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허락된 존재 (2)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겨울 실내 특유의 건조함과 쓰고 단 약 냄새가 동시에 느껴졌다. 연오는 추위 때문에 입가까지 끌어올렸던 목도리를 살짝 내리고 카운터 앞에 섰다. 카운터 너머 깊숙한 곳에 혼자 앉아 있던, 흰 가운을 입은 약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뭐 드려요?”
“종합감기약이요.”
약 두 종류를 챙겨 온 약사가 이건 한 번 먹을 때 두 알, 이건 하루에 하나씩 서로 섞어서, 하는 식으로 복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은 연오는 값을 치르고 약국 밖으로 나왔다. 센터 내부에도 병원이 있고 약국이 있지만, 기숙사와 좀 더 가까운 외부 약국으로 나온지라 조금 추웠다.
연오의 다음 목적지는 죽 가게였다. 함께 사는 동안 태헌이 죽 먹는 걸 본 적이 없는지라 메뉴를 고르는 데 애를 먹었지만, 결국 무난한 야채죽 하나를 포장했다.
연오는 산 것들을 단단히 챙기고 진료받기로 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자 친절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마음에 걸리던 문제까지 해결한 연오는 다시 걸음을 재촉해 기숙사로 돌아왔다.
태헌의 방 앞에 서서 카드키를 꺼냈다. 식탁에 얌전히 놓여 있는 걸 가지고 나온 참이었다. 전에 태헌이 자신의 캐리어에서 카드키를 가져갔던 게 떠올라, 연오는 이상한 감회에 잠겼다. 키를 대자 들릴락말락 한 기계음과 함께 잠금이 풀렸다. 연오는 봉지를 들지 않은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안은 조용했다. 심지어 냉장고 모터 소리 같은 생활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아까 나갈 때 모습 그대로였다. 태헌이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깨워서 약을 먹이는 것보다 좀 더 자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연오는 침실 문도 열지 않았다. 연오는 태헌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여 약과 죽을 정리하고, 카드키까지 제자리에 두었다. 그러고 나자 생각이 많아졌다.
태헌이 깨어날 때까지 잠깐 기다릴 생각이라 저번에 앉았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태헌이 아프게도 눈물을 쏟았던 자리였다. 연오는 태헌이 흐느꼈던 그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해야 하는데.’
친구라고 하기도, 동료라고 하기도 어렵고 지인이라고 칭할 수도 없는 모호한 관계다. 아플 때 기꺼이 달려와 간호하면서도 서로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태헌이 매사에 주저하고 눈치를 살피는 이유가 그 모호함에 있음을 연오 또한 모르지 않았다.
차근차근 풀어가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언제까지 풀기만 해야 할까. 자신이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태헌은 계속 흔들릴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옆을 지키는, 그냥 ‘아는 사이’나 ‘에스퍼와 가이드’ 정도로 남아도 우리는 괜찮은 걸까.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생은 끝나지 않는다. 관계가 단숨에 회복되어야 할 것 같은데 자질구레한 돌부리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전까지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완성품에 가까웠다. 다정하고 친밀하며 부족한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거푸집에 대고 찍어낸 기성품.
그러나 태헌이 기억을 잃은 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태헌의 비밀스러운 고통을 알게 되면서 우리가 나눈 것이 정말 사랑이었나 의심하게 되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시절의 태헌을, 심지어 고통에 시달리기까지 하는 불안정한 태헌을 마주하면서는 숨이 끊어지는 듯한 경험을 반복해야 했다. 태헌이 기억을 찾은 후에도 궤도가 맞지 않는 별들처럼 어긋났다.
그러다가 겨우 한 자리에서 만난 현재.
다시 묻는다.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지금도 사랑일까.
연오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저녁이 깊어가며 실내도 장막 같은 어둠에 잠겼다. 혼자 웅크리고 앉은 연오는 이내 가뿐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내가 네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해주는 데 집중하고 싶어.
사랑이니 우정이니 정의하지 않고 마음이 흐르는 대로.
일단 태헌이 깨어나면 약을 먹이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컴컴한 실내에 청승맞게 앉아 생각에 파묻히지 말자. 밥을 제때 먹고, 몸을 움직이고, 자잘한 집안일을 척척 해내자. 몸과 공간의 청결을 유지하며 생산적인 일을 하다 보면 기분도 한결 나아지고 답도 가까워질 것이다.
‘깊이 잠들었나?’
연오는 살짝 일어나 침실로 다가갔다. 기숙사라 내부 구조가 다 똑같다 보니, 자기 침실에서 자고 있는 태헌을 엿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주 조용히 문을 열고 좁은 틈으로 안을 살핀 그때.
연오는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했다.
태헌이 울고 있었다.
-
사람은 한번 약해지면 끝도 없이 약해지는 걸까?
침대에 석상처럼 앉아 소리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태헌은 그런 의문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전에는 우는 일이 많지 않았다. 연오 앞에서는 물론이고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심한 아픔 때문에 생리적인 눈물이 날 때는 제외해야겠지만. 함께 사는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누가 봐도 눈물이 더 많은 쪽은 연오였고 태헌은 해안의 바위처럼 단단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무던히 파도를 맞아내는 쪽이었다.
연오 앞에서 크게 운 것은 스무 살 연말뿐이었다. 가이드 수술을 받으면 어떻겠냐는 연오의 말에 크게 흔들렸던 바로 그때. 그때를 제외하면 태헌은 정말 우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기억이 돌아오고 연오 앞에서 몇 차례 눈물을 쏟고 나자, 또 그 눈물을 용서받고 이해받고 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마치 몸이 그동안 흘리지 못하고 쌓아 뒀던 눈물을 죄다 방류하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이게 울 일이야? 연오가 다른 사람 만나는 게 뭐. 연오가 자기 삶 찾아가는 게 뭐.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뭐가 어때서.’
이렇게 자신을 책망할수록 수도꼭지가 열린 듯 눈물이 쏟아졌다. 자기가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지금 당장 달려 나가서 연오를 보고 싶기도 했다. 차라리 소개팅 얘기를 아예 몰랐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마음이 편했을 텐데.
아니, 그럼 어느 날 갑자기 연오가 새 연인을 소개해 줬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 연인과 인사를 나눠야 했을까? 그쪽이 좀 더 비참했을까?
‘왜 안 멈추지.’
나약해진 자신이 한심했다. 수많은 날을 극복한 연오가 마침내 자기 길을 찾아가려 하는 중이니 응원해줘야 마땅한데 이렇게 소리를 죽여 가며 울고만 있으니. 태헌은 손을 들어 눈물에 젖은 뺨을 거칠게 닦아냈다. 한번 얼굴에 손을 대자 멈출 수가 없어서 계속 닦다가, 나중에는 감당할 수가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연오가 덮어줬던 이불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 뒀던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다섯 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연오는 지금쯤 그 사람과 만났겠지.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인데 뭘 먹을까. 혹시 나랑 갔던 식당에 가진 않겠지. 아니야, 가도 상관없잖아. 같이 갔던 식당에 새 사람과 가는 게 뭐 어때서.
종종 함께 갔던 강남역 레스토랑에 연오와 낯선 사람이 마주 보고 앉은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바짝 탔다. 큐브 스테이크가 잔뜩 올라간 파스타와 보기만 좋고 먹기는 불편한 랍스터를 자주 먹었는데 그걸 시킬까. 상대방에게 살을 발라 주는 건 아니겠지? 아니다, 연오는 조금 낯을 가리지만 그래도 친절하고 매너 있으니 분명 살을 발라 줄 것이다. 잘 바른 살을 상대방의 접시로 옮겨 주며 뿌듯한 듯, 쑥스러운 듯 웃을까.
‘가이드시라고 들었어요. 전담 에스퍼 있으세요?’
‘아, 네. 각인한 에스퍼 있어요.’
‘어……. 괜찮으세요?’
상대방이 조심스럽게 물으면, 연오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미소를 지을 것이다.
‘마음에 걸리세요?’
‘저는 상관 안 해요.’
‘다행이네요. 저도 상관 안 해요.’
한번 시작된 상상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성적인 성격은 아닌데.
차라리 아프다고 붙잡을걸. 못 견디게 아프니까 제발 옆에 있어 달라고 할걸. 양심?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히 양심적이었다고. 어차피 거짓말한 거 끝까지 뻔뻔스럽게 나갔으면…….
분명 아까 연오를 보낼 때는 욕심 낼 수 없는 사람이니 놓아주자고 결심한 것 같은데, 막상 혼자 남으니 마음이 또 전과 달랐다. 초 단위로 변덕을 부리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태헌이 낮은 헐떡임을 토한 순간.
“태헌아?”
떨리는 목소리가 꽂혔다.
환청인 줄 알았다. 상상을 너무 현실처럼 받아들여서 미쳤나 했다. 만성 가이딩 부족일 때 환각은 친구나 다름없었으므로, 환청을 듣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태헌은 지긋지긋한 환각 경험 때문에 지금 상황이 분명한 현실임을 직감했다.
한 뼘쯤 열린 문 너머에 연오가 서 있었다. 거실은 밝고 침실은 어두워서, 빛을 등진 연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만으로도 연오의 당혹을 충분히 알 수 있어서, 태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한 줄기 빛이 밝혔을 제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연오가 지금 이 장소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소개팅이 이렇게 일찍 끝났을 리 없는데. 아니면 자기가 우는 동안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일까. 아까 분명 나가는 소리도 들었는데…….
“연, 연오야.”
그러나 수십 가지 현실적인 의문보다 부름이 먼저였다. 본능이었다.
“나 아파.”
아프면 아프다고 하랬잖아.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랬잖아. 혼자 울고 아프고 그런 거 이제 그만하자고 했잖아.
“나, 아프, 진짜 아파…….”
정태헌, 넌 진짜 뻔뻔스러운 새끼야. 거울도 없는데 목소리가 징처럼 귓전을 때렸다. 연오가 아프다고 말하라는 게 이런 건 아니었잖아.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긴. 뭘 잘했다고 동정을 사려고 질질 짜면서…….
“태헌아.”
현실의 부름이 가상의 목소리를 쫓아냈다. 연오가 문을 활짝 열자 빛이 우르르 밀려들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로 들어와 소리도 못 내고 우는 태헌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머리를 감싼 손은 단단하고 따스했으며 의지하기에 충분했다. 마음 놓고 무너지기에도 충분했다.
연오야. 연오야. 간절한 이름을 연거푸 부르며 태헌이 그에게 매달렸다. 이제 태헌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소개팅 가지 마……. 안, 안 가면 안 돼?”
멈칫 굳는 연오의 몸을 느끼자마자 태헌은 두려워졌다. 주제넘게 참견해서 화난 걸까. 이대로 밀쳐지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아서 태헌이 연오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숨소리가 톡 터졌다. 황당함마저 담긴 짧은 물음이 뒤를 이었다.
“……뭐?”
연오의 되물음이 책망이라 여긴 태헌이 얼른 머리를 들었다. 빛과 어둠에 얼룩진 연오의 뺨에는 질책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잠꼬대를 들었나 의심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내가 소개팅에 왜 가는데?”
태헌은 자기가 꿈을 꾸고 있거나 아니면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울음의 여운에 잠겨 곧장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눈만 깜빡거리는 태헌을 살짝 밀어낸 연오가 걱정 가득한 몸짓으로 그의 이마를 짚었다.
“너 머리 많이 아파? 어디 부딪혔어?”
차마 정신이 나갔느냐고 묻지는 못하고 괜히 열만 확인하는 연오의 표정이 심각했다.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감싸듯 쥐었다. 방금까지 기대 있던 품에서 떨어져 연오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간절했다.
