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그림자 (6/23)

5장. 그림자

그날 오후, 강연오와 정태헌, 한주연과 김현철은 대전지부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연오는 무거운 분위기에 멈칫했지만, 태헌은 자기 옆자리 의자를 쭉 빼주며 앉으라고 턱짓까지 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연오는 본부장들에게 인사를 챙긴 뒤 태헌 옆에 앉았다. 두 본부장은 잠시 서로 시선을 맞댄 후 약속이라도 한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한주연이었다.

“일단, 정태헌 너. 균열 뒤처리 때문에 정신없는데 너 왜 불렀는지 알지.”

“모르겠는데요.”

가이드 하나를 제대로 망쳐 놓은 주제에 당당하게 턱까지 치켜드는 모습에 한주연이 낮게 욕을 뱉었다.

“이 미친놈아. 너 계속 이렇게 막 나갈래?”

“일주일 넘게 뭔지도 모를 약 처먹었는데 패지도 못해요?”

“절차대로 했어야지!”

흥분하기 시작한 한주연을 김현철이 막았다. 태헌 앞에 선 김현철의 얼굴은 돌처럼 딱딱했다.

“최인열 가이드가 위법한 행동을 한 건 유감이에요, 정태헌 에스퍼.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최인열 가이드,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어요.”

“우연이네요. 저도 그 새끼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김현철은 그 당당한 대답에 턱을 떨어뜨릴 뻔했다.

최인열이 한 짓은, 그래, 가이드 본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가이딩 에너지를 제외하면 아무 힘도 없는 가이드를 가혹하게 망가뜨린 초능력자가 이렇게 태연할 줄이야. 최인열은 A급 에스퍼에게 모든 에너지를 강탈당하고 가까스로 도망쳤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복도를 달리며 제발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다른 가이드들이 그를 챙기지 않았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태헌을 질책할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이드를 단속하지 못한 것은 분명 자신의 실수였으므로. 유성구에 연달아 열린 균열 때문에 바빠서 신경을 못 썼다는 핑계는 너무나 남루했다.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을 깬 사람은 연오였다.

“저……. 이제 어떡하죠? 새 가이드를 찾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가이드 사회는 소문이 빠르다. 힘없는 일반인의 몸으로 괴물들 틈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풍문에 민감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태헌의 행동은 이미 멀리까지 알려졌을 테고, 가이드들은 최인열의 잘못보다 ‘최인열이 당한 짓’에 더 집중할 것이다. 태헌의 입장을 이해하는 가이드가 있다 해도 선뜻 그를 가이딩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게 뻔했다.

상황을 잘 아는 두 본부장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주연은 며칠 사이에 마른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연오와 태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연오는 그녀의 눈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며칠 내내 균열에서 싸워야 했을 그녀의 고충이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졌다.

충분한 가이딩을 받을 수 있는 한주연도 전투 후에는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태헌은 어땠을까. 연오는 폭주까지 일으켰던 태헌을 살며시 바라보았다. 다행히 태헌은 괜찮아 보였지만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닐 거라는 불안이 치밀었다.

몸이 약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보다 더 나은 가이드가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고 정말로 애썼는데……. 연오는 쓴 입을 꾹 다물며 새삼스럽게 최인열을 원망했다. 그가 안 되는 가이딩을 붙들고 억지를 부리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주연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진 연오의 생각을 잘라냈다.

“지금으로서는 연오, 네가 정태헌의 유일한 가이드야. 네 몸이 좋지 않으니까 충분한 가이딩은 무리인데, 새 가이드 찾는 일까지 어려워졌어. 일단 너희 매칭률부터 높여야 할 것 같다.”

연오는 고작 50퍼센트에 불과했던 태헌과의 매칭률을 떠올리며 머리를 떨어뜨렸다. 인천지부에서 만난 이들도 ‘애매하다’고 평했던 매칭률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신은 정말 태헌을 사랑하는데 왜 매칭률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역시 태헌의 마음이 변해서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태헌이 기억을 잃기 전에 수술을 받을걸.

오래된 후회가 다시 입 안에서 버석거렸다. 의미 없는 짓임을 아는데도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자신만만한 태헌의 음성이 연오의 그림자를 조금 걷어냈다.

“매칭률 올랐을 거예요.”

태헌은 연오와 잠깐 시선을 얽었다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주연과 김현철을 번갈아 보며 다시 한번 확언했다.

“확실히 올랐을 거니까, 다시 검사해 볼게요.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그 뒤로도 오를 가능성 크잖아요.”

“어떻게 확신합니까?”

김현철이 기가 찬 듯 되물었으나 한주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움직이자. 확인해 봐야지.”

그녀는 쉴 틈도 없는 인생을 원망하며 먼저 태헌을 이끌었다.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던 태헌이 힐끗 연오를 돌아보았다. 따라오라는 뜻이 분명해 연오가 얼른 일어난 순간.

“강연오 가이드, 잠깐만요.”

김현철이 연오를 붙들었다.

연오는 영문도 모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김현철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연오를 바라보다가 코로 긴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네? 네, 괜찮습니다.”

“가이딩하는 거 무서워했잖아요. 매칭률 올리려면 정태헌 에스퍼와 이런저런 일도 해야 할 텐데 괜찮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제가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연오는 무례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반문했다.

안전 구역에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던 경험은 연오로서도 충격이었다. 태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오직 사랑만 한다고 믿었는데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연오는 결국 안전 구역으로 들어갔고 살려 달라고 우는 태헌을 구했다. 앞으로도 그때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

안 괜찮다고 태헌을 내버려 둘 수 있는가. 만성 가이딩 부족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태헌은 언제든 다시 아플 수 있다. 다른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연오 자신이 생명을 걸고 그를 책임져야 했다.

김현철은 허를 찔린 표정으로 긴 침묵을 지켰다. 곧 그가 무겁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대인 가이딩 말고 다른 방법이 있기는 한데.”

“본부장님, 뭐 하세요. 안 와요?”

돌아온 한주연이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김현철은 하던 말을 맺지 못하고 연오와 함께 일어섰다. 연오는 스치는 듯한 그의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뭐가 위험하다는 걸까. 연오는 자기 옆에 선 김현철을 돌아보며 질문하려 했지만, 꾸물거리기에는 한주연의 걸음이 너무 빨랐다. 연오는 결국 김현철이 하려던 말을 듣지 못했다.

-

매칭률 측정실에 혼자 남아 연오를 기다리는 동안, 태헌은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자기 마음을 구석구석 들여다보았다.

원래는 강연오가 싫었다. 싫었던 이유야 나열하자면 끝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호구 잡았고 어쩌고 하는 얘기야 상처 주려고 했던 의미 없는 얘기니 논외로 치더라도, 태헌은 정말로 연오가 싫었다.

몸이 아파 입원했다는 사람 앞에서 기억 운운하며 마음 아파하다니,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야 내가 다 아플 테니 네가 나 대신 병원에 누워 있으라고 쏘아붙이는 대신, 태헌은 연오에게 가장 상처 줄 수 있는 말을 골라 푹푹 쑤셔 넣었다. 치명상을 입은 듯 얼어붙던 연오의 모습은 은밀한 쾌감마저 선사했다. 혼자 아프고 싶지 않다는 치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강연오에게 반응하는 몸이 태헌의 혼란을 키웠다. 강연오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은데 몸은 강연오만 원한다니, 보이지 않는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제 마음도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절절하게 매달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강연오까지 봐야 하는 상황이 숨 막혔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강연오가 새 가이드를 구하겠다고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속이 뒤틀렸다. 그 일 때문에 박이정과 붙어 다니는 모습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였고. 무의식 때문에? 아니면 만성적인 통증에 대한 화풀이?

온몸으로 좋아한다고 외쳐서 사람을 뒤흔들어 놓고 갑자기 훌쩍 떠나 버리려는 태도가…… 무서웠던가?

안전 구역에서 벌어진 일은 그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반항할 힘도 의지도 없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밀고 짓밟는 자신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강연오는 괜찮다고만 했다.

강연오가 가이딩을 거부했다고 말하던 최인열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아프고 불안정한 상태지만 태헌도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몸의 이상을 느끼면서도 강연오를 찾지 않고 최인열의 가이딩에 매달린 것은 이제 살길이 이것뿐이라는 절박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죽고 싶었던 순간에 강연오가 온 것이다……. 다른 가이드에게 자신을 맡기고 떠날 줄 알았는데. 대전의 안전 구역에서 연오를 본 순간 느낀 해일 같은 안도와.

‘앞으로도 안 아프게 열심히 가이딩할게요.’

그렇게 말한 순간의 연오가 선사한 기묘한 떨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연오의 말을 곱씹으며 태헌은 고민했다. 진짜 호구 잡힌 쪽은 자신이 아니라 강연오 아닐까? 그렇게 심한 말을 듣고 험한 짓을 당했는데도 선선히 웃어 보일 수 있다니, 그러다가 미친 에스퍼에게 잘못 걸리면 시체도 못 찾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자신이 잘 지켜야 하는 게 아닐까!

잘 나가던 생각이 엉뚱한 높이까지 도약했다. 정작 본인이 ‘미친 에스퍼’에 가깝다는 사실을 잊은 태헌은, 매칭률 측정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오를 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강연오가 싫지 않았다.

강연오는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도 이만큼 호감이 생겼으니, 당연히 매칭률도 올랐을 것이다.

“정태헌, 준비됐어?”

연오와 함께 들어온 한주연이 태헌의 상태를 확인했다. 태헌은 짤막한 대답만 내놓고 연오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이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연오의 얼굴 구석구석이 새롭게 다가왔다. 마냥 순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게 빠진 눈꼬리 끝이 살짝 올라간 모습이 야무졌다. 야윈 뺨이 묘하게 처연하고 가냘픈 느낌을 자아냈지만 눈동자에 박힌 심지만은 견고했다. 엷은 긴장이 어린 입술도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시작할까요.”

한주연의 말에 같이 들어온 줄도 몰랐던 직원이 앞으로 나섰다. 본부장 둘에게 불려 온 직원은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듯 삐거덕거리는 몸짓으로 연오와 태헌에게 기계 장치를 붙였다. 태헌은 낯선 이의 손이 제게 닿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경직되다가, 연오도 자기와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직원의 손이 가슴팍까지 들어왔을 때, 연오는 잠깐 호흡까지 중단하고 어깨를 굳혔다. 직원의 손이 사라진 후에야 긴 숨을 내쉬는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태헌의 마음으로 뛰어들었다. 이도 없으면서 주인의 손가락을 앙앙 깨무는 털 뭉치 강아지를 볼 때나 느낄 법한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측정 시작합니다.”

연오가 먼저 내민 손에 태헌의 손이 얹혔다.

진득한 침묵 속에서 태헌은 줄곧 연오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시선에 연오가 먼저 눈을 내리깔 정도였다. 태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헐렁한 옷 위로 드러난 연오의 가는 목이나 솜털이 덜 가신 뺨을 살폈다.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그때 작은 기계음과 종이 팔락거리는 소리가 태헌을 깨웠다. 직원이 막 인쇄된 차트를 들어 올리고 결과를 살피고 있었다. 연오는 물론 한주연과 김현철까지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태헌만은 여유로웠다. 몇 퍼센트까지 올랐을까. 육십? 칠십? 아니지, 팔십일지도 모른다.

“어…….”

종이에서 눈을 뗀 직원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난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한 장짜리 결과지를 한주연 쪽으로 슬쩍 내밀며 말을 아꼈다. 심각한 얼굴로 결과지를 받아 든 한주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42퍼센트야.”

“……네?”

되물은 쪽은 연오가 아니었다. 자기 청력이 또 문제를 일으킨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정태헌이었다. 그러나 한주연은 결과지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며 확인 사살했다.

“너희 매칭률 떨어졌다고.”

-

현재 사용되는 매칭률 측정기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 실제 가이딩을 통해 매칭률을 계산하는 측정기. 가이드의 에너지가 에스퍼 안으로 침투할 때의 효율성을 수치화하는 기계였다. 연오가 가이드 수술을 받은 직후에 사용했던 간이 측정기가 이쪽에 속한다. 오차는 3퍼센트 내외였다.

둘째로 서로의 감응을 종합해 매칭률을 구하는 측정기가 있다. 실제 가이딩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첫 번째 기계보다 측정 정확도가 높아 오차는 고작 1퍼센트 내외.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라 가이딩 효율도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는데, 이 두 번째 기계는 그 요소들의 변동마저 수치화하여 반영했다.

