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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당신만은 (5/23)

4장. 당신만은

최인열. 25세 남성. 10세에 가이드로 각성 후 성인이 될 때까지 꾸준히 명상 훈련. 기질적으로 산만한 탓에 이범석처럼 뛰어난 가이드가 되지는 못했지만, 에너지의 양이 많고 체력이 좋아 낮은 등급의 에스퍼들은 제법 만족하는 편.

여기까지가 정태헌이 최인열에 대해 아는 정보였다. 이제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야 한다.

부작용 없이 자신을 가이딩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가이드.

“잘 되네요.”

태헌은 다소 떨떠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태헌의 손을 꼭 잡고 가이딩에 집중하던 최인열이 칭찬 고맙다는 듯 빙긋 웃었다.

“결벽증 소문이 자자해서 긴장했는데 잘 돼서 저도 기분 좋네요. 정태헌 에스퍼, 그동안 힘들었죠?”

“뭐…….”

태헌은 적당히 말을 흐렸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최인열의 가이딩은 기분 좋았다. 코 바로 아래서 찰랑거리던 물이 무릎 높이로 천천히 낮아졌다. 아니, 아닌가. 여전히 물속에 있는데 영혼이 몸을 떠나 자유를 얻은 듯도 했다.

온몸을 괴롭히던 고통이 누그러지자 짜증도 일부나마 가셨다. 누가 어깨만 건드려도 울컥 치솟던 분노 역시 몸이 편안해짐과 동시에 서서히 옅어졌다. 태헌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프지 않은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고통이 사라진 무감각 상태일 뿐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처럼 감격스러웠다.

몸이 늘 지금 같다면 강연오도 부드럽게 대할 수 있을 텐데.

강연오는 좋아하려나. 마침내 나한테서 해방돼서.

뜬금없이 치솟은 강연오 생각과 동시에 태헌이 손을 잡아 뺐다. 있지도 않은 연오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갑자기 위 어딘가가 바늘에 찔린 듯 아파 왔기 때문이었다.

“아.”

움칠하여 배를 감싼 태헌 때문에 가이딩이 중단되었다. 태헌은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이상하다, 분명 아까까지는 멀쩡히 가이딩이 되고 있었는데 왜…….

“괜찮아요?”

최인열이 조심스럽게 태헌의 어깨를 짚은 순간, 그는 고문관이라도 만난 듯 그 손을 쳐냈다. 허공에서 뿌리쳐진 손을 무안하게 들고 있던 최인열이 헛기침을 하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컵을 앞으로 쓱 밀어주었다.

“차 마저 마셔요.”

“시발, 머리 울리니까 잠깐만 닥쳐 봐요.”

“어서요. 한결 나아질 거예요.”

최인열이 그러거나 말거나 태헌은 징징 울리는 머리를 감당하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누가 뇌 속에서 꽹과리를 치고 있었다. 배 속이 차갑게 식으며 훅 식은땀이 솟았다. 오락가락하는 몸 상태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은 정말 참기가 어려웠다. 어찌나 힘들었는지 나불거리는 최인열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갈길 뻔했다.

다시 연오가 떠올랐다. 강연오, 비실비실하고 에너지가 부족해서 만족할 만큼 가이딩을 받은 건 딱 한 번뿐이지만 그와 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 적어도 가이딩 받는 동안에는 편안했고 이렇게 갑자기 몸이 이상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칙 소리가 났다.

한껏 예민해진 태헌이 번쩍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자마자 보인 것은 최인열이 자신 쪽으로 내밀고 있는 작은 스프레이였다. 코끝에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인지했다.

“무슨 지랄이야?”

성질대로 내뱉었는데 코를 킁킁거린 순간 갑자기 몸이 한결 나아졌다. 위경련이 온 듯 꼬이던 배가 가라앉고 칼끝처럼 뾰족한 신경도 안정을 찾았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변화에 태헌은 너무 기가 막혀 멍해지고 말았다.

스프레이를 내리며 최인열이 빙그레 웃었다.

“이상한 거 아니고 그냥 순한 방향제 같은 거예요. 만성 가이딩 부족인 에스퍼들은 감각이 예민해져서, 아플 때 후각을 자극하는 게 제일 좋거든요. 차도 그래서 마셔보라고 했는데.”

“…….”

“마셔요, 어서.”

태헌은 못 미더운 눈으로 최인열을 노려보면서도 컵을 들었다. 머그잔에 든 것은 신맛과 단맛이 고루 나는 따뜻한 레몬티였다. 아까 최인열이 오자마자 강권하기에 억지로 몇 모금 마셨는데, 그때보다 더 달고 시게 느껴졌다. 진한 레몬 향이 라벤더 향을 밀어냈다.

차를 몇 모금 마시고 잠시 기다리자 몸의 감각이 차차 둔해졌다. 오히려 가이딩을 받던 아까보다 더 나은 느낌이었다.

최인열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태헌의 손을 감쌌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다른 가이드들은 머리를 안 써요. 방향제나 차 같은 게 에스퍼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죠. 그저 에스퍼에게는 가이딩이 최고라고 믿나 봐요, 그렇지만도 않은데. 에스퍼도 사람이잖아요.”

그런가. 강연오는 머리를 안 썼던 건가. 이 웃기지도 않는 라벤더 방향제와 레몬티가 정말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건가. 아니면 최인열의 가이딩이 나와 잘 맞아서 이렇게 편안한 건가. 강연오의 가이딩은 항상 입술만 겨우 적시는 느낌이었는데 이 사람은 에너지도 많아서 이렇게 오랫동안 가이딩을 받을 수도 있고…….

아무렇게나 이어지던 생각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태헌은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려 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다음 새삼스럽게 최인열을 살폈다.

“얼굴 흉터는 뭐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최인열이 하하 웃었다. 그가 웃을 때 태헌의 몸으로 흘러오던 에너지도 흔들렸다.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사람 얼굴도 제대로 보고.”

태헌은 대답이나 하라고 최인열을 윽박지르는 대신 잠깐 기다릴 수 있었다. 아플 때는 상대의 대답이 조금만 늦어도 짜증스럽고 화가 치밀었는데 몸이 편안해지니 여유도 생겼다.

“왼쪽에 가로로 길게 난 거 말하는 거죠? 기억상실이라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이거 정태헌 에스퍼가 그은 건데.”

“……내가 사람 얼굴을 칼로 그었다고?”

태헌은 섬찟한 느낌에 바짝 굳었다. 폭주 중에 가이드를 함부로 휘두르는 것과 그 위에 올라타 얼굴을 그어 버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전자는 불가항력의 영역에 가깝고 후자는 악의에 가깝다.

태헌의 표정을 읽은 최인열이 재빠르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칼로 그은 게 아니라 사고였어요. 재작년쯤이었나, 제가 정태헌 에스퍼 부르느라 뒤에서 어깨 잡았더니 확 뿌리쳤거든요. 그때 이능이 사용됐나 봐요. 날카로운 공기 같은 게 슉 스치더니.”

최인열이 잠시 태헌의 손을 놓고 자기 흉터 위를 덧그렸다.

“이렇게, 된 거죠.”

태헌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요즘도 이능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기에 어떤 상태로 한 짓인지 바로 이해가 갔다. 아마 그때의 자신은 최인열의 손을 공격의 신호로 해석했을 것이다. 물에 빠진 채 버둥거리고 있는데 해초가 발목에 감기면 누구라도 그걸 상어 이빨로 착각하게 된다. 그 비슷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얼굴에 흉이 남을 정도로 공격했다니.

안전 구역에서 강연오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때 최인열이 태헌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때 충분히 사과했어요. 아픈 에스퍼 상대하는 가이드라면 이런 일 한두 번은 다 겪는 거고…… 그리고 본인도 놀랐는지 그날 집에도 안 가고 밤새 가이딩 기계 밑에 누워 있던데요.”

“기계?”

“이대로 집에 가면 사람 다치게 할 것 같다고. 부모님이랑 살아요?”

태헌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다치게 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 강연오라고 밝히기 싫어서가 아니라 잠깐 시야가 흐릿해져서였다. 눈앞에 필터가 생긴 것처럼 사물의 윤곽이 뿌옇게 뭉개졌다. 여러 번 눈을 깜빡여 봐도 시야가 원래대로 맑아지지 않았다.

태헌은 다시 차를 마셨다. 최인열이 태헌의 일렁이는 목울대와 질끈 감은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아니요.”

“아프면 솔직하게 얘기해요. 내가 가이드잖아요.”

머리가 멍했고, 이상하게 졸음이 밀려왔다. 아프지 않아서 그런가. 그래서 부족한 잠이 이렇게 쏟아지는 건가. 태헌은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저었지만 이상하게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차에 수면제라도 탔나.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보통의 수면제는 에스퍼에게 일말의 타격도 줄 수 없다.

“졸려요? 긴장 풀려서 그래요. 우리 진짜 잘 맞나 보다.”

“…….”

“S실로 옮겨서 가이딩해 줄까요? 누워 있기만 해요.”

태헌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 가이드와 S가이딩실로 들어가기가 꺼림칙했다.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냥……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막연한 거부감이 몽롱한 머리를 가득 채운 순간.

태헌이 잡힌 손을 거둬들였다.

“이제 됐어요.”

“하지만 좀 더…….”

“됐다고.”

잠시나마 다시 날카로워진 태헌의 기세에 최인열이 멈칫하고 물러났다. 가만히 앉은 그를 내버려 둔 채 태헌은 조금 비틀거리며 가이딩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혼자라도 S가이딩실로 가서 한숨 자야 할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떨리는 음성이 발목을 붙들었다.

“정태헌 에스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오가 서 있었다.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쓰러졌다더니 확실히 얼굴이 창백했고, 주저하다 다가오는 걸음도 외줄을 타는 듯 위태로웠다. 태헌은 드물게 시비를 걸지 않고 가만히 서서 기다려 주었다. 몸이 아프거나 숨이 막히지 않아서 참을성이 생긴 것인지, 연오의 상태가 나빠 보여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오가 태헌 앞에 섰다. 똑바로 서 있는데도 어쩐지 휘청거리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가이딩, 어땠나 싶어서.”

몸이 아플 때라면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쏘아붙였을 텐데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취제라도 맞은 듯한 몽롱함이 괜한 짜증도 성질도 죽여 주었다. 그래서 태헌은 멍하게 눈만 끔뻑거리며 대답을 고민했다. 지금 이 상태를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래, 이건 꼭…….

“죽은 것처럼 편안하네요.”

“네?”

“저 가이드랑 잘 맞나 봐요. 그런 건가?”

“……정태헌 에스퍼, 괜찮아요?”

연오가 태헌의 팔을 잡은 순간 태헌이 벌레라도 닿은 듯 그 손을 뿌리쳤다. 모르는 가이드가 어깨 좀 잡았다고 이능을 써 공격했다는 얘기가 섬뜩하게 귓가에 메아리쳤다. 최인열의 뺨에 길게 남은 흉터가 연오의 말간 얼굴에 잠깐 덧씌워졌다. 연오를 그보다 더 심하게 망가뜨린 적도 있는 주제에, 그런 상상을 하니 멍한 중에도 손에 땀이 찼다.

“씨발, 잡지 마요.”

동그래진 연오의 눈이 마음에 박혔다. 내가 사람을 공격할까 봐 그런다고 차분히 설명하고 싶은데 머리와 혀가 동시에 둔해졌는지 원하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편안하다기보다는 바보가 된 기분. 태헌이 위화감에 눈살을 찌푸린 순간 연오가 조금 물러났다.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연오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답답함과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태헌을 짓눌렀다.

“불쾌한 게 아니라…… 아무튼 잡지 마요.”

“네. 이제 가는 거죠?”

연오가 주저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처진 눈꼬리와 이상하리만치 침울한 입술이 신경 쓰였다. 몸은 괜찮으냐고 묻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라 태헌은 그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숨 좀 덜 막힌다고 남의 안부 물을 정신도 생기다니, 자신의 나약함이 징그러웠다. 그래도 물을 건 물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연 순간.

“왜요. 신나요?”

의도와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태헌이’도 아닌 나 버리고 갈 수 있어서?”

한심하게 뭐 이딴 말을 해.

태헌은 몽롱한 정신으로 돌아섰다.

너무 놀란 연오는 비틀거리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헌이 갑자기 빈정거려서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건 지금 태헌의 상태였다. 왜 저렇게 몸을 못 가누지. 방금은 눈빛도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었다.

‘가이딩 제대로 된 거 맞나?’

의구심과 함께,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태헌의 뒤를 따랐다. 일단은 태헌과 가까이 있으면서 그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만취하여 세상 고통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평화 상태에 있는 태헌이 어쩐지 무서웠다. 아무래도 상황을 살펴봐야…….

다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헌이 S가이딩실의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크기의 창으로 은은한 햇빛이 들이쳐 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였다. 박이정과 왔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아.”

태헌은 사막에서 헤매다 쉴 곳을 찾은 방랑자처럼 작은 탄식을 토했다. 여기까지 멀쩡히 걸어온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 비척거리며 침대로 간 그는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듯 눈을 꼭 감았다가 뜬 그가 어색하게 선 연오를 보고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뭐야.”

“…….”

“왜 따라왔어.”

그토록 바라던 태헌의 평온인데,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가이딩실에서 나온 후부터 계속 이상하던 태헌이 이제는 수면제를 먹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어서 와락 겁이 났다.

“잠깐만요, 정태헌 에스퍼. 제가 금방…… 일단 누구든 불러올게요.”

돌아선 연오가 문을 열자마자 다시 문이 쾅 닫혔다. 큰 소리에 놀라 태헌을 돌아보니 그는 아까와 똑같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가지 말아요.”

연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새 가이드와 아무 문제 없다고 들었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심지어 태헌은 ‘가지 말아요오’ 하며 아이처럼 말을 끌기까지 했다. 부탁하는 사람의 애교 섞인 어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연오가 느끼기엔 혀가 풀린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빨리 사람을 데려와야 할 것 같아 몇 번 더 문을 당겨 보았지만, 태헌이 이능을 쓰고 있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핸드폰을 꺼내는 동안 연오는 곧 쓰러질 환자라도 보듯 태헌 쪽을 힐끔거렸다.

한주연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고 김현철 본부장도 답이 없었다. 같이 회의라도 들어간 걸까, 아니면 출장? 연오는 묵묵부답인 이들에게 계속 전화를 거는 대신 관리지원실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 번호라 이쪽은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네, 관리지원실입니다.]

“안녕하세요. 가이드 강연오입니다. 지금 제가 담당한 정태헌 에스퍼 상태가 조금 이상해서요. 혹시 의료진 보내 주실 수 있나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설명해 주시면 조치하겠습니다.]

연오는 예기치 못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당황했다. 그는 거듭 태헌을 곁눈질하며 기이한 몽롱함을 표현할 단어를 생각해내려 했지만 모호하고 바보 같은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가이드님?]

참을성 있게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가 연오를 일깨웠다. 연오는 핸드폰을 꽉 쥐며 빠르게 속삭였다.

“정확히 설명하긴 어려운데 진찰이 필요할 것 같아요. 가이딩 받은 직후인데요, 눈에 초점도 없는 것 같고 말도 좀 어눌하고, 꼭 술 취한 사람처럼 보여요.”

술이 아니고 약 같기도 해요. 연오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태헌을 보며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아무래도 말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자마자 핸드폰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퍼가 고통스러워하나요?]

“아,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공황 상태거나 호흡곤란을 겪고 있나요?]

“아니요.”

[착시나 착란을 호소하진 않고요? 구토는요?]

“그런 건 전혀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연오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태헌의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핸드폰 너머의 잡음만 평화롭게 섞여들었다.

[확인해 보니 정태헌 에스퍼는 만성 가이딩 부족이네요. 이런 경우, 충분한 가이딩 후에 심한 졸음이나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명현현상(장기간에 걸쳐 악화된 병이 호전될 때 보이는 일시적 반응) 같은 거죠.]

“아, 네……. 근데 단순히 그런 느낌이 아닌 것 같아서요.”

우기는 것 같아서 민망했지만 그래도 연오의 어조는 제법 꿋꿋했다. 태헌이 잘못되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조금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보이는 게 훨씬 나았다.

잠깐 침묵하던 직원이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응대했다.

[그럼 일단 의료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위치가 어디세요?]

“여기가…… S1 가이딩실이에요. 감사합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통화가 끝난 후에도 연오는 잠시 제자리에 머물렀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자세 그대로, 핸드폰을 쥔 손은 축 늘어뜨린 채. 태헌에게 고정된 시선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연오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유도 없이 잠기는 목을 가다듬었다.

태헌에게 아무 문제가 없었으면 했다. 새 가이드에게 최상의 가이딩을 받아 일시적으로 컨디션이 나빠진 거라면 그거야말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연오는 마음 한구석의 어둠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었다. 만약 태헌이 그 가이드와 잘 맞지 않는 거라면, 여전히 자신이 태헌의 유일한 가이드라면.

연오는 자신 없는 걸음으로 잠든 태헌에게 다가갔다.

베개를 안다시피 하고 옆으로 누워 곤히 잠든 모습에서는 지난날의 폭력과 폭언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진 후였다. 그는 아주 어려 보였다, 그래, 정말 솜털 보송한 청소년처럼.

천진함과 잔인함, 과장에 가까운 강렬한 즐거움과 호기심, 오락가락 종잡을 수 없는 감정, 타자 집단에 관한 몰이해와 편견, 그로 인해 비롯된 악의와 충동성, 그러나 또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변화무쌍함. 성인이 되며 잊어버린 연오의 옛 시절 또한 태헌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다.

