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안전한 거리 (2)
연오는 내내 쉬었다.
이렇게 게으르게 쉰 게 얼마 만인가 싶을 만큼 휴식했다. 한주연과 김현철, 박이정이 차례로 문병을 왔다. 인천에서 기호와 현종까지 찾아왔을 때는 조금 놀랐다. 모두의 염려 덕분인지 상처는 문제없이 아물었고, 실밥을 제거할 때는 개운하기까지 했다.
태헌을 생각하며 전전긍긍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근본적인 평화였다. 자극 없는 밋밋한 일상, 딱히 무얼 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지루한 하루하루가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었는데. 무의미하게 흐르는 하루하루에 깔린 잔잔한 외로움과 끝내 혼자 남았다는 허망함도 연오의 휴식을 완전히 망치지는 못했다.
예정보다 좀 더 일찍 퇴원한 후에는 의식적으로 걷고 뛰기 시작했다. 입원 기간에 형편없이 약해진 몸을 어느 정도까지는 끌어올려야 했다. 앞으로 살아갈 일도 그렇고, 체력이 받쳐줘야 태헌이 가이딩도…….
연오는 자연스럽게 태헌에게로 흐르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잘라냈다. 산책하기 위해 일부러 센터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는데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르익은 가을이 연오를 감싸주었다. 적당히 선선하고 쾌적한 이른 저녁, 성가신 모기와 날벌레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맵시 있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교차로를 건너 각자의 목적지로 사라졌다. 차가우면서도 온화한, 모순적인 가을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계절이 아니라 삶의 냄새인지도 모른다.
무작정 걷고 있을 뿐인데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연오는 걸려 온 전화도 기분 좋게 받았다. 꺼릴 이유가 없는 상대의 전화기도 했다.
“네, 에스퍼님.”
[기숙사에 있어요? 저녁 같이 먹을 수 있나 해서요.]
“어……. 저 운동 삼아 잠깐 걷고 있어서. 밖에서 먹을 거면 센터 앞으로 갈게요.”
[운동? 센터에도 헬스장 있는데. 밖에 다 도로라 걷기 좀 그렇잖아요. 가이드도 쓸 수 있어요.]
“아는데, 좀 그래서요.”
거길 가면 왠지 태헌과 마주칠 것 같았다. 사실 센터 로비에만 들어가도 태헌이 나타날 것 같았다. 그와 불시에 마주칠까 초조할 때마다, 연오는 자신이 여전히 태헌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오래된 인연이니 지우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한 30분쯤 있다가 센터 앞으로 나갈게요.]
“네.”
연오는 막 신호가 바뀐 교차로를 곁눈질하며 전화를 끊었다. 언젠가 태헌과 시선이 마주쳐 먼저 고개를 돌렸던 그곳 즈음이었다.
연오는 비딱함을 넘어 다소 불량하게까지 보이던 정태헌을 떠올렸다. 인사하나 어쩌나 보자는 듯 뻔뻔하게 버티고 있던 태도도 함께 생각났다. 조금은 체념하는 심정으로 먼저 그를 외면했던, 그 봄.
태헌이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 여겼지만.
‘잘 살 거라고 약속해 줄 거죠?’
결국은 하나였던.
아마 죽어가는 그의 손을 붙잡았을 때 기적적으로 각성한 건, 끝내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연오는 교차로를 등지고 센터로 돌아갔다. 뒤꿈치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태헌 생각을 지우고자 저녁 메뉴로 생각을 틀었다. 구워주는 삼겹살집에 갔다가 우유 빙수 먹자고 해야겠다. 박이정 에스퍼가 다른 거 먹고 싶다고 하면 그냥 그렇게 하고.
센터 앞에 도착했지만 당연히 박이정은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다섯 시 십 분. 약속 시간까지 이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연오는 너무 빨리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감해졌다. 기숙사로 돌아가자니 들어가자마자 나와야 할 것 같고…….
긴 시간은 아니니 그냥 서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그때.
“강연오 가이드.”
김현철의 목소리였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자기의 이름만큼은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 법이라, 연오는 즉시 몸을 돌렸다.
김현철과 한주연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마주 걸었다.
“안녕하세요.”
“왜 여기 있어? 누구 기다려?”
한주연이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누구’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누구가 당연히 정태헌이리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헤어지기로 했으니 기다릴 일도 없어요. 그런 대답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유치해서, 연오는 건조한 사실만을 전했다.
“박이정 에스퍼요. 저녁 같이 먹기로 해서.”
“그래? 우리도 저녁 먹으러 나가던 길인데.”
“퇴근 안 하시고요?”