연오와 태헌이 사용한 측정기는 두 번째 기계인 데다 가장 최신 버전이었다. 즉 둘의 매칭률은 실제로 떨어진 것이다.

태헌은 측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연오는 잘못한 것도 없이 눈치를 살폈다. 둘을 진정시킨 한주연이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세 가지야. 첫째, 연오의 가이드 수술 부작용. 그것 때문에 가이딩 능력 자체가 떨어졌을 수도 있어. 재수술받으면 나아질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지.”

수술 부작용이라니, 태헌으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재빨리 맞은편의 연오를 살피자 아차 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태헌은 연오가 수술 부작용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떠밀려 제 몸을 챙기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둘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본 한주연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둘째로 연오의 생존 본능 때문일 수도 있고.”

“……생존 본능이요?”

“가이드 수술을 통해 ‘만들어진’ 후천적 가이드는 대체로 수명이 짧아. 에너지를 지나치게 많이 빼앗길수록 몸이 약해지니까. 그 한계를 의술로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이드 수술이 불법의 영역으로 넘어간 거기도 해.”

태헌은 이유 모를 초조함을 안고 연오를 바라보았다. 제 목숨이 실시간으로 깎여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한 연오를. 어째서인지 그를 대신해 자기가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우스웠다, 연오를 갉아먹으며 생존한 자신이 그를 대신해 화를 내다니.

“그러니까 연오의 몸이 더는 에너지를 넘기지 않으려 하는 걸지도 몰라. 물론 매칭률이 높아지면 적은 에너지로도 수월한 가이딩을 할 수 있겠지만, 몸은 그렇게 영리하지 않아. 일단 본능적으로 에스퍼에게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티는 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매칭률도 떨어져.”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인가요?”

“뭐…….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리 낙관적이지 않은 대답에 연오가 속상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진 정태헌이 한주연에게로 눈을 돌렸다.

“세 번째는요?”

“심리적 요인. 풀어서 말하면 너희 둘이 서로를 꺼리게 됐다는 거지. 드문 일은 아니야. 매칭률은 원래 오르기보다 떨어지기가 쉬워. 신뢰 같은 거지.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잖아.”

짧게 떨린 태헌의 눈동자가 연오에게로 향했다.

차라리 첫 번째나 두 번째 이유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세 번째라면?

안전 구역에 들어온 후에도 한참을 벌벌 떨기만 하던 연오의 모습이 불현듯 눈앞을 스쳤다. 그때의 연오는 분명 두려워하고 있었다. 교수대를 앞에 둔 사람처럼 의기소침하게 움츠린 목,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경련하던 팔다리,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움찔움찔 튀기만 하던 어깨. 모든 반응이 연오의 공포를 증언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매칭률이 떨어진 걸까.

그때, 연오의 단호한 음성이 태헌의 생각을 잘라냈다.

“서울 가자마자 최대한 빨리 수술받을게요. 그리고 제가 그동안 상태가 안 좋아서 식사를 좀 걸렀는데, 수술받고 제대로 챙겨 먹으면 훨씬 나을 거예요.”

연오는 그렇게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자신만만했다. 생존 본능 같은 거야 의지로 극복하면 되고, 심리적 요인이 원인일 리 없으니 거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태헌을 꺼리게 되었다니 말도 안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매칭률이 올랐을 거라고 단언한 태헌이 자신을 전보다 더 싫어하게 되었을 리도 없고.

연오는 의욕적인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헌을 부드럽게 달랬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태헌 에스퍼. 나노 로봇 수술이라 오래 걸리지도 않고 회복 시간도 거의 없습니다. 며칠 안에 매칭률 측정 다시 해볼 수 있을 거예요. 그땐 좀 더 올라 있겠죠.”

희망찬 말에도 태헌은 웃을 수 없었다. 이 매칭률 하락의 이유가 연오의 두려움에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우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태헌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연오가 어색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이 상황을 더 지켜보기가 힘들었던 김현철이 연오의 어깨를 감싸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태헌은 나가면서도 끝까지 자기를 힐끔거리며 안심시키려 드는 연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탁,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둘은 각자의 공간으로 갈라졌다.

“너도 좀 쉬면서 기다려. 둘 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시적으로 내려간 걸지도 몰라.”

한주연이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태헌 맞은편에 앉았다. 태헌은 그때까지도 닫힌 문에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8퍼센트나 떨어졌어요. 컨디션 때문은 아닐 거예요.”

“일단 재수술 기다려 봐. 이번에 수술하면 나중에 칩 제거해도 일반인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텐데, 그것도 문제네.”

혼잣말처럼 덧붙여진 한주연의 푸념에 태헌의 시선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라 오히려 텅 비어버린 얼굴에 의문과 혼란이 빼곡히 새겨졌다.

“그게 왜 문제인데요?”

“그야 6개월 지나기 전에 칩 제거 못 하면 계속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니까 그렇지. 빼려면 지금인데 네 상황이 엉망이잖아.”

개인적인 감정만 생각하면 연오에게 칩을 제거하라고 권하는 편이 맞았다. 그러나 한주연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연오를 아끼는 마음에 태헌에게 다른 가이드를 찾으라는 압박을 주기도 했지만, 연오를 대신할 가이드가 없는 지금은 결정이 달라져야 했다.

“지금이라도 빼면…….”

“뭐라고? 안 들려.”

고뇌에 잠겼던 한주연이 고개를 들자 태헌과 눈이 마주쳤다. 태헌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번역된 책처럼 멍하게 앉아 있었다. 한주연은 순간, 자기가 태헌을 읽지 못하는 것만큼 태헌도 스스로를 읽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했다.

잠시 후, 태헌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슬쩍 미끄러졌다.

“됐어요.”

측정실에는 한주연의 한숨만 남았다. 유성구 균열이 잘 정리되었으니 기뻐야 하는데 서울로 돌아가 해결할 일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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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과 함께 먼저 밖으로 나온 연오는 공간 이동을 통해 곧장 서울로 가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공간 이동을 담당하는 에스퍼는 유성구가 균열 위기에 시달리는 동안 각지의 능력자들을 실어나르느라 탈진하고 말았다.

“일단 여기서 며칠 기다리죠. 어차피 나랑 한주연 본부장도 처리할 게 많아서 당장은 같이 못 돌아가요.”

김현철이 차분한 목소리로 달랬지만 연오는 마음이 급했다. 하루라도 빨리 재수술을 받아 매칭률을 다시 측정해 보고 싶었다. 태헌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태헌에 대한 자신의 헌신이 손상되지 않았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제가 셔틀버스 타고 가면 되지 않을까요? 저녁에 바로 수술할 수 있을 텐데.”

김현철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연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낸 김현철이 연오를 로비 구석으로 이끌었다. 빈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간 후에는 연오에게 자리를 권했다.

커다란 회의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앉은 연오가 슬쩍 김현철의 눈치를 살핀 순간.

“강연오 가이드, 나는 재수술이 아니라 칩 제거를 권해주고 싶네요. 수술 후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칩을 빼면 괜찮을 겁니다.”

김현철은 미리 준비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처럼 막힘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연오가 멍하게 침묵을 지키는 동안 김현철의 음성은 점점 더 단호해졌다.

“한주연 본부장은 절대 칩 제거를 권하지 않을 거예요. 에스퍼 본부를 맡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죠. 난 다른 일을 맡고 있으니까 다른 제안을 하는 겁니다. 강연오 가이드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라도 칩을 제거한 다음 학교로 돌아가요.”

학교.

연오는 그 단어가 지나치게 까마득하게 느껴져 깜짝 놀랐다. 예전에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그토록 애썼는데 요즘은 학교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등교하고 공부하던 평범한 날들이 전생만큼 멀었다.

“S급인 정태헌 에스퍼가 폭주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우리로서는 정말 큰 손실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나라가 망하진 않아요. 지금까지도 많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죽었지만 어떻게든 굴려 왔습니다.”

정태헌과 최인열이 이용한 그 무수한 허점을 품고도 센터는 공공의 안전을 지켜 왔다. 주먹구구식 운영 때문에 희생된 이들도 적지 않겠으나 그건 본부장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든 된다’는 유일한 진리를 붙잡고 버틸 뿐. 김현철은 연오도 그 진리를 붙들고 멀리 달아나기를 바랐다.

연오가 안전 구역 입구에서 미친 사람처럼 떨지만 않았다면 김현철도 이런 권유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현철의 눈에 비친 연오는 이미 한계였다. 연오는 정태헌은커녕 자신의 두려움조차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위태로운 사람을 붙잡아 희생자로 만들 순 없었다.

김현철의 진심이 전해졌을까. 연오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현철은 침묵하는 연오를 기다려 주었다.

“태헌이 없었으면 저 대학도 못 갔을 거예요.”

다소 뜬금없는 첫마디가 김현철을 멈칫하게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뒤부터 계속 죽고 싶었거든요. 부모님의 마지막을 기억이라도 했으면 좀 달랐을 것 같기도 한데…… 저 아직도 균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못 해요. 그러다 보니까 더 미치겠더라고요. 속이 텅 빈 것 같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김현철에게 내밀한 개인사를 털어놓는 일이 쑥스럽고 민망해서, 연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빈틈을 태헌이가 전부 채웠어요. 상담 선생님은 한 사람한테 의존해서 우울을 덮으면 위험하다고 하셨는데 솔직히 어쩔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부서진 자아의 틈으로 태헌이 뿌리를 내렸고 연오는 그 뿌리에 매달려 생존했다. 그래서 연오는 혼자 있을 때도 태헌과 있는 것 같을 때가 많았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자각이 어렴풋하게나마 존재했지만 편안하고 익숙한 상태를 벗어날 의욕이나 용기가 없었다.

결국 연오는 태헌을 구하면서 자신을 살린 것이다. 그와 끈적끈적하게 유착되어 버린 자신의 자아를. 태헌의 옆자리를 다른 가이드에게 내어주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최인열에게 자리를 내주었던 것 역시 헌신보다는 생존 본능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연오의 웃음은 이제 조금도 힘겹지 않았다.

“수술하고 매칭률 올라가면 다 괜찮을 거예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현철이 깊은 탄식을 삼켰다. 그의 눈에 비친 연오의 얼굴은 비 갠 하늘처럼 한없이 맑기만 했다. 기이하고 위험한 천진이었다.

-

태헌은 발끝에 걸린 작은 돌멩이를 툭 찼다. 돌멩이라기보다는 조금 큰 모래알이라고 해야 옳을 그것은 아스팔트 바닥에서 튕기듯 구르다가 커다란 타이어에 톡 부딪혔다. 연오를 서울로 데려다줄 버스의 타이어에.

대전지부 센터의 정문을 통과해 지상 주차장으로 종종걸음치는 연오를 보며, 태헌은 이제껏 곱씹은 고민을 다시 되뇌었다.

‘칩 빼라고 말해야 하나?’

한주연은 지금이라도 칩 제거 수술을 받으면 후유증도 차차 사라질 거라고 했다. 태헌은 불쌍함을 넘어 답답할 정도로 야윈 연오를 응시하다가 마음을 정했다.

‘빼라고 하자. 난 괜찮다고 하자.’

전처럼 아픈 상태였다면 이런 결심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연오를 구명 튜브 취급하며 있는 힘껏 매달렸을 것이다. 이 결정도 결국 통증이 가라앉아 살 만한 지금만 내릴 수 있는 결정인 셈이다.

그러니까 지금이 가기 전에 말해야 한다.

“정태헌 에스퍼.”

짐도 거의 없는 연오가 태헌 앞에 섰다. 그가 나와 있을 줄 몰랐는지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정태헌 에스퍼도 지금 서울 가요?”

“아뇨. 최인열 일 때문에 처리할 게 많아서 며칠 있다가 같이 돌아가자고 하네요.”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미세한 동요를 알아차린 연오가 이상 신호를 읽어내려는 사람처럼 멈칫 입을 다물었다. 태헌은 연오의 입에서 가이딩이 더 필요하냐는 질문이 나오기 전에 선수를 빼앗았다.

“재수술받으러 가는 거죠?”

“네.”

“그거…….”

받지 마요.

그 짧은 한마디가 가시처럼 목에 탁 걸렸다.

강연오가 정말 사라지면 나는 어쩌지. 새 가이드를 찾지 못하면. 맞는 약도 개발되지 않고 가이딩 기계에도 적응하지 못하면. 또 전처럼 아프게 되는 건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벌떡벌떡 일어나 가슴을 움켜쥐고 씨근덕거리게 되는 건가. 안전 구역에서 폭주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게 되는 건가?

