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오작동 (11/23)

9장. 오작동

“보통 전담 가이드들은 뭘 하고 지내요?”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박이정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조금 웃었다. 연오가 먼저 연락해 얘기 좀 하자고 하기에 센터 카페에서 만났는데,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서 커피까지 사 준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거 궁금해서 커피 산 거예요? 내가 산다니까.”

“그냥 제가 사고 싶었어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답하는 연오를 보니 자연스럽게 정태헌이 생각났다. 정확히는, 태헌을 보고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연오도 갑작스럽게 나아진 것 같아서일까. 정태헌과 강연오, 둘은 아주 다르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그래서 그토록 절절하게 연애했나 싶기도 하고.

무례한 추측을 접으며 박이정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전담 가이드들은 보통 인생을 즐기죠.”

“……네?”

“왜요? 이상해요?”

뜻밖인 듯 눈을 치떴던 연오가 자기 컵을 돌리듯 흔들었다. 라떼 거품이 조금씩 죽기 시작했다. 농담인지 아닌지 분간하고 있는 게 뻔히 보여 박이정은 진지하게 부연했다.

“센터에서 돈 많이 주고 전담 에스퍼한테도 카드 받는 경우가 많아요. 가이딩 없을 때는 쇼핑 다니고 호텔 스파 받으러 가고, 해외여행 같은 건 좀 어렵지만 제주도에서 지내다가 에스퍼가 부를 때만 센터 오는 사람도 있어요.”

“에스퍼가 갑자기 위험해지면 어떡하려고요?”

“비행기 타면 한두 시간이면 오는데요, 뭐. 정 급하면 센터에서 전용기 보내서라도 데려오겠죠.”

태평하게 말할 문제는 아닌 듯한데, 박이정의 말투는 사실을 나열할 때처럼 단조로웠다. 연오의 혼란을 알아차린 박이정이 다시 커피를 홀짝거렸다.

“가이드님처럼 자기 에스퍼한테 헌신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적당히 하는 편이 좋기도 하고.”

“…….”

“에스퍼는 가이드 없으면 안 되지만 가이드는 다르잖아요. 각인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에스퍼가 일방적으로 각인하는 것뿐이지, 가이드는 각인이고 뭐고 없거든요.”

태헌의 각인이 떠올라 입이 썼다. 연오는 자신의 마음에 비하면 향기롭게 느껴지는 라떼를 몇 모금 마셨다.

“게다가 에스퍼가 가이드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도 꽤 많으니까, 가이드 입장에서는 인생이나 즐기자 싶은 거죠. 얘기해 보면 방탕하게 사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인 거예요. 사람들은 에스퍼 힘든 것만 많이 얘기하는데…… 가이드의 정서적 어려움이나 가이딩 피로도도 만만치 않거든요.”

어느새 박이정의 컵이 비었다. 아침 일찍 만났는데, 사무직까지 전부 출근하기 시작했는지 주위가 서서히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가 일어나려는 듯해 연오도 자기 컵을 비웠다.

태헌의 일에 정신이 팔렸을 때는 다른 가이드들이 어떤 문제를 겪는지 전혀 몰랐다. 인천지부의 기호, 현종과 어울리면서도 그들의 진짜 속 얘기는 들은 적 없는 것 같다. 마냥 해맑아 보이던 기호도, 의연하고 배려심 있는 현종도 각자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던 걸까.

박이정이 생각에 잠긴 연오의 손 앞쪽을 탁 두드렸다.

“그러니까 가이드님도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출장 가서도 어깨에 힘 빼고.”

“출장이요?”

“어.”

박이정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난감한 듯 턱을 매만졌다.

“그…… 말 안 했나?”

“뭘요? 무슨 출장인데요?”

“아니, 이게. 못 들었으면 안 가나 봐요. 맞아, 대학생이었죠, 참.”

박이정은 드물게 당황하며 빈 컵을 들고 일어났다. 이만 가자고, 대화의 끝을 대충 얼버무리는 모습이 영 불안했다. 태헌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숨겼기 때문일까, 어설프게 운만 띄우고 사라지는 태도가 싫었다.

무슨 일이냐고 제대로 캐묻기도 전에 박이정이 돌아섰다. 그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화를 피한 건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어쩐지 고집이 생긴 연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이정의 뒤를 따랐다. 카페 입구에 어정쩡하게 선 그를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딘 순간.

“안녕, 연오야.”

익숙한 음성이 목덜미를 낚아챘다.

연오는 스쳐 지나가는 대신 제 옆에 선 태헌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가이딩 후 사흘 정도 만날 일이 없었던 태헌이 검게 죽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헌을 보자마자 박이정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 안 했나?’

어렴풋하게나마 상황을 짐작한 연오가 태헌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냈다. 인사만 받아주고 떠날 줄 알았던 연오가 제자리에 머물자 태헌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연오는 그의 흔들림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안녕. 태헌아, S급들 어디 출장 가?”

“아.”

연오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마음을 졸이던 태헌의 입에서 허무한 감탄사가 흘렀다. 연오가 다정하게 자신의 안부를 물어 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일 얘기를 할 줄은 몰랐는데.

태헌은 이전의 가이딩처럼 갑자기 흘러넘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측기 오작동 문제 해결하려고. 예측기에 안 잡히는 균열 전부 들어가 보고 분석할 건데, 연구실에서 일하는 정신계 에스퍼들도 많이 가서 전국 S급이 전부 동원됐어.”

“가이드들도 많이 가겠네.”

“넌 안 와도 돼.”

당연한 듯 나온 말에 연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었나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왜?”

“왜냐니?”

태헌은 연오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연오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조심스럽게 변명했다.

“지금 학기 중이잖아. 김현철 본부장님이 대학생이나 겸업 가이드는 좀 배려해 주자고 해서, 난 필요할 때만 센터 와서 가이딩 부탁할 거야. 가이딩 필요할 정도로 큰 전투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고.”

“…….”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 너 말고도 대학교 다니거나 겸업하는 가이드는 다 안 가.”

연오는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숨기고 희생을 밥 먹듯이 하는 태헌 때문에 상황이 여기까지 온 탓에 지나치게 흥분할 뻔했다. 가이드 본부의 방침이라니 태헌의 탓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하나 있었다.

“근데 왜 난 출장 얘기도 못 들었어? 박이정 에스퍼는 나도 당연히 아는 줄 알던데.”

태헌이 마른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일렁였다. 연오는 그가 긴장한 듯 손바닥을 허벅지 옆에 쓱 문지르는 걸 볼 수 있었다.

“관리지원실에서 오늘쯤 연락 올 텐데, 다른 가이드들은 대부분 자기 에스퍼한테 미리 들었을 거야. 난 너한테 따로 연락하기가 조금.”

“…….”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어.”

“…….”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이제 네가 싫어하는 일 안 해.”

해야 할 말을 마친 태헌은 가만히 서서 연오의 답을 기다렸다.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게 뻔히 보여서 연오는 도리어 민망해졌다.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어. 미안해.”

“아니야.”

태헌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나도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인데 억지로 만들어 보인 표정인 게 연오의 눈에는 고스란히 보였다.

“그럴 만도 하잖아.”

도망치듯 먼저 돌아선 건 태헌이었다. 몸을 틀자마자 미소가 사라졌고, 커피를 주문하면서도 평상심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연오가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카페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용없는 후회가 밀려와 잠깐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연오는 이미 카페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유리 벽 너머로 박이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는 연오의 뒷모습이 보였다. 질투가 난다기보다는 그저 사무치게 부러워서 태헌은 작아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유리 벽에는 보기 싫은 자신의 모습만 남았다. 태헌은 조용히 그 모습을 외면했다.

-

박이정은 에스퍼 라운지에서 정태헌을 발견했다. 빛을 보지 않아도 자랄 수 있는 음지식물 위주로 꾸며 놓은 인공 정원 한가운데 멍하게 앉은 정태헌은 분주한 공간에 있는데도 눈에 띄었다. 어쩌면 모든 활력을 잃은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각인 가이드인 이연서를 잃었을 때, 박이정도 라운지에 오래도록 앉아 있곤 했다. 혼자 있으면 죽은 사람 생각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기에, 웃고 떠드는 사람들 틈에 몸과 정신을 내버렸다.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그래도 기숙사에 틀어박혀 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기억 돌아왔다던데.’

정태헌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센터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런저런 유명세가 있는 에스퍼다 보니 원치 않아도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저렇게 멍하게 앉은 모습을 보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아까 카페에서의 일도 마음에 걸렸고.

박이정은 태헌이 앉은 의자로 다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아예 정신을 놓고 있진 않았는지, 태헌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텅 비어 있었다.

“강연오 가이드랑 얘기 잘 했어요?”

“……네.”

어쩐지 대답이 얌전하고 정중했다. 왜 연오에게 괜한 말을 했느냐고 짜증을 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박이정이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강연오 가이드한테 말 안 한 줄 몰랐어요. 괜히 난감하게 만든 것 같네.”

“괜찮아요.”

그 덕에 한마디라도 섞었으니까. 할 수 없는 말은 꿀꺽 삼킨 태헌이 바닥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후 박이정과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대부분 자기 쪽에서 일방적으로 성질을 부린지라 지금 와서는 민망했다. 박이정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도 의외였다.

균열에서 으깨지기 전부터 그는 박이정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미성년자 시절, 상태가 불안정해 안전 구역에 격리되었다가 죽은 이연서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시신을 목격한 데다 박이정이 너무 심하게 절규하고 있어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박이정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태헌은 그 뒤로 내내 박이정을 한심하게 여겼다. 연오가 가이드였다면 나는 절대 저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가 죽을 때까지 에너지를 뺏다니,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야. 폭주 중이라 힘들었고 어쩌고는 그냥 핑계야. 참으려면 다 참을 수 있어.

미성년자 시절에 뇌리에 박힌 생각이 기억을 잃은 후에도 무의식에서 뽑혀 나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연오와 함께 있는 박이정을 보며 느낀 분노나 불안이 정말 질투이기만 했을까. 아마 아니었을 터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연오를 죽일 뻔했다. 연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에도 그랬다. 그 시기에 연오를 위로한 사람이 다름 아닌 박이정이라는 게,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한 충격이었다.

“연오 많이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이런 인사를 들을 줄은 몰랐던 박이정이 상체를 살짝 뒤로 뺐다. 태헌은 내가 뭐라고 이런 인사를 하나 자조하면서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진심이에요.”

“아니, 아니요, 뭘요.”

태헌은 별로 한 것도 없다는 겸양의 표현에 고개만 숙여 답했다. 박이정은 태헌이 질풍노도의 청소년처럼 눈을 뒤집고 왁왁 달려들 때보다 더 당황스러워 그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나란히 앉아만 있었다.

-

연오는 가이드 본부장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김현철이 직접 나와 문을 열어준 덕이었다.

“얼른 들어와요.”

김현철은 언젠가 연오를 불러들였을 때 그랬듯, 정성껏 우린 차를 직접 따라 주었다. 연오는 소슬한 가을 공기를 몰아내 줄 따뜻한 차를 후후 불어 마셨다.