“오늘 다섯 시에 강남에서 소개팅하는 거 아니었어?”
“내가? 강남에서?”
“저번에, 소개팅한다고……. 아니야?”
더듬더듬 묻던 태헌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황당함이 가득한 연오의 표정만 보더라도 자신의 인지가 오해였음을 알 수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진지하게 태헌의 말을 듣던 연오의 입이 퐁 벌어지기까지 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다행이다. 연오 소개팅이 아니었어.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서러운 상상이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무너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뒤늦게 얼굴로 열이 몰렸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지? 무슨 소리를 했지?
‘소개팅 가지 마…….’
입을 다무는 조개처럼 이불로 숨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시간을 되돌려 이 모든 바보 같은 짓을 무효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연오 역시 태헌이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묻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게 깨달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이라, 감정보다 대답이 앞섰다.
“아니……. 왜 내가 소개팅 나간다고 생각한 건데?”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소리가 장난감 망치처럼 태헌의 머리를 뿅 쳤다. 연오가 보기에 이 상황이 얼마나 터무니없을지 깨닫고 나자 귀뿌리까지 뜨거워졌다.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연오의 품에서 벗어나며 변명했다.
“저번에 가이딩실에서 소개팅 얘기해서. 그래서, 너 소개팅 나가는 줄 알았어.”
“가이딩실? 아.”
과거를 더듬느라 연오의 눈썹이 잠시 움찔했다. 기호와의 통화를 들은 모양인데 어떻게 해야 그걸 그렇게 오해할 수 있지. 게다가…….
“내 소개팅 아닌데.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에 누굴 소개받겠어?”
태헌은 그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연오가 말하는 ‘지금 이런 상황’이 대체 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연오가 아픈 거? 전담 가이드로 한 에스퍼에게 묶여 있는 거? 어느 쪽이든 자기 책임이라 태헌은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연오는 솔직히 상상이 안 가지만, 질투하지 않을 자신도 전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연오의 발목을 잡는 듯한 느낌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 덤덤한 한마디가 자책을 잘라냈다.
“너랑 완전히 정리도 안 됐잖아.”
태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오와 시선이 맞닿았다. 거실에서 흘러든 불빛이 연오의 눈에 하얀 동그라미로 비쳐 오묘했다.
“헤어진 건 맞는데 아직도 의식하고.”
“…….”
“무슨 사이냐고 물으면 할 말 없고. 그렇잖아, 우리.”
연오도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다.
서로에게 어디까지 허락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 허락받은 건지, 하나도 모르는 채로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연오가 이전에 원했던 것처럼 완전한 타인이 되지도 못했고 태헌이 빌었던 것처럼 연인으로 남지도 못했다. 서로의 생명을 구하고 서로의 생을 허락했으니 모든 것이 단숨에 행복해져야 할 것 같은데, 둘은 여전히 어정쩡한 선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연오의 마음은 진작 떠났다고,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오도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니 속상하면서도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이기적인 감정인 줄 알면서도 마음이 통제되지 않았다.
벅차서 입술이 굳었을 뿐인데, 연오는 태헌의 책망을 다른 뜻으로 읽은 듯했다. 말을 덧붙이는 얼굴이 착잡했다.
“이렇게 애매하게 있는 게 안 좋은 건 아는데,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어느 한쪽으로 정리가 안 돼. 너도 나도 복잡하니까 일단은 그냥 편하게 지내려고 하다가도 이게 뭔가 싶고.”
측정 결과 정말 안 볼 거냐고 농담을 하고, 미소를 짓고, 친구처럼 동료처럼 지내던 그 순간마다 연오도 어려웠을까. 그런데도 내색 없이 해야 할 일을 해내고 가이드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을까.
이제는 태헌도 솔직해야 할 때였다. 태헌은 연오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손가락을 얽었다. 살짝 힘을 주었는데도, 연오는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태헌을 마주 보았다.
“그럼 나 애써 봐도 돼?”
펑펑 울어서 못생겨졌을 게 분명한 얼굴로 이런 소리를 하다니. 거절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네가 마음 정할 수 있게, 나로 할 수 있게…… 내가 노력해 봐도 돼?”
너는 거기까지 허락해 줄까. 나를 너의 선 안으로 들여놓아 줄까. 간절한 떨림마저 스민 태헌의 눈이 연오의 가슴에 부딪혔다. 연오의 입이 바싹 말랐다. 왜 긴장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모르겠어. 그러다가 안 되면…… 안 되면,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횡설수설 나온 말에 태헌이 고개를 저었다. 얼마든지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네가 딱 하루라도 즐겁게 가지고 놀아 준다면 처참하게 버려져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연오가 선뜻 받아들일까. 그럴 리 없었다. 그래서 태헌은 다른 말을 택했다.
“해보게 해줘.”
“…….”
“절대 네 탓 안 할게.”
연오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태헌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진전될 줄은 몰랐다. 무슨 수를 써서든 혼자 마음을 정해야 한다고, 그런 다음 태헌에게 통보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혼자.
진짜 바보 같다. 서로 각자 알아서 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상황을 파국으로 이끌어 놓고 또 ‘혼자’ 하겠다고.
“그래.”
어떤 관계든 혼자 완성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한참 더 걸릴 것 같다.
“알았어, 태헌아.”
태헌은 귀중한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아직 무슨 결론이 난 것도 아닌데 기뻐하는 그를 보니 괜히 머쓱해서, 연오가 슬쩍 손을 잡아뺐다.
“너 그럼 안 아파?”
“…….”
“죽 사 왔는데.”
“…….”
“약도.”
“…….”
“어, 얼굴 빨개졌다.”
지금이라도 납작 엎드려서 빌어야 하나. 태헌은 연오를 놓지도 당기지도 못하고 살며시 눈치만 살폈다. 다행히 연오가 그리 화가 난 것 같진 않아서, 태헌은 연오의 손을 꼭 감싸고 손등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미안해. 손 시렸겠다…….”
봐달라는 듯 유순하게 속삭이며 찬기 하나 없는 손을 녹이자 헛웃음이 내려앉았다.
태헌이 아프다고 하면서 울어서 정말 깜짝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억 잃은 태헌이 안전 구역에서 살려달라며 울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앞뒤 가릴 것 없이 허겁지겁 달려와 껴안았더니 한다는 소리가 ‘소개팅 가지 마.’라니.
어이없는 걱정을 끼친 것보다 진짜 아픈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됐어. 손 다 녹았어.”
연오의 수고가 안타까운지 태헌이 잠시 끙끙 머리를 싸맸다. 그러더니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눈을 빛내며 약속했다.
“죽 다 먹을게. 약도 먹고.”
“아프지도 않으면서 약은 왜 먹어?”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연오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세수나 해, 정태헌. 눈 엄청 부었어.”
밀어내듯 놓아주자 태헌이 민망한 듯 눈을 비볐다. 저러면 내일 진짜 부을 텐데. 부은 데다 비비기까지 해서 더 붉어진 눈을 보며 연오가 살짝 염려한 그때.
“응. 나 열심히 할게.”
거실에서 흘러든 한 줄기 빛이 태헌을 반으로 갈라놓은 듯 보였다. 어둠에 묻힌 반쪽과 환한 빛 아래 눈물 자국까지 전부 드러난 나머지 반쪽.
그러나 전하는 마음은 여전히 하나였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
아프다는 말에 곧장 달려와 줘서. 우는 나를 망설임도 없이 안아줘서.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모르지 않느냐고, 선 밖에서 머뭇거리면서도 내 슬픔을 보자마자 단숨에 모든 경계를 넘어 줘서.
“그리고 네가 소개팅한 거 아니어서 너무 좋았어…….”
모든 용기를 쥐어짜 겨우 덧붙인 말이었다. 이런 소리를 해도 되나 안 되나 고민하다가 건넨 진심은 마치 종이배처럼 공기에 실려 연오에게 닻을 내렸다.
또 솔직한 정태헌이다. 애써 꾸미지도 다듬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말로 마음을 전하는 정태헌. 작은 허락을 받자마자 쪽지처럼 정성껏 접은 마음을 잽싸게 전해주고 바닥만 바라보는 정태헌. 고작 그 한마디 하고 귀까지 붉어진 정태헌. 하나도 어른 같지 않은.
열기가 옮아온 것일까, 연오의 뺨도 따뜻해졌다. 연오는 손등을 뺨에 대며 헛기침을 했다. 이상하다. 기억을 잃고 진짜 어려진 정태헌을 보면서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재채기가 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알았으니까 세수부터 해.”
손톱을 세워 간지러운 곳을 긁어내는 대신 한 말에 태헌이 냉큼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미 다 보여준 얼굴을 가리듯 고개를 숙이고 허둥지둥 욕실로 가는 일상적인 뒷모습이 왠지 낯설었다.
태헌이 울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정리된 건 처음이라 그런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울면서 매달리는 태헌에게 대체로 냉정했으니까.
이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건가. 불규칙한 보폭으로 다가오는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기다려지기도 했다.
‘일단 죽 데우자.’
욕실의 물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소음이 끼어들었다. 베개 옆에 놓인 태헌의 핸드폰이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엿볼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두 눈이 먼저 글자를 읽어냈다.
[아버지]
정한철의 연락이었다.
진동은 오래 이어지다가 멈췄다.
전화 왔더라, 하며 태헌에게 가져다줄까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연오는 핸드폰을 들지 않고 그냥 거실로 나갔다. 죽이 다 데워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정한철의 존재를 의식하자마자 아프게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이기도 했다. 악몽처럼 지난 일이 떠올랐다.
‘연오야, 태헌이 좀 도와줘라. 응?’
정한철이 사악한 사람이라고 여기진 않는다. 아버지로서는 그럴 수 있다고, 내내 아픔을 겪던 아들이 가이드를 찾아 드디어 살았는데 어떻게든 붙잡고 싶지 않았겠냐고, 돌아오라고 협박하거나 심한 말로 모욕한 것도 아니고 좋게 부탁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머리로는.
정한철을 미워하지 않는데 심장은 왜 이렇게 거세게 뛰는 것일까. 왜 이렇게 허둥지둥 죽 그릇을 꺼내고 있을까. 이러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아!”
조심해야겠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릇이 나뒹굴었다. 식탁 위에 내려놓다가 손이 미끄러져 그릇이 깨지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그러나 뜨겁게 데운 죽이 연오의 손등으로 반쯤 엎어지고 말았다.
“연오야!”
막 나오던 태헌이 뛰듯이 다가왔다. 연오는 확 뜨거웠다가 몇 초 안에 감각마저 사라진 손을 급히 싱크대로 가져갔다. 차가운 물에 손등을 씻어내자 피부가 벗겨지는 듯한 쓰라린 아픔이 덮쳐왔다. 옆에 선 태헌은 물을 더 차갑게 틀면서, 발갛게 익은 손등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화기 빼고 병원 가자. 화상인 것 같은데 십 분 정도라도 식혀 주는 게 좋아.”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특별히 무슨 감정을 느낄 틈도 없었다. 차가운 물로 식히고 태헌이 준 찬 물수건으로 손등을 덮었는데도 너무 아팠다. 슬프고 뭐고를 떠나 생리적인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연오는 숨까지 멈춰 통증을 참으며 진료를 받았다. 다친 사람은 연오인데 태헌은 옆에서 자기가 더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괴물의 몸에 들어갔다가 온몸에 위산을 뒤집어썼던 그때도 볼 수 없던 얼굴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탄력 붕대까지 감은 후 돌아오는 길. 연오는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통증이 심하긴 했지만 큰 부상도 아니었고 화상 부위도 크지 않아서, 열흘에서 보름 정도 치료하면 괜찮을 거라는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몸을 다치고 나니 흔들리던 정신이 오히려 놀라 제자리를 찾았는지도.