다짐하기는 쉬웠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기는 어려웠다. 그에게는 연오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연오의 가이딩이 간절했다. 이전에는 어떻게 그의 가이딩을 거절했나 싶을 정도로 절실했다.

연약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뜨겁게 치밀어올랐다. 지금까지 연오에게 했던 모든 짓보다, 시원하고 멋지게 ‘칩 빼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지금이 창피했다.

그때 깃털처럼 보드라운 한마디가 태헌의 수치심을 간지럽혔다.

“걱정하지 마세요. 문제없을 겁니다.”

그 음성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태헌의 말문이 트였다.

“후유증 심하다면서요.”

“안 심해요.”

연오는 정확하고 담담하게 고통을 부인하는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기억을 잃기 전의 태헌이 자신에게 고통을 감추었음을 알고 그렇게 마음 아파했으면서, 이제 자신이 그러고 있었다. 심지어 연오는 예전의 태헌이 했던 것처럼 적극적인 거짓말까지 덧붙였다.

“몸 관리 알아서 잘 하고 있고, 요즘은 수술도 워낙 발전해서 예전만큼 후유증 심하지도 않아요. 설령 칩을 제거한다고 해도 제가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요.”

거기까지 말하니 전에 태헌에게 들었던 말이 왕왕거리며 되살아났다.

‘힘은 내가 알아서 조절하고 있고, 요즘은 기계나 약도 워낙 잘 되어 있어서 굳이 사람한테 가이딩 안 받아도 돼. 그리고 네가 가이드 수술받아서 가이드가 된다고 쳐. 너랑 나랑 매칭률 높을지 안 높을지 어떻게 알아? 매칭률 높을 거라고 장담 못 하잖아.’

스물한 살 태헌의 방식으로 열다섯 살 태헌을 속이며 연오는 조금 웃었다. 끝내 고통을 감춘 태헌의 마음이 사랑이었을까 의심했던 시간이 참 부질없었다. 막상 비슷한 처지에 놓이니 통제할 틈도 없이 거짓말이 줄줄 나오는 것을.

그건 사랑이었다. 연오는 이제야 확신했다. 이 마음에 사랑 말고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사랑받았음을 깨닫자 온몸이 북이라도 된 듯 둥둥 울려댔다.

“그럼 나중에 측정실에서 봐요.”

연오는 짧은 인사와 함께 태헌을 지나쳤다.

태헌은 우두커니 선 채 연오를 눈으로 좇았다. 버스에 탄 연오는 창문 너머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붙박인 듯 선 태헌을 흘끗 돌아보고 고개를 꾸벅해 보이는 움직임이 못내 어색하면서도 다정했다.

태헌은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어째서인지 숨이 막혔다.

강연오를 끔찍하게 사랑했다는 ‘태헌이’가 여기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버스에 탄 연오를 억지로 끌어내려서라도 재수술을 막았을까. 막무가내로 우겨서라도 칩 제거 수술을 받게 했을까. 자기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든 말든 연오부터 구하고 홀가분하게 웃었을까.

그러나 강연오에게 꿰뚫린 후에도, 정태헌은 정태헌이지 ‘태헌이’가 아니었다.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을, 그는 아직 몰랐다. 그의 미성숙한 호감은 희생의 영역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기억 잃은 자신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는데 지금만큼은 이상하게 수치스러웠다.

어쩌면 매칭률이 떨어진 건 강연오의 공포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이 강연오가 애타게 부르던 ‘태헌이’가 아니라 그런 것일지도.

치익, 에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에 시동이 걸렸다. 잠시 덜덜거리던 버스는 곧 부드럽게 출발해 지상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태헌은 돌아오지 않는 기억처럼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버스를 한참 바라만 보았다.

-

처음 가이드 수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연오는 열아홉 살이었다. 태헌이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파렴치하다는 막말을 쏟아냈을 때가 그때였다.

아버지와의 통화를 끝낸 태헌은 대학 입시에만 신경을 쓰라고 못을 박았다. 태헌의 기세가 너무나 강하고 단호해서, 연오는 한국대 합격증을 받을 때까지 가이드 수술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대학에 입학한 첫해, 스무 살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마무리까지 무난하지는 못했다. 12월 31일, 반짝거리는 노란 조명이 거리마다 촛불처럼 반짝거리고 함박눈이 요정처럼 춤추는 그날 연오가 시작한 말 때문이었다.

“태헌아, 요즘 많이 힘들어?”

연말을 보내기 위해 주문한 파티 음식 너머에서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의 태헌은 유난히 힘들어 보였다. 연오에게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스스로 고개를 젓기도 했다. 그런 이상한 모습이 스무 살의 연오에게 용기를 주었다.

“가이드 수술 관련해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화 안 내면 좋겠어, 태헌아.”

여러 번 연습한 말이 매끄러웠다.

태헌은 대답하는 대신 식탁에 정적이 깔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연말 분위기를 내겠다고 불을 끄고 노란 조명만 켜 둬서 주위가 어둑했는데, 그 어둑함이 침묵을 도드라지게 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연오는 태헌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지만 무용한 짓이었다. 빛과 어둠이 섞인 태헌의 얼굴이 조금,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잠긴 목을 푼 연오가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포크로 샐러드를 쿡 찔렀다. 불편해하는 연오를 알아차렸을 텐데도 태헌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너 계속 가이딩 못 받고 지낼 수는 없잖아. 나 대학교도 갔고, 일 년 다녔으면 경험할 거 대충 다 경험했다고 생각해. 수술받고 센터에서 근무하면서도 학교 졸업할 수 있대.”

“…….”

“그리고 몸 안 좋아지는 거, 그거 사람마다 다르대. 밥 잘 챙겨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면 괜찮을 수도 있다나 봐. 당뇨 같은 거 있잖아, 심해지기 전에 꾸준히 관리하면 괜찮은 거. 그런 거라던데.”

“…….”

“그리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는 게 더 좋다고……. 그러면 가이드 자연 각성할 가능성도 커진대.”

오래된 신문 기사를 찾아 알아낸 정보였다. 태헌이 이번에도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묻는다면 신문에서 봤다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태헌은 어디서 들은 얘기냐고 캐묻지 않았다. 연오를 직시하던 검고 깊은 눈이 심연처럼 움푹 깊어지더니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연오가 그의 울음기를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굵은 눈물이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태헌아.”

연오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태헌의 옆으로 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그는 태헌의 흠뻑 젖은 뺨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그때 태헌이 연오의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평소답지 않은 동요에 놀란 연오의 귓가로 애처로운 음성이 내려앉았다.

“정말 그래 줄 거야?”

환희에 가까운 반가움이 연오를 적셨다. 태헌을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고 기뻤다. 연오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구 말을 쏟아냈다.

“응, 당연하지. 나 당장이라도 수술받을 수 있어. 불법이긴 한데 암암리에 다 할 수 있대. 우리 내일 당장 센터 갈까? 그럼, 그럼 나 지금 한주연 본부장님한테 문자 드릴게. 너무 늦었나? 네가 말씀드릴래? 나 수술받으면 밥도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건강 관리 잘할게. 너 걱정할 일 하나도 없게 할게.”

태헌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말들을 가만가만 마음에 담았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머잖아 고단한 머리가 툭, 떨어지더니 눈물에 젖은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미친 새끼…….”

“응? 뭐라고?”

워낙 작은 소리라 제대로 듣지 못한 연오가 태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 순간, 태헌이 연오의 손을 뿌리치듯 쳐냈다. 연오가 거의 경험한 적 없는 명확한 거부의 표시였다.

“태헌아, 왜…….”

“연오야, 우리 헤어지자.”

쿵,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연오의 빗장뼈를 부수고 심장까지 내려앉았다. 너무나 갑작스레 나온 말이라 고통보다는 압박감과 놀라움이 훨씬 컸다. 연오는 불시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만 크게 뜬 채 얼어붙었다.

헤어지자니. 태헌이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한 건가? 연오는 태헌과의 이별을 상상할 수 없었다. 둘의 자아는 하반신이 붙은 샴쌍둥이나 마찬가지였다. 태헌은 어떨지 몰라도 연오는 그랬다.

그런데 헤어지자니?

“나 때문에 수술받겠다는 거잖아. 차라리 헤어지자.”

태헌의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울음에 먹혀 축축하고 중간중간 꺽꺽거리는 소리까지 섞였다.

아마 현재의 연오였다면 태헌이 그때 정서적 슬픔과 신체적 고통에 동시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연오는 태헌의 고통에 대해 무지했다. 서운함부터 치밀어오른 건 당연지사였다. 연오는 바닥에 앉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 넌 그게 쉬워?”

“너 수술대 오르는 거 보는 것보단 쉬워.”

“내가 조사했잖아. 관리 잘 해주면 된대.”

“연오야, 제발.”

닦아줄 수도 없는 태헌의 눈물을, 연오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밖에는 축제처럼 함박눈이 쏟아지는데 태헌의 얼굴은 그 자체로 무덤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기이한 체념마저 전해지는 표정이 연오를 두렵게 했다.

“내가 네 인생 망칠까 봐 무서워.”

그 말은 토악질 같았다.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소리도 없이 뒤로 밀렸다. 태헌은 손도 안 댄 음식 앞을 떠나 침실로 들어갔다. 캐리어를 꺼내는 소리, 짐을 챙기느라 부산스러운 기척, 사이사이에 섞이는 울음소리. 연오는 별처럼 노란 조명만 빛나는 거실에 무릎을 꿇고 그 믿을 수 없는 소리들을 들었다.

태헌이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태헌이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짐을 제대로 챙기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그는 연오를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았다. 도망치는 듯 급하고 절박한 움직임에 연오의 눈이 커졌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고? 얘기도 제대로 안 끝내고?

“태헌아!”

연오는 튀어 오르듯 일어나 멀어지는 태헌의 등에 매달렸다. 그를 안고 두 손은 단단히 깍지를 꼈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마디까지 하얗게 질렸다. 연오는 울지도 못했다. 공황에 빠진 듯 창백한 얼굴에 새겨진 것은 공포뿐이었다.

“태헌아. 태헌아, 미안해. 미안해, 나 다시는 수술 얘기 안 할게. 너 거, 걱정돼서 그랬어. 너 요즘, 요즘에 계속 기분도 안 좋아 보이고 힘들어 보여서, 그래서. 네가 하지 말라면 안 할게. 안 할게, 정말 다시는 얘기 안 할게.”

숨쉬기가 어려웠다. 뇌로 가는 공기가 뚝 끊어진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시력은 멀쩡한데 앞에 보이는 상황을 제대로 해석하고 인지할 수가 없었다. 깍지 낀 손을 풀어내려는 태헌을 느낀 연오의 입에서 비명 같은 통곡이 터졌다. 억, 어억, 괴성 같은 숨소리가 현관을 채웠다.

“가지 마. 태헌, 아, 가지 마…….”

꽉 붙들려 있던 태헌이 어떻게 돌아섰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캐리어를 놓은 태헌이 제 몸을 안았을 때도 기억이 온전하진 않았다. 다만 마구 허물어지는 자신을 안은 태헌 역시 무너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 느낌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을 뿐.

그리고 그가 속삭였던 말도.

“나중에 내가 미쳐서 수술받으라고 하면 너 도망가야 돼. 내가 힘들고 아파서 죽겠으니까 수술받아달라고 하면 짐 싸고 돈 챙겨서 바로 도망가. 우리 부모님한테도 말하지 말고.”

연오는 엉망진창이 된 채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태헌과 헤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거짓말 정도야 쉽지 않은가. 태헌은 그런 연오를 품은 채 울음을 삼키며 속삭였다.

“내가 죽어가도 넌 날 내버려 둬야 해.”

“…….”

“내가 너한테 살려달라고 매달려도 버려야 돼. 할 수 있지?”

연오의 몸이 발작처럼 튀어 올랐다. 울음과 구분되지 않는 대답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응, 응.”

태헌은 안도하듯 연오를 안았다. 격양된 숨이 연오의 더운 뺨에 흩어졌다.

“그래. 그래, 괜찮을 거야. 넌 괜찮을 거야.”

그날, 둘은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애를 썼다. 다 식은 음식을 데워 먹고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위장하느라 평소보다 과장되게 웃고 떠들고 장난을 쳤다. 연오는 헤어지자던 말이 진심이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태헌이 챙겼던 짐은 모두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지만, 태헌은 끝내 헤어지자는 말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다. 곧 죽을 것처럼 서럽게 우는 연오를 봤으면서도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 무서울 정도로 단호한 태도가 연오의 입을 더욱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때의 태헌은 자신을 버리겠다는 대답을 믿었을까?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 연오는 그런 질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빛바랜 옛 사진을 매만지는 사람처럼 적막하고 쓸쓸한 그리움에 차서. 질문의 가장자리가 다 닳아버릴 때까지.