“갑자기 보자고 해서 놀랐네요. 혹시 복학 문제 때문에 그러는 거면, 서류 미리 준비해 놨어요.”

투명 파일이 테이블로 올라왔다. 연오는 ‘균열 피해 증명서’라고 적힌 서류가 가장 앞에 놓인 파일을 보다가, 김현철의 성의를 생각해 그걸 들고 대강 살펴보았다.

센터에서 균열 피해를 증명해 주면 출석 일수도 인정받고, 그사이에 놓친 과제 점수도 어느 정도는 만회할 수 있다. 예측기가 발명된 이후로 ‘균열 피해 증명서’를 학교나 직장에 제출할 일은 많이 줄었지만, 요즘처럼 뒤숭숭할 때는 이 서류를 찾는 이가 많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복학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하려면 깨어나자마자 바로 했을 거예요.”

“자퇴한 건 아니겠죠?”

김현철이 파일을 내려놓는 연오를 꼼꼼히 살폈다. 연오는 가이딩을 위해 자퇴하겠다고 말했던 자신을 떠올리고 설핏 웃었다. 자퇴까지 했으면 태헌이가 더 뒤집혔겠지. 좋은 대학 갈 수 있도록 내내 노력하고 수능 도시락까지 정성껏 싸 줬는데. 그런 생각까지 든 후에는 더 웃을 수 없었다.

“아니에요. 내년에 복학하려고요.”

“다행이네요. 그럼 무슨 일로?”

“어…… 그게, 출장 때문에요.”

연오가 어색하게 입가를 문질렀다. 김현철은 연오의 말을 이해했으면서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만 마셨다. 그리 무겁지 않은 정적이 깔렸다. 연오가 더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갈 필요 없어요. 정태헌 에스퍼도 동의했고, 관리지원실에서 오늘 전화도 갔을 텐데.”

“네, 그러긴 했는데, 갑자기 문제 생길까 불안해서요.”

박이정은 센터에서 전용기라도 보내 부르지 않겠느냐고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그리고 다른 가이드들도 지나치게 동동거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연오는 그렇게 태평할 수가 없었다. 내장까지 죄다 드러난 채 움찔움찔 떨던 태헌을 두 번이나 봤다. 태헌에 관한 감정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부르면 가면 되지.’라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태헌에 대한 감정과는 다른 문제였다. 연오는 다시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태헌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태헌을 위한 희생은 아니다. 그냥, 자기가 더는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이건 이기적인 행동일까. 태헌도 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자기 마음 편하자고 따라가는 게 맞는 일일까. 가 봤자 별다른 일 없이 그냥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울면서 매달렸던 태헌만 더 힘들게 만들지도 모르는데.

지난번에 태헌이 했던 말이 마음에 달라붙었다.

‘이러면 나쁜 거 아는데, 나 이번만 나쁘게 하면 안 될까.’

그러니 연오 입장에서는 이게 ‘이번만 하고 싶은 나쁜 일’인 셈이었다. 위급한 상황에 달려갈 수 있게 가까이 머물되 거리를 유지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그리고 관리지원실에 물어보니까 휴학한 가이드는 전부 간다고 해서요. 저만 뭔가 특혜받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려요.”

“특혜 맞죠. 줄 만하니까 주는 거고.”

“……네?”

김현철이 진지한 태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강연오 가이드를 제대로 보호한 적이 없잖아요. 나도 그렇고 한주연 본부장도 그렇고. 정태헌 에스퍼가 협조하기 시작했으니 지금이라도 회복할 시간을 좀 주고 싶어서 그래요.”

“…….”

“정태헌 에스퍼 가이딩하지 말란 말은 하기 어려워요. 정 싫으면 어떻게 손은 써 보겠는데, 그래도 센터 입장에서는 해 주기를 바라죠. 이제 수술 가이드도 아니니. 둘 다에게 쉬운 일이 아닐 테지만 강연오 가이드에게 더 가혹한 일일 거라, 본부에서 어느 정도는 특혜를 주는 겁니다.”

“본부장님.”

연오가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손을 무릎으로 내렸다. 어쩐지 낯이 조금 뜨거웠다.

“저는 본부장님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해요. 센터가 아니라 제가 스스로 저를 지켜야 했는데 많이 모자랐죠. 그러니까 그 부분은 마음에 걸려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말고도 많은 걸 책임지는 분들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으니까요.”

차분한 어조에 김현철이 쓰게 웃었다. 어찌 되었든 연오와 태헌을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던 과거의 한주연도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했으면 싶었다.

센터에서 본부장 정도의 직급을 달고 일하다 보면 무력감을 학습하게 된다. 폭주하는 에스퍼, 죽어가는 가이드, 계속되는 균열의 위협, 별다른 희생도 없이 무슨 일만 터지면 센터를 손가락질하기 바쁜 일반인들……. 개인의 힘으로도, 조직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감수성과 정의에 대한 기준이 무뎌지고 기괴한 모양으로 깎여나갈 수밖에 없다. 그 후부터는, 이미 무너진 마음으로 미약한 몸부림을 쳐 나가는 게 전부다.

김현철은 그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는 연오가 놀라웠다. 정태헌이 애인 때문에 가이드 결벽증까지 앓는 게 조금 유난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왜인지 이해가 갔다.

“말은 고맙지만, 강연오 가이드 지금 고작 스물한 살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지 못할 때 더 나이 많고 경험 있는 사람들이 지켜줘야 하는 나이입니다. 어쨌든…… 정말 출장 가고 싶어요?”

“네.”

“혹시 정태헌 에스퍼가 부탁했나?”

요즘의 정태헌을 생각하면 아닐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기억 잃은 시절의 정태헌이 워낙 이기적인 행동을 많이 한지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요. 저희 따로 연락 안 해요.”

“일단 알겠어요. 정태헌 에스퍼 출장 지역은 강원도인데, 이번 금요일에 출발할 겁니다. 서류 처리는 해놓을 건데 중간에라도 마음 바뀌면 바로 전화하고요.”

“감사합니다.”

“가을인데 산 근처라 추워요. 요즘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비 소식도 있고. 짐 쌀 때 옷 잘 챙기면 좋을 겁니다.”

뜻밖의 조언에 연오가 멈칫했다. 이런 식으로 챙겨주는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오는 괜히 허둥대며 감사 인사를 한 후 본부장실을 빠져나왔다.

김현철 본부장의 충고 때문일까, 조용한 복도를 걷는 동안 짐 쌀 일을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여행 갈 때마다 자신의 짐을 점검해 주던 태헌이 떠올랐다.

‘다 싸 놨는데 왜 뒤집어?’

‘너 또 겉옷 대충 싼 것 같아서. 두꺼운 거 챙기라니까. 패딩 조끼도 챙기고.’

‘옷 겹쳐 입기 싫어서 일부러 안 넣은 거야.’

‘그래도 저번처럼 감기 걸리는 것보단 낫잖아.’

그러면서 태헌은 기어이 연오의 짐에 겉옷을 챙겨 넣었다. 숙소 밖으로 나갔다가 지나치게 차가운 가을바람에 소스라칠 때면, 그는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연오의 겉옷을 가져왔다. 그냥 가자고 해도 꼭 도톰한 외투를 입혀 준 태헌은 파랗게 질린 연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표정이 환해졌다.

고작 그런 일에.

다 큰 남자애가 좀 추워하면 뭐 어떻다고.

많이 정리했다고 믿었는데 괜히 목이 메었다. 연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누르며, 혼자라도 짐을 쌀 때는 꼭 겉옷을 잘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

-

연오도 강원도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은 그날 바로 태헌에게 전해졌다. 김현철이 한주연에게, 한주연이 정태헌에게 이야기를 전한 결과였다.

태헌은 연오의 동행 소식을 듣고 몇 시간 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극복하기 어려운 균열 트라우마를 가진 연오가 예측기 오작동이 심한 강원도까지 간다니, 걱정부터 앞섰다. 더는 연오를 이렇게 걱정할 자격이 없음을 아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한참 기숙사를 서성이던 태헌은 견디지 못하고 연오의 번호를 입력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핸드폰만 내려다보던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가이딩 필요할 일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화를 내겠지?

차라리 연오가 막무가내였던 행동을 비난했다면 대처하기 쉬웠을 것이다. 왜 헤어지자고 했냐, 왜 나를 가리켜 거지라고 했냐, 왜 마구잡이로 에너지를 뽑아 생사를 오가게 만들었냐……. 그랬으면 울고 빌고 변명하고 해명해서 연오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오는 왜 자신에게 고통을 숨겼느냐고, 왜 매번 죽으려고만 하느냐고 물었다. 그건 정태헌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질문이었기에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는 거짓말뿐. 연오도 거짓임을 간파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전화는 걸지 말자. 먼저 전화를 걸어도 되는지 모르겠고, 또 걸어도 뭐라고 할 것이며, 혹시 지난번처럼 폭발하듯 감정을 내보이기라도 하면 서로 난처할 뿐이다.

‘네가 이러면 나도 진짜 힘들어.’

그렇게 말하던 연오는 정말로 힘들어 보였다. 다시는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포기하고 핸드폰 든 손을 축 늘어뜨린 그때.

진동이 울렸다.

[나 강원도 출장 갈 거야. 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연오의 메시지였다.

태헌은 연오와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 숨을 멈추고 그 메시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혹시 다음 메시지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태헌은 자기 쪽으로 공이 넘어왔음을 깨닫고 재빨리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쥐었다.

뭐라고 쓰지. 고등학생 때 연오와 처음 문자를 주고받을 때만큼이나 긴장이 됐다. 그때는 풋풋한 설렘도 있었는데, 지금은 실수할까 두려웠다.

[응. 본부에서 들었어.]

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일단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답장은 머잖아 왔다.

[그랬구나. 알았어.]

평범한 친구라도 이보다는 더 풍부한 대화를 할 것이다. 속상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와 태헌을 휩쓸었다. 태헌은 얼마 전에 울컥 무너졌을 때처럼 ‘나 앞으로 너한테 연락해도 돼?’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쏟아낼 뻔했다. 충동과 어리광을 눌러 참으며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연오야.]

[고마워.]

애써 담백하게 가다듬은 인사만 건네놓고 태헌은 초조하게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나 때문에 안 와도 돼. 너 몸도 안 좋잖아. 사실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제 연오가 싫어할 만한 소리는 안 하기로 했으니까, 고맙다는 얘기밖에 할 수 없었다. 연오가 이 인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몹시 초조했다.

[응. 금요일에 보자.]

그때 봐. 태헌의 간단한 답장을 끝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더는 메시지가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태헌은 핸드폰을 한참 쥐고만 있었다.

-

당연히 공간이동으로 강원도까지 갈 줄 알았는데 센터 앞에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나와 있던 직원들은 수많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전국으로 출장을 가는 만큼 공간이동 이용 인원에 한계가 있다고 안내했다. 순서를 기다리느니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나을 거라는 소리도 덧붙었다.

불평하는 사람도 꽤 많았지만 연오는 별다른 내색 없이 버스에 올랐다. 일찍 온 편이었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도 많았다.

