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균열을 넘어서 (15/23)

12장. 균열을 넘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연오는 붕대를 풀었다. 태헌의 도움을 받아 주의 깊게 관리한 덕분에 흉은 거의 남지 않았고, 살갗이 벗겨진 듯 보이는 붉은 기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거라고 했다. 흉이 사라질 때까지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연고를 발라 주라는 충고를 끝으로 연오의 오른손은 자유를 얻었다.

센터 병원까지 함께 갔던 태헌은 별다른 이야기 없이 연오의 곁을 지켰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데, 정작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잘 나아서 다행이다.”

“네가 도와줘서 그래. 고마워.”

태헌은 읽을 수 없는 연오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우연이 겹쳐 얻어낸 기회는 손가락 사이로 하나씩 빠져나가 버렸다. 연오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어쩐지 끝이 다가온 것 같아 태헌은 조바심이 났다.

연오도 나름대로 머릿속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복잡한 병원 복도를 빠져나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천천히 벌렸다.

“태헌아, 너랑 할 얘기…….”

목소리를 꺼낸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것뿐이었다면 무시했을 텐데, 태헌의 핸드폰도 함께 울렸다.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연락을 확인했다.

[해당 문자 수신자는 금일 19시까지 지하 1층 대회의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에스퍼 본부]

연오가 받은 문자도 발신자가 가이드 본부일 뿐 내용은 똑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균열에 직접 들어가야 하는 에스퍼가 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균열 독을 이겨낼 수 없는 가이드는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치료에만 힘쓰면 되므로 회의에 참석할 이유가 많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회의실에 에스퍼와 가이드가 동시에 모이는 모양인데, 이렇게 사람을 소집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핸드폰을 꼭 움켜쥐는 연오에게서 불안이 읽혔다. 태헌은 연오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주었다.

“별일 아닐 거야. 같이 가자.”

연오는 겨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주간 지속되었던 평화에 금이 가는 듯한 환청이 그의 발뒤꿈치를 붙든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그래서 연오는 태헌의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

오후 일곱 시 정각. 창밖은 다가올 재앙을 예고하듯 캄캄하게 물들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주연은 지하 회의실에 모인 S급, A급 에스퍼들과 그들을 담당하는 가이드들을 바라보았다. 정태헌과 박이정, 강연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떻든 이번 위기를 잘 넘기려면 저 세 사람의 능력이 가장 절실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잠깐 심호흡을 한 뒤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맞췄다. 썩 밝지 못한 분위기에 전부 긴장한 상태였다. 그녀 옆에 앉은 김현철의 표정 또한 어두웠다. 앞으로 무슨 말이 나올지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걱정을 두 어깨에 짊어진 모습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곧바로 본론을 얘기하겠습니다. 예측기 결함이 잘 고쳐졌습니다. 보완되었다고 해야 맞겠죠. 그런데 이 보완된 예측기가 출력한 결과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한주연 뒤로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한주연이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한강을 중점으로 균열 러시가 예측됩니다. 광나루역 인근에서 처음 시작되고, 강을 따라 새로운 균열이 시간 차이를 두고 연달아 발생할 것으로 관측되었습니다. 물길을 따라 분열하는 균열인 셈인데, 강을 계속 따라가면 경기도는 물론이고 양평까지 번질 겁니다. 전국의 에스퍼들이 지원을 위해 서울로 오고 있으니 협력해서 피해를 막아야 합니다.”

연오는 화면에 떠오른 지도와 강을 따라 점점이 이어지는 붉은 점을 아연히 바라보았다.

평화는 무섭다. 본래 아주 귀한 것인데, 며칠만 지속되면 당연해지기 때문이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태헌이 균열에서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그래서 평화가 깨지고 나면 재앙을 생전 처음 겪는 사람처럼 두려워진다.

태헌이 하얀 테이블 아래로 연오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다친 손, 이제는 움직여도 괜찮은 오른손이었다. 진정하라는 뜻이 전해져 연오는 의식적으로 호흡을 이어갔다. 태헌의 체온이 도움이 되었다.

“이 자리에 가이드까지 모은 이유는, 반나절에 걸친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커서 모두의 체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전처럼 몇 시간이나 하루 정도 대기하다가 가이딩을 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에스퍼들이 전투 전략을 세우는 만큼 가이드 여러분도 체력 안배에 주의해야 합니다. 상황이 만만하지 않으니까요.”

“…….”