태헌을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본 게 언제였더라. 연오는 의료진을 요청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말끔한 태헌의 얼굴을 보며 한가한 감상에 잠겼다. 요즘에는 이런 감상도 사치였는데, 역시 사치는 마음의 축축한 부분을 보송보송하게 말려 주나 보다. 물에 젖은 듯 무겁던 속이 한결 가벼워졌다.

“태헌아. 괜찮아?”

연오는 속삭이듯 그리운 이름을 부르고 태헌의 머리카락을 살짝, 아주 살짝 건드려 보았다. 예전에는 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려 까치집처럼 만들곤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조심스러워졌을까. 연오는 잠든 태헌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망막에 새기듯 응시하고 또 응시했다.

‘기억을 잃어서 나쁜 일만 생긴 건 아니야. 내가 모르는 시절의 너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지금 이 모습이 열다섯 살의 태헌과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의 태헌은 가이딩이 부족한 에스퍼가 아니었을 테니 신경증이나 질병에 시달리지 않았을 테고,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했으리라. 지금과 그때가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태헌에게 붙박인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태헌아…….”

네가 깨어 있을 때는 부를 수 없는 이름.

태헌과 함께 어려지기라도 한 것일까. 어리광부리듯 그를 부른 연오가 침대 옆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태헌이 깨어날까 싶어 그의 손은 잡지도 못하고, 그와 최대한 가까운 곳에 이마를 묻는 연오 위로 먼지가 반짝거리며 떠다녔다.

‘네가 괜찮아야 할 텐데, 태헌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연오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관리지원실 직원과 들것을 든 의료진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화한 이가 연오임을 알아차린 직원이 먼저 연오에게 다가왔다.

“일단 정태헌 에스퍼는 병실로 옮겨서 검사할 거고요, 문제 있으면 바로 조치할 겁니다.”

“깊이 잠든 것 같은데…….”

태헌에게 접근해 눈을 뒤집어 본 의사가 고개만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각자가 서로의 말을 하느라 잔잔하게나마 소란스러워진 가이딩실에서 태헌은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잠깐 그쪽을 확인한 직원은 연오에게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제 있으면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태헌 에스퍼 담당 가이드님이시죠? 오늘 가이딩한 게 본인이세요?”

“아니요, 다른 분이에요.”

“그럼 최인열 가이드네요. 그쪽에도 연락할게요. 이만 가셔도 됩니다.”

엉겁결에 가이딩실 밖으로 나온 연오는 들것에 실려 가는 태헌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냥 가이딩 받고 노곤해져서 자는 건데 일을 너무 크게 만든 거면 어쩌나 싶었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있으니 유난스럽게 구는 편이 안전하겠지 싶었다.

정말 태헌만 만나러 왔던 연오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아무래도 기숙사로 돌아가 조금 자야 할 것 같아서였다. 사무실에서 갑자기 기절해 이번 주 내내 공식적으로 쉴 수 있게 되었으니 눈이라도 붙이고 싶었다.

겨우겨우 기숙사로 돌아오니 문 앞에 비닐봉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연오는 내용물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봉지를 안으로 가져왔다. 식탁에 올려놓고 안을 살피니 플라스틱 용기에 든 죽과 간단한 밑반찬, 짧은 쪽지가 보였다.

[문병 못 가서 미안해요. 또 밥 안 먹고 있을 것 같아서. 챙겨 먹어요.]

생일에도 한 번 봤던 박이정의 필체였다. 죽이 식은 걸 보니 퇴원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다 놓고 간 모양이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지금은 뭘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먹자.’

벌써 점심인데 먹은 거라곤 아침에 깨작거린 병원식이 전부였다. 영양실조니, 면역력이니 하는 문제가 더 생기지 않으려면 끼니를 걸러선 안 된다.

식욕이 사라지고 끼니를 거르는 것은 우울감의 영향이다. 연오는 경험이 준 교훈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며 마음을 다잡았다.

죽 그릇을 전자레인지에 집어넣은 다음 손 닿는 곳에 올려놓은 식판을 꺼냈다. 적당히 미지근하게 데워진 죽을 식판에 덜어내자 자르르한 윤기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확 올라와 입맛을 조금이나마 돋워 주었다. 잘게 다진 양파와 당근, 소고기가 밥알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걸 바라보던 연오는 후후 입김을 불어 죽을 식힌 후 입을 벌렸다.

한 숟갈, 두 숟갈, 식사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이어졌다. 양이 줄어서 한 번에 많이씩 먹을 수는 없었지만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니 심신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밥이 주는 위로를 알기에 과거의 태헌은 아침마다 반찬을 해놓고 갔던 걸까. 많이 아팠을 텐데 왜 그런 일까지…….

갑자기 태헌에게로 튀는 생각을 방해하듯 핸드폰이 울렸다. 박이정이나 태헌의 부모일 거라 예상한 연오는 화면에 표시된 낯선 번호를 보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전화를 받지 않고 머뭇거렸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잠잠해졌다. 잘못 건 전화였나 생각한 순간.

[저 정태헌 에스퍼 가이드 최인열이에요. 문자 보면 연락 주세요.]

연오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태헌의 새 가이드가 문자를 보내다니, 혹시 태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죽을 떠먹던 숟가락은 식판에 대강 걸쳐놓은 뒤였다.

딱 한 번의 신호 후 상대가 응답했다.

[여보세요. 강연오 가이드?]

정중한 인사를 준비했던 연오를 멈칫하게 할 정도로 날카롭고 매서운 음성이었다. 곧바로 돌아오지 않는 응답이 답답했는지 최인열이 좀 더 크게 외쳤다.

[여보세요. 안 들려요?]

“아뇨, 들립니다.”

가까스로 답하자마자 한숨이 건너왔다. 밥 먹다가 난데없는 전화를 받게 된 연오 입장에서는 참으로 뜬금없는 탄식이었다.

[가이드님이 정태헌 에스퍼 병원 보냈어요?]

“네, 가이딩 받은 직후에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뭐가 안 좋아 보였는데요?]

“꼭 수면제 먹은 것처럼…….”

[하.]

상대의 헛웃음에 연오는 아차 싶었다. 허겁지겁 말을 덧붙이는 연오의 얼굴이 창백했다.

“가이드님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명현현상일 수 있는 거 알지만 정태헌 에스퍼 상태가 워낙 불안정하다 보니 만일에 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기분 상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일단 알겠는데 좀 기분 나쁘긴 하네요, 최선을 다해서 가이딩했더니 다른 가이드가 이상한 가이딩 받은 것 같다면서 신고하고.]

“이상한 가이딩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일단 내일 만나서 얘기해요. 어차피 할 말도 있고, 제가 내일 강연오 가이드 사무실로 찾아가겠습니다. 이만 끊을게요.]

연오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황당한 얼굴로 통화 종료 창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얻어맞았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체력이 약해지니 이만한 자극에도 이렇게 심장이 아픈 건가 싶어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눌러 보기도 했다.

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은 연오는 식어가는 죽을 억지로 한 숟갈 더 떠먹었다. 그러나 한입 삼키자마자 곧바로 속이 뒤집혀서 남은 죽은 전부 개수대에 부어 버려야 했다. 느릿느릿 쏟아지는 되직한 죽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자신의 시간도 전부 내일이 아닌 컴컴한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 버렸으면 싶었다.

-

“씨발, 되지도 않는 게 왜 설쳐.”

최인열은 핸드폰을 내던지며 거칠게 욕을 지껄였다. 핸드폰은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 옆으로 떨어졌다.

“왜…… 왜 그래, 인열아?”

초췌한 남자는 마른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누구와 통화했는지 보려는 듯 엄지를 움직인 순간, 최인열이 핸드폰을 낚아챘다.

“알아서 뭐 하게.”

“새로 가, 가이딩하게 됐다는 그 사람 얘기 아니야? 내가 도와줄 일…… 일 있을까 싶어서 그렇지.”

“하.”

최인열은 코웃음을 치며 핸드폰을 반대편으로 툭 던졌다. 그런 다음 남자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미 없이 켜져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노려보던 인열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네가 준 약, 부작용도 없고 병원에서 검사해도 안 걸린댔지?”

“으응, 응.”

“그거면 됐어. 네가 할 일은 약 안 떨어지게 하는 게 다야.”

“그, 근데 그게 가이딩을 해결하진 못할 텐데…….”

순간 최인열의 눈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말 더듬는 것도 짜증 나는데 답답한 소리나 하고.

“너 머리 나빠?”

“……응?”

모욕적인 말을 들었는데도 남자는 비위를 맞추듯 실실 웃을 뿐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그가 슬그머니 최인열의 손을 잡았지만 곧 날카롭게 뿌리쳐졌다.

“정태헌은 가이드 결벽증이었어. 기억 잃고 나서는 다른 가이드랑도 매칭률 높아졌으니 이제 결벽증은 아닌 셈이야.”

“그…… 그래도 아직 에너지를 못 받아들인다며.”

“적응하는 과정이겠지. 가끔 결벽증 아니어도 가이딩 에너지 흡수 못 하는 에스퍼 있잖아. 일단은 진통제로 거부 반응을 눌러 놓고 에너지를 들이붓다 보면, 매칭률도 더 높아지고 내 에너지에 적응해서 괜찮을 거야. 너도 그렇게 해결했잖아.”

“으응……. 그랬지.”

남자, 최인열의 에스퍼가 모호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앉았다. 손을 잡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만의 생각에 잠겨 있어서인지, 인열은 아까처럼 거부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용기를 얻은 에스퍼가 몇 마디 보탰다.

“그런데 가이딩 에, 에너지가 들어가면 충전이 안, 안 되는 거거든. 가이딩 다 한 척하면 위험하지 않을까? 갑자기 균열에 가게 되거나 그러면, 포, 포, 폭주할지도……. 차라리 정태헌 에스퍼한테 미리 말이라도 하는 게…….”

“아, 이 등신.”

최인열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주체하기 어려운 짜증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 써서 거부 반응 눌러 놓고 가이딩하는 게 합법이겠어? 인권이나 운운할 테니까 당연히 몰래 해야지. 게다가 요즘 균열 잠깐 잠잠해졌으니 당분간은 괜찮아. 균열도 많이 열리는 시기가 있고 안 열리는 시기가 있잖아.”

“그, 그런 방법이 있으면 센터가 진작…… 진작 하지 않았을까?”

“대가리들이 무능하니까.”

최인열은 남자와의 대화 도중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킬킬거리는 그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센터장은 정치인들한테 로비하느라 바쁘고, 본부장들은 일 많다고 뭐든 대충이고. 폭주했던 S급 에스퍼를 비리비리한 가이드한테 붙여 둔 것만 봐도 뻔하지. 다들 균열만 닫으면 됐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는 거야. 안일한 새끼들.”

태헌 앞에서 보인 나긋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쉼 없이 욕을 쏟아내는 최인열에게 익숙해진 그의 에스퍼는 바보처럼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마, 맞아. 네 말이 맞아, 인열아.”

최인열은 새삼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에스퍼를 바라보았다.

연구실에 소속된 A급 에스퍼. 대인기피증이라 가이딩 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해 고생하는 걸 약과 언변으로 어르고 달래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 놓았다. 너한테만 가이딩 받겠다며, 각인하고 싶다며 귀찮게 매달릴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에너지의 질이 좋지 않아 B급 에스퍼만 가이딩하던 인열에게는, 아직 귀중한 A급 에스퍼였다. 게다가 그는 정태헌에게 사용할 마약성 진통제를 계속 가져다줄 수 있는 공급원이기도 했다.

이쯤 되었으면 한번 달래 줘야지.

“준성아. 정태헌 에스퍼가 걱정돼?”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정태헌 에스퍼가 너 패기도 했잖아. 그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얼마 전에, 준성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태헌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가이드 추행 때문에 징계를 받은 상태에서 얻어맞기까지 해 준성은 큰 충격을 받았다. 등신 같은 새끼가 가이드 추행에 맞고 다니기까지,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도 최인열은 그를 잘 위로해 주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준성이 S급 에스퍼 정태헌을 손에 넣을 발판이었기 때문에.

가이드에게는 등급이 없다. 어떤 에스퍼를 맡을 수 있느냐에 따라 계급이 정해진다. 아무도 대놓고 ‘계급’이라고 말하진 않지만, 최인열은 현실을 잘 알았다. 높은 등급의 에스퍼를 가이딩 할 수 있는 가이드는 고액의 생명 수당을 따로 받기까지 했다.

불안정한 상태의 S급 에스퍼, 정태헌.

그는 최인열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사다리였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사다리. 게다가 얼굴에 금까지 그어 놨으니 이 정도는 받아내도 되지 않겠는가. 진짜 위험한 상태일 때는 다른 가이드에게 떠넘기고.

“인열아, 약속한 거 안 이, 잊었지?”

“…….”

“정태헌 에스퍼 완전히 맡게 되면, 나, 나도 가이딩 많이 해 준다고 했잖아.”

최인열이 만들어낸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정태헌을 가지면 이런 찌질한 새끼와도 안녕이다.

“당연하지. 항상 네가 우선이야.”

준성이 기쁜 듯 최인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앉은키도 더 큰 게 이렇게 기대 오니 짜증이 났지만, 최인열은 애써 나른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준성은 또 눈치 없이 불길한 소리를 해 댔다.

“그런데…… 저, 정말 괜찮을까? 정태헌 에스퍼 다른 가이드도 있다며. 뭔가 이상한 걸 알, 알아차리면 어떡해.”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

최인열은 한쪽에 던져둔 핸드폰을 힐끗 바라보았다. 몇 마디 몰아세웠더니 계속 죄송하다고 쩔쩔매던, 앳된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완전 어린애야. 한 입 거리도 안 돼.”

-

다음 날 아침, 연오는 아홉 시 정각에 사무실로 출근했다.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는 가이드들의 눈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가이드님, 오늘 안 오는 날이잖아요? 일주일 병가라던데.”

자리에 앉자마자 옆자리 가이드가 속삭이듯 물었다. 복잡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연오는 애써 웃었다.

“누가 찾아온다고 해서요. 그 사람만 만나고 가려고요.”

“다음에 오라고 하시지.”

“그건 좀……. 그쪽도 오늘 만나고 싶어 했고.”

“도대체 누가 코피 쏟으며 쓰러진 사람을 당장 만나고 싶다고…….”

의문에 답이라도 주듯 문이 열렸다. 연오가 마지막으로 출근했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고, 옆자리 가이드는 알 만하다는 듯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 못마땅한 표정을 목격한 연오는 어쩐지 더 불안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데없는 손님은 사무실을 가로질러 연오 옆에 도착했다. 보기 좋게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다소 쌀쌀맞게 치켜 올라간 외꺼풀 눈, 콧잔등에 금모래처럼 박힌 주근깨가 차례로 연오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왼쪽 뺨에 가로로 길게 새겨진 흉터였다. 꽤 깊은 흉터라 그 부분만 어둡게 보였다.

“강연오 가이드.”

목소리는 통화할 때 들은 것과 똑같았다. 연오가 간단히 대답하며 일어난 순간, 옆자리 가이드가 고개를 내밀고 툭 끼어들었다.

“최인열 가이드, 지금 강연오 가이드 좀 아파요. 며칠 전에 코피 나서 실려 간 거 못 들었어요? 소문 다 났던데.”

“남 일에 참견하는 건 여전하네요.”

지나칠 정도로 뾰족한 대화가 오가자 사무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분위기가 흐려지기 전에 최인열이 연오에게 까딱 고갯짓을 했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가이드님.”

연오도 구경꾼의 시선에 노출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옆자리 가이드가 작게 덧붙였다.

“등급 높은 에스퍼만 골라서 가이딩하는 사람이에요. 뭐라고 하든 너무 귀담아듣지 마요.”

멈칫한 연오는 조언에 대한 성의 표시로 짧은 눈인사를 건넸다. 최인열은 사무실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층에 있는 빈 회의실로 향했다. 연오가 약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의자에 앉는 동안 최인열이 문을 닫았다. 무거운 문을 끝까지 밀어 닫은 그는 책상에 허벅지를 기대고 서서 팔짱을 꼈다.

“최인열이라고 해요. 아시겠지만 정태헌 에스퍼의 새로운 가이드고요.”

“네.”

“어젠 왜 관리지원실에 전화한 거예요? 결국 아무 문제 없었잖아요.”

연오는 한숨을 참으며 어젯밤에 받은 문자를 떠올렸다. 태헌의 몸에 아무 문제도 없음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 안도했던 순간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제가 보기엔 조금 이상해서요. 그래도 괜찮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가이드님, 이게 그렇게 넘어갈 문제예요? 남이 가이딩 잘못한 것 같다고 신고해 놓고 문제없었으니 끝이다?”

“신고라니…….”

연오는 당황해서 눈만 빠르게 깜빡거렸다. 자신은 그저 태헌이 걱정되어서, 그래서. 그러나 한껏 불쾌한 낯을 하고 있는 최인열을 보니 일이 생각보다 커진 것 같은 낭패감이 밀려왔다. 최인열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냥 생각이 짧았던 거 맞아요? 정태헌 에스퍼 옆에서 저 떼어내려고 한 거 아니고요?”

너무 기막힌 소리라 연오는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되묻지도 못했다.

물론 다른 가이드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는 태헌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리고 섭섭하기는 했다. 자신이 태헌의 유일일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맹세코 최인열을 태헌으로부터 ‘떼어내려고’ 한 건 아니었다. 태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 없지 않은가.

연오는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최인열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서서 의심스러운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떼어내려고 한 적 없습니다. 제가 가이드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에스퍼 명현현상을 처음 봤어요. 그래서 그랬던 거고, 오히려 최인열 가이드가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해 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S급 에스퍼 독점하고 싶어서 신고한 거 아니고요?”

