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천적 가이드 3권-6장. 어항 속의 에스퍼 (7/23)

6장. 어항 속의 에스퍼

정태헌은 기억을 잃은 이래 가장 정신없는 열흘을 보냈다. 감사실 조사 때문이었다.

무리한 가이딩으로 완전히 정신을 놓은 연오는 열도 없이 앓으며 헛소리를 해 댔다. 태헌에게 유리한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태헌은 감사실에서 많은 말을 하진 않았다. 넋이 쑥 빠져 건조하게 사실만 나열할 뿐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는 열흘 내내 이어진 조사 중 딱 두 번만 동요를 내비쳤다.

첫째로는 강연오의 생사를 확인할 때.

“강연오는…… 산 거죠?”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한 번도 먼저 질문한 적 없던 그가 처음 입을 열어 한 질문이 그것이었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직원은 언젠가 한주연이 연오에게 보여줬던 태헌의 가이딩 기록을 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태헌을 보는 대신 종이를 넘기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애써 담담히 가다듬었던 표정이 우르르 무너졌다. 둑이 무너지듯 소리도 없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안도인 듯도 했고 강연오의 생존 자체를 기뻐하는 듯도 했다. 극적으로 변하는 그를 보는 직원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감사실에서 일하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을 숱하게 만나게 된다. 가이드를 죽이거나 죽일 뻔한 에스퍼는 개중 가장 자주 다루는 사례다. 아무리 아프고 예민하고 힘들다 한들 어떻게 사람을 죽도록 몰아붙일 수 있을까? 일반인인 직원으로서는 그 정도 이해가 전부였다.

그런 위험한 에스퍼들에 대한 징계나 법적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인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등급이 높을수록 이런 사고를 많이 일으키는데, 등급이 높을수록 처벌도 너그러워졌다. 이러니 센터가 변하지 못하고 썩어가는 거라고 감사실 안에서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균열이 발생하고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후, 개인의 권리나 행복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 희생되거나 무시되곤 했으니. 게다가 ‘보조적’ 역할인 가이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처우는 더 막장이었다. 가이드를 존중한다고 떠들면서 은근히 가이딩 압박을 주는 사람도, 센터에는 흔했다.

죽어 나가는 가이드들만 불쌍하지. 직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태헌의 조사를 이어나갔다.

태헌이 두 번째로 동요한 것은 그 이어진 조사에서였다.

“상황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왜 그러신 건가요?”

의례적인 질문이었으므로 직원 역시 의례적인 대답을 예상했다. 노트북 자판에 열 손가락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그녀는 ‘너무 아팠어요, 무서웠어요, 죽기 싫었어요, 폭주 직전이었어요’ 등의 흔한 대답을 적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태헌은 도무지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정태헌 에스퍼. 폭주 직전이었나요?”

“……아니요.”

“그럼 아팠어요? 서류 보니 만성 가이딩 부족이라 시도 때도 없이 아팠겠던데.”

“그렇게 아프진, 않았어요.”

직원은 태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인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두 손을 아래로 늘어뜨린 태헌은 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붉어진 얼굴로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었다. 직원은 섣부르게 답을 재촉하는 대신 한마디 툭 던져 놓았다.

“사유에 따라 징계 수위가 달라집니다. 있는 그대로 대답하시면 됩니다.”

“…….”

“에스퍼님.”

“모르겠어요.”

태헌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직원은 이 자리에 온 에스퍼들에게 늘 하는 질문을 던졌다.

“일부러 그런 건가요?”

“아니에요!”

태헌이 외치듯 부인했다. 붉게 충혈된 눈이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매칭률이…… 매칭률이 계속 떨어졌어요. 나는 우리가 화해했다고,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강연오는 아니었던 거예요. 날 항상 구해줬는데 그게 다 거짓말 같고, 화도 나고, 그래서 가이딩을 받기 시작했는데…….”

“멈출 수가 없었겠죠.”

직원은 아까 확인한 정태헌의 가이딩 기록을 떠올리며 대신 말을 맺었다. 그 정도로 수치가 불안정한 에스퍼는 가이드를 착취하기 마련이다. 수십 번쯤 본 일이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직원을 보는 태헌의 눈이 간절했다. 그는 괜찮다는 말을 기다리는 어린애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직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조사 첫날 검사 결과를 보면 정태헌 에스퍼 상태가 많이 나아졌어요. 그전에는 만성 가이딩 부족이었는데 수치가 좀 정상으로 돌아왔죠. 폭주 상태가 아닐 때 넘치도록 가이딩을 받은 덕분일 겁니다.”

“…….”

“아무튼, 가이딩 부족 상태라 그랬다는 거죠?”

사무적인 어조로 확인한 직원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움직였다. 탁, 타닥, 이어지는 소리를 멍하게 듣고 있던 태헌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뺨에는 아까 연오의 생존을 확인하고 흘린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니요.”

“네?”

“가이딩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 사실이 태헌을 가장, 가장 괴롭혔다.

폭주했을 때처럼 죽도록 아팠던 게 아니다. 물귀신처럼 가이드에게 매달려야만 살 수 있는 그런 상태였던 게 아니다. 그때의 자신은 이성을 간직하고 있었고 자신의 상처를 연오에게 책임 지우고 싶다는 뒤틀린 욕구도 명확히 인지했다. 이제부터 연오에게 하려는 일이 나쁜 짓인지 아닌지 찰나의 순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건 가이딩 부족 상태에서의 ‘실수’ 같은 게 아니었다. 태헌의 선택이었다. 감사실이나 본부장들은 달리 말하겠지만 태헌은, 연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던 폭주 때보다 이번 일이 더 나쁘다고 느꼈다.

또한 태헌은 본능처럼 알았다. 연오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할 것임을. 폭주 가이딩도 버텨냈던 연오가 이제 와 자신을 버릴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두려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차기 시작했다. ‘태헌이’를 찾으며 숨넘어갈 듯 흐느끼던 연오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감사실 조사는 힘겹고 번거로웠지만 태헌은 차라리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간은 태헌의 멱살을 잡아 현실에 메다꽂았다. 열흘이 쏜살같이 지나간 후 태헌이 마주한 현실은 연오와의 분리, 그리고 감봉 수준의 가벼운 징계였다. 그가 한 모든 행동은 ‘만성 가이딩 부족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에서의 충동적 일탈’ 정도로 정리되었다. 귀하디귀한 S급 에스퍼, 불안정한 몸으로도 균열을 정리할 수 있는 능력자임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태헌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연오 역시 태헌의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는 이들 중 하나였다.

감사실 조사가 끝날 무렵 의식을 되찾은 연오는 직접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는 태헌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심지어 힘이 없어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인천지부로의 전근 신청서까지 작성했다.

연오는 당장 떠나고 싶다며 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지만, 구급차에 실려 가고 싶은 게 아니면 며칠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에게 졌다.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재활하는 동안 연오는 내내 핸드폰을 끄고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마치 외부와 자신을 완전히 차단하고 싶은 사람처럼.

그래서 태헌은 이 모든 일을 한주연으로부터 전해 들어야 했다. 만남을 거절당한 것은 예상했기에 그저 침통한 정도였지만, 연오가 제 손으로 전근 신청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간다고요? 강연오 가이드가, 여길 떠나요?”

“그래.”

한주연은 눈에 띄게 초췌해진 태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 팔걸이에 얹힌 그녀의 손이 초조하게 까딱까딱 흔들렸다. 한주연 역시 연오의 이번 결정에 놀란 탓이었다.

설마 ‘그’ 강연오가 정태헌을 버릴 줄이야.

몸이 부스러지도록 헌신하던 연오가 아닌가.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태헌을 무척이나 무서워하면서도 뒤로 물러난 적 없던 사람 아닌가. 태헌이 가이딩을 원한다면 기어서라도 그에게 도달하던, 스스로는 구하지 못할지라도 태헌만은 구원하려 하던 연오가 아닌가.

“연오는 지금 나랑도 안 만나.”

“……왜요.”

“설득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흔들리지 않으려는 거야. 나 말고 김현철 본부장이랑만 대화해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있어.”

핸드폰은 아예 켜지도 않았다. 이정우나 정한철, 즉 정태헌의 부모로부터의 연락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 가족과의 사이가 정말 살가웠다는 걸 고려해 보면 연오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본부장실 한쪽에 앉아 있던 태헌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났다. 그는 센터 아래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가 섰다. 늘어진 어깨 때문인지 유난히 연약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태헌아.”

“안 그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연오인데.”

태헌이 한주연 쪽으로 돌아섰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늦은 저녁, 검보라색 하늘이 그의 등 뒤에서 바다처럼 너울거렸다. 화려하고 공허한 도시의 불빛을 등진 태헌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처음에…… 처음에 폭주했을 때, 그런 짓 당하고도 괜찮다고 한 사람이에요. 저를 이렇게 두고 갈 리가 없어요. 지금은 아마 놀라고 화가 나서…….”

“정태헌, 정신 차려. 가이드가 너 두고 간대. 에스퍼로서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돼?”

한주연은 태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형광등 불빛에 두 눈이 뻐근했다.

“네 가이드가 너 버리는 거야.”

태헌이 숨을 멈췄다. 한주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정태헌이 다쳤을 때 연오에게 연락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에 입이 썼다. 임종이라도 지키게 해 주는 게 태헌과 연오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는데 경솔한 짓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한주연도 헷갈렸다. 자신도 정태헌의 아버지, 정한철과 똑같은 마음이었던 건 아닐까. 정태헌을 사랑하는 강연오라면 망설임 없이 가이드 수술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고 불러들인 건 아닐까. 연오 앞에서는 ‘수술받으면 안 되는 거였다’고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연오를 가이드로 만들어 유용한 S급 에스퍼를 보존하려던 계산은 전혀 없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가이드 결벽증이 있는 정태헌을 뒤도 안 돌아보고 버리려는 연오가 매정하다는 생각이, 자기 안에 조금도 없나?

‘이래서 연오가 날 안 만나는 거겠지.’

한주연은 복잡하게 엉키는 생각을 잘라내기 위해 어조를 단호히 했다.

“네 사과도 필요 없고 마지막으로 얼굴 볼 필요도 없다고 했대. 심지어 같은 사무실에 있던 가이드들이나 박이정하고도 인사 못 할 것 같다고, 최대한 빨리 인천으로 떠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더라.”

태헌은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강연오가 정말로 자신을 버리다니, 어느 날 산소가 사라졌다거나 중력이 없어졌다는 말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정태헌 안에서 연오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였고 이렇게 사라질 리 없는 존재였다.

태헌은 앞뒤 생각할 틈도 없이, 한주연이 말릴 틈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연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연오 가이드’라는 건조한 저장명이 이상하게 아팠다.

[전원이 꺼져 있어…….]

핸드폰을 쥔 태헌의 손이 툭 떨어졌다.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 어지러웠다. 부질없이 창밖을 보면 장막처럼 세상을 덮은 검보라색 하늘, 그 하늘 아래를 가로질러 도망치는 연오의 환영이 아득히 멀어졌다.

[가이드님]

[얘기 좀 해요 문자로라도 좋으니까]

자판을 빠르게 두드리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만남조차 거부했던 연오가 이런 연락을 달갑게 여길 리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태헌은 입술을 꾹 깨물며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발]

-

김현철은 병실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았다. 그러나 배려가 무색하게도 연오는 깨어 있었다. 환자복 차림으로 일어나 앉은 모습이 유령처럼 투명하고 위태로웠다. 실제로 그가 정말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모습인지도 몰랐다.

“강연오 가이드. 안 잤네요?”

어느새 시커멓게 물든 밤하늘을 바라보던 연오의 시선이 반 바퀴 돌았다. 다가오는 김현철을 본 그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네, 본부장님.”

“저녁은요?”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식사하셨어요?”

체력이 바닥나 힘들 텐데도 안부를 잊지 않는 연오의 모습에 김현철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앞으로 하려는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야 뭐.”

김현철이 연오의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워낙 거구인지라 앉은 쪽이 푹 들어갔다. 평소와 같은 움직임인데도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져 연오는 조금 의아했다.

지금까지 연오를 돌봐 주면서, 김현철은 진중하면서도 산뜻한 태도를 유지했다. 일시적인 두통을 앓은 연오를 위해 말을 천천히, 작은 소리로 해 주었으며 우울한 말로 쓸데없는 비감을 유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식사나 운동 같은 일상적인 화제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런 사람이 침대 모서리에 앉아 침묵하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본부장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김현철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일부러 어조를 가볍게 만들었다.

“정태헌 에스퍼가 고집을 부리고 있어요. 전화나 문자라도 좋으니 강연오 가이드와 얘기하게 해달라고.”

김현철은 일부러 연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연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날아든 대답을 듣고서는 연오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외네요.”

잦아드는 음성으로 중얼거린 연오는 생각에 잠긴 듯 깊은 눈동자로 제 두 손만 내려다보았다. 속눈썹이 눈 아래로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대단한 슬픔보다는 혼란이 엿보였다.

“매칭률 일 때문에 금방 포기할 줄 알았는데.”

“…….”

“매칭률 30퍼센트 대로 떨어졌으니까, 이제 저 별로 필요 없잖아요. 지금까지처럼 얘기 안 한다고 해주세요.”

“강연오 가이드, 내 생각은 좀 달라요.”

김현철이 한숨인지 헛기침인지 모를 것을 뱉어 놓았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나도 가이드라 잘 아는데, 저런 에스퍼들은 끈질깁니다. 차라리 문자로라도 명확하게 의사를 전하고 관계를 정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센터와 지부가 강연오 가이드를 보호하기는 하겠지만, 막무가내로 구는 에스퍼를 행정력만으로 막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네…….”

“만나란 얘기가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알죠.”

연오는 대답을 미루고 침묵을 고수했다.

김현철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그가 인천까지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가정만으로도 가슴이 콱 막혔다.

그러나 연오는 태헌과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가 두 번째 폭주 때처럼 눈물로 애원하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사랑한 ‘태헌이’와 불안정한 ‘정태헌’이 어느 정도 구분된 지금도 연오는 혼란 속에 갇혀 있었으므로.

연오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김현철이 먼저 정적을 끊어냈다.

“내가 괜한 말을 했네요. 잊어요. 인천지부에 잘 말해둘 테니까.”

“아니요.”

앙상한 손가락만 바라보던 연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결연한 한편 떨리는 눈빛이 김현철을 따끔하게 찔렀다.

“만나서 정리할게요……. 근데, 본부장님이 옆에 있어 주실 수 있나요?”

“당연히 있어야죠.”

곧바로 나온 대답에 연오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태헌을 위해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정말 흔들리지 않을지. 자신이 사라지면 가이드 없이 혼자 남을 정태헌을 두고 냉정할 수 있을지. 태헌을 두고 떠나도 정말 괜찮을지. 그걸 확인해야만 인천지부에 가서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을 듯했다.

아직은 결정하지 못한 칩 제거 수술 역시 그때쯤이면…….

마음을 냉정하게 추슬렀다고 믿었고 또 정말 멀쩡해졌다고 확신했는데, 이상하게 울고 싶었다. 연오는 캄캄한 창밖을 바라보며 토해낼 수 없는 감정을 턱이 아프도록 곱씹었다. 김현철이 말없이 손을 잡아 주어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

태헌은 병실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날카로운 형광등 불빛이 태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병실 문에 닿을 듯 말 듯 한 그림자만 뚫어지게 노려보던 태헌은 정신을 차리고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일단 미안하다고 하자. 폭주 중도 아니었고 대단히 아프지도 않았는데 막무가내로 에너지를 빼앗았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조건 사과하자. 그리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보자. 매칭률도 차차 높여 가자고, 더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자.

마구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한 후, 태헌이 두 차례 노크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김현철이었다. 이렇게 될 것을 한주연에게서 미리 들어 알고 있었던 정태헌은 당황하지 않았다.

“본부장님.”

“정태헌 에스퍼. 들어와요.”

김현철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나 주었다. 그러자 비로소 연오의 모습이 보였다.

헐렁한 환자복을 걸친, 초췌한 병자가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연오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장마 직전의 무더위에 맞는 연회색 반팔과 긴 청바지를 입은 그는 유난히 야위어 보였다. 어쩌면 반팔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이 너무 하얗고 연약해 보인 탓인지도 모른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연오가 느리게 머리를 들었다. 늦은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연오의 뺨에 어룽졌다. 긴 속눈썹이 경련하는 눈가에 무늬 같은 그림자를 새겨 놓은 모습이 태헌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연오는 떠날 준비를 마친 사람 같았다. 해가 뜨면 사라질 이슬처럼 투명하고 단출했다. 어쩌면 떠날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지도 모른다.