‘태헌이는 믿었을 거야.’

그러니 잘 살라는 유언과 함께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믿음을 저버린 게 되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내 무사를 빌었던 그의 사랑을 배반한 게 되나. 연오는 그 물음을 쪽지처럼 차곡차곡 접어 가슴 어딘가에 처박아 버렸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연오는 병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꿈속의 창 너머에는 함박눈이 날렸는데 지금은 여름의 문턱에 선 나무들이 짙푸른 손바닥을 흔들고 있었다. 재수술이 끝났고, 이제 새로운 계절이었다.

-

연오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하루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아무 맛도 안 나는 병원식도 어떻게든 씹어 삼켰다. 자신을 대신할 가이드가 나타날 희망이 흐려졌으니, 지금부터라도 온 힘을 다해 몸을 챙길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쉬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 병실 밖으로 나왔을 때,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연오의 병실을 등지고 무언가를 으적으적 씹고 있는 이는 박이정이었다. 그는 하얀 약병을 손바닥에 대고 두 번 쳤다. 와르르 쏟아진 무언가를 다시 입에 넣으며 그가 돌아섰다.

“어.”

연오가 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박이정이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입에 든 약을 급하게 삼킨 후 헛기침을 했다.

“약만 먹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벌써 나왔어요?”

“네. 그런데 왜…….”

연오의 말끝이 흐지부지 뭉개졌다. 왜 오셨냐고 묻고 싶은데 상대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았다. 박이정은 연오의 불편함을 읽고 재빨리 대답을 내놓았다.

“매칭률 측정실까지 데려다주려고요. 한주연 본부장님이 가이드님 아직 힘들 거라고 저 보냈어요. 문자도 보내 놨는데 못 보셨구나.”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과연 박이정 말대로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연오의 어색한 웃음을 확인한 박이정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부축해 드릴까요?”

“어제 내내 쉬어서 멀쩡해요. 근데 에스퍼님은 괜찮으세요?”

폭주를 겪은 태헌이 전력에서 이탈했으니, 남아서 균열을 정리한 한주연과 박이정이 애를 많이 썼을 것이다. 걱정을 지우지 못하고 건넨 물음에 박이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방금 먹은 거 가이딩 알약이라.”

“가이딩 알약……. 에스퍼님은 약 부작용 없으신가 봐요.”

태헌도 그랬다면 상황이 이렇게 나빠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쉬웠다. 연오는 박이정의 손에 들린 흰 약통을 부러운 듯 응시했다. 연오의 시선이 어디 꽂혔는지 알아차린 박이정이 약통을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도 원래 심했어요. 약도 안 듣고 기계도 안 듣고. 근데 제 전용 약이 나와서 좀 나아졌죠.”

“전용 약이요?”

전용 약이라니, 그럼 태헌은 왜 저런 약이 없을까. 약에 대해 더 자세히 물으려는 순간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제 각인 가이드 죽은 다음에 받았어요.”

매칭률 측정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둘뿐인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각인 가이드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분위기를 바꿨음을 안 박이정이 쉽게도 말을 돌렸다.

“가이드님은 좀 어때요? 폭주한 에스퍼 가이딩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괜찮았어요.”

“최인열 가이드 때문에도 마음고생 많았죠.”

최인열. 그 이름에 연오가 새삼스럽게 움찔했다. 최인열의 일이 해결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의 이름이 귀에서 낯설게 서걱거렸다.

“어제 센터 나갔어요. 트라우마 때문에 가이딩 자체가 불가능해졌다는데…… 연금도 안 나갈걸요. 최인열한테 약 준 A급 에스퍼도 감사실 불려갔고, 다른 곳으로 전출될 거래요.”

“…….”

“궁금할까 봐.”

“아,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다지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에 박이정이 멈칫했다. 그가 자신을 이상하게 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데도 연오는 달리 덧붙일 말을 찾지 못했다.

최인열 때문에 태헌이 위험했던 걸 생각하면 물론 화가 났다. 아픈 몸을 끌고 최인열에게 달려가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낼 거라고 엄포를 놓은 것도 분노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미 정리된 일이니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태헌과 관련된 현재의 일이 아니라면 뭐든 다 내던져버리는 기묘한 태도에 박이정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가이드에게 맹목적인 에스퍼는 여럿 봤지만 반대는 처음 봤다. 강연오 가이드 괜찮은 걸까, 의문을 붙들고 깊이 파고들기도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연오가 진지하게 말을 걸어 왔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매칭률 올리는 방법이 있을까요? 나중에 본부장님도 말씀해 주시겠지만 궁금해서요.”

“글쎄요, 매칭률…….”

한주연으로부터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들은 박이정이 난색을 표했다. 연오는 눈까지 빛내며 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박이정은 그의 열정적인 모습에 떠밀리듯 어영부영 말을 시작했다.

“좀 경솔한 에스퍼들은 매칭률을 ‘호감도 시스템’이라고 불러요. 근데 제가 느끼기에 매칭률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 둘의 궁합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아요.”

“궁합이요?”

“좀 옛날 말이죠?”

열 살 많은 나이가 새삼 민망해진 듯 박이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설명만은 충실했다.

“궁합은 종합적인 거잖아요. 서로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첫인상이나 잠재의식 속 평가에 영향을 많이 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매칭률은 생각보다 오르내리는 일이 잦아요. 사이 좋은 파트너끼리도 왜 오르고 왜 떨어졌는지 모르기도 하고.”

“네…….”

결국 과학으로 밝히기 어려운 분야라는 소리라 연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때 마침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박이정은 연오를 매칭률 측정실 앞까지 데려다주며 친절하게 격려했다.

“너무 긴장하면 안 좋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하세요. 그리고…… 앞으론 정태헌 에스퍼도 많이 노력하겠죠.”

태헌이 연오를 난폭하게 다루는 꼴을 목격한 적 있는 박이정이 한숨처럼 덧붙였다. 그런 다음 연오가 직접 문을 열 수 있도록 한 걸음 비켜서 주었다. 눈짓으로 고마움을 전한 연오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손잡이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혼자 앉은 태헌이 보였다.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에 올린 채 고개를 숙인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연오가 주춤거리며 문을 닫자 태헌이 시선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연오는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태헌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멎자마자 지독한 침묵이 측정실을 점령했다. 태헌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연오를 한참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재수술한 거예요?”

“네.”

재수술을 받았으니 여기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잘 알 텐데 질문이 묘했다.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연오는 손끝만 괴롭히며 침묵을 견뎠다. 태헌과 이렇게 고요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

“예전이었으면 수술 못 하게 했겠죠?”

앞뒤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질문이 연오를 흔들었다. 재수술을 받은 직후에 떠올린 기억 때문일까. 자신을 직시하는 태헌의 어둑한 눈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눈에 비치는 엷은 죄책감이 연오를 더 곤란하게 했다.

연오는 태헌이 쓸데없는 감정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공연한 미안함을 품는 것이 싫어서 연오는 일부러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정태헌 에스퍼랑 제가 알던 태헌이는 다른 사람이에요. 그런 생각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확하게 선을 긋는 말에 태헌의 입술이 굳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측정실 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왔다.

둘 모두에게 간단히 인사한 직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측정을 준비했다. 두 사람의 몸에 기계 장치를 부착하는 몸짓이 재빨랐다.

“본부장님 두 분이 아직 대전에 계신데 결과 빨리 받아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좀 서둘러서 진행하겠습니다. 손잡아 주세요.”

연오와 태헌은 전처럼 손을 맞잡았다. 태헌의 손이 아래로, 연오의 손이 위로 가 틈 없이 겹쳐졌다.

태헌은 연오의 몸이 조금 차가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창백한 걸 보니 회복도 다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매칭률이 올랐을 거라고 기대했다니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정도로 기막힌 바람이었다.

50퍼센트였던 매칭률이 42퍼센트로 떨어졌다. 매칭률이 30퍼센트 대로 떨어지면 정말로 답이 없다. S급 에스퍼와 유일한 가이드의 매칭률이 30퍼센트 대라니, 그렇게 되면 앞으로 가이딩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봐야 했다.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강한 압박에 연오가 잠시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측정실에 앉아 있던 며칠 전이 아득히 멀어진 자리에는, 매칭률이 더 떨어지지 않았기만을 비는 연약한 정태헌이 앉아 있었다.

연오도 간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굳은 각오로 재수술까지 감행했으니 뭔가 성과가 있어야 했다. 둘은 아주 오랜만에 한마음이 되어 결과지가 나올 프린터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끝나고 직원이 마침내 결과지를 손에 들었다.

“결과 나왔습니다.”

애매한 얼굴로 결과를 확인한 직원이 테이블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결과지 맨 위에 크게 적힌 숫자를 본 두 사람의 안색이 동시에 일변했다.

40퍼센트.

대전에서보다 더 형편없는 결과였다.

-

강연오와 정태헌의 매칭률 측정 결과는 곧바로 한주연에게 전달되었다. 대전에서 균열 이후 상황을 수습하던 한주연은 쌓인 일감도 몰아두고 곧바로 태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계속 떨어지는 매칭률에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태헌의 목소리가 멍했다. 이 새끼가 또 자기 가이드에게 성질을 부린 거 아닌가 걱정하던 한주연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런 일은 없었겠구나 했다. 태헌은 화를 낼 기운도 없어 보였다.

“매칭률 더 떨어졌다며. 너 연오 잃어버리면 이제 방법 없어. 앞으로라도 잘해줘.”

[그동안 안 잘해줘서 이 꼴이 났단 거예요?]

짜증스러운 반문이 되돌아왔다. 한주연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었다.

“기억 잃고 만나자마자 눈에 띄지도 말라고 해서 인천으로 쫓아 보냈지, 첫 번째 폭주 가이딩 때는 개 잡듯 잡았지, 그래놓고 다른 가이드 소개해 줄 때마다 성질부렸지, 두 번째 폭주 가이딩 때도 에너지 강제로 뺏었지……. 그래놓고 매칭률이 오르길 바랐어?”

그래도 생각은 있는지 태헌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한주연은 의식적으로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꼭 연오 마음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너희 둘 의지가 제일 중요해. 앞으로라도 성질 죽이고 좀 노력해 봐.”

그때 김현철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끊는다, 그렇게 말한 한주연이 통화를 끝냈다. 이제 얘도 정신 좀 차려야 하는데. 터지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한편 태헌은 조용해진 핸드폰을 붙잡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주연은 연오를 ‘그렇게’ 대해 놓고도 매칭률이 오르기를 바랐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면 최인열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험악하게 휘둘러 놓고 강연오가 계속 헌신할 거라 생각했느냐고. 최인열은 천하의 머저리였지만, 그 말만은 맞았는지도 모른다.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멀리 떠나 버린 기분이었다. 거절한 쪽은 자신이었으니 아쉬울 이유 하나 없는데 공연히 헛헛해지는 유치한 아쉬움과도 비슷했다. 그러나 사실 태헌의 마음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연오의 맹목은 기억을 잃고 불안정해진 태헌의 지지대였다.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지 않고 헌신하는 타인은 고통스럽고 불가해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진통제 역할을 했다. 다만 연오를 싫어한 태헌이 그것을 고집스럽게 외면했을 뿐. 그런데 지금은?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태헌이라면 연오와 깊이 있는 대화부터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태헌은 열다섯 소년, 진지한 대화는 간지럽고 민망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그래, 잘해주라 이거지.’

태헌도 할 수 있었다. 강연오와 전에 사귀었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차피 껍데기는 똑같지 않은가. 조금만 노력하면 강연오는 금방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꼭 그래야 했다.

가이딩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헌은 강연오를,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는 유일한 존재를 잃을 수 없었다.

구명보트에 구멍이 나면 땜질을 해서 고치지 않나. 관계도 비슷할 거다. 강연오 마음에 구멍이 났다면 잘 때워 주자.

그러나 다음 순간, 거창한 자신감에 실금을 내는 과거가 떠올랐다.

‘태헌이를 위해서예요, 정태헌 에스퍼. 기억 잃은 지금의 정태헌 에스퍼 말고요. 제가 예전에 사귀었던 그 사람.’

‘저도 예전 같지 않은 정태헌 에스퍼 오래 붙들 생각 없어요.’

핸드폰을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시발, 흉내라도 내야 하나?’

그렇게 태헌은 자기 위에 드리워진 ‘태헌이’의 그림자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연오조차 원하지 않는 상황임은 까맣게 모르는 채로. 마치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연적과 장렬히 싸워 이기는, 사춘기 소년처럼.