이야기를 좋게 이어가려 하는데 자꾸 날 선 반응이 돌아오니 자꾸만 말을 주저하게 되었다. 연오의 침묵을 나름대로 해석한 최인열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이해해요. 에스퍼들은 등급이라도 있지, 우린 그런 거 없잖아요. 가이딩 가능한 에스퍼에 따라 그때그때 급이 달라지니까. 정태헌 에스퍼가 예전부터 불안정한 시한폭탄으로 소문났지만 그래도 S급이고, 그런 사람 차지하면 가이드 위치도 달라지고, 급여도 다르고.”

줄줄 쏟아지는 말이 불가사의보다 난해했다. 연오는 ‘가이딩 가능한 에스퍼에 따라 달라지는 지위’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정태헌의 안녕과 평화에만 신경 쓰는 연오로서는 지위 따위야 어떻게 되든 좋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미 연오를 ‘S급 에스퍼를 독점해 팔자 펴려는 속물’로 인지한 모양이었다. 요즘 속물이라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는 생각이 연오의 속을 쓰리게 했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오해를 뒤집어쓸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오히려 정태헌 에스퍼가 되도록 많은 가이드와 연결되었으면 하는데요. 사적으로 찾은 가이드들 정태헌 에스퍼한테 소개해 주기도 했어요.”

최인열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다듬어진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둘이 아주 각별한가 봐요.”

“……예전에는요. 지금은 그냥 정태헌 에스퍼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힘든 내색을 감추며 담담히 대답하자 최인열도 잠시 주춤했다. 연오에게 돈이라도 뜯긴 듯 예민하게 굴던 그는 처음으로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깔며 곤란한 내색을 했다. 우아한 얼굴에 스친 감정이 난감함이라고, 연오는 믿고 싶었다.

“저 모함했다는 건 제 착각이었네요. 무례하게 물어봐서 죄송해요.”

최인열의 사과는 뜻밖에도 담백하고 깔끔했다. 연오가 괜찮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의자를 뺀 그가 거기 털썩 주저앉았다. 자세를 느슨하게 바꾼 그의 입술에서 재잘재잘 불만이 흘러나왔다.

“제가 좀 예민해졌어요. 가이드들이 하도 S급이랑 각인하고 싶어서 난리를 치다 보니, 막 남 모함하고 그러기도 하거든요. 가이딩 이상하게 한다고.”

“……그런가요?”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으면 모르실 거예요. 가이드님 옆자리 앉은 그 사람 있죠? 전에 A급 에스퍼 가이딩 저한테 뺏겨서 괜히 틱틱거리는 거예요. 그런 가이드 얼마나 많은데요.”

“네, 알겠습니다.”

복잡한 과거사나 남의 험담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을 짤막하게 표현하자 최인열도 그쯤에서 말을 그쳤다. 대신 앉은 채로 손을 쑥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입가에는 사람 좋은 미소를 걸고서.

“어쨌든 말 많고 탈 많은 정태헌 가이딩하는 동지잖아요. 우리 잘해 봐요. 내가 선배니까 많이 물어보고.”

연오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최인열과 악수를 나눴다. 말마따나 ‘동지’처럼 손을 맞잡고 있는데 괜히 찜찜했다.

이 사람 말고 박이정이 소개해 준 박다현이나 이범석이 낫지 않았을까? 이유도 모르는 채로 잠깐 그런 아쉬움이 일었다.

그때 연오의 가이드 단말기 화면이 밝아졌다. 책상에 올려놓았던지라 최인열도 화면을 볼 수 있었다. 단말기 불빛이 두 쌍의 눈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가이딩 요청: 12층 S5 가이딩실

대상 에스퍼: 정태헌(S급)]

쉬는 날로 되어 있을 텐데 가이딩 요청 알림을 보내다니, 관리지원실에서 뭔가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센터로 들어올 때 출입증을 찍어 출근으로 처리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태헌의 가이딩을 거절할 생각이 없는 연오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잠깐만요, 가이드님.”

최인열이 연오를 붙들었다. 그런 다음 분주하게 자기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 때문에요. 네, 지금 강연오 가이드랑 같이 있는데 아파 보여서요. 제가 대신 가이딩하는 게 어떨까요?”

잠시 건너편의 안내를 듣고 있던 최인열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정태헌 에스퍼 지정이에요?”

본능과도 같은 반가움이 연오의 마음을 부풀렸다. 몸은 너덜너덜해져 가는데 태헌이 자신을 찾았다는 말이 이다지도 반갑다니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지만, 좋은 마음까지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최인열의 바늘 같은 목소리가 연오의 부푼 가슴을 톡 찔러 터뜨렸다.

“그래도 가이드님 입원까지 했었는데 좀 그렇잖아요. 가능하면 저로 바꿔 주세요.”

“최인열 가이드, 전 괜찮…….”

“네, 감사합니다.”

연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최인열이 통화를 끝냈다. 몇 초 지나기도 전에 연오의 단말기에서 가이딩 요청 알림이 사라졌고, 대신 최인열의 단말기가 울렸다. 내용을 확인한 최인열이 짐짓 걱정스러운 듯 웃으며 연오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프다면서요, 코피까지 쏟고. 저한테 맡겨요.”

산뜻하게 속삭인 최인열이 경쾌한 몸짓으로 등을 돌렸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나가는 그를, 연오는 붙잡을 수 없었다. 어쩐지 발밑이 쑥 꺼진 듯 불안하고 식은땀이 났다.

-

태헌은 이제 오래된 악우(惡友)처럼 느껴지는 몸뚱이의 감각을 곱씹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가이딩실에 혼자 앉은 그는 천적의 송곳니에 당해 제 굴로 숨어든 맹수처럼 고통스럽고 불안해 보였다. 최인열에게 가이딩을 받은 이후 신체적 고통은 상당히 많이 가셨는데 왜 이렇게 초조한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가이딩, 아무래도 가이딩이 좀 마음에 걸렸다. 최인열에게 받은 가이딩은 나쁘지 않았지만 눈을 떴더니 병실이었고, 도저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자신이 왜 입원해 있느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입원 전에 강연오와 가이딩실에 들어간 것 같기도 한데 꿈을 꾼 것처럼 기억이 명확하질 않았다. 기억 정리를 포기한 후 택시에 몸을 구겨 넣고 겨우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음 날 아침까지 시체처럼 자고 말았다.

연오에게 가이딩을 받았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폭주 직후 연오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긁어냈을 때는 일시적으로 개운함이나 고양감마저 느꼈는데. 물론 안전 구역에서의 가이딩이 정상적인 가이딩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게 제대로 된 가이딩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억을 잃은 상황이 답답해 이까지 갈렸다. 머리통이 온전했다면 이렇게 혼란스러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최인열의 가이딩보다 강연오의 가이딩이 나았다는 확신도 가질 수 있었을 테고.

‘진짜 네 손으로 연오 죽이기 전에 다른 가이드 찾아.’

태헌은 한주연의 목소리가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주연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고 또 그녀의 말에 동의했으면서, 또 연오와 그의 가이딩을 생각하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처음 봤을 때는 그토록 미워했는데, 그토록 탓했는데. 가만히 있어도 꼬이는 내장과 지끈거리는 머리, 차오르는 숨, 어디 하나 정상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지가 원망할 이를 찾으라고 부르짖기에 주저 없이 강연오를 골랐는데. 너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된 거냐고, 멀쩡하던 내 삶을 돌려내라고 쉽게도 윽박질렀는데.

태헌이 느끼기에 그때는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숨이 막혔고 자다가도 벌떡벌떡 깰 정도로 아팠으므로 누구라도 원망하고 상처입히고 갈기갈기 찢어버려야 했다.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강연오는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다.

불행한 이는 자신보다 더 불행한 이를 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태헌은 본능적으로 연오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가 상처 입으면 숨이 좀 쉬어지며 자신의 고통을 간신히 견딜 수 있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강연오라고? 최인열의 가이딩을 받아 통증이 좀 가셔서 살 만해지니 ‘사실 강연오한테 그렇게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라고? 그건 나쁜 인간도 아니고 약한 인간이다. 사악함보다 나약함을 더욱 경멸하는 치기가 치밀어올랐다.

“등신.”

자조적인 욕을 읊조린 태헌은 핸드폰을 들어 센터 어플을 켰다. 강연오를 죽이기 전에 다른 가이드를 찾으라던 한주연의 말을 되새기며 지정 가이드를 변경하려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동작을 마치기도 전에 가이딩실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에스퍼님.”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사뿐히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최인열이었다. 그의 두 손에는 오늘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가 들려 있었다. 자몽 향기가 훅 풍겨왔다.

“뭐예요. 저 안 반가워요?”

최인열이 장난스럽게 물으며 태헌의 굳은 얼굴을 타박했다.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태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무응답에도 최인열은 꿋꿋했다.

“강연오 가이드 지정했죠? 제가 대신 왔어요.”

“왜요?”

어차피 최인열을 부를 생각이었으니 그러려니 넘어가면 되는 일인데, 괜한 질문이었다. 태헌이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사이 최인열은 머그 하나를 태헌 쪽으로 쓱 밀어주었다. 대답은 피어오르는 김처럼 보드레했다.

“음, 오늘은 하기 싫다고 저한테 부탁하던데.”

“…….”

“이제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 그만하고 싶대요.”

최인열을 담은 태헌의 눈이 맑은 잉크처럼 깊어졌다. 그는 ‘이제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하기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연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너무 상상이 안 되는 꼴이라 입꼬리가 저절로 비틀렸다. 최인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태헌의 얼굴이 더없이 살벌했다.

“씹새끼야, 너 왜 이간질해.”

태헌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요란한 소리가 최인열을 향해 튀어 올랐다.

“대답 안 해?”

최인열을 빤히 보는 태헌의 눈은 유리알처럼 매끈하고 무기질적이었다. 최인열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까만 눈동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따끈한 머그를 두 손으로 감싸 잠시 시간을 번 그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간질이라뇨. 사실을 전한 건데요.”

태헌은 가이딩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대신 단단히 팔짱을 끼고 최인열을 위아래로 훑었다. 머리가 조금 멍하기는 했지만 참과 거짓을 구분할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그가 보기에 지금 최인열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유는 모른다. 이제부터 알아보는 수밖에.

“강연오는 나 가이딩하다가 죽으면 죽었지 날 거절하진 않아.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도 가이딩 받고 싶냐고 물어보던 사람이야. 그런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너한테 가이딩하기 싫다는 소리를 했다고?”

말을 하면 할수록 기가 찼다. 소매를 끌어 내려 손목의 멍을 감추고 떨리는 손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으며 애써 웃어 보이던, 멍청하고 말간 얼굴이 떠올라 감정이 요동쳤다. 눈앞의 이 새끼는 누굴 모함하려는 것인가.

“개소리를 하려면 조사를 잘 해야지. 강연오랑 내 얘기 10분만 해 봤으면 다른 거짓말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알았을 거예요, 가이드님.”

테이블에 있던 최인열의 손이 둥글게 말렸다. 태헌은 당황하여 말까지 잃은 우둔한 가이드를 직시하며 그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할까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이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최인열이 왜 강연오를 음해했는지 알아야 나중에 어떻게 대처할지…….

태헌의 생각이 잠시 끊어졌다. 대처? 무슨 대처? 언제든 고통이 도질 수 있는 상황에서 남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고?

침묵이 깊어진 사이 최인열이 꽉 쥐었던 주먹을 풀어냈다. 입술을 꾹 깨무는 얼굴에 약간의 낭패감이 스치듯 지나갔다. 다음 순간 그가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후, 한숨을 내쉬었다.

“생사람 잡지 마요. 내가 좀 오해해서 전달했을 순 있지만 이간질 소리 들을 짓은 안 했어요.”

“그래요? 그럼 내가 지금 강연오한테 전화해 봐도 되겠네.”

당황할 것이라 예상한 최인열은 오히려 낮게 웃었다.

“번호는 있고요?”

“…….”

“내가 강연오 가이드랑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언뜻 보기에도 둘이 별로 안 친한 것 같던데. 전화할 거면 해 봐도 돼요.”

최인열은 정말 괜찮다는 듯 테이블에 있는 태헌의 핸드폰을 쓱 밀어 주기까지 했다. 못 할 것을 알고 있기에 가장할 수 있는 여유였다.

그 같잖은 꼴을 본 태헌은 낮게 욕을 지껄이며 다음에 강연오를 만나면 반드시 번호를 받아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에 번호를 지우겠다고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번호는 그대로 두라고 했던 강연오가 떠오르며 약간의 후회가 포말처럼 일어났다.

“꺼져.”

태헌은 낚아채듯 핸드폰을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인열은 일어나지도, 움직이는 태헌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물었다.

“가이딩은요?”

“배고프다고 썩은 음식 먹는 사람도 있어?”

신랄한 비아냥에 최인열이 뒤늦게 시선을 틀었다. 태헌의 단단하고 고집 있는 뒷모습에서 약점을 읽어내기 위해서였다. 딱 하나의 단서,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보인다면 곧바로 낚아챌 작정이었다.

“강연오는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해.”

최인열의 입가에 은은한 희열이 번졌다. 강연오. 정태헌의 실마리는 강연오다.

“그 가이드님 요즘 많이 아픈 것 같던데.”

태헌의 걸음이 뚝 멎었다. 문고리에까지 올린 손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최인열은 초조한 내색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빈 맞은편 자리를 응시했다. 태헌이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상 주도권은 그에게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전 구역에서 지독하게 휘둘러서 가이딩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만 하고 나면 강연오 가이드 얼굴이 안 좋아진다는 말도 있고, 얼마 전에 코피 엄청나게 쏟아서 쓰러진 것도 가이딩 때문이라고 하고…….”

정말 죽을 것 같다고 속삭이던 연오의 음성이 태헌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자신을 짓뭉갠 에스퍼를 밀어내려 흐늘거리던 창백한 손도 다시 가슴께에 닿아 온 듯했다.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모양의 손의 환영이 언뜻 보였다가 휙 사라졌다. 환시와 환청, 전형적인 가이딩 부족의 신호였다.

“심한 말도 많이 했죠? 가이딩 부족한 에스퍼들 하는 짓이야 뻔하지.”

“하려는 말이 뭐야.”

태헌이 사납게 짓씹어 뱉었다. 그가 그럴수록 최인열은 더욱 느긋해졌다.

“강연오 가이드가 얼마나 헌신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함부로 대하는 사람한테 끝까지 끌려다닐 머저리일까요?”

“…….”

“강연오 가이드는 정말 이 가이딩 그만두고 싶어 했어요. 번호 없으면 나중에 직접 얼굴 맞대고 물어봐요. 내가 거짓말을 했나, 안 했나.”

“…….”

“둘이 가까웠냐고 물어봤더니, 다 옛날 일이라던데.”

태헌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서서히 씻겨나갔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연오에게 해온 말과 행동이 뱀처럼 목을 감쌌다. 아프고 힘들다는 핑계로 가장 만만한 사람을 점찍어 화풀이해온 시간은 몹시도 서늘했다.

“강연오 가이드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 말이 못처럼 태헌의 두 발등에 박혔다. 태헌은 정말로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본인이 싫다는데 그냥 놔줘요. 오죽 시달렸으면 귀한 S급 에스퍼 가이딩을 그만두겠다고 했겠어요. 돈도 명예도 필요 없다 이거죠.”

태헌은 갑자기 미친 듯이 고동치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강연오 따위 인생에서 꺼져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고작해야 몇 달 전인데, 자신을 놓는 연오를 상상하자 숨이 턱 막혔다. 이 역시 무의식의 반응일까. 도대체 이 빌어먹을 무의식은 강연오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갑자기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가 연오를 찾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정말 다른 가이드가 나타나자마자 나를 내버린 것이냐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할 것이다, 태헌은 그렇게 믿었다. 강연오가 이 모든 말이 모함이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그대로 그를 안고 가이딩을 받고 싶었다. 그가 제 품에서 죽을 때까지.

“하긴, 죽을 뻔했다는데 돈이나 명예가 대수겠어요.”

직전의 욕망과 최인열의 말이 새빨간 선으로 이어졌다. 태헌은 멍하게 서서 자기 자신을 곱씹었다.

강연오가 죽을 때까지 가이딩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 아프기 싫어서? 그를 죽이고 자신은 자유로워지려고?

눈가로 열기가 바글바글 모여들며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잠시 잠들어 있던 통증이 검은 연기처럼 스멀스멀 밀려와 온몸을 찢어 버렸다. 기이한 환상이 눈앞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죽은 강연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듯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강연오. 강연오. 강연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런 환상에 시달렸던 듯한 느낌이…….

“에스퍼님.”

“씨발, 놔!”

갑자기 어깨에 닿아온 손을 힘껏 뿌리쳤다. 상어 이빨에라도 물린 듯 본능처럼 이능이 솟구쳤다. 파편처럼 하얗고 날카로운 힘이 최인열의 머리를 휙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폴거리며 바닥에 떨어지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태헌은 멍하게 지켜보았다.

최인열은 멀쩡했다.

그러나 방금 자신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이 최인열이 아니라 연오였다면?

허공에 뿌리쳐진 손을 거둔 최인열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똑같은 에스퍼에게 두 번이나 공격당한 사람답지 않은 침착한 태도가 이질적이었다.

“이제 강연오 가이드 그만 괴롭혀요.”

“…….”

“정말로 시체 치우기 전에.”

태헌이 눈을 내리감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짖어대던 에스퍼가 조용해지자 최인열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일단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생각해 봐요.”

최인열은 태헌을 잡아끄는 대신 혼자 테이블로 돌아갔다. 개처럼 질질 끌어오지 않아도 태헌은 오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태헌의 컵을 살살 흔들어 가라앉은 자몽과 시럽을 부드럽게 푸는 최인열의 몸짓은 더없이 침착했다.