정태헌도 그중 하나였다. 평소라면 연오가 버스 밖에 있을 때 이미 존재를 알아차렸을 그는, 창문에 관자놀이를 기대고 선잠에 빠져 있었다. 맨 뒷자리에 앉은 그를 보던 연오가 통로를 가로질러 그리로 다가갔다.

옆에 자리 잡는 기척에 깰 법도 한데 태헌은 일어나지 못했다. 연오는 자질구레한 짐을 대강 정리한 후 태헌의 손을 가볍게 덮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집중 없이 에너지가 흘러나갔다. 태헌의 숨이 곧장 깊어졌다. 연오는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굵은 손을, 얕은 잠에 빠진 옆얼굴을 보며 한숨을 참았다.

어제는 센터 근처에 중형 균열이 발생했다. 예측기가 잡아내지 못한 균열이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S급 에스퍼인 정태헌과 박이정이 동시에 동원되었다. 중형이라고는 해도 적은 인원으로 균열을 돌파한지라 피로가 상당했을 터다.

늦게까지 가이딩 연락을 기다렸지만 단말기는 잠잠했고, 먼저 연락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차라리 오늘 가이딩을 하자고 결심하고 왔는데 태헌이 버스에서부터 지쳐 잠들어 있을 줄은 몰랐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연오의 에너지도 모자라지는 않았다. 연오는 하나씩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태헌만 지켜보며 가이딩을 계속했다.

각인이 아니었다면 에너지를 받아들일 만한 의식이 없는 에스퍼를 이만큼 수월하게 회복시킬 수는 없었을 텐데. 태헌이는 나한테 각인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한 번도 그걸 물어본 적 없다는 사실이 불쑥 떠오른 그때.

“아.”

태헌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손을 뺐다.

온기가 사라지며 물처럼 흐르던 에너지가 뚝 끊어졌다. 꿈을 꾸나 의심하는 듯한 태헌의 시선을, 연오는 애써 담담하게 받아냈다. 자기 옆에 앉은 연오가 현실임을 알아차린 태헌이 비뚤어졌던 자세를 고치며 뭐라고 말하려는데, 버스 문이 닫히며 내부가 아주 잠깐 덜컹거렸다.

어수선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벨트를 채우고 자기 가이드를 챙기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중요한 일 때문에 출장을 가는 중이지만 분위기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묘하게 풀어진 공기 속에서 연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헌아, 너 벨트.”

“아, 응.”

사고가 나도 절대 죽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그게 정태헌이지만, 그는 고분고분 벨트를 맸다.

“언제 왔어?”

“너 잘 때. 피곤해 보여서 가이딩 좀 했어.”

“안 해도…….”

괜찮았는데. 태헌은 본능처럼 말을 그쳤다. 연오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채 그를 주시했다. 태헌이 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어제 균열 때문에 힘을 써서 졸렸나 봐.”

“응.”

“고마워. 가이딩.”

연오는 꼬박꼬박 인사를 챙기는 태헌 옆에서 잠시 망설였다. 나란히 놓인 두 쌍의 운동화를 바라보던 연오가 불쑥 물었다.

“왜 어제 가이딩 요청 안 했어? 연락하기 불편했으면 관리지원실 통해서 해도 되잖아.”

태헌은 난감한 기색으로 연오의 얼굴을 살피더니 다음에는 그렇게 하겠다는 무의미한 약속을 남겼다. 그 약속을 믿을 수 없었던 연오는 예고 없이 태헌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가 움찔하는 것을 무시하고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나한테 가이딩 받는 거 불편해?”

편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귀다 헤어진 사람과 길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기분이 오묘할 텐데, 주기적으로 만나서 손을 잡고 가이딩까지 받아야 한다니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그러나 태헌의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니. 내가 널 불편하게 할까 봐 그래.”

“안 불편해.”

솔직히 말하자면 연오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깔끔하게 끊어낼 수도 없는 이 애매한 인연이 당황스럽기는 서로 마찬가지일 테니. 그러나 딱 잘라 ‘불편하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든 연오는 여전히 태헌을 살리고 싶었고 구하고 싶었다. 그에게 나를 위해 죽겠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말라고 못을 박은 지금도.

태헌이 연오의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대수롭지 않은 동작인 척 힘을 뺐지만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가 너 보고 싶어서 가이딩 요청할지도 모르잖아, 연오야.”

연오가 멈칫 고개를 들었다. 태헌은 아프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중에는 정말 가이딩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그냥 너 보려고 그러는 건지 나도 구분 못 하게 될 것 같아.”

가이딩이 좋은 구실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 한 건 아니다. 가이딩을 요청하면 연오는 밤이든 낮이든 달려와 줄 테고,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하면 몇 시간이고 마주 앉아 에너지를 나눠 줄 것이다.

연오가 자신의 생존에 얼마나 예민한지 알기에, 가이딩을 핑계로 그를 불러내는 악랄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어린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이딩 요청 잘 안 하게 돼.”

연오가 가볍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런 이유로 가이딩 요청을 피하는 줄은 몰랐다. 또 바보 같은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태헌에게도 태헌만의 이유가 있었다. 그가 가이딩을 핑계 삼아 자신을 휘두르려 들지 않아 주어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변한 사이가 씁쓸하기도 했다.

같이 행복하게 지낼 때 가이드로 각성했으면 어땠을까. 가이딩을 구실 삼아 센터에서도 매일 얼굴을 보며 장난을 치고 다정한 대화도 많이 나누었을 텐데. 이제는 얼굴을 한 번 맞댈 때마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을 해야 한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건가?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안개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을 떨치고자 연오는 가장 간명한 진심만을 꺼내놓았다.

“헷갈려도 요청해. 언제든, 핑계여도 갈 테니까.”

돌리지 않고 던진 말에 태헌이 멈칫했다. 연오는 진심 같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해주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척 고맙다고 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왜?”

헤어지자고 했잖아. 모든 관계를 끝내자고 했잖아. 그럼 나는 너를 핑계 대고 불러내서는 안 되는 거고, 너도 그 핑계를 모르는 척해주면 안 되는 거잖아.

태헌은 대답 없는 연오를 한참 바라보았다. 연오에게 함께 살자고 했던, 그 미숙한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연오는 자기를 동정하느냐고 물었다. 너 좋아서. 그렇게 대답했던 날이 태헌에게 다음 말을 가르쳐 주었다.

“나 불쌍해 보여서?”

연오가 아주 낯선 이를 만난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 역시 태헌과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타인이 건넨 다정을 동정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하고 외롭던 어린 시절.

저런 질문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헌이는 어른이니까,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니까 저런 질문을 할 리 없다고. 고등학생 때부터 자기만의 영역이 확고했던 사람이니 분명 성숙하고 완전할 거라고.

그런데 근래의 정태헌은…….

내가 태헌이를 정말 잘 알았던 게 맞을까?

“불쌍해 보이는 거면, 싫어?”

태헌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연오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물길이 넓어진 듯 에너지가 더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

“불쌍하게 생각해 주라.”

연오는 매일 걷던 동네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골목을 발견했을 때처럼 생경해졌다.

태헌이 매달릴 때 그냥 헤어져서 힘든 거라고, 그래서 잠깐씩 실수하는 거라 여겼다. 아니면 기억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성격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시야가 넓어지는지 태헌의 모습이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태헌이는 기억 속에 남은, ‘진정한 어른’ 같은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애인을 필요로 했던 연오가 쓰고 지낸, 왜곡된 렌즈에 비친 모습이 그러했을 뿐인지도.

“도착해서도 가이딩 필요하면 바로 얘기해.”

연오는 태헌에게서 손을 떼며 그렇게만 당부했다. 태헌이 기다렸다는 듯 답을 돌려주었다.

“응.”

“혹시 내가 전화 못 받으면 문자 보내놓고.”

“응.”

“그리고 가서 위험한 일 있으면, 나 말고 네 몸부터 챙겨.”

내내 돌아오던 대답이 멈추었다. 물을 꺼내려고 부스럭거리던 연오가 멈칫 태헌을 돌아보았다. 태헌은 안개 같은 미소로 본심을 가린 채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그럴게.”

-

강원도까지 출장을 온 에스퍼들은 이리저리 꽤 바쁜 모양이지만, 연오를 비롯한 몇몇 전담 가이드는 거의 휴가 나온 것처럼 지냈다. 에스퍼들이 이미 정리된 균열에 투입되어 힘을 쓸 일이 많지 않은 덕이었다. 물론 아직 살아 있는 균열이기에 괴물을 낳기도 하지만 에너지를 바닥낼 정도로 강한 건 거의 없었다.

태헌으로부터의 가이딩 요청도 거의 없었기에 연오는 며칠을 느긋하게 쉬면서 흘려보냈다. 빌린 차를 몰고 무작정 도착한 가을 바다는 황홀했고, 태헌과 한두 번 왔던 설악산은 알록달록 화려한 도포를 걸친 선비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끝없이 태어나고 죽는 파도와 구불구불 이어지며 영원히 흘러가는 산맥은 결국 같은 듯도 싶었다.

그렇다고 연오가 아예 태헌을 잊은 것은 아니다. 버스에서 태헌의 속내를 들은 후부터, 연오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가이딩 받을래?]

[아니면 오늘 가는 균열에 내가 따라갈까?]

균열 때문에 바쁠 텐데도 답장은 늘 금세 도착했다. 태헌이 언제나 핸드폰을 쥐고 있나 의문이 일 정도로. 답장의 내용 역시 매일 한결같았다.

[아니야. 오늘 에너지 거의 안 썼어.]

[물어봐 줘서 고마워.]

괜찮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호텔에 머무는 가이드들도 그리 바쁘지 않은 걸 보면 대부분의 에스퍼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힘을 쓰는 모양이었다. 가이드 신분증이 매달린 목걸이를 걸고 라운지나 식당에 흩어져 앉은 이들을 볼 때마다 연오의 걱정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어찌 되었든 안 좋은 기억이 가득한 서울을 떠나 멀리 오니 좋았다. 혼자 설악산 케이블카를 못 타본 것만 조금 아쉬웠다. 표까지 샀는데, 혹시 이걸 타고 이동하는 동안 긴급 가이딩 요청이 오면 어쩌나 불안해서 차마 탈 수가 없었다.

와글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보았을 때도 태헌이와 함께 있어 눈물겹게 아름다웠던 그 풍경을, 혼자서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달래며 혼자 산채비빔밥을 먹고 있으면, 단체로 관광 온 아주머니들이 연오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혼자 앉은 하얗고 마른 청년에게 꼭 한마디씩 붙여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연오는 그때마다 꼬박꼬박 그들의 자질구레한 물음에 답하고, 가끔은 크게 웃기도 했다.

“우리 사위 삼고 싶네.”

“너 사위 있잖아?”

“그놈은 시커메서 마음에 안 들어. 처음 데려왔을 땐 딸이 무슨 곰을 잡아 왔나 했다니까.”

“하긴, 네 딸이 사냥꾼 같긴 하지.”

“뭐라고?”