-

다음 날 아침, 연오는 초조한 얼굴로 센터 로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태헌과 통화했다. 그의 새 번호를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누구인지도 모르고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가 태헌임을 알자마자 왠지 긴장이 되어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관리지원실에 물어봤더니 알려주던데요.’

그런 대화를 끝으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연오는 태헌이 떨어진 매칭률 이야기를 하며 화를 낼까 봐 마음을 졸였지만, 그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만나요.’

‘네?’

‘내일 만나자고요. 매칭률도 올릴 겸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그래요. 옛날에 우리 뭐 많이 먹었어요?’

‘……어, 햄버거?’

뜬금없는 질문에 어울리는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전의 태헌은 실제로 햄버거를 무척 좋아했으므로.

연오가 아는 정태헌은 부잣집 도련님다운 성장 과정을 거쳤다. 균열 예측기도 없던 시절에 에스퍼와 가이드로 일하며 세상을 구하느라 너무 바빴던 부모님은 아들을 시터들의 손에 맡겼다. 명확한 규칙, 정돈된 생활, 수많은 제한 사항들. 부모의 사랑이 아닌 사무적인 보살핌에 의지하며 자란 태헌은 자주 답답함을 느꼈다.

특히 그는 음식에 대한 제한을 버거워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우연히 한 입 먹어 본 햄버거에 푹 빠졌던 앙증맞은 초등학생 때는 더욱 그랬다. 물론 정크 푸드는 ‘도련님’에게 허락된 음식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통제에 대한 보상 심리 탓인지 태헌은 유난히 햄버거를 좋아했다. 신선한 재료를 잔뜩 얹은 수제 버거가 아니라, 양상추는 시들고 패티는 짜부라진 전형적인 햄버거를 원했다. 연오에게 보여 주었던 어른스럽고 여유 있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면이었지만, 연오 눈에는 그 의외성마저도 귀여웠다.

‘둘이 같이 자주 먹었거든요. 학교 다닐 땐 진짜 거의 매일 사 먹기도 했어요. 학교 근처에 24시간 하는 곳이 있었는데 야자 끝나고 가자마자 두 개 다 세트로 시키고 감자튀김은 사이즈 업해서 엄청 먹고.’

지나간 추억이 떠올라 저절로 말이 많아졌고 경직되었던 어조도 말랑하게 풀렸다. 연오는 태헌이 한참 침묵을 지킨 후에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정태헌 에스퍼?’

‘추억이 뭐 그렇게 허접해요.’

‘…….’

허접하다니. 연오가 속상함에 입술을 꾹 깨문 순간.

‘그럼 내일 햄버거 먹으러 가요. 열한 시에 센터 로비에서 봐요.’

허접한 추억이라고 폄하할 때는 언제고 막무가내로 약속을 잡은 태헌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연오는 이게 약속이 잡힌 게 맞나 의심하면서도 일단 로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태헌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매칭률 때문이겠지. 갑자기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서, 연오는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재수술을 받았으니 수술 부작용을 핑계 삼아 거절할 수는 없다. 연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매칭률 하락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태헌과 좁은 공간에 둘만 남으면 갑자기 어깨가 경직되고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심장은 의지와 상관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런 상태인데 매칭률이 오를 리가.

내가 더 노력해야 하는데.

계속 매칭률 떨어져서 태헌이가 화내면 어떡하지.

“강연오 가이드.”

어깨를 건드리는 손 때문에 연오가 소스라쳤다. 홱 돌아보니 불쾌한 얼굴의 태헌이 서 있었다.

“뭐예요. 벌레라도 닿은 것처럼.”

“아, 아뇨…….”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깨어나 놀랐을 뿐인데 태헌은 뭔가 오해한 모양이었다. 제대로 해명하기도 전에 태헌이 성큼 앞장섰다.

“가요, 햄버거 먹으러. 얘기는 먹으면서 하고.”

이번만 참는다는 투였다.

다행히 센터와 멀지 않은 곳에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가 있었다. 태헌은 연오를 뒤에 남겨두고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고, 연오는 분주히 그를 뒤따랐다.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인지 아니면 태헌의 걸음이 너무 빠른 것인지 금세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태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가게로 들어갔다.

“시켜요.”

겨우 따라 들어온 연오를 보자마자 그가 키오스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제일 자주 먹었던 걸로.”

치즈버거 세트에 베이컨 새우버거 세트, 감자튀김은 둘 다 사이즈 업. 태헌이 카드를 꺼내자마자 연오가 재빨리 계산을 마쳤다. 카드를 든 손이 무안해진 태헌이 연오를 돌아보았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아뇨, 얻어먹기 좀 그래서.”

그냥 ‘좀 그래서’라기엔 방금의 동작이 너무 재빨랐다. 납득하지 못한 채 빤히 바라보자 연오가 어물거렸다.

“예전 일도 있고요. 전에도 매번 얻어먹진 않았습니다.”

예전 일.

태헌은 가까스로 연오가 언급한 일이 무엇인지 유추해냈다. 푼돈 모은 거지 운운한 것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냥 상처 입히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고 딱히 진심도 아니었는데, 이런 결과가 돌아오니 답답했다.

머리를 쥐어짰지만 과거를 지울 수 있는 그럴듯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구구절절한 변명보다 담백한 사과가 낫다는 사실을 잘 모르던 시절의 정태헌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태헌은 키오스크 앞을 떠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 아니었어요.”

“네?”

돈 얘기 후부터 불편하게 서 있기만 하던 연오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태헌은 자리에 앉은 다음 연오를 보지 않은 채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거지 어쩌고 한 거 진심 아니었다고요. 드라마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호구 잡고 그런 게 어딨어요. 그냥 성질나서 화풀이한 거예요. 내가 가이드님 때문에 기억까지 잃었다니까 짜증 나서 그냥.”

연오는 거의 숨도 안 쉬고 와르르 해명하는 태헌을 아득히 응시했다. 이런 서툰 태도가 신선했다.

그가 만나 왔던 태헌은 한 번도 이렇게 ‘어정쩡하게’ 군 적이 없었다. 연오가 쑥스러워해도 고마운 건 확실하게 고맙다고 했고,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이어도 미안한 일은 분명한 사과와 대화로 풀었다. 태헌도 고작 스무 살, 스물한 살의 청년이었음을 상기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막연히 태헌은 처음부터 완벽한 성격이었으리라 믿었다. 부모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기 어렵듯 태헌의 미숙한 시절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태헌이도 이럴 때가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다.

“뭐 거기 평생 서 있을 거예요?”

성마른 재촉에 연오는 얼른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괜히 시선을 피하며 영수증을 만지작거리는 태헌의 목과 귀뿌리가 시뻘겠다.

“예전에 있었던 일은 서로 잊자고요. 가이드님도 신경 안 쓰는 거 맞죠?”

넌 당연히 괜찮아야지, 그런 말로 들렸다. 반쯤은 우격다짐이고 반쯤은 떼를 쓰는 어조라, 연오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네.”

“앞으로는 잘해줄 테니까.”

‘잘해줄 테니까’라는 말은 너무 작아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태헌이 이런 말까지 하다니, 매칭률 결과가 충격적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헌이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만큼은 알겠는데, 감동이라기보다는 괜히 손끝이 아렸다.

“예전에 그 사람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잘해줄게요.”

때마침 그들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태헌은 벌떡 일어나서 픽업대로 갔다. 아마 연오가 말한 ‘태헌이’는 이렇게 했을 것 같아서.

연오가 ‘태헌이’ 운운하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 와서 그 사람 흉내를 내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마음이 형편없이 우그러들었다. 그러나 매칭률도 올려야 하고, 또 연오의 마음도 돌려야 하고, 자신을 바라보던 처음의 그 맹목적인 시선도 다시 얻어내야 하고…….

자존심은 잠시 접어둘 수밖에.

탁, 쟁반을 내려놓는 태헌의 손길이 조금 거칠었다.

“먹으면서 얘기해 봐요. 예전에 또 뭐 같이 했는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매칭률이 오르지 않으면 정말 못 견딜 것 같다.

태헌의 생각을 읽지 못한 연오는 잠자코 햄버거 포장을 뜯었다. 받아서는 안 될 호의를 받고 있는 듯 어색하고 초조했지만 입은 착실히 움직였다.

“태헌이랑은 같이 안 한 게 거의 없어요.”

“…….”

“합격하자마자 한국대 구경도 같이 했고 맛집도 엄청 다녔고 영화도 장르별로 많이 봤고, 만화 카페나 이색 카페나 전시회, 연극, 뮤지컬, 놀이공원, 워터파크, 심지어 어린애들 많이 데려가는 갯벌 체험이나 철새 도래지 관광도 갔고.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여행 안 간 곳이 없고.”

태헌은 줄줄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기가 막혔다.

그는 가이딩 결핍이 어떤 고통을 유발하는지 직접 겪었다. 작은 자극도 견디기 어렵고 늘 숨이 가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토막 난 것처럼 아픈데…… 뭘 해? 어딜 가?

연오가 나열한 데이트 중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여행’이었다.

“여행을 갔다고요? 몸이 이 지경인데 센터를 떠나요?”

따지는 듯한 어조에 연오가 멈칫했다. 태헌의 눈치를 살피던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역마다 지부가 있으니까 거기 가이딩 기계 쓰면 된다고……. 여행 중에도 매일 지부 들르긴 했습니다.”

“진짜 미친 새낀가?”

약도 기계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가이딩 효과도 미미했으니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몸으로 애인과 전국 여행을 다녔다니, 미친놈밖엔 할 말이 없었다.

‘태헌이’를 흉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조차 사라졌다. 두 번의 폭주 가이딩을 통해 한결 나아진 지금도 신경을 누그러뜨리기가 힘든데 그때는 어땠을까. 이대로 6년을 더 산다고 해도 그만한 정신력을 가지진 못할 것 같았다.

“태헌이…… 그때도 아팠겠죠?”

갑작스러운 질문이 태헌의 주의를 빼앗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연오의 낯이 폐허처럼 황량했다. 마른 우물처럼 텅 빈 눈으로 연오가 속삭였다.

“그런 것도 전부, 기억 안 나죠?”

“…….”

“다행이네요.”

고통에 시달리며 쌓은 추억이 태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음식 맛이나 제대로 느껴졌을까, 풍경이나 온전히 보였을까. 온통 아프고 힘든 기억뿐일 테니 차라리 태헌이 기억을 잃은 지금이 다행스러웠다.

어쩌면 태헌은 스스로 기억을 버린 게 아닐까. 생의 가장 푸르른 몇 년이 고난뿐이라 전부 내던지고 싶었던 거라면. 각성하기 전인 열다섯 살로 돌아간 것도 먹먹한 가정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이런저런 감정에 짓눌려 급격히 말이 없어진 연오 앞에서, 태헌은 치미는 욕설을 참았다.

‘흉내는 무슨 흉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데.’

정태헌은 이대로라면 영원히 과거의 ‘태헌이’를 그림자처럼 달고 살게 될 것을 직감했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상했던 태헌의 속이 단단히 뒤틀렸다. 연오가 ‘태헌이’ 얘기를 할 때마다 열등감과 치기가 동시에 치밀어올랐다. 죽도록 아픈데도 연오의 수술을 막았다는 태헌이, 극한의 고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는 태헌이, 그토록 헌신적이었다는 태헌이.

그는 지금의 정태헌은 결코 닿지 못할 미지의 어른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일단은 해보는 수밖에.

“그럼 먹고 영화 보러 가요.”

“…….”

“예전에 한 거 다 하게. 이제 가이딩도 좀 되니까 전보단 낫겠죠.”

연오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직 한 입도 먹지 않고 포장만 뜯은 햄버거를 들고 주저하던 그가 불쑥 물었다.

“매칭률 때문이죠?”

햄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문 태헌이 콜라를 들이켰다. 저런 질문을 받으니 왠지 입 안이 말랐다.

“그렇기도 하고.”

“…….”

“아니기도 하고.”

“…….”

“이따 영화 뭐 볼지나 생각해요.”

거기까지 말한 태헌이 햄버거를 다시 한입 베어 물었다. 연오는 모래라도 머금은 양 까끌까끌한 입에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으며 시선을 테이블에 고정했다. 태헌이 나름대로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는 건 알겠지만, 예전의 태헌이와 있을 때 같은 설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매칭률에 대한 목 막힐 정도의 부담감뿐.

이상하다. 지금의 태헌이나 과거의 태헌이나 결국 같은 사람일 텐데.