김현철이 문을 닫자 병실은 완전한 침묵에 잠겼다.

행동을 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던 태헌은 일단 연오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의 움직임을 숨죽여 주시하던 연오의 두 손이 세게 말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며 토할 것 같아, 태헌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 주었으면 싶었다.

다행히 태헌은 두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가이드님.”

연오는 태헌을, 또 자신을 두려워하며 제대로 된 대답조차 내놓지 못했다. 태헌이 갑자기 달려들어 에너지를 뺏어가거나 밀칠까 봐 두려웠고, 자신이 바보처럼 그를 받아줄까 봐 두려웠다.

태헌 역시 연오가 보내는 공포의 신호를 읽었다. 상대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그는 까마득한 좌절감을 맛보았다. 뭐라고 말하려 했는지 잠시 잊어버린 그때, 연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태헌 에스퍼. 저 오늘 인천지부로 갑니다.”

선언과도 같은 한마디가 태헌의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었다. 그는 연오를 멍하게 바라보며 바보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들었, 어요.”

“혹시라도 안 찾아오면 좋겠어요. 그 얘기 하고 싶어서 보자고 한 겁니다.”

“…….”

연오가 속사포처럼 쏟아낸 바람이 태헌의 말문을 막았다. 그는 알겠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왜 그랬느냐고 따지면 변명하지 않고 사과할 생각이었다. 무섭다고 울기라도 하면 연오가 진정될 때까지 몇 시간이라도 서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하면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연오는 태헌이 예상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이별을 말했다. 찾아오지 말라는 말은 간절한 경고나 다름없었다.

“진짜, 간다고요?”

태헌은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말을 던졌다. 가늘게 떨리며 건너간 말에 연오가 태헌의 시선을 피했다.

“네.”

“날 두고?”

“……네.”

두 번째 대답은 좀 더 단단했다. 그러나 태헌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유일한 가이드인 강연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었던 강연오가, 몸이 부서지도록 사랑해 주었던 강연오가…… 정말 간다고? 이렇게?

“내가 사과해도, 다시는 안 그런다고 해도요?”

아마 그것은 정태헌이 강연오에게 한 최초의 애걸이었을 것이다.

그 무겁고 축축한 감정이 건네지자마자 연오는 깜짝 놀랐다. 그리 길지도 않은 태헌의 한마디가, 자신의 중심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태헌이 떨면서 애원한 순간 세상이 휘청거리며 모든 굳은 다짐이 전복되었다.

마음 한쪽에서 익숙한 속삭임이 들렸다. 미안하다잖아. 저 표정 좀 봐, 울기 직전이야. 지금 용서해 주면 고마워서라도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언젠가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지금 떠나다니 말도 안 돼. 이렇게 버리고 갔다가 태헌이가 죽기라도 하면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태헌이는 목숨까지 바쳤는데 고작 이 정도 일도 못 버티고 도망치는 거야?

“크흠.”

김현철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연오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다그치는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기억이 채웠다. 연오는 정태헌의 에너지 갈취를 허락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태헌이와 정태헌이 완벽히 분리되던 그때를. 한 사람을 둘로 나눠 생각하다니 제정신으로는 못 할 짓이었지만 연오는 실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태헌이가 말했다. ‘연오야, 나는 이런 짓 안 해.’

자살처럼 정태헌에게 모든 것을 내던진 후 태헌이를 보았다. 그는 죽어가는 자신을 안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사지에 몰려 이성이 사라진 상태 그대로 연오는 처절하게 매달렸다. 너한테 갈 거라고, 날 데려가라고.

그랬는데 죽지도 못하고 깨어났다.

어둡게 저무는 하늘 아래 홀로 남아 태헌이의 한마디를 붙들었다. 나는 이런 짓 안 해. 나는 이런 짓 안 해. 나는 이런 짓 안 해.

“가이드님.”

불안이 극에 달한 태헌이 대답 없는 연오를 보챘다. 나는 이런 짓 안 해, 그렇게 속삭이던 태헌의 목소리를 덮는 소음 같았다. 연오는 짧게 숨을 들이켠 후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태헌을 직시했다.

“아파서 그랬던 거 아니죠.”

“…….”

“그냥 매칭률 때문에 화나서, 상처받아서…… 그래서 그런 거죠?”

그 사실이 연오를 무너뜨렸다.

차라리 태헌이 폭주 상태였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무섭고 힘들지언정 이렇게 도망가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신을 밀치고 휘둘렀던 첫 번째 폭주 때나 애처롭게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던 두 번째 폭주 때나, 무척 괴로웠지만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었으니까.

기억을 잃은 직후처럼 말도 안 되는 막말과 쓰레기 같은 폭언을 쏟아냈다 해도 무난히 넘어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불안정한 에스퍼니까 그럴 수 있지, 진심이 아닐 거야, 나중에 마음이 진정되면 사과하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거리고 나중에 태헌과 대화로 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번의 정태헌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태헌을 담은 연오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아프면, 정말 너무 아파서 내 에너지가 필요한 거면 다 가져가도 돼요. 그러다가 날 죽여도 돼요. 죽일 권리도 있고. 나는 첫 번째 폭주 가이딩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막무가내로 가이딩하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박이정의 염려를 그런 말로 거절했다. 태헌이가 구한 목숨이니 태헌이가 거둬도 상관없다고. 만용을 부린답시고 지껄인 헛소리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그 후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가이딩을 했다.

거기까지 되새긴 연오가 숨죽인 정태헌을 노려보았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음이 터지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졌다.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침내 답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거지 취급에도 싫어지지 않던 태헌이, 얻어맞은 후에도 애틋하게만 보이던 태헌이, 이제 와 이렇게 미워진 이유를.

마침내 태헌이와 정태헌이 구분되고야 만 이유를.

“근데 그냥 화풀이로, 짜증 나서, 상처받았다고…… 그래서 죽이는 건 안 돼요.”

“…….”

“태헌이가 그런 개죽음 당하라고 나 살리진 않았을 테니까.”

세상에 혼자 남아 매일 죽고 싶었던 열일곱 살에 태헌이 자신을 구했다. 스물한 살에는 혼자 균열의 핵으로 뛰어들어 연오를 보호했다. 그런 식으로 여러 번 목숨을 빚졌다. 그랬더니 하찮고 보잘것없게만 느껴지던 생명이 갑자기 무겁고 귀중해졌다.

태헌이가 준 마지막 선물을 정태헌이 순간의 감정으로 짓밟으려 했다. 연오는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상처받은 어린애의 화풀이라는 걸 알았으면서 왜 에너지를 허락했나. 왜 태헌이가 준 생명을 쓰레기처럼 내버렸나.

그러지 말고 저항해야 했다. 있는 힘을 다해 거부하고, 상처받고 흥분한 태헌을 진정시키고 대화로 풀어야 했다. 무서워서 그런 이성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다면 돌아서서 도망이라도 쳐야 했다. 늘어져 있지 말고 버둥거리기라도 해야 했다.

그때는 하지 못한 일을, 연오는 이제라도 하려는 참이었다.

충격으로 말을 잃은 태헌을 보며 연오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사실 그는 여전히 정태헌이 두려웠다. 지금은 저렇게 얌전히 서 있어도 언제 낯빛을 바꾸어 달려들지 모르니 시한폭탄을 앞에 두고 있는 듯 초조했다. 그래서 다음 말을 토해놓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도 이제 내 목숨 소중히 할 거예요. 그래서 떠나는 겁니다.”

“죽이려고 한 거 아니에요.”

태헌이 간신히 쥐어짠 한마디는 그토록 초라했다.

연오는 물론 김현철의 얼굴에서까지 넋이 쑥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을 읽지 못한 태헌은 성급히 한 걸음 나아갔다. 연오와의 거리가 성큼 좁아졌다.

“그렇게 쓰러질 줄 몰랐다고요. 내가 함부로 대한 건, 그건 미안하지만, 죽이려고 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가이드님도 알잖아요!”

좁아진 거리와 고성이 숨 막혔다. 연오의 상태를 알아차린 김현철이 태헌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태헌의 눈가가 아프게 일그러졌다.

“가이드님, 날 알잖아요!”

“모르겠는데요.”

연오가 두 손을 세게 움켜쥐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이제…….”

힘없는 속삭임에 태헌의 두 팔이 무력하게 늘어졌다. 그는 눈물로 사과할 타이밍도 놓치고 변명할 기회도 날려버린 채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부스러져가는 연오의 모습이 심장을 저몄다. 그 고통이 태헌에게 할 말을 일러 주었다.

“그럼 정말 간다고요? 내가…….”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연오가 태헌의 영혼을 꿰뚫었던 바로 그때처럼. 태헌은 자기가 연오의 진심에 흠뻑 젖고 말았던 모든 순간을, 온전한 자신인 채로 연오에게 정복당했던 모든 순간을 떠올렸다. 모호하기만 했던 감정이 단어로 정의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알면서?”

뒤늦게 언어로 자각한 감정이 턱밑까지 차올라 괴로웠다. 태헌은 김현철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연오에게 바싹 다가가 이 모든 괴로움을 그의 발밑에 토해놓고 싶었다. 그러나 김현철이 놓아주지 않았기에, 또 연오 앞에서 이능으로 사람을 해칠 수 없었기에, 태헌은 붙들린 채로 소리쳐야 했다.

“가이드님도 나 좋아하잖아요. 날 위해서 뭐든 할 정도로 좋아하잖아요. 나도 이제, 이제 가이드님 좋아해요. 기억도 안 나는 과거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지금 이대로, 그냥 무작정 가이드님 좋아해요!”

“…….”

“나랑 헤어지기 싫다고 했잖아요. 나랑 안 헤어진다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요. 싫으면 가이딩도 안 받을게요. 나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할 수 있어요. 나도 가이드님한테 잘할 수 있다고요!”

“…….”

“강연오!”

연오는 얼어붙은 채로 말이 없었다.

그는 태헌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등교하던 어느 여름날을. 대추나무가 바람에 쏴쏴 흔들리던 아침을. 하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을 뜨겁게 스치고 지나가던 바람을. 그 바람에 실려 수줍은 선물처럼 도착했던.

‘너 좋아서, 연오야.’

어떤 고백을.

소년다운 말간 얼굴로 떨면서 고백하던 태헌이의 얼굴 위로 절박하게 애원하는 정태헌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지금의 정태헌이 찬란하던 여름의 추억마저 망치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해놓고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 매달리는 정태헌의 모습이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

아름다운 이별조차 못 하게 막는 네가 정말로 싫다.

연오는 제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예전에 정태헌이 꽂은 말의 칼이 아직도 같은 자리에 꽂혀 있었다. 연오는 팔에 힘을 주어 그것을 쑥 뽑았다. 그리고 시퍼런 날을 그대로 정태헌에게 박아 넣었다.

“왜요, 호구 잡았다 싶었는데 간다니까 아쉬워요?”

말이 아니라 오물이다. 자신이 태헌을 위해 한 일은 ‘호구 짓’ 따위의 표현으로 요약될 수 없다. 알면서도 연오는 그냥 되는대로 내뱉었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심장이 펄떡펄떡 요동쳤다. 지금은 정태헌을 상처 입힐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든 가이딩해 준다던 가이드가 없어진다니까 아쉽냐고요. 아니면 죽을까 봐 무서워요?”

태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매칭률이 떨어졌을 때보다 더 상처받은 듯한 표정도 연오의 화를 누그러뜨리진 못했다. 이제 연오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언어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것이 입 밖으로 마구 쏟아졌다.

“내가 좋아졌다고요? 그럼 내가 호구라 좋아진 거겠죠.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도 좋다고 달려오는 개새끼 꼴이라 마음에 든 거겠죠. 내 말이 틀려요?”

피가 거꾸로 솟구치며 갑자기 세상이 핑 돌았다. 연오는 물이 가득 든 채 위태롭게 회전하는 유리컵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심도 아닌 말을 마구 쏟아내며 연오는 이상한 해방감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에게 박혔던 칼을 뽑아 상대에게 되돌리는 비열한 쾌감에 손끝까지 저렸다.

“이제 가서 다른 호구나 찾아봐요.”

뒤집혔던 시야를 바로잡고 눈을 똑바로 떴을 때, 태헌은 껍데기만 남아 떨고 있었다. 연오의 막말을 고스란히 받아낸 그의 입술이 대리석처럼 창백했다. 태헌은 폐수나 다름없는 말을 쏟아내고 될 대로 되라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연오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연오가 다른 사람 같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위해 뭐든 해주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차갑고도 뜨겁게 돌아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연오는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그가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기했을 리 없는데.

발밑이 깨진 얼음처럼 우르르 무너졌다. 매칭률이 떨어졌을 때 자각했듯, 연오의 맹목적인 사랑은 기억을 잃고 불안정해진 정태헌이 뿌리내릴 토양이었다. 연오가 자신을 으깬 사랑이라는 바오밥나무를 붙들고 견뎠다면 태헌은 연오의 헌신을 밟고 버텼다. 그런데 돌연 땅이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진짜로 하는 말 아니죠?”

태헌은 살얼음 위에 선 듯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화나서, 화풀이로 그러는 거죠? 그냥 짜증 나서, 힘들어서 그런 말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연오는 두 가지 충동을 느꼈다. 화풀이였다고 대답해서 태헌이 느꼈을 생생한 고통을 하찮게 짓밟아버리고 싶은 충동. 또 반대로 내가 당신과 똑같은 인간인 줄 아느냐고, 다 진심이라고 외쳐서 태헌을 비난하고 싶은 충동.

그러나 연오는 어느 길로도 가지 못했다. 호구 운운한 소리가 정말 화풀이인지 진심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말은 그토록 무서워서, 몇 마디 막말에 진심은 퇴색되고 진실은 훼손되었다.

태헌이 무너질수록 연오는 고양되었다. 그가 아픈 꼴을 보니 숨통이 터지면서 좀 살 것 같았다. 눈을 뜬 직후의 정태헌도 이런 무자비한 상승감 때문에 호구니 거지니 헛소리를 해 댔을까. 그의 아픔을 보며 기뻐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저열하게도 연오는 기뻤다.

태헌이 기억을 잃은 후, 자신이 처음으로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순간이었다. 그를 마음껏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가이딩 때문에 아쉬워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래서 사과하는 거 아니라고요.”

대답 없는 연오를 기다리는 태헌의 숨이 가빠졌다. 가이드로부터 버려지는 이때,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었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인데 정작 눈물은 한 방울도 없어 낯빛이 황폐했다.

연오라면 괜찮을 줄 알았다. 모든 분노와 원망과 어리광을 무단투기해도 연오는 다 받아줄 줄 알았다. 자신이 그를 죽인 것 같다며 울었을 때도 이런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으니까, 연오는 늘 자신을 용서해 줬으니까, 끝없는 이해로 자신을 함락시켰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이번에는 정말 실수였는데 왜.

예전이었다면 벌컥 화를 냈을 것이다. 김현철이 있든 말든 아무렇게나 연오를 휘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가이딩을 받은 몸은 지나치게 안정적이었고 정신도 멀쩡했다. 태헌은 감정적 폭주를 일으키는 대신 밭은 숨을 내쉬며 연오를 찾았다.

“가이드님.”

“…….”

“말 좀 해요, 제발. 아무 말이나…….”

잦아드는 음성에 담긴 감정은 명백한 공포였다.

그 선명한 두려움이 연오를 흡족하게 했다. 자신이 벌레처럼 죽어도 좋은 존재는 아니었음을, 적어도 최후의 순간에 태헌을 떨게 할 수 있는 존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그러나 지금 연오를 점령한 만족은 쾌감보다는 비탄에 가까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렸나. 태헌의 공포를 즐기고 그의 애원을 만끽하는 뒤틀린 마음이 징그러웠다. 태헌이가 사랑해 주었던 자신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기나긴 싸움 끝에 자신 역시 태헌처럼 다른 사람이 되고야 말았는가?

그러나 정태헌과 태헌이가 결국은 한 사람이듯, 태헌을 위해 죽으려 했던 연오와 그를 두고 도망치는 강연오 역시 똑같은 사람이다.

끝내 망가지고 말았다. 더럽혀지고 말았다.

태헌과 함께 공들여 쌓아 올린, 그 완전무결한 사랑이.

그러니 아마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번호 바꿀 거예요.”

연오는 태헌의 애원에 답하는 대신 관계에 종언을 선고했다. 우뚝 선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태헌이 끝끝내 울기 시작했는데도, 그는 괴로운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우리 다시는 안 보면 좋겠어요, 정태헌 에스퍼.”