연오는 죽을병에 걸린 환자라도 부축하는 듯한 태헌을 살짝 밀어냈다. 몸이 너무 가까워서 괜히 민망했다.
“괜찮아. 심한 거 아니라잖아.”
“물집 올라오면 엄청 아파.”
돌아오니 죽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태헌은 그쪽에 눈길을 주는 대신 연오를 침대로 데려갔다. 이 사태의 화근인 핸드폰을 대충 치운 그가 연오를 침대에 앉혔다.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데다 딱히 안정을 필요로 하는 상태도 아닌데, 태헌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했다.
“아직 많이 아프지.”
“좀 쓰라린 거야. 많이 아픈 건 아니고.”
식은땀이 맺힐 정도였지만 질식할 듯한 태헌 앞에 대고 아프다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깬 채로 과거를 꿈꾸는 것 같던 몽롱함이 완전히 가신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현실이 하나하나 정확하게 인식되었고, 허둥거리며 뜨거운 그릇을 다뤘던 바보 같은 행동만 조금 후회스러웠다.
침대 아래 무릎을 꿇은 태헌이 붕대가 감긴 연오의 손을 보며 참담한 낯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환히 보였다.
“미안해. 내가 괜히 불러서, 괜히 죽 때문에……. 내가 거짓말만 안 했어도 이런 일 없었을 텐데…….”
“태헌아. 그만해.”
이럴 줄 알았다. 예상한 그대로라 연오는 성한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한 열흘 정도면 괜찮을 거라잖아. 내가 들다가 실수한 거고 너랑 상관없이 다친 거야. 큰일도 아니고.”
정한철의 전화는 굳이 언급하지 말자. 그것 역시 태헌의 탓이 아닐뿐더러 괜한 말로 부자 사이를 갈라놓을 마음도 없었다. 이 문제는 너무 어려워서 당분간은 덮어 둘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래서 연오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죽 엎어져서 치워야 되는데.”
“내가 얼른 치우고 올게. 누워 있을래?”
“아니, 나도 이제 가야지. 저녁도 먹어야 하는데.”
저녁을 먹기 전에 태헌에게 온 데다 진료까지 받느라 밥시간을 놓쳤다. 일단은 돌아가서 정리도 하고 밥도 먹고 해야겠다 싶어 일어나려고 했는데, 바로 앞에 태헌이 무릎을 꿇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아 일어날 자리가 없었다. 연오는 의아한 듯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태헌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간다고?”
“응.”
“오른손 다쳤는데……. 도와줄 사람 필요할 거야.”
연오가 몇 차례 눈을 깜빡거렸다. 옆에 붙어서 병 수발을 들겠다는 소리임을 이해한 연오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조금 쓰게 웃었다.
태헌과 함께 살 때는 아프면 그가 돌봐 주는 게 당연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혼자 견디려고 했다. 비상구에서 굴러 병원에 갈 때도, 뛰다가 쓰러질 정도로 허약해졌을 때도 혼자였던 몇 달의 기억이 이토록 강렬한가 싶었다.
“밥은 왼손으로 먹으면 되지. 씻는 것도 붕대 감았으니까 물 안 들어가게 요령껏 할 수 있어.”
“오른손 다치면 생활하기 힘들어. 며칠이라도 도와줄게.”
“아니…….”
정말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데 태헌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냉정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생각해 보니 설거지부터 샤워까지 불편한 일이 한둘이 아닐 것 같긴 했다. 병원 도시락 설거지야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 주겠지만, 머리는 어떻게 감을 것이며 방은 어떻게 청소해야 할까. 빨래도 한 손으로 개야 할 테고 자잘한 물건을 정리하기도 어려울 게 뻔했다.
태헌은 연오의 머뭇거림을 눈치챘다. 연오의 무릎에 살짝 턱을 대고 절실하게 올려다보는 눈이 조금 젖어 있었다.
“나 잘할 수 있어.”
“…….”
“잘할게, 응? 연오야아.”
발밑에 앉은 충견처럼 살살 눈치를 보며 꼬리를 흔드는 태헌의 모습에 연오는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사귈 때의 태헌도 애교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이름을 길게 끌어 부르거나 손바닥에 입을 맞추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하며 놀아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등 표현이 풍부한 축에 들었다. 매사 부드럽고 단정해 애인에게도 귀염 떠는 일이 없던 연오는 그런 태헌을 낯설어했지만 금세 적응했다. 애인을 귀여워하는 일은 제법 즐겁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태헌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데, 왜 처음 보는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일까. 됐다고 거절할 마음이 절반쯤 들었는데 왜 소리 내어 웃은 후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해버리고 싶은 것일까.
연오는 가슴의 간질거림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목을 가다듬었다.
“너 안 힘들겠어?”
“하나도 안 힘들어.”
고작 며칠 돌봐 줄 수 있을 뿐인데, 태헌은 일생일대의 기회라도 얻은 양 감격했다. 연오가 마음을 바꿀까 두렵다는 듯 재빠르게 다음 질문을 건네기까지 했다.
“네 짐 챙겨 올게. 아니, 네 방으로 가는 게 편하겠지? 내 짐을 챙겨갈까?”
“어, 아니, 그냥 옷만 가져다줘…….”
엉겁결에 대답은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좀 이상했다. 그냥 생활을 조금 도와달라고 한 거지 같이 살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짐 이야기를 하는 태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반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건 좀 아니지 않냐는 말을 하려던 그때, 얌전히 앉아 있던 태헌이 살짝 눈을 굴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었던 순간.
“나 카드키 받을 수 있을까, 연오야?”
표정을 살피는 기색이 조심스러웠다.
캐리어에서 카드키를 가져가 놓고 큰 잘못이라도 한 듯 다시는 안 그런다고 빌던 그가 떠올라 연오는 말문이 막혔다. 이제는 타인의 공간이 된 연오의 방이, 태헌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함께 지내는 일이 당연하던 시기를 자기 손으로 박살 내고, 한 발 한 발 허락을 받아야만 나아갈 수 있게 된 지금.
연오는 긴장마저 어린 태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자.”
“아. 아, 응. 미안해, 부담스럽게 하려고 한 거 아니고, 너 피곤할 것 같아서 옷만 챙겨 오려고 했어. 너 저녁 먹을 것도…….”
자리에서 일어난 태헌이 급하게 변명했다. 같이 가자는 연오의 말을 거절로 읽은 게 분명했다.
연오는 딱히 화를 내지도 않았는데 쩔쩔매는 태헌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전의 태헌은 늘 여유 있는 어른 같았는데, 눈을 새롭게 뜨고 관계가 틀어지고 나자 겁 많은 모습이 더 자주 보였다.
어쩌면 그가 고통을 숨기고 완벽한 사랑에 집착했던 것도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연오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움보다 더 컸던 것은, 수용되지 못하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을지도.
지나치게 완벽하고 싶은 사람은 전부 겁쟁이인지도 모르겠다.
분명 태헌의 어른 같은 면을 좋아했는데, 부모를 잃고 혼자 남은 세상에서 의지가 되어 주는 사람이라 빠져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새로운 모습을 잔뜩 보여주는 요즘 같은 때라면 마음이 식어야 할 것 같은데.
“태헌아.”
그의 이름을 발음할 때 전보다 더 단맛이 나니 이상한 일이다.
“너 못 믿거나 키 주기 싫어서가 아니고, 옷 뭐 챙겨야 할지 네가 모를 테니까 같이 간다는 거였어. 다리 다친 것도 아닌데 너 심부름 보내듯이 혼자 가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불안이 많고 우울한 자신을 안심시킨 사람은 언제나 태헌이었는데, 그게 마치 육아처럼 피곤하지 않았느냐고 물은 적도 있는데, 막상 달래는 입장이 되니 그리 힘겹지 않았다. 느리면서도 확실하게 이어지는 말에 점점 풀려 가는 태헌의 표정을 보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래서일까. 딱히 지금 할 생각은 없던, 그러나 내내 마음에 걸렸던 말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제 안 부담스러워. 그 말은 취소.”
태헌의 눈이 동그래졌다. 받을 자격 없는 위로를 받은 사람처럼 멍하게 서서 연오만 바라보는 눈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신체의 고통은 그토록 완벽하게 숨겼으면서, 요동치는 마음은 조금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그니까 얼른 가자.”
농담조로 재촉하며 연오는 작은 미소까지 보여주었다. 달의 꼬리처럼 늘어진 눈매가 태헌을 울렸다.
부담스럽다는 말에 놀라긴 했지만, 내내 그 말에 묶인 듯 지내기는 했지만, 연오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한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창 같은 말에 관통당한 채 살아야 한다 해도 감사해야 한다 각오했는데.
그런데 연오는 악의 없이 꽂았던 말마저 하나하나 직접 거둬 준다. 피가 굳은 자리를 만져 주고, 회복할 것을 허락해 준다.
“연오야.”
일어나는 연오를 본 태헌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가장 먼저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머릿속을 찌르는 말이 무수히 많았는데, 정작 튀어나온 건.
“네가 너무 좋아.”
대화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는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널 안 좋아할 수가 없어.”
말을 다 내놓은 후에야 얼굴이 붉어졌다. 빨리 짐 챙기러 가자며 일어난 사람을 붙들고 대뜸 좋아한다는 소리를 했으니 연오도 얼마나 황당할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슬픔에 잠긴 연오를 혼자 좋아하던, 같이 살면 어떨지 권했다가 불쌍해서 그러느냐는 반문에 깜짝 놀랐던 그때. 다른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재채기하듯 고백을 쏟아버렸던 미숙한 여름날.
무더운 여름에도 시린 겨울에도, 연오는 그의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정직하고 맑은 눈동자에 들어차는 자신의 모습. 연오가 마치 처음처럼 더듬거렸다.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아닌데. 정말 항상 좋아했는데.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빨리 가자.”
연오는 어쩐지 조금 허둥거리며 태헌을 지나쳤다. 태헌은 미미하게 붉어진 목덜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를 뒤따랐다.
-
태헌은 세상에 감사한 일뿐이었다. 12월의 한복판인데 오늘따라 날씨가 온화한 것도, 밤사이에 눈이 내린 것도, 잠에서 깬 연오가 그 눈을 보고 기뻐한 것도, 하얀 세상을 보고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무심결에 슈거 파우더를 잔뜩 뿌린 조각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중얼거린 것도, 자신이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던 것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가 났다. 아침 일찍부터 디저트 카페를 찾아다닌 태헌의 뺨은 그새 붉게 터 있었다. 아무 카페나 들어가도 괜찮았겠지만, 태헌은 연오의 입에 맞는 케이크를 사고 싶었다. 눈처럼 하얀 파우더를 잔뜩 뿌린.
귀까지 빨갛게 얼도록 돌아다닌 덕분에 케이크 전문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헌은 유리벽 너머에 예쁘게 전시된 각양각색의 케이크를 잠시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예쁜 블루베리를 얹은 연보라색 케이크와 망고를 네모나게 조각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한 케이크, 크림을 레이스처럼 아기자기 오밀조밀 뿌려 놓은 모카 케이크……. 태헌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파우더를 잔뜩 뿌린 가나슈 케이크였다.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태헌은 작은 가나슈 케이크 하나를 포장했다. 카드를 내밀면서 카운터 너머에 눈길이 닿았는데, 정리하다 만 초가 보였다. 태헌이 잠시 멈칫했다.
