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네가 있는 겨울 (12/23)

10장. 네가 있는 겨울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상황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가장 중요한 예측기 오작동 문제는 격무에 지친 연구실 에스퍼들이 파업을 선언하기 직전에야 겨우 해결되었다. 그들은 공중에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균열이 나타나 예측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새 균열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 보완된 예측기를 선보이겠다는 목표까지 밝히자 대중들은 대체로 안도했다.

하지만 연오는 안심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균열에 두 번이나 빨려 들어갔던 그로서는, 올해가 가기까지 남은 두어 달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게다가 올해까지 예측기를 보완하겠다는 말도 어디까지나 ‘목표’가 아닌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길을 걷다 균열에서 죽어야 할지.

태헌을 생각하면 더 답답했다. 예측기 오작동의 이유를 밝혀낸 후 에스퍼들의 전국 출장도 끝나, 내일이면 다시 센터로 돌아간다. 하지만 강원도를 떠나는 것뿐이다. 예측기가 보완될 때까지는 에스퍼도 가이드도 예전처럼 24시간 대기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매일 가이딩 받는 것도 거절하는 그인데 앞으로의 일정이 무리가 되진 않을까.

‘피곤하다.’

인터넷 뉴스를 휙휙 넘겨 보며 심란함을 곱씹다 보니 머리가 아팠다. 그냥 누워서 잘까 싶었는데 시계를 보니 일곱 시 반이었다. 지금 잠들면 자정쯤 깨어나 밤새 뒤척거릴 거라는 생각에 눕기도 싫었다.

일단 환기도 시킬 겸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강원도에 와서 실컷 본 아름다운 산 풍경이 펼쳐졌다.

겨울의 초입이라 찬 바람이 불었지만, 확실히 두통은 조금씩 가셨다. 잠시 밖에 앉아서 알록달록 물들었던 가을 산이 어둠에 잠긴 모습을 바라보니 기분까지 한결 나아졌다. 머릿속 창도 열렸는지 긍정적인 생각이 새 바람처럼 불어왔다.

예측기 오작동 문제도 결국은 해결될 테고, 태헌이도 괜찮을 것이다.

이 겨울이 가기만 하면.

‘나는 이제 어떡할 건데?’

태헌을 뒤에 두고 돌아서며 치밀었던 고민이, 몇 주 내내 애써 잊으려 했던 고민이 불쑥 떠올랐다. 연오는 차갑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그 생각을 곱씹었다. 어차피 마음 가는 대로 해야 할 문제고 아직은 마음이 길을 잃은 상태라 답이 나올 수 없는 걸 잘 알면서도.

휘이이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려댔다. 마른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마구 흔들리는 소음이 연오를 재촉하는 듯했다. 연오는 코끝이 발갛게 물들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더 앉아 있었다.

많이 나아졌는데, 도약할 계기가 없었다. 아직은 그런 막막함이 전부였다.

-

태헌은 일찍부터 호텔 앞에 서서 연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연오 대신 다른 사람만 잔뜩 나타났다.

강원도 출장을 끝내고 서울 센터로 돌아가는 날이라 다들 들떠 있었다. 어제가 마지막 날이었던 만큼 친한 사람끼리 모여 술도 한 잔씩 나누었는지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어젯밤, 연오도 저런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을까 궁금했다.

태헌은 운동화 앞축으로 땅을 툭툭 두드리며 호텔 입구를 주시했다. 그의 기다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오는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고 걸음걸이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연오야.”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연오에게 다가가 캐리어 손잡이를 빼앗았다. 커다란 짐을 질질 끄는 내내 바닥만 보던 연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태헌이 좀 더 빨랐다.

“어디 아파?”

“……조금.”

썩 내키지 않는 투로 중얼거린 연오가 캐리어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태헌은 성큼성큼 걸어 캐리어를 짐칸에 싣고 다시 연오에게로 돌아왔다. 사귀는 것도 아닌데 이럴 필요 없다는 모진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사실 연오는 떠들어 댈 힘도 없는 상태였다.

“회복하고 돌아가면 좋을 텐데.”

“그냥 감기야. 나 혼자 남아서 뭐 해. 가이딩 문제도 있고.”

기운 없는 모습으로도 또렷하게 의견을 밝힌 연오가 버스로 향했다. 태헌은 차마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조용히 보조를 맞췄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자리를 잡자 버스가 출발했다. 태헌은 힘겨운 듯 눈을 감는 연오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짚어 보았다. 연오는 살짝 눈을 떠서 태헌을 보았을 뿐 아무 제지도 하지 않았다.

“해열제 먹었어?”

“응.”

거짓말은 아닌지 이마는 그리 뜨겁지 않았다. 식은땀이 맺힌 얼굴이 무척이나 애처로워 보였을 뿐이다. 태헌은 연오와 어느 정도 거리를 지켜야 하는 현재의 입장도 잊고 초조하게 질문했다.

“언제부터 아팠어?”

“오늘 아침에……. 어제 바람 쐐서 그런가.”

“창문 열고 잤구나.”

“아니야, 잘 닫았는데.”

두런두런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제법 자연스러웠다. 태헌이 연오를 챙기는 상황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했다. 몇 개월 하지 않았다고 어색해질 일은 아니었다. 그 덕에 연오도 거부감 없이 꼬박꼬박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냥 테라스에서 생각 좀 한 거야.”

덧붙은 말에 태헌의 눈가가 어둑하게 죽었다.

연오가 약해진 건 알고 있었다. 기억을 찾은 직후 한주연 본부장에게 따로 묻기도 했고, 연오의 상태를 보며 스스로 알아가기도 했다. 괴물을 피해 달아나는 가이드들 틈에서 홀로 뒤처지는 연오를 보았을 때는 또 얼마나 놀랐던가. 가이드 수술의 후유증이, 또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에너지를 빼앗긴 여파가 크다는 사실은 자주 태헌을 괴롭혔다.

그래도 이렇게 앓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아픈 이유가 밤바람을 조금 쐬어서라니. 겨울의 문턱이라 공기가 차갑기는 했어도, 스물한 살 청년이 끙끙 앓을 정도의 칼바람이 부는 날씨는 아니었다.

‘나 때문에.’

태헌은 겉옷을 벗어 연오에게 덮어 주었다. 연오는 이럴 필요 없다고 중얼거렸지만 태헌은 알아듣지 못한 척했다.

십 분쯤 지나자 연오는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연오는 희미하게 끙끙거렸다. 태헌은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몸을 찢어 놓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몇 번이나 옷을 고쳐 덮어 주었다.

-

연오는 수만 가지 꿈에 시달리다가 버스가 완전히 멈춘 뒤에야 겨우 눈을 떴다. 제대로 회복하지도 못하고 버스에 몇 시간을 묶여 있었던 탓인지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해열제 효과도 서서히 떨어져 으슬으슬 한기까지 치밀었다.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 약을 먹고 따뜻한 이불 안에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부축해 주려는 태헌의 손을 거절했다. 못 걸을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몸살감기인데 연약한 사람처럼 부축까지 받고 싶진 않았다. 어쩔 줄 모르던 태헌은 연오 뒤를 따라가다가 서둘러 짐칸으로 달려갔다.

“연오야, 잠깐만 있어.”

말릴 기력도 없어서 그냥 서 있으니 태헌이 금세 캐리어를 가져왔다. 자기 캐리어와 연오 캐리어를 양손에 나눠 든 그가 힘겨워 보여 연오가 손을 뻗었다. 태헌은 얼른 가기나 하자는 듯 앞장섰다. 뒤에 있는 연오를 몇 번이나 돌아보는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연오는 어질어질한 몸을 가누며 희미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이 빙빙 돌고 자꾸만 숨이 가빴다. 목구멍이 가시에 쓸린 듯 따끔거렸고 날숨조차 너무 뜨겁게 느껴져 괴로웠다. 기숙사까지 무슨 정신으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안까지 따라오는 태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괜찮아…….”

연오는 신발을 벗으며 태헌에게 가도 된다고 손짓해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지듯 눕자,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손이 목덜미로 들어왔다. 한기에 몸서리치는 연오의 귓가에 비는 듯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약 먹어. 응? 약 먹고 자자.”

약은 먹어야지 싶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해열제 두 알이 손바닥에 놓였다. 태헌이 연오의 입술에 차가운 물컵을 대 주었다. 목이 부어서인지 약 두 알을 삼키는 것조차 힘겨워, 연오는 물컵을 반 이상 비워냈다.

“태헌아, 나 진짜 괜찮아.”

연오는 눈에 힘을 주고 억지로 목소리를 키웠다. 태헌처럼 괜찮은 척을 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질 않았다. 얘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아픈 중에도 의문이 들었다.

“너도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야지.”

“응. 나도 갈 거야.”

“그래, 빨리 가…….”

끔찍한 추위에 연오가 몸을 웅크렸다. 이불을 목까지 덮어쓰고 덜덜 떨자 태헌이 커튼을 쳐 주었다. 방이 어두워지며 정적이 찾아왔다.

연오는 조용조용 움직이는 태헌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연오의 캐리어를 한쪽으로 치우고, 찬장을 여닫으며 죽 재료가 있나 확인했다. 진짜 가라니까. 그런 생각과 함께 연오는 다시 잠에 휩쓸렸다.

자다 깨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것 같다. 태헌은 옆에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감각이 축소된 듯 소리도 냄새도 빛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깰 때마다 시간이 궁금했는데, 핸드폰이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찾을 힘도 없었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핸드폰을 들고 죽 같은 걸 주문할 자신이 없었다. 배달 온 걸 받아 식탁에 벌려 놓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지쳐 버렸다.

좀 더 자면 나을까. 어차피 자는 것밖에 할 게 없기도 했다. 아파서 그런가, 무력한 상황이 무척 쓸쓸하게 느껴졌다.

혼자 앓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부모님을 잃은 후 절절히 느꼈다. 태헌과 사귄 후에는 또 금세 잊어버렸지만. 태헌과 24시간 함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가 센터로 출근한 동안 혼자 약을 삼키며 견딘 적도 있는데, 이상하게 그때는 외롭다는 느낌이 없었다. 태헌은 그만큼 연오의 삶을 빈틈없이 채워 주었다.

아픈 연오를 볼 때마다 태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 아픔도 위로받고 싶지는 않았을까. 내가 그의 담담한 얼굴 너머에서 진실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이잉.

머리맡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연오는 긴 숨을 내쉬고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았다. 태헌이일까.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연오를 맞이했다.

[가이드님. 센터 왔다면서요?]

박이정 목소리였다.

“네…….”

[저도 오늘 돌아왔거든요. 가이드들 주려고 특산품 좀 샀는데 기숙사 문에 걸어놓고 갈게요.]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염려 어린 음성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혼자 남았음을 절절하게 느끼다가 이런 전화를 받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전화하길 잘했네. 죽 사 갈게요.]

“죽은 괜찮아요.”

[뭐라도 먹어야죠. 조금이라도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모르겠다. 너무 힘들기도 하고 뭔가 차갑고 시원한 게 먹고 싶기도 하고. 트럭에서 한 봉지씩 파는 겨울 귤 같은 거…….

그런데 박이정 에스퍼한테 이런 거 부탁해도 되나?

열이 거의 떨어지지 않은 듯한 몸을 겨우 가누며 대답을 미루는데, 카드키 대는 소리가 들렸다. 삐리릭.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 발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연오는 핸드폰을 든 상태 그대로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누가 왔나. 카드키는 캐리어에 있었을 테고 거기 손을 댈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곧 침실 문이 열렸다. 연오는 거실 빛을 등지고 선 새까만 인영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가이드님?]