이런 시시콜콜하고 장난스러운 대화가 연오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굳은 얼굴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센터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관광객 무리와 어울리니 오랜만에 사람의 정이 느껴졌다. 학생 때 같았으면 질색했을 친절한 오지랖도 반갑고 고마운 것은, 자신이 외로워서일까 아니면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일 만큼 여유가 생겨서일까.

산채비빔밥은 썩 맛이 없었지만, 야외 테이블에 앉아 건너편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무척 좋았다. 연오는 이제 등산하러 갈 건데 같이 가자고, 젊은 사람도 운동을 해야 건강해진다고 참견하는 그들에게 신발 핑계를 댄 후 웃으며 작별했다.

단풍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은 그들은 설악산 공원을 가로질러 등산로 쪽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소녀처럼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깐 엄마 생각이 났지만, 인천지부 공원에 주저앉아 통곡했을 때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연오는 가방에서 단말기를 꺼내 가이딩 요청이 없음을 확인한 후, 공원이나 몇 바퀴 더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호텔 한식당에 앉은 태헌은 억지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윤기가 흐르는 밥을 조금 떠서 나물과 함께 먹어 보았지만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분명 냄새도 맛도 느껴지는데 이렇게 식욕이 안 돌 수 있나. 옆 테이블에서 끊임없이 웃고 떠들어 대는 다른 에스퍼들도 거슬렸다.

그래도 태헌은 식사를 이어갔다. 매일 야위는 꼴을 보여 연오를 심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연오가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래 함께한 사람이 말라 가면 당연히 걱정하지 않겠는가.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 위장 언저리가 강하게 수축하며 지금껏 애써 밀어 넣은 음식을 역류시키려 했다. 올라오는 쓴 침을 느낀 태헌이 물잔을 쥔 순간.

“그니까 가이딩 살살 좀 받아. 코피까지 터뜨릴 이유가 뭐냐?”

바로 옆 테이블에서 넘어온 대화가 주의를 잡아끌었다. 아까부터 에스퍼들이 모여 떠들고 있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어째서일까.

“가이드들 원래 코피 잘 나잖아.”

“안 그래, 등신아. 네가 무식하게 가이딩 받아서 그렇지. 코피 흘리다 쓰러지는 가이드도 많아. 저번에 누구 갑자기 실려 가서 잠깐 유명해졌잖아.”

“아, 나 이름도 알았는데.”

“강연우랬나?”

틀린 이름이었는데도 심장이 철렁했다. 태헌은 식사를 아예 잊고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근데 그건 가이딩이랑 상관없지. 사무실에 있다가 갑자기 코피 쏟으면서 기절한 거라던데.”

“멀쩡한 사람이 쓰러질 정도로 피 흘리겠냐. 그니까 너도 적당히 해. 그러다 가이드 도망가면 어쩌려고?”

“몸 약한데 가이딩하는 거 민폐야. 사람 기분 찝찝하게. 내 가이드가 나 싫다고 하면 관리지원실에 얘기해서 새 가이드 배정해 달라고 하면 되지. 내가 뭐 각인했냐?”

숟가락을 쥔 태헌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낄낄거리는 저 어린 새끼 입을 찢어버려야 하나. 그러나 정말 찢고 싶은 게 저 에스퍼의 입인지 자신의 입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방금까지 억지로라도 입에 넣던 음식이 전부 역겨워 보였다. 가이딩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피 흘리며 쓰러지는 연오의 환상이 보이는 것 같아, 태헌은 팽개치듯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화장실까지 달려가 얼마 먹지도 않은 것을 전부 게웠다. 연오가 그렇게 쓰러진 적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는데, 잊지도 않았는데, 남의 입으로 가십인 양 들으니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물론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자신이었다.

‘등신아, 관리지원실에서 연락 못 받았어? 연오 쓰러졌어.’

‘알아요.’

‘너랑 연오, 전날 매칭률 측정실에 있었잖아. 너 또 가이딩 세게 받았지.’

‘에스퍼가 가이딩 받는 게 잘못이에요?’

사방이 막힌 화장실에 있는데 바람이 불었다. 기억을 되찾자마자 열어젖힌 창문에서 불던 그 바람이었다.

사람은 어느 한계에 다다르면 초탈의 마음을 얻는다고 한다. 연오는 떠나고 그는 여기 혼자 남겨졌는데, 얼마나 더 견뎌야 초탈을 선물하는 한계가 오는 것일까. 연오가 홀로 견딘 시간만큼 아프고 나면 그때는 자신도 후련하게 연오를 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연오가 원하는 ‘건강한 관계’ 같은 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연오는 무고했고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는 부르튼 발목에 족쇄처럼 언제까지고 매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 늘 잘못하지 않은 자, 매 순간 최선을 다한 자가 더 후련하게 떠날 수밖에.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걸 이렇게 간절히 바란 건 처음이었다.

-

평화로운 일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연오는 센터에서 아침에 보낸 문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오늘 오후 7시 무렵 대형 균열 발생이 예측되었습니다. 해당 문자를 수신한 에스퍼와 가이드는 오후 4시까지 호텔 로비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비예측 균열과의 비교를 위해 핵 제거보다 데이터 수집에 집중할 예정이므로 미리 가이딩 받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메시지 창을 끄고 기사를 확인해 보니 포털 사이트도 예측기 오작동 문제로 시끄러웠다.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쏟아지는 기사에 그보다 더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댓글이 달려 어지러웠다. 연오는 ‘이럴 거면 세금은 왜 처받아감?’이라는 댓글까지 확인한 후 피로감에 창을 꺼 버렸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 틈에 서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태헌이 나타났다. 밝은 옷으로 어두운 안색을 가린 모습으로 그가 연오 옆에 섰다.

“왔어?”

애써 덤덤하게 묻자 태헌도 비슷한 인사로 답해 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한 차례 목을 가다듬었다. 하기 어려운 말이라도 하는 듯.

“몸은 어때?”

“괜찮아. 가이딩 때문에? 지금 해 줄까?”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그냥 물어본 사람치고는 시선이 집요했다. 연오는 자기 안색을 꼼꼼히 살피는 태헌의 눈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곧 직원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든 사람이 모였음을 확인한 그가 간단히 안내했다.

“문자 받으셨겠지만, 에스퍼 여러분이 균열에서 보낼 시간이 평소보다 길 거예요. 불편하시더라도 가이드분들은 균열 가까운 곳에서 대기해 주시고, 큰 균열이라 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데 에스퍼들이 옆에 있을 겁니다. 보호 범위를 벗어나는 단독 행동은 하시면 안 됩니다.”

느슨하던 공기가 순간 팽팽해졌다. 웅성거리며 떠들던 이들도 입을 다물고 시선만 교환했다. 강원도에서 휴가를 보내는 듯 굴던 모두가 처음으로 위험에 대한 경고를 받은 지금, 태연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버스에 오르면서도 심란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헌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연오는 이전까지는 태헌이 하는 모든 말을 믿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설악산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으며 곰 같은 사위 이야기를 들었던, 더없이 안전한 날들이 갑자기 멀게만 느껴졌다.

-

이번에 가이드가 대기할 장소는 관공서 건물이 아니었다. 균열 발생이 예측된 장소가 산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산은 지겹다고, 가이드들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임시 천막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에스퍼들은 이미 예측된 장소로 떠나고 없었다. 연오는 초조하게 이름 모를 산 중턱을 바라보며 공터에 설치된 천막을 서성거렸다.

균열이 일곱 시쯤 열릴 거라더니 여섯 시가 되기도 전부터 저 먼 곳이 시끄러웠다. 별다른 불안을 드러내지 않던 가이드들도 자기들끼리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너무 심한데요? 괴물들 엄청 튀어나오나 봐요.”

“보통 균열 안에서 다 정리되지 않아요?”

“데이터 수집 때문에 바로 핵으로 진입 안 해서 그런가? 아, 이러다 사람 죽으면 또 우리만 욕먹는데. 재난 문자까지 다 보냈는데 괜히 어슬렁거리는 관광객 없겠죠?”

그때 거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음이 들리더니 돌풍이 몰아쳤다. 천막의 기둥이 삐거덕거리며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몸이 확 떠밀리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빈 플라스틱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나뒹굴었다.

천막 밖으로 나가 위를 보자 검은 물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대포알처럼 가로질러 날아와 천막 앞에 떨어진 그것은…….

“아아악!”

연오 뒤에 있던 가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 나갔다. 연오는 충격으로 뻣뻣하게 굳어, 온몸이 새까맣게 그을린 에스퍼를 내려다보았다. 담당 가이드가 바닥에 사정없이 팽개쳐진 에스퍼의 손을 잡고 에너지를 흘려보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연오는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밖에 안 보이는 산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걱정이 치민 다른 가이드들이 전부 천막 밖으로 나와 주위가 단번에 어수선해졌다. 천막을 지키던 두 명의 에스퍼들이 잔뜩 긴장한 채 안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위험하니까 자리 지키세요!”

“담당 에스퍼 오면 가이딩해 주면 됩니다. 다들 좀 앉아서 기다려요!”

떠밀리듯 천막 아래로 들어가면서도 연오는 엉엉 우는 가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어가는 태헌이를 보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수술대로 달려갔던 그때가 떠올라 손발이 저렸다. 이후로 힘든 일이 무수히 많았지만 그를 죽게 내버려 둬야 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그 뒤로도 몇몇 에스퍼가 엄청난 부상을 입고 천막으로 피신하듯 돌아왔지만, 태헌은 해가 다 저물어 사위가 캄캄해질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연오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지금만큼은, 태헌과의 복잡한 관계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 일 없는 거겠지.

무사한 거겠지.

초조한 바람과 함께 하늘 어귀를 쳐다본 그때.

바람이 연오의 등을 떠밀었다. 등 뒤에 뭐가 있나 본능적으로 돌아볼 정도로 거센 바람이었다. 공기가 흐르는 물처럼 산 높은 곳으로 불려가고 있었다. 균열이 있는 곳으로, 무성한 나무가 무시무시한 입구를 가린 곳으로.

온 세상이 미지의 구멍으로 빨려들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빛줄기가 치솟았다.

콰앙!

모두가 귀를 틀어막았다. 연오는 찢어지는 이명에 시달리면서도 단풍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지점에서 하늘 끝까지 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구름 너머까지 뻗어 나간 빛줄기는 기둥처럼 굵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었겠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니 가슴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잠시 기다린 후에야 빛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졌다. 균열 폭발의 여파였는지 새들이 날아오르고 나뭇잎이 휘날리고 번개가 쳤다.

그러더니 찾아온, 완전한 정적.

“뭐야?”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무거운 분위기에서 가이드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주위를 지키던 에스퍼가 팔을 뻗어 그를 제지하기도 전에.

거대한 것이 비상했다.

처음에 연오는 그게 검은 뱀인 줄 알았다. 구름 사이로 구불구불 오가는 것이 꼭 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뱀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요란했다.

“다 물러나요! 보호막 칠 겁니다!”

가이드들이 우르르 물러나며 반투명한 막이 펼쳐졌다. 막이 펼쳐지기가 무섭게 굉음과 함께 지축이 울렸다. 연오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바닥을 짚고 앉은 채 헐떡이며 보호막 밖을 보는 연오의 얼굴이 무섭도록 창백했다.