“가장 중요한 건 폭주를 방지하는 겁니다. 균열 러시 상황에 폭주하는 에스퍼까지 나오게 되면, 대기하는 가이드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어요. 균열 괴물이 아닌 에스퍼가 도심을 파괴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각자 충분히 대화하고 미리 협의하고 몸 상태를 공유해서 불상사가 없기를 바랍니다. 특히 전담 가이드 여러분.”

기분 탓일까, 한주연의 시선이 연오에게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책임이 막중합니다. 다른 가이드가 본인의 에스퍼를 책임질 수 없는 경우라면 더 그렇고요. 모두가 안전할 수 있게 미리 가이딩을 충분히 해 두기 바랍니다.”

붙어 앉은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 분주한 속삭임이 오갔다.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정확히 인지한 모두의 표정이 무척 진지하게 변했다. 패닉에 빠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몇몇이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는 했지만 크게 어수선해지지는 않았다.

“그럼 균열 러시의 정확한 경로와 에스퍼 조 배치, 예측된 균열의 종류를…….”

뒤부터는 연오가 들어도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가이드들은 조를 나누어 버스나 순간이동으로 자리를 옮기기 때문에 인솔에만 집중하면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연오는 불안한 마음에 한주연의 설명을 경청했다.

태헌은 자신과는 달리 현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침착했다. 여전히 연오의 손을 잡고 있기는 했지만 그건 연오를 위해서지 자기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연오는 또 훌쩍 어른처럼 변한, 어쩌면 까마득한 선배처럼 보이기도 하는 태헌의 옆얼굴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여기까지입니다. 시민 대피 안내는 이미 끝났으니 우리만 움직이면 되고, 삼십 분 후에 바로 출발합니다. 각자 준비하고 1층으로 모이세요.”

회의를 빙자한 작전 전달이 끝난 후 한주연이 집결 시간을 통보하자 모두가 웅성거리며 급히 움직였다. 예측에 따르면 균열 러시가 시작되는 시간은 오늘 밤 열 시. 앞으로 세 시간도 남지 않은 셈이니 다들 의논할 게 많을 법도 했다.

태헌과 회의실 밖으로 나오니 복도 공기마저 유난히 스산하게 느껴졌다. 기분 탓일 거라고 생각해 봐도 소용없었다. 연오가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교차해 상체를 감싼 순간, 두툼한 옷이 어깨에 덮였다. 차림이 가벼워진 태헌이 굳건한 얼굴로 연오를 보고 있었다.

“얼른 가서 옷 갈아입자. 너 감기 걸리면 안 돼.”

“넌 괜찮아?”

“나? 난 괜찮지.”

태헌은 안 괜찮을 이유가 없다는 투로 대답하고 연오를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중이라 혼잡했지만 태헌이 감싸 준 덕분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사람 많은 엘리베이터로 한주연과 김현철이 쑥 들어왔다. 본부장이 둘이나 타자 저마다의 이야기로 시끄럽던 엘리베이터도 갑자기 조용해졌다. 연오도 두 사람과 간단히 묵례만 주고받은 후 침묵을 지켰다.

당연히 본부장실로 올라가거나 다른 준비를 위해 떠날 줄 알았는데, 한주연은 연오와 같은 층에서 내렸다.

“연오야. 몸은 괜찮지? 예측기 때문에 영 신경을 못 써줬네.”

“문제없어요. 감사합니다.”

“그래, S급 에스퍼가 많지 않아서 가이드 역할도 중요해. 중간에 가이딩할 시간 없을 수도 있어. 그래서 말인데…….”

“본부장님.”

태헌이 연오 앞을 살짝 막아섰다. 연오는 그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 어른거리는 적의만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 마세요.”

“정태헌, 너 때문에 얘기하는 거잖아. 너 폭주할까 봐.”

“알아서 조절하니까 괜한 소리 마시라고요.”

태헌은 곧바로 연오를 이끌어 한주연과 멀어지게 했다. 한주연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연오만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주연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태헌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는 듯한, 연오의 의아한 옆모습을 보며 탄식을 삼켰다.

한편 연오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는 태헌과 나란히 걸으며 질문에 대한 답을 재촉했다.

“방금 무슨 얘기였어? 가이드 역할도 중요한데, 그러고 뭐?”

“가이딩 많이 해주라는 소리야. 우리 이미 충분히 하고 있고, 나도 만성 가이딩 부족 벗어난 지 몇 달 됐으니까 괜찮아.”