대답하려는 순간 목이 갈라지며 기침이 터졌다. 연오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는 사이, 통화하는 그를 본 태헌이 가까이 다가왔다. 검은 비닐봉지를 연오 머리맡에 내려놓은 그가 부드럽게 핸드폰을 가져갔다. 스치는 손끝이 무척 차가웠다. 밖에서 뭔가를 사 온 모양이었다.

“에스퍼님. 정태헌입니다.”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왁왁대며 패악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태헌은 의외로 깍듯하게 전화를 받았다.

“강연오 가이드 저랑 있어요. 지금 통화할 상태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기침이 겨우 잦아들었다. 연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대화를 마치고 통화를 끝내는 태헌을 지켜보았다. 태헌은 핸드폰을 잘 내려놓은 다음 물을 한 잔 가져다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다음 검은 봉지에서 동그란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거실에서 흘러드는 빛에 의지해 보니 귤이었다.

“귤 사 왔어?”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삼키는 동안 태헌이 귤 하나를 전부 깠다. 탱글탱글하고 차가운 귤을 반으로 쪼개고 다시 한 조각을 떼어 연오의 입에 넣어 주는 몸짓이 정성스러웠다.

“너 열 나면 차가운 과일 먹고 싶어 하잖아. 귤이나 사과 같은 거.”

내가 그랬나. 연오는 턱을 움직여 귤을 씹었다. 새콤하고 단 즙이 입 안 가득 퍼지자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불붙은 듯하던 목구멍도 조금씩 식었다. 태헌은 새로운 조각을 떼어 연오에게 먹여 주었다. 두 조각까지는 잠자코 받아먹던 연오가 눈을 내리깔며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내가 먹을게.”

“…….”

“너도 빨리 가. 피곤하겠다.”

“열 내릴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

태헌이 귤 한 조각을 더 떼어냈다. 그 한 조각은 연오의 펼쳐진 손바닥에 노란 보석처럼 건네졌다. 태헌은 곧바로 손을 거두지 않고 연오의 손끝을, 아주 조심스럽고도 간절하게 붙들었다.

“다른 사람 말고 내가.”

연오가 뿌리칠까 두려워 태헌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연오는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는 그를 보다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 그게.”

“응.”

“너 기억 잃었을 때도 말했지만, 박이정 에스퍼랑 아무 관계도 아니야.”

“…….”

“기분 안 상했으면 좋겠어.”

연오가 붙잡힌 손을 살짝 당겨 잡아 뺐다. 그런 다음 불편한 침묵을 견디듯 손바닥에 놓인 귤을 입으로 가져갔다. 말없이 오물거리는 그를 보는 태헌은 먹먹한 수렁으로 잠겨들었다.

연오가 변명했다. 나한테. 왜?

왜긴 왜야. 한동안 잠잠했던 내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그를 비웃었다. 네가 박이정이랑 ‘뭔가 있어 보이는’ 연오만 보면 의심병 환자처럼 발작을 했으니까 무서워서 저러지. 그때 연오한테 의지할 사람은 박이정밖에 없었는데.

“기분 안 상했어.”

목이 심하게 메어, 태헌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야 끝에 걸린 연오의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내려앉았다. 안도의 기색이 역력한 몸짓이라 태헌은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박이정 에스퍼랑은 저번에 잘 풀었어. 기억 잃었을 때 그 사람 일로 너한테 화낸 거, 그거…… 미안해.”

아픈데 이런 것까지 눈치 보게 해서.

연오 옆에 있고 싶다는 간절함은 여전했지만 지금의 행동이 맞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간호한답시고 붙어 있어 봤자 연오 마음만 더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태헌은 무안한 손을 달래고자 귤 조각을 더 떼어냈다.

“다른 사람 불러 줄까?”

연오는 건네진 귤을 받아 입에 넣었다. 저 입술이 이렇게 무서웠던 적 있나. 연오가 기다렸다는 듯 그게 좋겠다고 대답하면, 이제 아플 때조차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 미칠 것 같았다.

“괜찮아.”

부를 사람 없다는 말로 들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너도 가고, 정태헌.”

연오도 태헌이 있어 주었으면 했다. 혼자 아픈 건 서러우니까, 태헌이 아닌 누구라도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런 일로 태헌을 붙잡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쩔쩔매는 그를 보며 이상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싫었다.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더욱 싫었고.

다시 힘들어져서 침대에 눕자 태헌이 주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오는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가 순간 생각난 게 있어서 눈을 떴다.

“참, 카드키 네가 가지고 있어?”

희미한 빛 속에서도 태헌이 놀라는 게 선명히 보였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는 그의 목울대가 심하게 일렁였다.

“응. 그게, 귤 사 오려고 했는데 다시 들어올 때 너 깨우기가 좀 그래서 내가 가져갔어. 캐리어에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만졌어.”

‘짐을 뒤졌다’는 말을 완곡하게 순화하는 태헌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짐을 챙기고 또 풀던 사이였으니 캐리어에 손을 댄 것 정도로 화가 날 리 없는데, 태헌은 허락받지 못한 영역에 발을 들인 짐승처럼 꼬리를 말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

“잘못했어.”

여기서 더 미움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태헌이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냈다. 귤 봉지 옆에 키를 가지런히 내려놓는 동안에도 무수히 연오의 눈치를 살피면서.

“선 안 넘을게. 며칠 간호하게 해줘도, 너랑 예전으로 돌아갔다거나 네가 나 받아줬다거나, 그런 기대 절대 안 할게. 그냥 간병인 불렀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연오의 이마에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태헌이 사 온 귤은 여전히 머리맡에 있었고, 불필요할 정도로 빌면서 돌려준 카드키도 그 옆에 놓인 채였다. 낮은 한숨에 태헌이 어깨를 움찔한 순간, 이불 속에서 튀어나온 연오의 손이 카드키를 태헌 쪽으로 쓱 밀었다.

“그럼 일단 가지고 있어.”

“아, 응. 고마워.”

태헌은 안심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재빠르게 카드키를 챙겼다. 그러더니 연오가 마음을 바꿀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다른 말을 꺼냈다.

“센터 병원에서 의사 부를 수 있어. 주사 놔 달라고 할게. 괜찮지?”

“응…….”

기운이 없어 대충 대답만 내놓고 눈을 감았다. 태헌이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아파서 그런가, 아니면 꼭 아무것도 모르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런가, 그 손길에 괜히 눈물이 났다.

-

연오를 진찰하러 온 의사는 그의 가이드 수술을 집도했던 사람이었다. 또 태헌에게 연오의 자연 각성 사실을 알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독감이네요.”

의사는 짐작했다는 투로 툭 내뱉고는 곧바로 주사를 준비했다. 신음만 흘리며 잠든 연오 옆에 초조하게 서 있던 태헌은 초조하게 그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주사 맞으면 열은 한두 시간 안에 바로 떨어져요. 며칠 입맛 없거나 울렁거릴 수는 있는데.”

“네.”

“입맛 없다고 해도 옆에서 뭐라도 조금씩 먹여야 해요.”

연오가 옆에 있게 해 줄까. 열이 떨어질 때까지만 있겠다고 빌다시피 해서 허락을 얻어냈으니, 열이 내리고 나면 바로 나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의사는 대답 없는 태헌을 두고 약을 주사했다. 그런 다음 주섬주섬 짐을 챙겨 침실 밖으로 나갔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의사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태헌은 연오를 돌아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안경을 쓴 의사는 식탁 의자에 먼저 자리했다. 태헌이 앉기를 기다리는 그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두 분이 조금 괜찮아진 것 같으니 말씀드리자면.”

“…….”

“강연오 가이드 이제 겨울마다 이럴 겁니다. 날씨 추워지고 면역력 떨어지면 자주 아플 거예요.”

말에 강철로 된 손가락이라도 달린 것일까. 태헌은 숨통이 막히는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목 언저리를 쓸었다.

“솔직히 수명이 길 거라는 말도 못 하겠네요. 몸이 너무 약해졌고, 의학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몰랐던 얘기가 아닌데도 심장이 심하게 펄떡거렸다. 어쩌면 의사에게 듣는 이야기여서일지도 모른다.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정한철 에스퍼한테는 예전에 신세 진 것도 있고 워낙 간절하게 부탁해서 가이드 수술도 해 준 건데……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네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태헌 에스퍼한테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조심시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정한철은 태헌과 연오의 절절한 관계를 알리며 수술을 부탁해 왔다. 태헌이 절대 무리하게 연오의 에너지를 빼앗지 않을 거라고 설득하면서. 불법 수술이라 주저했던 의사도 그 확신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정태헌이 기억을 잃은 채로 깨어날 줄은 누구도 몰랐겠지만.

착잡한 심정으로 말을 맺는데, 태헌이 고개를 들어 의사를 직시했다.

“수술받았어도, 가이딩 무리하게 안 했으면 이렇게는 안 됐겠죠?”

의사의 얇은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괜히 옛정에 넘어가서 가이드 수술 한 번 해줬다가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로서도 개운한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의사를 보내도 되는 왕진에 나선 이유이기도 했다.

“당연하죠. 가이딩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 관리만 잘했으면 훨씬 건강했을 겁니다.”

“…….”

“식사 잘 챙겨주세요.”

의사는 배웅도 없이 떠났다. 태헌은 같은 자리에 꼼짝없이 못 박혀 식탁만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연오 혼자 밥을 먹었을, 또 혼자 정적을 견뎠을 그 자리에서.

처음에는 정한철을 원망했다. 자신이 연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그를 수술대로 보낸 아버지를.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상황은 자신 때문이었다. 가이딩 부족 때문에 그렇게 아팠으면서 핵에서 제대로 죽지도 못한, 질긴 목숨 때문이었다.

‘강연오 가이드 이제 겨울마다 이럴 겁니다.’

용서 못 받는 것도 당연해.

나는 너의 모든 겨울을 빼앗았으니까.

마른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

연오는 날이 다 저문 후에야 눈을 떴다. 열이 내려서인지 주변의 정적이 한층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어쩐지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아직 태헌이 밖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머리맡을 확인해 보니 귤 봉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태헌이 냉장고에 넣어 둔 모양인데, 나가서 귤이라도 몇 개 더 꺼내 먹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연오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그러자마자 귤이 문제가 아니라 샤워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문을 열고 나갔는데 거실에 빛이 하나도 없었다.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빛 없이도 식탁에 우두커니 앉은 인영을 잡아냈다.

태헌이 혼자 앉아 있었다.

조는 걸까 싶었는데 그는 미동도 없이 식탁만 보는 중이었다. 깊은 생각에 빠져 문 열리는 소리도 연오의 발소리도 듣지 못한 듯했다.

불도 안 켜고 왜 저러고 있어. 연오가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거실이 확 밝아지며 태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연오야.”

밝은 빛 아래서 본 태헌의 두 눈이 심하게 짓물러 있었다. 기운 없는 연오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울었냐고 묻는 것도 민망해서 연오는 괜히 목덜미를 쓸며 중얼거렸다.

“나 샤워 좀 하려고.”

허둥지둥 일어난 태헌이 욕실 문을 열어주었다. 문 하나 못 여는 병자 취급하는 태도가 기막혔다. 그런데 태헌은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씻겨 줄까? 샤워기 들 수 있겠어?”

“뭐?”

지금이 농담할 상황은 아니지 않나 하며 욕실로 들어갔는데 태헌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문가에 서 있었다. 기운이 없어 예민한 연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보고 있으려고?”

“아, 아니.”

태헌은 그제야 문을 닫고 사라졌다. 연오는 무슨 일이 있었는데 저러나 의문을 품으며 한 겹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을 틀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으니 개운해서 살 것 같았다. 힘이 없는 건 여전했지만 찝찝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연오야, 옷 밖에 뒀어.”