“예측기 오작동 때문에 퇴근도 없다. 센터장이 마라톤 회의하면 예측기 고쳐질 것처럼 굴고 있어.”
한주연이 어울리지 않는 푸념을 늘어놓은 다음 김현철을 흘끔거렸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연오는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심지어 한주연이 하려는 말의 내용까지도.
에스퍼 본부장인 한주연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연오는 그녀의 부담을 조금 덜어주었다.
“태헌이 가이딩 언제부터 할까요? 안 그래도 여쭤보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걔 어제 균열…….”
“좀 더 쉬어요.”
침묵을 지키며 연오를 살피던 김현철이 한주연의 말을 끊어냈다.
“에너지 소진하긴 했지만 전처럼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본인도 당장은 가이딩 필요 없다고 했어요. 가이드 체력도 중요하니 일주일이라도 더 쉬었다가 다시 얘기합시다.”
“태헌이가 그랬어요? 가이딩 필요 없다고.”
“그래, 그러더라.”
한주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내내 혀 아래 숨겼던 질문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각성했는데, 태헌이랑 얘기 잘 안 됐어?”
“……얘기요?”
“그래. 정태헌 기억도 돌아왔던데, 너 회복할 때까지 찾아가지 좀 말라고 성질만 부리고 무슨 얘기 했는지 말이 없더라.”
“…….”
“나한테 엄청 화냈어. 자기 기억 잃은 동안에 너 제대로 케어 안 해줬다고, 믿고 연오 소개해 준 건데 왜 그랬냐면서 거의 배신자 보듯 하는데 뭘 더 물어볼 수도 없고.”
연오는 쓰게 웃었다. 어쩐지 한주연이든 김현철이든 연락이 올 때가 됐다 싶었는데 조용하더라니, 태헌이 난리를 쳐놔서 그랬나 보다. 당연히 정한철에게서도 전화나 문자가 오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풍파로부터 연인을 지키겠다는, 불가능한 지상 과제를 수행하던 태헌이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걸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현실에 입이 썼다.
“내가 적극적으로 널 분리할 수가 없었어. 너도 알겠지만.”
“알아요.”
미온적인 한주연의 태도가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태헌처럼 배신자 대하듯 할 마음은 없었다. 자신이 나서서 보호를 요청했다면 그녀도 그렇게 우왕좌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지킬 의지도 없으면서 남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돌이켜 보면 비극적인 상황에 짓눌려 멍청한 짓도 많이 했다. 영양실조 진단을 받을 정도로 식사를 거르다가 가이딩 하러 가는 길에 쓰러진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났다.
어쩌면 지금의 여유도 가이드로 각성했기에 생긴 게 아닐까? 가이딩을 하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정태헌은 계속 아프다고만 하는, 답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니 식사도 챙기게 되고 운동도 시작할 힘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람은 상황에 자신을 맞춘다. 그래서 연오는 한주연을 그리 원망하지 않았다. 태헌도 그러지 말았으면 싶지만,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나중에 가이딩 일정 잡아 주시면 시간 맞춰서 갈게요.”
그날이 멀지 않았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연오는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후 혼자 남았다. 운동화 앞축을 바닥에 툭툭 두드리는 연오의 얼굴이 조금 복잡했다.
-
태헌은 차라리 이날이 영원히 오지 않기를 바랐다.
[가이딩 장소: 12층 B1 가이딩실
지원 가이드: 강연오]
강연오. 또렷하게 적힌 세 글자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벌써 몇 주가 흘렀다. 그동안 태헌은 이별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증상을 다 겪었다.
핸드폰이 울리기만 하면 씻다가도 뛰쳐나갔고, 나중에는 아예 핸드폰을 욕실까지 가지고 들어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연오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며 혹시 상태 메시지가 바뀌지는 않나 촉각을 곤두세웠다. 연오가 상태 메시지 따위로 재결합의 신호를 보낼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랬다.
연오에 대해서라면 뭐든 궁금했고 무작정 알고 싶은 게, 꼭 사랑에 빠졌던 그때 같았다. 시작도 끝도 같은 감정이 있다니 놀라웠다.
자려고 누웠다가도 혹시 연오가 건 전화를 못 받지나 않을까 싶어, 핸드폰이 벨 모드로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확인했다. 그래놓고 핸드폰이 진동하는 듯한 느낌에 퍼뜩 깨기를 반복했다.
종종 연오와 연락하는 듯한 박이정을 붙들고 그의 소식을 묻는 상상도 했다. 연오가 질색할 게 분명해 참고 또 참았지만 그에 관한 자그마한 이야기라도 듣고 싶어 밤이고 낮이고 조마조마했다.