“초도 같이 계산해주세요.”
“숫자 초 아니면 한 묶음은 그냥 드려요.”
친절한 직원이 포장한 케이크와 얇은 비닐에 든 초 다섯 개를 함께 건네주었다. 카드를 챙기고 짐을 드는 태헌의 손이 다 녹지 않아 발갰다.
센터로 돌아가는 길, 제설 작업이 끝난 도로는 질척했다. 녹다 만 눈과 얼음이 시꺼먼 슬러시처럼 엉겨 있었다. 제설이 덜 된 도로 가장자리에는 얇게 얼음이 얼어 있기도 했다. 주말 아침인데 일찍부터 밖으로 나온 몇몇이 언 바닥을 피해 조심조심 걸어 다녔다.
언젠가 연오와 이런 길을 걸은 적이 있는데.
‘수능 보던 날에.’
수능 전날 함박눈이 내려 도로와 인도를 덮어 버리다니, 전국의 수험생과 학부모가 전부 기겁할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연오는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도 태연했다. 오답 노트를 한 장씩 넘겨 보며 문제를 풀다가 이따금 눈이 쏟아지는 창을 바라보았을 뿐. 말간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수능과 상관없는 태헌이 날씨 걱정을 훨씬 더 많이 했을 것이다. 내일 연오 컨디션 안 좋으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에 애를 태우면서.
다음 날 도로는 당연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연오는 특별히 유난스럽게 염려하진 않았지만, 언 길을 걸어 수능장으로 향할 때만큼은 담담함을 조금 잃어버렸다. 떨리는 숨을 뱉는 연오의 입가에서 흰 입김이 흩어졌다. 태헌은 연오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 팔을 단단히 잡아 주며 물었다.
‘많이 긴장돼?’
‘조금.’
‘공부 열심히 했잖아. 잘할 거야.’
‘그래, 기회는 한 번이니까.’
가까워지는 수험장을 보는 연오의 얼굴은 어딘지 비장하기까지 했다. 태헌이 의아함을 느낄 정도로.
‘왜 한 번이야?’
‘재수하면 안 되잖아. 계속 너희 부모님한테 신세 질 수도 없고. 좋은 학교 현역으로 가면 과외도 많이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어!’
살짝 경사진 길을 오르며 진지하게 말을 잇던 연오가 크게 휘청했다. 언 길에서 디딤발이 미끄러지며 앞으로 넘어졌다.
‘연오야!’
태헌은 본능처럼 연오를 잡으며 살짝 힘을 썼다. 그가 발 디딘 곳과 연오 아래의 얼음만 연기를 내며 녹았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태헌의 팔에 의지해 가까스로 나뒹구는 것을 면한 연오조차도. 연오는 일어난 것도 아니고 넘어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버티다가 태헌을 붙잡고 겨우 두 발로 섰다.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연오가 너무 안도해서, 태헌은 원한다면 재수해도 상관없지 않으냐고 말할 기회를 놓쳤다. 성인이 되면 자신이 에스퍼 일을 해서 돈을 벌 테니까, 부모님 돈이 쓰기 싫으면 그걸로 공부를 하면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늘 선을 긋는 연오가 섭섭했다. 그러나 수능을 보러 가는 애인에게 서운하다며 칭얼거릴 수는 없었으므로, 태헌은 연오를 단단히 잡아 주며 웃어 보였다.
‘안 미끄러졌으니까 오늘 시험 잘 보려나 보다.’
한 번뿐인 기회를 앞에 두고 긴장한 연오에게 태헌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연오는 안개 같은 긴장으로 몸을 감싼 채 수험장 밖에 서 있다가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나름대로 단 한 번뿐이라고 정의한 기회를 움켜쥐었고, 모르는 문제가 거의 없었다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기숙사 앞이었다. 태헌은 차갑게 언 손이 아닌, 그 손에 들린 종이상자를 바라보았다. 연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연오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않았어도 수능은 또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반수도 방법이고, 연오가 원치 않았다 해도 태헌이 돈을 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태헌은 달랐다. 연오가 준 기회는 정말 마지막이었다. 이번에 연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평생 갈라서게 될 거라고, 그는 직감했다. 딱 한 번만 볼 수 있는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라 자꾸 입이 마르고 목덜미가 경직되었다.
연오는 시험이라 여기지 않을 테고 오히려 같이 애써 보자고 말해주었지만…….
방 앞에 도착한 태헌이 카드키를 댔다. 거실 소파에서 커다란 창문 밖 세상을 바라보던 연오가 고개를 돌렸다. 반기는 웃음이 스민 얼굴을.
“너 오는 거 봤어.”
기숙사 입구에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태헌은 신발을 벗으며 그랬느냐고 다정하게 되물었다. 연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다친 팔을 한쪽으로 멀리 뻗었다. 여기저기 닿을까 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손부터 씻고 케이크 박스에 손을 댔다. 그때 가만히 앉아 있던 연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바로 안 들어오고 한참 서 있었어?”
태헌을 움찔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가져가려던 동작마저 멈춘 채였다.
네가 나한테 준 한 번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다잡느라고 그랬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네가 수험장 앞에 잠시 서서 긴장을 털어내려 애썼듯 나도 그랬다고 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태헌은 하던 일을 마무리하며 일상적인 어조를 유지했다.
“케이크 말고 다른 것도 사 올까 해서.”
“아침부터?”
태헌은 초를 따로 챙기고 케이크 접시를 연오 앞으로 가져갔다. 케이크를 놓은 후에는 연오 옆에 나란히 앉지 않고 테이블 옆 바닥에 앉았다. 그런 다음 연오의 반응을 살폈다.
케이크를 보자 아침에 태헌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왼손으로 양치까지 하느라 조금 진이 빠져 있던 연오의 눈이 빛났다. 단 음식을 즐겨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힘들 때는 꼭 생각났다.
“포크 하나네.”
“난 별로 안 당겨서. 너 많이 먹어.”
“나도 다는 못 먹을 것 같은데……. 초는 왜?”
연오는 투명한 비닐 너머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초를 살짝 들었다. 대단한 장식 초는 아니었고, 제과점에서 흔히 주는 평범한 초였다. 아무것도 안 적혀 있을 걸 뻔히 알면서 초를 이리저리 살피는 연오의 손길이 약간 무성의했다.
“케이크 사니까 그냥 줬나 보네. 조각 케이크인데.”
“그건 아니고, 내가 달라고 했어.”
연오의 시선이 태헌에게로 옮겨 왔다. 뜻을 짐작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어질 말을 연오가 반길지 알 수 없어서 태헌은 입술이 말랐다.
“올해 네 생일에 케이크 하나 못 줬잖아.”
“…….”
“5월 7일인데 지금은 너무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초 하나만 꽂아 주고 싶어서.”
초를 보자마자 챙겨주지 못한 생일이 생각났다. 매년 5월 7일마다 최고의 하루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그때까지의 노력이 죄다 물거품이 된 기분이었다. 생일은 봄인데 축하는 겨울에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태헌으로서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연오의 올해 생일에 자기가 연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 다시 ‘생일’ 얘기를 꺼냈다가 뺨을 맞아도 이상할 게 없다. 키스 가이딩을 요구하고 내가 이렇게 아픈 건 너 때문이라고 맹비난한 날을, 연오는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지 않을까. 모르는 척 언급을 피하고 연오가 그 일을 잊기를 기대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태헌은 연오 앞에서 정직하고 싶었다.
네가 잊지 못했을 것처럼, 나도 그 일을 잊지 않았다고 말해 위로하고 싶었다.
연오는 오래 대답이 없었다. 그저 눈높이보다 낮게 앉은 태헌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길어지는 침묵이 태헌을 쥐어짰다.
“안 내키면 안 꽂아도 돼.”
“…….”
“그냥 내가 네 생일 때 일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그 말 하고 싶었어.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라 너한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하고.”
태헌이 그때 일을 모르는 척해도 이해했을 것이다.
연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꾸덕꾸덕한 초콜릿 케이크는, 생일에 박이정에게 받은 케이크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닌 선물이었다. 이 작은 케이크에 사과를 곁들이기 위해 태헌이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지 생각해 보면, 요령껏 넘어가지 못하는 태헌이 안쓰러우면서도 그답다 싶었다.
생일 이후로도 기막힌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나 그때 일 따위는 별로 상처도 아니다 생각했는데, 막상 태헌이 그때를 콕 집어 사과하니 심장을 찌르고 있던 고드름 하나가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매칭률 측정을 앞둔 태헌이 지난 일을 사과했을 때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태헌은 감히 용서를 구하려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어떤 사과는 마음을 낫게 하기도 한다.
“위로?”
“……미안. 고작 초 하나인데.”
“아니, 비꼰 거 아니야.”
연오가 조용히 비닐을 뜯었다. 크지 않은 케이크에 빨간 초를 하나 꽂는 연오를, 태헌은 숨죽여 지켜보았다.
“진짜 좀 위로가 돼서.”
불은 네가 붙여 달라고, 연오가 성냥을 건넸다. 둘의 손끝이 살짝 맞닿았다. 긴장한 태헌은 성냥을 하나 부러뜨린 후에야 초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연약한 촛불 하나가 연오의 마음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던 어둠을 조금 몰아냈다. 인지하지 못했던 상처마저 전부 회복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초를 밝혀야 할까. 남은 일이 지겹고 막막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자기가 더 벅찬 표정을 짓고 있는 태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년까지 태헌과 함께했던 모든 생일의 기억이 다 꺼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연오는 팔랑거리며 춤추는 불을 바라보다가, 장난기마저 어린 목소리로 툭 말을 던졌다.
“그땐 키스 가이딩 하라고 명령하더니 오늘은 케이크를 사 오네.”
비난인지 장난인지 모르는 태헌의 눈이 조심스럽게 연오에게 닿았다. 미소가 번진 얼굴을 본 후에도 그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비난받는 것 같아서가 아니라 창피해서였다.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변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자 머리 위에서 짧은 웃음이 터졌다.
“열다섯 살이 뭘 안다고 키스 가이딩 해달라고 했을까?”
이건 놀리는 거다. 백 퍼센트 놀리는 거야. 자연스럽게 농담으로 받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때의 자기가 떠올라 도저히 태연할 수가 없었다. 연오에게 소개팅 가지 말라며 울었을 때보다 더 부끄러웠다.
“응? 말해 봐, 태헌아.”
“잘못했어……. 이제 안 그래…….”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이유가 궁금하다니까.”
“연오야…….”
끙끙거리며 비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화가 난 게 아님을 알았는지 슬쩍 종아리를 잡아 오는 손이 크고 단단했다. 끝까지 그를 놀려 보니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즐거움이 있었다.
연오는 상체를 기울여 초를 후 불어 껐다. 들어갈 쥐구멍이 없다면 직접 구멍을 팔 기세였던 태헌이 놀라서 초를 확인했다.
“노래 불러 주려고 했는데.”
반년이나 늦게 챙기는 생일인데, 노래까지? 그러나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는지 태헌이 아쉬운 듯 눈썹을 눕혔다. 연오는 손가락 한 마디쯤 녹은 초를 쑥 빼며 가볍게 거절했다.
“노래까지는 그렇지 않아? 내년에 불러 줘.”
“…….”
내년.
연오가 내년을 기약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그러나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헛된 희망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매정하게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어떻게 발을 빼고 물러날 수 있을까.
“응. 내년에 꼭 불러 줄게.”
왼손으로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조금 잘라 먹은 연오는, 태헌과 달리 ‘내년’이라는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 잠잠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평범하지 않았다.
