짜 청승이다.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뭐라도 먹어야 태헌을 가이딩할 게 아닌가. 앞으로도 저녁은 항상 이 식판에 덜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하니 책상에 커다란 택배 박스가 올려져 있었다. 연오는 커터칼로 테이프를 깔끔하게 잘라냈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가이드들이 관심 어린 얼굴로 자신을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홍삼이네요?”

옆자리 가이드가 불쑥 말을 걸었다. 언젠가 정태헌 때문에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던 그 사람이었다.

“네.”

“하긴, 가이드님 보약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제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요?”

“조금?”

옆자리 가이드의 난감한 웃음을 보며 연오는 손으로 자기 얼굴을 쓸어 보았다. 피부가 좀 거칠어진 것 같기도 하고.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인지 잠을 깊게 못 자서인지 전반적으로 몸에 기운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하니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이러다 태헌의 새 가이드를 찾기도 전에 갑자기 잘못되면 큰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연오는 재빠르면서도 침착한 손길로 홍삼을 먹고 공진단까지 씹어 삼켰다. 쓰고 텁텁한 맛이 입에 남아 몇 번이나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런 다음 연오는 오늘의 일정을 잠깐 되새겨 보았다. 가장 중요한 건 열 시쯤 있을 태헌의 매칭률 측정이었다. 박이정이 소개해 준 많은 가이드 중 한 명이 시간 맞춰 측정실로 올 텐데,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 태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했다. 가이드가 오기 전에 자신이 나서서 조금이라도 가이딩을 해 주면 어떨까?

순간 어제 들은 태헌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키스로요, 가이드님. 매칭률 50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손잡고 하는 가이딩은 의미 없어서.’

오늘도 키스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키스가 아니라 섹스라 해도 태헌이 원한다면 해줘야겠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툭 건드리며 위협하던 태헌을 떠올리면 저절로 몸이 떨렸다.

손만으로도 충분하도록 가이딩 연습이라도 해 봐야겠다고 다짐한 연오는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몸 이곳저곳에 산발적으로 흩어진 에너지를 한데 모아 기다란 사슬처럼 이어지게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몇 바퀴 돌려 보았다. 어차피 진짜 가이딩은 아니니 힘들진 않았다.

아닌가, 아주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킁.”

콧물이 나는 것 같아 연오가 코를 훌쩍이며 휴지를 찾았다. 사무실 책상 저편으로 손을 뻗어 티슈를 한 장 뽑은 순간, 코 안에서 뭐가 터지기라도 한 듯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붉은 핏방울이 매끈한 책상에 후드득 쏟아지는 모습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선명했다.

“어.”

연오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젖히고 티슈로 코를 막았다. 고요한 소란에 연오를 힐끗 본 옆자리 가이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이드님, 피가…….”

조용하던 사무실에 파문 같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몰리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연오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마른 손가락이 허공을 쓰다듬듯 움직였다.

“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냥 코피일 뿐이다. 수차례 쓰러지기도 했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런데 쏟아지는 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수도꼭지라도 열린 듯 콸콸 쏟아지는 피 때문에 어지럼증이 닥쳤다. 연오가 티슈를 몇 장 더 뽑으려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그때.

쿵.

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며 머리가 책상에 부딪혔다. 주위의 가이드들이 낮게 비명을 질렀다. 연오는 제 어깨를 붙잡는 옆자리 가이드의 손과 괜찮으냐고 묻는 여러 목소리를 전부 느낄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콧구멍에서 줄줄 흐른 피가 책상에 둥글게 고였고 뺨과 머리카락에까지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연오는 눈을 느리게 깜빡, 깜빡, 하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태헌이 새 가이드 소개해줘야 하는데.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

매칭률 측정실에 앉아 있다가 강연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태헌은 잘됐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새 가이드와 ‘알아가는 시간’ 따위를 가지고 싶은 마음도 없던 차에 강연오가 쓰러졌으니 며칠은 자유라는 기쁨도 느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달갑잖은 매칭률 측정이 취소되었음에도 도무지 즐겁지가 않았다.

‘왜 쓰러진 거지?’

전날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자제한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무리하게 에너지를 빼앗은 것 같기도 했다.