편지를 써 볼까 해서 몇 문장 적다가 종이를 죄다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제 와서 편지 쓰면 뭐가 달라지는데. 괜히 연오만 더 힘들어져. 그런 생각이 들면 펜까지 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토록 연오와 연결되고 싶어 안달을 냈으면서도, 태헌은 눈앞에 닥쳐온 가이딩 일정을 반길 수 없었다.
그는 이전에 스무 살 연말의 일을 되새기며, 관계를 끝내자고 선언한 연오의 마음을 거의 전부 이해했다. 그런데 그가 이해하게 된 또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날 이별 통보를 받아야 했던 연오의 마음이었다.
이렇게 막막해서.
이렇게 무서워서.
그래서 엉망으로 울면서 매달렸구나. ‘연오도 슬프겠지.’ 정도의 막연한 짐작이었던 것이 구체적인 공감과 이해로 바뀌었다. 네 희생을 원치 않으니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은 이의 마음도, 헤어짐을 선언하는 이만큼이나 아픈 것이었다.
너무 아파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어른스럽게 굴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침착하자고 몇 번이나 자신을 타일렀지만 전부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는 며칠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발을 구르며 앙앙 우는 어린애가 된 듯한 수치심과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마음이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바뀌어 인격이 백 갈래 정도로 찢어진 것 같았다.
이런 상태인데, 연오와 가이딩실에서 만나야 한다니.
“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태헌은 심호흡을 하면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거울이 어려웠다. 거울뿐 아니라 얼굴을 비춰 주는 모든 물건이 다 거북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연오를 만나는데 아무렇게나 하고 갈 수는 없었다.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데 얼굴은 왜 신경 써?
차가운 빈정거림이 밀려왔지만, 태헌은 옷차림을 점검하고 머리도 가볍게 만졌다.
연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라도 초라한 꼴로 갈 수는 없었다.
황폐한 모습으로 연오 앞에 앉는 건 유치한 시위다. 네가 헤어지자고 해서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내가 망가진 꼴을 알아봐 주고 어서 나를 다시 받아 달라고, 구질구질하게 미련 떠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연오를 위한다면 멀끔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세상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뚜벅뚜벅 걸어 가이딩실로 들어가야 한다. 연오 안에 어떤 죄책감도 슬픔도 남지 않도록.
그래서 태헌은 하나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미소 짓는 연습도 하고, 뺨을 몇 차례 두드려 발갛게 만들어 보기도 했다. 살이 조금 내린 것은 감출 수가 없어 밝은 옷을 챙겨 입고 코트까지 걸쳤다.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괜찮게 지내는 사람’ 흉내 정도는 낸 것 같았다. 전문 분야 아닌가.
‘가자.’
태헌은 거울을 등지고 기숙사를 나섰다. 연오도 기숙사에 사니 가이딩실로 가는 길에 마주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어쩌면 너무 일찍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가이딩실까지는 금방이었다. 태헌은 금세 닫힌 문을 마주하고 섰다. 머뭇거리면 절대 이 문을 열지 못할 것 같아서 서둘러 손잡이를 쥐었다.
손잡이는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법에라도 걸린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다리는 물론 호흡기까지 돌로 변한 기분이었다.
저 안에서 태연할 자신이 없었다.
연오와 만나지 않은 지난 몇 주도 참느라 힘들었다. 전화하고 싶고 문자라도 보내고 싶고 당장 달려가서 만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식은땀을 흘릴 때도 많았다. 제발 헤어지자는 말만은 하지 말라고 애걸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느라 힘을 뺐다.
그런데 얼굴을 맞대고 어떻게 참아?
보자마자 울어버릴 것 같다. 건강한 관계를 위한 어른스러운 결정? 그런 것 따윈 하나도 모르겠고 너랑 못 헤어지겠으니 끝내자는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해 버릴 것 같다.
다시는 가이딩 수술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다고 울면서 빌던 연오가 떠올랐다. 나는 너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데, 너는 그때 정말 많이 놀라고 아팠겠구나. 헤어지자고 말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조차 건네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사무쳤다.
‘오늘은 안 돼.’
태헌의 손이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연오에게, 아니, 관리지원실에 연락해서 오늘 가이딩 받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자. 지금 이 상태로 연오를 보면 다시는 널 구하고 죽는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 헤어지지 말자면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게 분명하다. 가이딩은 자신이 좀 더 이성적일 수 있을 때,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을 때…….
“태헌아.”
너무 놀라 돌아선 순간, 연오와 시선이 마주쳤다. 손잡이만 붙들고 석상처럼 선 태헌을 보고 적잖이 놀란 듯 연오의 눈이 동그랬다.
“안 들어가?”