‘적응되겠지.’

연오는 억지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별다른 맛도 느껴지지 않는 햄버거를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체할 것 같았다.

-

영화 시작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연오와 태헌은 스낵 코너로 가 메뉴판 아래 섰다. 조명이 약한 공간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태헌은 옆에 선 연오를 돌아보며 조금 큰 소리로 물었다.

“나 예전엔 뭐 좋아했어요?”

“네?”

“예전에 있던 그 사람은 주로 뭐 먹었냐고요. 둘이 영화 엄청 봤다면서요.”

연오는 당황해서 입술만 벙긋거렸다. 태헌은 이전의 자신이 자주 먹던 음식을 알아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듯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이상한 고집이 연오에게서 답을 이끌어 냈다.

“그냥 기본 팝콘 세트요……. 고등학생 때부터 쭉.”

“그럼 그거 시키고. 가이드님은 뭐 먹을 거예요?”

연오는 핫도그를 주문했다. 이번에 계산은 정태헌이 했다. 거지 운운한 건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까지 했는데 연오는 끝까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태헌은 직원이 내민 팝콘 세트를 챙겼고, 연오는 핫도그와 콜라를 양손에 들었다. 빵 사이에 끼워진 소시지에 케첩과 머스터드 소스, 마늘 칩이 골고루 뿌려져 있었다. 상영관까지 가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태헌은 자리를 찾아 앉은 후에야 자잘한 대화를 이어가고자 질문을 던졌다.

“핫도그 좋아해요?”

“네. 그리고 앞으로 무조건 잘 챙겨 먹으려고요.”

덤덤한 다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연오가 와앙 입을 벌려 핫도그를 물었다. 입을 꼭 다물고 오물오물 오랫동안 씹는 모습은 양 볼이 부푼 다람쥐 같았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신 연오는 미리 챙긴 티슈로 입가를 닦은 후 다시 핫도그를 먹었다. 어차피 먹다 보면 또 묻을 건데, 한 입 먹을 때마다 입을 닦는 모습이 어쩐지 친근했다. 태헌 자신도 비슷한 습관을 가진 덕이었다.

어지럽게 스쳐 지나가는 광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핫도그에 집중하던 연오가 문득 태헌을 돌아보았다. 막 조리해 따끈한 팝콘에 손조차 대지 않은 태헌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안 먹어요?”

“먹어야죠.”

음식 먹는 연오를 구경하느라 정작 제 것에는 손도 대지 않았던 태헌이 팝콘을 집어 먹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계속 연오를 힐끔거렸다.

‘아까보다는 잘 먹네.’

인스턴트 핫도그 하나일 뿐인데 참 열심히도 먹는다. 남의 먹는 모습을 이렇게 오래 바라본 건 처음인데 이상하게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햄버거보다 핫도그가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비슷비슷한 음식인데 무슨 차이일까.

사실 연오 입장에서는 햄버거나 핫도그나 비슷했다. 다만 햄버거 가게는 너무 밝아 태헌의 얼굴이 환히 보였고, 지금은 어둑한 상영관이라 그와 조금 떨어진 느낌이 든다는 점만 다를 뿐.

‘내가 왜 이러지?’

태헌이 노력하고 있는데, 분명 잘해주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이는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하고 불편했다.

“맛있어요?”

지금만 해도 그렇다. 태헌은 아무 생각 없이 건넸을 질문 한마디에 목이 막혔다.

어설프게 과거 흉내를 내는 정태헌을 보기가 괴로워서 그런가. 아니면 과거 일은 얼렁뚱땅 묻은 채로 대충 지나가려는 태도가 낯설어서 그런가. 매칭률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태헌이 변했을까 하는 쓸데없는 의문 때문일까.

“네.”

급히 콜라를 마신 연오는 일부러 광고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오가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태헌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연오는 시끄러운 액션 영화에 거의 집중하지 못했다. 자신 역시 매칭률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방법은 안 통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 가슴이 답답했다.

옆에 앉은 태헌을 보니 그는 영화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연오는 괜히 입술만 잘근거렸다.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했다면.’

그러면 매칭률 올리기도 쉬웠을 텐데. 아무리 흉내를 내도, 지금의 정태헌은 과거의 태헌이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 같다. 아니, 어쩌면 정태헌이 과거의 자신을 흉내 내려 하기 때문에 차이가 더 극명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의 태헌을 분리하면 매칭률에 도움 될 게 없는 걸 뻔히 짐작하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태헌은 연오의 혼란을 까맣게 모르는 채로 팝콘 한 통을 전부 먹어 치웠다.

-

가이드가 필요 없는 에스퍼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액션 영화가 끝났다. 두런두런 영화 이야기를 나누니 아까만큼 어색하지는 않아서 연오는 조금 안도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영화까지 봤는데 아직 밖이 환했다. 그래도 곧 헤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내내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연오는 영화관 밖으로 나온 후 확인차 물었다.

“오늘 가이딩 필요하세요?”

“가이딩?”

“네. 만성 피로도 하루 푹 잔다고 낫진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꾸준히, 조금씩 가이딩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태헌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는 늘 가이딩을 필요로 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하던 고통이 쿡쿡 쑤시는 기분 나쁜 동통으로 바뀌어 일상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래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였다.

태헌의 상태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는 연오는 침묵으로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키스해 보라고 조롱하던 이전과는 달리 태헌이 조용했다. 연오를 한참 기다리게 한 그가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럼 바로 센터로 돌아가지 말고 좀 걸어요.”

의외의 제안이었다. 가이딩실로 가도 되는데 왜 걷자고 하는 것일까. 연오는 태헌의 의도를 알지 못해 조금 허둥거렸다.

널찍한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차보다 사람이 많은 카페 거리였다. 데크를 설치한 아기자기한 카페와 편집숍, 세련된 음반 가게와 작은 규모의 전시장까지. 양옆으로 늘어서 손을 맞잡은 가로수 아래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태헌은 그림을 여러 점 걸어놓은 갤러리 카페로 들어갔다. 연오는 얼결에 그와 함께 음료를 주문했고, 머잖아 차가운 허브티를 받았다. 태헌 역시 얼음이 뜬 허브티를 마시며 밖으로 나가자고 턱짓했다. 연오는 머뭇거리다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요?”

“뭐가요.”

“음료…….”

“차갑고 좋은데요?”

성큼 앞서 나가는 태헌의 뒷모습에서는 어떤 트라우마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최인열의 차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혼자 지나간 일을 떠올린 게 머쓱해진 연오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은 한 뼘쯤 떨어져서 거리를 걸었다. 나무 아래를 지날 때면 그늘이 내려앉았고, 조금 벗어나면 뜨거운 볕이 뺨을 간지럽혔다. 삼삼오오 모여 지나다니는 사람들, 가게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들리는 종소리,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나뭇잎과 덩달아 춤추는 그림자…….

불편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가이딩 얘기를 하다가 여기로 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연오가 가이딩과 산책의 연관성을 물으려던 그때.

“손잡고 걸을까요. 그럼 가이딩도 될 텐데.”

태헌이 애써 가다듬은 목소리로 권해 왔다.

너무나 뜻밖의 제안이라 연오가 멈칫했다.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태헌이 연오에게 제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차피 작정하고 가이딩할 거 아니잖아요. 매칭률 측정도 아직이고.”

“네, 그건 그런데…….”

“그럼 손 줘요.”

태헌은 대단한 생각이라도 해냈다는 듯 뿌듯한 표정이었다. 늘 연오를 돌봐 주었던 커다란 손이 어색하게 쑥 내밀어졌다. 매일같이 잡던 손인데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 연오는 조금 움찔거리다가 겨우 손가락을 얽었다.

집중하지 않고 있었기에 아주 미미한 양의 에너지만이 태헌에게 건너갔다. 그 은은한 흐름을 연오도, 태헌도 느낄 수 있었다. 연오는 땅 밑으로 서서히 꺼지는 듯했고 태헌은 점점 날아오르는 듯했다. 어깨가 닿을 듯 가까이 붙어 걷고 있는데 둘의 세상은 그토록 극명히 달라졌다.

‘태헌이한테도 이런 걸 해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연오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태헌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남몰래 아쉬움과 그리움을 느꼈다.

참 이상하다. 지금도 자신은 태헌이를 가이딩하고 있는데 태헌이 그립다니. 현재의 태헌과 과거의 태헌은 결국 같은 사람인데 구분 짓는 일을 멈추기 어려웠다. 현재의 정태헌이 어리고 서툰 면을 보일수록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뚜렷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태헌은 정말로 어린애 같다. 내가 사과했으니 너도 괜찮아야 한다고 확신하고, 뭐든 원하는 대로 하려 들고, 그러면서도 그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믿는다. 무지해서 이기적인 어린아이, 정태헌. 반면 연오의 ‘태헌이’는…….

‘아니, 아니지.’

이렇게 구분하면 안 되는데.

이러다 매칭률 더 떨어지면 어떡하지?

“왜 그래요?”

연오의 손에서 힘이 풀리자 태헌이 그를 돌아보았다. 연오는 무구한 눈동자를 보며 할 말을 찾았지만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뒤라 적당한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연오는 등에 솟는 식은땀을 느끼며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매칭률 때문에 걱정돼서 그래요?”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만. 연오가 대답하지 않는 사이 태헌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매칭률 올랐을 거예요. 그거 생각하니 기분이 좋네.”

“…….”

“가이드님도 전보다 내가 더 좋죠?”

연오의 입술이 굳었다.

맑은 눈동자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태헌에게서 벗어나려 무의식적으로 꿈틀거리는 손과 경직된 어깨가 그의 긴장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어, 그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자신을 기다리는 태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화가 난 건 아닌 듯했지만 이어질 대답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연오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다. 안 그래도 심란했는데 이런 질문을 받게 되니 당황스러운 것을 넘어 두려웠다.

두려워? 뭐가?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며 태헌에게 손을 붙들린 이 상황 자체가 갑작스러운 위협으로 다가왔다.

연오는 이해한다 했고 잊었다 믿었지만, 태헌의 폭언은 연오 안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태헌의 태도가 뒤집힐 수 있음을 뼈저리게 배운 연오는 제 마음 대신 태헌의 눈치를 살폈다.

일 초, 이 초,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단둘이 손을 맞잡은 상황에서는 삼십 초의 침묵도 영겁과 같은 법. 연오의 대답을 기다리던 태헌의 눈이 점점 가늘어짐과 동시에 연오가 움찔하며 손을 힘껏 잡아 뺐다. 마음을 정하지도 못했는데 입술이 먼저 움직여 태헌의 비위를 맞췄다.

“네.”

태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우습게도 그 웃음을 확인한 후에야 숨통이 트였다. 다행히 맞는 대답을 했구나. 연오를 덮친 안도는 소나기처럼 차갑고 따가웠다. 연오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애써 화제를 돌려야 했다.

-

평화롭던 하루를 증명하듯 하늘은 부드러운 남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연오가 핸드폰을 챙기고 인사를 하려던 그때.

“내일도 보는 거죠?”

갑작스러운 물음에, 연오는 어색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과거의 태헌이에게서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질문이었다. 학생일 때 처음 만났기에 등교하면 자연히 만날 수 있었고, 만난 지 일 년도 안 되어 한집에 살게 되었으니 매일 보는 건 당연했다. 이런 식의 ‘데이트 약속’이 필요했던 적은 없었다.

태헌은 약간의 긴장과 초조, 기대가 동시에 담긴 얼굴로 연오를 마주 대했다.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익숙한…… 모르는 사람의 얼굴. 연오는 혼란을 감추며 애써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내일 연락하겠습니다.”

이제 정말 대화가 끝났겠거니 했는데 태헌이 또 연오를 붙들었다.

“기숙사는 살 만해요?”

“네? 네.”

돈이 많은 덕인지 센터 기숙사는 호텔 부럽지 않았다. 식탁을 놓을 수 있는 거실에 작은 침실까지 딸려 있어서 넓고 쾌적했다.

긍정적인 대답이었는데 어쩐지 태헌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아쉬워하는 건가, 연오의 마음으로 어설픈 추측이 스쳤다. 그러나 태헌은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 알겠다는 대답만 남겼다.

“가이딩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새벽에라도.”

마지막 당부를 남긴 연오가 꾸벅 인사한 후 먼저 돌아섰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았는데 태헌은 그때까지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어서 들어가라는 의미로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자, 그도 자연스럽지 못한 동작으로나마 손을 들어 주었다.

그렇게 기숙사로 돌아온 연오는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피곤해…….’