“네 생일은 12월인데. 아직 안 지났잖아.”
“…….”
“받고 싶은 거 없어?”
“없어.”
대답은 망설임도 없이 나왔다.
이전까지 연오는 태헌의 생일을 성의껏 챙겨주었다. 어쩌면 5월 7일을 최고의 하루로 만들어 주려고 애쓰는 태헌을 보았기에 12월에 더 공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때는 구구절절한 편지와 작은 선물을 건네며 미안해하더니, 대학생이 되어 과외를 시작한 후에는 유명 브랜드의 니트와 가방을 포개어 선물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정을 비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헌이 원하는 모든 일을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무 살의 태헌을 침대에 눕히고 간호나 해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연오는 무지한 상태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받고 싶은 물건도 없고?”
“응. 받고 싶은 건 전부 받았어.”
내가 뭘 줬는데? 묻기도 전에 태헌이 포크로 케이크를 푹 떠 주었다. 습관처럼 몸을 기울여 받아먹은 연오는 행복감이 가득한 태헌의 얼굴에서 답을 읽었다.
다친 사람 수발드는 게 뭐 그렇게 좋다고.
더 물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연오는 생일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붕대를 감아 둔 손을 보니 어제 일이 떠올랐다. 부재중 전화가 찍혔을 텐데 아버지에게 전화를 되걸었을까.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나랑 같이 지내고 있다는 소리도 했을 것 같은데, 이 상황이 어떻게 보였을까…….
“연오야?”
“응?”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태헌이 핸드폰을 건네고 있었다.
“전화 오는데.”
표시된 이름을 보니 기호였다. 그제야 소개팅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굳이 물을 필요가 없기도 했고, 태헌 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연오는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응, 기호야.”
태헌은 엿듣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괜히 주방을 치우고 케이크 상자를 정리하고 물도 한 잔 따라 마셨다. ‘기호.’ 소개팅 이야기가 나왔을 때 들은 이름이라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인천지부 동료라고만 들었는데 가이드일까, 에스퍼일까.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라면서 무슨 밥이야? 나중에 진짜 사귀면 사줘. 응? 애프터 때문에 왔다면서 현종이 형은 또 왜 끌고 왔어?”
귀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띄엄띄엄 이어지는 목소리는 들어야 했다. 더는 할 일이 없어진 태헌이 연오 아래 앉자, 연오가 태헌을 힐끔 바라보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 손을 좀 다쳐서 왼손으로 밥 먹어야 하거든. 외식은 불편할 것 같은데.”
손을 다쳤다는 소리에 반대편에서 놀라 소리를 질렀는지 연오가 핸드폰을 귀에서 살짝 떼어냈다. 큰소리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박이정과만 친한 줄 알았는데 저쪽과도 꽤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병문안 올 정도는 아니야. 아니, 안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무슨 말을 또 그렇게까지 해.”
투정 부리는 막냇동생을 달래듯 연오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타박하는 투인데도 말에 가시가 없어서 다정하게만 느껴졌다. 태헌에게도 익숙한, 그러나 요즘은 거의 들은 적 없는 봄바람 같은 음성이었다. 눈 그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태헌이 조용히 손끝을 헤집었다.
“그럼 기숙사로 와. 그건 괜찮을 것 같아. 어…… 점심 때쯤? 너 저녁에 서인이 만난다고 했으니까 일찍 보고 일찍 헤어지자.”
시간을 정하고 통화를 마친 후에도 연오는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태헌은 자신이 절대 엿볼 수 없을, 연오만의 시절과 연오만의 관계를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전에도 연오에게는 대학 동기들이 있었고 그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연오가 대학 생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기 때문에, 태헌은 동기들의 이름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오늘은 누구와 만나니까 술을 많이 마시겠네, 오늘은 누구와 만나니까 카페에서 수다만 떨다 오겠네……. 이름만 듣고도 그런 짐작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태헌은 자신을 피해 인천으로 가야 했던 연오가 만난 동료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 먼저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고, 연오 또한 굳이 공유할 필요 없다고 여기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지금 통화한 사람이 연고도 없는 인천에 덜렁 떨어진 연오를 위로해 줬을까. 연오와 얼마나 친한 동료로 지냈을까. 당일에 전화해서 만나자고 졸라도 웃으며 만나 줄 정도니 무척 가까웠던 게 분명하다.
“태헌아, 나 이따 점심에 내 방에 내려갈게. 동료들 온대서.”
“응.”
“소개팅하는 거 아니니까 울지 말고.”
창피함이 울적함을 걷어찼다. 태헌은 그만 놀리라고 투덜거리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정오 무렵, 태헌은 됐다고 만류하는 연오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가이드 단말기며 핸드폰이며 챙겨야 할 짐이 있었으므로 연오도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마자 기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는 전화인 줄 알았는데, 이미 연오의 방 앞이라고 했다.
[음식 너무 많이 사서 무거워요. 형, 왜 안 나와요?]
“미안, 나 지금 바로 내려가.”
약속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한다는 예의를 칼같이 지킨 기호와 현종 덕분에 태헌은 그들과 제대로 대면할 수 있었다. 센터 앞 식당에서 포장한 게 분명한 음식을 양손에 바리바리 싸든 그들은 연오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기호는 낯선 사람이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연오에게 달려와 호들갑을 떨어 댔다.
“형, 붕대 왜 이래요? 조금 다친 거라면서요!”
정신없이 걱정하는 기호를 진정시킨 건 현종이었다. 그는 연오의 손을 한 번 확인한 후 기호가 혹시라도 다친 곳을 건드리지 않도록 옆으로 살짝 밀어냈다. 태헌의 존재를 먼저 언급한 사람도 현종이었다.
“일단 문 좀 열어줘. 옆에는……?”
“안녕하세요. 정태헌입니다.”
태헌이 현종의 손에서 묵직한 봉투를 받아 들며 인사했다. 이름을 말하자마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어…….”
현종은 물론이고 요란을 떨던 기호까지 행동을 멈추었다. 시끄럽던 영상을 일시 정지한 듯한, 기묘한 침묵마저 맴돌았다.
태헌은 의식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소문이 어떤지는 본인이 잘 아는 바라 이런 반응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짐을 대신 들고 어찌어찌 문까지 여는 태헌을, 기호와 현종은 멍하게 지켜보았다. 신을 벗고 짐을 식탁에 올리는 태헌은 난폭하고 예민하다는 소문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다.
“들어가자.”
연오는 그들을 재촉해 안으로 들여보냈다. 기호가 연오 옆에 딱 붙어서 속닥거렸다.
“진짜 정태헌 에스퍼예요?”
“응.”
“오오…….”
‘오오’라니. 괜한 감탄사에 픽 웃은 연오는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오른쪽 손등이 어디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행동이 느려졌다.
태헌은 그새 현종이 들고 온 음식을 풀어서 식탁에 세팅하고 있었다. 현종은 말없이 그쪽을 도우러 갔고, 기호만이 연오 옆에 달라붙어 재잘거렸다.
손은 어쩌다 다쳤는지, 붕대는 언제까지 감고 있어야 하는지 묻더니 자기 어머니도 음식을 하다가 다리에 화상을 입어서 엄청나게 아파하셨다는 얘기까지 줄줄 늘어놓았다. 대화 주제가 바뀌고 바뀌어 연오가 소개해 준 동기 이야기까지 나왔을 때쯤 세팅이 끝났다. 기호와 가까이 붙어 선 연오를 힐끔거리지 않으려고 이제껏 온 힘을 다한 태헌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연오야, 그럼 이따가 연락해 줘.”
현종이 깔끔하게 인사하는 태헌을 힐끔 바라보고 연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만 시키고 보내는 듯한 느낌이라 찜찜한 모양이었다. 마침 기호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기에, 연오는 떠밀리듯 그를 붙들었다.
“밥 먹고 갈래? 음식이 너무 많기도 하고.”
“그래요. 밥 먹고 영화도 볼 건데 같이 봐요.”
붙임성이 좋은 기호가 현종보다 먼저 나섰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제안에 태헌이 크게 흔들렸다. 안 그래도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연오의 한 시기를 엿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에 뜻밖의 동석 제안이 무척 반가웠다. 태헌은 연오도 썩 꺼리는 기색이 아님을 확인한 후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편하지 않으시면 같이 먹을게요.”
모두가 둘러앉은 식탁은 화기애애한 이야기로 풍성했다. 태헌은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어느 정도 관계를 파악했다. 주로 떠드는 사람은 기호였고, 그를 어린애 대하듯 하며 조금 선을 넘는다 싶은 질문도 다 받아주는 쪽은 연오, 경청에 신이 나서 점점 더 흥분하는 기호를 자제시키는 이는 현종이었다. 나름대로 균형과 역할이 있는 관계였다.
태헌은 말을 줄이고 기호의 이야기에 적당히 호응하며 웃어 주기만 했다. 두 손은 연오의 앞접시에 음식을 가져다 놓느라 분주했다.
“서인이랑은 어때? 잘 맞을 것 같아?”
“누나가 먼저 에프터 신청했어요. 첫인상은 되게 소심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말도 많이 하고 밝아요.”
“하긴, 나도 처음에 서인이 봤을 때 엄청 조용한 사람일 줄 알았어. 근데 같이 점심 먹으러 갔다가…….”
조곤조곤 이어지는 연오의 목소리가 음악 같았다. 그에게 전화조차 함부로 걸 수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렇게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태헌은 전에 몇 번 들은 적 있던 서인이라는 동기 이야기를 하나하나 귀담아들으면서 뼈를 바른 등갈비를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연오 형도 첫인상 조용했는데.”
“맞아, 연오 그랬지.”
“사실 조용하다기보다는 좀 슬픈 느낌?”
기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태헌이 뼈를 놓쳤다. 연오는 식탁에 떨어진 뼈를 접시로 옮기는 태헌을 힐끔 본 뒤 난감한 듯 되물었다.
“내가?”
“형 맨날 눈 부어서 왔잖아요. 울었냐고 하면 슬픈 영화 봐서 그렇다고 하고.”
“으음.”
연오는 별다른 대답 없이 태헌이 먹기 좋게 발라 준 고기를 입에 넣었다.
“우리끼리 그때 형 센터에서 실연당하고 온 거 아니냐고 했었어요. 맨날 울고 오니까.”
“……그래?”
“게다가 몸도 안 좋았고. 막 곧 죽을 것처럼.”
“김기호, 그만해.”
현종이 기호의 팔을 툭 건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기호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느냐며 투덜거렸고, 식탁의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현종은 태헌과 연오의 얼굴을 번갈아 딱 한 번씩만 바라본 후에 말을 돌렸다.
“오늘은 웃긴 영화 볼 거야. 너 뭐 보고 싶은지 정했어?”
“당연하죠. 한 달 전에 개봉한 건데…….”
잠시 부루퉁했던 기호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은 사람처럼 금세 회복해 이 말 저 말을 늘어놓았다. 기호를 말렸던 현종도, 잠시 태헌을 살피던 연오도 다시 대화에 참여했다. 의례적인 미소를 띤 태헌의 심장만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형 맨날 눈 부어서 왔잖아요. 울었냐고 하면 슬픈 영화 봐서 그렇다고 하고.’
‘게다가 몸도 안 좋았고. 막 곧 죽을 것처럼.’
태헌은 연오가 너도 좀 먹으라고 권해서 앞접시에 덜어 둔 고기 조각을 억지로 입으로 가져갔다. 연오의 지난 시기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고기는 소화될 수 없는 시간처럼 유난히 질겼고, 맛도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
“연오야.”