퇴로가 끊어진 듯 숨이 막혔다. 도망가야겠다고 다짐하며 안도한 순간에 이루어진 만남이라 더 놀랍고 무서웠다. 태헌은 원치 않는 말이 입 밖으로 줄줄 흘러나올까 봐 자기도 모르게 속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연오의 고개가 아주 살짝 기울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태헌을 발견했다. 손잡이를 잡고 있기에 먼저 들어가겠구나 싶었는데, 태헌은 연오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감싼 시간이 홀로 멈춘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래서 부른 것뿐인데 이런 반응이라니.
“정태헌.”
왜 그러고 섰느냐는 투로 가볍게 부르자 비로소 태헌이 반응했다.
“연오야, 진짜 미안한데 나 오늘은…….”
“응?”
“……아니야.”
태헌은 연오가 먼저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준 다음 한 걸음 비켜섰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태헌의 낯이 흙빛이었다.
연오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견디며 가이딩실로 들어갔다. 태헌과 ‘그’ 대화를 한 게 벌써 몇 주 전. 그동안 서로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으니 어색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태헌과 어색하다니, 한 집에서 몇 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변해가는 관계가 실감 나서 입이 썼다.
태헌이 주저하며 안으로 들어가 연오 맞은편에 앉았다. 닫힌 공간 안에 단둘. 연오는 긴장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손을 깍지 껴 맞잡은 다음 작게 심호흡을 했다. 기억이 돌아왔으니 태헌이 전처럼 거칠게 굴지 않을 걸 잘 아는데도 어쩔 수 없이 어깨가 경직되었다.
에너지를 무지막지하게 갈취당했던 일은 마음보다 몸에 더 깊이 새겨졌다. 연오는 제어할 수 없는 떨림이 뭔지 알게 되었고, 다른 이도 아닌 태헌과 있을 때 그런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손 줘.”
연오는 두 손을 테이블에 올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태헌은 손을 무릎에 둔 채 연오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열기마저 어린 눈빛이 키스해 보라고 강요하던 시절의 태헌을 생각나게 했다. 설마 지금 그런 요구를 하는 건 아니겠지, 연오가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순간.
“무리 안 해도 돼. 칩 없애도 수술 후유증은 남기도 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연오는 두 손을 꽉 말아쥐었다가 느슨하게 폈다.
“나 이제 각성해서 어느 정도는 괜찮아. 너 균열도 몇 번 다녀왔다며.”
“지금 나 때문에 무섭잖아.”
“…….”
“억지로 안 해도 돼, 연오야.”
가이딩이 필요할 게 뻔한데 태헌은 한없이 부드럽게 얼렀다. 연오는 복도에서와는 달리 멀쩡해 보이는 태헌의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움을 감추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오는 태헌과 둘만 남겨졌을 때 긴장하는 자신이 창피했다. 첫 폭주 가이딩 이후로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계속 이랬는데, 바보 같은 꼴일 뿐만 아니라 불편하기도 했다. 마음을 대범하게 먹고 태연하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가이딩 필요하잖아.”
“이런 말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가이딩 안 받아도 참을 수 있어.”
연오는 대답 대신 자기 손을 쫙 펼쳐 보이며 가이딩을 시작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여전히 경직된 어깨를 살피던 태헌이 마지못한 듯 손을 내밀었다.
따뜻한 손이 위아래로 엇갈려 포개진 순간, 연오는 아주 작은 숨을 토했다. 균열에서는 절박한 마음에 미친 듯이 가이딩했는데, 안 좋은 기억만 가득한 가이딩실에 있자니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
“묶고 할까?”
“……뭐?”
“내 손. 묶고 해도 돼.”
연오의 손을 놓은 태헌이 수갑 찬 사람처럼 손목을 마주쳐 보였다. 그의 눈 안쪽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읽은 연오는 할 수 있는 여러 대답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묶어도 끊으면 그만이잖아. S급 에스퍼인데.
너 불편할 텐데.
네가 그렇게 있는 거 보면 내 마음도 안 편할 것 같아.
마음에 드는 답이 한 가지도 없었다. 그래서 연오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뱉었다.
“우리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
벌어진 거리, 끝나가는 관계, 에스퍼와 가이드로 만나야 하는 현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지만 태헌을 묶고 가이딩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밧줄도 수갑도 의미 없다는 판단 때문이라기보다는 기분의 문제였다. 헤어지기로 했지만, 사실 오래전에 헤어졌지만, 목숨까지 걸어가며 사랑했던 사람을 비참한 꼴로 만들긴 싫었다.