-

연오는 일주일의 병가를 평범하게 보냈다. 일어나서 씻고, 방을 정리하고, 때가 되면 밥을 시켜 먹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잔잔한 노래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두어 번 정도 박이정과 밖에서 만나 식사를 하기도 했다.

매우 한가롭고 느긋해 보이는 일상 내내 연오는 단말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언제 정태헌의 긴급 가이딩 요청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럴 필요 없다고, 태헌이는 이미 건강하고 경력 있는 새 가이드를 찾지 않았느냐고 자신을 달래 봐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텔레비전을 유난히 많이 본 것도 찐득찐득하게 달라붙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단말기는 조용했다. 좋은 신호라고 믿고 싶었다.

다시 센터로 출근하는 날, 연오는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그고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확인했다. 꾸역꾸역 밥을 챙겨 먹고 규칙적으로 자려고 노력했더니 혈색이 조금 돌아온 것도 같았다. 자신의 얼굴을 한참 살피던 연오는 오랜만에 데이트라도 가는 듯 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내가 문제야.’

새 가이드를 찾은 태헌에게서 조용히 멀어져 줄 궁리는 못 할망정. 자신을 타박한 연오는 억지로 거울에서 눈을 떼고 센터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지만.

“정태헌 에스퍼?”

바쁜 시간인데 공교롭게도 엘리베이터에는 태헌뿐이었다. 아무래도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듯했다.

연오를 발견한 태헌은 잠깐 멈칫했지만 별다른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연오는 주춤거리며 엘리베이터에 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혔다.

뜻밖의 만남에 당황한 건 태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연오의 것보다 훨씬 더 다층적이었다. 그는 연오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달라지는 공기를 느낄 수 있는 에스퍼였으므로. 연오와 가까워지자마자 모래주머니를 뗀 듯 다리가 가뿐해졌고 숨통마저 트였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태헌은 조금 앞쪽에 어색하게 선 연오에게 본능처럼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난 일주일 내내 충분한 가이딩을 받았는데, 통증도 많이 옅어졌는데, 그런데 왜 강연오를…….

“아.”

태헌의 손이 얼굴 쪽으로 온 순간, 연오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 갑작스러운 신음이 태헌을 일깨웠다.

“죄, 죄송합니다.”

태헌은 죄도 없이 사과하는 연오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턱이 아프도록 이를 사리물었다. 그의 손은 연오를 지나쳐 연오의 사무실이 있는 20층 버튼을 꾹 눌렀다.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정태헌 에스퍼. 그게…….”

통제할 수 없었던 몸의 반응에 당황한 연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태헌은 괜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또 자신이 헛된 질문을 할까 두렵기도 했다. ‘정말 나 가이딩하기 싫다고 했어요?’ 그렇게 묻는 제 모습은 상상만 해도 비루했다. 아니, 그 질문에 대한 강연오의 대답이 두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연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애써 내뱉은 말은 다행히도 제법 건조했다.

“버튼 안 눌렀길래.”

“……고맙습니다.”

연오는 그제야 자신이 태헌을 의식하느라 층 버튼도 누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20층에 도착한 연오는 바로 내리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태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을 안 후에야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태헌을 돌아보는 눈빛이 조심스러웠다.

“저, 새 가이드랑은 잘 맞으세요?”

질문의 의도가 뭘까. 새 가이드와 잘 맞아서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뜻일까.

“네.”

짧은 대꾸로 모든 질문을 억누른 태헌이 곧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느리게 닫히는 문 사이로 둘의 시선이 진득하게 얽힌 것도 잠시, 그들은 곧 각자의 공간에 홀로 남았다.

조용한 엘리베이터에서 태헌은 지친 신음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새 가이드를 찾아 강연오를 버린 건 자신일진대, 이상하게 버려진 느낌이었다.

-

한주연과 김현철, 그들은 본부장이기 이전에 현직 에스퍼이고 현직 가이드였다. 즉 균열을 정리할 인력이 모자라면 언제든 동원될 수 있는 근로자였다. 그렇다 해도 서울을 벗어나 장기 출장을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출장이라 해도 일단 살던 곳을 벗어났으니, 한주연은 대전 유성구 2층 술집에 앉아 오렌지 주스를 홀짝거리며 여행 온 기분을 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철이 다가왔다. 창가 자리의 작은 의자는 갑작스러운 무게에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김현철은 개의치 않았다.

“주연아.”

한주연이 흘끗 그를 돌아보았다. 술집 특유의 은은한 노란빛이 김현철의 커다란 얼굴에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한주연은 주스가 든 유리잔을 흔들며 불평했다.

“기분 안 난다. 대기 중이라 술도 못 마시고.”

“곧 균열 열릴 거래. 세 시간 안에.”

“지겹다, 지겨워. 어제랑 그제도 밤새 대기했는데 아무 일 없었잖아. 이 정도면 예측기 고장 아니야?”

기술의 발전은 균열 예측이라는 선물을 가져왔지만 백 퍼센트 확실한 예측을 내놓지는 못했다. 대전 유성구에 중형 균열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거라는 관측에 따라 대전 지부장은 물론이고 센터 본부장들까지 내려와 있는데 며칠 내내 허탕을 치고 있으니 모두 지친 상태였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서울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스퍼도 가이드도 모자라는 지금, 대형 균열 하나보다 중형 균열 세 개가 훨씬 더 위험했다. 대형 균열의 강력한 괴물 열 마리보다 중형 균열의 만만한 괴물 서른 마리가 더 상대하기 까다로우니까. 심지어 중형 균열의 괴물들은 자가 증식까지 하니 센터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주먹구구로 일해야 하냐. 에스퍼는 모자라지, 가이드는 더 모자라지, 안 그래도 모자란 가이드는 폭주한 에스퍼들 손에 자꾸 죽어 나가지……. 일이 이 지경인데 아직 센터도 나라도 안 망한 게 대단하다니까. 가이드 수술이 아니고 에스퍼 수술을 만들어야 해.”

한주연의 장탄식을 한 귀로 흘리며 김현철은 텅 빈 술집을 두리번거렸다. 주인조차 없는 걸 보니 균열 예보를 듣고 이미 대피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주연은 어떻게 이 술집에 들어와 당당하게 주스까지 마시고 있을까.

“너 여기 무단침입한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사장이 내 옛날 동료야. 어차피 자기 문 못 여니까 마음껏 마시라더라.”

“동료?”

“각성하기 전에 다녔던 회사 동료. 현철아,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고 최인열 얘기 좀 해봐. 나보단 가이드 본부장이 더 잘 알 거 아니야.”

“갑자기 최인열은 왜?”

한주연이 유리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반쯤 빈 컵의 표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바 테이블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당연히 정태헌 때문이지. 그 가이드랑 정태헌이 가이딩 잘 된다는 게 난 좀 안 믿어지거든.”

“최인열 가이드 원래 등급 높은 에스퍼랑 잘 맞아.”

“그래? 에스퍼 애들은 걔 욕하던데. 등급 가려가면서 가이딩한다고.”

“대우가 달라지는데 좀 가릴 수도 있지.”

“식구라고 편드냐?”

“너야말로 가이드들 건전지처럼 보지 마. 센터 에스퍼도 일반인들도 다 똑같긴 하다만.”

에스퍼나 가이드나 균열 때문에 고생하는 건 똑같은데, 더 인정받고 칭송받는 건 에스퍼였다. 직접 괴물과 맞서 싸우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나 그 불공평한 인식은 고스란히 불공평한 대우로 이어졌다. 가이드 인권이 많이 나아진 지금도, 여전히 가이딩을 거부하는 가이드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손가락질당하기 일쑤였다.

에스퍼의 각인이 일방적이라는 점 역시 가이드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으면 죽게 되지만 가이드는 에스퍼 없어도 살 수 있다.’ 사람들은 에스퍼를, 마음만 먹으면 가이드의 에너지를 빨아 말려 죽일 수도 있는 능력자를 동정했다. 심한 경우 가이드를 에스퍼의 힘에 기대 사는 기생충에 빗대기도 했다.

능력의 종류에 따른 은은한 차별은 여전히 가이드들의 발목에 묶인 족쇄였다. 수면에 드러나는 일이 적어 오히려 더욱 해결하기가 힘든. 인터넷에서는 ‘그래도 요즘 가이드들 살기 좋잖아.’라고 떠드는 모양인데 김현철은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 또 가이드를 건전지 취급했다고.”

가볍게 투덜거린 한주연은 컴컴한 번화가를 내려다보며 한숨지었다. 대피령이 내려지자마자 대전으로 온 게 벌써 일주일째. 정태헌도 강연오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것도 일주일째였다. 크고 작은 균열을 정리하며 쌓인 피로 때문일까, 그 문제가 유난히 머리를 아프게 했다.

“난 그냥, 정태헌이 정말 다른 가이드랑 가이딩이 되는 게 이상하다 이거야. 걔 기억 잃은 후에도 연오 엄청 괴롭히면서 집착했거든. 박이정한테는 시도 때도 없이 눈깔 뒤집고. 무의식에 연오가 박혀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랑 이렇게 쉽게?”

“지금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조만간 정태헌 에스퍼도 임무 나가야 할 텐데 맞는 가이드 찾으면 좋지. 강연오 가이드는 워낙 몸이 약해서 제대로 가이딩하기 힘들잖아.”

“그건 그런데.”

한주연은 못내 걸리는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 찜찜하다. 에스퍼가 얼마나 충전됐는지 볼 수 있는 기계 있으면 좀 좋아. 야, 도대체 연구실은 왜 그거 하나 못 만들고…….”

그녀가 뭔가 열변을 토하려던 순간, 갑자기 테이블 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대전지부 예측실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본부장님, 예측기가 이상해요. 이게 고장이 아닌데, 갑자기 값이 달라졌어요. 삼십 분 후에 대형 균열 열릴 것 같아요.]

“괜찮아요. 시간 좀 당겨지긴 했는데 그래도 중형 세 개보다는 대형 하나가 편해요. 나도 S급이고 A급 지부장도 와 있으니까 시민들 안심시켜요. 동요하다가 대피소 밖으로 뛰쳐나오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이니까.”

[대형 하나가 아니에요.]

“네?”

[대형 셋이에요, 본부장님.]

한주연은 핸드폰을 놓쳤다. 테이블로 우당탕 떨어진 핸드폰에서, 겁에 질린 직원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어떡해요? 이대로면 대전이 완전히 불탈 거예요…….]

한주연은 물론이고 김현철의 얼굴까지 사색이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한주연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려 귓가에 댔다. 침착함을 가장한 목소리가 딱딱했다.

“바로 센터에 연락해요. 박이정, 정태헌, 둘 다 부르고 A급들도 전부 오게 해요.”

통화를 종료한 한주연이 벌떡 일어나 출구로 달렸다. 김현철의 몸짓 역시 다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의 유리컵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균열이 열리고 있었다.

-

미친 듯 삑삑거리는 단말기를 든 연오가 허겁지겁 1층 공간 이동실로 들어섰을 때, 다른 사람들은 전부 도착해 있었다. 익숙한 사람은 셋. 정태헌, 박이정, 그리고 최인열.

태헌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박이정이 다가와 연오를 붙들었다.

“기숙사에 있다가 뛰어왔어요? 쓰러지겠네.”

“괜찮아요. 바로 오라고 해서.”

가쁜 숨을 가지런히 고른 연오는 사납게 인상을 쓰고 있는 태헌과 갑자기 눈이 마주쳤다. 연오와 박이정 사이에 끼어든 그가 연오를 노려보았다.

“왜 왔어요?”

“그야 호출이…….”

“지금 균열 가는 거예요. 균열 보면 패닉 일으킨다며. 짐만 될 텐데 왜 왔냐고요.”

“…….”

연오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태헌을 바라보았다. 모진 말 속에서 염려가 읽히는 듯하니 제 머리가 정말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일까. 연오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박이정이 부드러운 한숨과 함께 연오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어차피 가이드들은 멀리서 대기할 거니까 괜찮을 겁니다. 지금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이동부터 해야 해요. 우리가 가야 A급 에스퍼들도 이동하죠.”

태헌은 할 말 많은 얼굴로 연오를 응시하다가 욕설을 삼키며 공간 가운데로 이동했다. 서로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서라는 이동 에스퍼의 지시에 여섯 명의 사람이 밀착하여 섰다. 태헌은 저와 박이정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있는 연오를 노려보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반대편에 있던 최인열이 괜찮으냐고 속삭이는 손을 뿌리치면서.

몸이 좀 이상했다. 어디가 이상하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상태가 안 좋은 것만은 확실했다. 통증이 없는 것만 해도 어디냐 싶었지만 이대로 간다고 해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자신이 없었다.

“움직입니다.”

이동 에스퍼의 안내와 함께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좁은 창자 같은 시간과 공간을 벌레처럼 기어 빠져나가는 불쾌한 감각이 모두를 덮쳤다. 멀리서 삐 하는 소리가 다가왔다가 옆을 휙 스쳐 지나갔다. 이러다 귀가 찢어지고 눈알이 터지는 거 아닌가 싶은 바로 그 순간.

발이 땅에 닿았다. 그들은 모든 시민이 대피소로 숨어든, 자정 무렵의 대전에 서 있었다.

절멸당한 도시처럼 고요하고 캄캄한 분위기에 적응할 틈도 없이 한주연이 달려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본 연오에게 인사를 건넬 정신도 없어 보였다.

“정태헌, 박이정! 일단 설명부터 들어. 세 개가 순차적으로 열리면 박이정이 가장 먼저…….”

두 명의 에스퍼가 한주연의 지시에 따르는 동안 연오를 비롯한 네 명의 가이드들은 안전한 지역으로 안내받았다. 연오는 끝까지 태헌을 힐끔거리며 걱정을 놓지 못했다. 대형 균열 세 개라던데 태헌이 괜찮을까 염려스러웠다.

박이정이야 데려온 두 사람이 아닌 가이드에게도 가이딩을 받을 수 있지만 태헌은 다르다. 힘을 많이 쓸 텐데 두 명의 가이드가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한없이 부풀어 오른 걱정이 최인열에게 질문을 던지게 했다.

“가이드님, 요즘 정태헌 에스퍼 괜찮아요?”

“……뭐가요?”

지난번 일 때문인지 돌아온 반문이 뾰족했다. 연오는 아차 싶은 눈으로 최인열을 보았지만 질문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아까 이동할 때 머리 아픈 것 같던데.”

“그래요? 내가 보기엔 멀쩡했어요.”

아닌데. 연오는 초조함에 입술만 꾹 깨물었다. 정말 문제없는 거 맞느냐고 재차 묻고 싶었지만 지금 같은 긴급 상황에 최인열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말이 없어진 연오를 일별한 최인열이 태헌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태연자약하던 그 얼굴에 희미한 불안이 스쳐 갔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이렇게 바로 이능을 쓸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가이딩이 제대로 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으니 이대로 태헌이 균열에 들어가면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태헌을 말릴 수는 없었다. 모두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할 텐데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저 태헌에게 에너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길 바라는 수밖에.

최인열은 진심으로 태헌이 다치거나 폭주하지 않기를 바랐다. 연오와는 다른 마음으로, 그러나 비슷한 정도의 간절함으로.

-

정태헌과 박이정, 한주연은 각자 균열 하나씩을 맡아야 했다. 한 사람마다 A급 에스퍼 다섯 명, B급 에스퍼 스무 명을 지휘해야 했지만 태헌은 지휘자 역할에서 빠졌다. 기억을 잃고 불안정한 상태가 된 그에게 지휘를 맡길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상황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금이 갔다.

“진입 준비해!”

한주연의 고함이 끝나자마자 보인 것은 시커먼 균열의 아가리였다. 균열 입구는 나이프로 찢어낸 종잇장처럼 좁고 길고 너덜너덜했다. 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시커먼 연기가 막 도착한 에스퍼들의 발목을 휘감았다.

우주의 블랙홀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듯 균열도 근처의 모든 생명을 빨아들이고 싶어 했다. 입구의 윤곽을 따라 시커먼 촉수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진입합니다!”

태헌을 대신해 C조의 지휘를 맡은 A급 에스퍼가 곧바로 균열로 뛰어들었다. 태헌은 가이드들이 기다리고 있을 먼 곳을 한 차례 돌아본 다음 급히 움직였다. 균열에 들어간 게 처음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 연오가 있다고 생각하니 평소보다 배로 긴장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심하게 연오를 다치게 했던 주제에 이런 생각을 하다니, 우습지도 않은 염려였다.

균열로 진입하자 중력이 달라졌다. 억세게 내리누르는 무게에 태헌의 발이 아래로 푹 빠졌다. 본능처럼 아래를 보니 갯벌 같은 바닥에 모두의 다리가 무릎까지 잠겨 있었다. 벽도 천장도 바닥도 늪처럼 꿀렁거리며 사람을 빨아들이는 성가신 균열이었다.

태헌은 입구를 지날 때 달라붙은 검은 촉수들을 떼어내며 온몸의 힘을 끌어올렸다. 중력이 서서히 약해지는 느낌과 함께 몸이 가벼워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에스퍼들도 각자의 힘으로 질척이는 바닥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갑니다!”

지휘자가 앞장서서 균열 깊은 곳으로 뛰어갔다. 태헌은 그와 나란히 달리기 위해 속도를 냈다. 만성적인 통증이 없으니 힘을 쓰기도 한결 수월했다. 다리에 힘을 싣고 물 위를 걷듯 가뿐하게 바닥을 박차며 달리는 순간.