물소리가 멎기만을 기다렸는지 태헌이 나직하게 알려 왔다. 옷이 어디 있는지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연오는 밖에 준비된 헐렁한 옷을 챙겨 입으며, 이러니까 진짜 옛날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면 안 될 텐데. 열도 내렸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태헌을 보내야겠다.

굳게 결심하고 젖은 머리를 닦으며 거실로 나오자 고소한 죽 냄새가 풍겼다. 하얀 대접에 윤기가 흐르는 야채죽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 사람 몫의 식사를 본 연오가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독감이어서 열 떨어져도 입맛 없을 건데, 뭐라도 먹어야 한대. 간단하게 장 봐서 해봤어. 인스턴트 아니니까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 볼래?”

못 먹겠으니까 그냥 치워 달라고 말하려다가 연오는 억지로 식탁에 앉았다. 식사 거르는 짓은 이제 안 하기로 했고, 요리까지 해 줬는데 안 먹는다고 거절하기도 민망했다.

“너는?”

“나? 난 먹었어.”

안 먹었을 게 뻔했지만 밥 문제로 입씨름을 할 의욕이 없었다. 연오는 차가운 숟가락으로 죽을 몇 번 휘휘 저었다. 아주 조금 떠서 억지로 한 입 먹었는데, 냄새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입맛도 전혀 없었다. 주사가 많이 독했나 생각하며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미안. 진짜 입맛이 없어서. 나중에 내가 데워 먹을게.”

태헌은 몇 숟갈 줄지도 않은 죽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다음 말은 아주 어렵게 나왔다.

“식판에 줘 볼까?”

일어나려던 연오가 굳었다. 태헌은 그 반응의 이유를 몰라 조심조심 말을 이었다.

“너 그렇게 하면 조금씩이라도 더 먹었잖아. 찬장 봤는데 없어서. 혹시 어디 뒀어?”

연오는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들어 괜히 죽을 저었다. 닿아오는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었다.

“버렸어.”

“…….”

“필요 없어서.”

잃어버렸다고 할걸.

조각나는 태헌의 얼굴을 발견한 후에야 낭패감이 일었다.

먹고 싶지도 않은 죽을 괜히 젓는 연오를 보다가 태헌이 간신히 미소 지었다. 필요 없어서. 식판이 필요 없다는 뜻이었겠지만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이 되고 말았지만, 죽 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연오가 이 한심한 꼴을 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랬구나. 미안, 불편한 얘기 하게 했네.”

연오는 식어가는 죽을 억지로 한 번 더 떠먹으며 침묵을 지켰다. 열 내렸으니 그만 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지금의 태헌에게는 차마 그 말을 못 할 것 같았다.

-

강원도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자고, 집에 돌아와서도 밤이 될 때까지 계속 자서일까. 어두워질 때쯤에야 제대로 눈을 뜬 연오는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텔레비전 앞 소파에 기대앉아 시간만 죽이니,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태헌에게 신경이 쏠렸다.

나중에 할 테니까 그냥 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을 것을 알기에, 연오는 세운 무릎에 턱을 올려놓고 잠깐 눈을 감았다. 어색한 분위기에서나마 죽을 몇 술 뜬 덕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태헌이 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눈을 뜬 직후처럼 기운이 없지는 않았다. 덕분에 잠들지 않고 태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연오야.”

태헌이 작은 상을 내려놓았다. 있는 줄도 몰랐던 직사각형 모양의 그릇에 귤 조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죽 별로 안 먹길래. 이거라면 좀 먹을까 싶어서.”

“고마워.”

안 그래도 입이 마르는 느낌이었는데 물은 안 들어가던 차였다. 연오는 작은 포크로 귤을 찍어 먹으며 태헌을 바라보았다.

“넌?”

“난 배불러서.”

아무리 봐도 안 먹은 것 같은데 먹으라고 강요해 봤자 소용없겠지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입맛 없다고 고개만 젓는 자신에게 식판까지 들이밀던 태헌이 떠올랐다. 안 먹는다, 안 먹는다 하는 사람에게 밥 먹이는 것도 참 성가신 일이었을 텐데, 태헌은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정성까지 쏟았을까.

안 먹으면 말라지. 그런 마음으로 물러나려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연오는 귤을 쿡 찍은 포크를 태헌 쪽으로 내밀었다.

“너도 먹어 봐. 달아.”

연오가 자신에게 음식을 권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한 듯 당황한 태헌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기울여 귤을 받아먹었다. 포크에 이나 혀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모습이 정태헌다웠다.

“고마워.”

“네가 가져왔잖아.”

“어…… 그래도.”

귤 한 조각 나눠 먹은 게 뭐라고 분위기가 조금 나긋하게 풀어졌다. 태헌은 담담한 연오를 살피다가 입에 든 귤을 꿀꺽 삼켰다.

“있잖아, 연오야. 생각해 봤는데.”

“응?”

“나 아는 병원 있거든. 그냥 진료만 하는 게 아니라 환자 개인마다 맞춤형으로 관리하는 곳인데, 거기서 지병 고친 사람도 많고 그래. 환자도 워낙 소수만 받아서 예약이 좀 어렵긴 한데 에스퍼 일하면서 알게 된 의사 선생님 있거든. 연락해 봤더니 너 하나 정도는 자리 만들어 보겠다고 하더라고.”

길게, 하지만 천천히 이어지는 말을 연오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소수의 환자만 받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하는 병원이라. 거기까지만 들어도 비용이 짐작이 갔다.

“그냥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하는 것보다는 전문가한테 관리받는 게 좋을 테니까, 같이 한번 가보면 어떨까?”

“…….”

“아까 왕진 왔던 의사가 너 몸 많이 안 좋다고, 앞으로 관리 열심히 해주라고 하더라고.”

연오의 침묵에서 거절을 읽은 것인지 태헌의 말이 점점 구구절절해졌다. 그러나 연오는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의 몸을 방치하지 않고 열심히 챙겨서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좋은 병원이 있다면 도움을 받을 생각도 있었다.

“어딘데? 연락처 주면 내가 전화해 볼게.”

뜻밖의 대답에 놀란 태헌의 눈이 커졌다. 그는 귤 한 조각을 찍어 먹는 연오의 긍정적인 표정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내일 나랑 같이 가자.”

“혼자 가야 비용 얘기도 편하게 하지.”

“비용? 그냥 내가 미리 결제해 둘게.”

달그락, 접시에 포크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아주 작은 분위기 변화에도 민감한 태헌이 곧바로 입을 닫았다. 연오는 반쯤 빈 접시만 내려다보다가 태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뿐이었는데, 태헌은 혼이 난 듯 움츠러들었다.

“너한테 금전적으로 뭐 받는 거 좀 불편해서 그래.”

‘좀 불편해서 그래.’ 그 짧은 표현에 수많은 감정이 녹아 있었다. 거지 운운했던 시간이 태헌을 채찍처럼 후려치고 지나갔다. 자동차 이야기를 하다가 분위기가 싸늘해졌던 순간도 떠올랐다. 바보처럼 또 돈 얘기를 꺼낸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연오가 심란하게 하지 말고 그냥 가라고 할까 봐 무서워졌다.

“그래도 병원은 같이 갈게. 내가 운전해 주고 싶어서 그래. 안 될까?”

“응.”

“…….”

“혼자 갈게. 연락처 줘.”

태헌이 갑자기 왜 병원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갔다. 왕진 왔던 의사가 자신의 건강에 대해 뭔가 전한 모양이었다. 연오도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태헌이 신경 쓰는 건 싫었다. 그렇게 되면 예전과 다를 게 없으니까. 게다가 태헌이 이러기 전에도 혼자 잘하고 있었는데 또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으면 태헌도 물러날 줄 알았는데, 그는 입술만 씹을 뿐 대답이 없었다. 연락처 안 알려줄 거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너 겨울에 매번 이럴 거래.”

“…….”

“날 추워질 때마다 이렇게 아프고 힘들 거래. 지금 겨울이잖아. 혼자 병원 왔다 갔다 하는 거 피곤하니까 같이 가게 해줘. 불편하면 입구까지만 데려다주고 주차장에서 기다릴게.”

그림자에 숨어 있던 질문이 왁 일어나 연오를 덮쳤다. 너는 이제 어떡할 거야. 정태헌이 이러는데 너는 어떡할 거야. 그냥 지금처럼 애매하게 지낼 거야? 가이딩 때문에 평생 얼굴 봐야 할 텐데 죽을 때까지 이럴래?

차라리 태헌이 거리를 유지해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세상 모든 잘못을 짊어진 듯 저자세로 나오지 말고 서로 마음 편하게 잊자고 뻔뻔하게 굴어 주면 좋겠다. 서로 목숨 구해주고 희생했으니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자고 해 줬으면 연오도 그냥 시원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걷어차인 개처럼 꼬리를 말고 곁을 맴도니 연오도 자꾸만 눈길을 주게 됐다. 지금도, 당당한 척 의견을 내세운 주제에 기가 죽어 눈치를 살피는 속내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어째서일까. 사귀는 동안에는 거의 보지 못한, 비굴하기까지 한 모습에 조금 심술이 났다. 불완전하게나마 찬란하던 사랑이 이만큼 망가졌다는 사실을 매번 두 눈으로 목격하게 하는 태헌이 미웠다.

“어차피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 왜 의논했어.”

“…….”

“네 마음대로 해, 그럼.”

욱 치미는 대로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빈 접시와 태헌을 제자리에 두고. 태헌은 뺨이라도 맞은 듯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고 연오를 바라보았고 연오 역시 그의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돌아보고 위로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화장실로 가 간단히 양치를 하고 나온 후에도 태헌은 귤 접시를 들고 풀죽은 낯으로 서 있기만 했다. 연오는 그를 지나쳐 침실로 들어가며 한숨을 참았다. 마냥 조심스러운 태헌을 보고 있으니 화풀이를 한 자신도 실망스러웠다. 화풀이를 하던 시절의 태헌도 이랬을까. 해놓고도 찝찝했을까?

불필요한 생각까지 마구 치밀었다. 들어오지 말라는 뜻으로 침실 문을 꼭 닫고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확인하려던 그때.

똑똑.

단정한 노크가 휴식을 방해했다.

“연오야아…….”

말꼬리를 끌며 들어온 그가 침대 옆에 바짝 붙어 꿇어앉았다.

“차로 좀 가야 하는 곳이라 너 혼자 짐 챙겨서 다니다 보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걱정돼서 그랬어. 강요해서 미안해.”

태헌이 살그머니 연오의 손을 잡아끌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던 차라, 뾰족뾰족 섰던 가시도 누그러졌다. 연오는 그를 뿌리치는 대신 고슴도치 같던 자신의 마음이 다시 순하게 가라앉는 것을 가만히 느껴 보았다.

잠시 이렇게 있으니, 계속되는 태헌의 호의와 정성에 불필요한 답답함이 치밀었던 이유도 분명해졌다.

“네가 잘해줘도 난 아무것도 장담 못 해줘. 다시 사귀자든지 그런 말 안 할 수도 있어. 그냥 너 이용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는데, 계속 이러면 내가 너한테 뭘 돌려줘야 할 것 같고.”

“…….”

“부담스럽잖아.”

욕도 비난도 아닌 짧은 한마디가 태헌에게 대못처럼 박혔다. 태헌은 박힌 못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말은 이미 쑥 빠져나가고 깊고 좁은 구멍만 남아 있었다. 태헌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용해도 돼.”

연오의 손을 붙잡는 동작에 자신감이 없었다. 연오가 멈칫한 사이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나한테 이것저것 시키고 필요할 때마다 불러내 줘. 그러고 나중에 너 괜찮아지면 다른 사람이랑 사귀거나 결혼…… 결혼 같은 거 해도 돼. 네 선택이잖아.”