허공에 뜬 태헌의 손을 잡아 테이블로 이끄는 연오의 손길이 단호했다. 손이 맞닿은 순간, 태헌의 손가락이 연오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뜻밖의 행동에 고개를 든 연오의 눈에 상대의 묘한 표정이 한가득 비쳤다.
태헌은 닫힌 입을 찢고 튀어나오려 드는 무수한 말을 필사적으로 살해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 연오의 한마디에 기다렸다는 듯 기어오르는 희망의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바로 연오에게 매달릴 것 같았다.
한 명의 분위기가 바뀌자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연오는 일변한 기류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가이딩 시작할게. 그리고…….”
“응.”
“충분히 가이딩할 테니까, 네가 에너지 가져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거 생각보다 힘들어서.”
험난한 절벽을 거의 다 기어올랐던 희망이 걷어차인 듯 나가떨어졌다.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는 듯 조심스러운 연오를 보고 있으니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미안해.”
조심스럽게 건너온 사과가 연오를 두드렸다. 연오는 마주 문을 두드려 노크에 답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받으려고 한 얘기는 아니야.”
“가만히 있을게.”
“…….”
“주는 만큼만 받을게.”
뭐라 대답할 듯 망설이던 연오가 곧 가이딩을 시작했다.
호흡을 차분히 유지하며 정신을 가다듬자 몸 안쪽을 순환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수술을 통해 가이드가 되었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마른 우물에서 모래 섞인 물을 박박 긁어 쓰다가 바다를 만난 기분이었다.
균열에서 빠져나온 후 제대로 가이딩을 하는 건 처음이다. 그때도 성공했으니 이번에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연오는 침착하게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태헌은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연오를 받아들였다. 아직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각인이 에너지 흡수를 도왔다. 잠을 자도 풀리지 않던 끈질긴 피로가 파도에 쓸려가듯 밀려났다. 균열 괴물의 피와 진액에 젖었던 몸이 이제야 진정으로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고요를 유지하면 파도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완벽한 가이딩이었다.
연오 역시 놀라울 정도로 수월한 가이딩에 놀랐다. 컵을 기울이면 물이 쏟아지듯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태헌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단한 집중도 필요치 않았고 진이 빠지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가이딩을 멈추지 않을 수도 있을 듯했다.
각성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태헌이 달라져서일까.
상념이 종이배처럼 의식의 표면을 떠다녔다. 연오는 태헌을 향해 흐르는 에너지를 느끼며 긴 숨을 내쉬었다. 내내 놓을 수 없었던 긴장이 비로소 풀어졌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는 서로를 구한 것이다. 가이딩할 때는 그것만 생각하자.
어느 순간, 둘의 연결이 끊어졌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손이 멀어지고 가이딩이 끝났다. 맞닿은 손만 보고 있던 연오가 드디어 시선을 들었다. 그 순간, 태헌이 쫓기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의자 밀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태헌아?”
“나 먼저 갈게.”
“……응?”
“미안.”
태헌이 연오 곁을 스칠 때 바람이 일었다. 연오는 도망치듯 문으로 가는 태헌을 자기도 모르게 붙들었다.
“너 괜찮아?”
태헌이 부름을 받은 개처럼 연오를 돌아보았다. 표정을 조금도 감출 수 없는 자세였다. 연오는 가이딩을 받기 전보다 훨씬 나빠진 안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그래. 설마 토할 것 같아? 가이딩 느낌은 괜찮았는데.”
태헌은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산소가 사라진 세계에 혼자 남겨진 사람 같았다. 상태가 정말 안 좋아 보여서 연오는 더럭 겁이 났다. 가이딩이 잘 된다는 느낌은 착각에 불과했나 보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연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높이가 엇비슷해지자 태헌이 고개를 떨어뜨려 표정을 감추었지만, 그 정도 행동으로 연오의 걱정을 지울 수는 없었다. 연오는 태헌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이딩 이상했어? 회복 안 된 것 같아? 에너지 모자라서?”
“아니야, 진짜 그런 거 아니야.”
“정태헌, 나 무섭게 하지 마. 걱정되잖아.”
걱정되잖아.
짧은 말이 물방울처럼 떨어졌다. 가득 차 위태롭던 잔의 표면장력을 깨는,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태헌이 넘쳐흘렀다.
“연오야.”
눈물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막을 틈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금방 목이 막히고 숨쉬기가 버거워졌다. 얼마나 보기 싫은 꼴인지 알기에, 태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정하고 꼼꼼하게 묶인, 연오의 신발끈이 보이자 어째서인지 정말로 참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나 너랑 정말로, 정말로 못 헤어지겠어.”