“그런 거면 우리가 알아서 할 텐데 따로 찾아와서 말씀하실 리가 없잖아.”

기숙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태헌이 마침내 연오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걱정이 심하시다, 그렇지? 예전에는 엄청 강한 에스퍼였다는데 자리 때문인지 세월 때문인지.”

웃는 얼굴이 가면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연오는 이번에 명백한 거짓의 기미를 알아차렸다.

“솔직하게 말해 줘. 아니면 박이정 에스퍼한테 전화하게.”

“……왜?”

“중요한 얘기였을 것 같은데 네가 감추니까. 적어도 박이정 에스퍼는 나한테 솔직하거든.”

박이정은 위험할 수 있는 전용 가이딩 약 이야기도 숨기지 않고 해주었다. 각인 가이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어쩌면 그가 태헌만큼 연오의 안전에 민감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만, 진솔한 태도가 연오의 신뢰를 산 건 사실이었다.

“연오야.”

태헌은 정말 박이정에게 전화를 걸려는 연오를 붙들었다. 너는 나한테 감추는 게 너무 많다고, 무언의 책망이 어린 시선 때문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겨우 관계를 이만큼 개선해 놨는데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태헌은 마르는 입술을 적신 후 최대한 건조한 어조를 만들어냈다.

“성 가이딩 하라는 말 하려고 했을 거야.”

“……성 가이딩?”

“키스라든지…… 그 이상이라든지.”

사실 대체로 성 가이딩은 섹스를 뜻하지만 키스 이야기만 듣고도 깜짝 놀란 연오에게 너무 구체적인 단어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헌은 오늘따라 더디게 내려오는 듯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점막 가이딩이 접촉 가이딩보다 효율적이기도 하고, 에너지의 질도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아무래도 밤부터 아침까지 싸우게 될 테고, 균열 하나 없앨 때마다 와서 가이딩 받을 수도 없으니까 미리 에너지 비축하라는 소리였겠지.”

사실 에스퍼 본부장으로서 할 수 있는 권유였으므로 그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태헌은 그녀가 자신이 아닌 연오를 붙잡고 그런 말을 한 게 못 견디게 싫었다. 연오라면 거절하지 못할 줄 알았나 보지. 한주연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기 말을 들을 만한 상대를 쏙쏙 골라내는 짓은 정말 경멸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라서 말 안 하려고 한 거야. 난 점막 접촉 없이도 잘할 수 있고, 너한테 각인해서 문제없어.”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쥔 연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문제없을 거라는 태헌의 말을 믿기가 어려웠다.

예측기에 의하면 균열 러시는 오늘 밤부터 시작되어 동틀 무렵에나 끝난다. 반 시간에서 한 시간 단위로 다음 균열이 열리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균열을 없애고 곧장 다음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니 태헌 말대로 매번 가이딩을 해줄 수도 없는 상황. 한주연이 왜 성 가이딩을 권유하려고 했는지 단숨에 이해가 갔다. 그녀로서는 S급 에스퍼의 폭주 위험을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띵.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연오는 자기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러시를 앞두고도 겁먹은 기색이 없는 태헌을 바라보다가 신발코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태헌에게는 익숙한 일일 것이다.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 태헌을 믿고 기다리다가 돌아온 그에게 에너지를 나눠주면 된다.

그런데 만약, 중간에 에너지가 고갈되어 태헌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가이드가 대기하는 장소로 옮겨지기도 전에 숨이 끊어진다면?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심장도 함께 쿵쾅거렸다. 불안이 큰 보폭으로 다가와 연오를 집어삼켰다. 어느새 연오는 연명실에 있었고 균열에 있었다. 죽어가는 태헌을 앞에 두고 좌절하던 그 시절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태헌의 방 앞이었다. 카드키 대는 소리에 비로소 현실이 인지되었다. 연오는 넋이 쑥 빠진 채 태헌을 따라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 채로 신발을 벗는, 그 간단한 동작조차 어렵게만 느껴졌다.

“연오야, 일단 밖에 추울 테니까 겉옷부터 좀 더 단단히 챙기고…….”

뒤로 이어진 말이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시간은 여덟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균열 러시까지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고, 집결 시간을 생각하면 여유 부릴 틈은 전혀 없었다.

숨이 턱 막히며 몸을 태우는 불안이 발끝에서부터 치받았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자신과 비슷한 공포를 내비치지 않는 태헌의 태평함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빨리 준비하자. 사람들 몰려서 서둘러야 해.”