이 다짐을 지킬 수 있을까. 정태헌이 다시 한번 살려달라고 애원한다면 또 전처럼 달려가지 않을까. 자기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주제에 그를 건지려고 죽음의 파도에 몸을 던지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태헌이인데. 우리 관계가 이렇게 망가졌어도 결국은 내 태헌이인데…….

연오 안에서 태헌이와 정태헌이 끝없이 합쳐졌다가 분리되기를 반복했다. 다른 사람인데 같은 사람이고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인, 끝없는 혼란이었다. 까딱 발을 잘못 디디면 시커먼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내가 죽어도 상관없어요?”

그래서 태헌의 그 물음은 연오의 폐부를 저미며 들어왔다.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자처럼 무력하게 울면서 던진 질문이 가차 없이 연오를 난도질했다.

“이제 정말, 내가 죽어도 좋아요?”

연오는 캄캄한 구멍 같은 두 눈으로 태헌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는 주제에 하나뿐인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태헌을. 자신이 사력을 다해 구한 목숨을 무기로 삼은 태헌을.

이 지경까지 와서도 어리광이다.

연오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헌은 좁혀지는 거리와 다가오는 연오를 숨죽여 바라보았다.

발소리가 들리고, 얼굴이 가까워졌다가,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갈 때.

익숙한 체향과 동시에 비수 같은 연오의 한마디가.

“진짜 못됐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발소리, 문 닫히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때까지도 태헌을 붙들고 있던 김현철이 손을 놓았다. 태헌은 김현철까지 사라진 빈 병실 한가운데 붙박인 서 있었다.

정말로 혼자가 된 순간이었다.

-

“강연오 가이드.”

김현철은 나란히 복도를 걷는 연오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어깨조차 들썩이지 않고 펑펑 우는 모습이 가여웠다. 태헌이 떨면서 울었다면 연오는 허물어지듯 눈물을 쏟았다. 눈물로 흥건히 젖은 두 뺨을 문질러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강연오 가이드. 진정해요.”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제대로 기운을 차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울면 좋지 않다. 김현철은 정수기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종이컵에 물을 받았다. 한 잔의 호의를 건네받는 연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태헌 앞에서는 덤덤한 척했지만 그 역시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연오는 기를 쓰고 물을 마셨다. 잘 살기로 했으니, 끝까지 살아내기로 했으니 몸을 챙겨야 했다. 작은 컵을 다 비운 후에는 자기 손으로 직접 물을 더 떠 마셨다. 쓰레기통에 컵을 버린 후 연오는 소매로 얼굴까지 다 닦아냈다.

그러고 있으니 문득 셔틀버스 생각이 났다. 인천지부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몇 시 출발이더라.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이렇게 사무치게 슬프고 막막한 순간에 버스 시간 생각이나 하다니, 그래도 살 만하구나 싶어 조금 비웃음이 나기도 했다.

“좀 천천히 가요.”

성큼 걸음을 옮기자 김현철이 팔을 잡아 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추면서,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버스 얘기를 했다.

“셔틀버스 놓칠까 봐요. 지금 안 떠나면 못 갈 것 같은데.”

정태헌과 마주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지 확인하고 싶다고?

연오는 흔들렸다. 사과하겠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애원하는 태헌을 보자마자 떠나겠다는 결심이 전복되었다. 태헌이의 희생을 생각하며 겨우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정태헌의 마지막 말에 또 마음이 약해졌다. 치밀어올랐던 분노마저 시시하게 식어버릴 만큼.

태헌은 이제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느냐고 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연오의 머릿속에서 태헌이와 정태헌이 분리된 건 사실이지만 연오는 그 둘이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믿을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 우연한 계기로 기억만 돌아온다면 태헌이는 분명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탓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연오는 정말이지 숨이 막혔다.

혼란을 피해 달아나는 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태헌이 했던 말을 되돌렸지만 복수라도 한 양 후련하기만 할 리 없었다. 울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을 무작정 즐기기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정말 버스 때문에 그래요?”

김현철이 연오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되물었다. 연오는 막막한 낯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김현철은 두 손을 연오의 어깨에 얹으며 코로 긴 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내가 태워다 주려고 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네……. 그래도 빨리 가려고요…….”

“정태헌 에스퍼 때문에? 따라올까 봐?”

복도는 조용했지만 가이드를 잃을까 두려움에 잠긴 에스퍼가 언제 뛰어나올지 모른다. 김현철도 그 부분은 주의하고 있었다. 연오의 두려움도 이해한다고, 그렇게 위로하려는 순간.

“머뭇거리다가 제가 못 떠날까 봐요.”

겨우 진심을 뱉은 연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들리다 끊어졌던 음성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지직거리며 반복되고 있었다. 정태헌이 사과했잖아, 다시는 안 그런다잖아. 이대로 버리고 갔다가 불시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래. 걘 어린애야. 한 번만 용서해 주고 믿어 봐.

그러나 순순히 그 목소리에 따르기엔 연오가 겪었던 고통이 너무 컸다. 기분 나쁘다고 찍 눌러 죽여도 되는 개미처럼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주는 공포와 모멸감도 너무나 짙었다. 태헌이 준 생명을 이제라도 소중히 하고 싶은 욕구, 즉, ‘정태헌 전용 가이딩 기계’가 아닌 ‘강연오’로 살고 싶은 욕구도 묵직하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강연오 가이드.”

김현철이 연오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주물러 주었다. 연오를 보는 그의 얼굴은 뜻밖에도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생각해요. 깊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강연오 가이드는 지금 약해진 상태고,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그리고 정태헌 에스퍼 옆에 있으면 제대로 회복할 수가 없죠. 서울 센터는 너무 복잡하니 환자에게 도움 되는 환경도 아니고.”

“…….”

“일단은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죽어가는 에스퍼를 버리는 거라고, 인연을 끊는 거라고 거창하게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요양 가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냥 요양 가는 거.

김현철 말대로 단순한 생각이 도움이 되었다. 그래, 급하게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이별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괜찮다. 일단은 태헌과 거리를 두고 천천히 고민해 보자. 아마…… 아마 정태헌은 그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다.

“더 깊은 생각은 몸 좀 나아지면 합시다.”

김현철이 연오의 등을 감싸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길이 연오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에, 복도 저 끝에 나타난 태헌의 모습을 본 듯도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

태헌은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다가 비상구로 달려갔다. 연오가 머물던 개인 병실은 고층에 있어서 지하까지 가려면 한참 뛰어 내려가야 했지만,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태헌은 긴 다리로 어둑한 비상구 계단을 두세 칸씩 내려가며 속력을 냈다.

좁은 비상구에 요란한 발소리가 울렸다. 가이딩을 받은 후 균열에 투입되지 않아 아직도 기운이 넘쳤다. 정태헌은 넘어지지도 비틀거리지도 헐떡이지도 않았지만 난간을 잡은 손만은 점점 축축해졌다. 이대로 연오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를 바짝 추격해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까마득하게 이어진 계단을 내달리는 동안 다리가 규칙적으로 교차하고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그러나 난간을 잡고 빙글 돈 순간, 돌연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동작이 꼬이고 말았다. 태헌은 그대로 발을 헛디디며 우당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머리와 무릎이 계단 모서리에 부딪히며 험악한 소리가 났다. 어디를 잘못 부딪혔는지 뒤통수까지 뜨끈했다. 딱딱한 바닥을 짚은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태헌은 튀어 오르듯 일어나 다시 달려 나갔다. 그러다가 한 번을 더 구른 후에야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들었다.

‘빨리 가야 하는데.’

강연오가 정말로 인천으로 떠나기 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아까 병실에서는 하지 못한 얘기를 마저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냐면, 무슨 얘기를 제대로 전하지 못했냐면…….

불을 켜놓아도 밝지만은 않은 비상구에 우뚝 선 채로 태헌은 잠시 멍해졌다.

‘찾아가서 뭐라고 할 건데?’

연오는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다. 핸드폰 번호도 바꿀 거라고, 앞으로 만날 일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나 죽어도 상관없느냐고 묻기까지 했는데 돌아온 건 억눌린 비난뿐이었다. ‘진짜 못됐다.’ 연오의 마지막 한마디가 쟁쟁 울렸다.

태헌은 바닥을 짚어 더러워진 손으로 난간을 움켜쥐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거침없이 뛰어 내려갈 수 있었던 계단이 갑자기 무섭고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바닥이 파도처럼 울렁거리며 솟구쳤다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훅 가라앉았다. 태헌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거기 서 있었다.

가서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느린 속도로 내려가 봐야 연오는 가고 없다는 걸 알면서, 태헌은 필사적으로 한 발을 아래로 내렸다.

연오에게 할 말을 찾고 싶었다. 아까처럼 더듬거리는 게 아니라 정확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정태헌은 치열하게 생각했다. 자기가 뭘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발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솟았다. 태헌은 아프지도 않은데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아내며 다른 발을 움직였다. 모래주머니라도 매달린 양 묵직한 다리가 마치 남의 것 같았다. 생각이 어지럽게 휘몰아쳐, 태헌은 폭풍을 만난 고층 빌딩처럼 마구 흔들렸다.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연오가 받아줄 줄 알았다.

철저히 혼자가 된 지금은 그때의 확신이 우습고 어처구니없었다. 왜 받아줄 거라고 믿었나. 한주연이 ‘네 가이드가 너 버리는 거야.’라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에스퍼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에스퍼 본부장도 연오가 지쳐버렸음을 알아차렸는데 왜 자신만 몰랐나.

층이 아주 느리게 바뀌었다. 연오는 이미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태헌은 미련한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끈질기게 내려갔다.

호구, 호구, 호구, 그 듣기 싫은 단어가 발소리에 맞춰 띄엄띄엄 튀어 올랐다. 자신을 위해 뭐든 하는 강연오라 좋아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연오가 직접 ‘호구’라는 표현을 입에 담았을 때는 상처받고 말았다. 연오의 판단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을 터인데 중대한 오해라도 받은 양 억울해졌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고 항의하고 싶었다. 그냥 당신을 이용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달라진 세상, 급변한 환경, 익숙해지기 어려운 센터, 야만적인 에스퍼들과 넋이 빠진 가이드들, 그 사이에서 혼자 빛나는 당신의 마음이 좋았던 거라고.

배운 적 없고 배울 생각도 없었던 희생과 헌신을 주저 없이 해내는 당신을 동경하고, 또 그런 당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던 과거의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끼어들 수 없는 견고한 관계를 질투하고…….

정태헌은 그제야 지나간 순간의 연오를 이해했다. 자신이 호구니 거지니 고아니 하며 막말을 쏟아낼 때, 거세게 항변하는 대신 변명 같은 설명만 구구절절 쏟아내며 당황하던 그를.

감정은 한 단어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설명되고 간단하게 압축되어 공처럼 휙 던질 수 있는 사물이 아니었다. 이제 떠날 거라고 말하는 연오 앞에서 태헌이 무수한 말을 끌어안고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듯, 과거의 연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층이 바뀌고 또 바뀌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의 장면도 필름을 갈아 끼운 듯 교체되었다. 폭주하여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에서부터 달려온 연오가 가물가물 눈을 감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옆에서 그를 받아 안는 박이정의 모습도 선명했다. 그때는 연오를 두고 가면서도 우스운 질투만 느꼈다.

그런데 왜, 걱정은 되지 않았지?

입술에 상처를 달고 나타났던 강연오도 떠올랐다.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한 날이라 에너지를 천천히 넘기겠다고 양해를 구하던, 그 파리한 몰골이. 그때는 어땠나. 그를 걱정했던가. 아니면 다른 에스퍼를 돌보고 왔을 그가 미워 무작정 분노했던가?

층이 바뀌었다.

다른 가이드를 찾아 제게 갖다 붙이려 했던 시절의 강연오가 앞서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박다현을, 이범석을 소개하던 연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았는데도 이상하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과거의 애인에게 새 가이드를 직접 붙여 주는 일이 쉽고 즐거울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연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는 사실만 알았어도 무리한 가이딩을 요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연오가 죽음의 위협을 겪을 일도 없었을 테고 이렇게 떠나지도 않았겠지. 자신이 연오의 몸을 한 번이라도 염려했다면, 그가 아프다는 사실에 한 번이라도 주목했다면.

최인열 사건이 있고 나서는 연오가 쉬었으면 했다. 두 번째 폭주 가이딩을 받은 직후라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연오가 휴식을 취했으면 하는 간단한 바람 정도였지 죽도록 염려스럽진 않았다.

왜?

그가 무리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서?

‘진짜 네 손으로 연오 죽이기 전에 다른 가이드 찾아.’

한주연이 했던 경고가 가시처럼 솟아올랐다. 그때 그녀는 분명 수술 후유증을 언급했다. 자신이 강연오를 정말 죽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최인열과의 매칭에 더 열심히 임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후 상황이 변하며 엄중한 경고도 잊혔다.

사실 신호는 많았다. 박이정도 계속해서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조언했고, 한주연도 정신 차리라고 수차례 일갈했다. 그런데 정태헌은 멈출 수가 없었다. 연오가 멀쩡하게 견뎌서 그랬을까, 아니면 강연오만은 죽을 리 없다고 무작정 믿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가이딩을 살살 해요? 물에 빠졌는데 구명 튜브 살살 잡으라고요?’

태헌의 걸음이 계단 중간쯤에서 뚝 멎었다. 나선형으로 이어지며 파고들던 생각도 한 자리에 머물렀다.

내가 강연오를 사람으로 취급한 적이 있나?

자신을 변호하는 목소리가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당연히 있지. 칩 제거하라고 말하려고 하기도 했잖아. 처음에는 구명 튜브나 편리한 가이딩 기계 취급했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달랐어. 적어도 최인열의 일 이후부터는 강연오를 소중히 대하려고 노력했어.

목소리의 볼륨이 점점 낮아졌다.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강연오를 똑같은 사람으로, 평범한 인간으로 대했다면 매칭률이 떨어졌을 때 왜 그렇게 화가 났나. 강연오는 상처받지 말라고 위로했지만 그건 단순한 마음의 아픔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 아프지도 않으면서 에너지를 남김없이 갈취할 정도의 분노였다.

구명 튜브가 말을 안 들어서? 그동안 노력하고 잘해 주었는데 강연오가 ‘감히’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판단을 가진 존재라서?

태헌은 그제야 자신이 연오의 수술 후유증을 궁금해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몸이 어떤지 자세히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강연오는 그냥 자신을 가이딩해 줘야 하는 연약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졌다고요? 그럼 내가 호구라 좋아진 거겠죠.’

좋아한다는 자신의 고백을 짓밟고 비웃은 강연오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조금의 애정만 주면 매칭률이 올라갈 기계 취급하다가 냅다 좋아한다고 했으니 듣는 사람은 기가 막혔을 터다.

돌로 변한 양 멈췄던 태헌의 다리가 마침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는 결승선을 발견한 달리기 선수처럼 미친 듯이 달렸다. 연오에게 할 말이 떠올라 머릿속이 완전하게 정리되었다.

걱정했다가도 금세 잊어버리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화풀이를 하고, 필요할 때는 살려달라고 매달렸다가 막상 살아나면 전과 똑같이 굴고, 그렇게 당신을 감정도 생각도 없는 가이딩 기계 취급해서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연오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며 가이딩을 받는 동안, 화풀이로 연오의 에너지를 갈취하는 동안, 날개를 단 듯 떠올랐던 정태헌이 곤두박질치듯 하강했다.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던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어깨를 부딪히며 살아가는 지상으로. 추락해야만 진실해지는 애정도 있다는 사실을 태헌은 그때 깨달았다.

내려가고 있는데 오히려 마음이 부풀었다. 이제 연오에게 이 말만 하면, 이 마음만 전하면!

쾅!

로비의 비상문을 열어젖히자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어둑어둑한 비상구를 벗어나 눈이 부셨다. 태헌은 사람이 거의 없는 로비를 무작정 가로질렀다. 아무 계산도 없이 센터 밖으로 튀어 나갔을 때쯤에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헉, 헉…….”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토한 태헌은 막연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차들. 늦은 저녁 하늘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 잘못 쓴 글자처럼 비뚤비뚤 빼곡한 빌딩들. 커다란 버스와 분주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어지러운 소음. 매연과 아스팔트와 한여름의 냄새.

당연하게도 연오는 없었다.

아마 비상계단에서의 정태헌이 더 깨달아야 했을 한 가지는, 너무 늦은 마음도 있다는 것.