한주연의 호출을 받고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던 것은 아마 그 찜찜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가면 강연오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본부장실까지 가는 길이 그리 귀찮지 않았다.

본부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에 앉은 한주연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다리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감싼 그녀는 지독하게 피로해 보였다. 태헌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그녀와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야, 정태헌.”

기다렸다는 듯 부르는 한주연의 음성이 한숨 같았다.

“넌 기억이랑 같이 뇌도 잃어버렸어? 연오 잘못되면 손해 보는 건 너야. 에스퍼면서 그것도 몰라?”

“제가 뭘 어쨌다고요.”

태헌이 애써 야멸차게 내뱉었다. 평정을 가장하는 태도에 욱한 한주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관리하는 에스퍼이자 나이 어린 후배를 보는 그녀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등신아, 관리지원실에서 연락 못 받았어? 연오 쓰러졌어.”

“알아요.”

“너랑 연오, 전날 매칭률 측정실에 있었잖아. 너 또 가이딩 세게 받았지.”

“에스퍼가 가이딩 받는 게 잘못이에요?”

“태헌아. 태헌아, 정태헌!”

한주연은 답답한지 발까지 쿵쿵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벌떡 일어난 그녀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소파 뒤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등받이를 짚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속 뻔히 들여다보이는 애새끼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 마. 내가 에스퍼들 속을 몰라? 너 평소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연오 신경 쓰여서 온 거 아니까 우리 제발 좀 솔직해지자.”

“…….”

“연오 가이드 수술받았어. 무리하게 가이딩하면 애 작살나는 거 너도 알 거야. 제발 살살 해. 이렇게 계속 쓰러지다가 연오 돌연사라도 하면 너 어쩔 거야?”

그 위협이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바닥에 쓰러진 연오, 눈을 뜨지 않는 연오, 자신을 보지 않는 연오. 갑자기 가슴이 죄어들며 숨이 막혔다. 억지로 크게 심호흡을 한 태헌은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떨쳐버리듯 되물었다.

“죽을 것 같은데 어쩌라고요.”

“……태헌아.”

태헌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한주연이 고요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정시키려는 시도였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태헌은 제 두 손을 세게 맞잡으며 토하듯 한마디 한마디 뱉어냈다.

“죽을 것 같아요. 씨발, 진짜, 진짜로 뒤질 것 같다고요. 폭주하면 기억은 뚝뚝 끊어지지, 가이딩 안 받을 때면 항상 숨이 모자라지, 누가 내 머릴 물속에 처박았다가 죽겠다 싶을 때쯤 다시 끌어올리는 느낌이에요. 근데 가이딩을 살살 해요? 물에 빠졌는데 구명 튜브 살살 잡으라고요?”

“정태헌, 나도 에스퍼야. 이해해. 근데 그거 참고 연오 좀 배려해야…….”

“어떻게 참아요, 숨 참고 살 수 있어요? 당장 내가 질식할 것 같은데 누굴 배려해요!”

“…….”

“그 와중에 유일한 가이드는, 씨발, 새 가이드 던져주고 도망갈 생각뿐이고.”

한주연의 표정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그녀 역시 에스퍼였으므로 지금 태헌의 상태가 어떤지 대강은 알았다. 그가 느낄 초조함과 두려움, 생명의 위협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또한 태헌이 감당하고 있을 기묘한 죄책감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녀 역시 혈기 왕성하던 젊은 시절에는 태헌과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하곤 했다. ‘에스퍼니까 그럴 수 있지’라는 합리화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자책 사이에서 자주 으깨졌다. 아마 지금의 태헌도 비슷할 것이다. 계속해서 연오를 다치게 한다면 아예 잘못된 길로 엇나갈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결벽증. 개 같은 무의식. 엿 같은 기억상실.’

기억을 잃을 거면 아예 싹 다 잊어버릴 것이지 이게 다 뭔가. 정신은 에스퍼로서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는 청소년의 그것인데 몸은 애인을 원하는 성인이라니.

한주연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태헌을 노려보는 눈이 매서웠다.

“너 오늘 만나기로 한 가이드 있었지. 그 사람 만나. 다음 사람도, 다음 사람도. 박이정이 괜찮은 애들로 줄을 세워 놨더라. 가이드 본부장도 적극적으로 찾고 있으니까 최대한 많은 가이드 만나고 아무한테나 다 가이딩 받아 봐.”