“태헌아.”

마음이 분주하던 태헌이 뒤를 돌아보았다. 가까스로 신을 벗고 현관 근처에 선 연오의 얼굴이 처참했다.

“왜 그래? 괜찮아?”

급히 걸음을 옮긴 태헌이 연오를 붙들었다. 체온이 섞이자 연오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시끄러운 소리가 났지만 연오는 몸을 굽혀 줍지 않았다.

대신 그는 태헌의 팔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어디에 이런 힘이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강하게. 새하얗게 질린 손끝을 보는 태헌에게, 벼락같은 제안이 내리꽂혔다.

“우리 하자.”

태헌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너무 당황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물을 수도 없었다. 재촉하고 나선 사람은 지금까지 내내 태헌과 거리를 두려 애써 왔던 연오였다.

“못 할 거 없잖아. 너 위험해지는 것보단 빨리 하는 게 낫지. 이제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에너지 비축해서 나쁠 거 없고…….”

태헌은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연오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지끈거린다. ‘못 할 거 없잖아.’라니, 마치 정말 못 할 일을 입에 담는 것 같다. 하기 싫지만 참으려면 참을 수 있다는 말 같아서 가슴께가 뻐근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혹하게 태헌을 할퀸 것은 반쯤 이성을 잃은 듯한 연오 자체였다. 죽음을 접하며 살아 온 그의 마음에 뿌리내린 공포였다. 태헌은 생생하게 전해지는 연오의 고통을 자기 마음으로 받아 안았다.

“연오야, 진정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네가 어떻게 확신해.”

연오가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

지금까지는 문제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전에 괜찮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말은 사고의 오류일 뿐이다.

연오는 위험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까지 뿌리 뽑고 싶었다. 섹스 가이딩, 그래, 욕실에서 그런 짓도 했는데 진짜 섹스는 못 할 게 뭔가. 어차피 태헌이 기억을 잃기 전에도 섹스는 여러 번 했었고 이제는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는데. 붕대를 풀고 나오면서 다짐한 바도 있지 않은가.

“하자. 시간 없어, 빨리.”

연오는 급한 일을 얼른 해치워버리려는 사람처럼 서둘렀다. 그러나 태헌은 자신을 지나쳐 침실로 가려는 연오를 붙잡아 부드럽게 돌려세웠다. 한때 둘만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던 행위를 무슨 보험처럼 얘기하는 연오의 모습이 심장에 파편처럼 박혀 들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아프다고 징징거릴 수는 없다. 일단은 연오를 안심시키는 게 먼저였다.

“전에는 이거보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도 많았어. 가이드 없을 때 말이야. 근데 항상 살아남았고, 이번에도 똑같을 거야.”

에너지도 상처도 회복할 수 없는데, 위급한 상황이라는 이유로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되었다. 이따금 폭주했지만 그 폭주를 이용해 균열을 정리한 적도 있었고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해지지도 않았다. 물론 고통은 늘 한계에 달했지만 그래도 태헌은 늘 살아남았다.

균열의 핵에서 으깨진 두 번도 결국은 살아남지 않았던가. 태헌은 자기 목숨이 꽤 질긴 편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을 연오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 연오가 저렇게 슬프고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도록.

태헌은 연오의 손을 굳건히 움켜쥐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빠짐없이 교차했다. 단단한 결속이 확인된 순간 내내 아랫입술을 짓이기던 연오가 입을 열었다.

“하기 싫어서 그래?”

“……뭐?”

“안 내켜서 그러냐고.”

태헌은 자기도 모르게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거절해. 난 불안한데, 난 네가 또 죽어서 돌아올까 봐…….”

목이 메어 연오의 말이 끊어졌다. 이건 연오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 지금은 가이딩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태헌에게 도움만 된다면 나가기 직전까지도 한 침대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그러고 싶었다.

태헌이 연오를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연오는 바람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기억 잃었을 때도 나는 목숨 걸고 널 협박했잖아.”

실컷 괴롭혀 놓고, 마음대로 휘두르고 화풀이를 해 놓고, 폭주할 때마다 죽을 것 같으니 살려달라고 했다. 첫 번째는 분노였고 두 번째는 애원이었으나 연오 입장에서는 결국 둘 다 협박이었다. 태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던 연오의 얼굴에 새겨져 있던, 깊은 무력감과 좌절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기 싫어.”