박이정과 전화하는 걸 보자마자 은근슬쩍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신경 안 쓴다는 말은 잘도 나온다. 각인한 에스퍼가 자기 가이드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을 리 없는데도, 태헌은 해낼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만성 가이딩 부족도 견뎌 봤는데 그 정도야 못 할까 하는 자신감일까.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언급하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렸지만.

“우리 헤어진 거 안 잊어버렸어. 앞으로도 안 잊을게.”

“…….”

“그러니까 병원 내가 데려가게 해주라.”

“…….”

“연오야아.”

태헌은 연오가 그은 선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눈치를 살피더니, 보드라운 손등에 뺨을 살짝 비볐다. 연오가 대번에 뿌리치지 않자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기고 안도했는지 눈꼬리가 처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연오의 손등과 손목을 간지럽혔다. 익숙한 온기가 열이 떨어져 늘어진 몸을 북돋웠다. 갑자기 피가 빨리 돌면서 얼굴이 따끈하게 달아올랐다. 아파서 물러진 걸까, 한 봉지에 얼마 하지도 않는 귤 때문일까, 앓는 소리도 못 내고 꿇어앉은 태헌 때문일까.

“……마음대로 해.”

원치 않던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태헌은 선물이라도 받은 듯 환하게 기뻐했다.

“고마워. 절대 너 부담스럽게 안 할게.”

연오는 모르는 척 손을 뺐다. 부담스럽다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어째서인지 그것만은 조금 후회스러웠다.

-

연오가 잠든 것을 확인한 태헌은 조심스럽게 나갈 준비를 했다. 자기 방으로 가서 제대로 씻고 정리도 조금 할 생각이었다. 정리야 나중에 해도 되고 샤워도 여기서 하면 되지만, 같은 욕실을 쓰면 연오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니까. 부담스럽다는 얘기까지 들은 이상 선 언저리를 얼쩡거릴 수는 없었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바깥쪽 문고리에 뭔가가 걸려 있었다. 세련된 쇼핑백 안에는 색깔 먹인 한지로 포장한 오메기떡이 들어 있었다. 이게 박이정이 아는 가이드들을 위해 사 온 기념품인 모양이다. 제주도 출장이었나. 태헌은 괜히 심란해졌다.

‘전해주기 싫다.’

연오를 챙겨 준 박이정에게 고마운 것과는 별개였다. 태헌은 어느새 떡을 전해주지 않을 이런저런 핑계까지 생각해 내고 있었다. 죽도 잘 못 먹는데 떡은 무슨 떡. 소화 안 되어서 얹히기라도 하면 괜히 더 고생할 텐데. 초콜릿 같은 거라면 또 모르지만.

구차한 핑계를 대다가 태헌은 문득 허탈해졌다. 박이정을 경계하는 자신이 더없이 한심했다.

연오가 다른 사람을 만나도 상관없다는 말은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이기도 했다. 모순적인 감정이었지만 그랬다. 심지어 태헌은 연오가 다른 에스퍼와 만나도 정말 상관없었고, 연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줄 의향도…….

‘아니, 그건 못 하겠다.’

한동안 가이드를 소개해 주려고 애썼던 연오를 떠올리자 속이 깎여나가듯 아팠다. 그때 연오는 도대체 무슨 기분이었을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른 가이드를 소개해 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혼자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자신은 다른 가이드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연오가 싫다고 발광을 했다. 연오를 만나고 사랑하기 전으로 돌아갔으니 애새끼처럼 군 거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어린애 짓 때문에 연오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도저히 태연할 수가 없었다.

원래 더럽던 성격에 고통이 끼얹어지니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자신의 모든 패악을 받아주는 헌신적인 애인까지 있으니 더 막무가내로 굴었다.

태헌은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걸 연오에게 전해주기 싫다고 생각한, 현재의 자신이 가장 애 같아 기가 찼다. 연오 앞에서는 네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도 좋다는 말까지 하며 입을 놀리고, 뒤에서는 이런 궁리나 하다니.

내가 뭔데.

내가 연오한테 뭔데…….

태헌은 안으로 돌아가 쇼핑백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박이정이 선물한 모양 그대로. 어두운 거실을 떠나는 태헌의 눈이 황량했다.

-

아침 일찍 깬 연오가 침실 밖으로 나왔을 때, 태헌은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무릎을 세워 안고 꾸벅꾸벅 졸다가 그대로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푸른 새벽빛이 태헌의 얼굴을 부드럽게 덧칠했다. 연오는 정물처럼 웅크린 그를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내려다보았다.

옷을 갈아입은 걸 보니 새벽에 씻은 모양인데, 피곤하면 소파에서 자든지 아니면 자기 방에서 자고 오지. 난방 때문에 안이 춥지는 않았지만 이불 한 장 없이 이렇게 있는 모습을 보니 속이 편치 않았다.

차라리 깨워서 침실로 들여보낼까 하다가도 그건 내키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서 자고 오라고 해도 말을 안 들을 게 뻔하고, 괜히 아침을 차려 준다 어쩐다 하며 쉬지도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연오는 침실에서 자기 이불 하나만 가져와 태헌에게 덮어 주었다. 곤히 잠들었는지 태헌은 깨지도 않았다. 연오는 잠시 그 곁에 앉아 한때 모든 것을 내던져 사랑했던 사람을 바라보았다.

깊은 잠에 붙들린 얼굴은 좋았던 시절 그대로였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눈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오히려 전보다 더 보기 좋은 듯도 했다. 아마 태헌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만성 통증이 사라졌기 때문 아닐까. 아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그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편안히 잠든 낯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기는 했다.

연오는 태헌을 그대로 두고 욕실로 가서 간단히 씻었다. 간단하게라도 아침을 먹을 생각이라 냉장고를 열려고 했는데, 식탁에 못 보던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태헌이 사 왔나. 그러다가 문득 박이정이 떠올랐다. 특산품을 샀으니 문에 걸어두고 간다고 했던가. 쇼핑백에 제주도 마크가 찍힌 걸 보니 그의 선물이 맞는 듯했다.

연오는 고운 포장지를 뜯어 오메기떡을 조금 맛보았다. 담백한 떡과 달콤한 앙금이 제법 잘 어울렸다. 태헌과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도 몇 번 먹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새 입맛이 바뀐 걸까.

개별 포장된 떡을 한두 개 까먹다 보니 금세 또 입맛이 달아났다. 주사가 독해서인지 간식도 많이 들어가질 않았다. 연오는 박스 뚜껑을 닫은 다음, 물을 마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장에서 컵을 꺼내 정수기 물을 따르는, 별로 크지도 않은 소리에 태헌은 눈을 떴다.

이상하게 포근했다. 태헌은 자기 몸에 덮인 이불을 깨닫고 당황했다. 잠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잠든 것도 놀라운데 가져온 적도 없는 이불까지 덮고 있으니. 게다가 이불에서 묘하게 연오 냄새가 나서 꿈인가 싶었다.

얼른 주방을 확인하니 연오가 거실을 등진 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컵을 내려놓는 몸짓도 식탁에 흩어진 뭔가를 치우는 동작도 조심스러웠다. 비닐 포장지만 바스락거릴 뿐, 연오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나 깰까 봐?’

신경 쓰이게 왜 여기서 자고 있느냐고 성질을 부리고 쫓아내도 괜찮은데. 마음껏 화풀이하고 맺혔던 걸 풀어도 되는데. 그래도 조금도 억울하거나 밉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태헌은 연오가 가져다준 이불에 머리를 묻었다. 두 눈으로 금세 열이 몰렸다.

이러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 어떻게. 집에 아무도 없어서 저녁을 매일 혼자 먹는다는 한마디에 선뜻 손을 내밀어 주던 시절의 모습이, 여전히 지금의 연오 안에 녹아 있는데. 그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던 연약함이 자기 안에 남아 있는데.

태헌은 감상적인 생각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 차려 주려고 했는데 연오가 이미 뭘 먹은 것 같았다. 연오가 군것질로 배를 완전히 채우기 전에 상을 차려 주고 싶었다.

일어나는 기척에 연오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살가운 기척을 만들어내던 연오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깼어?”

“응. 이불 고마워.”

“방에 가서 좀 더 자.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어.”

“너 아침 차려 주려고 했는데.”

“떡 좀 먹었어.”

연오가 박스를 식탁 한쪽으로 치우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박이정이 선물한 오메기떡을 먹은 모양이었다. 유치하게 이런 거나 신경 쓸 때가 아닌 걸 알면서도 공연히 가슴이 철렁했다.

“너도 좀 줘?”

태헌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연오가 다시 박스를 열려고 했다. 태헌이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느낀 감정을 들키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괜찮아. 그럼 나 바로 씻을게. 병원 아침부터 여니까 바로 출발하자.”

“잠 좀 제대로 자. 운전할 건데 졸면 안 되잖아.”

“안 졸게. 너 불편하게 안 해.”

식탁 너머에 선 연오가 멈칫했다. 꺼리는 기색이 태헌을 초조하게 했다. 뭘 실수했을까 고민하는데 잔잔한 말이 흘러들었다.

“불편할까 봐 그런 게 아니라 너 걱정하는 거잖아.”

“걱정 안 해도 돼. 네가 내 걱정을 왜 해.”

애써 웃으며 건넨 말에 연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럼 걱정 안 되게 해.”

말대답하지 말걸. 태헌은 연오의 시선을 피해 흐트러진 이불만 바라보았다. 호되게 혼이 난 아이처럼 조금 서러워진 채로.

기죽은 태헌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연오가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좀 더 자고 출발해도 되잖아, 태헌아.”

걱정 안 되게 하라는 차가운 말보다 애써 부드럽게 어르는 말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너는 내게 정말로 해로운 다정이다. 태헌은 고집부리는 어린애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어렵게 대답했다.

“응. 그럴게.”

태헌은 머뭇머뭇 자리에 앉았다. 자기 방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여기 누울까 고민하다가, 연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그냥 여기 있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연오가 갖다 준 이불을 덮고 딱딱한 바닥에 머리를 댔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노력하면 한 시간 정도는 더 잘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너 뭐 해?”

황당함마저 담긴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몸을 일으키자 연오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연오도 연오 나름대로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피곤해 보여서 더 자라고 했는데 왜 굳이 불편한 바닥에 눕는단 말인가.

“소파에서 자든지 침실로 들어가든지 하지.”

“아.”

질책이 아니었음을 안 태헌이 이불을 꾹 움켜쥐었다.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보이는 얼굴이 낯설었다.

“그래도 되는지 몰라서……. 그럼 소파에 있을게.”

예기치 못한 대답에 연오가 속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담스럽다는 말 같은 건 진짜 하지 말걸. 그게 얼마나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지, 자기 자신을 검열하게 하는지, 행동 범위를 좁히는지 알면서 쉽게 내뱉고 말았다.

연오는 소파에 걸터앉으려는 태헌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는데도 태헌은 저항하지 않고 따라왔다. 연오는 불도 켜지 않은 침실로 태헌을 이끈 다음 그를 침대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 그가 미처 챙기지 못한 이불까지 번쩍 들고 돌아왔다.

“여기서 자. 한두 시간 있다가 깨울게.”

태헌은 낭패한 심정이었다. 이러면 꼭 동정심을 자극해서 침실을 얻어낸 것 같지 않은가. 연오가 부담스럽게 하지 말랬는데. 여기서 펄쩍 뛰면서 거절하면 그게 더 우습겠지.

“응……. 고마워.”

연오가 불 켜진 거실로 나가며 문을 닫았는데,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그 모습이 꼭 질린 사람 같았다. 차곡차곡 실수를 쌓는 자신이 너무 미워서, 또 마음이 자꾸만 타들어 가서, 태헌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꾹 누르고 잠깐 숨을 골라야 했다.