연오를 만나기 위해 떨어진 지상에 연오는 없었다. 태헌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서울 한복판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

정태헌은 가이딩 기계 아래서 눈을 떴다.

그냥 기계 아래 누워 있었을 뿐인데 온몸이 짜부라지는 느낌이었다. 배가 눌려 내장까지 토할 것 같아 태헌은 상체를 굽힌 채 여러 번 침을 삼켜야 했다. 토기를 억누르고 나자 아무도 없는 기계 가이딩실의 살풍경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새하얀 공간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침대에, 정태헌은 혼자 누워 있었다. 창문도 시계도 없어서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나. 긴 숨을 토하며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그때.

지잉…….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태헌은 번개처럼 핸드폰을 낚아챘다. 일순 숨까지 죽이고 발신인을 확인했으나 희미한 기대는 익숙한 실망으로 변했다.

“네.”

성의 없이 대꾸한 태헌이 두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기계 가이딩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그의 안색이 파리했다.

[너 아직 연오랑 연락 안 돼?]

“알아서 할게요.”

[걱정돼서 그러지. 네 엄마도 걱정이 태산이야.]

“그래요? 어제 저랑 통화할 때는 강연오 가이드 불쌍하다고 우시던데.”

[태헌아.]

타이르는 듯한 음성에 태헌은 짙은 피로를 느꼈다.

연오는 정한철과 이정우, 즉 정태헌 부모의 연락도 피하는 중이었다. 바꾼 번호 역시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연오가 떠나고 일주일, 태헌은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 매일매일 확인하고 있었다.

[내가 연오 만나서 설득해 봐야겠다.]

복도를 걷던 태헌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곧이어 튀어 나간 음성에는 황당함마저 묻어 있었다.

“제정신이세요?”

[요즘 균열 열리는 게 심상치 않아. 조만간 너도 투입될 텐데 가이드 없이는 안 돼.]

“강연오 가이드 좀 내버려 두세요. 저 무섭고 싫다고 갔는데 억지로 불러서 뭐 해요? 게다가 가이드 본부장님한테 들으니까 몸도…….”

갑자기 가슴이 턱 막혔다. 김현철로부터 전해 들은 연오의 상태를 떠올릴 때마다 그랬듯이. 김현철은 연오의 상태가 정말로 좋지 않다고, 요양을 떠난 거나 마찬가지라고, 괜히 연락해서 스트레스 주지 말고 마음 편하게 지내도록 배려해 주라고 신신당부했다. 스물한 살 한창때의 청년이 매번 픽픽 쓰러지니 얼마나 힘들겠냐고 중얼거리던 얼굴에 염려와 동정이 가득했다.

순간 치밀어올랐던 감정을 수습한 태헌이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쥐었다.

“……건강 상태도 최악이래요. 지금 만나도 아무 소용 없다고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야. 기계도 약도 안 듣는데.]

“알아서 한다고요. 끊을게요.”

[기다려 봐. 연오가 내 말은 들을 거다.]

태헌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통화가 끝났다. 기계 가이딩의 고통이 가시지도 않은 몸뚱이를 끌고 멍하게 서 있던 태헌이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묘하게 불길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그런 싸구려 신파극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건 정말 아니겠지.

태헌은 급히 아버지에게 전화를 되걸었다. 그러나 정한철은 응답하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애꿎은 입술만 짓씹던 태헌은 이내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

인천지부에서 연오와 친해졌던 기호와 현종은 돌아온 연오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기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조차 못 한 채 환호만 했고, 현종은 정신 나간 S급 에스퍼를 상대하느라 황폐해진 연오를 알아차리고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헤아림의 방향과 깊이가 다른 위로였지만 연오에게는 둘의 존재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인천지부에서의 일주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일시 휴직으로 처리되어 가이딩에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열심히’ 쉬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오는 인천지부에서 진행하는 ‘가이드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는데,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선배 가이드는 서울 센터엔 이런 게 당연히 없을 거라고 했다.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일수록 균열이 자주 열려요. 그래서 서울에 S급 에스퍼가 제일 몰려 있는 거죠. 바쁘고 사람이 모자라다 보니 회복시킬 틈이나 있겠어요? 이런 프로그램 있어도 다 형식적이지. 센터 사람들은 솔직히 미성년자 에스퍼라도 데려다 일 시키고 싶을걸요.”

“그래요? 인구 밀도 때문이면 다들 이사를 가면 될 텐데.”

“뭐, 살던 곳을 단숨에 포기하긴 어렵겠죠. 게다가 최근 몇 년은 균열 사망자도 거의 없었고. 다들 어느 정도는 안전해졌다고 생각할 거예요. 균열이 어디 열릴지 예측하는 기계까지 나왔으니까.”

태연히 이어진 말에 문득 부모님이 떠올랐다. 균열 예측기가 좀 더 일찍 발명되었다면 부모님은 아직 살아 계셨을까. 해봤자 괴로워지기만 하는 생각이라 연오는 그쯤에서 가정을 멈췄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상담실에 앉아 우울함을 창조하긴 싫었다. 정식 심리 상담은 아니지만 연오는 이 공간의 안전함과 아늑함이 좋았다.

“저녁 먹기 전에 뭐 할 거예요? 오늘 뭐 하는 날이죠?”

“런닝이요.”

“아, 그거 너무 힘들지 않아요?”

선배 가이드가 지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과거에 연오처럼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그는 30분 달리기가 제일 힘들었다고 투덜거렸다. 연오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전 아직 2분 뛰고 1분 걷고 이렇게 다섯 번만 반복하는데도 너무 힘들어요.”

“자주 쓰러진다면서요. 무리하다가 막 기절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고요.”

연오가 멋쩍게 웃었다. 스물한 살이면 돌도 씹어먹을 나이인데 비실거리다가 매일 기절이나 한다고 하니, 달리기 코치가 매일 잔소리를 할 만도 했다.

“처음엔 1분 뛰기도 힘들었어요. 몸이 많이 약해졌구나 했는데, 점점 나아져야죠.”

“몸이 얼마나 축났으면. 옛날에 수술한 가이드들이 딱 그랬어요. 가이딩 몇 번이면 곧 죽을 사람처럼 얼굴이 파래져서…….”

자기 이야기에 바쁜 선배 가이드는 연오의 짧은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손까지 홰홰 내저으며 한탄했다.

“그 수술 진작 불법으로 지정해야 했는데. 하여튼, 돈만 많이 주면 뭐 해요. 에스퍼든 가이드든 세상 지키다 죽는다고 누가 알아주나.”

“네, 그렇죠…….”

“가이드님도 몸 사려요. 서울 센터에선 에스퍼나 가이드 죽는 게 드문 일도 아니라던데.”

둘은 그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술 가이드 얘기가 나와서인지 죽음 얘기를 들어서인지 연오는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다. 차라리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달리기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달리면서 땀을 흘리면 잡념도 옅어질 것이다.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샤워하고 저녁을 챙겨 먹은 다음 쓰러져서 자 버려야겠다.

요즘은 김현철 본부장의 충고대로 생각을 간단히 하고 행동을 단순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태헌도, 칩 제거 수술도, 센터에 두고 온 인연도, 당분간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사람은 김현철뿐이었다. 외로울 줄 알았는데 회복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빡빡해서인지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서인지 고독보다는 후련한 해방감이 더 컸다.

당분간 이렇게만 살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연오는 기숙사로 가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어제 빨아놓은 옷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깔끔하게 정리된 기숙사 방과 새것처럼 깨끗하고 빳빳한 운동복이 기분마저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산뜻한 걸음으로 지부 로비로 내려갔을 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달리기 코치의 전화였다.

[강연오 가이드, 미안한데 내가 몸살기가 좀 있어서 오늘 같이 못 뛸 것 같아요. 혼자 갔다 와야겠는데.]

연오는 로비에 잠깐 멈춰 섰다. 의욕적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사람 마음은 간사해서 슬쩍 꾀가 났다.

“편찮으세요? 저도 오늘 하루 쉴까요?”

[아픈 건 난데 강연오 가이드가 왜?]

쉰 살 넘은 여자 코치의 꼬장꼬장한 말투가 핸드폰을 타고 전해졌다. 일주일 사이에 쌓인 친밀감 덕에 연오가 피식 웃은 순간 코치가 이어서 당부했다.

[2분 뛰기 1분 걷기 다섯 번만 하고 더우니까 그늘 있는 트랙에서만 뛰어요.]

“그럼 내일 뵐게요. 약은 드셨어요?”

[예에. 아무튼 파이팅!]

콜록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무뚝뚝하지만 세심한 코치를 잠깐 걱정하다가 연오는 혼자 밖으로 나갔다.

센터 바로 옆에 조성된 공원으로 가니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저녁 시간 직전이라 해가 기울고 있어 모두의 그림자가 기다랗게 늘어진 모습이 활기차게 느껴졌다. 연오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삼사 분 정도 걷다가, 핸드폰 스톱워치를 켜고 가뿐히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힘이 붙기 시작한 다리가 앞뒤로 교차하며 땅을 박찼다. 쨍쨍한 햇볕을 피해 그늘로만 달리자 조각난 햇빛이 연오 위로 내려앉았다가 빠르게 멀어졌다. 천천히 달리는 연오보다 빨리 뛰어서 앞서가는 사람도 있었고, 맞은편에서 “후! 하!” 요란한 기합까지 넣으며 달려와 곁을 스치는 할아버지도 보였다.

그늘에서 달리며 보는 여름빛은 찬란했고 온 힘을 다해 초록을 밀어 올리는 나무들은 잔가지 하나하나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탁, 탁, 규칙적으로 트랙을 차는 다리와 흔들리는 팔도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 주었고, 살짝 가빠진 숨은 한 호흡 한 호흡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뒤늦게 스톱워치를 본 연오는 자기가 4분 넘게 쉬지 않고 달렸음을 깨닫고 천천히 달리기를 멈추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숨이 차서 힘들었는데 체력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수술 후에는 거의 느끼지 못한 뿌듯함과 성취감이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딱 1분만 걷고 다시 뛰기 시작해야지. 스톱워치를 새로 작동시킨 연오는 춤을 추듯 가뿐하게 팔을 흔들었다. 상담실에서 잠깐 울적해지긴 했지만 지금 기분은 최고였다. 역시 사람은 생각을 비우고 몸을 많이 움직여야…….

‘연오야, 상담 선생님이 뭐래?’

‘약 먹으면 걸으러 나갈 힘도 생길 거라고……. 그리고 나중에 달리기도 해보래. 난 뛰는 거 싫은데.’

‘그럼 나랑 같이 뛸래? 우리 연습해서 나중에 10킬로미터 마라톤도 나갈까?’

‘넌 에스퍼인데 왜 일반인들이랑 같이 뛰려고 그래? 불공평하게.’

‘에스퍼도 뛰면 숨은 차거든?’

‘거짓말.’

불쑥 떠오른 지난날의 대화가 연오의 무릎을 가차 없이 걷어찼다. 순간 넘어질 듯 휘청한 연오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겨우 정신을 붙들었다. 지금 고등학교 때의 태헌이를 생각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끝내 10킬로미터 마라톤에는 나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쉬워하면 태헌의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하나. 이러지 말고 달리기나 마저 하자.

생각의 물길을 억지로 틀어놓으며 다시 뛰려던 바로 그때.

“연오야!”

처음에 연오는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과거 생각에 깊게 잠겼던 탓에 환청을 듣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의 부름이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멀지 않은 곳에 선 정한철의 모습이 증명해 주었다.

“아저씨.”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뒤에서 달리던 사람들이 연오 곁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가까이 온 정한철이 연오의 어깨를 살짝 감싼 채 트랙 밖으로 이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늘이 주는 시원함이 좋았는데, 정한철과 조우하자 이상하게 한기가 들어 추웠다.

“연오야, 우리 어디 들어가서 얘기할까?”

“아, 아니요. 저 운동 중이라서요.”

연오는 상냥하고 친절하게 묻는 정한철의 팔을 슬쩍 떼어냈다. 물어볼 말은 가득한데 머리가 멈춘 듯 적절한 질문을 꺼낼 수가 없었다. 공원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을까. 아니, 아니, 진짜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왜…… 오신 거예요?”

이렇게 갑자기. 불편한 마음에 일부러 연락 피하는 거 아셨을 거면서.

연오가 채 뱉지 못한 말을 제대로 삼키기도 전에 정한철이 연오의 두 손을 감싸 잡았다. 달리는 동안 땀이 나기도 했고 어쩐지 찜찜하기도 해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정한철은 생각보다 강하게 연오를 붙들고 있었다.

맞닿아 오는 그의 시선이 간절했다. 연오의 착각이 아니었다. 정한철은 조금, 글썽거리고 있었다.

“연오야, 네가 태헌이 좀 도와줘라. 응?”

연오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자신의 숨소리까지 사라졌고, 주위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의식하던 예민함도 사그라들었다. 울먹이는 정한철에게 고정된 연오의 눈동자는 떨리지도 않았다. 그대로 정물이 되어버린 연오의 손이, 정한철에 의해 힘없이 흔들렸다.

“태헌이가 너한테 많이 잘못한 거 알아. 아저씨랑 아줌마가 여러 번 얘기는 했는데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고, 너한텐 미안한 것밖에 없다.”

“…….”

“그런데 태헌이 이제 겨우 만성 가이딩 부족 벗어났어. 센터에서도 안정되려면 지금이라고 하더라. 한주연 본부장은 차마 너한테 연락 못 하는 것 같던데, 그래도 너 아니면 누가 태헌이 살리겠어.”

“…….”

“기계도 약도 소용없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가이드들은 아예 예전만큼의 매칭률도 안 나와. 연오야, 태헌이도 많이 반성하고 있고, 그리고…… 그리고 걔가 너 얼마나 좋아했니. 걔 기억 잃고 많이 이상해졌지만 여전히 예전의 태헌이야.”

“…….”

“연오야…….”

모든 단어와 문장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정한철을 원망만 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공교롭게도 그의 말은 모두 연오 마음 깊은 곳에 깔린 걱정과 맞닿아 있었다.

태헌은 이제 겨우 만성 가이딩 부족에서 벗어났는데, 또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상태가 전처럼 악화될 것이다. 태헌이 괴로워하지 않도록,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지금인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외면만 하고 있어도 되나. 칩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고 태헌을 돕는 것도 아닌 애매한 교착 상태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태헌이 저렇게 된 것도 결국은 자기 때문 아닌가. 기억을 잃은 직후의 태헌이 녹음 파일을 들려주며 추궁했듯이. 배은망덕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는 괴로워하고 있는데 일주일 가까이 이렇게 뭉개고만 있고.

발끝부터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무슨 감정이라고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지저분한 진흙 덩어리가 혈관을 틀어막았다. 몸을 옷 뒤집듯 뒤집어 박박 닦아내고 싶었다. 그러면 이 답답함이, 이 처참한 괴로움이 사라질까.

“우리 아내는 널 설득할 생각 말라고 하더라. 김현철 본부장도 그랬고. 근데 그거 아니, 아내도 김현철 본부장도 가이드라 에스퍼의 고통은 몰라. 가이딩을 못 받으면 평생 좁은 어항에 갇혀 살아야 하는 그 느낌을 몰라.”

“…….”

“연오야, 아마 너도 모를 거다. 태헌이를 아무리 좋아해도, 너도 모를 거야. 가이드니까.”

“…….”

“태헌이가 너한테 잘못했지만, 정말 나쁘게 했지만…… 태헌이 기억 잃기 전에도 정말 힘들어했어. 너한테 숨기느라 더 힘들었을 거야. 그때를 봐서라도 네가 한 번만, 태헌이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

“네가 쓰러진 태헌이 보고 주저 없이 가이드 수술받는다고 했던 그때처럼 나서 주면 안 되겠어, 응?”

연오의 손은 그때까지도 정한철에게 붙잡혀 있었다. 열기에 가까운 온기를 느끼며 연오는 겨우겨우 마른침을 넘겼다. 감각이 엉망이 된 것 같았다. 분명 정한철은 많은 말을 했는데 이상하게 ‘가이드 수술’이라는 단어만 귀에 콱 박혔다.

태헌이가 쓰러졌을 때, 가이드 수술을 받았을 때. 새삼 되새겨보지 않았던 그때 일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하나하나 떠올랐다.