“내가 괜찮다잖아. 내가…….”

“너 안 괜찮아.”

단호한 선언에 연오가 우뚝 멈추었다. 태헌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으면서도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지금 엄청 떨고 있어.”

한번 보라는 듯 태헌이 연오의 손을 놓아주었다. 연오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았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손이 이상할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연오는 본능처럼 두 손을 맞잡고 이를 악물었다. 태헌이 말해 준 후에야 경련이 인지되었다. 게다가 가슴에서부터 솟는 한기도 심상치 않았다. 극도의 긴장과 불안이 체온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설령 정말 섹스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해도 이런 상태로는 절대 못 해. 너 쓰러져.”

연오는 진정하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를 노련하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조절되지 않는 몸에 화가 치밀어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태헌이 연오를 천천히 소파에 앉혔다. 유령처럼 소파 끝에 걸터앉은 연오는, 떨리는 어깨에 담요 한 장이 둘러질 때까지 턱에 힘을 주고 앉아 있기만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정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자 괜히 흥분만 더해갔다.

“연오야. 내 말 좀 들어 봐.”

태헌이 스스럼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연오의 두 손을 모아 쥔 그가 조심스럽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성적인 의도가 조금도 읽히지 않는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가 새로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우리 같이 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든 난 네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잖아.”

캄캄한 마음의 유일한 등대였던, 연오가 있는 집. 한강이 보이는 창가를 서성거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연오를 생각하면 죽을 수가 없었다. 어떤 아픔도 견딜 수 있었고 어떤 폭주도 결국에는 진정시킬 수 있었다.

태헌의 미소가 약속처럼 눈부셨다.

“이번에도 그럴 거야.”

“…….”

“언제나 그럴 거야.”

설령 우리가 정말 끝난다 해도. 우리가 끝내 에스퍼와 전담 가이드 정도의 무미건조한 사이로 남는다 해도. 그러니까 네가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나는 한결같이 너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정해진 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별처럼.

“그러니까 정 불안하면 이렇게 손잡고 가이딩해 줘. 다른 때처럼, 그냥 평소처럼.”

연오의 눈이 저무는 듯 떨렸다. 태헌은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 애처로운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연오도 거부하지 않을 걸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틈 없이 맞물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해줄 거지?”

연오가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평정심을 잃은 그는 동요를 조금도 감추지 못했다. 마음을 잡지 못한 연오를 보며 태헌이 살짝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이제 이십 분 정도밖에 안 남았어. 시작하면 이십 분 안에 못 끝내. 한 번만 할 순 없잖아.”

“……뭐라고?”

연오의 입이 퐁 벌어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지금이 농담할 상황인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는 얼굴이 황당했다.

“지금 농담이 나와?”

“농담 아니고 사실이 그렇다는 건데. 심지어 저번에 욕실에서도 십 분은 계속…….”

“정태헌!”

때아닌 음담에 목덜미까지 시뻘게진 연오가 태헌의 손을 야멸차게 뿌리쳤다. 방금까지 무척이나 급박하고 아련했던 것 같은데, 태헌의 몇 마디 말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런 소리 그만하고 빨리 짐이나 챙겨.”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 말이면 성공이었다. 한 번만 할 수 없으니 이십 분 안에 못 끝낸다는 둥, 욕실에서도 십 분은 있었다는 둥 하는 소리 때문에 맥이 탁 풀려 버렸으니까.

그래, 어쩌면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이 아닐지도…….

태헌은 웃음기마저 어린 얼굴로 일어났다. 연오도 함께 돌아다니며 옷과 방한용품을 꺼냈다. 혹시 중간에 기운이 떨어져 가이딩을 하지 못할까 싶어 냉장고를 열어 에너지 음료까지 챙겼다. 예전처럼 태헌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쓰러지고 싶진 않았다.

둘은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에스퍼와 가이드는 물론 기자들까지 가세해 혼잡했지만, 연오는 태헌과 함께 공간 이동실로 안내받았다. 상황이 급한 만큼 S급, A급 에스퍼는 전부 공간이동을 통해 움직일 계획이라고 했다.

미리 와 있던 박이정과 무슨 정신으로 인사를 나누었는지, 시공간의 틈을 억지로 비집는 듯한 불쾌하고 답답한 공간이동을 어떻게 견뎠는지, 강바람이 몰아치는 한강에 도착해 가이드 대기실로 이동하며 뭘 봤는지, 연오는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사람도 너무 많았고 다들 뭐라고 떠들어대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겨우 상황을 인지했을 때, 태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공간이동을 담당하는 에스퍼가 빠른 속도로 설명을 쏟아내고 있었다.