쿵, 쿵, 묵직한 소음과 함께 검은 몸뚱이가 막에 부딪혔다. 가이드들이 비명을 질렀고, 보호막을 책임지는 두 에스퍼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뭐가 와서 저러는 건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막에 실금이 가고 있었다.

미세한 금을 발견한 연오는 숨까지 멈추고 밖을 주시했다. 눈알이 쑥 빠져나간 듯한, 시커먼 눈구멍이 보였다. 뱀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었다. 비늘도 눈도 심지어 혓바닥도 없는 괴물. 가진 거라고는 길고 굵은 몸뚱이와 톱날 같은 이빨이 가득한 입뿐인.

균열 밖으로 튀어나온 괴물은 처음 봤다. 뉴스로나 접하던 비상사태에 맞닥뜨리자 저절로 다리가 얼어붙었다. 게다가 이건 뭘까, 눈도 없는 괴물이 방금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본 것만 같은 느낌이 엄습했다. 사냥감 무리 중 가장 약한 것을 점찍은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그가 움직이자마자 괴물이 입을 벌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와 살점이 묻은, 칼날 같은 이빨 수백 개가 모조리 드러났다.

피이이이이―!

길고 날카로운 포효가 귀청을 찢었다. 뒤로 물러났던 그것이 다시 보호막을 들이박았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채찍처럼 보호막에 감겼다. 보호막이 흔들리는 소리가 너무나 살벌해서 몇몇 가이드는 눈물까지 터뜨렸다.

“S급은 뭐 하는 거야!”

보호막을 펼친 두 에스퍼 중 하나가 날카롭게 소리친 순간, 하늘에서 포탄같이 정태헌이 떨어졌다.

정태헌은 정확히 괴물의 머리에 내리꽂혔다. 머리만 납작하게 찌그러진 괴물이 머리에 못이 박힌 뱀처럼 온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보호막 쪽으로 달려가다가 스스로 주춤했다. 저기 가서 뭘 할 수 있는데. 괜히 태헌이를 자극해선 안 된다. 지금은 여기 안전하게 있는 게 가장 낫다.

태헌의 손에서 철사처럼 날카롭고 가는 실 수백 갈래가 뻗어 나왔다. 그 실은 괴물의 긴 몸을 옭아매 더 이상의 몸부림을 막았다. 어둠 속에서 힘을 쓰느라 빛이 번쩍번쩍 튀고 바람이 사납게 짖어댔다. 연오는 빛이 튈 때마다 번뜩거리며 나타나는 태헌의 얼굴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아주 잠깐, 보호막 너머로 태헌과 눈이 마주쳤다. 괴물과 눈이 마주쳤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연오의 핏기 가신 얼굴을 목격한 태헌이 이를 악물며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손에 연결된 실을 잡아당기는 뒷모습이 처절했다.

다른 에스퍼들도 태헌에게 합류했다. 더 많은 줄이 괴물을 묶었다. 이제 꼬리만 봉하면 문제없이 머리를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방심했을 때 터지기 마련이다. 연오 뒤에서 발을 구르던 가이드가 갑자기 입을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사정없이 휘둘린 꼬리에 맨 끝에 있던 에스퍼 둘이 얻어맞았다. 그들은 긴 봉으로 배를 가격당한 사람처럼 침과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고작 두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실이 핑, 핑 소리와 함께 마구 끊어졌다. 괴물의 몸부림이 점점 거세지더니 결국 모두 떨어져 나가고 태헌 혼자 남았다.

태헌아.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연오는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보호막을 치던 에스퍼들이 가이드들을 먼저 대피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태헌이가. 정태헌만이. 그가 구하고자 했던, 이 지경이 되어서도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던.

단 한 사람이.

연오를 돌아보고 엷게 웃었다.

안심하라는 듯.

의도하기라도 한 듯 실이 일시에 끊어졌다. 몸부림의 반동으로 괴물이 총알처럼 튕겨 보호막에 부딪혔다. 퍽, 쩌억……. 보호막이 얼음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가이드들이 고함을 지르며 뒤편으로 달려갔다. 자기 에스퍼를 챙기려는 사람도 있고 괴물과 멀리 떨어지려는 사람도 있었다. 연오 역시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에스퍼들이 모두를 엄호했지만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끼이이익!

소름 끼치는 금속성의 울음이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연오는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뛰었다. 수술 후유증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는 금세 뒤처졌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발목이 부러질 듯한 아슬아슬함을 안고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이대로 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고꾸라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연오야!

부름은 꼭 환청 같았다. 그러나 곧 부름보다 정확한 것이 와닿았다. 태헌의 커다란 두 손. 단단한 가슴팍. 연오는 제 가슴 앞에서 엇갈린 태헌의 두 팔을 느꼈고, 그러자마자 몸이 확 떠올랐다.

그들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위치는 아니었고, 그저 몸이 땅에서 살짝 떨어져 바람의 속도로 나아갔다. 그러자마자 무시무시한 파열음과 함께 바닥 꺼지는 소리가 났다. 연오는 방금까지 자기가 서 있던 자리가 움푹 들어간 살벌한 흔적을 보고 몸을 떨었다. 이 순간만큼은 태헌과 가까이 붙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기 어려웠다.

“무서워하지 마.”

낮은 속삭임이 들린다. 고등학생 시절, 기억할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귓가를 간질이던 포말 같은 음성. 둘 모두 그때보다 훨씬 더 성숙해졌는데 왜 안도감은 전과 같은 것일까.

“금방 끝낼게.”

인지할 틈도 없이 발이 부드러운 바닥에 닿았다.

태헌은 연오 앞을 막고 섰다. 괴물이 무서운 속도로 미끄러져 그들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연오는 태헌이 뭔가 무시무시한 힘을 써서 괴물을 죽일 걸 기대했다. 이제 곧 거대한 칼이라도 나타나서 저 뱀의 목을 싹둑 잘라…….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태헌이 자리를 박차고 정면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블랙홀처럼 벌어진 괴물의 아가리로 곧장 뛰어들었다. 연오가 눈을 홉떴다. 비명도 터지지 않았다.

괴물은 태헌을 꿀꺽 삼키더니 곧바로 꽈배기처럼 온몸을 한 방향으로 비틀었다. 저 괴물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태헌의 몸이, 끈적한 위장에서 으깨지는 환각이 연오의 망막을 뒤덮었다.

세상이 끔찍한 적막에 휩싸였다. 바람이 멎고, 나뭇잎 소리가 사라졌으며, 구름이 흩어지고 발밑이 내려앉았다. 힘 풀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연오에게 에스퍼가 다가왔다. 연오는 그에게 이끌려 무력하게 몇 걸음 옮기면서도 괴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 괴물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사나운 뱀처럼 똬리를 틀며 몸을 꼬던 괴물의 눈구멍이 차오르더니 시커먼 액체가 철벅철벅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오는 물론 연오를 끌고 가던 에스퍼마저 놀라서 굳어 버렸다.

괴물이 입을 벌렸다. 끔찍한 포효를 예상했으나 성대가 잘린 듯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고요한 세상 속에 얹히는 고요, 정적은 곧 소요로 변했다.

처음에 연오는 괴물의 몸에 축구공이라도 든 줄 알았다. 배가 불룩 튀어나왔다가 등이 튀어나오고, 다음에는 목, 그리고 다시 배, 등, 목, 커다란 쇠공이 괴물 안을 짓찧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괴물이 아까와는 다르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삼킨 것을 뱉어내려는 듯 헛구역질을 하고 자기 몸을 바닥에 쿵쿵 찧으며 자해했다. 흙과 나뭇조각이 날리고 먼지가 일어났다. 세상이 울려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회복한 에스퍼들이 뒤늦게 달려왔지만 괴물의 반응이 먼저였다. 꺼어어……. 목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괴물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폭풍전야의 침묵이 내리깔리고 공기의 흐름이 끊어졌다.

퍼어엉!

괴물이 폭사했다.

먼 곳에서는 폭죽이 터진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서는 폭탄이었다. 순간 귀에 엄청난 압력이 전해지며 고막이 터져버리는 착각이 일었다. 찢어지는 이명과 함께 모두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조각조각 갈라진 괴물의 시체가 엄청난 피와 진액을 뿜었다. 수류탄 파편처럼 사방으로 날아간 시체 조각이 모두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연오 역시 소리가 사라진 세상에 주저앉아 검은 피와 타르처럼 끈적한 진액을 잔뜩 뒤집어썼다.

눈알이 따갑고 머리가 어지럽고 청력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후에도, 연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괴물이 있던 자리를 파헤치듯 응시했다.

“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태헌을 발견한 순간, 탄식이 터졌다. 태헌은 누구보다도 심하게 더러워진 모습으로 옷을 툭툭 털었다. 그의 몸에 달라붙은 끈적한 위액이 투명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온몸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꼭 전신에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정태헌!”

연오가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폭음 때문에 귀가 정상이 아닌지 자기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주위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연오는 시체 조각이 가득해 미끄러운 바닥을 딛고 달리는 동안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그가 태헌에게 다다랐을 때.

“오지 마!”

태헌이 버럭 소리쳤다. 먹먹하던 귀가 뚫릴 정도로 거센 고함이었다.

“나 지금 위산 뒤집어썼어. 너 다쳐.”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니 태헌의 상태가 확실히 보였다. 소매와 바짓단이 전부 타들어 가 꼴이 엉망이었다. 머리카락은 물론 피부 표면까지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듯 상한 상태였다. 온몸이 익은 듯 벌게서 보기만 해도 아팠다. 심지어 신발까지 녹아 그는 맨발이었다.

“가이딩해 줄게.”

공포에 질린 연오가 겨우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러나 태헌은 제 어깨에 들러붙은 점액을 털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좀 씻어야 돼. 나한텐 화상인데 넌 이대로 나한테 손대면 피부 녹아.”

말을 잃은 연오를 보며 태헌이 어색하게 웃었다. 온몸이 쓰라리고 아플 텐데, 당장 뒹굴며 가이딩을 요청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모든 고통을 눌러 참는 모습이 정태헌의 불변을 증명했다.

달라지겠다고 울고 빌었지만, 그의 이런 면은 수정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어떤 감정이 얼굴에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연오 자신조차 모르는 감정을 표정을 통해 읽어낸 태헌만이, 조금 애원하는 투로 속삭였다.

“화내지 말아줘, 연오야.”

“…….”

“나 살았잖아.”

가까이 있던 에스퍼 하나가 연오를 잡아끌었다. 괴물의 체액을 뒤집어썼으니 가이드님도 어서 씻어야 한다고, 안 그러면 위험하다고, 그런 말이 전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연오가 에스퍼의 손에 끌려 사라질 때까지, 태헌은 시체의 잔해 가운데 선 채 쓰라린 미소만 짓고 있었다.

-

피부에 약한 발진이 일어났다. 연오는 생전 처음 본 연고를 듬뿍 짜 발갛게 까진 자리에 꼼꼼하게 펴 발랐다. 심한 부상은 아니라 보기에만 징그럽고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화끈거리나 싶었는데 씻고 나니 나아졌고, 약을 바르자 붉은 기도 빠르게 가셨다.