연명실에 태헌의 어머니인 이정우는 없었다. 나중에 듣기론, 아들의 상태를 보자마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졸도했다고 했다. 그야 당연하다, 태헌은 그때 시체보다 못한 꼴이었으니까. 처참한 지경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본 부모라면 다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한철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슬픔을 눌러 참는 모습이긴 했으나 이성을 잃거나 막막하게 넋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연오의 전화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받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 비극적인 소식을 입에 담는 아버지다운 태도는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감당할 수 없는 참극이 현실로 와닿지 않아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 이상한 건 연오가 가이드 수술을 받겠다고 말한 이후였다.

수술을 준비하는 시간조차 없었다. 수술실, 의사, 도구까지 전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 수술이 불법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언젠가 한주연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연오의 뺨을 후려쳤다.

‘센터가 관리하던 의사가 네 수술을 집도했고……. 아마 정태헌 아버지도 일을 크게 만들 수 없다는 걸 알고 이런 짓을 벌였겠지. 어른이 되어선, 파렴치하게.’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가이드 수술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 사람도 정한철이었다. 물론 연오가 먼저 물어봤지만 정한철은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불법 수술에 대한 정보를 줄줄 읊어 주었다. 그 사실을 안 태헌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막말을 쏟아냈었고.

“아.”

연오는 정한철에게 붙잡힌 그대로 탄식했다. 눈앞의 풍경이 가장자리부터 타들어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연오는 자기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아까부터 목구멍에 걸려 있던 진흙 덩어리가 말을 막았다.

왜 이런 막막한 감정이 해일처럼 일어나는지 연오도 잘 알지 못했다. 정한철이 가이드 수술을 의도했든 아니든, 최종 선택은 연오 자신이 했다. 억울할 일도 아니고 남을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실제로 연오는 그때 몸을 던져 태헌을 살린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왜 이러지.

“연오야. 연오야…….”

정한철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언어로 정리할 수 없는 속내를 죄다 토해내 보여 주고 싶었다. 예의 없이 고함을 치든 차분하고 냉정하게 설명하든, 어떻게든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주장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정한철의 손을 놓지도, 달아나지도, 소리 지르지도 못한 채 계절처럼 못 박혀 있는 게 연오의 최선이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기합을 넣으며 트랙을 돌던 할아버지도 그들 옆을 지날 때면 소리를 죽였다. 잘못 건드리면 퍽 터질 듯한 긴장감과 맥 빠진 허무가 공존하던 그때.

“그만 좀 해요!”

억센 손이 연오와 정한철의 연결을 끊어냈다. 저물어가는 저녁을 이끌고 나타난 태헌의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순식간에 두어 걸음 밀려난 연오가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태헌은 주저앉은 연오 앞을 막고 서서 정한철을 노려보았다.

“이러면 어떡해요. 지금 저랑 강연오 가이드 분리 조치 중인 거 몰라요?”

“태헌아.”

“강연오 가이드 환자예요. 왜 사람을 길바닥에 세워 놓고 구경거리 만들어요?”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간 연오의 시야에 태헌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언제 여기까지 왔나, 어떻게 알고 왔나,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현실 같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 낯설고 안전한 사람들 사이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태헌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말투는 격렬해졌다. 차분히 타이르려는 정한철의 노력도 소용없었다. 연오는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서서히 식어가는 바닥에 주저앉아 태헌의 말을 기계적으로 이해했다.

가이딩 기계 취급받다가 죽을 뻔했는데 기분이 어떻겠어요.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면 얼마나 무섭겠어요. 강요가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왜 날 더 등신 같은 새끼로 만들어요!

우습게도 태헌이 막무가내로 내뱉은 말이 연오를 일깨웠다. 도저히 표현할 수 없던 마음이, 누군가의 뒤에 숨자 언어로 다시 태어났다. 연오도 태헌처럼 말하고 싶었다. 고함치고 싶었다.

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목숨 안 아끼고 죽도록 가이딩했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벌레처럼 죽을 뻔했어요. 무서워서 숨은 거예요, 태헌이가 선물해 준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친 거예요. 제가 결정해서 돌아가면 모를까 다른 사람이 와서 등을 떠밀면 안 되는 거잖아요.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저씨가, 우리는 한때 가족처럼…….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던 말이 ‘가족처럼’의 굽이에서 푸시시 식었다. 가족처럼, 가족처럼. 그 말을 거듭 되뇌던 연오의 입이 마침내 벌어졌다. 그러나 원망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분노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엄마아…….”

연약한 통곡에, 태헌과 정한철의 실랑이마저 멎었다.

연오는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지친 두 팔을 늘어뜨리고 머리는 위로 치켜든 채. 완벽한 항복이고 최후의 저항이었다.

“엄마……. 아빠아…….”

나도 가족 있었는데. 나도 득달같이 달려와 편들어 줄 엄마랑 아빠 있었는데.

그늘에 놓인 얼굴이 울음 때문에 벌겋게 익었다. 다 큰 남자가 공원에서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다니, 한심하고 멍청한 꼴이라는 걸 아는데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연오는 텅 빈 가슴을 붙잡고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태헌아아…….”

너는 새로 생긴 내 가족이었어. 엄마랑 아빠가 떠나고, 나는 그 최후를 기억조차 하지 못해 사무칠 때 갑자기 나타난 내 가족. 그래서 너를 더 놓을 수가 없었고 결국은 여기까지 왔는데, 너마저 나를 남겨두고 떠나고 말았다.

혼자 남은 세상의 하늘은 기가 차도록 높고 어둠은 수렁처럼 깊었다. 발버둥 칠수록 빠르게 몸을 삼키는 칠흑 같은 운명에서 연오를 건진 이는 태헌이었다. 지금의 연오에게는 없는, 과거의 태헌이.

“연오야, 아저씨가…….”

연오는 자신을 일으켜 주려고 다가오는, 뒤늦은 죄책감이 담긴 낯을 외면했다. 정태헌이 자신을 부축하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울다 울다 정신을 놓는 대신, 자신을 빤히 보는 시선들을 견디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아빠를 불러 봤자 소용없다. 태헌이를 불러도 소용없다. 살면서 뼈가 저리도록 느낀 사실이 연오를 움직이게 했다.

치솟는 흐느낌을 누르며 겨우 돌아선 연오는 가이드님, 하고 부르며 자신을 부축하려는 태헌의 손을 힘없이 거절했다. 그는 땀과 눈물 때문에 더러워진 뺨을 손등으로 벅벅 문지르며 간신히 한 걸음을 떼었다.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고꾸라질 것 같았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꾸역꾸역 달아나는 뒷모습을, 정한철조차 붙잡지 못했다.

연오는 움직이기 어려운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나아갔다. 인천지부와 기숙사가 코앞인데 거기까지 가는 길이 구만리 같았다. 안간힘을 쓰며 마침내 인천지부 바로 옆의 기숙사에 다다른 순간, 긴장이 풀린 탓인지 사지가 풀렸다. 연오는 가까워지는 바닥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이드님!”

허리에 팔이 감기며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두 발이 다시 땅에 닿는 느낌이 불편할 정도로 낯설었다. 멍하게 고개를 돌리자 태헌이 조심스럽게 연오를 놓아 주었다.

태헌의 안색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나빴다. 초췌해진 듯한 모습에, 연오는 멍하게 정한철의 말을 떠올렸다. 기계도 약도 안 듣고 다른 가이드들과의 매칭률도 더 떨어졌다고 했던가. 만성 가이딩 부족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 지금 잘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아버지 말 귀담아듣지 마요.”

연오를 완전히 놓아주고 선 태헌의 어조가 꽤 단호했다. 헤어진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혼자서 몇 년은 보낸 사람처럼 단단하기까지 했다.

“나 균열에서 사고 나기 전에도 몇 년이나 알아서 잘 살았다면서요. 문제없을 테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말라고요.”

연오는 망연히 눈을 깜빡거렸다.

신경 쓰지 않으면? 태헌은 또 가이딩 부족에 시달리겠지. 당장 몇 달, 몇 년은 괜찮아도 서서히 죽어가는 건 전과 똑같겠지. 오늘은 정한철만 왔지만 다음에는 이정우까지 와서 아들 좀 살려 달라고 매달릴지도 모른다. 부모의 마음에 비할까 싶지만 연오 자신도 태헌이를 사랑하는데 그들의 부탁을 끝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가이딩을 해야 할 테고…….

정한철 때문일까, 연오는 그쯤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지금 나한테 뭐라고 말해 줬을까?

그딴 건 평생 알 수 없겠지. 우리 부모님은 돌아가셨으니까.

창백한 뺨에 쓴웃음이 번졌다. 너무 기운이 없어서 반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연오가 입을 열었다. 울음에 먹힌 목소리였다.

“예전에 나한테 고아라고 했잖아요. 별 볼 일 없는 고아 애인이라고…….”

태헌이 총에라도 맞은 양 움칠했다. 진심이 아니라 괜한 화풀이였다는, 그 지겨운 변명을 되풀이하기도 전에 연오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땐 고아인 게 뭐 어때서 싶어서 별생각 없었거든요. 내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내 할 일 다 할 수 있는데. 게다가 부모님 일찍 돌아가신 게 무슨 흠은 아니잖아요?”

“가이드님, 그때는 내가…….”

“근데 오늘 일 겪으니까 정태헌 에스퍼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겠네요.”

“…….”

“좋겠어요, 참.”

시간을 건너뛰어 되돌아온 말의 칼이 태헌의 폐부에 박혔다. 대꾸도 못 하고 석고처럼 굳어 버린 태헌을 눈에 담는 연오의 마음이 기괴한 쾌락으로 욱신거렸다. 잘한다, 강연오. 아저씨 앞에선 한마디도 못 했으면서 왜 괜한 사람한테 화풀이야. 비열하게.

채찍처럼 날카로운 자책도 뒤틀린 쾌감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연오는 화가 나고 억울했으며, 어딘가에 이 뜨거운 괴로움을 무단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눈앞에 태헌이 있었다. 고아 운운하며 자신을 아낌없이 조롱했던 사람이.

“부모 둘 다 있는 거 꼭 온 세상에 자랑해요. 자랑거리 맞네, 그거.”

연오가 자학적인 자조와 함께 돌아설 때, 약한 바람이 일었다. 부드러운 바람은 태헌의 낯에 다다라 수백 개의 바늘로 변했다. 태헌은 찔린 듯 따갑고 데인 듯 쓰라린 자기 자신을 견디며 기숙사 유리문 너머로 사라지는 연오를 지켜만 보았다.

연오가 직접 짚어낸 과거의 말들이 끔찍하게 부끄러웠다. 온 세상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환한 태양 아래서의 수치심보다 거대한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저 사람의 상처를 어떻게 지우지.

말은 이미 오래전에 입 밖으로 나가 버렸고 벌어질 일은 모조리 벌어졌는데.

그렇게 태헌의 시선은 자신의 수치심과 고통에서 타인의 아픔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은 때로 유리장 너머의 유물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사람을 더욱 막막하게 한다. 태헌은 어루만질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망가진 연오의 상(像)을 앞에 두고 망연해졌다.

그는 연오를 낫게 할 방법을 몰랐다.

방법을 몰랐다.

-

우울은 손쉽게 도진다.

청소년기에 지독한 우울증을 앓았던 연오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누군가 그랬던가, 우울증은 평생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질병이라고. 가이드 수술의 후유증도 그렇고 우울증도 그렇고, 연오는 자기에게 ‘사는 동안 관리해야 할 것’이 참 많다고 느꼈다.

기숙사 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센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방의 구조도 느낌도 서울 센터 기숙사와는 다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감싸 안은 자세 그대로 굳어, 연오는 정한철의 말을 거듭 되새겨 보았다.

분노와 울분이 부글부글 끓다가, 태헌을 위해 희생하고도 그를 버린 매정한 가이드 취급받는 현실이 억울해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면 ‘아버지로서는 그럴 수 있지.’ 하는 이해와 함께 기이한 담담함이 찾아오기도 했다.

태헌에게는 부모 운운했지만 사회의 시선이 원래 그렇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무기력했다. 에스퍼 옆에서 고생하는 가이드를 위로하다가, 막상 그 가이드가 에스퍼를 떠나려 하면 안색을 바꾸어 비난하는 세상. 과거의 태헌이는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수술을 입에 담는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말린 것일까. 과거 태헌이가 한 말이 불쑥 떠올랐다.

‘넌 센터가 어떤지, 에스퍼랑 가이드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잖아.’

그래, 태헌아. 네 말이 맞아. 이럴 줄 몰랐어.

몸살이 난 것처럼 사지가 쑤셨다.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연오는 아마 몇 시간이고 그렇게 우울 속으로 잠겨 들었을 것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인천지부의 가이드 기호였다. 누구와 통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여보세요.”

[형, 운동 끝났어요? 다 씻었어요? 우리 저녁 먹고 영화 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어……. 나 좀 피곤한데.”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되잖아요. 밥만 먹고 가면 되죠.]

밥 생각 없어. 그 말이 목에 턱 걸렸다. 태헌이를 위해, 매칭률을 위해 열심히 잘 챙겨 먹겠다고 결심했던 과거가 우르르 밀려와 버거웠다. 이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면에서 푹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연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래, 저녁은 먹어야지. 금방 내려갈게.”

[빨리 와요!]

기호 특유의 명랑한 음성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연오는 자신을 주저앉히려는 무기력감과 소리 없는 다툼을 벌여야 했지만, 그래도 1층으로 내려가는 데 성공했다.

“연오야!”

기호와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던 현종이 손을 들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자 우중충한 그늘을 드리우던 우울이 한 뼘쯤 물러났다. 자욱하던 먹구름이 옅어진 것을 느끼며 연오는 겨우 미소를 지었다.

“뭐 먹을 건데요?”

“여름인데 몸보신 될 만한 거 먹을래?”

“그럼 삼계탕 먹어요! 인삼주도 시키고.”

잔뜩 들떠 술 얘기까지 꺼내는 기호를 보며 연오도 웃었다.

“영화 본다며? 술 마시고 영화관 가려고?”

“아, 다음에 보면 되죠.”

그렇게 그들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삼계탕집에서 뜻밖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자신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연오는 부드럽게 술을 사양했다.

삼 냄새가 적절히 풍기는 뜨거운 국물을 개인 접시에 덜어 식혔다. 숟가락으로 몇 번 떠먹다가, 접시째 들고 국물을 마시는 기호를 보고 연오도 그렇게 했다. 부드럽게 쫙쫙 찢어지는 다리 살과 결대로 퍽퍽하게 갈라지는 가슴살, 커다란 닭 안에 가득 들어 있던 찹쌀이 접시에서 섞였다.

김이 펄펄 나는 뚝배기를 사이에 두고 그런 전투적인 식사를 벌인 후에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왜 또 밥을 안 먹으려고 했을까. 얼마 지나지도 않은 과거를 반성하며 연오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기운이 차오르자 생각도 술술 풀렸다. 그래, 아저씨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고 이해해 버리자. 정태헌 에스퍼가 와서 막아 주기도 했고 아저씨 손에 강제로 센터로 돌아간 것도 아니니까. 결정은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 있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미적거릴 수 없다는 사실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아까까지만 해도 꼬인 실타래처럼 어렵고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상황이 차근차근 정리되는 느낌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연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로 입가심을 하는데, 독한 인삼주를 몇 잔 마신 기호가 이제껏 삼갔던 질문을 건네 왔다.

“형, 센터에서 많이 힘들었어요? 현종이 형이 형 챙겨야 된다고 막.”

“그런 얘기는 왜 해?”

마찬가지로 술을 마신 현종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의 배려가 고마웠던 연오는 크게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힘들었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어. 이젠 괜찮아.”

아까까지만 해도 길바닥에 주저앉아 엄마 아빠를 찾으며 엉엉 울어놓고 괜찮다니. 거짓말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괜찮은 듯도 했다. 어쨌든 지금 기분만큼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까는 사양했던 술 생각이 날 정도로.

“나도 술 한잔 마실까?”

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하자 신이 난 기호가 자리를 옮기자며 부산을 떨었다. 연오의 상태를 살피던 현종만 괜찮겠느냐고 물어 왔다. 연오는 핸드폰을 챙기고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밖이 아직도 환했다. 기나긴 여름 해가 모두의 그림자를 늘려 놓았다. 한 방향으로 늘어진 그림자를 응시하는 연오의 마음이 비눗방울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죽지만 않으면 삶은 살아지고, 마음을 닫지만 않으면 의지할 사람은 늘 생겨나고, 포기하지만 않으면 답은 주어진다.