“일단 가이드님은 S급 에스퍼 전담이니까 계속 제가 이동시킬 겁니다. 균열 열리는 간격이 좀 길면 정태헌 에스퍼가 와서 가이딩 요청할 거고 짬이 안 나면 건너뛸 건데,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계속 이동하면서 따라갈 거예요. 짧은 텀으로 계속 공간이동 하게 되면 멀미 날 수도 있어요. 약부터 드세요.”

눈앞으로 멀미약이 쑥 내밀어졌다. 연오는 멍한 정신을 수습하며 재빠르게 약을 삼켰다.

사방이 엉망이었다. 가이드들이 대기하는 천막이 말소리 때문에 터져버리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공간이동 에스퍼는 물론이고 지원 나온 센터 직원들, 담당 가이드와 인사를 나누러 온 에스퍼들, 갑작스럽게 벌어진 긴급 상황에 놀란 가이드들이 동시에 떠들어대자 그야말로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주위가 너무 소란스러우니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어려웠다.

연오가 겨우 초조함을 억누르며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만 주문처럼 외고 있을 때, 천막을 걷으며 태헌이 나타났다.

“연오야.”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운 공간에서도 태헌의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연오에게 닿았다.

연오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이미 균열로 진입할 모든 준비를 끝낸 태헌은, 외투도 하나 입지 않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균열에 들어가면 어차피 거추장스러워 벗어야 하니 미리 어디에 맡겨 둔 게 분명했다.

“곧 시작될 거래. 바로 가봐야 해. 인사만 하려고 왔어.”

뭔가 말하려던 연오가 지나치게 시끄러운 천막을 의식하며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태헌은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갈 사람치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연오를 따라갔다.

휴대용 온풍기를 가동한 데다 사람이 많아 후끈한 천막과는 달리 바깥 공기는 싸늘했다. 하얀 입김도 사나운 바람 때문에 순식간에 흩어졌다.

연오는 별이 박힌 하늘 아래 선 태헌을, 당장이라도 사라질 듯한 태헌을 막막하게 눈에 담았다.

“걱정하지 마. 다들 걱정이 지나친 거야.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

지우지 못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태헌이 구구절절한 위로를 건넸다. 그런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힘이 될지 알 수 없어서, 연오는 잠시 침묵을 고수했다. 아까 천막 안에서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서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무사히 돌아오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서로를 격려했을까?

지금 태헌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나.

네가 죽을까 봐 무섭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 봐야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위험과 의연하게 마주할 수는 없더라도, 무언가 태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저번에 백화점에서 산 거, 네 생일 선물이야.”

뜬금없는 말이지만 태헌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것이다.

연오는 눈만 동그래진 태헌을 보며, 쇼핑백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침실에 보관한 선물을 떠올렸다. 생일도 조금 남았고, 뭐라고 하면서 건네줘야 할지도 몰라서 구석에 방치한 상자를. 예쁘게 포장된 그것은 마치 길을 잃은 연오 자신의 마음 같았다. 어디에 안착해야 할지 모르는 선물 같은 사랑.

“돌아오면 그거 줄게.”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다.

“연오야.”

태헌은 이미 신발보다 훨씬 더 값진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환희에 젖어 있었다.

“내 생일에는 같이 못 있었잖아. 네 생일에는 같이 있고 싶어.”

“…….”

“앞으로도. 계속.”

태헌은 떨지도 못했다. 그는 연오의 말을 한 자 한 자 주워 담듯 집중하느라 완전히 멈춰 버렸다. 연오는 균열 러시 앞에서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던 그가 자신의 한마디에 목숨이라도 달린 듯 긴장한 것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아프게 웃었다.

“무사히 와 줄 거지?”

태헌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치받는 감정을 삼키는 그의 입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응.”

그 짧은 약속을 뱉기 위해.

“다시는 너 실망 안 시켜.”

“…….”

“나 꼭 돌아올게.”

물소리가 났다. 다리를 지나다니는 지하철조차 멈춘 지금, 사방이 고요했다. 마음만 먹으면 서로의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울고 싶었지만 웃고 싶기도 했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대로 계속 침묵하고 싶기도 했다.

연오가 창백한 두 손으로 태헌의 뺨을 감쌌다. 물소리에 잠길 듯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가이딩 때문 아니야…….”