약이 묻지 않도록 헐렁한 티를 걸친 연오는 침대에 멍하게 주저앉았다.

아까 그 현장에는 다른 에스퍼들도 많았다. 자신이 뒤처지지만 않았다면 태헌이 무리해서 괴물의 몸속으로 진입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폭사한 괴물의 시체 한가운데 망연히 서서 미소 짓던 정태헌의, 화상으로 붉어진 뺨을 떠올리니 몹시 괴로웠다.

나는 늘 이렇게 방해만 될 뿐인가.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수술 후에 몸 관리를 제대로 못 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가이드로 각성한 후에는 밥도 잘 챙겨 먹었고 잠도 잘 자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달려가는 가이드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낙오된 자신의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한심해.’

태헌에게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도망도 제대로 못 치면서 무슨 큰소리를 친 것인가. 연오는 자괴감에 휩싸여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지금쯤이면 태헌도 다 씻었을 텐데, 가이딩 요청이 올 때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전화를 걸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통화 어플을 누른 순간 누군가 벨을 눌렀다.

“연오야.”

익숙한 목소리에 연오는 곧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문을 열자 어색하게 선 태헌이 보였다.

“들어와.”

연오는 길을 터 주며 눈을 굴렸다. 태헌의 얼굴은 아까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얼굴보다는 반소매 티 아래로 드러난 팔이나 손이 문제였다. 연오는 화상의 흔적이 역력한 몸을 힐끔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태헌은 방 안쪽으로 이동하는 대신 잠잠히 서서 연오를 기다렸다.

연오가 그를 테이블로 안내하기도 전에 태헌이 물었다.

“너 피부 괜찮아?”

“너만 할까.”

공연히 울컥해 말이 뾰족해졌다. 엉망진창인 꼴을 하고 남 걱정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했다. 움찔하는 태헌을 본 후에야 괜한 화풀이를 했음을 깨달았다. 사과하려고 했는데, 태헌은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듯 쩔쩔매며 물었다.

“얼굴에 연고 덜 발렸는데, 내가 발라 줘도 돼?”

“알아서 할게. 너 가이딩부터.”

막 씻고 와서 그런지 태헌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었다. 둘 다 편한 옷을 입고 이렇게 있으니 꼭 옛날 같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평온한 나날들. 태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쟤가 뭘 저렇게 곰곰이 보나 싶어 함께 눈을 돌리자, 짐을 쌓아 두어 엉망인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풀지도 않은 가방은 테이블에 던져져 있고 괴물의 진액에 더러워진 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진 상태였다. 힘든 일을 겪고 온 데다 온몸에 발진이 일어난지라, 씻고 약을 바르기 바빠 정리할 기운이 없었다.

간단히 치울 수도 있지만 왠지 찜찜했다. 태헌의 성격상 대강 치운 곳에 앉아 가이딩을 받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연오가 빈 침대를 돌아보았다. 아까 팽개친 핸드폰과 쓰다 만 연고만 놓여 있을 뿐, 이불조차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깔끔한 상태였다.

“누워서 받을래?”

“…….”

“다른 의미는 아니고.”

태헌의 시선이 묘해 짤막하게 덧붙였다. 어쩐지 얼굴이 뜨거웠다. 발진 때문일까, 약을 좀 더 발라야 하나, 괜히 그런 잡념만 주워섬기고 있으니 태헌의 답이 들렸다.

“네가 침대에 앉아. 바닥에 있을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냐고 물으려던 연오는 먼저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부상을 단 태헌과 중요하지도 않은 걸 두고 입씨름을 하느니 가이딩이나 빨리 해 주는 편이 좋을 듯했다.

연오가 푹신하고 하얀 침대에 걸터앉았다. 태헌이 연오의 발치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편하게 앉으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무리해서 안 해 줘도 돼. 너도 힘들 텐데 부탁해서 미안해.”

연오는 대답 대신 태헌의 손을 맞잡았다. 태헌은 붉게 일어난 연오의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 정신이 팔려 훨씬 더 심한 자신의 상처는 아예 의식조차 못 하는 모양새였다.

“안 아파? 화상 원래 되게 아픈데.”

“견딜 만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헌의 몸 전체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아픔으로 인한 극도의 긴장 상태가 생생히 전해졌다.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아프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 태헌이 답답하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아픈 티도 내고 그래.

그 말은, 이런 관계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가이딩 에너지가 빠르게 태헌에게 흘러갔다. 연오는 아주 천천히 원래의 색을 되찾는 태헌의 팔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아까.”

“…….”

“나 때문에 무리한 거지? 다른 에스퍼들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아니야.”

대답은 미리 준비한 것처럼 바로 튀어나왔다. 태헌은 연오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실내 슬리퍼를 신은 연오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너 아닌 다른 가이드가 위험했어도 그랬을 거야. 너 때문 아니야. 그리고 다 잘 됐잖아. 너도 나도 문제없이 무사하잖아.”

“정태헌.”

급하게 이어지던 말이 중간에 끊어졌다. 태헌은 여전히 연오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정태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연오는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는 태헌을 물끄러미 보며 자문했다. 나는 변했나?

“나 혼내지 마.”

태헌이 고분고분 부탁하듯 약한 소리를 했다. 그러고 나자 마침내 입과 마음의 통로가 뚫렸는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너는…… 너 때문에 위험해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몰라. 아까도 계산하고 행동한 거 아니야.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어. 네가 싫어하는 거 아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좀 더 안전한 방법도 있기는 했다. 연오 말대로, 일단 방어하며 다른 에스퍼들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괴물이 연오를 사냥감으로 점찍은 걸 아는데 어떻게 그런 태평한 짓을 하겠는가. 어떻게든 연오를 빨리 안전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태헌의 손을 잡은 연오의 힘이 약해졌다. 그러나 태헌은 연오를 놓지 않았다. 그는 연오의 손을 바짝 잡아당기며 절박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 헤어진 거 알아. 근데 내가 그냥 너 좋아해서 그래. 혼자 좋아할 수도 있는 거잖아.”

또다. 또, 기억을 잃은 정태헌 같은 모습이다. 아니, 그냥 태헌의 다른 일면이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연오를 응시하던 태헌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다시는 널 위해서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 우린 안 헤어졌을까?”

“…….”

“그래도 헤어졌겠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태헌의 입가에는 미소 한 줌 없었다. 연오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아득해졌다.

“기억 잃었을 때 널 그렇게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네가 기억 돌아온 날 보자마자 헤어지자고 하진 않았을 텐데. 대화라도 나눠 줬을지도 모르는데. 안 헤어졌을지도 모르는데.”

태헌의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정태헌에게, 또 정한철을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시달려 극도로 소진된 상태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곧바로 이별을 결정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여기고 어떻게든 태헌과 그 난관을 넘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의미 없는 가정이다. 연오는 끝없이 흘러가는 에너지를 느끼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미 다 벌어진 일이잖아.”

그러나 태헌은 이 관계를 그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내가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너한테 몇 달, 몇 년이라도 날 안 보고 혼자 있을 시간을 줄 수 있었다면……. 너도 혼자 쉬면서 한 번쯤은 나를 떠올려서 돌아와 줬을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어.”

연오는 태헌의 끈질긴 시선을 회피했다. 맞닿은 손만 보며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시 낯이 뜨거워졌다.

“내가 너한테 화풀이만 안 했어도.”

그건 내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었다. 정말 연오를 한 번도 원망한 적 없느냐는 거울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못했으니까.

“태헌아.”

“내가 각성만 안 했어도.”

자학마저 스민 음성이었기에, 연오는 그를 재차 부를 수도 없었다. 태헌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졌다.

“내가 나만 아니었어도…….”

“…….”

“내가 그걸 얼마나 후회하는지, 너는 몰라.”

그의 이마가 연오의 무릎에 닿았다. 연오는 자신에게 머무는 낯설지 않은 온기를 느끼며, 미약하게 떨리는 태헌의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물도 없이 울고 있었다.

“내가 나여서, 나는 그게 가장 미안해.”

손은 여전히 굳건히 이어져 있었다. 연오가 모든 힘을 다 빼 버려도 태헌은 그를 놓지 않을 것이다. 연오가 균열에 빨려 들어갈 때 그랬듯이.

이만큼 연약하고 솔직한 태헌은 처음이었다. 그가 울면서 못 헤어지겠다고 매달렸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진솔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연오가 알아 온 모습이 아니었고 또 어쩌면 바라 온 모습도 아니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저렸다.

누군가의 맨살에 닿으면 본래 조금쯤은 슬픈 것일까.

나에게 이 조금의 슬픔도 얹고 싶지 않아, 너는 늘 한 꺼풀 너머에서 조용히 울었을까.

“태헌아.”

완전히 본래의 색을 되찾은 태헌의 팔을 본 연오가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태헌은 갈 때가 되었음을 깨달은 듯 조용히 마음을 거둬들였다. 연오는 상체를 천천히 펴고 표정을 정리하는 그를 보다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약 좀 발라주고 갈래?”

이대로 보내면 너는 또 조용히 울 것 같아서.

“손이 안 닿아서, 등에는 거의 못 발랐거든. 바쁘면…….”

기적적인 제안이라도 받은 듯 태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도 안 바빠.”

태헌은 연오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급히 움직였다. 무릎을 펴고 일어난 그가 침대 한쪽에 놓인 연고를 챙겼다. 어디 있는지 찾지도 않는 걸 보면 내내 약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우왕좌왕하는 태헌을 보니 괜한 부탁을 했나 싶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니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철저히 거리를 지켰는데, 태헌의 맨살과 닿은 순간 자신의 가장 무른 부분도 드러나고 말았다.

우리가 진작 서로에게 솔직했다면.

우리가 조금씩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연오야, 엎드려 볼래?”

연오는 대답 대신 침대에 배를 대고 길게 엎드렸다. 헐렁한 티셔츠를 걷어 올리는 태헌의 손길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다치기 쉬운 갓난아기를 다루는 듯한 태도에 연오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조심 안 해도 돼. 지금은 안 아파.”

“…….”

“나 유리 아니야.”

태헌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연오는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의 당혹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처음 만난 그때부터 연약한 모습만 잔뜩 보인 게 실수였을까. 무작정 마음을 표현하는 태헌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것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불안하고 힘들 때 시작한 연애는 꼭 비극으로 끝난다던데,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끝난 것일까.

태헌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차가운 연고를 발라 주는 몸짓은 아까보다 한결 자연스러웠다. 어둑하고 묵직한 잡념을 쓱싹쓱싹 닦아내는 것처럼 시원하기도 했다.

“그랬구나.”

착각일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 같았다.

“알았어, 연오야.”

포근한 피로가 밀려왔다. 잠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너도 이제 가……. 그 말을 했나, 못 했나. 태헌이가 알았다고 대답했던 것 같기도 하고 조용히 웃은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이 아니라 흐느낌이었나.

의식이 한 걸음씩 멀어졌다. 아까 침대에 혼자 앉아 곱씹었던 자책도 잠기운이 거두어갔는지 가물가물했다. 남은 것은 등의 상처를 달래 주는 나른한 온기뿐.