이 갑작스러운 고양감과 긍정적인 생각은 우울에서 빠져나온 직후의 반동이라는 사실을, 연오는 잘 알았다. 이러다가 조울로 발전하면 더 위험하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으므로 연오는 어둑한 조명을 매단 술집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떤 안주를 먹었고 어떤 술을 마셨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연오를 취하게 했다. 과음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질 정도의 취기가 올라왔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술자리를 끝내고, 기호와 현종을 보내고, 혼자 남은 연오가 기숙사 앞에서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것은.

아까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한 술집에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니 습한 여름으로 내팽개쳐졌다. 기묘한 고요와 눅눅한 공기, 축축한 냄새가 연오 안으로 한꺼번에 밀려왔다. 연오는 급격히 밀려오는 허전함에 저항하듯 전화 어플을 눌렀다.

태헌의 예전 번호를 입력한 것은 습관이었다. 흥분한 에스퍼를 가이딩하다가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연오는 무작정 태헌의 예전 번호를 눌렀다. 누르는 도중에 태헌은 이제 이 번호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라 전부 지우긴 했지만.

정태헌의 새 번호도 외우고 있었지만 그에게 전화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아니지. 전화를 걸어서 아까 빈정거린 거 미안하다고 얘기할까. 정한철 앞을 막아서던 그의 뒷모습과 먹먹하게 서 있던 모습이 차례로 떠올라 마음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그러나 전화를 걸 정도는 아니었다.

김현철 본부장? 한주연 본부장? 아니면…… 태헌이네 어머니? 아저씨랑 같은 생각이시냐고 여쭤볼까?

‘와, 나 취했나 봐.’

연오는 맥락도 없이 충동적으로 튀어 나가는 생각을 느끼고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그는 외우고 있던 또 하나의 번호를 입력했다.

연결음이 두 번 정도 울린 후에야 열 시 넘은 시간에 취한 채로 전화를 걸 정도로 친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상대방은 자신의 번호를 모른다는 사실도. 끊으려고 마음먹은 순간.

[네, 박이정입니다.]

단정하고 말끔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끊어야겠다고 결정하자마자 들린 목소리에 연오는 잠깐 우왕좌왕했다.

“어, 안녕하세요, 에스퍼님. 저 강연오입니다.”

[와.]

뜻밖의 감탄사에 연오가 멈칫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는데 박이정이 말을 이어나갔다.

[먼저 전화할 줄 몰랐어요. 목소리 들으니까 반갑네요.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밝은 인사를 듣자 연오는 돌연 민망해졌다. 박이정에게는 나름대로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센터를 떠날 때 인사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데다 번호를 바꾼 후에 제대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사라졌으니 상대로서는 섭섭할 법도 한데 박이정은 태연했다.

“외우고 있었어요.”

[똑똑한가 보다. 대학도 좋은 데라고 들었는데.]

매일 만난 사람처럼 대화를 이어 주려는 노력이 고마웠다. 연오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먼저 해야 할 말을 꺼냈다.

“여기 올 때 연락 못 해서 죄송해요.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아니에요. 무슨 일 있었는지 대충 들었어요. 에스퍼라면 꼴도 보기 싫을 만도 하죠.]

“그래서는 아니었는데.”

연오가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그때는 그냥 빨리 떠나고 싶었다. 정태헌도 보기 싫었고, 그를 외면하는 자신은 더 보기 싫었다. 숨을 쉴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누구에게 인사를 하고 말고 할 정신이 아니었던 셈이다.

[몸은 괜찮아요?]

“네. 많이 나아졌어요.”

[고작 일주일 지났는데요, 뭐. 좀 더 푹 쉬어야죠.]

“……그러게요.”

문득 정한철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 언저리가 쓰라렸다. 일주일. 그래,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구나.

[술 마셨어요?]

나긋한 질문에 정신이 들었다. 연오는 비스듬하던 자세를 고치고 핸드폰을 제대로 쥐었다.

“취해서 전화한 건 아니고요.”

[알아요, 가이드님. 뭐 할 말 있는 거죠? 아니면 물어볼 거라도 있어요?]

침착하고 차분한 질문이 연오를 일깨웠다.

박이정에게 왜 전화했나. 당연히 위로받으려고는 아니었다. 한밤중에 취한 채로 전화해 위로를 요청할 만큼 깊은 관계는 아니니까. 정한철의 일을 털어놓고 상의할 생각도 없었다.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인 데다 남에게 태헌의 부모를 나쁘게 말하긴 싫었다.

같은 가이드라 공감의 폭이 넓을 기호와 현종에게도 차마 공원에서의 일은 털어놓지 못했다. 술이 양껏 들어간 후에도 그 말만큼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쉽게 말하기 꺼려지는 일을 터놓아도 괜찮은, 절대적인 ‘내 편’이 없다는 상실감이 목까지 차올랐는데도 떠들고 웃기만 했다.

[가이드님?]

금세 다른 곳으로 새는 생각을 박이정이 붙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연오가 한 차례 목을 가다듬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자기가 뭘 궁금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간 말은 무더운 여름밤 너머로 아득하게 흘러갔다. 묻고 싶은 게 있다는 말을 뱉은 후에야, 연오는 자기가 박이정에게 전화한 이유를 깨달았다.

언젠가 병실에서 나왔을 때 본 박이정의 뒷모습 때문이다. 작은 약통을 손바닥에 대고 톡톡 턴 다음 하얀 알약을 으적으적 씹어 삼키던 뒷모습이 떠올라 박이정의 번호를 눌렀다.

“에스퍼님이 전에 먹던 그 전용 가이딩 약.”

[…….]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태헌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고, 막무가내로 에너지를 빼앗는 그에게 다시 몸을 맡길 용기도 없다면.

연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게 정한철이 연오에게 일깨운 것이었다. 영원히 회피만 할 수 없다는 사실, 움직여야만 하는 현실. 술기운에 힘입어 연오가 찾아낸 답은 아마 박이정에게 있을 터였다.

한동안 말이 없는 상대방을, 연오는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미지근한 여름 바람이 앞머리를 살짝 흔들고 지나갔다.

[이렇게 하긴 좀 어려운 얘긴데. 만나서 얘기할까요?]

연오의 입술 사이로 긴 숨이 샜다. 네, 하는 대답에 불안과 각오가 동시에 서렸다.

-

정태헌은 기숙사까지 신청하고 요즘 센터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안 맞는 가이딩 기계에 적응해보기 위해서였다. 한주연은 기억을 잃기 전에도 많이 노력했는데 소용없었다며 비관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정태헌은 해볼 수 있는 일은 전부 시도할 작정이었다.

연오가 떠난 지 열흘이 지난 시점, 한주연은 기계 가이딩실에서 나온 태헌을 붙들었다. 눈알이 주르륵 쏟아질 것 같은 끔찍한 느낌에 시달리던 태헌은 그녀의 접촉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정태헌, 진정해.”

공격이라도 받은 양 움찔하는 태헌을 담은 한주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스퍼의 이런 예민함은 좋지 않은 신호였다.

“무슨 일 있어요?”

태헌은 균열이 열린 건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알림이 없는 걸 보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는데 한주연의 한숨이 들렸다.

“네 상태 보러 왔지. 안 되는 일에 힘 빼지 말고 연오한테 가서 빌어보지그래.”

“……됐어요. 아픈 사람 왜 건드려요?”

엄마 아빠를 찾으며 엉엉 울던 연오가 떠올라 저절로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아버지도 그렇고 한주연 본부장도 그렇고, 왜 연오를 움직여 일을 해결하려 할까. 강연오가 자기 발로 직접 돌아오면 모를까, 빌고 애원해 끌고 온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잘 알 텐데도.

애원하던 정한철을 돌아보지도 않고 비틀비틀 달아나던 연오의 뒷모습이 아직도 태헌의 망막에 새겨져 있었다. 아마 연오는 다시는 정한철을 전처럼 대하지 못하겠지. 정태헌은 그가 자신에게도 그럴까 봐 겁이 났다. 이미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관계인데 여기서 더 미움받을 수는 없었다.

“고집은. 아프고 후회하지 말고.”

뭐가 됐든 가이딩부터 받고 보자는 태도에 신물이 났다. 하긴, 연오 입장에서는 자기도 똑같았을까.

한주연의 나직한 타박을 무시한 태헌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빠르게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잠깐 멈추었다. 병원이 있는 층이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아픈 사람이 탄 모양이었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강연오 쪽으로 흘러갔다.

며칠 전에 직접 봤을 때는 안색이 엉망이던데 그동안 좀 나아졌을지 모르겠다. 혹시 아버지 일로 악화된 건 아닐지 신경이 쓰였다. 괜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진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해서 연락해 보고 싶었지만, 바뀐 번호를 몰랐다. 관리지원실을 통해 알아낼 수도 있었으나 연오가 싫어할 게 뻔해서 그럴 수 없었다.

괜찮은지만 알고 싶은데, 인천지부에 연락해 볼 만한 사람이 있었나?

“어, 본부장님.”

귀에 익은 목소리가 태헌의 상념을 깼다.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본 정태헌의 무심한 낯빛이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확 바뀌었다.

박이정과 강연오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한주연을 부른 쪽은 박이정이었지만 태헌의 관심을 끈 이는 당연히 강연오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태헌의 눈이 동그래졌다.

헛것이 아니었다. 강연오가 거기 있었다.

“……안녕하세요.”

연오가 머리 숙여 인사했다. 한주연에게 하는 인사인지 정태헌에게 하는 인사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호한 방향으로. 태헌은 연오가 한 손에 든 서류 봉투를 슬쩍 곁눈질했다. 그게 뭘지 제대로 추측하기도 전에 한주연이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연오야, 언제 왔어? 센터 병원은 왜?”

한 손으로 다른 팔을 붙들고 어색하게 선 연오와는 달리 그녀는 태연했다. 수많은 에스퍼와 가이드를 대해 본 그녀에게, 인사 없이 헤어진 가이드와 말을 트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검사 좀 하려고요.”

“가이드 본부장은 알고?”

“네, 오기 전에 연락드렸어요. 본부장님한테도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됐어, 너희 본부에 알리면 됐지.”

연오의 말을 적당히 끊으며 한주연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태헌, 안 타?”

“먼저 가세요. 전 다음 거 탈 테니까.”

아까의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태헌이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당장 연오 옆에 서서 그날 잘 들어갔는지, 몸은 나아졌는지 캐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혹시 연오가 붙들어 주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묘한 냉기마저 서린 눈으로 태헌을 훑은 연오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태헌은 연오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까지 꼼꼼하게 지켜보았다. 혈색은 전보다 좀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연오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정태헌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냥 모르는 척 같이 탈걸. 몇 마디라도 섞어볼 수도 있었는데. 저번에 전하지 못한 마음을, 그를 비상약이나 구명보트처럼 함부로 대해 온 것에 대한 미안함을 전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에는 멋대로 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웠는데, 이상하게 연오가 자신을 두고 돌아선 후에는 멋대로 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태헌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누르고 똑바로 섰다. 낯설지 않은 갈증이 목을 바짝 태웠다.

-

한주연의 헛기침이 불편한 정적을 깼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가 옆에 선 연오의 어깨를 다독이듯 툭툭 쓸어주었다.

“연오야, 나 너 나쁘게 생각 안 해.”

빠르게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숫자만 보고 있던 연오의 시선이 한주연에게 돌아갔다. 약간의 불편함과 서먹함을 두른 연오의 모습이, 한주연에게는 생경하게 다가왔다. 처음 정태헌이 연오를 소개해 주었을 때도 지금보다는 편안한 분위기였는데.

“네가 혹시 그런 오해 해서 나한테 연락 안 했나 해서. 김현철 본부장도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도 연락해.”

“감사합니다.”

간단히 답한 후 연오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냥 제가 괜히 민망해서 그런 거예요. 본부장님은 태헌이랑 저 어땠는지 아시니까…… 제가 이기적으로 보일까 봐. 본부장님이 저 나쁘게 생각 안 하시는 거 알아요.”

올곧고도 솔직한 대답에 한주연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연오가 태헌과 만나지도 않고 인천으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느낀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서였다. 연오의 공포와 혼란을 이해하는 한편 그가 매정하다고 생각했었다. 죽어가는 에스퍼를 버리고 떠나는 가이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에.

아까만 해도 정태헌에게 연오를 설득해 보라고 권하지 않았나. 사실 그 바람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러나 파리한 연오의 얼굴을 직접 마주 대하니 도저히 정태헌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태헌에게 연오 죽이기 전에 다른 가이드를 찾으라고 강권했던, 그때의 마음이 되살아났다.

지켜보는 이도 이렇게 오락가락 혼란스러운데 당사자들은 어떨까. 한주연은 이 주제에 대해 말을 아끼기로 결심하고 살짝 화제를 틀었다.

“수술 부작용 검사 때문에 온 거야?”

“아뇨, 가이딩 약 만드는 거 때문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온 말에 한주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홱 고개를 틀어 연오를 확인한 후 곧바로 박이정을 노려보았다. 설명을 듣기도 전에 전후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박이정, 너 미쳤어? 네 각인 가이드는 각성한 가이드고 건강했으니까 버틴 거야. 강연오는 그 약 만들고 나면 바로 죽어.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연오 에너지로 약 제조 가능했으면 진작 권했지.”

“안 하기로 결정했어요, 본부장님. 어차피 몸 상태 안 좋아서 안 된대요.”

박이정 대신 연오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안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말하는 어조가 너무 태연해서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전용 가이딩 약은 대부분 S급 에스퍼를 위해 만들어진다. S급 에스퍼가 상대적으로 가이딩 부적응을 호소하는 일이 많은 탓이기도 하고, 그들이 모든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귀중한 인적 자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지는 약인 만큼 고려할 변수가 많아 제약 과정이 까다로웠다. 가이딩 에너지를 추출해 캡슐에 보관하는 단순한 방법으로는 약을 만들 수 없었다. 제약에 참여한 가이드가 목숨을 잃어도 약을 생산할 수 있도록, 에너지의 구조와 흐름을 꼼꼼히 분석하고 제약 기계에 입력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끝없이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는 가이드가 얼마나 혹사당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두 달 만에 뚝딱뚝딱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언제 약이 완성될지 아무도 모르는 기약 없는 싸움이었다.

후천적 가이드들은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만약 제약이 가능했다면, 한주연도 연오와 태헌의 관계가 이렇게 악화되기 전에 제약을 권했을 것이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 권유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괜한 생각 하지 마. 말이 좋아서 제약이지 실험 쥐 노릇이나 마찬가지야. 게다가 약 완성되기 전까진 대면 가이딩 병행하는 경우도 많은데, 안 그래도 에너지 빨렸는데 가이딩까지 해야 해 봐. 아차 하면 바로 죽어.”

한탄 어린 어조로 중얼거린 한주연의 시선이 슬쩍 박이정에게 닿았다. 박이정은 특별히 동요하지 않았지만, 한주연은 이 이야기 역시 그만두고 싶어졌다.

“연오야.”

약 같은 거 말고, 대면 가이딩이 훨씬 나을 거야. 네가 태헌이 한 번 봐줘.

움푹 꺼진 연오의 눈을 보자 안 그래도 꺼내기 어려운 말이 목에 탁 걸렸다. 에스퍼 본부장으로서 이제껏 수없이 악역을 맡아 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한주연은 1층에서 먼저 내리는 연오에게 이렇게만 인사했다.

“몸 잘 챙기고.”

연오는 엘리베이터 밖에 선 채 한주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때 정태헌을 좀 이해해 주라고 부탁했던 한주연의 얼굴이 현재의 그녀 위에 설핏 겹쳤다. 연오는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로비에 박이정과 둘만 남은 연오가 긴 숨을 내쉬었다. 체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인천지부에서 여기까지 와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받고 났더니 급격히 피곤해졌다. 아무래도 오늘 바로 인천지부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듯했다.

“저 그냥 기숙사 방문 신청해서 하루 자고 내일 돌아갈게요. 여기까지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요, 안색 안 좋은데 조금이라도 빨리 자는 게 낫죠. 내일 연락해요, 인천 데려다줄게요.”

“괜찮아요. 셔틀버스도 있고.”

“그러지 말고 꼭 연락해요. 기숙사까지 같이 갈까요, 아니면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요?”

자연스럽게 덧붙은 물음에 연오가 멈칫했다. 박이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겨 연오를 로비 의자로 이끌었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로비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안내 데스크에 앉은 직원만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연오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며 맞은편에 선 박이정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앉아 있다가 가려고요. 생각도 정리할 겸.”

“그래요, 자리 비켜줄게요.”

박이정이 선뜻 미소 지었다. 아낌없이 도움을 주고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는 모습이 고마워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런 사람이 친형이었으면 좋겠다. 과거의 태헌이를 보면서도 품지 않았던 바람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제약 안 되는 거 강연오 가이드 탓 아니에요. 무슨 얘긴지 알죠?”