태헌이 숨 막히는 얼굴을 했다. 연오 외의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을 때마다 먹은 것 없이도 속을 게우고 통증까지 느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한주연은 그런 그를 배려할 수 없었다.

“진짜 네 손으로 연오 죽이기 전에 다른 가이드 찾아.”

태헌은 매칭률 측정이고 뭐고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다고 외치고 싶었다. 내가 원해서 에스퍼가 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차라리 강연오가 죽을 때까지 가이딩을 받은 후에 만성 가이딩 부족인지 뭔지에서 벗어나겠다고 우기고 싶었다.

그러나…….

“강연오, 저 때문에 쓰러진 거예요?”

키스하면서도 태헌이만 찾아대는 그 비리비리한 놈에게 관심 두고 싶지 않은데 왜 이런 걸 묻게 되는 것일까. 나 숨쉬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남의 숨을 걱정하는 것일까. 그게 강연오라서? 기억을 잃기 전에는 목숨까지 걸고 사랑했던 연인이라서?

아니, 아마 괴물이 되기 싫어서일 것이다. 덜덜 떨며 눈치를 보던 강연오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못내 끔찍해서일 것이다. 교과서와 필통이 든 가방을 메고 등교해 급식 시간만 기다리던 중학생이었는데 돌연 괴물이 되어버린 이 운명이 멍에처럼 무거워서일 것이다.

한주연이 그런 속내까지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태헌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다른 가이드 찾아. 되도록 빨리.”

“…….”

“오늘부터 결벽증이라는 소리 하지 마. 죽도록, 정말 죽도록 노력해 봐. 수백 번 토하고 아프고 쓰러져도 사람은 안 죽어. 에스퍼는 더더욱 안 죽고.”

“…….”

“너 S급 에스퍼잖아. 수술 후유증에 시달리는 가이드보다 의지가 약하다고 하진 않겠지.”

수술 후유증에 시달리는 가이드.

태헌은 노랗게 멍든 손목을 가리던 연오를 떠올렸다. 폭력을 잊지 못해 달달 떨면서도 가이딩 얘기만 하던 바보를. 안전 구역에서 연오를 사납게 휘두르고 밀쳐버렸던 자신의 모습도 눈앞에 그려보았다. 그때의 폭력을 잠시간 후회하고도 또 연오를 몰아세웠던 어제도, 통제되지 않는 심신과 마주칠 때마다 섬뜩하게 차오르는 공포도.

“알겠어요.”

태헌이 드물게 얌전히 대답했다. 강연오와 자기 자신 모두를 위해, 진작 이렇게 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언저리가 못 박힌 듯 화끈거렸다.

-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부터 날아왔다. 무슨 웅얼거림 같기도 했고 대화 같기도 했고 자장가 같기도 했다. 연오는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여러 개의 목소리를 어둠 속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든 채 부모님의 대화를 어렴풋하게 듣곤 하던 어린 시절 같았다.

아니, 아니다. 이건 태헌의 목소리다. 그는 우울증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연오를 위해 침대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다. 자기 어렸을 때 이야기, 학교 애들 이야기, 오늘 길거리에서 본 이상한 사람 이야기, 길고양이 이야기……. 그때의 연오는 그런 얘기를 몇 시간씩 들어야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지겹고 힘들지는 않았을까. 각성한 후에는 가이딩 부족 때문에 더 피곤했을 텐데 잠 못 드는 애인 때문에 새벽까지 혼자 재잘거려야 했다니 얼마나 지쳤을까. 그런데도 태헌은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더 힘들지 않게 다른 가이드를 많이 찾아야 할 텐데.

걱정과 동시에 연오의 시간이 현재로 돌아왔다. 부모의 무릎에 기댄 어린아이에서 태헌의 품에 안긴 우울증 환자로, 다시 후천적 가이드로. 놀라서 눈을 번쩍 뜨자 꿈을 헤매는 동안 외면했던 현실이 동공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강연오 가이드.”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 도르륵 눈을 굴렸다. 가이드 본부장인 김현철이 거구를 기울여 연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연오는 순간 곰을 본 줄 알고 헉 숨을 들이켰다. 다행히 연오의 입에서는 비명이 아니라 정확한 호칭이 튀어나왔다.