뜬금없는 말을 빚어낸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흐느낌이 섞이며 숨이 더욱 밭아졌다. 태헌은 자신의 팔을 쥔 연오의 손을 붙잡아 눌렀다. 놓지 말아 주었으면 했다. 이대로 나를 놓지 말아 주었으면.
“이런 말 하면 안, 안 되는 거 아는데, 근데 나 진짜 못 하겠어서 그래…….”
연오가 붙잡지 않았다면 달아날 수 있었을까. 연오가 여전히 자신을 걱정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참을 수 있었을까. 가이딩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터져나갈 것 같던 간절한 애원을 끝내 감출 수 있었을까.
“우리 헤어지지 말자. 응? 그러면 안 돼? 다시는 네 앞에서 죽는다는 말 안 할게. 진짜 안 할게. 내가 너한테, 함부로 했던 것도, 너 이렇게…… 이렇게 지치게 한 것도, 다 너무 미안해.”
아무리 애를 써도 연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힘들 거라면 차라리 가이딩 부족으로 고통받던 때가 나았다 싶었다. 어떤 아픔도 사랑을 아는 태헌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연오만은 너무나도 쉽게 그를 무릎 꿇렸다.
“이러면 나쁜 거 아는데, 나 이번만 나쁘게 하면 안, 안 될까.”
“…….”
“연오야, 제발.”
연오는 태헌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답을 준 것도 아니었다. 뜻 모를 침묵이 태헌의 목을 졸랐다.
각인했다고 할까. 나 너한테 각인했다고, 너 없으면 진짜로 안 된다고 해서 동정이라도 구해 볼까. 그러면 연오가 안 갈지도 모르잖아. 옆에 있어 줄지도 모르잖아. 다시 사랑해 줄 수도 있잖아.
다시.
사랑해 줄 수도.
있잖아.
“나 각인했어.”
환상 속에서 거울을 볼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태헌은 방금 자기가 뱉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번 말을 토하고 나자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태헌은 비어 있는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며 다시 한번 해서는 안 될 고백을 토해냈다.
“나 너한테 각인해 버렸어, 연오야…….”
그 말을 완전히 끝낸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연오에게 공연한 족쇄만 되리라 생각해 얘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사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엎질러진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 태헌은 막막하게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연오가 냉정하게 자리를 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끈 묶인 운동화는 여전히 그의 시야에 있었다.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연오가 뭔가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태헌은 눈물을 닦는 것조차 잊고 혼날 준비를 하는 아이처럼 호흡을 멈추었다.
“그랬구나.”
건너온 말에는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연오를 보니 그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연오는 태헌의 뺨을 닦아줄 듯 손을 아주 살짝 들었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가이딩실 들어오기 전부터 너 많이 불안정해 보였는데, 헤어지고 나면 원래 조금 그래. 평소 같지 않은 행동도 하고.”
방금도 태헌은 답지 않은 말을 했다. 원래의 그라면 이런 식으로, 각인이 연오를 설득할 유일한 카드 패라도 되는 양 무모하게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연락 한 통 없었던 지난 몇 주간의 태헌이 훨씬 더 본래의 그다웠다.
“너랑 헤어지고 인천 갔을 때 나도 그랬거든. 괜히 슬픈 영화 보면서 울다가 자고, 네 예전 번호로 전화 수십 통씩 걸어보고, 햄버거 꼭 두 개씩 사서 하나는 먹고 하나는 냉장고에 며칠씩 넣어 뒀다가 버리고…… 우리 학교 근처 로드뷰로 너랑 걸어 다닌 곳 보고, 막 그랬어.”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랑의 상실은 고통만큼이나 확실하게 연오를 망쳐 놓았다. 태헌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연오 역시 앞뒤 가릴 것 없이 헤어지지 말자고 거듭 매달렸을 것이다.
“헤어졌는데 얼굴은 계속 봐야 하니까 넌 더 힘들 거야. 네가 왜 이러는지 아니까, 다른 말은 안 할게.”
왜 이기적으로 구냐고 따지고 싶진 않았다. 이별은 원래 사람을 반쯤 짓이겨놓지 않나. 연오는 못 헤어지겠다는 태헌의 진심을 읽었고, 그 진심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 타격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연오는 얼이 쑥 빠져나간 태헌을 가만히 응시했다.
“근데 태헌아.”
“…….”
“네가 이러면 나도 진짜 힘들어.”
자신이라고 왜 기억을 되찾은 태헌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가이딩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우리 이제 행복하게 살자고 얼싸안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반복되는 희생과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끝내기 위해 다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이별의 과정을 거쳤기에 태헌만큼 힘들진 않았지만 연오도 태연하지는 않았다. 혼자 산책하다가도 문득문득 태헌을 떠올렸고 종종 사무치게 괴로워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견디고 있었는데.