-

태헌이 데려간 병원은 서울에 이런 곳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외진 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센터가 있는 서울 중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만 자리한 외곽이었다. 건물을 단독으로 썼고 정원 조경도 훌륭했지만, 까마득하게 높지는 않았다. 돈 많은 사람들이 장수를 위해 들락거릴 것 같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인데 자본의 위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아 신기했다.

내부도 한산했다. 그래도 3층짜리 건물인데, 크기에 비해 환자가 너무 없지 않은가 싶었다. 그래서인지 일하는 사람들도 여유와 친절이 넘쳤다. 병원 특유의 딱딱하고 사무적인 느낌이 전혀 없어 조금 어색할 지경이었다.

접수는 미리 되어 있었고, 검사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가지 검사를 끝낼 때마다 멍하게 앉아 기다리는 일 없이 바로바로 이동하니 편하고 빨랐다. 모든 순서가 쾌적하게 진행되면서도 급한 느낌이 없어 별로 지치지도 않았다.

연오는 검사를 마치고 잠시 기다리기 위해 1층으로 돌아왔다. 따라다니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한 태헌이 얼른 다가섰다.

“연오야, 목마르지.”

하얀 머그잔에 따뜻한 보리차가 반쯤 차 있었다. 마시기 좋게 식혀 놨다고 말하면서 태헌은 열심히 연오의 기분을 살폈다. 검사 결과는 같이 듣고 싶은데 연오가 허락해 줄지 모르겠다. 기분이 괜찮아 보이면 조심조심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나중에 따로 병원에 전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괜한 짓으로 눈 밖에 나긴 싫었다.

연오는 말없이 컵을 받아 목을 축였다. 병원이 추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따뜻한 걸 마시니 한결 기운이 났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태헌에게 제안할 마음이 생긴 건.

“삼십 분만 기다리면 결과 알려준다는데, 그때 같이 갈래?”

부탁하기도 전에 나온 뜻밖의 제안에 태헌의 눈이 커졌다. 연오가 먼저 이런 말을 해 줄 줄은 몰라서 무작정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연오는 너무 반가워 대답을 잊은 태헌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왠지 혼자 들으려니까 용기가 안 나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에 태헌의 숨이 뚝 멎었다.

용기가 안 나는 게 당연하다. 몸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매일 실감하며 사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연오일 테니까. 몇 년 안에 죽는다고 하면 어쩌나, 평생 시름시름 앓으며 살아야 한다고 하면 어쩌나 겁이 나는 게 당연했다.

태헌은 속없이 기뻐하던 자신을 탓하며 겨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같이 듣자.”

그 뒤로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앉아만 있었다. 연오는 연오 나름대로 생각이 많아 태헌을 챙길 수 없었고, 태헌은 상념에 잠긴 연오에게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저 결과가 최악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진료실로 들어가 중년의 의사와 마주 앉았을 때, 연오보다 태헌이 훨씬 더 긴장한 상태였다.

의사는 머리를 말끔하게 염색하고 무테안경을 쓴 모습이었다.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온화한 입가나 편안한 눈빛에서 관록이 느껴졌다. 그녀는 검사 결과지임이 분명한 종이를 내려놓으며 활짝 웃었다.

“오래 기다리셨네요. 얼른 앉으세요. 태헌 씨도 오랜만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에스퍼로 일하다가 알게 된 병원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의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정도였나? 연오가 의아하게 태헌을 돌아보았다. 태헌은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듯 모호하게 웃더니 연오를 긴 의자에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앉았다.

의사는 연오가 미리 작성한 문진표를 보며 안경을 고쳐 썼다.

“수술을 꽤 여러 번 하셨네요. 세 번?”

“가이드 수술 한 번, 나중에 부작용 때문에 재수술 한 번, 그리고 각성하면서 한 번 했어요. 개복한 건 마지막 수술뿐이고요.”

“그래요, 으음…….”

의사는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침음을 흘리며 문진표에 뭔가를 적었다. 세 번의 수술에 대해 간단히 적어 두는 게 분명했다. 태헌은 땀이 차는 손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연오를 곁눈질했지만, 연오는 의외로 의연하게 침묵을 견뎌냈다.

“일단 지금 상태를 좀 설명해 드리면.”

의사가 결과지를 뒤집어 빈 종이에 그래프를 하나 그렸다. 위로 둥글게 솟았다가 아래로 천천히 떨어지는 모양의 그래프였다.

“보통 사람 건강 상태가 대충 이렇게 변해요. 젊을 때 제일 정력적이고 건강하다가 나이 들면 노화의 영향을 받는 거죠. 그런데 강연오 씨는…….”

의사가 곡선을 하나 더 그렸다. 처음의 그래프와 모양은 똑같은데 위치가 한참 아래 있었다.

“지금 이런 상태인 거죠. 애초에 시작점이 달라져 버렸다고 할까? 또래보다 훨씬 더 빨리 지칠 거고 회복도 느릴 거예요. 아예 체질이 달라졌다고 보면 돼요.”

“네…….”

“가이드 수술이 무섭긴 하네……. 이런 일 별로 없는데.”

의사가 결과지를 거둬들이며 혼잣말을 했다. 태헌은 두 손을 세게 말아쥐며 연오를 바라보았다. 연오의 얼굴도 조금 창백했지만 후회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태헌에게 시선을 돌린 후 괜찮다는 듯 조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순한 눈매를 보고 있으니 목이 콱 막혔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며 원망하고 비난했다면 죽고 싶은 마음이 지금처럼 간절하지는 않았을 텐데.

“독감 걸렸다가 열 떨어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결과 더 안 좋게 나온 것도 있을 거예요. 태헌 씨한테 좀 기다렸다 오라고 말은 했는데 마음이 급했나 봐요, 둘 다.”

“센터 의사는…….”

태헌이 목을 가다듬었다. 연오 앞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었지만 어차피 몸 상태는 연오가 제일 잘 알 테니 숨겨도 의미 없을 성싶었다.

“연오가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그런 말도 하던데,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지 몰라서요.”

“으음.”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안경을 벗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알겠네요. 면역력이 떨어지고 몸이 약해진 사람은 외부 자극에 영향을 심하게 받아요. 평범한 스물한 살이라면 며칠 밤새고 술 마시고 취업 준비한다고 스트레스 받고 울면서 매운 거 먹고…… 이래도 괜찮지만, 연오 씨는 아니라는 거죠. 그랬다간 바로 쓰러지겠는데, 지금 상태면?”

의사가 펜을 내려놓고 두 손을 맞잡아 깍지를 꼈다.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더 진지했다.

“식사, 운동, 스트레스 관리. 지병이 있는 게 아니니 결국 이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저글링을 잘 해야 하는 건데, 사람들이 뻔한 소리 한다고 매번 욕해요. 근데 그 뻔한 일이 제일 하기 어려운 겁니다. 살다 보면 끼니 거르기도 하고 운동도 빼먹고 애인이랑 헤어지기도 하잖아요. 그래도 최대한 일상 유지하면서 이런저런 자극을 좀 줄이는 게 좋아요.”

“네.”

“심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같이 열심히 해 봐요. 우리 병원은 원래 큰 지병은 없는데 몸 약한 사람들 요양시키는 거 잘해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 뒤로는 뻔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매주 한 번씩 와서 전문 물리치료사와 상담할 것, 운동 처방을 해 줄 테니 운동을 빼먹지 말 것, 식단 가이드를 지키고, 직접 해 먹기 어렵다면 병원에 맞춤 배달 서비스가 있으니 신청할 것…….

이 병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상투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심리 상담이며 자택 방문 보호사 서비스에, 원한다면 한의원에 연결해줄 수 있다는 말까지 들었을 때는 태헌이 굳이 여기까지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운이 없을 때는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는 것만으로도 지쳐 버린다. 나중에는 아파서 힘든 것인지 병원을 오가느라 힘든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고, 기력이 떨어지면 병원 방문 자체를 포기하기 쉽다.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끼니를 거르고, 운동도 쉬게 되고, 그러다 보면 건강 관리 자체를 놓아 버린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여기저기 다닐 필요 없이 한곳에서 관리받을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장점이었다. 환자가 넘쳐나지 않는 조용함도 이해가 갔다. 환자가 너무 많으면 집중해서 관리하기 어려우니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수를 조절할 것이다.

‘생각보다 비용이 세겠네.’

상담을 마치고 나오며 연오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다른 병원을 알아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옆에서 하나하나 챙겨주는 사람 없이 살아가려면 번거로움을 최소화해야 한다. 센터 급여가 적은 편은 아니라 비용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너한테 금전적으로 도움받기 싫다는 말까지 들은 바 있는 태헌은, 접수대에서 카드를 긁는 연오 뒤에 얌전히 서 있기만 했다. 손을 어찌나 괴롭혔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잔뜩이었다. 그는 결제를 마치고 돌아서는 연오 옆으로 서둘러 따라붙었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병원 괜찮은 것 같아.”

연오가 차에 타면서 간단히 인사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태헌은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키며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오가 태헌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여기 어떻게 알게 됐어?”

“어…… 그냥 우연히.”

사실은 만성 가이딩 부족 때문에 알아본 병원이었다. 센터에서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해서 민간 병원까지 알아봤었다. 연오를 진찰한 의사도 그때 알게 된 사람이었다. 물론 태헌에게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연오는 명확한 답을 피하는 태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부모님도 건강하시고 아픈 친척도 없고 센터에도 친한 사람이 없던데, 이런 병원을 알게 될 일이 뭐가 있을까. 가이딩 부족 때문에 찾아왔던 병원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파고드는 질문 같아 내키지 않았다.

연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용하고 한산한 외곽 풍경이 차창 너머로 흐르듯 지나갔다.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부자연스러운 듯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풍경을 보던 연오의 눈에 문득 떡집 간판이 걸렸다.

“아, 맞다.”

떡 잘 먹었다고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은 게 뒤늦게 떠올랐다. 막 핸드폰을 꺼내는데 마음이 통하기라도 했는지 박이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연오는 운전에 집중한 태헌을 힐끔 바라본 후 전화를 받았다.

“에스퍼님.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태헌의 신경이 그쪽으로 확 쏠렸다. 태헌은 핸들을 힘주어 잡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 정지 신호였다.

“병원 좀 갔다 왔어요. 아, 감기 때문은 아니고 다른 일 때문에. 못 나갈 정도로 컨디션이 나쁜 건 아니에요. 저녁도 괜찮고, 지금 센터 가고 있어서 차 마셔도 괜찮고…….”

저녁? 차? 약속을 잡는 걸까. 아무렇지도 않게 연오에게 전화해 만날 약속을 잡을 수 있는 박이정이 너무나 부러워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한때는 연오의 여가를 자신이 독점하다시피 하기도 했는데. 연오가 동기들과 어울리다 늦게 들어오면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장난스럽게 투덜거릴 수도 있었는데.

연오가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태헌을 돌아보았다.

“태헌아, 신호.”

“아, 응.”

태헌이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그러는 중에도 연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럼 좀 늦게 점심 먹을까요? 아니에요, 전화로 하기 좀 그렇기도 하고 저도 기분전환도 하고 싶고. 그럼 앞에서 뵐게요.”

통화가 끝났다. 태헌은 핸드폰을 챙기는 연오를 곁눈질하며 무수한 말을 떠올렸다.

박이정이 뭐래? 왜 만나자고 한 거야? 전화로 하기 좀 그런 얘기가 뭔데? 센터로 돌아가는 길에 어디 들러서 점심 먹으려고 했는데. 밥 늦게 먹으면 안 좋아. 저녁에 들어와? 오늘 저녁부터 식단대로 차릴까 싶은데 일찍 와 주면 안 돼? 나 밖에서 기다려도 돼?

“연오야.”

“응.”

“센터 앞에 세워 주면 될까?”