가이드 수술을 받은 후 이렇게 종일 돌아다닌 건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던 일들이 지금은 힘겨운 과제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내내 태헌을 의식하며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에 더 지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정신 차리자.’

연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태헌을 계속 두 사람으로 나눠 인식하면 매칭률이 더 떨어질 것이다. 지금의 태헌이든 예전의 태헌이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니 모든 것을 바쳐 구하고 싶다고 다짐하던 때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내일부터는 정말 잘 해내겠다고 생각하며 연오는 간단히 몸을 씻었다. 개운하지만 그만큼 무거운 몸으로 침대에 쓰러진 그의 마음으로 익숙한 어둠이 살금살금 기어들었다.

-

마지막 매칭률 측정으로부터 열흘이 지난 시점, 연오는 아침 일찍 식탁에 앉아 아침을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플라스틱 용기 모양으로 동그랗게 데워진 밥을 식판에 보기 좋게 풀어 놓고, 센터 식당에서 사 온 반찬까지 차근차근 식판에 덜었다.

김이 오르는 김치찌개, 애호박전, 된장에 무친 나물, 먹기 좋게 썬 돼지고기까지. 어디서 본 것 같은 한 상이 차려졌다. 물기가 덜 마른 머리를 몇 차례 만진 후 비장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찌개를 고기와 함께 푹 퍼먹으며 각오를 새롭게 했다.

‘오늘 잘해야 해.’

그동안 태헌이 정말 많이 노력해 주었다. 매일같이 점심을 함께 먹고 거리를 산책했다. 전처럼 심한 말을 하거나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그 나름대로는 얼마나 노력했을지를 생각하면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매칭률 결과가 좋지 않아 그를 실망시키면 어쩌지.

연오는 음식으로 염려를 밀어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전투적으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식판을 비워냈다. 태헌이 해 줬던 음식처럼 입에 잘 맞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맛있게 먹을 만한 음식이 전부 연오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식기를 닦고 양치까지 마친 연오는 결의에 찬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요즘은 식사도 제때 챙기고 잠도 잘 자려고 노력했는데 뺨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연오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착착 두드리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힘내자.’

약속된 시간보다 좀 더 일찍 매칭률 측정실로 향하는 연오의 발걸음은 가벼운 듯 무겁고 무거운 듯 가벼웠다. 수없이 교차한 기대와 불안이 심장에 격자무늬를 새겨 놓았다. 매칭률 측정실에 다다랐을 때, 연오는 거의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제발.’

측정실 문을 열자 측정을 진행할 직원과 태헌이 먼저 와 있었다. 거의 이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태헌이 먼저 나와 있다니. 그가 이번 측정에 얼마나 많이 신경 쓰고 있는지 실감하자 곧바로 속이 메슥거렸다.

“빨리 앉아요.”

연오가 들어온 순간부터 그쪽에 시선을 고정한 태헌이 자신만만한 낯으로 웃어 보였다.

“잘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이전의 태헌을 보면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은은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왠지 측정을 뒤로 미루고 싶어서 연오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본부장님들 안 계시네요.”

“서울 오는 중이래요. 먼저 하라던데.”

“네…….”

더 할 말도 없어서, 연오는 속입술만 괴롭히다가 태헌 맞은편에 앉았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직원이 능숙한 손길로 기기를 부착했다. 옷 속으로 들어오는 손을 늘 거북해하던 연오도 이번만큼은 그쪽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곧 알게 될 매칭률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심지어 연오는 가슴 언저리에 붙은 기기를 꾹 누르기까지 했다. 기기의 밀착 상태와 매칭률 결과가 무관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혹시 기기가 덜 단단히 붙어 매칭률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 탓이었다.

초조해하는 연오와 달리 태헌은 느긋했다. 그는 부산스러운 연오를 지켜보며 넉넉한 미소만 지었다. 과거가 어찌 됐든 지금 좋으면 된 거 아닌가. 차근차근 매칭률을 올리고 연오와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면 다 잘 될 것이다.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을 신호로 연오와 태헌의 손이 맞닿았다. 태헌은 연오의 손이 조금 축축한 것을 느끼고 남몰래 웃었다. 긴장한 모습도 제법 귀여웠다.

두 사람의 접촉을 확인한 직원이 측정기를 작동시켰다.

연오는 쉴 틈 없이 눈을 굴리며 기계를 살폈다. 어차피 결과지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엇도 알 수 없음을 알면서도 무의미한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침내 결과지가 인쇄되었을 때 연오는 숨까지 멈추었다.

“어…….”

직원은 결과지의 수치를 확인한 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난감한 얼굴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에스퍼 본부에 전달해야 할 것 같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결과지를 내려놓은 직원이 급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사라졌다. 제 손으로 기기를 툭툭 떼어내던 태헌은 의아한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결과지를 낚아챘다.

“왜 저래?”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왜…….”

태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종이를 한 번 뒤집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가장 위에 박힌 숫자가 변하지는 않았다. 원수라도 진 듯 수치를 노려보던 태헌의 시선이 창날처럼 연오에게 꽂혔다.

연오는 목 안쪽으로 소리도 없이 신음하며 움찔했다. 든든히 챙겨 먹은 아침이 갑자기 명치 부근에 얹힌 것 같았다. 태헌은 핏기가 싹 가신 연오 쪽으로 종이를 내던졌다. 무게감 없는 종이는 팔랑거리다 연오 앞에 툭 떨어졌다.

37퍼센트.

전보다 더 형편없는 숫자였다.

“이게 말이 돼요?”

태헌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서 저절로 마음이 요동쳤다. 위협적인 몸짓은 없었지만 연오는 곧바로 숨이 막혔다. 자기도 모르게 사과가 나왔다.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하지 말고 얘기를 해요. 뭐가 불만이에요? 내가 잘해 줬잖아요. 잘해 줬잖아!”

솔직히 ‘태헌이’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데도 그를 따라 한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매칭률이 오르고 연오의 마음을 고쳐 줄 수 있다면, 자신에게 헌신적인 그를 계속 붙잡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애썼다. 불쑥불쑥 성질이 날 때도 있었지만 참았고, 최대한 다정한 모습만 보이려 했다. 그런 식으로 성질을 눌러가며 일주일 가까이 노력했는데, 연오가 돌려준 건 37퍼센트라는 전보다 형편없는 숫자뿐.

그게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매겨진 점수 같았다. 잔잔하던 속에서 천불이 치밀었다.

“정태헌 에스퍼…….”

연오는 태헌의 이름만 읊조리며 떨림을 억제했다.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했다. 매칭률이 오르지 않을 것을.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을.

‘나 때문에.’

태헌이 무서웠다. 두 번째 폭주 가이딩 때 안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일조차 힘들 정도로. 태헌이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바쁘게 눈치를 살필 정도로. 기억을 잃은 태헌은 멀쩡히 대화하다가 갑자기 화를 냈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물고 늘어지며 사람을 태웠다. 전처럼 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연오는 그를 이해했다. 우울증을 앓던 시절의 자신도 태헌에게 이유 없이 성질을 부리곤 했으니까. 신경증까지 앓는 태헌이니, 무슨 짓을 해도 다 이해하고 품을 수 있었다. 태헌이의 어린 시절을 엿본다고 생각하며 견디기도 여러 번이었다. 연오는 정말로 태헌을 미워하지 않았다. 증오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도저히 절개할 수 없는 두려움이 종양처럼 자리 잡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태헌이와 정태헌이 하나가 아니어서…….

게다가 ‘태헌이’를 흉내 내는 정태헌을 보는 내내 위화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모든 과거를 대충 덮고 넘어가려는 태도는 태헌이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끔찍한 죄책감이 연오를 짓뭉갰다. 이빨 같은 자책이 연오를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내가 어떻게 저 사람한테 이럴 수 있어. 저 사람은 나 때문에 죽었는데. 균열 트라우마를 앓는 나를 위해 혼자 위험한 균열에 남아 으깨졌는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연인을 위해서 망설임 없이 목숨까지 내던졌는데.

나는 그거 조금 맞았다고, 그거 조금 상처받았다고.

이렇게 쉽게 그를 외면하나?

“제가 앞으로 더…… 더 노력할 테니까…….”

이제 사랑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종류의 사랑은 본래 육중한 의무감 앞에서 기를 못 펴는 법이다. 연오 안에 뿌리내린 정태헌의 사랑이 시드는 나무처럼 왜소해지며 빈틈이 생겼다. 그 틈에 돋아난 감정은 종기 같은 죄책감과 의무감이었다. 태헌과 함께 가꾼 연오의 별은 그렇게 병들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태헌에게는 문제가 없으니 자신만 바뀌면 되는데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스스로의 상처를 외면하고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 돌린 대가로, 연오는 망망대해에 버려졌다.

“내가 그렇게 싫어요?”

태헌이 새파랗게 질린 연오를 노려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옛날만큼은 안 된다 이거예요? 그런 거냐고요!”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뭐든 다 받아들여 준다면서!

솔직히 인정한다. 강연오가 호구라서 좋아졌다. 심한 짓을 수없이 당하고도 맹목적으로 매달려 오는 이라서 좋아졌다. 부담스럽고 무서운 싱크홀 같은 존재였던 연오가, 기억상실 후 불안정해진 정신을 지탱해주는 지지대로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축하해요. 앞으로도 안 아프게 열심히 가이딩할게요.’

두 번의 폭주 가이딩을 끝낸 연오가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그렇게 말하며 웃었을 때, 부모조차 건네주지 않은 격려와 이해를 줬을 때. 그때 태헌은 최초로 타인에게 수용되었다. 모든 서툰 감정과 잘못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용서받는 그 감각에 태헌은 속절없이 꿰뚫렸다.

그래서 자신만 잘하면 매칭률 따위는 금방 오를 거라고 믿었다. 연오는 이미 자신을 받아들였으니까. 지나간 시행착오는 없던 일로 하자고 덮어 주었으니까. 부끄럽지 않도록 체면을 세워 주고 아프면 실수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대신 변명해 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태헌은 결과지를 다시 확인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결과가 바뀔 일은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원인이,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연오가 겨우 중얼거렸지만 태헌이 듣기엔 다 변명 같았다. 매칭률 하락이 연오의 마음 탓이라는 확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허투루 넘겼던 연오의 모든 이상 반응들이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라 태헌을 괴롭혔다.

생각해 보면 일주일 정도 이어진 ‘데이트’ 내내 연오는 한 번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여 주지 않았다. 뭘 먹어도 맛있게 먹고 자신의 요구에 곧잘 맞춰 주기는 했지만 애틋하고 달콤한 뭔가를 내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예전보다 더 좋아졌느냐고 물었을 때는 또 어떻고. 그렇다고 대답한 주제에 손을 홱 잡아 빼지 않았나. 쑥스러워서 그런 거라고 애써 합리화해 받아들였던 연오의 행동이 이제야 마음에 걸렸다.

전부 연기였다고?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연오 역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대체 왜?

성질을 부리고 싶었다. 왜 매칭률이 떨어진 거냐고, 당신 때문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내가 잘해줬는데도 당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거라고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예전처럼.

그래, 예전처럼. 연오와 처음 마주했던 그 혼란스러운 순간처럼.

“가이드님이 괜찮다고 했잖아요. 아팠으니까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이해한다고 했잖아요.”

강요하는 것인지 떼를 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조였다. 토악질처럼 쏟아진 말에 연오의 머리가 위아래로 맥없이 움직였다.

연오가 정말 태헌을 위하고 싶었다면, 긍정 대신 꾸짖음을 주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부도 반항도 모르는 연오는 순순한 대답과 함께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랬죠. 당연히, 다 이해하는데…….”

답하는 음성이 불안하게 떨렸다. 태헌이 연오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으르렁거리는 음성이 그를 물어뜯었다.

“근데 왜 매칭률이 떨어져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잔잔한 추궁에 미움과 원망이 섞이기 시작했다. 폭언과 폭력을 경험한 연오는 달라진 그의 분위기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연오가 방패를 준비하거나 도주로를 찾기도 전에 태헌이 성질대로 그를 난도질했다.

“사실은 내가 죽든 말든 상관없는 거죠. 내가 그런 짓을 했으니까 그냥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씨발,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요.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감정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쩡 높아진 목소리에 연오가 파랗게 얼어붙었다. 예측할 수 없는 조류에 휩쓸린 표류물 같았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좁아진 동공에 태헌의 상이 흐리게 맺혔다.

다음 순간 연오는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속삭였다.

“죽든 말든 상관없는 거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대체 뭐냐고요.”

“정태헌 에스퍼가 아주 가끔, 무서운 정도고…… 극복할 수 있게 노력할 테니까…….”