“……네.”

“너무 오래 앉아 있지는 말아요.”

어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손이 따뜻했다. 같은 가이드가 아닌 사람에게 이런 위로를 받은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갑자기 감정이 흔들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연오는 동요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자기 운동화만 노려보았다. 박이정의 그림자가 시야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병원에서의 일이 하나하나 느리게 떠올랐다.

제약 상담을 해 준 의사는 가이드 수술을 집도한 그 남자였다. 사실 ‘상담’이랄 것도 없었다. 약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연오의 말을 듣자마자 묘하게 기막혀하는 투로 꿈도 꾸지 말라고 못을 박았으니 말이다.

‘현대 의학이 만능은 아닙니다. 검사 결과 보니까 수치도 썩 좋지 않은데, 강연오 가이드가 약 만들겠다고 나서면 석 달 안에 돌연사해요.’

‘약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표본이 많지 않아서 평균이 없습니다. 설령 한 달 만에 끝낼 수 있다고 해도 꿈도 꾸지 마세요.’

의사는 의료인 특유의 사무적이고 정중하면서도 묘하게 냉정한 투로 툭 내뱉은 후 빨리 나가서 잠이나 자라며 연오를 떠밀었다.

박이정으로부터 안 될 거라는 말을 미리 듣긴 했지만 그래도 충격이 상당했다. 약만 만들어지면 태헌과 마주하지 않아도 그를 도울 수 있고, 설령 불의의 사고나 수술 부작용으로 일찍 죽어도 그를 살려 놓을 수 있는데,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니. 박이정의 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 동안 부풀었던 낙관이 맥없이 터져 버렸다.

결국 남은 방법은 전처럼 직접 가이딩하는 것뿐인데 이상하리만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 같은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아 준 태헌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지금은 그 정도로 태헌이 거북했다.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갇히자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삼 개월. 삼 개월.

연오는 의사가 말한 기간을 부질없이 곱씹었다. 삼 개월 안에 죽을 수 있다는 말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백 일 정도 시간이 있다는 뜻 아닌가? 만약 운이 따라 주어서 한두 달 안에 약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걸 가치도 있지 않을까? 약이 만들어지기만 하면 자신이 죽은 후에도 태헌은 무사히 생존할 테고, 기억이 돌아온 후에도 죽지 않을 텐데.

아마 약을 만들고 생을 다하는 것은 연오가 그토록 싫어하고 두려워했던 ‘개죽음’은 아닐 터였다.

‘시도해 볼까?’

정서가 안정된 시기였다면, 태헌이의 사랑을 한껏 누리고 그로부터 확고한 보호를 받던 시절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모한 생각이었다.

연오는 손에 든 서류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이 안에는 두 장의 종이가 들어 있다. 혹시 몰라 병원에서 받아 온, 제약 동의서 두 장이었다. 하나는 가이드가 작성해야 할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전용 약을 받게 될 에스퍼가 작성해야 할 것이었다.

연오는 기어이 종이를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매끈한 질감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연오는 제약 과정의 위험을 상세히 적어 놓은 동의서 두 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전용 가이딩 약 실험 참가 동의서

1. 가이드 사망 가능성 등 부작용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2. 가이드에 대한 마취, 가이딩 에너지 강제 추출, 합병증과 후유증이 있을 수 있음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이드의 체질이나 환경 변수에 의한 우발적 사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3.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시 센터와 의료진의 결정에 신속하게 협조하겠습니다.

4. 법정 분쟁이 발생할 시 이 동의서가 지니는 증거로서의 효력을 알고 있습니다.]

태헌이가 여기 있었다면 이 동의서를 빼앗아 갈가리 찢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태헌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태헌이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이들은 정태헌, 정한철, 한주연. 연오가 전처럼 잠자코 희생해 주기를 바라는 이들뿐.

가이딩을 받지 못해 괴로워하며 가슴을 쥐어뜯던 태헌. 지금의 태헌이나 과거의 태헌이나 결국 같은 사람이라고 호소하던 정한철.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에게 못 박혀 있던 한주연의 묘한 시선.

그리고 끝내 태헌이를 저버릴 수 없을 자신.

자의와 타의가 어지럽게 뒤섞이며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이거 말고 다른 해결책이 없지 않나?

연오는 봉투에 함께 들어 있던 펜을 꺼내 가이드 몫으로 주어진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태헌이 작성해야 할 동의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태헌의 번호는 외우고 있으니 그쪽에 연락해 서명하러 오라고 해도 되지만…….

‘나 멀쩡하게 만들어 주고 죽어.’

언젠가 태헌도 그렇게 말했으니.

연오가 결연하게 입술을 짓이겼다. 그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상태라고 믿었으나 판단력은 온전치 못했다. 인천지부의 회복 프로그램에 일주일 참가했다고 사람이 마법처럼 ‘회복’될 수는 없다. 연오는 부러지고 으스러지고 착취당하던 그때에서 한 뼘쯤 멀어졌을 뿐이었다.

백 일 동안 죽도록 노력해 보자고 결심하고 두 장의 동의서에 모조리 서명한 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자살을 택하던 그때의 절망이 그대로 달라붙어 있었기에.

이건 내 의지일까. 아니면 남들의 말에, 눈빛에 떠밀린 것뿐일까. 정한철이 오지 않았더라도, 한주연이 망설이는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았더라도 이 동의서에 서명했을까.

빈 로비는 너무 넓었고 연오는 혼자였다. 태헌이의 빈자리가 밤의 동공처럼 연오를 빨아들였다.

-

함께 회의실을 나서는 한주연과 김현철의 낯이 어두웠다. 요즘의 가장 큰 이슈인 균열 발생 예측기의 오작동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공공의 안전에 대한 크나큰 위협이었기에 센터장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새로운 걱정거리까지 생기니 둘 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가이드 본부장실로 간 건 예측기 오작동 때문이 아니었다. 강연오와 정태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김현철보다 먼저 가이드 본부장실로 들어간 한주연이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댔다. 김현철도 차분하게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는 동안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잔잔한 긴장감이 고요에 깊이를 더했다.

“연오 설득해 봐야 해.”

한주연 앞에 찻잔을 내려놓던 김현철의 손이 짧게 흔들렸다. 달그락, 듣기 싫은 소리가 나며 뜨거운 차가 살짝 넘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강연오 가이드 인천지부에서 보름도 안 지냈어. 그런데 다시 센터로 불러서 정태헌 옆에 붙여 놓자니, 사람 죽일 일 있어?”

“정태헌도 많이 반성했어. 기계 가이딩으로 버텨 보려고 애 많이 쓰던데, 좋게 좋게 하면 서로 좋잖아. 연오, 말은 그렇게 안 해도 정태헌 많이 신경 써.”

“강연오 가이드가 무리할 땐 그쪽 편 들더니, 막상 떠나니까 에스퍼 편이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같은 에스퍼라 어쩔 수 없겠지.”

한주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빈정거리지 마. 내가 나 좋자고 이래? 예측기는 유성구 이후로 계속 오작동하고 대형 균열 나타날 조짐도 심심찮게 보이니까 S급 에스퍼가 아쉬워서 이러는 거잖아.”

“너 박이정이 폭주하다가 이연서 가이드 말려 죽였을 때도 균열 얘기로 박이정 감쌌지. 이연서 가이드 가족들이 돈에 눈멀었으니 보상금 정도로 넘어갔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어.”

해묵은 과거가 난데없이 화제에 올랐다. 방어적으로 몸을 뒤로 뺀 한주연이 팔짱을 꼈다.

“지나간 얘기는 왜 꺼내. 네가 그 가이드 아낀 건 아는데, 박이정도 후회 많이 했어. 그 뒤로 아무한테도 대면 가이딩 안 받고 몸 안 사리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균열 정리하고 다녔잖아.”

“그거야 전용 약 있으니 아쉬울 거 없어서 그랬겠지. 그리고 후회한 게 뭐. 후회하면 죽은 이연서 가이드가 살아 돌아와?”

김현철답지 않은 격렬한 언사에 한주연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대꾸를 멈추고 김현철을 꼼꼼히 살폈다.

“너 왜 그래? 왜 유난히 화가 났는데.”

김현철은 제 몫의 찻잔을 내려다보며 화를 억눌렀다. 몇 차례의 심호흡 후에야 말이 툭 튀어나왔다.

“정태헌 에스퍼 아버지가 강연오 가이드 찾아갔었어.”

“……뭐?”

“어제 강연오 가이드 약 때문에 센터 왔었잖아. 오기 전에 나한테 연락했는데,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지나가듯 그 얘기 꺼내더라. 정태헌 에스퍼 가족도 자기 결정을 기다리지 않겠냐고. 알아보니까 인천지부까지 찾아갔던데, 가서 무슨 얘기 했을지 뻔하지.”

“…….”

“그랬는데 이젠 너까지 강연오 가이드 등 떠밀고 있잖아.”

한주연은 등을 떠민 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또 정태헌과 강연오의 이전 관계를 아니 그들이 안타까워서 그런다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사람은 결국 처지가 비슷한 쪽에 감정을 쏟게 된다. 에스퍼는 에스퍼에게, 가이드는 가이드에게. 아무리 한주연이라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너도 강연오 가이드가 제약 상담받게 허락했잖아. 박이정도 나서고. 난 네가 연오 복귀에 동의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김현철은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소리를 들은 듯 헛웃음을 쳤다.

“그 몸으로 약 못 만드는 거 정확하게 알려주려고 상담 허가한 거야. 간절한 에스퍼나 가이드 속여서 돈 빼먹는 업자나 악질 브로커한테 잘못 걸리면 돈만 뜯기고 진짜 죽을 테니까. 박이정도 강연오 가이드 확실하게 단념시키려고 차 끌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왔다 갔다 했겠지.”

찻잔 받침에 넘친 노란 국화차만 보는 한주연의 표정이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김현철도 그녀의 복잡한 표정을 보고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시간 좀 줘. 당장 칩 제거 안 하는 것만으로도 강연오 가이드는 자기 몫 하고 있어. 수술이 봄이었으니 가을 오기 전에 칩 제거하면 좀 나아질 거 알면서도 고민하느라고 견디고 있잖아.”

본부장실이 잠시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타는 목을 축이느라 차만 들이켠 한주연의 찻잔이 거의 비었을 때쯤, 기다리기라도 한 듯 노크 소리가 났다.

안으로 들어온 직원이 깨끗한 결재판을 김현철에게 주었다. 제약실 쪽에서 넘어온 서류라고 했다. 직원을 내보낸 후 서류를 확인하는 김현철의 모습을 한주연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허.”

김현철의 탄식이 그녀를 붙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종잇장을 넘겨 보던 김현철이 결재판을 한주연에게 불쑥 넘겼다.

“왜?”

한주연은 어리둥절하게 서류를 확인했다. 머잖아 그녀의 얼굴 또한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김현철이 전화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바깥에 지시하는 목소리에는 분노마저 스며 있었다.

“당장 정태헌 에스퍼 부르세요. 지금 바로!”

-

태헌은 반쯤 구겨진 종이를 쥐고 센터 병원 복도를 지났다. 빠른 속도로 걷는 그의 옆으로 닫힌 문이 여러 개 지나갔다. 태헌은 벌겋게 변한 눈으로 문에 붙은 호수를 훑으며 연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가이드 본부장실로 가자마자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들었다. 전용 가이딩 약,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제약 과정, 제약에 필요한 두 장의 동의서, 그리고 서명란에 떡하니 적혀 있던 자신의 이름.

본 적도 없는 동의서 서명란에 제 이름 석 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태헌은 그때의 황당함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지금 그 동의서를 든 채 강연오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김현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연오는 오늘이 밝자마자 제약을 위한 정밀 검진을 받기 시작했다. 목숨을 잃을 게 뻔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생명을 다 바쳐도 약 한 알 나오지 않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개죽음당하기 싫다고 했으면서. 이제 영원히 안 돌아올 것처럼 말했으면서!’

고마운 게 아니라 기가 막혔다. 죽을 자리로 걸어 들어가는 연오가 황당하기까지 했다. 아직 제대로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지나간 일들을 풀지도 못했는데 전보다 더 큰 희생을 하려는 연오의 마음이 너무나 버겁고 막막했다.

정한철 때문이든 연오의 결정이든 이 일은 막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태헌은 연오가 들어앉은 채혈실 문을 망설임 없이 열어젖혔다.

연오의 팔에서 막 주사기를 빼던 간호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개를 돌렸다가 태헌을 발견한 연오의 얼굴은 놀란 간호사와 대비되어 더욱 덤덤해 보였다. 그는 간호사가 허둥거리며 건네준 솜을 팔에 대고 꾹 누를 뿐 태헌을 계속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간호사가 주사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태헌은 연오까지 나가 버리기 전에 그에게 다가갔다. 테이블에 구겨진 종이가 툭 던져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게 뭐예요.”

연오는 동의서 사본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아침부터 검진을 받느라 돌아다녔다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태헌이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이게 뭐냐고요. 왜 여기 내 이름이 적혀 있는데요.”

“동의서예요. 전용 가이딩 약 만들려고.”

남의 서명을 위조해 놓고도 연오는 무덤덤했다.

“그건 이미 다 들었고요, 왜 목숨 걸고 약 만들려고 하는지 묻는 거잖아요.”

채혈실은 넓지 않았고, 태헌과 연오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연오는 테이블에 붙어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헌의 존재를 의식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떨고 싶지 않은데, 태헌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바보처럼 움찔거리고 싶지 않은데 몸이 통제되지 않았다.

옅어지지 않은 공포가 생생하게 신체를 지배했다. 그 강력한 지배력에 압도당할수록, 약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연오의 결심은 굳어졌다.

“가이드님.”

“…….”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떨지 마요.”

태헌은 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간호사가 있던 곳까지 물러난 그의 낯에 수만 가지 감정이 얽혀 있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다. 강연오를 다그치려고, 그에게 화를 내려고 온 게 아니다. 멍청한 짓 그만두고 자기 몸이나 잘 챙기라고 설득하러 왔다. 흥분 때문에 언성이 조금 높아졌을 뿐인데 손까지 가늘게 떠는 연오를 본 순간 모든 열기가 쑥 사라지고 답답함만 남았다.

태헌은 고집스레 고개를 숙인 연오를 내려다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한 심호흡이었다. 태헌은 구겨진 동의서 사본을 살짝 건드리며 연오의 주의를 끌었다.

“아버지가 시켰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한텐 알리지 말라고 해서, 그래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동의서에 서명한 거예요?”

“…….”

“누가 시킨 건데요. 누가…….”

“아무도 안 시켰습니다.”

나직한 추궁이 서늘하게 썰려 나갔다. 내뱉듯 대꾸한 연오가 마침내 태헌과 마주했다.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안 시켰는데 동의서에 나 대신 서명했다고요?”

태헌은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이런 짓을 시키지 않았다면, 강연오가 스스로 에스퍼 몫의 동의서에 서명을 남겼다는 것인데. 대체 왜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짓을 했으며 지금의 저 건조한 모습은 무엇인가. 개죽음당하기 싫다고 등을 돌리던 때의 각오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아니면 약 만들다 죽으면 개죽음은 아니라 이건가.

수많은 생각이 화살 비처럼 쏟아졌다. 태헌은 따끔따끔한 아픔과 의문을 느끼며 연오를 기다렸다. 한참 말이 없던 연오의 입술 사이로 피로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동의할 건데 뭐 하러 보여줘요. 제약 진행되면 정태헌 에스퍼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 따로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전화하거나 만나기도 싫었고. 어차피 이렇게 바로 알게 됐잖아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강연오는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인 사람이 서명을 위조해 동의서를 제출하고 죽으러 나설 리 없다. 태헌은 연오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내버려 둔 사본을 홱 낚아챘다.

“나 당장 제약실 가서 이 동의서 원본 다 찢어 버릴 생각인데.”

“…….”

“왜 내가 이런 야만적인 일에 찬성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네요. 가이드님 마음대로 내 동의서에까지 서명하고.”

연오가 까맣게 죽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눈동자 깊은 곳에 태헌은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들어차 있었다. 태헌은 호흡마저 억누른 채 연오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메마른 아랫눈시울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바로 그때, 연오의 두 눈이 아주 살짝 가늘어졌다. 의문으로 짠 베일이 연오의 핏기 없는 얼굴을 덮었다. 연오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마음을 바꿨어요?”

“바꾸긴 뭘 바꿔요. 애초에 난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 얘기 아니고. 예전에 정태헌 에스퍼가 그랬잖아요.”