그러고 보니 오늘은 태헌과 단둘이 있었는데도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흐리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머리맡에 놓인 연고와 쪽지가 보였다.

[아침에 한 번 더 발라.]

작은 메모지 위를 누르고 있는 연고를 들어 한 번 살펴본 다음 일단 옆으로 치워 놓았다. 어제 엉망인 상태로 방치한 테이블을 먼저 정리해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오는 침대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내부가 아주 깨끗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방과 지저분해진 옷이 널려 있던 테이블과 의자가 말끔해진 건 물론이고, 갑 티슈나 충전기 등 흐트러졌던 물건도 전부 제자리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태헌…….’

피곤했을 텐데 가서 쉬기나 하지.

일단 씻은 다음 연고를 다시 발라야겠다. 화장실로 들어가자 센서등이 켜지며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양치하기 전에 흘끗 거울을 바라본 연오가 순간 멈칫했다. 발진이 많이 가셔서인가, 묘하게 번들거리는 뺨이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잠깐 칫솔을 내려놓고 오른쪽 뺨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끈적한 연고가 반쯤 말라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연고를 바른 게 자정 전이니 아직까지 이 상태일 리 없는데도.

그뿐이 아니었다. 새삼 몸을 점검하니 목덜미부터 발가락 끝까지 시원하고 묵은 통증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잔뜩 긴장한 채로 괴물을 피해 뛰었으니 온몸이 뻐근하거나 몸살기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공들인 마사지라도 받은 듯 전신이 가뿐했다.

연오는 거울 속 자신과 잠깐 눈을 맞추다가 이내 양치질을 시작했다.

이왕 쪽지 쓸 거면 자기가 이것도 저것도 했다고 생색이라도 내지. 하얀 거품 같은 생각이 보글보글 일어나, 연오는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

“진짜 죽겠다. 이러다 쓰러지면 산재 되나?”

투덜거리는 소리가 거리를 넘어 연오에게까지 닿았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만 하나 사서 자리를 잡으려던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멀지 않은 테이블을 곁눈질했다. 에스퍼 신분증을 목에 건 사람들 다섯 정도가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한탄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연구직인데 균열 들어갈 일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몇 주를 이러고 있는데 오작동 원인도 모르겠고 다 헛수고지, 뭐. 하도 시달려서 그런가, 요즘은 아무리 가이딩을 받아도 머리가 안 돌아.”

“넌 원래 균열 물질에 면역 있어서 연구직 한 거지 똑똑하진 않았잖아?”

“아, 피곤한데 시비 걸지 말고. 너도 힘들잖아.”

“전투 쪽 에스퍼만 하겠어. 어제 정태헌 복귀하는 거 보니까 등까지 젖었던데, 화상 때문에 진물 난 거라더라. 너도 이 일 몇 년 더 해봐, 그 꼴 안 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돼.”

“꼰대 새끼.”

대화가 거기까지 흘렀을 때 직원이 때맞춰 주문한 음료를 건네주었다. 연오는 차가운 샌드위치와 따뜻한 음료를 들고 돌아섰다. 빈자리를 찾아 앉는 연오의 표정이 무거웠다.

우연히 들은 대화치고는 구체적이다 싶었는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귀를 기울여 보니 사방이 정태헌 얘기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사러 온 센터 사람들도 전부 정태헌 얘기뿐이었다. 어제의 단독 전투가 같은 에스퍼는 물론 가이드의 이목까지 끌어서이기도 하고 부상이 워낙 심해서이기도 했다. 성격 더럽다는 소문은 자자해도 S급 에스퍼가 다르기는 다르다며 가십거리처럼 태헌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연오의 속을 불편하게 했다.

샌드위치를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이어가는데 문득 아까 들은 대화가 갈고리처럼 마음을 낚아챘다.

‘어제 정태헌 복귀하는 거 보니까 등까지 젖었던데, 화상 때문에 진물 난 거라더라.’

내가 어제 태헌이 등을 제대로 봤던가. 반소매 아래로 보이는 팔과 손의 부상만 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손잡고 가이딩한다고 손만 낫는 건 아니니 등도 회복되었겠지만, 진물이 날 정도로 다쳤었다는데 상처 부위의 호전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게 조금 신경 쓰였다.

가이딩이 덜 되었다 해도 스르르 잠들어버린 자신을 깨워 가이딩을 좀 더 해 달라고 요청할 태헌이 아니었다. 아파서 어깨까지 경직되어 있으면서도 견딜 만하다고 대답하던 그를 보았기에 걱정은 무럭무럭 커져만 갔다.

어제 좀 더 주의 깊게 볼걸. 눈에 보이는 두 팔의 상처가 심해 거기에만 집중했지, 옷에 가려진 부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연락해야겠다.’

연오는 전투적으로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걱정 때문에 식욕이 없었지만 기운 없는 채로 가이딩만 하는 비효율적인 짓은 그만두기로 했으니까. 연오는 그새 미지근하게 식은 차까지 그대로 들이켠 다음 핸드폰을 꺼냈다.

-

연오가 샌드위치를 사던 그때, 태헌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자세로 고단한 아침잠에 빠져 있었다.

있는 대로 힘을 쓴 데다 연오 옆에서 거의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으니 잠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가이딩 덕분에 상처는 거의 다 회복되었지만 잠은 잠이었다. 태헌은 두꺼운 커튼까지 친 채로 연오가 나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자주 연오 꿈을 꾸는지, 연오는 예전에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예전에 그의 꿈에 등장하는 연오는 성격이 어마어마하게 다채로웠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냉정하게 태헌을 버리는 무자비한 모습이기도 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기도 했으며, 고백을 받은 그 여름날처럼 얼이 쑥 빠진 표정으로 태헌만 한참 바라보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억이 돌아온 후에는.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태헌아…….’

‘여기까지 하자, 태헌아.’

그 둘 중 하나였다. 시체보다 못한 안색으로 얕은 숨을 헐떡거리며 고통을 호소하거나, 세상을 버리고 껍데기로 숨어 버릴 듯 지친 얼굴이거나.

꿈에서 태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면 자각몽이 될 듯도 한데 그는 늘 꿈에 속았다. 그는 언제나 연오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고 또 헤어지지 말자고 매달리고 싶었다.

바꿀 수 있는 건 없었지만.

현실처럼.

꿈이 너무 깊어서 태헌은 한쪽에 팽개친 핸드폰 진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진동은 아주 잠깐 끊어졌다가 곧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도 태헌은 우리 이미 헤어진 거 몰랐느냐고 말하는 연오에게 헤어지지 말자고 애원하지도 못하고 죽죽 울기만 하느라 바빴다.

초인종이 연달아 울렸을 때도.

쾅, 쾅!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린 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균열이다. 그렇게 생각한 태헌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핸드폰을 낚아채고 문으로 달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속적으로 훈련받은 에스퍼는 돌발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법을 알았으므로, 못 봐줄 옷차림이 아닌지만 확인하고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아!”

오른손을 반쯤 들고 있던 연오가 뒤로 주저앉았다. 갑자기 열린 문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연오야!”

놀란 태헌이 즉시 연오를 일으켰다. 아직도 꿈을 꾸는 걸까. 반쯤 제정신이 아닌 채로 태헌이 물었다.

“괜찮아? 문에 맞은 거 아니야?”

“아니야. 뒤로 가다가.”

연오는 어색하게 손을 털며 태헌을 바라보았다. 상황 파악이 덜 된 태헌은 문을 두드린 사람이 연오인가 잠시 고민했다. 핸드폰을 쥔 손에 땀이 찼다.

“잤구나.”

연오가 숨을 살짝 들이쉬고 또 깊게 내쉬었다. 그런 다음 커튼을 쳐놓아 어두운 태헌의 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들어가서 얘기 좀 해.”

“……아, 응.”

긴장 때문에 저절로 어깨가 굳었다. 태헌은 연오가 들어올 수 있게 길을 비킨 다음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리고 허둥지둥 불을 켰다. 연오는 바로 환해지는 방 한가운데 서서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뒷모습을 초조하게 보던 태헌이 슬쩍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오로부터 부재중 전화 세 통. 메시지가 하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급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태헌아.”

넘어지면서 손목 같은 곳을 삐지는 않았느냐고, 갑자기 왜 이렇게 급하게 왔느냐고, 방은 어떻게 알았느냐고, 한가득 쌓인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연오가 돌아섰다. 다행히도 화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표정이 밝지도 않았다.

“걱정했어. 전화 안 받아서.”

연오가 날 걱정해? 왜?

걱정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오게 만들었으니 미안해야 마땅한데, 서글픈 희망으로 마음이 죄어들었다. 태헌은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쥐며 변명했다.

“미안해. 늦잠 잤어.”

“그래, 어제 늦게 갔으니까.”

태헌이 움찔했다. 온몸을 골고루 마사지해주고 어질러진 안을 치운 후, 쪽지를 여러 번 고쳐 쓰고, 발진이 덜 가신 곳에 연고를 새로 바르고, 날이 거의 다 밝은 후에야 나온 걸 연오가 알아차렸을까. 성적인 접촉은 물론이고 그 외 나쁜 짓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하지 않았고, 잠든 연오 옆에 누워 보거나 무방비한 얼굴을 몇 시간이고 감상하는 음침한 짓도 안 했는데.

“무슨 일 있어?”

화제를 돌리고자 건넨 질문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티셔츠 좀 벗어 봐.”

“……어?”

“너 온몸을 다쳤었잖아. 다 나았는지 보고 싶어서.”

태헌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연오는 머리를 굴리는 게 훤히 드러나는 표정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나 오늘 가이딩 한 번 더 부탁하려고 했어.”

“그래?”

“응.”

“어제 부족하다고 말하지 그랬어? 다 안 나았다고.”

“에너지는 다 회복됐고, 상처는 너 피곤해 보여서…….”

태헌은 연오가 정말 화를 내기 전에 재빠르게 티셔츠를 벗었다. 등이 계속 쓰라려서 엎드려 잤다는 사실은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랜 운동과 전투로 다듬어진 상체가 조명 아래 전부 드러났다. 왜 진작 말 안 했느냐고 타박하려던 연오는 필사적인 얼굴로 다가오는 태헌을 보고 한숨만 삼켰다. 왜 가이딩 요청 정확히 안 하느냐고 화를 내기엔, 태헌이 너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오늘 다시 부탁하려고 했다는 거짓말에 속아주는 편이 좋을 듯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중요한 건 상처기도 하고.

“침대에 앉아 봐.”

태헌은 어제 연오가 했던 것처럼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면서 살며시 덧붙였다.

“많이 가라앉았어.”

연오가 보기에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진물까지 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과장된 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제의 가이딩 덕인지 붉은 기가 조금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멀쩡한 피부와는 상태가 아주 달라서,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씹었다.

“기다려 봐.”