영화도 끝나고 기호의 약속 시간도 다가와 헤어질 때가 되었을 때, 현종이 연오를 조용히 불렀다. 식탁을 치우는 태헌과 기호를 도우려고 일어나던 연오가 다시 소파에 걸터앉았다.
“네?”
“무슨 문제 없는 거지?”
“문제요?”
“저 사람이랑.”
‘저 사람.’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연오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밥을 먹는 동안, 또 영화를 보는 동안 현종은 태헌을 늘 ‘정태헌 에스퍼’라고 불렀다. 내내 예의를 지키다가 호칭을 달리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문제라면 어떤 문제를 말하는 걸까. 가이드끼리 소문이 빠르다 해도 자신과 태헌의 오래된 관계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을 텐데.
현종이 설거지를 시작한 태헌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물소리가 이 짧은 대화를 차단해 줄 것이다.
“너 두 번째로 인천 왔을 때 너무 안 좋아 보였어.”
“……그래요?”
“센터로 돌아가서 저 사람 가이딩한다고 했잖아. 그러고 나서 돌아왔는데 갑자기 회복 프로그램 참여하고. 그때 너 곧 죽을 것 같았어. 당연히 저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소문도 좀 있었고.”
명확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또 태헌에 대한 말을 퍼뜨리고 싶지도 않아서, 연오는 모호한 끄덕거림으로 답했다. 다행히 현종도 특별히 설명을 강요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분위기가 나쁜 것 같진 않은데, 그냥 신경 쓰여서 물어봤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낸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나와 연오는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오른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할 소리는 아니지 싶었지만, 적어도 현종이 걱정하는 부분은 괜찮았다. 태헌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서, 첫눈이 내릴 때까지만 해도 악을 쓰며 그를 비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연오의 대답에 조금 안도한 듯 현종이 소파에 툭 등을 기댔다. 그러더니 장난스러운 말투로 속삭였다.
“너한테 각인했대?”
“……사생활이라 제가 말하긴 좀 그래요.”
“사귀어?”
“그런 거 아니에요.”
빙글빙글 웃으며 묻는 얼굴을 보면 현종이 왜 기호와 어울리는지 알 것 같다. 매사 진지할 것 같아도 이런 순간에는 기호와 비슷했다. 오래 알고 지내지 못하기도 했고 나이 차이도 크지 않아 박이정만큼 의지가 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여겨 봐주고 걱정해 준 것은 무척 고마웠다.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다고 좌절했던 인천지부 시절에도 가까운 사람들은 늘 있었던 것 같다.
“그래. 별일 없어도 자주 연락해.”
연오의 왼팔을 툭 친 현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호에게 다가간 그는 사귈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뭐가 묻은 옷을 입고 가도 되겠느냐며, 빨리 나가서 새 옷을 사든지 하자고 재촉했다. 태헌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얼쩡거리던 기호는 뒤늦게 가슴팍에 튄 얼룩을 보고 화들짝 놀라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태헌에게 같이 못 치워서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태헌은 두 사람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현종은 마지막으로 연오의 얼굴을 확인한 후 태헌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방문객이 떠난 후, 연오와 태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태헌아.”
“응?”
“바빠? 도와줄까?”
“손 다쳤잖아.”
태헌이 무슨 말이냐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런데 웃는 얼굴이 밝지 않아서, 연오는 선뜻 싱크대 옆으로 물러나지 못했다. 태헌도 상황의 어색함을 알아차리고 다시 끼려던 장갑을 잠깐 내려놓았다. 달싹이는 입술이 경직되어 있었다.
“너 인천에서 그렇게 힘들었던 거 몰랐어.”
연오는 깨끗하게 치워진 식탁에 기댔다. 시선이 비스듬히 맞닿았다.
태헌이 또 사과할까.
지나간 일에 대한 사과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풀리는 건 사실이다. 전부 내가 선택해서 겪은 일이니 억울할 필요 없다고 믿었던 일들도 사실은 응어리로 남았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정성 어린 사죄에 풀어지는 감각은 되풀이해 겪어도 싫지 않았다.
그렇지만 관계를 풀어가기로 한 이상, 과거의 모든 일을 꼬투리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봐야 의미 없는 일이기도 하고.
“지나간 얘기 하지 말자. 이제 어쩔 수 없잖아.”
이걸 용서와 이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거창한 말보다는 놓아줌이 맞을 것이다. 아픈 과거 하나하나를 들이밀며 물어내라고 요구하지 않을 거라면, 언젠가는 잊어야 한다.
태헌은 연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연오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는 그의 입술에 쓴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난 하나하나 보상해주고 싶어. 네가 혼자 외롭고 아팠던 거 전부 잊게 해주고 싶어.”
모든 일을 대충 뭉뚱그려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 과거가 청산되는 것인가. 후회하고 있어, 그런 것만으로 마음이 전달되는가. 때로는 구차하리만치 긴 말이 필요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연오의 말 역시 옳았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내가 어떻게 해도 보상할 수 없고 잊게 할 수 없겠지. 그래서 너도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일일이 얘기 안 하는 거잖아. 말해도 의미 없으니까.”
“…….”
“그래도 난 말할래.”
“…….”
“너한테 목숨까지 빚지고 인천까지 쫓아 보낸 거, 그러고 나서 필요하다고 다시 찾은 거, 너 그렇게 계속 혼자 둔 거…… 미안해. 그래놓고 아파서 그랬다고 변명만 한 것도.”
누구에게나 수치스러운 시기가 있다.
돌아보면 그게 정말 나였나 싶은 시절. 지금에 비하면 너무나 미성숙하고 부족해서, 그 모습 역시 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시절. 성장한 후에는 거울을 보며 내가 항상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부끄러운 과거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런 추잡스러운 게 나였을 리 없다고 부인하다가, 결국은 깨진 거울 앞에서 참혹하게 부끄러워야 했던 그날.
죽어 없어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강렬한 수치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오의 동료들이 인천지부 시절을 언급했을 때도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그때의 일을 입에 담으며 사과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정말, 너한테 안 부끄러운 사람이 될게.”
태헌은 연오의 말간 눈 앞에서 늘 거울을 볼 때처럼 발작적인 수치에 사로잡혔다. 무거운 책망 없이도, 날카로운 비난 없이도.
오래전부터 강연오는 그의 양심이었다.
세상의 꾸지람보다 양심의 가책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알게 한 유일한 사람.
연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처음 자세 그대로 멈춰 버렸다.
태헌은 집요하게 파헤치고 끈질기게 부끄러워했다. 오히려 대충 넘어가고 싶었던 쪽은 연오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둘 다 살았으면 된 거 아니냐고, 마음에 박힌 가시야 시간이 가면 삭고 녹아 저절로 빠지지 않겠느냐고, 적당히 모르는 척하고 기적에 감사하자고, 우는 태헌을 감싸며 그런 다짐을 했는지도.
나에게 작은 슬픔도 얹고 싶지 않아 고통을 감추었던 네 얼굴을 그려 본다. 그러더니 이제는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 하나도 자기 것처럼 아파하는 너를 바라본다.
“알았어.”
겨우 대답하자, 태헌이 무거운 분위기를 애써 걷어내듯 미소를 지었다.
“여기 마저 치울 테니까 소파에라도 앉아 있을래?”
연오는 태헌의 표정을 확인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를 두고 자리를 옮기는 내내 심장 언저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연오는 태헌의 뒷모습을 혼자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괜히 코끝이 간질거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뭔가 계기가 필요하다.
손을 다친 연오를 도우며 보낸 며칠 동안 태헌은 그 필요에 골몰했다.
연오와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연인은 아니었다. 서로 눈을 맞추고 함께 식사하고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물론 연오는 착하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관계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가 연오가 더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
최선을 다해 매달려 보겠다고 다짐했다. 버려질 때 버려지더라도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하고 싶은데…….
“나 먼저 들어가 잘게.”
게다가 요 며칠, 연오가 자신을 피하는 것도 문제였다.
인천지부의 동료들이 왔다 간 후 연오의 태도가 변했다. 전까지는 데면데면하거나 어색한 순간이 있어도 태헌과 함께 있어 주었는데, 요즘은 잠이나 휴식을 핑계로 혼자 침실로 가는 일이 잦았다. 태헌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외면하기도 했다.
그날 자신이 뭔가 잘못했을까. 태헌은 초조함을 감추며 한 가지를 권해 보았다.
“샤워할래? 아까 씻고 싶어 했잖아.”
지금까지는 태헌이 머리만 감겨 주었다. 물기를 전부 제거한 욕조에 연오를 앉히고 머리를 난간에 대고 뒤로 젖히게 해 샴푸질까지 해 주었다. 샤워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다는 연오를 이기지 못해, 그가 불편하게 혼자 씻도록 내버려 둬야 했지만.
“씻고 자고 싶긴 한데.”
“내가 씻겨 줄게.”
샤워까진 괜찮다고 사양하던 연오가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사실 어제만 해도 손이 미끄러져 붕대를 흠뻑 적실 뻔했다. 오늘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아무리 오래 공들여 씻어도 괜히 깨끗하지 않은 느낌에 찜찜하기도 하고.
확실히 태헌이 도와주면 편하기는 할 텐데…….
“옷 꺼내놓고 안에 준비 좀 할게.”
연오의 망설임에서 대답을 읽은 태헌이 급히 방 안을 뛰어다녔다. 옷을 준비한 그가 욕실로 들어간 후에는 뭔가 꺼내는 소리, 내려놓는 소리, 물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연오는 이게 잘한 일인가 고민하면서도 천천히 욕실로 향했다.
연오가 앉을 플라스틱 의자까지 준비한 태헌이 샤워기 물 온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연오는 성한 손으로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몸을 보이는 게 새삼 부끄럽지는 않다. 그야 당연히, 둘은 자주 밤을 함께 보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모호한 관계에서는 아무래도 조금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태헌을 의식할 때마다 기분이 조금…….
“연오야.”
샤워기를 들고 돌아보는 태헌의 얼굴은, 잠자리 따위는 조금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진무구했다.
“얼른 들어와.”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내내 의식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조심조심 탈의하고 맨발로 욕실에 들어서자 태헌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아직 바닥이 제대로 젖지도 않아 미끄러울 일이 없다는 걸 뻔히 알 텐데도. 맨살에 부드럽게 감기는 손가락이 길고 단단했다.
“앉아서 여기 오른팔 올려 봐. 젖으면 안 되니까.”
연오는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욕실이 추워질까 싶어 문을 닫고 돌아온 태헌이 샤워기 물을 연오의 발치에 뿌려 주었다. 물이 발끝을 적시는 느낌이 묘했다.
“어때?”
“괜찮아.”
곧 적당히 따뜻한 물이 연오의 어깨를 적셨다. 온수가 목과 어깨를 타고 아래로 흐르자 무척 개운했다.
태헌의 손은 담백하게, 어떤 성적인 함의도 없이 연오의 몸 곳곳을 닦아냈다. 심지어 허벅지 안쪽이나 매끈한 종아리를 쓸고 지나갈 때도 그랬다. 다치기 쉬운, 그래서 무척 조심스럽게 다뤄야 마땅한 아이를 씻기는 손길에 가까웠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씻기느라 태헌의 옷이 점점 젖어갔다. 편안한 면바지긴 해도 젖어서 좋을 건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태헌을 보는데, 그가 종아리를 씻기느라 몸을 숙이자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졌다. 곧은 목선과 옷을 팽팽히 당기는 어깨도 함께 눈에 들어왔다. 열중한 얼굴이 진지했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아.”
자연스레 치솟은 감각은 솔직히 반사 반응에 가까웠다.