연오는 이제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당장 죽는다고 해도 꿈쩍하지 않을 듯한, 비현실적인 견고함이 마른 몸을 감싸고 있었다. 위화감마저 느껴지는 모습에 태헌이 주춤한 그때.

“자기 멀쩡하게 만들어 주고 죽으라고.”

붙박인 과거가 태헌에게 박혔다. 태헌의 뺨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연오는 무구한 낯으로 과거의 창날을 쑤셔 태헌을 꿰뚫었다.

“그거, 지금 하려는 거예요.”

“…….”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던 태헌이 겨우 입을 벌렸다. 그러나 엉망으로 엉킨 생각은 언어로 가지런히 정리되지 못했다.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처리하느라 뇌가 멈춘 것 같았다.

한순간 연오를 몰아붙인 정한철을 원망했다. 그러나 연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의 것이었다. 폭주 중이라 아파서 그랬어요. 힘들어서 그랬어요.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제정신일 때도 연오를 죽이고 멀쩡해지려 했으니까.

허락된 말이 많지 않았으므로 태헌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바람을 토해냈다.

“그건 잊으면 안 돼요?”

유리알 같은 연오의 눈을 보고 있으니 목이 막혔다.

“내가 했던 말들…… 내가 함부로 대한 거, 나 아프다는 핑계로 가이드님 휘두른 거, 화풀이하고 난폭하게 군 거, 그런 거 다…….”

연오와 함께했던, 길다면 길었던 시간들이 납작하게 압축되어 태헌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오는 한순간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울거나 찡그리거나 죽고 싶은 얼굴로 웃었다. 태헌이 아무리 강한 에스퍼라도 과거로 돌아가 연오를 위로할 순 없을 것이다.

“다 잊어버리고, 없던 일로 하고, 용서해 주면 안 돼요?”

태헌은 마침내 연오가 인천으로 떠났던 그날 느낀 감정을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그는 용서받고 싶었다.

있던 일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처럼 조르고 싶었다. 그냥 잊어버리면 안 되냐고. 없었던 일로 생각해 주면 안 되냐고.

목소리가 저절로 덜덜 떨렸다. 발가벗은 듯한 수치심보다 죽을 길로 걸어가려는 연오가 더 무서웠다.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예기치 못한 고백에, 연오는 언 호수처럼 동요 없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잊어버리지. 당연히 용서하지.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하겠어. 이전에는 당연했던 사랑과 관용의 말들이 투명한 얼음 아래서 물고기처럼 오갔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지느러미와 수축하는 아가미까지 볼 수 있는데 정작 건져 올릴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래서 연오는 그냥 진심을 말했다.

“그걸 어떻게 잊어요?”

“…….”

“잊어버리는 사람은 하나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태헌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턱에서도 힘을 뺀 후에야 자기가 이를 악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잔뜩 긴장한 채였는지 온몸의 마디마디가 전부 욱신거렸다. 차라리 울어서 후련해지고 싶었는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못 잊는데 약은 왜 만들어요. 나 용서 못 하는데 목숨은 왜 던져요. 용서 못 할 새끼 때문에 죽는 게 억울하지도 않아요?”

뜻밖에도, 연오가 웃었다. 그는 차라리 후련해 보였다.

“밤새 생각을 했는데요.”

“…….”

“태헌이가 균열에서 핵 파괴하고 죽을 때 막…… 부러지는 소리 들었잖아요.”

그 소리가 여전히 생생한 듯 연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석고 같던 낯에도 실금이 갔다.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다쳤는지도 봤고. 꿈에서도 그 소리 듣고 그 모습 보면서, 아, 핵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태헌이가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얼마나 불행했을까…… 했거든요.”

“…….”

“근데 막상 내가 약 만들고 죽으려고 하니까 태헌이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행복했을 거예요, 태헌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어서, 그럴 기회가 있어서, 좋았을 것이다. 연오가 아는 태헌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런 태헌이와만 살아서, 자신도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연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선 정태헌을 가만히 응시했다. 살짝 벌어진 입과 아프게 일그러진 눈썹, 그 모습에서 태헌이가 엿보였다. 둘이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일은 이제 그만뒀다.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한 후에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동의서 찢지 말고, 내가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보게 내버려 둬요.”

“…….”

“이것까지 방해하면 정말로 용서 안 할 거예요.”

정태헌은 참았던 숨을 뱉었다. 한 호흡 한 호흡이 전부 고통이었다. 자신을 직시하는 연오의, 반쯤은 맛이 가고 또 반쯤은 어느 때보다 제정신인 눈이 무서웠다. 지금의 연오라면 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펄펄 끓는 용광로여도 망설이지 않고 투신할 것 같았다.

태헌은 필사적으로 말을 골랐다.

이제 나를 위해 죽지 않아도 돼요. 아니, 이 말은 무용하다.

홧김에 한 소리라고 했잖아요. 이 변명은 너무 지겹다.

잊어 달라는 애원은 이미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알겠어요.”

성의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연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경직된 눈가와 입술 끝이 스르르 풀리며 최후의 미소마저 감돌았다.

“그럼 나 절대 용서하지 마요.”

태헌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진.

정태헌은 연오가 붙잡을 틈도 없이 채혈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제약실은 병원과 멀지 않았다. 고작해야 10층 아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아까웠고 끓어오르는 괴로움 때문에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었으므로 태헌은 비상구로 달렸다. 언젠가 연오를 붙잡기 위해, 그에게 변명하기 위해 달렸던 그 길을.

나선형으로 돌아 도달한 제약실은 평화로웠다. 공용 가이딩 약을 만드는 곳인지라 약국보다는 연구실에 가까워 그랬는지도 모른다. 가지런히 놓인 책상, 흰 가운을 차려입은 채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한 사람들,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려진 일회용 장갑 무더기. 강연오는 이런 곳을 지나 목숨을 버리러 갈 뻔했구나. 그 생각이 들자 아찔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태헌에게 다가왔다. 밀치고 가려다가, 태헌은 머리를 쓰기로 했다. 연오가 허겁지겁 따라 내려오기 전에 모든 일을 정리해야 하니까.

“에스퍼 정태헌입니다. 제약 동의서 다시 작성해야 한다고 해서.”

“아, 오늘 아침에 들어온 그거. 잠시만요, 안 그래도 본부장실에서 연락 왔었는데…….”

“그 전에 제약 시설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제 가이드가 좀 걱정돼서요.”

“전용 가이딩 약 시설은 안쪽에 있는데 따로 출입 허가 받아야…… 어, 저기요!”

태헌은 상대가 가리킨 방향으로 곧장 달려갔다. 조용하고 평온하던 제약실이 단번에 어수선해졌다. 뭐 하는 거예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요! 다급한 고함을 무시한 태헌은 순식간에 가장 안쪽에 있는 문에 다다랐다. S급 에스퍼만을 위한 중요한 시설답게 문이 잠겨 있었다. 태헌은 번호를 누르고 지문까지 인식시켜야 하는 보안 패드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힘을 끌어올렸다. 망설임 없이 발을 날렸다.

쾅!

인체와 사물이 부딪혀서는 절대 날 수 없는 살벌한 소음이 터졌다. 달려오던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비명이 터졌다. 태헌은 허무하게 부서진 문을 가볍게 지나 내부로 진입했다. 보안 시스템이 울려대는 날카로운 사이렌을 무시하고 안을 구석구석 확인했다.

한 사람만을 위한 약을 만드는 곳이라 좁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살벌한 기계들이 줄지어 늘어선 풍경은 숨 막힐 정도로 삭막했다. 이상한 쇠 냄새와 독한 소독약 냄새가 풍겨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전선이 연결된 또 다른 기계들이 벽면에 붙어 있었다. 서버실을 연상시키는 답답한 구조였다. 창문조차 없었다. 태헌은 다룰 줄 모르는 기계에 달린 수백 개의 알록달록한 버튼과 레버를 노려보다 눈길을 돌렸다.

가이드를 눕히는 용도가 분명한 철제 침대에는 구속구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이 이 잘 정돈된 제약실에 남은 유일한 비인도적 흔적이었다.

씨발,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는 건데. 정태헌은 욕설을 읊조리며 침대를 걷어차고 벽에 붙은 기계들로 다가갔다. 파란 불, 빨간 불, 노란 불이 어지럽게 번쩍이고 있었다. 빛의 잔상 사이로 약을 만들고 죽겠다던 연오가 불쑥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운 좋게 약이 만들어지면 좋지 않겠어? 마음 언저리에 달라붙은 그림자가 지독하게도 속삭였다.

희생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데 마음대로 하라고 해. 네가 언제부터 강연오 그렇게 생각했다고 유난이야. 모르는 척 약 받고 죽으면 좀 슬퍼하다 잊어.

언젠가 연오에게 ‘살려주세요.’ 하고 애원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징그럽게도 외쳐 대는 애새끼를 패버릴 수 있다면 태헌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태헌은 두 손을 힘껏 위로 들어 올렸다.

쾅!

두 개의 주먹이 수십 개의 버튼에 내리꽂혔다. 금속판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플라스틱 버튼이 산산조각 났다. 날카로운 파편이 태헌의 눈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태헌은 개의치 않았다. 쾅, 쾅, 쾅, 쾅! 전선이 끊어지는 소리와 전류 공급이 중단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능을 두른 손이 빠르게 엉망이 되었다. 살이 까지고 피부가 찢어지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헌은 아픔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줄이라도 선 듯 가지런한 기계들을 부숴 나가는 그의 동작은 무서울 정도로 규칙적이고 침착했다. 그는 확실하게 파괴했고 정확하게 죽였다. 밖에서 들리던 비명이 더 커졌고, 호출받은 에스퍼들이 다가오는 기척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상관없었다. 태헌은 연오를 생각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를 생각했다. 수없이 붙잡았던 하얗고 마른 손, 그 손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더 먼 과거의 자신을 생각했다.

그 새끼가 싫었다.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랑을 퍼부은 어른 태헌이가 싫었다. 그래서 유치하게 질투도 하고 그의 그림자를 지우려고도 했지만 다 괜한 짓이었다. 정말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으니까.

강연오를 살리는 일.

전선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선가 퍽 불꽃이 튀었다.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졌다. 폭우 한가운데 선 것만 같았다. 에스퍼에게 접근은 못 하고 발만 구르던 사람들이 감전될 수도 있다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태헌은 개의치 않았다.

살리고 싶다. 살리고 싶다. 살리고 싶다.

귀가 찢어질 듯한 소음과 금속이 부러지는 소리, 물소리, 전기 튀는 소리가 마구 섞였다. 전류 때문인지 피부가 찌릿찌릿 저렸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쉼 없이 떨어졌다.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그러나 에스퍼는 감전이나 추위 따위로 죽지 않는다. 태헌은 자신 있었다. 다시 손을 휘둘렀다. 쾅!

살리고 싶다. 살리고 싶다. 살리고 싶다.

태헌은 벽에서 떨어져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구속구를 하나씩 떼어낼 때마다 제 가슴의 못을 뽑는 듯 뻐근하고 시원했다. 벽에 있던 기계와는 다르게 생긴, 가이딩 기계와도 비슷한 금속 덩어리를 노려보던 태헌이 다시 팔을 휘둘렀다.

기계의 긴 목이 우지끈 부러졌다. 잔해를 발로 걷어차고 네모난 본체를 깨부쉈다. 지직거리며 전기가 통했다. 상처로 물이 흘러들어 따끔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개운했다. 멍한 중독 상태에서 빠져나와 온전한 감각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물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강연오가 완전히 포기하도록, 고개를 젓고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나도록 확실히 없애야 했다. 기계야 다시 만들면 그만인 걸 안다. 그러나 연오는 이 꼴을 봐야 했다. 이 꼴을 보고 정태헌의, 태헌이의 진심을 받아들여야 했다. 강연오는 떠나서 생존해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삶을 누려야 했다.

아마 더 자격 있는 쪽은 그쪽일 것이다.

“정태헌 에스퍼!”

난무하는 소음을 뚫고 연오의 비명이 들렸다. 감전 위험이 있다며 말리는 사람들의 손에 붙들려 문밖에 있었는데도 연오의 존재감이 생생했다. 태헌은 피 흐르는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마침내 연오를 돌아보았다.

기껏해야 동의서나 찢을 줄 알고 말리러 왔다가 한 층짜리 재앙을 목도한 이의 충격이 작은 얼굴에 얼룩져 있었다.

“미쳤어요? 이러면 어떡해요, 어쩌려고 이러냐고요! 살고 싶다면서, 살려달라면서!”

태헌은 혼자 흠뻑 젖은 꼴로 조금 웃었다. 빌어먹을 스프링클러 때문에 속눈썹까지 젖어 연오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옷자락조차 젖지 않은 이들을 밖에 두고 혼자 쏟아지는 물속에 있는 정태헌의 윤곽이 사라질 듯 흐려졌다.

폭우 너머에 선 듯한 연오의 존재가 다른 이들 사이에서 빛처럼 도드라졌다. 우스꽝스럽고도 황홀한 경험이었다.

“가이드님.”

태헌은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몇 번 털어냈다. 피부에 박혀 있던 플라스틱 조각과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따끔따끔한 아픔과 함께 태헌은 깨달았다. 언젠가 결심만 하고 건네지 못했던 말을 이제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칩 빼요.”

더 일찍 할걸. 버스 앞에 선 연오를 보고 망설였던 그때 설득해서 수술대에 눕힐걸. 그랬으면 이 지경은 안 되었을 텐데. 지나간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냐고, 그런 무서운 말을 들을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제 나 살려 줄 필요 없으니까.”

처음부터 강연오를 의식했다. 화풀이를 하면서도 다른 에스퍼와 있으면 질투가 났다. 하지만 솔직히 인정하자면 그건 전부 무의식이 시킨 일에 불과했다. 그렇게 시간이 갔다.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정태헌 스스로도 정리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는 정말로 강연오에게 반해버렸다.

하늘에서 땅으로.

어항 안에서 밖으로.

기압도 중력도 딴판인 사랑의 세계로.

“용서해 달라거나 잊으라는 개소리 다시는 안 할게요. 칩 빼고, 가서.”

“…….”

“잘 살아요.”

까만 머리카락이 창백한 뺨에 달라붙었다. 눈썹과 눈꼬리를 지나 물이 흘러내렸다. 얇은 옷이 축축하게 늘어졌다. 흠뻑 젖은 정태헌은 작고도 커 보였다. 미소가 추락하는 빗방울처럼 부서졌다.

“잘 살아, 강연오.”

망부석처럼 굳은 연오 곁을 에스퍼들이 스쳐 갔다. 끌려갈 정도로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태헌은 순순히 그들에게 팔을 맡겼다. 오래 담아둔 말을 쏟아내니 가벼웠다. 연오 곁을 지날 때 태헌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 정도의 인사면 충분하다는 듯.

연오는 발치에 떨어진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태헌이 지나갈 때 떨어진 물방울에 연오의 상이 조각조각 비쳐 보였다.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잃어버린 스물한 살 청년이 막막하게 서 있었다.

죽을 수 없다면 살아야 하는데, 언제나 죽음보다 삶이 훨씬 더 어려웠다.

힘에 부쳐 고개를 떨어뜨리자 눈과 코가 동시에 뜨끈했다. 인중을 타고 따뜻한 액체가 흐르더니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울고 뛰고 흥분하고 싸우고 원망하고 포기하고, 지나친 감정의 격동을 이기지 못한 몸이 또 무너지고 있었다. 서러운 게 아니라 울컥 화가 치밀었다. 연오는 징징대는 몸뚱이가 지겨워서, 지겨워서, 지겨워서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그냥 지켜만 보았다.

그러면서 물었다.

태헌아, 나 진짜 가도 돼?

너는 죽도록 아플 때도 나를 버리지 않았는데, 나는 이깟 코피 좀 난다고 가도 돼?

사실은 이토록 오래 곱씹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과거의 태헌이가, 또 현재의 정태헌이 이미 답을 주었으므로.

‘잘 살아.’

연오는 다리를 꺾고 웅크린 채 피와 눈물을 모조리 쏟아낼 기세로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그간 응어리진 모든 것을 목놓아 쏟아냈다. 이제는 정말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죽음보다 더 확실한 이별일 것 같아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연오는 태헌이 엉망으로 부순 제약실을 앞에 두고 오래도록 오열했다. 수술을 받기 전보다 훨씬 더 마른, 형편없이 야윈 두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서. 아마 연오가 스스로 자신을 안아 준 최초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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