‘우리 헤어지지 말자. 응? 그러면 안 돼?’
그런 말에 어떻게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은 자신과 태헌 모두를 위해서라도 냉정하게 말해야 할 때였다. 연오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한 번 지그시 깨물었다.
“다시는 이러지 마.”
“…….”
“정태헌.”
약속을 종용하는 부름이 태헌을 옭아맸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어차피 딱 하나였다.
“응.”
“…….”
“미안해. 내가 너무, 경솔했어.”
그는 잠긴 목소리로 사과했다. 어느 순간부터 눈물이 멎은 눈이 수정처럼 깊게 빛났다.
태헌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둘은 다시 닿은 데 없이 떨어졌다. 연오는 자기가 저지른 짓에 놀라 창백하다 못해 사색이 된 태헌을 바라보았다.
“넌 괜찮을 거야.”
힘들고 아프겠지만 나아질 것이다. 더한 고통도 견딘 정태헌이니 이 정도에 무너질 리 없다.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실수했지만, 금방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각인은…….”
“거짓말이야.”
태헌이 급히 연오의 말을 가로막았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이 다급했다.
“그냥 너 붙잡으려고 거짓말한 거야. 각인 안 했어.”
“했잖아.”
연오는 확신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가이딩이 평소보다 훨씬 수월해서 깨달은 건 아니었다. 가이딩이야 서로의 컨디션에 따라 쉬웠다 어려웠다 하니, 쉬운 가이딩이 각인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연오가 태헌의 각인을 확신한 건 그저 태헌을 믿어서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각인했다는 거짓말로 자신을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굳건한 믿음.
그 믿음은 태헌에게까지 전해져 그를 무참하게 했다. 무서울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연오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이해해 주고 믿어 주는데, 자신은 아이처럼 울면서 안 헤어지겠다고 떼를 쓰다가 각인했다는 말까지 내질러 버렸다. 기억까지 되찾았는데, 어른이 된 연오 앞에서 열다섯 살처럼 군 게 못 견디게 창피했다.
“내가 에스퍼가 아니라 각인이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네가 나한테 각인한 건 유감이야.”
유감이야. 그 표현에 태헌의 심장이 찢겨나갔다.
“어차피 가이딩은 나한테만 받을 수 있으니까 별다른 차이는 없을 거야. 나중에 새로운 사람 생기면…….”
말이 스스로 끊어졌다. 새로운 사람이라니, 연오도 그런 말까지 할 정도로 의연하진 못했다.
“어쨌든 문제는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다음 가이딩 때 보자.”
연오가 몸을 틀었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태헌은 붙박인 듯 서서 연오가 있던 자리만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어린아이가 되어 애원했는데 연오는 어른으로 남았다. 차라리 연오도 함께 울고 화를 냈다면 어떻게든 빌어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을 텐데, 연오는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는 어른처럼 대화를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안 헤어지겠다며 울다가 자신의 냉정한 반응에 눈물까지 그치던 연오가 떠올랐다. 어안이 벙벙해 울음까지 뚝 그치고 앨범은 챙겼느냐고 묻던, 그때의 강연오.
연오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태헌도 정확히 그런 심정이었다.
한바탕 울고 애원했는데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끝나자 마음 어딘가가 텅 비었다. 갑작스럽게 비어버린 자리에 연오의 상(像)이 맺혔다.
혼자 햄버거 두 개를 포장해 기숙사로 터벅터벅 돌아가는 연오의 모습. 하나는 뜯어서 억지로 씹어 삼키고, 나머지 하나를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냉장고 문을 여는 모습. 며칠이 지나 딱딱하게 굳고 말라비틀어진 햄버거를 버리며 눈물만 뚝뚝 흘리는, 사랑하는 얼굴.
늦은 밤에 핸드폰을 붙잡고 열한 자리의 번호를 꾹꾹 눌러 보았을 연오. 원래 쓰던 번호, 고등학생 연오에게 처음 알려 줬던 그 번호를 몇 번이나 눌러 보았을 연오. 바보 같은 짓인 줄 알면서도 거듭 전화를 걸면서 결번임을 확인받았을 연오.
길고 지난한 이별의 길을 혼자 걸어가야 했던 과거의 연인을, 절대로 위로할 수 없고 다시는 안아줄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에 못을 박았다.
‘나 너랑 정말로, 정말로 못 헤어지겠어.’
태헌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등신 새끼. 등신 같은 새끼.
-
기숙사로 돌아온 연오는 핸드폰 달력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정이 엉망이 됐네.’
개강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균열로 빨려 들어갔다가 그대로 수술실까지 가는 바람에 몇 주 내내 학교에 가지 못했다. 결국 이번 학기도 쉬게 된 것이다.