연오가 침대로 올라가자 매트리스가 살짝 꺼졌다. 태헌은 자기 뒤에 앉은 연오의 존재를 느끼며 숨을 죽였다. 어디를 짚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연오의 손이 태헌의 맨어깨에 닿았다. 그냥 평소처럼 손잡고 해도 된다고 말하려던 그때 에너지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화끈거리고 쓰라리던 상처 부위에 차가운 젤이 얹힌 느낌이었다. 열감이 가시고 지독한 간지러움도 사라졌다. 지속되는 아픔에 계속 굳어 있던 태헌의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미안.”

뒤에서 들린 사과에 태헌이 반쯤 고개를 돌렸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응?”

“미안하다고. 어제 내가 좀 더 신경 써야 했는데.”

잘 훈련된 가이드는 이런 실수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에스퍼를 보자마자 상태를 파악하고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려 주겠지. 적어도 상처를 하룻밤 내내 방치하는 일은 없을 텐데. 가이드로 지낸 지 꽤 오래됐는데 어린애 같은 실수를 한 게 뼈아팠다.

연오의 말을 이해하느라 잠시 침묵하던 태헌이 툭 고개를 떨어뜨렸다.

“네 탓 아니야, 연오야.”

“…….”

“원래 가이드랑 에스퍼랑 얘기하면서 맞춰가는 거야. 근데 내가 기억 잃고 너한테 워낙…… 그렇게 해서, 너는 에스퍼랑 맞춰갈 일반적인 기회를 못 얻은 거고.”

“…….”

“다 나 때문이지.”

기억을 잃었을 때는 에너지를 빼앗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맞추고 어쩌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연오의 손을 잡거나 그와 입술을 겹친 채 갈증이 풀릴 때까지 에너지를 착취하면 끝이었으니까. 연오가 학습한 가이딩 과정에 소통과 협의 단계가 아예 빠진 것도 당연했다.

아마 지금의 연오가 생각하는 좋은 가이드란 투시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 정도가 아닐까. 이야기 속 명의처럼 담당 에스퍼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해 맞춤 가이딩을 해내는 이능력자.

어떤 가이드도, 또 어떤 에스퍼도 그런 일은 해낼 수 없다.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기 어려운 고통도 있기에.

“어제 네가 빨리 도망 못 간 것도 나 때문이고. 내가 널 형편없이 약하게 만들어 놨잖아.”

연오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태헌은 그의 자책을 읽었다. 태헌은 언제나 연오의 어둠, 연오의 감춰진 표정에 민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네가 느끼는 네 부족함은 아마 거의 다 나 때문일 거야.”

잠들 때마다 연오에게 버려지는 순간을 되풀이해 경험하는 주제에, 어쩌자고 연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잘못을 축소해 연오의 마음을 사는 편이 훨씬 유리할 걸 잘 알면서도. 그래도 태헌은 연오가 자기를 찌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날 탓했으면 좋겠어.”

“…….”

“이제 너한테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통증이 거의 다 가셨는데도 연오는 태헌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있었다. 태헌은 정말 간절히, 연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많이 싫을까. 많이 미워졌을까. 이제 와서 이런 말이나 나불거리는 나를 경멸하지는 않을까.

“너는?”

불쑥 돌아온 물음에 비난의 낌새는 없었다. 연오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정태헌, 너는 어떤데.”

질문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태헌 때문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깨에 남았던 연오의 온기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믿을 수 없는 말이 태헌의 목을 잘랐다.

“너는 내 탓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화가 난 어조도 아니고 원망하는 기색도 없었지만 그 물음은 태헌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그는 연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연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몰라 무서웠다.

“네 탓 할 게 뭐가 있는데.”

겨우 되물었지만 돌아온 건 침묵이 전부였다. 태헌은 더 견디지 못하고 돌아앉았다. 그러자마자 체념과 긴장이 동시에 어린 연오의 얼굴을 발견했다. 핏기 없는 입술이 힘겹게 움직였다.

“내가 너 그렇게 아픈 걸 일찍 알았으면 어땠을까. 그래서 네가 반대하든 말든 일찍 수술했으면 나쁜 일도 없지 않았을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

“아니면 나한테 화나서 하는 말이야?”

태헌이 침대에 놓인 연오의 손을 덮었다. 이 여린 손등에 이마를 묻고 고해하며 울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면, 그건 내가 예전에 너한테 했던 말 때문이야. 알아서 수술받아야 했던 거 아니냐고, 진짜 사랑했으면 몰래라도 수술받았을 거라고, 그런 소리 해서.”

내가 너를 원망하니까, 착한 너는 그 말이 옳은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넌 나쁘고 이기적이고 나약한 사람이라고 폭언하자 거부할 생각도 못 하고 납득한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연오를 향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입을 찢어 버릴 텐데.

“나한테 화나서 하는 말이면……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라고 이러는 거면…….”

태헌의 손에 덮인 연오가 움찔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항변이 나오기 전에 태헌이 쓰라리게 웃었다.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어, 연오야.”

내가 네 안에 너무 깊은 자책을 심지 않은 거면 좋겠다. 내가 너를 위축되게 하지 않은 거면 좋겠다. 끊임없이 자기의 마음과 능력을 검열하고 심판하게 된 지금의 네 모습이 내 책임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연오의 손이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침대만 내려다보며 굳어 있던 연오가 결심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태헌은 그가 무슨 원망을 해도 놀라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지만, 연오가 건넨 말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그럼 그런 말에 네 진심은 하나도 없었어?”

“…….”

“기억 잃기 전에도, 정말 한순간도 둔한 날 원망하지 않았어? 네가 그렇게 아픈 걸 내가 왜 몰라주나 어이가 없지는 않았어? 괜히 우울증 있는 애랑 사귀어서 의지도 못 하고 연애를 육아하듯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 없었어?”

“연오야.”

점점 격양되는 연오의 질문이 잘려 나갔다. 말을 끊은 태헌의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걷어차인 개처럼 내내 꼬리를 내리고 있던 그의 눈에 처음으로 분기가 돌았다. 저 말을 한 사람이 연오 본인이 아니었다면, 그는 곧바로 상대의 입을 막았을 것이다.

“너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한 거, 너 유리처럼 취급한 거, 그건 내가 잘못했어.”

“…….”

“근데 네가 우울증 앓은 적 있는 거랑은 상관없는 문제야.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내 눈엔 네가 하얗고 약해 보였고, 빈혈 있는 거 알고 나서는 더 걱정됐어. 괜히 가이드 수술받았다가 몇 년 못 살고 죽을까 봐 무서웠어. 말 안 하고 참으면서 너 대학교나 잘 다니게 하는 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숨긴 거야.”

“…….”

“유치한 거 아는데 그게 내 자부심이고 자랑이었어. 자기 가이드 죽이는 에스퍼들 비웃으면서, 나는 한심한 놈들이랑 달리 너 온전하게 지켰다고 우쭐대면서 견뎠어.”

어쩌면 연오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폭주했다고 가이드 착취하는 미친놈들이랑 달라. 나는 아무리 아파도 연오한테 내색하지 않았고 연오를 수술대로 끌고 가지도 않았어. 연오가 가이드로 자연 각성한다 해도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참아서 연오가 힘들지 않게 할 거야. 그것만큼은 자신 있어. 내 사랑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그러다가 사랑을 잊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통을 감추는 게 어떤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애송이가 되어 연오를 탓했다. 자기가 참아 놓고, 자기가 죽어 놓고.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정태헌.

연오의 ‘태헌이’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이라, 여전히 사랑을 잃고는 무엇도 될 수 없었다.

“나 너 사랑한 거야. 육아 같은 거 한 적 없어.”

연오는 타오르는 태헌의 눈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눈물조차 말려 버린 두 눈은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버려진 황무지보다 더 메마른 눈이 차마 꺼내지 못했던 물음에 전부 답을 주었다.

내가 더는 가이딩 안 하겠다면서 인천으로 가 버린 건 원망 안 해? 기억 잃은 널 두고 센터를 아예 떠나 학교로 간 건? 날 위해 두 번이나 죽은 너를 보자마자 헤어지자는 말부터 꺼낸 건?

태헌은 원망한 적 없다고 할 것이다.

마음의 배수구를 막고 있던 지저분한 찌꺼기들이 서서히 씻겨나갔다.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던 여러 자책이. 네가 태헌이 아픈 거 몰랐잖아. 네가 미리 수술 안 받았잖아. 걔가 아파서 우는 동안 너는 시험 못 볼까 봐 걱정했잖아. 네 탓이 없다고 할 수 있어? 네가 험악한 꼴을 당할 만해서 당한 건 아닐까? 그냥 분노한 정태헌 손에 얌전히 죽어주는 게 맞지 않았을까?

혼자서는 아무리 치우려고 해도 치울 수 없던 생각들이 손쉽게 부서져 하수구로 떠내려간다.

그제야 연오는 태헌이 현실을 바꿀 수도 없는 ‘미안해’라는 말을 왜 그렇게 많이 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모든 것이 연오의 탓이 아님을, 자신이 미안해야 할 일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너 원망 안 해.”

그래서 연오도 말해주고 싶었다. 태헌처럼 한 번도 너를 원망한 적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지금은, 적어도 현재만큼은 정태헌을 원망하지 않았다.

기뻐해야 할 말이었음에도 태헌은 아프게 웃었다.

“알아.”

“…….”

“근데 나는 네가 날 원망하면 좋겠어.”

“…….”

“날 아주, 아주 미워하고, 내가 너한테 그랬던 것처럼 상처입히고, 화풀이하면 좋겠어.”

연오가 자신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서, 태헌은 용서도 받지 못한다. 화나지 않았다고, 너랑 함께하기가 너무 힘든 거라고 말하는 상대에게 재차 빌어보아야 돌아올 건 한숨뿐 아니겠는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연오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짐작하면서도 연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자신을 좋아한다는 정태헌, 혼자 좋아하는 건 괜찮지 않으냐고 매달렸던 정태헌. 끝이 보이지 않는 지지부진한 관계가 태헌 역시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 역시 적잖이 지쳤을 텐데, 그는 탈진한 낯으로도 이 관계를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 서로 많이 아팠으니 태헌 쪽도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텐데 왜 그만은 손을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그의 사랑은 깊고 나의 사랑은 얕았던 것일까.

아니, 아마 그런 문제는 아닐 것이다…….

“갈게.”

태헌은 데려다줄 것처럼 일어나서 따라오더니, 더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처럼 문가에서 멈춰 섰다.

“잘 가, 연오야.”

연오는 간단한 눈인사로 작별하고 돌아섰다. 뒤에 서서 가는 자신을 응시하는 태헌의 존재가 자꾸만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지나간 말이 귓전에 울려댔다.

‘나 너 사랑한 거야.’

이러는 정태헌이야말로 오작동하는 중이 아닌가. 임계점을 넘긴 지 오래인데도 계속해서 사랑을 외치는.

정말 이대로 영원히 고장 난 기계처럼 살 작정인가? 자신이 식판을 내버렸듯, 태헌도 이제는 질긴 애정을 포기해야만…….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자리에 서 있던 태헌은 연오가 돌아볼 줄 몰랐던 사람처럼 움찔하더니 곧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연오는 인사에 답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 걸음을 빨리해 달아났다. 서둘러 걷는 연오의 발뒤꿈치로 질문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나는 이제 어떡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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