바로 앞쪽에서 전갈 꼬리가 탑처럼 높이 솟아올랐다. 하마터면 사람 허리보다 굵은 꼬리에 찔려 꼬챙이가 될 뻔한 태헌이 뒤로 넘어지듯 물러났다. 그는 하늘로 가볍게 몸을 띄우며 그대로 힘을 폭발시켰다. 수백 개의 자잘한 불덩어리가 꼬리로 날아가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펑, 펑, 먹먹한 소음을 중심으로 에스퍼들이 몰려들었다. 곧 바닥이 마구 요동치더니 괴물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균열 입구에서 에스퍼들을 맞이한 것은 중장비보다 거대한 전갈이었다. 온몸에 끈적끈적한 회색 흙을 잔뜩 묻힌 괴물은 폭발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린 꼬리를 휘두르며 끽끽 울부짖었다. 현실의 전갈과는 달리 다리가 수백 개쯤 달린 괴물의 위협적인 기세에 에스퍼들이 주춤한 사이 A급 에스퍼가 외쳤다.

“정태헌 에스퍼가 머리로 접근할 수 있게 해요! 전부 붙잡아!”

에스퍼들의 손에서 빛나는 밧줄이 튀어나왔다. 배를 묶는 밧줄처럼 굵은 그것들이 미친 듯 딸깍거리는 전갈의 다리를 붙잡았다. 성인 남성의 허리만큼 굵은 다리와 줄다리기를 하는 에스퍼들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태헌은 찬란한 밧줄 사이로 날아 전갈의 머리로 정확히 착지했다. 그림처럼 재빠르고 우아한 동작에 모두가 위험도 잊고 넋을 잃은 사이, 전갈이 거대한 앞발로 태헌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태헌은 늘 방어보다는 공격이었다. 전갈의 단단한 머리통에 손을 댄 그가 온 힘을 실어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사람의 손으로 낼 수 없는 소리는 한 번으로 멎지 않았다. 뻑, 뻑, 뻑! 반복적인 충격에 전갈이 앞발을 버둥거리며 제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그러나 태헌은 몸부림치는 전갈의 공격을 피해 이미 허공으로 떠오른 뒤였다.

불안과는 달리 힘을 쓰자 온몸이 개운해지며 호승심이 솟았다. 지독한 흥분이 모든 위험을 잊게 했다. 충분한 가이딩 덕분일까, 그저 무모한 돌진일까, 태헌은 그것을 분간할 수 없었다.

높은 곳에서 작살처럼 내리꽂히며 전갈의 머리를 조준했다. 그의 몸이 추락하는 혜성처럼 뜨거워지며 엄청난 열과 빛을 발했다. 둘러선 에스퍼들이 일제히 눈을 가린 그때, 쩡 소리와 함께 태헌이 전갈과 충돌했다. 태헌이 떨어지던 속도 그대로 전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두 개의 별이 마주쳐 폭발한 듯 끔찍하게 밝은 빛이 모두의 눈을 찔렀다.

게 다리를 부러뜨릴 때와 비슷한 우지끈 소리가 울렸다. 쩌적거리는 파열음은 점점 더 커지더니 폭음으로 끝을 맺었다. 태헌이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 전갈의 머리통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으로 정체 모를 녹색 체액이 피처럼 솟구쳤다.

“안에 더 있어요. 계속 진입합니다!”

태헌이 멀쩡함을 확인한 A급 에스퍼가 크게 외치자, 괴물을 붙들고 있던 밧줄들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지휘를 맡은 에스퍼는 누구는 이쪽에 서고 누구는 저쪽에 서고 하는 식으로 몇 마디 지시를 내렸는데 태헌은 거의 듣지 못했다. 그는 전갈의 함몰된 머리통에 혼자 올라서서 끈적거리는 녹색 체액이 제 신발을 엉망으로 적시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툭, 투둑.

코에서 흐른 피가 괴물의 체액과 섞였다. 태헌은 반쯤 멍한 정신으로 코 아래를 문질렀다. 살짝 땀이 난 손등에 시뻘건 피가 번졌다.

‘왜 이러지?’

폭주하거나 쓰러진 적은 있어도 코피가 난 적은 없었다. 다행히 태헌을 스쳐 지나가던 에스퍼 중 하나가 말을 걸 무렵에는 피가 멎었다.

“안 가요?”

태헌은 대답 없이 다시 한번 코를 훔치고 전갈 위에서 뛰어내렸다. 머리가 징징 울리며 몸의 에너지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르는 척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어쩌면 이 균열에서 다시 폭주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태헌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기분 나쁜 통증이 발바닥부터 쿡쿡 올라오기 시작하자 불길함은 배가 되었다.

그러나 근처에 가이드들이 있다. 균열을 보면 패닉을 일으키는 주제에 여기까지 따라온 강연오는 잔뜩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겠지. 창백한 얼굴과 꼭 다문 입술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휙 사라졌다. 환시인 걸 아는데도 찰나의 가이딩을 받은 듯 잠시나마 마음이 놓였다.

에스퍼들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괴물은 끝도 없이 쏟아졌고 S급인 태헌이 도맡아야 하는 괴물의 수도 그만큼 많았다. 나중에는 힘을 보태는 에스퍼들도 지쳐 버렸다. 모두의 얼굴이 땀과 진흙 범벅이 되어 갔다. 그중에서도 태헌의 모습은 특히 엉망이었다.

“정태헌 에스퍼, 괜찮아요?”

앞장서던 A급 에스퍼가 태헌에게 달려왔다. 왜요, 하고 물으려고 입을 벌린 순간 찝찌름한 피가 입으로 들어왔다. 태헌은 고개를 돌리고 침을 뱉었다. 세상이 팽이처럼 핑그르르 돌다가 간신히 멈췄다. 자꾸 토기가 밀려오고 속에서 비린 맛이 올라오는데, 이대로 있다간 내장까지 토할 것 같은 위기감이 솟았다.

“거의 끝났어요. 못 견디겠으면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는데…….”

A급 에스퍼가 곤란한 듯 말을 흐렸다. S급 하나 없이 대형 균열을 돌파하겠다는 결정은 무모한 것을 넘어 멍청한 것이었으므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태헌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지나쳐 앞으로 달려갔다.

들을 수 있다. 펑, 펑, 펑……. 아름다운 불꽃이 터지는 소리를. 그러나 그 소리는 균열이 아닌 자신의 몸 안에서 울려왔다. 아직은 아주 작은 소리지만 힘을 사용할수록 점점 더 커지겠지. 최인열의 가이딩 후 잠잠해졌던 고통도 다시 치받아 오르기 시작했으니 또 안전 구역에 갇힐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최인열이 있으니 강연오가 험한 꼴을 볼 일은 없다는 사실일까.

태헌은 멀찌감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시뻘겋게 타오르는 균열의 핵을 노려보았다. 몸 전체를 흔드는 아름다운 폭발음이 지척에 와 있었고, 태헌은 끈적한 바닥을 박차며 사선으로 날아올랐다. 균열의 핵을 지키는 십수 마리의 괴물들이 일제히 솟구쳐 그에게 달려들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태헌의 몸을 덮은 순간, 그의 몸이 그대로 폭발했다.

-

펑!

균열과 멀지 않은 대기소까지 폭음이 전해졌다. 균열 근처 관공서 강당에 모여 있던 가이드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태풍이라도 온 듯 창문이 심하게 덜컹거려 위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균열의 모습을 볼 수 없어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연오도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릴 정도의 소란이 강당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폭발의 여파가 쓸고 지나간 뒤에는 비정상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 침묵도 얼마 가지 못했다. 멀리서 발소리 하나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강당 문이 벌컥 열렸다. 김현철 본부장이 숨까지 헐떡거리며 서 있었다.

“최인열 가이드! 당장 이쪽으로 와요!”

최인열과 연오가 동시에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김현철은 연오를 향해 재빨리 손을 들어 보였다.

“강연오 가이드는 말고. 지금 정태헌 에스퍼 위험한 상태예요. 감당 못 합니다.”

“위험하다뇨, 설마…….”

“폭주했어요. 안전 구역으로 보냈는데 지금 당장 갈 겁니다. 최인열 가이드, 빨리 오라니까 거기 서서 뭐 합니까!”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선 최인열을 향해 거센 호통이 날아갔다. 그러나 최인열은 김현철에게 가기는커녕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연오를 포함한 다른 가이드들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 꽂혔다. 집중된 시선 한가운데서 최인열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전 안 갈래요.”

“뭐라고요?”

되물은 사람은 김현철이 아니라 연오였다. 김현철 역시 황당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최인열 가이드, 안 간다고요?”

자신에게 꽂히는 소리 없는 비난에 부담을 느낀 최인열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 부담감이 최인열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듯 주먹까지 꼭 쥐었다.

“저, 저 폭주한 에스퍼 가이딩해 본 적 없어요. 위험하기도 하고, 정태헌 에스퍼는 폭주하면 더 심하잖아요.”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김현철은 기가 차서 화를 냈지만 현실적으로 최인열에게 가이딩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소 최인열을 백안시하던 다른 가이드들마저 지금만큼은 그에게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폭주 상태의 에스퍼가 가이드를 죽이는 일도 많은 현실에서 사명감만으로 목숨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만 빼고.

“제가 갈게요, 본부장님.”

연오는 어지럽게 흩어져 앉은 가이드들 틈을 비집고 김현철에게 다가갔다. 꼭 다물린 입술과 굳은 얼굴이 제법 결연했다. 지난번에 폭주 중인 태헌을 가이딩하다가 험한 꼴을 당했으니 두려울 법도 한데 두 눈에는 망설임조차 없었다.

“저 태헌이한테 데려다주세요.”

-

대전의 안전 구역은 서울과 똑같았다. 커다란 반구가 줄을 지어 늘어선 모습은 거대한 공동묘지를 연상케 했다. 연오는 김현철의 차에서 내리며 단단한 무덤 속에 시체처럼 버려졌을 태헌을 떠올렸다.

“강연오 가이드.”

가장 가까운 반구로 앞장서 걸어가던 김현철이 복잡한 표정으로 연오를 돌아보았다. 연오가 걸음을 빨리해 나란히 붙어 서자 김현철이 한숨을 삼켰다.

“괜찮겠어요?”

“네.”

“다행히 기절해 있다고 하는데, 다른 에스퍼 붙여 보내고 싶어도 다들 균열 뒷수습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네.”

김현철은 이 겁 없는 가이드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염려의 말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폭주 가이딩 때 험한 꼴을 당해 놓고도 일을 피하지 않는 태도는 가히 가이드의 모범이라 할 만했으나, 개인적으로는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다.

“내가 같이 갈게요.”

“……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나도 가이드지만 덩치가 이래서 도움이 될 겁니다. 밖에 서 있을 거고 CCTV 화면 공유받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 안 해요. 감사합니다.”

태헌이 괜찮을까 속을 태우는 중에도 연오가 엷게 웃었다. 억지로 지어 보이는 미소임을 안 김현철도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좁고 긴 복도를 달리듯 지난 그들은 첫 번째 문도 통과했다. 묵직한 문이 좌우로 열리고 마지막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연오는 지문 센서를 확인한 후 심호흡을 했다. 제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김현철의 존재도 긴장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준비됐어요?”

“네, 바로 갈게요.”

연오는 오른손 엄지를 펼쳐 센서 가까이 댔다. 이제 지장을 찍듯 꾹 누르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강연오 가이드?”

김현철의 부름도 듣지 못하고, 연오는 거짓말처럼 벌벌 떨리는 제 손만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지독히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주먹을 쥔 채 엄지만 비죽 내밀고 있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꼴은 연오의 눈에 볼썽사납기까지 했다. 떨림을 막아 보려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손을 쫙 폈는데, 다섯 개의 손가락이 마구잡이로 경련하는 모습은 더 보기 어려웠다. 연오는 자기가 환각을 보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떴지만 몸 상태는 여전했다.

손만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친 듯 떠는 연오는 홀로 지독하게 위태로웠다. 극심한 추위가 배 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더니 심장까지 얼려 버렸다. 머릿속이 텅 비고 사지가 뻣뻣하게 굳자 침을 삼키는 간단한 동작조차 어려워졌다. 온몸이 심장이 된 듯 쿵쿵 박동하면서 목 언저리가 꽉 막혀 왔다. 구역질 없는 토기만 밀려와 선 채로 눈물이 핑 돌았다.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어. 나 왜 이러지?

“강연오 가이드!”

김현철이 연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사람의 온기와 외침이 연오를 잠시 현실로 끌어올렸다. 연오는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가까스로 김현철을 돌아보았다. 김현철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턱에 바짝 힘을 주었다.

“이해해요. 돌아갑시다. 어떻게든 최인열 가이드 데려올 테니까.”

“아, 아, 아니에요.”

연오는 김현철의 커다란 손을 뿌리치다시피 놓았다. 등을 흥건히 적신 식은땀이 마르며 아까보다 더한 추위가 엄습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태헌이, 지금도…… 지금도 아픈 거잖아요.”

정신이 혼미해지고 앞뒤가 보이지 않는 아픔이라고 했다. 가이드를 죽도록 착취해도 풀리지 않는 갈증이라고 했다. 태헌의 고통을 되새기고 되새기는 연오의 귓가에 과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나가기 싫어. 나가기 싫어, 연오야. 나 아파.’

꾀병 부리지 말라고 했었는데.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다.

“제 손 좀, 눌러 주세요, 본부장님.”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손가락을 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오의 부탁에 김현철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

“안 돼요. 돌아갑시다.”

김현철은 정말로 연오를 데려가려 했다. 제 어깨를 잡는 그를 밀어낸 연오는 이를 악물고 센서에 손가락을 꾹 눌렀다. 아주 잠깐 기절하는 것처럼 눈이 뒤로 넘어갔으나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삑, 삑. 식은땀 때문인지 센서가 불일치 표시를 띄웠다. 연오는 엄지 끝을 허벅지에 벅벅 문질러 닦은 후 다시 센서에 갖다 댔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소리도 없이 좌우로 열리는 문이 균열처럼 연오를 빨아들였다.

“강연오 가이드!”

김현철의 부름도 무시한 연오는 다시 붙잡힐세라 안으로 힘껏 달려갔다. 제 기능을 잃은 몸이 콰당 넘어진 순간 문도 닫혔다. 연오는 문틈으로 사라지는 김현철의 모습을 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헌아.”

바닥을 짚은 두 손을 내려다보며 연오는 혼자 속삭였다.

“태헌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똑바로 섰다. 그러자마자 보았다, 넓고 휑한 공간 한가운데에 버려진 옷가지처럼 늘어진 태헌의 모습을.

이러고 싶지 않은데 태헌을 보자마자 밖에서처럼 몸이 얼었다. 지금만큼은 태헌이 사람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톱니로 보였다. 자신 따위는 무자비한 톱니 사이에서 뼈까지 으깨질 게 뻔했다. 지난번처럼, 모든 에너지를 강탈당했던 저번처럼, 그때처럼.

연오의 동공이 텅 비었다. 두려움은 본래 까마득한 무(無)여서 연오는 자기 자신을 놓쳐 버렸다.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에 공포의 대상만, 태헌만 가득 찼다. 사랑이 주는 충만감과는 완전히 다른, 짓눌려 질식하는 듯한 이 느낌.

그때 아주 작은 기침 소리가 연오의 공황을 깼다. 힘없는 숨을 터뜨린 이는 먼 곳에 있는 태헌이었다.

김현철의 말과는 달리 그는 깨어 있었다. 아기처럼 둥글게 웅크린 채 느리게 눈을 깜빡, 깜빡이며 연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본다.

바라서, 본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가이드님.”

이렇게 먼데, 저렇게 작은 소린데, 말과 말 사이의 숨소리까지 생생했다. 태헌의 음성은 연오의 영혼에 닿았다. 어쩌면 그가 연오를 위해 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실핏줄이 다 터져 시뻘건 눈을 다시 한번 깜빡이자, 눈물이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려주세요…….”

-

차라리 죽을까?

안전 구역에 갇힌 태헌은 그 생각의 포로였다.

물론 생각해야 할 다른 문제도 많았다. 이를테면 최인열과 그의 가이딩 같은. 가이딩을 받는 동안에는 아프지도 않았고 구역질도 나지 않았는데 왜 폭주했을까. 지난 일주일 내내 주말도 없이 충분한 가이딩을 받았으니 아무리 만성 가이딩 부족이라 해도 이렇게 터지듯 폭주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파.’

어렴풋하게나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이상할 정도로 쏟아지는 잠, 갑자기 멍해지는 것, 정신을 차리고 보면 뭉텅뭉텅 잘려 나간 기억, 수상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명현현상이라 했고 병원 검사에서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고, 그냥 만성 가이딩 부족이 해결되어가는 것이라 여겼다.

‘아파.’

솔직하게 인정한다. 최인열의 가이딩을 통해 통증이 가라앉으니 당시에는 굳이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싫다는 강연오를 부를 수도 없었고…….

‘아파.’

깊게 파고들어 추리하려고 해도, 무슨 감정이든 진득하게 느껴 보려 해도, 유압기에 짓눌리는 듯한 고통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대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누른 채로 심호흡을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알록달록한 벌레 같은 것들이 잔상처럼 시야를 어지럽혔다.

배 속에서 불덩이가 날뛰고 있었다. 내장의 미끄러운 조직이 불길에 오그라들며 서로 엉겨 붙었다. 상처 부위에서 흐른 진물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거품을 일으키며 부글부글 끓다가 고스란히 말라붙었다.

뜨겁게 지진 자리에 다시 덧입혀지는 상처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수많은 벌레가 혈관 속을 기어 다녔다. 간지럽고 아프고 죽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죽으면 안 아프지 않을까. 머리끝까지 물이 차올랐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원래 죽음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가. 물에 빠진 채 불에 타며 으깨지는.

태헌아.

처음에는 환청이었다. 그다음에는 마치 물속에서 고개를 내민 듯.

“태헌아.”

비로소 현실이었다.