연오는 젖은 왼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거품을 씻어내는 태헌의 손이 치골을 문지르고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허벅지가 조금 팽팽해지고 말았지만.
태헌이 기억을 잃은 후, 한 번도 ‘이런 쪽’으로 태헌을 의식한 적은 없었다. 몸은 엉망으로 망가진 데다 기억을 잃은 태헌은 어린애나 다름없어서 욕구가 동할 수 없었다. 기억을 찾은 후에도 마음의 문제가 너무나 중대해 성적으로 의식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연오가 속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종아리로 내려가는 태헌의 손을 밀어냈다.
“이, 이제부턴 내가 할게.”
“…….”
“너 옷도 다 젖었고. 빨리 가서 갈아입어.”
봤을까. 당연히 봤겠지. 소개팅 가지 말라고 엉엉 울다가 오해인 걸 깨달은 태헌이 딱 이만큼 부끄러웠을까. 몸이 반응한 건 어쩔 수 없지만 태헌에게 그걸 환히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는 정말 아무 사심 없이 씻겨 주고 있는데 혼자 갑자기…….
“연오야.”
샤워기가 바닥에 놓였다. 태헌의 손은 자연스럽게 연오의 허벅지로 올라왔다. 재차 가라고 말하려던 그때.
“내가 해줘도 돼?”
홱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부딪혔다. 자기 감각을 추스르느라 몰랐는데, 흠뻑 젖은 맨살에 올라온 태헌의 손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뜨거웠다.
심지어 그의 눈은.
“뭘…… 뭘 한다고?”
고백하던 시절의 소년 같던 무구함은 어디로 갔는지,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네 거.”
한마디씩 발음할 때마다 태헌의 입이 둥글게 벌어졌다. 연오는 저 안의 온도를 알고 있었다.
“입으로 해줄게.”
연오는 한 발을 뒤로 물렸다. 태헌이 손을 올리고 있는 다리는 어째서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야?”
“빨아줄게.”
적나라한 단어에 연오의 입술이 굳어 버렸다.
샤워기에서는 여전히 온수가 나오고 있었다. 둘의 침묵을 물소리가 갈랐다. 연오는 욕실로 들어오라고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요요한 기운마저 감도는 태헌의 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연오의 허벅지에 얹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고 여린 안쪽으로 애를 태우며 들어오는 손길은 애무나 다름없었다.
“받고 싶은 선물 생각났어.”
“…….”
“너를 달라고는 못 해도…….”
끈질기게 이어졌던 시선이 툭 끊어졌다. 연오의 다리를 밀어 공간을 만든 태헌이 넓지 않은 곳에 두 무릎을 다 대고 꿇어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입술이 허벅지에 닿았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까지 그가 집요하게 매만진, 은밀한 안쪽에.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어.”
네 기분이 좋아져서, 날 완전히 허락해 줄 마음이 들게. 착한 너는 나처럼 ‘기분 탓이었어.’라며 결정을 번복하지도 않을 테니까.
연오는 아득히 태헌을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야 많았다. 오늘은 네 생일도 아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지금 우리가 이럴 관계는 아니지. 그러나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그런지 머리가 굳어 버렸다. 네 거 해주고 싶어. 빨아줄게. 나 잘해. 연달아 들은 말 때문에 세상이 빙빙 돌았다.
“너도 알잖아…… 나 잘하는 거.”
잊고 있던 순간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무릎을 잡아 벌리고 사이에 자리 잡던 정태헌. 가벼운 입맞춤으로 시작해 점점 대담하고 농밀해지던 애무. 그만하라고 울먹거리면서 애원할 지경이 되어야 겨우 입을 떼고 물러나던…….
그러나 그때도 태헌은 자기 입으로 ‘잘한다’는 말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태헌이가 이런 음담패설도 할 줄 알았나?
“아, 아니…….”
“섹스하자는 거 아니야. 너만 기분 좋게 해 줄게.”
태헌이 한마디 할 때마다 젖은 살에 숨결이 느껴졌다. 연오는 안쪽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완전히 동요했다. 태헌의 머리카락이 이미 발기한 성기를 조금씩 건드리고 있었다. 간지럽히는 것 같기도 하고 작정하고 자극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태헌은 다른 일은 모른다는 듯 연오의 허벅지를 애무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혀로 정성스럽게 핥다가 아프지 않게 이를 세워 잘근거렸다. 충분히 자극한 부위에 입술을 붙인 후, 허락을 구하듯 약하게 빨아들여 엷은 자국을 남겼다. 연오의 몸에 남은 불그스레한 자국, 예전에 남기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태헌은 환희에 잠겼다. 연오가 한 번 만져주지도 않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중심이 단단히 일어났다.
“연오야.”
연오가 다리를 오므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무릎을 잡고 조금 더 벌렸다. 아직 이성이 남은 연오가 다리에 미약하게 힘을 주었다. 태헌은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다시는 그럴 수 없었다.
“허락해 줘.”
대신 그는 내내 숙였던 머리를 들고 연오를 올려다보았다. 물에 젖은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나 정말 잘할게…….”
착한 아이 같은 애원에 다리가 벌어진 건 연오의 의도가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태헌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내 주변만 맴돌던 입술이 마침내 선단에 닿았다. 곧장 혀를 내밀어 핥던 전과는 달리, 태헌은 한동안 애를 태우듯 입술만 대고 있었다. 잔잔한 숨결이 예민해진 곳을 간지럽혔다.
느릿하게 벌어진 입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갔다.
예전처럼 핥지 않고 곧바로 입에 머금자 연오의 당황이 여실히 느껴졌다. 연오의 발끝이 오므라들며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연오는 태헌의 머리를 밀어내기 위해 왼손을 얹었지만, 어쩐지 팔에 조금도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숭배하듯 무릎을 꿇고 성기를 빠는 태헌의 머리가 앞뒤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에 얹힌 손 역시 무력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순한 짐승처럼 이를 감춘 태헌이 한껏 입을 벌려 연오의 것을 최대한 삼켜냈다.
“흣…….”
연오가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잔뜩 민감해진 성기 끝이 태헌의 입천장을 긁는 감각이 너무 생생했다. 태헌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며 깊이 삼키자, 선단은 좁고 살이 연한 목구멍에 파묻히듯 닿았다.
태헌이 소리도 없이 생리적인 구역질을 했다. 그만하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목구멍이 조여들며 엄청난 쾌감이 엄습했다.
“읏, 태헌, 아…….”
태헌의 머리에 얹힌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머리카락을 움켜쥐다시피 했는데도 태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연오가 처음으로 보인 명확한 반응을 붙들고 더욱 깊이 달려들었다. 구역감을 참고 목구멍을 조인 태헌이 미끈한 종아리를 야릇하게 쓸어올렸다. 그 손이 음란한 목적을 품고 성기의 뿌리로 접근했다.
태헌은 성기 아래를 감싸듯 쥐고 움직임을 재개했다. 목에서 빠져나온 성기가 다시 그의 입천장을 쳤다. 입 안을 강하게 조인 그가 코로 긴 숨을 내쉬자, 숨결이 닿은 곳이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태헌은 성기를 문 채 정성껏 혀를 움직였다. 안에서 핥아지는 감각이 오싹했다. 연오는 이러다 정말 태헌의 머리를 잡아당기기라도 할까 봐 탁 손을 놓았다.
그러나 연오가 강제로 당겼다 해도 태헌만큼 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읏!”
태헌이 순식간에 목을 열었다. 목구멍 끝에 걸쳐진 성기가 위아래로, 또 앞뒤로 흔들리며 선사하는 쾌감에 이성이 점점 흐려졌다. 태헌은 신음을 참지 못하는 연오 아래서 그의 쾌감에만 집중했다. 아플 정도로 일어나 있는데 손길 한 번 받지 못한 제 아래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성적인 필요에 의해 불려온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봉사했다.
빨리 사정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간질간질한 쾌감을 최대한 길게 느끼게 하려는 듯 완급을 조절하기까지 했다. 이러다 목이 다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깊이 삼켰다가 절정이 가까워졌을 때 얕은 곳에 머금고, 시시하고 지루해지기 전에 둥근 손톱으로 연약한 살을 긁어 새로운 자극을 더했다.
“태헌아, 그만…….”
태헌의 노력과는 별개로 정말 쌀 것 같았다. 혹시 그의 입에 사정할까 봐 억지로 머리를 밀어내려는 연오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잠시 입을 뗀 태헌이 안달 난 얼굴을 했다. 당장 사정할 것처럼 선 걸 뻔히 알 텐데 연기는. 태헌이 이것저것 숨기는 데 능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순간에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태헌은 붉게 달아오른 연오의 얼굴을 황홀하게 우러렀다. 기억을 잃은 후로는 연오를 늘 울리기만 했는데, 좌절하게만 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연오의 허리를 감싸자 간헐적인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연오가 흥분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때문에.
“입에 해줘.”
“너 진짜 무슨…….”
“선물 미리 줘, 응?”
턱이 뻐근하고 무리하게 벌어졌던 입이 아팠다. 계속 이를 감싸느라 입술 안쪽도 아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태헌은 어떤 내색도 없이 연오의 성기 끝을 애교스럽게 핥아 올렸다. 바짝 선 성기가 혀의 움직임에 따라 튕기듯 움직였다. 입에 물고 있을 때보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움직임에 연오가 끝내 고개를 돌렸다.
태헌이 자신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있는 상황 자체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정성껏 빠는 소리와 살과 살이 마찰하는 소리도 질척하게 귀에 달라붙었다.
허락을 조르듯 성기를 핥던 태헌의 입술이 성기 끝으로 미끄러졌다. 얕게 물고 선단만을 집요하게 자극하자 금세 한계가 찾아왔다. 연오는 어쩔 줄 모르고 태헌의 어깨를 쥐었다. 밀지도 당기지도 못하는 어설픈 손짓이 태헌을 더욱 부채질했다.
태헌이 연오의 손을 잡아 자신의 뒤통수로 이끌었다. 언뜻 보기에는, 연오가 태헌의 위치를 고정한 모양새였다. 태헌의 머리가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오갔다. 사정을 유도하는 몸짓에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며 피가 한 곳에 몰렸다. 연오는 본능처럼 태헌의 머리를 세게 움켜쥐며 고개를 쳐들었다.
파정의 순간, 태헌은 물러나는 대신 연오의 모든 것을 입으로 받아냈다. 연오는 밭은 숨을 내쉬며 꿈쩍도 하지 않는 태헌을 내려다보았다. 시선만 위로 올린 태헌이 사탕이라도 선물 받은 듯 눈웃음을 치자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정태헌.”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는데 사정의 여운 때문에 목소리가 크게 나가지도 못했다. 이만한 쾌감은, 정말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태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연오의 것을 문 그대로 입에 든 것을 삼켰다. 다시 한번 안이 조여지며 저린 쾌감이 덮쳐왔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태헌이 마침내 연오의 것을 뱉어냈다.
내내 물고 있었으니 턱이 아플 게 분명한데, 그는 내색하지 않고 투명한 방울이 맺힌 연오의 성기 끝을 할짝거렸다. 방금 자기가 뭘 삼켰는지 전혀 모른다는 투였다. 경악한 연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너…… 너 그걸 먹으면 어떡해.”
전에도 태헌이 자주 해주긴 했지만 입에다 사정한 적은 없었다. 항상 사정하기 전에 성기를 뱉게 했고 태헌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에다 정액을 받아내고 삼키기까지 하다니.
“왜?”