한 학기 더 휴학하는 것이야 상관없지만 앞으로의 일이 고민스러웠다. 하루하루가 텅 비었는데,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산책이나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태헌의 전담 가이드나 다름없으니 센터에 출근해 봐야 할 일도 많지 않고. 종일 가이딩 한 건도 없이 놀다 오는 날이 대부분일 게 분명했다.
남는 시간 동안 뭘 하지?
답 없는 고민에 부딪히자 애써 억눌렀던 생각이 기다렸다는 듯 밀려왔다. 연오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태헌의 얼굴을 지워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태헌이 울면서 빌 줄은 정말 몰랐다.
아니, 연오가 정말 몰랐던 건 자기 자신이었다. 못 헤어지겠다고 매달리는 태헌을 쳐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직도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태헌을 거절한 것인지 헷갈렸다.
난제 끝에 난제. 해결되지 못한 문제 위로 또 다른 문제.
‘지금은 생각해도 소용없어.’
연오는 더 고민하지 않기 위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방을 쓸고 닦고, 이불을 털어 침대를 정리하고, 나중에는 찬장에까지 손을 댔다. 기숙사에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는 그릇들을 하나씩 살펴보다가,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 둔 오래된 식판을 발견했다.
쉬지 않고 움직이던 연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저 식판에 밥을 먹은 게 떠올랐다. 태헌이 자신을 ‘낫게’ 했던 그때를 추억하면서. 입맛이 하나도 없어도 태헌이 사 왔던 식판에 음식을 덜어 먹으면 한 입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랑이 연오를 먹이던 때.
태헌과 함께한 내내 샘처럼 솟는 사랑을 먹어 치우며 살았던 것 같다. 심지어 그가 기억을 잃은 후에도 연오는 오래도록 그가 남겨준 애정을 끼니 삼아 견뎠다.
그렇게 살았으니 사랑이 사라지자마자 길을 잃는 게 당연하다. 해야 할 일을 알 수 없게 된 것도, 공허하고 헛헛한 것도 당연하다.
연오는 식판을 꺼내 잠시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처음처럼 반짝거리는 물건을 한참 들고 있던 연오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에 식판을 내려놓는 연오의 얼굴이 복잡했다.
안전한 거리를 지키며 멀어지기로 했으니, 태헌의 사랑을 먹고 살던 시절도 끝나야 할 것이다.
연오는 결심이라도 한 듯 재활용 쓰레기를 챙겨 지정된 장소에 버렸다. 그런 다음 곧장 마트로 향했다. 태헌과 소꿉놀이 하듯 골랐던 식재료를 혼자, 꼼꼼하게 살펴보며 카트에 담았다. 중요한 손님에게 내줄 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이 과일 저 과일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했다.
봉투 가득 식재료를 담고 기숙사로 돌아온 연오는 그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싱크대 물을 틀고 재료를 하나하나 다듬었다. 양파 껍질을 까고 버섯을 자르고 파프리카도 잘게 썰었다. 간 고기도 딱 혼자 먹을 만큼만 덜어 미리 프라이팬에 올려두었다.
물소리, 고기 비닐을 뜯을 때 손가락에 달라붙는 기름기, 도마에 대고 칼질하는 소리, 신선한 식재료 냄새, 프라이팬이 가스레인지에 부딪히는 소음, 가스 불이 올라오는 소리, 기름 위에서 재료가 익어가는 요란한 소리, 달그락달그락 평온하게 귓전에 부서지는 일상의 모든 기척.
태헌이 자기 삶에 채워 주었던 소리를 스스로 만들며, 연오는 혼자 견디게 될 삶을 잠시 엿보았다. 부모님을 잃은 직후처럼 끔찍할 것만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만들어진, 간단한 볶음밥 한 그릇. 연오는 소금으로 간을 한 달걀부침까지 밥에 얹었다. 마트에서 사 온 간단한 밑반찬까지 그릇에 덜어 식탁에 놓으니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태헌이 차려 주던 상에 비하면 초라하고 민망하지만, 회복한 후 처음 자기 손으로 차린 밥상이었다.
연오는 조용한 식탁 앞에 혼자 앉아서 밥을 먹었다.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쳐 달각 소리가 날 때마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숟가락질을 해 그릇을 전부 비우자 적당한 포만감이 찾아왔다.
이상한 일이다. 배가 부르면 나른해져야 하는데, 아까 매달리는 태헌 앞에서도 나지 않던 눈물이 났다. 연오는 자기가 왜 우는지도 모르는 채로 마음의 댐을 열어 슬픔을 방류했다.
후련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