정태헌은 감고 있는 줄도 몰랐던 눈을 떴다. 뭉개진 세상, 조각난 시야 속에서 강연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어미의 배에서 막 미끄러져 나온 짐승처럼 형편없이 떨면서. 날것 그대로의 생명을 지켜볼 때의 경이와 희망이 태헌 안의 서캐들을 짓눌러 터뜨렸다. 톡, 톡, 물방울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한 그것들과 함께 태헌은 생의 수면으로 떠올랐다. 기어이 숨이 쉬어지고 삶이 이어졌다.

난 이제 살았어.

그런데 연오가 오지 않았다. 유령처럼 무섭게 서서 흔들리기만 했다.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흰 옷가지가 흔들흔들, 아니, 목매단 육신이 시계추처럼 좌우로 왔다 갔다…….

빨리 오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고 마른기침을 하자 피비린내가 울컥 끼쳐왔다. 이번에야말로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아 눈을 깜빡이자 앞이 뿌옇게 변했다.

“가이드님.”

날 버리지 마.

“살려주세요…….”

나 사실은 죽기 싫어. 아프기도 싫어. 전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멀쩡하게 살고 싶어. 나도, 나도…….

뱉을 수 없던 속삭임을 들었을까, 우뚝 굳었던 연오가 망가진 구명선처럼 다가왔다. 남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할 난파선이었다. 태헌이 웅크린 채로 손을 뻗자 체온이 사슬처럼 얽혔다. 끝없는 침몰이었다.

-

잠이 오지 않는 밤,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함부로 낭비되었다. 열일곱 살의 연오는 끝나지 않는 밤 내내 책을 읽어 보려고도 하고 핸드폰 게임을 붙잡아 보기도 하고, 베개를 안았다가 다리 사이에 끼웠다가 하며 자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

엄마 생각, 아빠 생각, 앞으로 혼자 살아가야 할 막막한 미래 생각, 암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오를 끝없는 수렁으로 끌어당겼다. 버둥거릴 힘조차 잃은 연오는 봄을 따라 깊어가는 우울감에 사로잡혀 홀로 남은 밤을 견뎠다.

그러고 나면 해가 뜨고 아침이 왔다. 당시의 연오에게 아침은, 앞으로도 이런 생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니 죽어야 한다는 속삭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연오야!”

같은 반 친구에게 문을 열어 줘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연오는 미적미적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교복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근 단정한 차림의 또래 남학생이 싱글싱글 웃으며 현관으로 발을 디뎠다. 연오는 온 힘을 쥐어짜 겨우 웃었다.

“태헌아, 안녕.”

“안녕.”

매일 보는 얼굴인데 새삼 뭐가 그리 반가운지 태헌이 말갛게 웃었다.

태헌은 아침마다 이렇게 연오의 빌라로 찾아왔다. 길을 걷다가 균열에 휘말린 경험 때문에 혼자 다니기를 두려워하는 연오와 함께 등교하기 위해서였다. 연오는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다며 부담스러워했지만, 선생님이 시킨 일이라고 둘러대는 태헌을 끝까지 거절하지는 못했다.

4월부터 시작한 이 ‘함께 등교’는 무더위가 무르익는 7월까지 이어졌다. 그사이 연오도 태헌도 서로에게 많이 익숙해졌다.

연오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는 태헌을 힐끔거리다가 뒤늦은 등교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만사가 귀찮고 힘들어서 씻기도 옷 입기도 싫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어떻게든 몸이 움직여졌다. 안간힘을 써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쏴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연오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태헌이 낮은 싱크대 앞에서 몸을 수그린 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세제 묻힌 그릇들을 헹구는 뒷모습은 제법 능숙하고 진지했다. 이 역시 지난 4월부터 아침마다 벌어진 상황이었다.

“태헌아, 그냥 두라니까.”

“씻을 거 컵밖에 없어. 어떻게 숟가락 하나가 없냐. 너 어제도 밥 안 먹었지?”

“먹었어…….”

뻔한 거짓말과 함께 연오가 태헌 옆으로 다가갔다. 그만두라고 말릴 작정이었는데 태헌은 때맞춰 물을 끄고 손의 물기를 닦으며 돌아섰다. 가까이 서 있는 연오를 보고 조금 놀란 듯하던 그의 뺨이 곧 발갛게 물들었다.

“왜, 왜 이렇게 가까이 있어?”

“어? 어, 미안. 이거 하지 말라고 얘기하려고 했지.”

“할 것도 없었다니까. 너 가방만 챙기면 되나?”

연오의 방에서 책가방을 가지고 나오는 태헌의 움직임이 딴청을 부리는 사람처럼 부산스러웠다. 달아오른 얼굴도 쉽게 식지 않았다.

연오는 그가 건네는 가방을 받아 어깨에 멘 다음 신발을 신었다. 운동화 끝을 바닥에 쿡쿡 찍는 사소하고 흔한 습관을, 태헌은 진귀한 풍경이라도 되는 양 관찰했다. 그 과정까지 거치고 나면 그들은 나란히 빌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더위가 기승이었다. 연오는 태헌의 이마와 콧잔등에 맺힌 땀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제 아침에도 덥잖아. 혼자 등교할 수 있으니까 매일 안 와도 돼. 3월에도 나 혼자 잘 다녔고.”

뜬금없는 말에 태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연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손등으로 제 이마를 훔쳤다. 아무렇지도 않음을 증명하듯 싱긋 웃는 그의 뒤로 펼쳐진 여름 하늘이 유난히 새파랬다.

“별로 안 더워.”

“너 힘들잖아. 선생님한테 괜찮다고 말씀드릴게.”

“선생님 때문에 계속 온다는 거 아닌데.”

사실 처음부터 선생님이 시켜서 온 것도 아니라는 말은 끝내 못 하고 태헌이 고개만 살래살래 저었다. 환한 햇빛 아래서도 평소보다 어두워 보이는 연오의 얼굴을 힐끔거리다가 그가 불쑥 제안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살래?”

“……뭐?”

태헌은 연오의 황당한 표정을 본 후에야 자기가 아무 맥락 없이 엄청난 말을 뱉어 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가 허겁지겁 설명했다.

“아니, 이 집은 너 혼자 살기엔 너무 넓기도 하고, 같이 살면 내가 매일 안 와도 이것저것 도와줄 수 있잖아. 그리고 이제 곧 방학이잖아? 너 혼자 있는 것도 걱정되고, 우리 부모님은 어차피 너무 바빠서 집에 잘 안 오시니까 나도 혼자 있기 싫고…….”

“무슨 소리야?”

연오가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을 뚝 끊어냈다. 태헌은 자기 말을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연오를 보며 이제라도 화제를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같이 살면 서로 좋을 것 같아서.”

그 말이 연오를 아예 멈춰 세웠다.

태헌을 응시하는 연오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연오보다 한두 발짝 앞서갔던 태헌이 돌아보고 잠시 움찔할 정도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오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작은 입이 열렸다.

“너 내가 불쌍해?”

혼자 남은 연오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불쌍하다’였다. 도움을 줄 수 없는 친척들이, 연오의 사연을 알게 된 친구들이 쉽게도 그런 말을 뱉었다. “쟤 부모님, 균열에서 돌아가셨다며.”라는 말 뒤에 “진짜? 불쌍하다.”라는 대꾸가 후렴구처럼 따라붙던 시기였다.

사실 연오는 사람들의 동정을 싫어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싫어할 만한 기력이 없는 탓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헌의 동정만큼은 거슬렸다. 불쌍하냐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굳어 버린 태헌의 모습은 어쩐지 밉기까지 했다.

“내가 불쌍해서 그러냐고.”

추궁 같은 말에 태헌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눈이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고 입술은 한참을 달싹거리다 한일자로 다물렸다. 긴장을 고스란히 전하는 태헌을 보며 연오가 앞으로는 정말 오지 말라고 말하려던 순간.

“좋아서.”

아까보다 더 강한 바람이 조용한 골목을 휩쓸었다. 담장 너머까지 가지를 뻗은 대추나무가 거세게 흔들리며 노래를 불렀다. 뜨거운 햇빛과 뜨거운 바람, 후끈거리며 달아오르기 시작한 아스팔트 바닥. 평범하고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서.

구름 같은 한마디가.

“너 좋아서, 연오야.”

-

연오는 유령이 된 듯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몸이 텅 빈 것 같았다. 수술대에 누워 중요한 장기들을 죄다 적출하고 나면 이런 느낌일까. 온몸이 팔랑팔랑 흔들리는 종잇장이 된 듯 가볍고 허망했다. 그 허망함이 가이딩의 성공을 알려 주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걸 보니 태헌이 마음껏 에너지를 가져간 모양이었다.

지나간 추억이 껍데기만 남은 몸을 가득 채웠다. 그날의 더운 공기와 바람 냄새, 나뭇잎의 진녹색, 가방끈에 어깨가 눌리던 느낌, 꽉 막힌 운동화 안에서 점점 뜨거워지던 발, 그런 사소한 감각 하나하나가 연오를 덧칠했다. 연오는 꿈에서 깼는데도 꿈속에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여기 누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연오는 현재를 하나하나 인지해 나갔다. 사방이 캄캄했고 누운 자리는 푹신했다. 아무래도 병실인가 보다 추측하며 안전 구역에 들어가기 전에 맡긴 핸드폰을 찾아 머리맡을 더듬거리니 과연 단단한 게 만져졌다. 핸드폰을 켜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가이딩 이후로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걸 보면 잠들어 있던 시간이 길지 않은 듯했다.

김현철 본부장으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계속 중형 균열이 파생되고 있어서 옆에 있을 수가 없어요. 깨어나면 연락하고, 몸에 무리가 많이 갔다니까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됩니다. 마음이 바쁘겠지만 유성구 쪽 정리하고 얘기합시다.]

연오는 핸드폰 화면을 끈 다음 두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갑자기 쓰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일어났다. 머리에 몰린 피가 발밑으로 확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비틀거릴 정도로 강한 충격은 아니었다. 연오는 병원 슬리퍼를 대충 꿰어 신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직, 직, 슬리퍼 끌리는 소리만 그를 뒤따랐다.

-

최인열은 관공서 강당을 벗어났다. 호출을 기다리는 여러 가이드의 눈을 피해 화장실 쪽 외진 복도로 나온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손톱을 딱딱 씹으며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는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초조했다.

[이, 이, 인열아.]

반가움을 가득 담은 음성이 최인열을 맞이했다. 남의 속도 모르는 해맑은 새끼. 화풀이하듯 욕을 뱉으려던 최인열은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조만간 가이드 본부장이 연구실 갈 거야. 약 같은 거 물어보면 잡아떼. 남은 건 전량 폐기하고.”

[그것 때문에 너한테 무…… 문제 생긴 거야?]

“문제 생기지 않게 잘 처리하라고 말하고 있잖아.”

[알, 알았어. 너…… 지금 대전에 있다며.]

“어.”

[서울 오면 나 가이딩해, 해 주는 거지?]

최인열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는 빈 벽을 원수라도 되는 듯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었다.

“대전 정리되려면 시간 좀 걸릴 테니까 그때까지 완벽하게 처리해 놔.”

[인열아, 가이딩…….]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최인열은 목소리를 낮추어 사납게 쏘아붙였다.

“이 찌질한 새끼야, 알겠으니까 약이나 잘 처리하라고!”

[……응……. 미, 미안.]

최인열은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벽에 이마를 기댔다. 욱해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화를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마구잡이로 화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달래는 말 몇 마디를 뱉어 보려던 그때.

“무슨 약이요?”

손에서 핸드폰이 죽 미끄러졌다. 텅, 요란한 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렸다. 최인열은 귀신이라도 만난 듯 놀라서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인물, 강연오가 우뚝 선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최인열의 핸드폰 화면을.

“무슨 약이요, 최인열 가이드.”

연오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 기묘한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낀 최인열은 자기도 모르게 반걸음쯤 뒤로 물러났다. 몇 마디 강하게 쏘아붙이면 금세 수긍하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던 연오였는데 지금만큼은 기세가 달랐다. 평소의 힘없고 만만한 분위기를 싹 벗어버린 연오는 정신 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연오는 천천히 몸을 숙여 최인열의 핸드폰을 주웠다. 지나치게 느리고 정확한 동작이 오히려 오싹했다. 최인열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를 꾸며내기 위해 꽤 애써야 했다.

“뭐라는 거예요. 병원에 있다더니 택시 타고 여기까지 왔어요? 이 밤에, 환자복 차림으로?”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 거의 안 된 상태던데.”

“뭐라고요?”

꺼진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던 연오가 시선을 들었다. 이어진 추궁은 차분했다.

“왜 모르는 척해요. 가이딩 할 때 느꼈을 거면서.”

“이봐요!”

“왜 사람 목숨으로 장난쳐요. 태헌이가 장난감이에요?”

연오는 최인열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 침착하고 싸늘하게 제 말만 뱉었다. 억지소리 하지 말라고 반박할 수도 있었지만 최인열은 입술이 붙어 버린 듯 침묵했다. 비실비실하고 어린, 마음대로 구워삶기 좋은 풋내기 가이드라고 여겨 온 연오의 살의가 섬찟했다. 살의. 그래, 연오는 정말 최인열을 죽일 것 같았다.

연오의 동공이 한껏 확장되며 최인열을 빨아들였다.

“정태헌 에스퍼는 아파서 관심 없어도 내가 알아낼 거예요.”

“…….”

“그러니까 이제 정태헌한테서 손 떼요.”

연오가 그때까지 쥐고 있던 핸드폰을 불쑥 내밀어 돌려주었다. 액정에 금이 간 핸드폰을 낚아채듯 챙기며 최인열이 이를 갈았다.

“일 년도 안 된 주제에 뭘 안다고 유난이야.”

낮게 흘러온 비아냥에도 연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최인열이 어려웠던 건 그가 선배라서가 아니라 정태헌을 구할 수 있는 또 다른 가이드였기 때문이다. 최인열이 태헌에게 위험한 존재임이 확인된 지금, 연오는 그가 조금도 어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애써 봐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툭 내뱉은 최인열이 연오를 스쳐 지나갈 때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연오는 목표를 포착한 짐승처럼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람은 저마다 물불 안 가리고 사랑하는 뭔가가 있는데 연오에게는 그게 정태헌이었다. 어떤 태헌이든 상관없었다.

최인열의 핸드폰에 표시되었던 이름은 A3. 병기된 번호는 010-2569-20XX. 사진 찍듯 외워둔 정보가 출발 지점이 되어 줄 것이었다.

-

태헌은 무서울 정도의 고요 속에서 눈을 떴다.

일상의 크고 작은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병실에 혼자 누워 있으니 혼자 우주에 내던져진 듯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심지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 나는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앉아 두 손을 손뼉 치듯 마주쳐본 후에야, 태헌은 주위가 조용한 게 아니라 자기 청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

얼떨떨한 마음으로 헛웃음을 쳐도 지독한 정적이었다. 폭주하고 났더니 귀가 안 들린다는 기막힌 상황에 부닥쳤는데 그리 당황스럽지가 않았다. 몸 상태가 심각하게 좋지 않을 때 몇 번 겪은 일이기도 했고.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잦았을까.

태헌은 자신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점검해 보았다. 몸살이 난 것처럼 가볍게 쿡쿡 쑤시기는 했지만 안전 구역에서 느낀, 자살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은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였다.

온몸으로 자신을 안아 에너지를 허락했던 연오의 체온이 심장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태헌은 희생양을 발톱으로 찍어 누르고 뱃가죽 속의 장기부터 먹어 치우는 맹수처럼 연오의 에너지를 탐한 자신을 회상했다. 처음 폭주했을 때처럼 폭력적으로 군 기억은 없지만 이번에도 강제로 에너지를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제 고통이 한발 물러난 자리에 타인의 고통이 그득 들어찼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심해 같은 세상을 헤치고 태헌은 복도로 나섰다. 연오도 여기 어딘가에 입원해 있을 텐데, 그를 만나고 싶었다. 청력 이야기는…… 하지 말자. 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들을 수 있게 될 듯했다.

그는 캄캄한 복도를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며 굳게 닫힌 병실 문을 훑었다. 문밖에 꽂힌 입원한 이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 가며 연오를 찾는 걸음은 다소 조급했다. 태헌도 왜 자신이 이렇게 연오를 급하게 찾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태헌은 마침내 연오의 이름을 발견했다. 강연오. 태헌은 마른침을 삼킨 후 차가운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팔뚝으로 손이 올라왔다. 무방비한 상태였던 태헌은 시체에라도 붙잡힌 듯 거세게 몸을 틀었다. 천만다행으로 이능이 튀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팔을 잡았던 이는 놀라서 두어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강연오.

환자복 차림의 연오가 서 있었다.

태헌은 그의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정태헌 에스퍼, 여섯 글자를 정확하게 만들어낸 입술이 창백했다. 음소거 상태의 영상을 보는 듯해서 태헌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떨리는 눈으로 태헌을 살피던 연오의 입이 벌어진 순간.

“정태헌 에스퍼!”

막혔던 귀가 뚫린 듯 세상의 모든 소리가 밀려왔다. 태헌은 그중에서 가장 큰 소리를 붙잡았다.

“괜찮아요? 설마 안 들리는 거예요?”

“잘 들려요.”

태헌은 연오의 말을 뚝 끊어냈다. 그러나 연오는 기겁한 기색을 거두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부터 불렀는데 못 들었어요?”

“어…….”

“가이딩 모자란 거 아니에요? 좀 더 필요해요?”

“아니요.”

태헌은 어서 다시 가이딩을 받으라고 외치는 몸을 무시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통증이 크지 않아 거절한 것도 있지만 연오의 꼴을 보니 도저히 가이딩을 부탁할 수가 없었다.

연오는 누가 봐도 중환자였다. 입술은 하얗게 터지고 뺨은 움푹 들어가도록 말랐으며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환자복 차림을 하고 야밤에 여기저기 돌아다닐 게 아니라 당장 침대에 누워서 쉬어야…….