결국 태헌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연오는 그래 주면 고맙고, 하며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번에 박이정은 필요에 의해 연오를 불러냈다. 물론 그 ‘필요’라는 게 그리 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연오에게 부탁할 게 있어 불렀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따뜻한 차를 앞에 놓은 연오 역시 그의 필요를 열심히 충족시켜 주는 중이었다.

“회복 프로그램이 서울 센터에도 있으면 좋을 것 같긴 해요. 한 일주일 경험으로는 괜찮았어요. 누가 끌어내서 밥 먹이고 운동시키고 상담해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 많이 됐고……. 그런데 인천에서 만난 선배는 서울이 균열에 취약해서 센터가 바쁘다고, 회복 프로그램 같은 건 다 형식적일 거라고 하던데요.”

“그래서 제대로 건의해 보려고요. 그러기 전에 경험자 얘기 듣고 싶어서, 괜히 힘든데 불러냈네요.”

“저야 도움 되면 좋죠……. 그런데 왜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원래 생각하고 있었어요.”

연오가 설핏 웃었다. 인천지부에서 들은 박이정의 소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누가 그러던데요. 어떤 사람들은 에스퍼님 보고 ‘가이드 인권운동가’라고 한다고.”

“웃긴 얘기죠. 각인 가이드 죽인 가이드 인권운동가.”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무거운 얘기에 연오가 움찔 놀랐다. 박이정은 그 반응을 본 후에야 아차 싶었는지 얼른 변명했다.

“불편하게 하려고 한 건 아니고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잊으려고 노력한다는 게 괜히 말이 헛나왔네요. 아무튼, 많이들 그렇게 부르는 거 알고 있어요. 에스퍼들이 빈정거리느라 그래요. 혼자 착한 척한다고.”

“네……. 속상하시겠어요.”

“속상한 건 아니고.”

박이정이 긴 손가락으로 자기 몫의 컵을 쓱 매만졌다. 그의 시선이 연오 뒤편의 유리 벽에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가이드가 살아 있는 에스퍼들 보면 질투 나긴 하죠.”

박이정이 싱긋 웃으며 연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장난스러운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래서 정태헌 에스퍼도 질투해요.”

“……네?”

“잘못했다고 빌 수 있잖아요. 아, 진짜 너무 부럽다. 솔직히 마주칠 때마다 배가 아파서, 가이드님이 정태헌 에스퍼한테 엄청 화내고 못되게 굴면 좋겠다니까요. 뺨 때리고 물 뿌릴 거면 나한테 미리 연락해 줘요. 구경 가게.”

처음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동그래졌던 연오가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박이정이 ‘물 뿌릴 거면’이라고 말하며 자기 머그를 휘두르는 시늉을 했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진짜로 웃고 말았다.

“제가 갑자기 물은 왜 뿌려요?”

“물 뿌리면 다행 아닌가? 가이드님은 어려서 모를 텐데, 우리 때는 김치 싸대기 때리고 그랬어요.”

“김치…… 뭐요?”

대체 왜 김치로? 아니, 그보다 어떻게? 배추 포기를 때릴 사람 앞까지 들고 가는 건가? 가벼운 분위기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오를 보며 박이정이 짐짓 엄숙하게 목소리를 꾸몄다.

“나 진지하게 하는 얘긴데. 동영상 찍어 놨다가 질투 날 때마다 보면서 고소해 할 거예요. 김치도 내가 준비해 줄까요?”

갑자기 고무장갑을 낀 두 손으로 시뻘건 김치를 든 채 센터 앞에 선 박이정이 떠올랐다. 그가 전설 속 성검이라도 건네주듯 비장한 얼굴로 자신에게 김치를 내밀 걸 생각하면…….

“그게 뭐예요, 진짜.”

늘 어른스럽고 침착하던 박이정이 요란한 농담을 하자 몇 배는 더 이상하고 웃겼다. 소리를 내어 웃는 연오를 보던 박이정이 턱을 괸 채 빙긋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좀 웃네요.”

“…….”

“웃어야 오래 산대요, 가이드님. 오래 살아요.”

멈칫했던 연오가 고마워요, 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소리를 내어 웃어서인지 마음도 한결 가뿐해졌다. 에스퍼님이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는지 몰랐다고, 되게 어른 같고 진지해 보였는데 의외라고, 입이 트인 듯 재잘거리는 연오를 보며 박이정은 그냥 웃기만 했다.

연오는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가이드가 살아 있는 에스퍼들을 질투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생존한 연오에게 울면서 빌 수 있는 정태헌을 볼 때마다 배가 아프다는 말도 진심이었고.

‘그러니까 말 안 해줘야지.’

정태헌이 계속 유리 벽 너머를 서성이며 연오만 바라봤다는 사실을. 우연인 척 들어올까 고민하면서 입구 근처를 수없이 서성거린 모습을. 웃음을 터뜨린 연오를 보며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죽어야 할지 살아도 좋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눈시울만 붉힌 그를.

절대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정태헌은 지금이 가장 힘들지 몰라도, 박이정은 그의 고통마저 사무치게 부러우니까.

-

박이정과 헤어져 돌아온 연오가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태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복도에 기대서서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태헌. 지루해서 핸드폰이라도 보고 있을 법한데 태헌은 생각에 잠긴 채로 서 있기만 했다.

누굴 기다리는지 뻔해서, 연오는 주머니에 든 카드키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카드키는 차에서 내리면서 태헌에게 돌려받았다. 차마 싫다는 말은 못 하고 키를 돌려주기에 이제 서로 일상으로 돌아가나 했는데. 회색 코트를 입고 선 태헌을 보고 있으니, 그의 일상에는 늘 자신이 포함되어 있구나 싶었다.

“정태헌.”

또렷하게 불린 이름에 태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가오는 연오에게 마주 뛰어가더니, 찬바람에 발갛게 튼 뺨을 보고 속상한 얼굴을 했다. 연오는 그를 지나쳐 카드키를 센서에 댔다. 같이 들어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 분위기를 읽으려 애쓰던 태헌이 일단 현관까지 따라왔다.

“무슨 일 있어?”

“저녁 준비하려고. 너 아직 기운 없잖아.”

태헌은 연오가 쫓아내지 못하도록 얼른 신발을 벗었다. 연오의 겉옷을 받아 들고 핸드폰을 식탁에 대신 놔 주는 행동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태헌과 함께 살 때도 이런 시중까지는 받은 적 없는데. 당황한 연오와 달리 태헌의 움직임은 잽쌌다.

간단히 손을 씻은 그는 곧바로 전에 사 왔던 재료로 요리를 시작했다. 곧 소고기를 참기름에 달달 볶는 냄새가 풍겼다. 무를 써는 소리도 경쾌하게 주방을 채웠다. 엉겁결에 그에게 주방을 맡기게 된 연오는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식탁 앞에 앉았다.

자기 뒤에 앉은 연오를 알아차린 태헌이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나가라는 말이 돌아오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텔레비전 보면서 기다려도 되는데…….”

“됐어.”

“얼른 할게.”

“천천히 해, 태헌아.”

부드러운 말이 무색하게 아까보다 움직임이 빨라진 태헌을 보며 연오는 잠잠히 생각에 잠겼다.

열 떨어질 때까지만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더니, 이렇게 은근슬쩍 계속 붙어 있을 작정일까. 하지만 태헌만 탓할 수는 없다. 태헌의 속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자신은 또 어떻고. 쩔쩔매는 정태헌을 알면서도 편하게 있으라는 말 한마디 안 해주는 자신은.

설마 은연중에 자신에게 이 정도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상념이 이어지는 사이 상이 차려졌다. 쪽파를 띄운 소고기뭇국에 모양 좋은 계란말이, 고춧가루를 뿌려 무친 콩나물, 가지런히 썬 배추김치…….

시간을 확인하니 좀 이른 저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연오는 자기 앞에 적당한 양의 밥이 놓인 후에야 그걸 알아차렸다.

“넌?”

태헌 앞에는 숟가락조차 없었다.

“아까 점심 먹은 게 얹혔나 봐.”

사실 점심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박이정과 마주 앉아 웃는 연오를 바라보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다.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뻔한 핑계를 댔는데, 말끄러미 태헌을 보던 연오가 툭 내뱉었다.

“그래? 그럼 바로 가려고?”

“……생각해 보니까 그래도 저녁은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태헌은 어설프게 웃으며 얼른 제 몫의 밥을 떴다.

둘은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박이정과 웃으며 대화하고 와서 그런지 이 침묵이 유난히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전에는 태헌과 끊임없이 수다를 떨 때나 편안한 정적 속에 각자 앉아 있을 때나 어색하지 않았는데.

밥그릇이 절반쯤 비었을 때, 연오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서비스 신청하면 병원에서 식단대로 배달해 준다더라. 어플도 있어서, 안 먹는 날은 그냥 취소하면 된대.”

태헌이 숟가락을 꼭 쥐었다. 국을 떠먹는 연오를 보던 그가 어렵게 중얼거렸다.

“병원 밥 별로 맛없다던데…….”

“입원했을 때 먹는 그런 거 아니래. 그냥 일반 도시락 같은 건데, 챙겨 먹기 귀찮거나 바쁜 사람들 있으니까 해 주는 거라고 하던데.”

“그냥 내가 해 주는 게 더 입에 맞지 않을까?”

연오가 조금 웃었다. 박이정과 있을 때처럼 편안해 보이진 않았지만, 미소는 미소였다. 태헌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으려던 순간.

연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거야 그렇겠지. 그런데 이제 필요 없어, 태헌아.”

먹은 게 고스란히 얹힌 것 같았다. 상을 차릴 필요가 없다는 뜻임을 잘 알면서도, 자기가 필요 없다는 말 같았다.

물론 연오에게 태헌이 필요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괜찮은 병원도 알아봤고 거기서 검진부터 식단까지 전부 봐 준다니 간병인 같은 건 없어도 된다. 무엇보다도 연오는 극진한 돌봄이 필요한 지병을 앓는 게 아니었다. 명약이나 간병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필요한 상태라 굳이 태헌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셈이었다.

“운전하기 힘들 것 같은 날에 신청하면 차도 보내 준대. 서비스가 다양해서 편하더라. 네가 왜 추천했는지 알겠어.”

“…….”

“며칠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열도 내리고 한결 나아졌어.”

“연오야.”

태헌이 두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려 맞잡았다. 속눈썹이 연약하게 떨렸다.

“혹시 같이 지내는 동안 내가 많이 잘못했어?”

며칠이나 같이 지냈다고 많이 잘못하고 말고 할 게 있을까. 그러나 태헌은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부담스럽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재료도 남았고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랬어. 밖에서 별로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어. 연락할까 했는데 네가 다른 사람이랑 있으니까 방해될까 봐.”

저녁 준비야 태헌이 고생했고 밖에서 기다린 것도 그의 수고지 연오의 수고는 아니었다. 박이정과 있는 줄 알고 연락하지 않은 배려도 고마울 일이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 태헌은 숨 쉬는 것마저 빌 것 같았다.

연오는 이런 태헌이 싫었다.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 자신에게 잘못했으니, 또 두 번이나 희생해 트라우마를 자극했으니 뭐든 엎드려 빌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서로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모양새가 된 관계가 무섭고 만사에 지쳐 헤어지자고 한 거지, 태헌을 증오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단순히 ‘부담스럽다’고 표현했던 감정이 점점 구체화되었다. 태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최종적인 결정을 강요받는 것 같고,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라 불편했다. 실제로 그에게 몇 번 화풀이하듯 말하기도 하지 않았나. 태헌과 점점 더 깊이 엮이는 느낌도 연오를 불안하게 했다.

변하지 않은, 또한 변하지 않을 태헌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애 같은 맨살을 보이면서도 어떤 부분만은 단단하고 헌신적인 어른인 그가.