깨끗하게 닦아주듯 연오의 성기 끝을 핥던 태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각도가 야릇했다. 수작질인 게 뻔히 보이는데도 연오는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선물 고마워, 연오야.”
마지막 입맞춤을 끝으로, 태헌이 정말로 물러났다.
다리 사이를 다시 씻는 동안 연오는 무척 멍했다. 방금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오직 자신의 쾌락을 위해 성심껏 애쓴 태헌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하는지, 아까 아니라고는 했지만 태헌이 섹스를 원하는 것인지, 아직 관계가 제대로 정의되지도 않았는데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하나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태헌은 보송하게 마른 수건으로 젖은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 줄 뿐이었다. 오른손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옷까지 입혀준 후에야, 태헌은 마침내 연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 안 해도 돼.”
“…….”
“나한테 선물 준 거야.”
부채감 같은 건 갖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나한테 너그럽게 베풀어준 거라고, 완전히 못 박은 태헌이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더 허둥거리며 침실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연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연오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뻐근한 턱을 조금 매만질 수 있었다. 마음이 조금, 허전하고 불안했다.
만족한 거겠지?
자주 써 주면 좋을 텐데. 몸으로라도 붙잡아 볼 수 있게.
-
“사이즈 찾아 드릴까요?”
직원이 가까이 오는 줄도 몰랐던 연오가 움찔 놀랐다. 직원은 의례적인 미소를 띠고 상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구두처럼 깔끔한 디자인이라 공식적인 자리에 신고 가기도 괜찮고, 내구성이 좋아서 활동하기에 좋고, 세탁과 관리도 간단하다는 말이 길게 이어졌다.
연오는 한참 보고 있었던 끈 없는 남색 운동화를 들어 올렸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밑창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미끄러지기 쉬운 재질은 아니라고,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보탰다.
“280도 있나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은 재빠르게 돌아왔다. 그는 당연히 연오가 신어 볼 거라고 생각한 듯 자리를 권했지만, 그건 연오가 신을 신발이 아니었다.
“계산해주세요. 선물이라서.”
“아, 그러면 포장 도와드릴게요.”
백화점이라 포장도 남달랐다. 이렇게 거창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포장지와 리본이 들어갔다. 그런데도 완성된 모양은 조잡하지 않고 깔끔했다.
계산을 마친 연오는 포장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쇼핑백을 챙겼다. 브랜드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쇼핑백이 걸을 때마다 다리를 스쳤다. 어쩔 수 없이 태헌이 떠올랐다.
‘복잡하게 생각 안 해도 돼. 나한테 선물 준 거야.’
그런 걸 선물로 칠 수는 없었다. 태헌의 생일을 어떻게 챙겨야 하나 고민하긴 했지만, 선물을 주지 않으면 태헌 말대로 욕실에서 벌어진 일이 선물이 될 것 같았다.
그 뒤로 며칠이 지났지만 둘 사이에 같은 일이 생긴 적은 없었다. 분위기가 형성된 적은 있어도 연오가 응하지 않았다. 사실 연오는 자신이 그때 왜 태헌의 행동을 용납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분위기에 넘어갔다 해도 당연히 거절할 기회가 있었다. 정말 싫다고, 하지 말라고만 했으면 태헌은 바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연오는 떨면서도 다리를 벌려 주었다. 태헌이 바지를 적시며 젖은 바닥에 꿇어앉는 것을 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대체 왜?
‘네가 마음 정할 수 있게, 나로 할 수 있게…… 내가 노력해 봐도 돼?’
태헌의 말대로 마음을 정한 것일까. 옛날처럼 돌아가기로 한 것일까.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했다.
태헌은 부담 갖지 말고 선물 준 셈 치라고 했지만 연오는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그 이후, 자신이 태헌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
“연오야.”
차 앞에서 기다리던 태헌이 얼른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통에 같이 오긴 했지만 선물을 태헌 앞에서 고를 수는 없었다. 쇼핑은 혼자 하겠다는 말로 그를 여기 남겨뒀는데, 차에서 핸드폰 게임이라도 하면서 기다리지 내내 밖에서 서성거린 모양이다. 태헌은 연오가 산 게 자기 선물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한 채로 짐을 뒷좌석에 싣고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춥겠다. 얼른 타.”
백화점은 더울 정도였고 주차장도 그리 춥지 않은 데다, 어제 다녀온 병원에서 체력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는 진단까지 받았는데도 태헌은 늘 전전긍긍이었다. 바람이 쌀쌀해지자마자 독감에 걸려 앓았던 연오를, 앞으로 겨울마다 이럴 거라는 의사의 말을, 내내 잊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히터를 미리 켜 놓은 덕에 차 안은 실내만큼이나 따뜻했다. 온열 시트까지 작동시킨 태헌이 손을 다친 연오를 대신해 안전벨트를 채워 주었다. 그와 몸이 지나치게 가까워진 그 순간에,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시선을 내리자 태헌의 곧은 목이 시야에 걸렸다. 체향이 가까워지고, 맞닿은 곳도 없는데 온기가 전해졌다. 집중하면 태헌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오는 성한 왼손으로 시트 가장자리를 살짝 움켜쥐며 찰나를 견뎠다. 태헌이 이렇게 몸을 숙이고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입술을 묻었던 그 순간이, 갑자기 떠올라서…….
“연오야.”
찰칵, 벨트가 물리는 소리와 함께 태헌이 멀어졌다. 곧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연오는 그제야 호흡을 조금 편히 할 수 있었다.
“응?”
“뭐 샀어?”
“그냥.”
네 선물 샀다고, 운동화인데 괜찮아 보였다고, 이따가 집에 가서 신어 보든지 생일날 풀어 보든지 하라고, 그 말을 하기가 어쩐지 쑥스러웠다. 방금 자기 혼자 느낀 야릇한 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필요한 거 산 거야?”
“응.”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간단히 대답하자 태헌이 살금살금 눈치를 살폈다. 본인은 티가 안 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창밖을 보는 연오의 뺨이 따끔거릴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었다. 겨울 햇살이 튀는 횡단보도 앞에 차가 멈춰서자 태헌이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옆에 앉아 있기만 해도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연오는 그가 욕실에서의 일을 언급할까 봐 불안했지만.
“나도 너한테 사 주고 싶은 거 많은데.”
“…….”
“손 다 낫고 너랑 쇼핑하러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짐도 들어줄 수 있고…….”
연오와 태헌 사이에서 내내 걸리적거리는 문제가 언급되었다. 빌붙은 게 아니냐며 거지 운운했던 말 때문에 흔한 겨울 목도리 하나 선물할 수 없는 처지가 된 태헌은, 이번엔 같이 쇼핑을 가자고 조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옷도 골라줄 수 있고. 나 그래도 옷 잘 고르잖아.”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태헌은 옷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치고 이것저것 잘 골라 입는 편이었다. 에스퍼로 각성한 후에는 반복되는 훈련과 전투로 몸이 가다듬어져 티 한 장만 걸쳐도 태가 났다. 센스와 몸이 전부 받쳐주니 그가 입는 옷은 다 괜찮아 보여서 연오도 대학교에 다닐 때는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태헌은 자기가 골라 준 옷을 입고 동기들과 술을 마시러 가는 애인을, 웃는 얼굴로 보내 주곤 했었다.
“좀 그렇지? 그냥 말해 봤어.”
연오가 선물이나 쇼핑 동행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는지 태헌이 발을 뺐다.
연오는 신호가 바뀔 때까지 대답을 고민했다. 다음에 같이 쇼핑하자고 할까, 아니면 사실 네 선물 산 거니까 기숙사로 가서 뜯어보라고 할까.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 기숙사 주차장에 섰다.
“잠깐만.”
태헌이 안전벨트를 풀어주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연오의 어깨가 다시 경직되며 등이 뒤에 딱 붙었다. 벨트를 푼 태헌은, 곧장 물러나는 대신 그런 연오를 살폈다.
“연오야. 혹시…… 그날 별로였어?”
다시 그날 일이 언급되자 연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뭐, 뭐가?”
“욕실에서. 오랜만이라 내가 제대로 못 했나 해서.”
부끄러운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이 물어오는 태헌은 연오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안 그래도 그때 이후로 태헌이 몸을 붙일 때마다 의식하고 있는데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을 받을 줄이야.
“아니, 그게 제대로 하고 못 하고가 뭐 있어.”
문 쪽으로 몸을 빼며 중얼거리자 태헌의 얼굴이 변했다. 별로라는 대답보다 더 충격적이었는지 그가 풀 죽은 눈을 내리깔았다.
“다음에 기회 주면 더 잘할 수 있어.”
노골적인 말에 연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태헌은 연오의 어느 곳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지만, 지나간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태헌과 한번 그런 일을 하고 나자 까맣게 잊었던 욕구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연오는 피가 몰리는 중심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겨우 고개를 저었다.
“너 계속 그렇게 하면 목 다쳐.”
거절하려고 하는 소리기도 하고 진심이기도 했다. 정말 걱정해서 한 말인데 태헌은 속도 좋게 웃었다.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그날 목 아팠을 거 아니야.”
“안 아팠어. 나 요령껏 잘해.”
설마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는 건가. 몸으로 꼬셔 보는 쪽으로 노선을 바꾼 건가. 실력을 주장하는 태헌이 너무 진지해서 그냥 농담으로 받아넘기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태헌은 잠깐 분위기를 살폈다가, 그다지 음담패설 같지도 않은 진중한 어조로 이렇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아침에도 해줄 수 있어.”
얘가 정말 미쳤나?
“정태헌.”
“…….”
“올라가자. 나 추워.”
태헌은 꼬리를 흔들다가 걷어차인 개처럼 재빨리 물러나더니 조수석 문을 열어 주려고 급히 달려 나갔다. 연오는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짐 좀 가져와 줘. 나 먼저 갈게.”
태헌을 두고 휙 앞서가면서 연오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성큼성큼 걷는 내내 아침에도 해줄 수 있다고 어필하던 태헌의 얼굴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한겨울인데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다. 들어가자마자 한 손으로라도 세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연오야.”
엘리베이터 앞에서 연오를 따라잡은 태헌이 얼른 말을 붙였다.
“혹시 그날 더러웠으면…….”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 말에는 침묵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에서 눈을 뗀 연오가 곧바로 태헌을 돌아보았다. 자기 선물인 줄도 모르는 쇼핑백을 한 손에 든 태헌이 움찔했다.
“그런 거 아니고 좋았, 좋았어.”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기숙사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눌 대화는 아니지 않나. 그러나 별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를 더럽다고 비하하는 태헌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진 않았다.
좋았다는 짧은 평가에 태헌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 일을 두고 좋았네, 싫었네, 논하는 게 지독히 예의 없는 짓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태헌은 한없이 기쁘기만 한 것 같았다. 뭐라고 말하려는 듯 벌어지는 입술이 욕실에서처럼 붉었다.
아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연오는 자기 생각을 지우듯 재빨리 내뱉었다.
“아침엔 됐어. 그, 너무 자극적이고, 아무튼 좀 그래.”
“연오야, 나 앞으로 더 연…….”
“엘리베이터 왔어.”
구원처럼 문이 열려 ‘연’ 뒤에 이어질 말을 듣지 않아 다행이었다. 더 붉어질 수도 없을 정도로 붉어진 연오가 따라오려는 태헌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다.
“너…… 넌 다음 거 타.”
“응? 왜?”
“아무튼 다음 거 타라고.”
닫힘 버튼을 연타하자 놀란 태헌의 모습이 사라졌다. 연오는 벽에 등을 기대고 심호흡을 했다. 태헌과 같이 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터져버리기 직전의 얼굴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