태헌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어디 갔다 와요?”

“진짜 괜찮아요?”

둘의 말이 겹쳤다. 태헌은 연오가 먼저 질문을 거두리라 예상하고 기다렸지만, 연오는 태헌의 질문을 무시하고 제 말을 쏟았다.

“아까 정말 들렸던 거 맞아요?”

“잘 들린다니까 왜 자꾸 똑같은 말 하게 해요.”

타박에 가까운 어조에 연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을 더 보고 있기가 힘들었던 태헌은 먼저 연오의 병실로 들어갔다. 열린 문을 지난 연오는 병실 한가운데 선 태헌의 등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픈 거 숨기면 안 됩니다. 말 안 하면 알기 힘들어요.”

자책이 진득하게 묻은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내가 이렇게 아픈 건 다 너 때문이라고 비난한 주제에 이제 와서 저런 말이 듣기 싫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그래서 태헌은 그냥 연오를 끌어다 침대에 앉혔다. 시키는 대로 질질 딸려 온 연오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 말이 없었다.

기억을 잃은 태헌만큼은 자신에게 아픔을 감추지 말았으면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까맣게 모른 채 혼자 행복을 누리는 삶이 무서웠다. 태헌이 화를 내고 빈정거리고 함부로 자신을 밀치며 아프다고 발광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디 갔다 오냐고요, 가이드님.”

태헌의 재촉이 상념을 깼다. 연오는 자기 앞에 쪼그려 앉은 태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와 의논할 일이 있었다.

“최인열 가이드한테 다녀왔습니다.”

“아, 그 새끼.”

대뜸 튀어나온 욕설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제게 하는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연오는 습관처럼 움찔했다. 그런 연오를 알아차리지 못한 태헌의 미간은 여전히 좁아져 있었다.

“근데 그 새끼는 왜요.”

“아무래도 정태헌 에스퍼한테 무슨 짓을 한 것 같아서 알아보려고 가이드 대기실 갔었어요. 약 얘기를 하던데, 통화하던 상대 번호 알아 왔으니 관리지원실에 얘기한 다음 감사실에 도움 요청할 겁니다.”

“……그거 때문에 이 밤에 거기까지 갔다 왔다고요? 그런 차림으로?”

쪼그려 앉은 태헌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무언가를 참는 듯 턱에 힘을 주고 눈살까지 찌푸리는 모습에 연오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헌의 다음 말이 연오를 더 놀라게 했다.

“내버려 둬요. 앞으론 그쪽에 가이딩 안 받으면 되니까.”

“…….”

“아픈데 그런 것까지 할 정신 있어요? 우리 둘 다 그럴 여유 없으니까 그냥 두라고요.”

연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순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태헌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건 대충 짐작했다. 제 몸 하나 돌볼 정신 없는 태헌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최인열에게 태헌이 관심 없어도 자기가 진실을 알아낼 거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으니 처음 생각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정태헌 에스퍼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알아서 하지 말고 거기서 관심 끄라고요. 그런다고 누가 알아준다고.”

누가 알아주길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태헌을 응시하는 연오의 시선이 곧았다.

“최인열 가이드를 잡아야 앞으로 정태헌 에스퍼 도와줄 다른 가이드들이 조심하죠. 이렇게 넘어가면 비슷한 사람이 더 많이 꼬이지 않겠어요?”

됐다니까 왜 자꾸 최인열 얘기인가. 태헌의 눈꼬리가 저절로 치솟았다.

“왜요, 빨리 다른 가이드 찾아서 나 넘기고 싶어요? 폭주 가이딩 두 번 하니까 죽겠다 싶어요?”

짜증스럽게 비꼬았는데, 연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요.”

단단한 대답이 치기마저 앗아갔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걱정 운운하다니, 고마움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최인열과 지내는 동안 잠시 잊고 있던 연오의 끔찍한 헌신이 온몸을 따끔따끔하게 찔러댔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불편한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간지러운 듯도 했다.

버리고 가려는 줄 알았는데. 하긴, 그럴 거였으면 안전 구역에 오지도 않았겠지…….

태헌의 감정을 모르는 연오는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히 설명했다.

“유성구에 중형 균열이 계속 생기고 있어서 본부장님들이 도와주시기 어려울 겁니다. 일단 알아낸 번호 이용해서 상황을 좀 보고 감사실에 정황 증거라도 알려주면서 조사해 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택시에서 박이정 에스퍼랑 통화했는데, 가이드가 모자라서 바로 감사실에 얘기하면 흐지부지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고요.”

박이정. 귀에 거슬리는 이름이 또 나왔다. 태헌은 성질을 부리지 않으려고 애썼고, 가까스로 성공했다. 통증이 심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 새벽에 박이정이랑 통화했어요?”

“네……. 섣불리 움직였다가 일을 망칠까 봐. 전 센터 분위기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박이정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뒤집던 태헌을 알기에 연오의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태헌은 연오의 얼굴로 쏟아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저 머리채를 잡았던 순간을 곱씹어 보았다. 그때도 박이정이 있었다.

태헌은 이유 없이 꺼림칙한 이름을 되뇌며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박이정 가이딩한 적 있어요?”

“……네? 아니요. 아, 전에는 정말 그냥 쉬려고…….”

“상관없고, 앞으로도 박이정은 가이딩하지 마요.”

태헌은 약속을 받아내려는 듯 매섭고 단단한 눈으로 연오를 응시했다. 강요에 가까운 권유라 연오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태헌의 얼굴에 연기 같은 안도가 스쳤다.

“그 새끼 찜찜해요. 왠지 가이드 한 명쯤 죽였을 것 같다니까.”

잦아드는 속삭임의 끝을 잡아챈 연오가 움찔했다. 박이정의 과거를 들은 연오로서는 태연히 들어 넘길 수 없는 소리였다. 기억을 잃기 전부터 알고 있던 정보가 예감의 형태로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순수한 태헌의 감일까. 어느 쪽이든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박이정과 있는 걸 그렇게 싫어했던 것도…….

연오는 의외로운 마음으로 태헌을 관찰했다. 그는 자기가 엉겁결에 진실을 뱉은 줄도 모르고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릎을 펴고 똑바로 서는 동작이 제법 자연스럽고 시원했다.

“이제 좀 덜 아파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태헌이 연오를 내려다보았다. 연오는 죄지은 것도 없이 찔끔하여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전보다 말하는 게 차분하고 움직이는 것도 한결 편해 보이고, 그래서요.”

태헌은 뒤늦게 자기 자신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덜 아팠고,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근원 모를 화도 줄었다. 아까도 성질을 부리지 않고 참을 수 있었다. 연오의 말을 듣고 보니 방금까지 이어진 대화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이리저리 튀기는 했어도 성질내지 않고 대화할 수 있었으니까.

아프지 않은 감각을 잊었듯 아프지 않을 때의 삶도 잊고 있었나. 쓰디쓴 자각과 동시에 태헌의 입술 끝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웃겨요? 아플 때는 있는 대로 성질부리다가 좀 덜 아프다고 달라진 게.”

갑작스러운 자조가 연오를 놀라게 했다. 그의 표정에서 이미 대답을 들었음에도 태헌은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비웃어도 돼요. 나도 웃기니까.”

“하나도 안 웃깁니다.”

연오가 앉은 채로 주먹을 꼭 쥐었다. 시선을 정면으로 맞대 오는 표정은 결연하기까지 했다.

“덜 아파서 살 만하다는데 왜 비웃어요. 오히려 고맙고 축하할 일 아닌가요.”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태헌이 연오의 뇌리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고통에 짓눌린 채 살고 싶어서 울던 그를 누가 비웃을 수 있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으깨진 이의 몸에서 흐른 진액을 본성이라 부를 수 있나. 적어도 연오만큼은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피하지 않고 태헌을 직시했다. 태헌의 애원이 자신의 영혼에 닿았듯, 이 말도 그의 메마른 영혼을 적셔 주길 바라면서.

“축하해요.”

“…….”

“앞으로도 안 아프게 열심히 가이딩할게요.”

연오의 말은 태헌을 적시지 않고 그를 쪼개 버렸다. 담담한 축하는 바위처럼 꽝꽝 언 뇌를 내리찍는 창이었다. 태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로 꿰뚫린 채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갑자기 온몸이 간지러웠고 숨구멍이 좁아진 듯 호흡이 급해졌다. 첫봄 앞에 선 풋내기처럼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이건 잃어버린 기억이 보내는 신호가 아니었다. 태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신인 채로 소리 없이 전율했다.

‘태헌이’ 운운하며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강연오는 그대로였다. 당신을 걱정한다고, 언제든 가이딩해 주겠다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약속했던 그 강연오였다.

“됐으니까 자기 몸이나 잘 챙겨요.”

당연히, 애써 퉁명스럽게 뱉은 그 말에는 어떤 가시도 없었다. 연오는 말간 웃음으로 서투른 염려를 받아냈다.

-

최인열은 은근한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귀신 같은 얼굴로 찾아온 연오가 반드시 무슨 짓을 했는지 밝혀내겠다고 엄포를 놓은 탓이었다. 그래봐야 한참 어린 애송이의 알맹이 없는 협박일 뿐인데, 연오의 눈빛이 워낙 살벌했어서 퍼뜩퍼뜩 생각이 나곤 했다.

그러나 유성구에서 며칠을 더 보내는 동안에도 연오는 조용했다. 폭주 상태에서 벗어났을 태헌도 연락이 없었다.

‘역시 입만 산 거였어.’

게다가 불안정한 상태인 태헌이 전력에서 제외된 후 유성구의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불안에 떨고만 있을 시간도 줄어들었다.

대피소로 들어간 주민들은 며칠 내내 폭음이 끊이질 않는 밖의 상황을 상상하며 불안에 떨어야 했고, 에스퍼들은 교대할 틈도 없이 중형 균열의 증식 괴물과 맞서 싸우느라 너덜너덜해졌으며, 가이드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아, 짜증 나.”

최인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관공서에 마련한 임시 가이딩실에 앉아 가이딩을 받던 에스퍼가 움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관리할 여유도 잃어버린 최인열은 그에게 대강 에너지를 밀어 넣었다.

맞은편에 앉은 에스퍼는 평소라면 상대도 안 할 B급이었다. 센터에서 근무를 시작한 첫해를 제외하면 B급 에스퍼와는 어깨조차 스친 적이 없는데, 별 대단치도 않은 사람에게 에너지를 보내고 있으니 아까웠다.

그러나 이것마저 안 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정태헌의 가이드로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 결정적인 순간에 가이딩을 거부했으니, 다른 에스퍼에게라도 제 몫을 해야 했다. 가이딩 본부장인 김현철의 너그럽고 무른 성품만 믿고 있다가 나중에 곤란해지는 것보다는 에너지를 조금 쓰는 게 나았다.

‘아깝게.’

가이드의 가이딩 에너지는 재산이다. 에스퍼와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화폐인 동시에 값이 매겨지는 물건이기도 하다. 가난하게 자란 최인열은 가이드로 각성한 열 살 때부터 이 물건을 최대한 비싼 값에 팔기로 다짐했다.

매칭률이 높은 S급 에스퍼를 만나 자신에게 각인시키고 싶었지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최인열은 A급 에스퍼만 골라서 가이딩하면서 자신과 잘 맞는 이를 물색했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A급 에스퍼 이준성을 전담할 뻔한 적도 있지만, 좀 더 강한 에스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기회를 차 버렸다. 뭐, 준성은 보험이기도 했다. 전담 신청이 무산된 게 몇 년 전인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건 그쪽이니까.

성격이 소심하고 한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준성은 자신에게 맹목적이었다.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안심되는 일이었다.

최인열은 붙잡고 있던 에스퍼의 손을 탁 놓았다.

“끝났어요.”

“조금만 더…….”

“끝났다고요. 다른 에스퍼들은 생각 안 해요? 가이드가 기계인 줄 알아요?”

최인열은 아쉬워하는 그를 매섭게 내쫓았다. 그가 나가자마자 다른 에스퍼가 지친 얼굴로 들어오는 걸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계획이 어그러지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S급 에스퍼 정태헌과 있을 텐데. 유성구의 균열이 딱 한 달만 늦게 열렸어도. 아니, 하다못해 대형이나 중형이 아니라 소형이기만 했어도!

새로 들어온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내내 최인열은 낭패감을 곱씹으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발만 동동 구를 순 없었다. 어긋난 계획을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하는 일이 더 급했다. 진실을 알아낼 거라고 으르던 강연오의 기세가 심상찮았으니 이쪽도 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어떻게 하지. 어떡하면 좋을까. 약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확실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귀중한 가이드이니 문제가 생긴다 해도 적당히 덮고 지나갈 수 있었다.

머리를 팽팽 굴리는 사이 가이딩이 끝났다. 가이딩에 집중할 수 없어서 에너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 B급이나 C급 아닌가. 다른 가이드한테 부탁해 보라지.

다시 문이 열렸다. 밤샘 가이딩을 하는 동안 날도 환하게 밝았는데 언제까지 이 찌꺼기들을 상대해야 하나. 침묵으로 탄식한 순간 최인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최인열 가이드.”

깜짝 놀라 시선을 드니 김현철이 태산처럼 서 있었다. 그 역시 밤새 다른 에스퍼들을 가이딩했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최인열을 내려다보는 눈은 묘하게 차가웠다.

“나랑 얘기 좀 하죠.”

갑작스러운 전개에 말을 잃었던 최인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현철을 대하는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이러나저러나 그도 앳되고 풋풋한 스물다섯 살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번에는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겁이 나서……. 지난번에 강연오 가이드가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하다가 쓰러졌다는 소문도 돌았고, 제가 한 번도 폭주 에스퍼 가이딩한 적이 없다 보니까 자신이 없었어요.”

“그것도 문제지만 지금 하려는 건 다른 얘깁니다.”

“네?”

김현철의 입가가 엄격하게 경직되었다.

“그동안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 제대로 한 거 맞아요?”

“……당연하죠.”

최인열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김현철은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며칠 조사했어요. 같이 행동한 에스퍼들 얘기를 들어 보니, 대형 균열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폭주했더군요. 정태헌 에스퍼는 몇 주간 두 명의 가이드로부터 가이딩을 받았고 지난주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이딩을 받았던데, 왜 그렇게 빨리 폭주했을까요. 이상하지 않아요?”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지금 본인 대신 안전 구역 들어가서 에너지 다 빨아 먹힌 강연오 가이드한테 책임을 돌리는 겁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최인열도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구석에 몰리기는 했지만 일단은 안심이었다. 말하는 걸 보니 김현철도 막연한 심증에 의지하고 있었다. 최인열로서는 대비할 시간이 있는 셈이었다.

유리한 침묵을 지키는 최인열을 지켜보던 김현철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샜다.

“최인열 가이드 욕심 있는 거 압니다. 에스퍼 가려 받을 때부터 보기 좋진 않았지만, 가이드 본부 식구고 이왕이면 높은 등급 에스퍼 가이딩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가서 에스퍼 본부장이 불평할 때도 막았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똑똑하고 욕심 있는 사람이니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고.”

“…….”

“날 실망시킨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최인열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김현철이 턱을 까딱하며 일어났다.

“통화해요.”

최인열은 김현철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핸드폰을 꺼냈다. ‘정태헌’이라는 글자가 화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최인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는 재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태헌 에스퍼?”

[가이드님. 지금 어디 있어요?]

태헌의 목소리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강연오가 온 힘을 다해 가이딩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의 폭주가 완전히 잦아들었음을 확인한 최인열이 마른침을 넘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를 꾸며냈다.

“저 지금 가이딩실이죠. 유성구 대기실 쪽……. 가이딩 못 가서 죄송해요.”

[그건 됐고요, 어느 가이딩실인데요? 주민센터라 그런지 못 찾겠네.]

“여기가…… 근데 그건 왜요?”

[왜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 핸드폰 너머가 조금 소란스러웠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잡음도 계속해서 섞여들었다. 최인열은 어쩐지 식은땀이 차기 시작한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정태헌의 기세가 이상했다. 어디가 이상하다고 정확히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최인열이 뭘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벌떡 일어난 순간, 차분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그쪽이 나 다 조져 놨잖아요.]

전화가 끊어진 순간, 임시 가이딩실의 문이 열렸다. 최인열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짐승과 마주친 듯 얼어붙었다. 어느 때보다도 살벌한 미소를 띤 태헌이 제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강연오 가이드랑 박이정은 고상하게 해결하려는 것 같아서.”

달칵, 문 잠그는 소리가 났다. 최인열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태헌은 다가와 압박하는 대신 문을 막고 선 채로 핸드폰을 조금 만졌다. 메시지를 보내는지 전화를 거는지 톡톡거리던 손가락이 뚝 멈추었다. 그의 눈에 새파란 이채가 어른거렸다.

“내가 직접 왔어요.”

정말 죽이기라도 할 기세에 눌린 최인열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 단말기의 비상 버튼을 누르려고 책상을 더듬거렸다. 그 순간, 단말기가 허공으로 날아가더니 최인열의 귀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누가 던지기라도 한 듯 떠오른 단말기는 시멘트벽에 퍽 부딪히며 그대로 박살이 났다. 까맣게 죽은 액정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새겨졌다.

태헌은 새파랗게 질린 최인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공기가 무겁게 최인열을 짓눌렀다. 이것이 S급 에스퍼의 이능인지 아닌지, 최인열은 분간할 수 없었다.

“정, 태헌 에스퍼, 갑자기 왜…….”