“네가 뭐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 이런 식으로 이용하기 싫어서 그래. 네가 내내 붙어 있을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태헌은 울지도 빌지도 못하고 연오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 연오가 유리처럼 연약하지 않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근 몇 년을 절절하게 함께한 관계를 이렇게 종식 시킬 수 있는 유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러니까 연오는 이제 태헌 없이도 괜찮은 것이다. 원래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고.

이 관계에서 진짜 유리였던 사람은 정태헌 자신이었을지도.

완벽하다 믿은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 모든 헌신을 바치고 고통을 감추고 끝내는 죽음까지 택했던. 깨져버린 관계를 견디지 못해 비겁하게 각인까지 내세우며 못 헤어지겠다고 우겼던. 조금씩 좁아지는 듯한 거리에 가슴이 무너지도록 안도하며 종종걸음을 쳤던.

그토록 연약한 정태헌.

“나한테 그만 미안해해도 돼. 네가 안 아프고 잘 살면 나도 그걸로 됐어.”

“…….”

“너도 그렇잖아.”

그래야만 한다는 말로 들려서 태헌은 아니라고 고개를 젓지도 못했다. 차라리 전처럼 울면서 빌어 볼까. 아니면 모르는 척 애교스럽게 졸라서 상황을 모면해 볼까. 그러나 연오는 지금 그런 게 싫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태헌아?”

처음으로 네가 나한테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부담스럽고 싫다는 말로 쫓아내지.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밉기만 하다고 해서 마음을 난도질해 버리지. 이런 순간까지 상냥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응……. 나도 그래, 연오야.”

이런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밖에 할 수 없는데.

둘은 마주 앉아서 밥을 끝까지 먹었다. 태헌은 국 한 모금 남기지 않았다. 왠지 연오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아서, 돌아가 다 토하는 한이 있어도 조금이라도 더 앉아 있고 싶었다. 더디게 그릇을 비우는 태헌을 연오는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정성 어린 인사처럼.

연오를 두고 혼자 떠나며, 태헌은 자기 발끝만 바라보았다. 더는 네가 필요 없다고 선언하던 연오의 음성이 겨울바람보다 차갑게 주위를 맴돌았다. 그 바람은 태헌의 세계에 있는 수많은 창을 하나씩 열어젖혔다.

이제 연오는 너 없어도 괜찮을 거야.

죽고 싶지 않아?

죽이고 싶지 않아?

메아리치는 음성을 뿌리치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태헌은 창가에 무너졌다. 유리 너머로 화려한 고독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혼자 남으면 엉엉 울 것만 같았는데 그냥 얹힌 듯한 느낌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시원히 토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태헌은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자 어둠이 밀려왔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

그 뒤로 일주일이 더 흘렀지만 태헌은 죽지 못했다. 연오가 준 선물이나 다름없는 목숨을 길바닥에 쓰레기처럼 내버릴 수는 없었다. 태헌은 아무리 굳게 다짐해도 자꾸만 열리는 창을 꼭꼭 걸어 잠그며 연오만 생각했다. 그러면 하루가 겨우 견디어졌다.

동작구에 대형 균열이 예측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균열을 헤매고 다니다 보면 잡생각도 사라질 것이다.

태헌은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가깝게 붙어 지냈던 며칠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둘은 다시 단절되었다. 그래도 가이딩 때문이라면 연오에게 연락할 수 있다.

태헌은 바람이 열어젖힌 창을 닫고 거울을 외면한 다음 나갈 준비를 했다.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여겼는데, 동작구로 이동할 차에서 박이정과 마주치자마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유리벽 너머에서 연오를 웃게 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자격 없는 미움이 치솟고, 자기 가이드를 죽이고도 살아 있는 처지를 생각하면 마치 선배 같은, 박이정.

“안녕하세요.”

박이정이 먼저 인사를 챙겼다. 태헌도 겨우 마주 인사한 후 그의 옆에 앉았다.

S급 둘만 탄 차가 센터 앞을 벗어나며 혼잡한 도로로 진입했다. 예측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탓에 공간이동 에스퍼가 바빠서 가까운 곳은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고, 묻지도 않은 설명을 늘어놓는 기사에게 의례적인 대답을 돌려준 이는 박이정뿐이었다.

정적이 흐르는 차에서 태헌은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연오랑 연락해요?”

박이정은 왜 안 물어보나 했다는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죠. 어제도 밥 같이 먹었는데. 아픈 데 없는 것 같고, 여전히 정태헌 에스퍼 얘긴 안 하고.”

아픈 데라는 걸 뻔히 알 텐데 찌르는 모습이 얄미웠다. 그러나 문득 본 박이정의 얼굴에는 빈정거리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정태헌을 조금 염려하는 것 같았다.

“별로 안 살고 싶죠? 그래도 살아야 돼요.”

무방비하게 있다가 정곡을 찔린 태헌이 눈을 치떴다. 박이정에 대한 고마움과는 별개로 그에게 이런 참견까지 허락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때 각인 가이드나 죽이는 멍청한 새끼라고 비웃었던 박이정으로부터 삶의 의지에 대한 설교나 듣고 있는 자기 처지가 제일 한심했다.

“안 죽어요.”

“균열에서 어쩌다, 우연히 죽을 생각도 하지 말고.”

그 말에는 왜 약점을 들킨 듯 발끈할 수밖에 없었을까. 태헌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자기가 각인 가이드 죽이고 그런 생각 했다고 해서 남도 똑같을 거라고 착각하지 말죠.”

박이정은 불쾌한 기색도 없이 웃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태헌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장난스러웠다.

“성질 어디 안 가네.”

“…….”

“강연오 가이드한테 일러야지.”

농담인 걸 뻔히 알 텐데도 태헌의 표정이 무너졌다. 조금 참견했다고 이빨을 보이기에 놀려 준 건데 태헌이 너무 절박한 얼굴을 해서, 박이정은 제풀에 놀라고 말았다.

“그냥 해본 소리예요.”

태헌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균열 발생이 예측된 곳, 검은 밤의 한강이 뱀처럼 풍경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이정은 자기 턱을 살짝 쓸며 강 대신 태헌의 위태로운 옆얼굴을 주시했다.

상태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균열에서 괜찮으려나.

-

박이정의 걱정이 무색하게 태헌은 균열에서 제 몫 이상을 해냈다. 가이딩 부족에 시달리지 않는 S급 에스퍼가 두 명이나 있으니 지원 인력도 편안하게 균열 깊숙한 곳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데이터 수집을 위해 핵 파괴를 미룰 이유도 없어서, 강원도에서처럼 괴물이 밖으로 튀어 나가는 불상사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정태헌 에스퍼, 저쪽 맡아요!”

핵으로 진입하기 직전, 독이 찬 늪에서 괴물 두 마리가 나타났다. 박이정은 자신을 보조하는 A급 에스퍼들을 데리고 왼쪽을 맡았고 정태헌은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거대한 두꺼비였다. 새빨간 몸통에 검은 점이 박힌, 커다란 눈과 둔하고 멍청한 표정이 조금도 귀엽지 않은 괴물. 주의해야 할 점은 길고 빠른 혀. 위협적인 혀에 파리처럼 말려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면 무척 조심해야 했다.

드문 괴물은 아니어서 A급 에스퍼들이 알아서 대형을 갖췄다. 목표물을 정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움직이며 괴물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미끼로 쓸 폭탄을 준비했다. 폭사를 노리는 작전으로, 폭탄을 안고 함께 괴물의 입으로 딸려갈 미끼는 당연히 정태헌이었다. S급 정도는 되어야 중간에 혀를 찢고 폭탄을 벌어진 입으로 던져넣은 후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여기요!”

태헌은 급하게 건네진 폭탄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연구실에서 개발된 이 커다란 폭탄은 폭발하는 순간 수만 개의 파편을 흩뿌리는 구조로, 웬만한 에스퍼도 폭발에 휘말리면 즉사할 확률이 높았다. 아마 충분히 고통스러운 죽음이리라. 태헌은 보석처럼 빛나는 술잔이라도 받아든 듯 아찔해졌다.

나는 왜 지금 이런 거나 생각하고 있지?

분명 다급한 상황임을 아는데 이상하게 초연했다. 현재 있는 공간이 균열임을 증명하는 악취가 풍겨오고, 무리해서 힘을 쓴 몸이 저리고, 저쪽에서는 박이정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태헌은 자기만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멍하게 괴물에게 뛰어들었다.

목표물을 찾던 까만 눈이 태헌에게 정지하듯 고정되었다. 화살처럼 튀어나온 혀가 하반신을 감자 끈적한 침과 무릎뼈가 박살 날 듯한 압박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제 벌어진 입으로 폭탄을 던진 후 재빠르게 혀를 끊으면…….

못 죽겠지. 차라리 폭탄과 함께 삼켜질까. 그러면 죽여 버릴 수 있을 텐데.

누구를. 나를? 아니면 괴물을?

생각은 찰나에 흘러갔다.

그러나 결국 태헌은 목숨을 버리지 못했다. 그의 생명은 이제 연오의 선물이었으므로. 슬픔이 차고 넘치는 연오의 세상에 또 한 컵의 눈물을 부을 수는 없으므로.

정신을 붙든 태헌이 이능을 끌어올리려던 그 순간.

“정태헌!”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누군가 폭탄을 빼앗았다. 자기 쪽 괴물을 처리하고 달려온 박이정이었다. 그는 태헌의 어깨를 밟고 가볍게 도약해 폭탄을 내던졌다. 괴물의 혀를 끊어낸 쪽은 태헌 본인이었다. 괴물의 입이 닫힌 순간 폭탄이 터졌다.

태헌과 박이정이 동시에 보호막을 형성해 모두를 감쌌다. 반투명한 막에,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이 물감처럼 흩뿌려졌다. 괴물의 몸이 빵빵하게 부풀었다가 곧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마침내 찾아온 고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A급 에스퍼들이 뒤늦게 웅성거렸다.

“뭐야, 정태헌 에스퍼 왜 방금 안 움직였어?”

상황을 짐작한 박이정만이 차가운 얼굴로 태헌을 일별한 후 먼저 핵으로 진입했다. 태헌도 일단 서둘러 박이정의 뒤를 따라 달렸다.

머잖아 핵이 파괴되고 균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투명하게 옅어지는 공간에 우뚝 서서, 박이정은 A급 에스퍼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부상자를 확인했다. 태헌도 습관처럼 그 일을 해냈다.

균열이 완전히 소멸되어 두 발이 땅에 닿았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강물 비린내. 뺨과 귓불을 할퀴는 차가운 강바람.

기다리던 센터 직원과 여러 가이드가 에스퍼들에게 달려왔다. 균열이 컸던 것치곤 부상자가 많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한동안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분주한 소요 속에서 박이정이 태헌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정신 나갔어요?”

그답지 않게 거친 언사였다. 그러나 태헌은 가이드들이 몰려 북적거리는 저편을 바라보며 성의 없는 대답을 뱉을 뿐이었다.

“뭐가요.”

“올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아까는 진짜 죽을 뻔했잖아요. 이제 가이드 있어서 균열이 만만합니까?”

“…….”

가이드들 틈에 연오가 없는 걸 확인한 태헌이 마침내 박이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세가 제법 흉흉했다. 위기의 상황에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보낼 만한 눈빛은 절대 아니었다. 그 거친 얼굴과 마주한 박이정이 헛웃음을 쳤다.

“아니면 죽으려고?”

“무슨 상관인데요.”

초연한 어조에 박이정의 가슴에도 확 열이 뭉쳤다. 그는 태헌의 팔을 움켜쥐며 강하게 소리쳤다.

“강연오 가이드 걱정돼서 그래요!”

“그래서 균열에서 우연히 죽으려고 한 거잖아!”