어떻게 그 따뜻한 입술을 거절할 수 있을까?

눈을 감자 어둠이 찾아왔고, 입술이 겹쳐지자 낙인처럼 새겨진 과거의 아픔이 지워졌다. 숨이 섞이며 이해할 수 없던 많은 일이 저절로 이해되었다. 살아 돌아올 것을, 또 살아서 기다릴 것을 약속하면서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사랑은 영원한 찰나.

서로가 없는 계절을 두려워하며 놓아 버리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기적.

아주 잠시간 바람이 멎었다.

“연오야.”

태헌이 제 뺨에 얹힌 연오의 손을 덮었다. 그는 늘 그랬듯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꿈일까 봐 무서워…….”

바보 같은 소리라는 듯, 연오가 떨면서도 웃었다. 밤 풍경을 등진 그 모습이 찬란하게 아름다워서 태헌은 이 모든 것이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 다녀와. 기다릴게.”

설령 이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 해도 나는 온 힘을 다해 살아 돌아와야 할 것이다.

너의 슬픔은 한낮의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응.”

짧은 대답을 남겨두고 뒤돌아 멀어져가는 태헌을, 연오는 제자리에 선 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옷자락, 뛰는 몸짓, 돌아보는 얼굴의 미소, 그를 감싼 풍경, 무엇 하나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오늘의 밤하늘은 상실의 검보라색이었다.

그러나 연오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태헌을 기다릴 것이다.

-

첫 번째 균열부터 상황이 쉽지 않았다.

미로 형태인 데다 이제껏 잘 관찰되지 않았던 형태라 길을 찾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두 조로 흩어져 움직였는데, 두 번째 조를 지휘하던 A급 에스퍼가 길을 찾다가 함정에 걸려 중상을 입었다. 가구로 위장한 트랩에 고스란히 삼켜질 뻔한 그는 한쪽 다리가 너덜너덜해진 채 부축을 받아 겨우 일행에 합류했다.

핵 파괴가 늦어진 탓에 가이딩 받을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연오를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먼발치에 선 모습을 언뜻 본 것 같기는 한데 곧장 다음 균열로 이동해 뛰어들어야 했다.

박이정 에스퍼도, 다른 지역에서 온 S급 에스퍼도 각자 다른 균열을 파괴하는 중이라 태헌은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져야 했다. 그는 예민하게 주위를 살폈고 부상자를 분리했으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괴물들을 제거해 나갔다. 몸은 금세 피와 진액으로 엉망이 되었다. 자잘한 상처도 늘어갔다. 균열을 하나씩 파괴할 때마다, 구더기 같은 균열 벌레가 상처로 자꾸 기어들었다.

가이딩 한 번이면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균열이 생성되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 틈을 내는 게 불가능했다. 에스퍼들은 빈사 상태에 이르지 않는 이상 조에서 이탈할 수 없었다.

세 번째, 네 번째…….

펑!

자폭 몬스터에게 휘말린 에스퍼의 몸뚱이가 허공에 포물선을 그렸다. 옷자락은 물론 살갗까지 타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그가 태헌 바로 옆에 내리꽂혔다. 커다란 시궁창 쥐 크기인 자폭 몬스터를 한곳으로 모는 데 집중하던 태헌이 이를 악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빨리 데려가!”

태헌을 엄호하던 A급 에스퍼 하나가 서둘러 달려와 부상 입은 에스퍼를 끌어냈다. 태헌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힘없는 비명만 토하는 에스퍼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당분간 가이딩은 기대할 수도 없다. 에너지를 조절하고, 과격하게 힘을 쓰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렇지만 이 속도라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몇 번째 균열인지도 잊었다. 몇 명의 동료가 쓰러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공중에서 뼈를 녹이는 산성비가 쏟아지고, 바닥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벽에서 가시 달린 손이 튀어나와 목을 조르고, 본 적도 없는 거대한 몬스터가 포효하며 앞을 가로막았다. 싸우고 베고 죽이고 도망치고 반격하고 압박하고 승리해도 다음 싸움, 다음 위기가 기다리고 있을 뿐.