“본부장님?”

“드디어 깨어났네요.”

대답한 이는 김현철이 아니라 흰 가운을 걸친 의사였다. 연오는 그가 자신의 가이드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 아니고 너무 빨리 왔는데요. 가이드 수술한 지 두 달 정도 지났는데 벌써 오면 어떡해요.”

“……네?”

줄줄 이어진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연오를 위해 김현철이 나섰다.

“수술 부작용이라고 하네요. 면역 체계에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혹시 영양실조 진단받은 적 있어요?”

“아니요, 그런 적 없는데…….”

의사가 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휙휙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에 갑자기 쓰러져서 입원했을 때 영양실조 진단받은 걸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래요? 아, 그때.”

폭주 직전이라는 태헌을 가이딩하러 가다가 기절했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박이정이 쓰러진 자신을 병원으로 데려가서 잠깐 입원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안전 구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이정이 영양실조 진단을 받았으니 조심하라고 말했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한 번 있어요.”

“영양실조가 한 번, 두 번, 이렇게 셀 수 있는 줄 알아요? 아무튼 칩은 최대한 빨리 빼는 게 낫겠습니다.”

“빼다뇨?”

“교란된 면역 체계가 가이드 수술 때 이식한 칩을 감당 못 하고 있어요. 그걸 치명적인 세균으로 인식했다는 거죠. 수술한 지 반년도 안 지났으니까 지금이라도 칩 제거하면 일반인으로 돌아갈 수 있고, 후유증도 몇 년에 걸쳐 점점 사라질 겁니다.”

연오는 망연히 눈을 깜빡거리며 의사의 말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가이드 칩을 빼야 하는데, 수술한 지 얼마 안 되어 체질이 완전히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칩을 제거하면 일반인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연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차트에 뭔가를 분주하게 적고 있는 의사를 설득하기 위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아직은 안 돼요.”

“그럼 뭐 재수술이라도 받겠다는 거예요?”

“그게 가능하면 그렇게…….”

“강연오 가이드.”

김현철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연오의 어깨를 짚었다. 다정한 온기에는 단호한 만류의 뜻이 섞여 있었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어요.”

“아니에요. 본부장님, 저 태헌이 가이딩 마저 해야죠.”

“이제 강연오 가이드가 나설 필요 없어요.”

“네?”

연오의 입이 퐁 벌어졌다.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그새 태헌이 잘못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아니면, 아니면 설마……. 무언가를 짐작한 연오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기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데 흘러나온 목소리는 처참했다.

“태헌이 새 가이드 찾았어요?”

김현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순한 몸짓 하나가 연오의 심장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연오는 거대한 충격과 쓰라림, 달콤한 환희와 안도를 동시에 맛보는 모순적인 경험을 했다. 정말이냐며 반겨야 할지,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는 사이 김현철이 살갑게 격려했다.

“그동안 수고했어요, 강연오 가이드.”

연오는 김현철과 의사를 딱 한 번씩만 바라보았다. 곧 그의 시선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텅 빈 두 손이 이렇게 무력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마 다시는 태헌의 손을 잡을 수 없음을 잘 알아서일까.

간신히 쥐어짠 목소리가 듣기 싫게 갈라졌다.

“당장은 칩 그냥 둘게요. 나중에, 태헌이 완전히 괜찮아진 거 보고 재수술을 받든…… 칩을 제거하든…… 그때 결정할게요. 그래도 되죠?”

고개를 떨군 채 간절히 속삭이는 연오에게 김현철도 의사도 안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김현철이 격려의 의미로 마른 등을 몇 차례 쓸어주는 동안 연오는 이상한 설움과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제야 직시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가이드를 거부하는 태헌을 볼 때마다 느낀 저열한 안도감을. 계속 태헌의 옆에 남을 수 있다고 남몰래 기뻐했던 비겁함을. 태헌을 죽을 위기로 몰아넣고서도 그의 유일이 되고자 했던 이기심을.

자기 자신조차 몰랐던 유약함과 졸렬함이 강철로 된 손가락처럼 목을 졸라 왔다. 그날 밤 연오는 홀로 남은 자리에서 조금 헐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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