태헌의 목소리도 맞붙듯 높아졌다. 머리가 펄펄 끓는 듯 뜨거웠다. 힘을 쓴 직후라서일까. 아니면 스스로 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구출된 자신이 한심해서일까. 가이드들 틈에서 연오의 얼굴을 찾던 모습이 증오스러워서일까. 못 죽어서 아쉬운가. 좋은 기회였는데 머뭇거린 자신이 미운가. 그도 아니면 연오를 입에 올리며 참견하는 박이정에 대한 유치한 질투인가.

거센 고함에 박이정의 얼굴이 멍하게 변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한 듯 뻣뻣하게 굳은 채, 사멸할 듯 타오르는 태헌을 보고만 있었다.

“앞으로는 내가 죽든 살든 내버려 둬요. 오늘처럼 참견하지 말라고요. 내가 왜 날 죽이고 싶은지 당신은 알 거 아니야!”

어차피 죽지도 못하는데. 연오가 살아 있는 한 나도 영원히 이 관 같은 삶에 갇혀 있어야 하는데. 당신도 알 거면서. 누구보다도 잘 알 거면서!

바로 그때.

정지했던 박이정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시선의 방향 자체가 바뀌는 명확한 변화였다. 곧 박이정의 입이 살짝 벌어졌고, 부드러운 얼굴이 낭패감에 젖었다.

“……가이드님.”

태헌이 찬물을 맞은 듯 얼어붙었다.

등허리와 목덜미를 타고 확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뒤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맞붙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틀어 돌아섰을 때.

숨까지 멈춘 연오와 눈이 마주쳤다.

“연오야.”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연오가 뒷걸음질을 쳤다. 가이딩을 한다, 담당 에스퍼를 찾는다 하며 정신없는 가이드들 사이로 멀어져 갔다. 태헌은 너무 놀라 잠깐 비틀거렸다가 급히 연오를 뒤따랐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한 연오 위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미리 대피해 아무도 없는, 이질적일 정도로 텅 빈 한강변을 따라 달리는 연오가 신기루처럼 위태로웠다.

태헌은 금세 연오에게 다다랐다. 그러나 보행로를 따라 달리던 연오는 태헌이 붙잡기도 전에 고꾸라졌다. 그러더니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두 손을 댄 채 숨 가쁜 기침을 쏟아냈다. 거대한 다리 그림자가 연오의 등을 덮쳤다.

“연오야!”

토악질에 가까운 기침 소리가 태헌을 후려쳤다. 태헌은 서둘러 달려 연오를 바닥에서 일으켰다. 그러나 연오가 거친 몸짓으로 그를 밀쳤다. 손톱 끝이 태헌의 뺨을 날카롭게 스쳤다.

연오가 이렇게까지 그를 강하게 거부한 적은 없었다. 태헌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연오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채 곧 죽을 듯 기침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끝에야 연오의 숨이 안정되었다. 격동하는 감정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뺨이 태헌의 속을 찢어놓았다. 그런 태헌을 직시하는 연오의 눈은 한밤의 한강처럼 글썽였다. 뾰족한 별이 그의 두 눈에 박혀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너.”

“…….”

“정태헌 너…….”

호흡을 고르며 제대로 된 말을 꺼내려 해도 생각이 실타래처럼 엉켜 엉망이었다. 자꾸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연오는 잠시 태헌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원 나온 가이드들 틈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강바람 차가울 텐데 내 몸은 내가 챙겨야지, 야무진 생각으로 패딩에 목도리에 핫팩까지 가지고 나와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저번처럼 괴물이 튀어나올 위험도 없다니 안심이었다. 옆자리 가이드가 보온병에 믹스 커피를 타 왔기에 사양하지 않고 조금 얻어 마시기도 했다. 따뜻한 커피가 든 종이컵을 조금 잘근거리며, 연오는 태헌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전에는 태헌이 대형 균열에 간다고 하면 걱정하며 종종거리는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다른 가이드들 틈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 태헌과 헤어진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신선한 공기 같은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균열에서 우연히 죽으려고 한 거잖아!’

눈을 들자 태헌이 사형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서 있다.

개새끼.

입에도 담아본 적 없는 욕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들끓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엉망이던 태헌을 처음 본 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망설임도 없이 수술대에 오르던 그때도. 정태헌이 정말 자신을 죽일 것 같았는데도 손을 내어 준 두 차례의 폭주 가이딩도. 제약 동의서 두 장을 앞에 놓고 한 장에는 자기 이름을, 다른 한 장에는 태헌의 이름을 또박또박 썼던 그 날도. 균열에서 두 번째로 으깨진 태헌을 본 순간의, 정신이 나갈 것만 같던 절망과 공포도.

강바람이 눈을 말려 버렸는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아니, 이건 강바람 때문이 아니다. 연오는 지금 슬프지 않았다. 마음을 다치지도 않았다.

그를 가득 채운 건 이제껏 태헌을 보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극렬한 분노였다. 굶주린 짐승처럼 사나운 감정이 그의 온몸을 지배하려 들었다. 광폭한 감정에 가장 먼저 굴복한 것은 입술이었다.

“기껏 살려 놨더니 왜 죽는다고 해. 죽는 게 우스워? 빨리 죽고 싶고 그래?”

“아니야!”

태헌이 급히 다가섰다. 오해를 풀려는 그의 등을 강한 바람이 떠밀었다.

“내가 너 아프게 만든 게 속상해서 그랬어. 근데 죽으려고 한 건 아니야. 진짜 아니야. 박이정이 오해해서…….”

“오해? 무슨 오해? 죽고 싶다며. 죽고 싶은 이유를 박이정 에스퍼는 알 거라며? 헤어지느니 죽겠다는 거야?”

마구 뱉은 말을 연오가 이렇게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다. 태헌이 어쩔 줄 몰라 멈춘 사이 연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균열에서 죽으려고 했어?”

“…….”

“대답하라고, 정태헌. 한순간이라도 자살 생각 했냐고 물어보잖아.”

연오는 생기가 가신 태헌의 얼굴에서 미리 대답을 읽었다. 태헌은 연오의 입술이 비틀린 후에야 정신을 차렸으나 연오가 먼저였다.

“진짜 실망이다.”

말의 창이 태헌의 입을 지나 배 속까지 내리꽂혔다. 태헌은 입을 다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속절없이 연오만 바라보았다.

“너는 죽는 게 장난이야? 몇 번 죽을 뻔하니까 이제 다 우스워? 죽어가는 널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내가 어떤 마음으로 수술…….”

말하다 목이 메어 시선을 틀어야 했다. 시커먼 강물이 일렁이며 다가왔다. 먼 곳에 있는 센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마치 다른 세상의 것처럼 아득했다. 혼자 남은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계절처럼 들이닥쳤다.

“나는 내 편 하나 없는 세상에서도 네가 준 목숨 지키면서 견뎠는데.”

“…….”

“근데 너는.”

“…….”

“내가 널 정말 잘못 봤네, 태헌아.”

연오가 두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얼어붙은 태헌의 모습도 그다지 동정심을 자극하진 못했다. 지금은 그의 마음을 넝마가 되도록 찢어놔도 울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오는 잔인하게 씹어뱉었다.

“너 진짜 형편없어.”

태헌에게 박혔던 창이 쑥 뽑혔다. 너덜너덜해진 입 안과 목구멍으로 바람이 들었다. 냉혹한 말에 이성이 마비된 것 같은데, 떨면서도 제자리에 버티고 선 연오가 너무 무서운데, 그런데도 태헌은 연오에게 다가갔다.

난 기억 찾았을 때부터 죽고 싶었어. 거울을 볼 때마다 죽어야 하나 고민돼서 이제는 거울도 안 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도 혐오스러워.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를 증오할 수밖에 없어서 세상 어딜 가든 지옥이야. 그래서 잠깐 흔들렸는데, 그래도 금방 정신 차리고 마음 다잡았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자살하려고 한 거 아니야.

“잘못했어…….”

솟구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태헌이 빌었다.

그는 겨울 공기 속에서 얼고 있는 연오의 두 손을 붙들었다. 부르튼 피부가 태헌의 손에서 녹았다. 두 무릎이 꺾이며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태헌이 연오의 손등에 이마를 대자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주 잠깐 죽음을 갈구했을 뿐이라는 변명이 무슨 소용일까. 자신은 연오가 생명을 깎아 가며 선물한 고통 없는 생을 내버리려 했다. 하루라도, 일 초라도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태헌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연오의 손만 붙잡고 있었다. 발갛게 튼 손등이 그를 더욱 괴롭혔다.

이 추위 속에서 나를 기다렸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연오가.

“내가 너무 미워서 그랬어. 잠깐, 아주 잠깐 충동이었어. 다시는 이런 일 없어, 연오야. 나 다시는 안 이럴게. 앞으로 절대…….”

연오는 엎드릴 기세로 비는 태헌을 내려다보았다. 어지러웠는데, 분노 때문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수십 가지 모진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기어이 자신을 두고 죽어버리는 세 번째 사람이 되려고 했던 태헌을, 죽기 직전까지 망가뜨리고 싶은 잔인한 욕구가 치밀었다. 그렇게 하면 안심이 될까. 실컷 화를 내고 끝내 해서는 안 될 말로 태헌을 짓밟아 버리면 이 응어리가 녹아 없어질까.

내 안에 이런 면도 있었나. 이게 내가 맞나.

연오는 태헌의 손을 뿌리쳤다. 수백 마디의 말보다 그 단호한 몸짓이 더 큰 충격이었다. 고개를 꺾어 연오를 올려다보는 눈이 공포에 젖어 있었다.

“연오야, 제발…….”

“네가 진짜 원하는 게 죽는 거야?”

그럼 가서 죽어버려.

화가 치밀었어도 강연오는 강연오여서, 홧김에라도 그 말만은 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태헌이 정말 어디서 뛰어내리기라도 하면. 당장 저 강에 투신하기라도 하면. 허락만을 기다렸다는 듯 기쁘게 죽으러 가기라도 하면.

부모님을 그렇게 잃고, 죽어버리라는 욕설을 농담처럼 뱉는 모두를 미워하고 부러워한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기억 잃은 정태헌은 자기보고 잘만 죽으라고 했는데 자신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네가 죽든 말든 상관 안 할 테니 알아서 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태헌은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아니야. 안 죽어. 진짜 안 죽어.”

“그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목숨까지 걸고 협박하는데 내가 뭘 못 들어주겠어.”

협박한 거 아니야. 그런 거 정말 아니야……. 태헌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다 쏟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울면서 말을 끌면 연오가 참아주지 않고 가 버릴 것 같아서 울 수도 없었다.

“말해, 정태헌. 뭐든지 말해 보라고.”

“…….”

“말 안 해?”

태헌이 핏기 가신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쩔 줄 모르고 허벅지에 놓은 손만 쥐었다 폈다 하며 눈물을 참았다. 연오는 격양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할지 뻔했다. 못 헤어지겠다고 하겠지. 다시 같이 살자고 하겠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하겠지. 그래, 어디 마음껏 해봐. 연오는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오기로 이를 악물었다. 걷어차인 개처럼 움츠러든 태헌이 어느 때보다도 작아 보였지만 불쌍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태헌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너 행복하게 오래 사는 거…….”

말끝과 함께 마음의 둑도 무너졌다. 태헌이 연오의 발을 붙들고 몸을 굽힌 순간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내가 망친 그거, 연오야…….”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먼 물소리와 바람 소리.

하늘 끝까지 솟구쳤던 연오의 분노에 돌연 찬물을 끼얹는 한 줌의 진심.

말을 잃은 연오와 온몸을 떠는 태헌 위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연오 없이 맞이하게 될 겨울에도 쏟아질, 시린 첫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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