짧은 말 몇 토막이 그리도 힘든지 연오가 비 오듯 식은땀을 흘렸다. 혼신의 힘을 쥐어짜 버티고 있는 듯한 모습에 태헌이 일순 멈칫했다.

“내가 지금, 매칭률 걱정해서 이러는 것 같아요? 당신이 지금까지 계속 나를…….”

나를 싫어했다는 사실이 미워서 그런다.

받아들여진 줄 알았는데. 당신만은 끝까지 나를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그런데 사실 계속 나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밀어내고 있었다니.

연오는 혼란이 가득한 태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렵게 열린 그 입에서, 예기치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정태헌 에스퍼, 저 때문에 상처받지 마세요.”

태헌은 머리라도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자기 때문에 상처받지 말라고?

갑자기 두 눈으로 뜨거운 점 같은 것들이 와글와글 몰렸다.

어처구니없게도 상처받지 말라는 그 말이 상처를 또렷하게 의식시켰다. 태헌은 그제야 자신의 혼란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상처받았다.

태헌은 목이 메는 부끄러운 감각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더 거세게 내뱉었다.

“끝까지 헷갈리게 하네. 상처 안 받았어요. 이런 것 때문에 왜 상처받아요, 내가.”

연오는 말의 진위를 확인하듯 살짝 눈을 들어 태헌의 얼굴을 확인했다. 태헌은 시선이 사슬처럼 얽힌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가이드님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거짓말을 한 거든 아니든, 매칭률이 떨어지든 말든 난 가이딩 받을 거예요. 가이드님한테만. 다른 가이드는 필요 없어요.”

시발, 자존심 상해. 이런 나는 싫다고, 과거의 나만 좋다고 하는 가이드한테 매달리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한 사람에게 목숨을 걸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이제는 무섭다고 도망치려는 사람에게 매달려 억지를 부리고 애처럼 징징거리는 꼴이었다.

연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작은 머리통이 위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태헌은 후려치듯 재촉했다.

“허락하는 거죠?”

“……네.”

“그럼 손 내밀어요.”

숨 돌릴 틈도 없이 떨어진 지시에 연오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태헌에 대한 공포를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나자 행동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연오의 각오는 늘 그렇듯 보통 이상이어서, 두 손은 순순히 테이블로 올라왔다. 기다렸다는 듯 겹쳐지는 태헌의 손은 뱀처럼 차가웠다.

“오늘 끝까지 할 거예요.”

정태헌은 생각했다. 이것도 화풀이의 일종일까. 그러나 그는 연오를,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연오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연오가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러니까 당신이 날 받아 줘.

“이것도, 허락하는 거죠.”

그리하여 태헌의 강요는 더없이 이기적이었다. 그는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느냐며 떼를 쓰는 어린애였다. 상대의 아픔은 볼 수도 없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 외눈박이였다. 오직 자신의 상처만 중요하다 외치는 일인칭 세계의 독재자였다.

연오는 태헌이의 탈을 쓴 듯한 이 소년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태헌의 실망감도 이해는 했다. 그렇지만 대화하기도 전에 이렇게 에너지를 빼앗으려 들다니. 매칭률이 왜 떨어졌는지 이유를 정확히 파헤치지도 않고, 소통도 하지 않고, 그냥 가이딩만 해 달라고 떼를 쓰다니.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이 사람은 태헌이가 아니야. 태헌이는 이런 말 안 해.

동시에 태헌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연오야, 나는 이런 짓 안 해.

순간 열어서는 안 될 상자를 연 것처럼 가슴이 추락했다. 연오는 태헌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렇게 연오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정태헌에게 던져 버렸다.

“네. 하세요.”

자살이었다.

“이제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잘해줘도 아무 소용없어.”

강제로 에너지를 빼앗기는 익숙한 느낌이 울음처럼 연오를 갈랐다. 반항할 수조차 없이 가만히 앉은 채로, 배 속에 뭉친 에너지가 줄줄 딸려 나가는 꼴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꾸역꾸역 아침을 챙겨 먹기는 했지만 깨작거린 수준에 불과한데, 급체라도 한 듯 명치가 조여 오며 토기가 치밀었다. 태헌이 에너지를 빨아들일 때마다 시원하게 토하는 것 같기도 하고 더 심하게 체하는 듯도 했다. 연오는 얼굴까지 새하얗게 질린 채 태헌의 어리광을 견뎠다.

사랑해 줄 수 없다면 에너지라도 줘.

태헌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가이딩 에너지가 애정이나 우정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그저 상처에 대한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걸까.

어느 순간부터는 머릿속이 백지로 변하며 쓰러질 것 같은 예감이 엄습했다. 태헌은 폭주 때와는 달리 얌전히 앉은 듯 보였지만 그때보다 더 사나운 기세로 연오를 긁어내고 있었다. 본능처럼 손을 빼려던 연오는 태헌이 갑자기 아귀에 힘을 주는 바람에 낮은 비명을 삼켜야 했다.

“잠깐만요, 잠깐……. 억지로 가져가지 말고 제가…….”

“싫어요. 매칭률도 낮아졌는데 답답해요.”

에너지를 마구 빨아들이는 태헌의 음성 역시 격양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요는 연오의 흔들림과 완전히 달랐다. 연오가 죽을 듯 휘청거린다면 태헌은 하늘로 비상하는 중이었다. 폭주했을 때처럼, 눈멀고 귀먹었을 때처럼 양껏 에너지를 빨아들이자 폭발적인 고양감이 태헌을 한껏 날아오르게 했다.

사랑받을 수 없다 해도 에너지는 받을 수 있다.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연오는 언제든 자신을 위해 희생해줄 것이다. 그거라도 받고 싶었다. 그거라도.

말라붙은 진흙 같은 것들이 머리부터 씻겨나가기 시작했다. 축복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태헌은 덕지덕지 달라붙은 만성적 통증과 신경증을 하나씩 떨쳐버렸다. 내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망가졌던 몸이 마법처럼 수복되었던 그때 같았다. 정태헌은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바로 그때.

에너지를 애정으로 착각하여 이렇게 달콤한 것일까?

그는 자유를 얻고 있었다. 함부로 에너지를 빼앗은 적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이렇게 또렷한 정신으로 연오의 바닥까지 긁어낸 건 처음이었다. 세상의 어떤 쾌락과도 바꾸지 못할 해방감이 태헌을 자극했다.

연오를 끌어 일으켰다. 그는 이미 무아지경이었다. 둘은 부딪히듯 포옹했고 사랑 없이 입술을 겹쳤다. 키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연오만이 알았다. 가이딩 효율을 높이기 위한, 본능적인 점막 접촉이었다. 실신할 듯 휘청거리는 연오를 태헌이 안아 지탱했다.

밑 빠진 독에 쏟아지는 물 같던 가이딩 에너지가 점차 쌓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축적되는 것보다 흘러나가는 것이 더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에스퍼가 강한 의지와 의욕으로 에너지를 흡수하자, 녹슬어 삐걱거리던 신체의 모든 부분이 열렬히 환호하며 에너지를 받아들였다. 연오는 그 자체로 태헌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이 비공식 가이딩 시간은 연오에게는 영겁과도 같았고 태헌에게는 섬광보다 짧았다. 그러나 둘 모두에게 공평하게 강렬했다. 두 사람의 손이 마침내 떨어졌을 때, 연오는 끈 잘린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고 태헌은 답답한 물에서 고개를 내민 사람처럼 환희에 차 있었다.

온몸에 힘이 넘쳤다. 넘쳐나는 에너지를 믿을 수가 없어서 태헌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폭주 가이딩을 받은 후에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약탈자가 되어 훔친 연오의 생명은 더없이 값졌다. 지금이라면 대형 균열로 혼자 들어가도 두려울 게 없을 듯했다.

무엇보다도 잔잔히 남아 그를 괴롭히던 고통의 잔여물이 조금도 남지 않았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물때가 끼어 있던 어항을 깨끗한 물로 싹싹 닦아낸 듯 개운했다. 새로 태어난 육신에 압도당한 태헌이 현실을 잊은 그때.

“흐으으…….”

연오가 긁는 듯 신음했다.

태헌의 시선이 멈칫 그쪽에 닿았다. 완전히 넘어진 연오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눈 아래 드리워진 속눈썹 그림자도 함께 떨렸다. 연오는 세상을 버리려는 사람처럼 손에 힘을 푼 채 완전히 늘어져 있었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높이 솟았다가 곧 힘없이 잦아들었다.

태헌은 아주, 아주 느리게 현실을 인식했다.

오랜 병을 떨치기라도 한 양 고양된 자신의 몸과 정신. 맨바닥에 넘어진 연오. 연오의 코와 입, 귀에서 흐르는 피. 반은 감기고 반은 뒤집힌 연오의 눈. 그 눈에서 흐르는, 차라리 진액이라 해야 옳을 눈물.

“어.”

태헌이 얼어붙은 다리로 주춤 물러났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실제가 아니라 사진 같았다.

그가 일반인이었다면 이 모든 행동은 조금 거친 키스에 불과했을 것이다. 서로 기분은 상했겠지만 ‘사건’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정태헌은 일반인이 아니라 에스퍼였다.

그래서 그가 한 행동은 살인이었다.

“강연오.”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연오 옆에 무너지듯 앉은 태헌이 축 늘어진 상체를 안아 받쳤다. 본능처럼 코 아래 손가락을 대보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영원 같았다.

실바람보다도 미세한 숨결이 느껴졌다.

태헌은 참았던 숨을 토하며 헐떡거렸다.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야. 이러려고 그런 게. 그냥 화가 나고 속상해서. 날 배신한 것 같아서. 폭주 가이딩 때도 괜찮았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왜.

온몸이 식은땀에 푹 젖었다. 수 분 전까지만 해도 날개 달린 듯 가뿐했던 몸이 갑자기 묵직하게 추락했다. 연오를 감싸지 않은 손이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쥐었다. 가이딩을 받을 때 테이블에서 떨어졌는지 액정이 깨져 있었다.

떨리는 손이 남의 것 같았다. 경련하는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여 한주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리지원실이나 이쪽이 더 빠를 것 같다는 본능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그의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한주연은 첫 번째 신호음이 끊기기도 전에 응답했다.

[여보세요. 정태헌?]

태헌이 뭐라도 말하려던 그때. 막막하고 무서운 울음이라도 토하려던 그때.

“……아…….”

연오의 새파란 입술이 나비 날개처럼 잘게 떨렸다.

태헌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태헌은 연오를 내려다보며 호흡까지 멈추었다. 연오가 눈을 뜨고 있었다. 코와 귀에서 흐른 피가 태헌의 옷까지 붉게 물들인 끔찍한 광경 속에서, 연오는 무서울 만큼 편안해 보였다.

“태헌아…….”

시체의 것처럼 늘어져 있던 손이 태헌의 뺨에 닿았다.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러자 연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너무나 순간이었다. 경탄하듯 벌어져 있던 입이 사정없이 찌그러지고 미간과 콧잔등이 구겨지며 처절한 표정을 그려냈다.

“나 무서워어…….”

연오가 태헌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물에 빠진 사람 같은 악력이었다.

“나 무서, 무서워, 흐억, 억, 아프고, 힘, 힘들어……. 나 데, 데려가, 데려가 줘, 태헌아. 나 너, 허어엉…….”

“…….”

“너한테 갈래…….”

어쩌면 피투성이가 되어 누웠던 연인을 보며 하고 싶었을 그 말이 최후의 애원처럼 나왔다.

유언 아닌 유언이 넋을 잃은 태헌에게 아로새겨졌다. 태헌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연오의 상체를 안은 채, 제 얼굴에서 미끄러지려는 연오의 손을 붙들고 떨었다. 이상했다. 마음 어딘가가, 뻥 뚫린 것 같았다. 이 역시 태헌이의 무의식일까. 태헌이가 절규하는 것일까. 그러나 의식 너머의 것이라기엔 고통이 너무 생생했다.

핸드폰 너머에서 한주연이 무슨 일이냐며 고함을 쳤다.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급히 이동하는 중인 듯 요란한 소리까지 들렸다. 태헌은 억지로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지금 강연오랑 있는데.”

태헌이 붙들고 있던 연오의 손이 미끄러졌다. 태헌은 피투성이가 된 연오의 얼굴을 더듬으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죽인 것 같아요.”

거대하고 짙은 그늘이 그를 덮쳤다. 그가 무의미하게 다투려 했던 ‘태헌이’의 그림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어리광과 이기심이 드리운 그림자였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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