폭주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다. 이제껏 조용하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설마, 그 며칠 사이에 뭔가를 알아내기라도 한 것은…….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거든요. 당신한테 가이딩만 받으면 너무 나른하고 졸린 거야. 근데 병원 검사에서도 별 이상 없다고 하고, 다들 명현현상이라고 하고, 덜 아프니까 힘쓰기도 괜찮은 것 같고, 그래서 넘어갔는데.”

최인열에게 바짝 다가선 태헌이,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흐트러진 목깃을 다정한 척 매만져 주었다. 그리 덥지도 않은 곳에서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한 최인열은 그의 손가락이 맨살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지금까지 많은 에스퍼를 다뤄 왔지만 이런 미친 상황은 처음이었다. 감사실을 거치지도 않고 본부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이렇게 다짜고짜 밀고 들어와 사람을 추궁하다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최인열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상대는 S급 에스퍼다. 심지어 만성 가이딩 부족으로 성깔까지 더러운.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며 솜털까지 빳빳하게 곤두섰다.

“근데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재밌는 소식을 들었네?”

연오는 최인열의 핸드폰에서 봤던 번호를 박이정에게 넘겼다. 박이정은 유성구에서 바삐 뛰어다니는 중에도 관리지원실 지인에게 연락해 그 번호의 주인을 알아냈다. 이름은 이준성, 연구실 소속 A급 에스퍼.

“그 에스퍼가 맡은 일이 마약성 진통제 개발이라는 거야. 몸에 흔적도 안 남고 수면제 비슷한. 원래 더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다쳐서 죽어가는 에스퍼한테 주는 약이라던데.”

최인열이 이를 사리물었다. 정태헌은 아직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버티고 선 기세는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이 씨발 새끼야, 안 그래도 힘든데 내가 이상한 약까지 처먹어야 해요?”

옷깃을 만져 주던 태헌이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최인열의 몸이 마네킹처럼 앞뒤로 흔들렸다. 최인열은 본능적으로 태헌의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즈, 증거도 없이 왜 이래요. 내가 당신한테 약 먹였다는 증거 있어요? 강연오 가이드가 몇 마디 들은 것 때문인 모양인데 그 약 내…… 내가 먹는 약이에요. 완전히 다른 얘기였는데 오해한 거라고요!”

“그래? 그럼 너 그 빌어먹을 차 없이 지금 나 가이딩할 수 있어?”

살기등등한 어조였다. 최인열은 모욕감을 느끼기도 전에 가슴이 철렁했다.

사실 최인열의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자기 말이라면 쩔쩔매는 이준성을 통해 마약성 진통제를 얻어 차에 탄다. 마취 상태에 가까운 무통을 선사하는 차를 정태헌에게 먹이고 가이딩을 하면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늘어져 가이딩을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에스퍼의 몸이 거부하는 에너지를 억지로 밀어 넣는 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한두 달 정도 적응 기간을 가지며 신뢰를 쌓으면 거부 반응이 저절로 사라질 확률이 높다. 가이딩은 서로의 심리 상태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에스퍼가 ‘이 가이드는 나를 아프지 않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진짜 가이딩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은 과거 이준성에게 써먹었던 것이기도 했다. 성격이 소심하고 대인기피증이 심하던 이준성을 자신에게 홀딱 빠지게 했던, 바로 그 방법이었다. 그래서 최인열은 더욱 자신만만했다.

아마 태헌의 가이드 결벽증이 아주 심한 수준이며, 대인기피증과 가이드 결벽증은 천지 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최인열도 결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 지금 가이딩 가능하냐고 묻잖아.”

크지 않은 소리와 함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최인열은 자기가 뺨을 맞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흉터가 있는 쪽이었다.

“너 예전에 나한테 접근하다 다쳤다며. 그때도 이상한 짓 하려고 한 거 아니야?”

같은 쪽 뺨에 다시 불이 붙었다. 적당한 통증과 심한 모욕감을 주는, 강하지 않은 손찌검이었다. 이런 식으로 맞은 적이 처음인 최인열은 당황해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뒤틀린 시야 끝에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박살 난 단말기가 걸렸다. 머릿속이 멍해진 순간 갑자기 몸이 떠밀렸다.

“악!”

짤막한 비명과 함께 최인열의 무릎이 꺾였다. 그를 구석으로 밀어 버린 정태헌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그는 넘어진 최인열의 무릎에 무심히 발을 얹었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테이블의 핸드폰에 닿았다. 그러나 당황한 최인열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이런 짓 하면 후회할 거예요. 아무 증거도 없이, 안 그래도 요즘 가이드 모자란데……!”

“이러면 정말 큰일 나나?”

태헌은 허술한 과학 실험의 결과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눈에는 괴이한 순수마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어른의 세계는 완벽한 줄 알았거든. 완성된 시스템이 조직을 움직이고, 모든 일이 통계와 확률에 의해 결정되고, 그러니까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할 틈이 없고.”

태헌의 무게 중심이 최인열의 무릎을 짓밟은 다리로 점점 옮겨갔다. 관절이 어긋난 채 짓눌리는 느낌에 최인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그는 이런 식의 폭력에 면역이 없었다. 위험한 에스퍼는 전부 피하면서 살아온 안전한…….

“아아아악!”

급작스레 들이닥친 통증에 최인열의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태헌은 반쯤 이성이 사라진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근데 실제로 겪어 보니까, 꼭 중학교 학생회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허점이 너무 많아.”

최인열이 이용한 것도 그 허점 중 하나였다. 매칭률을 측정하는 기계는 있어도 에스퍼의 ‘충전도’를 측정하는 기계는 없다는 허점. 에스퍼의 건강을 일반 의학에 맡겨야 하는 현실의 한계. 또한 언제까지 주먹구구로 일해야 하느냐 불평하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공직 사회의 기묘한 해이.

에스퍼를 움직여 균열만 제대로 정리하고, 나머지야 대충 굴러가는 대로 굴리면 된다는 나태함이 센터 곳곳에 스며 있었다.

타성에서 비롯된 한계는 미성년자의 눈에 더 환히 보일 때가 있다. 태헌은 미성년자가 아니었지만 현재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센터의 문제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허점을 좀 이용해 보려고.”

태헌의 발에 더한 힘이 실렸다. 최인열의 무릎은 정말 망가지기 직전이었다. 태헌은 이걸 부러뜨릴까, 가루로 만들어 버릴까 잠깐 고민했다.

“가이딩실에서 가이드를 패면 어떻게 되지? 감사실을 거치지 않고 내가 직접 패서 자백을 받으면 나한테 불이익이 있나? 내가 S급이라 그런지 강연오 팼을 때도 격리만 시키고 말던데.”

최인열의 얼굴이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입술이 달달 떨리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전혀 가련하지 않았다. 간도 작은 게. 능력도 안 되는 주제에 욕심이나 부리고. 강연오 반만 따라갔어도 이 지경은 안 됐을 텐데.

문득 떠오른 강연오 생각에 태헌이 낮게 웃었다. 그래, 강연오. 강연오가 이 일을 해결하겠다고 설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실거리는 강연오를 병실에 눕혀 둘 수만 있다면 좀 성가셔도 괜찮았다.

“나 진짜로 팰 건데. 요즘은 참기도 너무 힘들고.”

최인열의 숨이 가빠지며 동공이 극단적으로 축소되었다. 쉼 없이 오르내리는 가슴팍과 우스울 정도로 떨리는 팔다리를 외면한 태헌은 최인열 쪽으로 점점 몸을 기울였다. 태헌은 아직 제대로 닥치지도 않은 고통을 겁내는 그를 착실하게 압박해 나갔다.

그는 잘 알았다, 공포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을.

“입 열 마음 들면 얘기해요. 협조했다던 그 연구실 에스퍼 얘기도 좋고.”

태헌은 발을 위로 치켜들었다. 최인열이 목에 핏대를 세운 건 그때였다.

“내, 내 잘못 아니에요!”

“……뭐?”

태헌이 천천히 발을 내려놓았다.

머리카락이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린 최인열이 바삐 머리를 굴렸다. 이 에스퍼는 미쳤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차라리 감사실 조사를 받고 가이드 자격을 박탈당하는 게 낫지 여기서 이렇게 당할 수는 없다. 최인열은 정말 자기 무릎뼈를 가루로 만들려 했던 태헌을 보며 온몸을 떨었다.

생각해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갈 핑계를 만들어내!

그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태헌이 이미 언급하지 않았나. ‘협조했다는 연구실 에스퍼!’

“야…… 약 준 에스퍼, 저번에 정태헌 에스퍼한테 맞은 그 사람이에요. 이유도 모르고 맞았는데 정태헌 에스퍼가 별 처벌도 안 받고 넘어갔다고, 억울하다고…… 나한테 약 주면서 시킨 거라고요!”

급하게 만들어 낸 거짓말이라 구멍이 많았다. 최인열은 그 구멍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나도 그냥 힘없는 가이드예요. 아무리 연구직이라도 A급 에스퍼가 협박하면 어쩔 수 없다고요. 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재밌네.”

태헌이 물러났다. 일단 살았다, 최인열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러나 태헌은 자리를 뜨는 대신 테이블에 고이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들었죠? 안으로 들어와요. 삼자대면이라도 해야지 안 되겠네?”

탁, 핸드폰이 성의 없이 팽개쳐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최인열은 안으로 들어오는 이를 핏기 가신 얼굴로 바라보았다. 절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서울 연구실에서 안전하게 약을 폐기하고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야 할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인열아.”

“너…… 너 왜…….”

박이정으로부터 준성에 대한 얘기를 들은 태헌은 그 길로 서울로 달려갔다. 막무가내로 쳐들어가 겁먹은 준성을 질질 끌어냈다. 타고난 성격이 소심한지 아니면 전에 한 번 경험해본 S급 에스퍼의 무력에 겁을 먹었는지, 그는 사정을 묻기도 전에 진실을 털어놓았다.

‘인열이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애초에 약을 주지만 않았더라면……. 가이딩 욕심 때문에…….’

준성은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자신이 인열을 설득해 감사실로 가게 할 테니 제발 인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부탁했다. 태헌은 그제야 준성이 자기 손에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았던 그 새끼임을 알아차렸다. 씨발, 가지가지들 한다. 비웃으면서도 재밌는 생각이 났다.

태헌은 준성을 대전까지 끌고 내려왔다. 그런 다음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당연히 번거롭고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냥 최인열의 무릎뼈를 부수는 게 더 성질에 맞았다. 하지만…….

뭐, 강연오 대신 복수했다고 치지. 그러자 이 번거로운 짓도 싫지 않았다.

“이준성, 네가 왜 여기 있어?”

패닉에 빠져 입술까지 새파래진 최인열을 보던 태헌의 입술이 비틀렸다. 한 걸음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 주자 준성이 최인열 앞에 섰다. 최인열은 불안과 안도가 공존하는 얼굴로 준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상황 파악은 나중에 해도 된다. 일단은 저 미친 정태헌으로부터 달아나야 했다.

“나 좀, 일으켜 줘. 일단 여기서 나가자. 응?”

“…….”

“이준성!”

높아진 목소리에도 이준성은 꿈쩍하지 않았다. 반질반질 텅 빈 눈으로 최인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야, 이 모자란 새끼야!”

마지막 외침이 준성을 일깨웠다. 그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너, 너, 너…… 왜, 왜, 내, 내 탓 해?”

“뭐?”

“나, 나는, 너,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와, 왔는데……. 가, 가이딩도 자꾸, 안, 안 해주려고 하고, 네, 네가 약 주, 주면 가이딩, 가, 가이딩, 해 준다고…….”

“뭐라는 거야!”

흥분 때문인지 더듬는 증상이 더 심해졌다. 최인열은 잠깐 상황도 잊고 짜증스럽게 반문했다. 그때,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태헌이 조용히 웃었다.

“진짜 등신인가. 최인열은 나 전담하고 싶어 했는데 몰랐나 보네.”

준성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태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쐐기를 박았다.

“속도 좋다. 나 같으면 죽을 때까지 에너지 빨아먹었을 텐데.”

분노로 흐리멍덩하던 준성의 눈에 갑자기 빛이 돌아왔다. 여전히 주저앉아 있던 최인열이 경악한 얼굴로 태헌을 쏘아보다가 벽으로 더 바싹 붙었다. 꿈틀거리는 꼴이 벌레 같았다. 태헌은 저 무릎을 으깨 버리지 못한 걸 조금 후회했지만.

“가, 가, 가이딩해 줘.”

뒤처리는 저쪽에 맡기는 게 더 좋겠지. 어차피 둘 다 똑같은 쓰레기니까.

“이준성……! 너 미쳤어, 이거 안 놔!”

준성이 마르고 홀쭉한 몸으로 최인열을 덮쳤다. 아무리 연구직이라 해도 에스퍼는 에스퍼다. 그것도 A급. 최인열이 내내 까다롭게 굴며 이용만 한 모양이니, 에너지도 부족할 테고 울분도 쌓일 만큼 쌓였을 테고.

태헌은 쓱 핸드폰을 챙겼다. 임시 가이딩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걸음이 더없이 가벼웠다. 나가기 전에 손잡이의 안쪽 버튼을 눌러 문을 잠그자 달칵, 걸리는 소리가 났다. 그 뒤로 이어진 최인열의 비명.

아, 기분 좋다. 이제 강연오도 피곤한 몸으로 일 해결하겠다고 쏘다니지 않겠지. 얼마 전에 가이딩도 받았겠다 껄끄러운 일도 해결했겠다, 마음이 가뿐해지자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강연오의 감사 인사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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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헌이 동분서주하는 사이 유성구의 균열이 천천히 정리되어 갔다. 여진처럼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균열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소형이라 모두 여유를 되찾았다. 지친 에스퍼와 가이드도 주민센터에서 쪽잠을 자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숙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폭주 가이딩 후 내내 병실에 있던 연오는 지금 급한 걸음으로 호텔 복도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한주연으로부터 들은, 믿을 수 없는 소식 때문이었다.

한주연이 알려 준 태헌의 객실 앞에 서서 연오는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태헌이 금세 밖으로 나왔다.

“강연오 가이드.”

밤에 푹 자고 일어나서 막 씻었는지, 그는 낙낙한 흰 티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 끝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흰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친 운동을 마치고 개운하게 씻은 소년처럼 활기차 보였다.

“인사하러 왔어요?”

“네?”

“최인열 일 해결해 줘서 고맙다고 하러 왔냐고요.”

설명하는 태헌은 드물게 친절했다. 그러나 연오는 입술을 잠시 깨물었을 뿐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최인열 일 때문에 온 건 맞다. 하지만 태헌의 기대대로 감사 인사를 하러 아침부터 달려온 건 아니었다. 연오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태헌이 문가에 선 자세 그대로 상황을 전했다.

“아직 못 들었나 보네. 최인열 그 새끼, 이제 반 폐인 됐어요. A급 에스퍼한테 골수까지 빨렸을 테니 안 죽은 게 행운이지만.”

“……들었어요. 서울 연구실에 있던 A급 에스퍼가 갑자기 대전에 나타났다는 얘기도.”

“가이드들 소문 빠르네.”

태헌은 뻐기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더니 씩 웃었다. 잘 처리한 일을 자랑하는 듯한 태도에 연오는 순간 숨이 막혔다.

가이드 사회의 소문은 발 없는 말과 같다. 최인열이 저지른 일도, 또 정태헌이 벌인 일도 전부 퍼졌다. 그 소문이 균열에서 싸우고 나온 한주연 귀에까지 들어가 연오에게 전달된 것이다.

“감사실 통해서 해결할 생각이었습니다.”

“어느 세월에? 게다가 요즘 가이드 부족해서 징계도 제대로 안 나올 텐데.”

“…….”

“왜 표정이 안 좋아요? 잘됐잖아요, 귀찮은 일 없이 바로 해결하고 가이드님도 좀 더 쉴 수 있고.”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묻는 모습을, 연오는 복잡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태헌도 피해자다. 최인열의 거짓말 때문에 폭주까지 한 사람은 바로 정태헌이다. 그렇지만 아무 이능도 없는 가이드를 A급 에스퍼의 손에 먹잇감처럼 던져주고 ‘처리’를 맡긴 그 방식은…….

너무, 너무 어렸다.

연오가 알던 태헌이와는 너무 달랐다.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해서요.”

더듬거리며 겨우 내놓은 말에 태헌의 표정이 달라졌다.

칭찬해줄 줄 알았는데.

성질을 부리고 싶었지만 그는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연오의 말을 곱씹었다.

아마 기억을 잃기 전의 태헌이었다면 앞으로는 다른 방법을 쓰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내 방식이 너를 실망시켰다면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태헌은 그때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여 주는 강연오가 좋아졌다. 자기가 당한 짓은 전부 잊은 듯, 안 아프게 되어 축하한다고 말하던 강연오가 좋아졌다. 철없이.

“이런 방법은 안 돼요?”

“정태헌 에스퍼……. 그건…….”

연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최인열이 하려던 짓이 밝혀진 건 물론 기뻤다. 그렇지만 일을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해결해도 괜찮은 걸까. 통제되지 않는 정태헌, 미숙한 정신으로 너무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정태헌이 지극히 염려스러웠다.

연오가 하지 못한 말을 읽기라도 했을까. 태헌은 연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괜찮다고 해줘요.”

당신만은 괜찮다고 해줘.

연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차마 괜찮다고, 잘했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연오는 할 수 있는 말을 하기로 했다.

“다음에는 감사실 통해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태헌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연오로부터 조금 물러난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선언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개수작 부리다 인생이 끝장난 최인열에 대한 소문이 멀리까지 퍼져나갈 테니까.

“그러니까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좀 쉬어요.”

엷은 걱정마저 어린 말에도 연오는 차마 마주 웃지 못했다. 대신, 앞으로 섣불리 정태헌 옆에 다른 가이드를 붙이는 일은 그만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새 가이드 찾기’ 계획이 완전히 폐기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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