같은 조에 편성된 에스퍼들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전투 불능에 빠진 이들은 가이드들이 기다리는 천막으로 옮겨졌지만, 에너지가 남은 이들은 곧장 다음 현장으로 투입되었기에 주위를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언젠가부터 태헌은 연오를 찾는 일조차 잊어버렸다. 지금은 연오와 의미 없는 눈 맞춤을 하는 것보다 살아서 그에게로 돌아가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러려면 현재에, 눈앞에 닥친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쓰러진 동료를 넘어 앞으로 내달렸다. 분명 넓은 강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데, 계속 균열에 들어와 있으니 공간 감각이 흐려졌다. 균열을 하나 파괴하고 밖에 나가서 어두워진 하늘을 봐도, 균열 안은 해가 뜬 듯 밝으니 꼭 밤낮을 오가는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시공간 개념이 무너지고 일그러지고 왜곡되었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었다.

‘태헌아.’

그때마다 태헌을 지탱한 것은 연오의 목소리였다.

사랑을 말할 때. 상처를 고백할 때. 기억 잃은 자신을 설득하려 했을 때. 죽으려 한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할 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흔들릴 때.

그때마다 연오는 그렇게 불렀다, ‘태헌아.’

폭음이 아주 가까이서 터졌다. 태헌은 자기가 이능을 끌어올려 하늘을 터뜨렸음을 깨달았다. 몬스터의 날개 수십 개가 파편처럼 주위로 떨어졌다. 철퍽, 철퍽, 살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기괴했다. A급 에스퍼들이 날개를 잃고 비명을 지르는 몬스터들을 하나씩 끌어 내려 죽였다. 새도 아니고 도마뱀도 아닌 무엇들이 검은 피를 튀기며 죽어갔다.

정신을 차렸더니 태헌 자신의 손에도 몬스터의 모가지가 들려 있었다. 뻣뻣한 깃털이 박힌 징그러운 머리통이었다. 사람의 해골을 연상시키는 머리를 내던진 태헌이 찐득한 입가를 문질렀다. 소매가 피투성이로 더러워졌다.

기억이 중간중간 지워졌다. 자신이 하는 일을 매 순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없었다. 위험한 신호였다.

‘태헌아.’

환각처럼 연오가 달려왔다. 당장 허물어질 듯한 난파선. 두 번째 폭주 가이딩을 위해 왔던 연오의 모습이었다. 자기 자신조차 구할 수 없으면서 남의 생명을 건지고자 망설임 없이 닻을 내리던 그 연약하고 강인한 얼굴.

일순 기억이 끊어지고 빛이 번지면, 또 한강에 서 있다. 온몸이 피에 젖어 질척한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열린 균열을 너무 오래 방치하면 괴물들이 도심으로 뛰쳐나온다. 공간이동 에스퍼는 막 균열을 파괴하고 나타난 에스퍼들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았다. 정작 그들을 이동시키는 본인도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분명 상황이 급박한 것 같은데 하나도 급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돌아갔다. 정신을 차리면 한강의 별. 다시 눈을 뜨면 괴물의 발톱에 등을 찢겨 피를 흘리고 있는 자신.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균열 밖. 몇 걸음 겨우 옮기면 몇 안 남은 A급 에스퍼들과 몬스터를 조각내고 있는 자신.

깜빡.

깜빡.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목이 마르고 숨이 가빴다. 가이딩 부족에 시달리던 그때 같았다. 어항에 갇힌 느낌, 끈적한 늪에 코 밑까지 잠긴 느낌. 까딱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위기감.

그러나 모든 감각이 남의 것 같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득히 먼 일로 느껴졌다.

“정태헌 에스퍼!”

경고 조의 외침과 동시에 둔탁한 꼬리 같은 것이 정면을 후려쳤다. 가슴팍과 복부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지며 잠시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몸이 붕 떠서 날아가고 있었다. 폭발에 휘말려 제 옆으로 떨어지던 이름 모를 에스퍼가 잔상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딱딱한 곳에 잘못 떨어졌는지 뒤통수와 등이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태헌은 바닥을 구르며 벌떡 일어났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녹색 꼬리가 쾅 후려쳤다. 흙과 돌 조각이 튀더니 비처럼 쏟아졌고 바닥이 움푹 꺼졌다.

수십 개의 꼬리를 휘두르는 변종이었다. 태헌은 살아 움직이는 뿌리처럼 자유롭게 공격하는 꼬리 사이사이를 오가며 두꺼운 가죽과 질긴 살을 자르고 뿌리를 불로 지졌다. 하나씩 침착하게. A급 에스퍼들이 위험 지대를 누비는 태헌을 엄호했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 생살이 불에 타는 누린내, 잘려 나간 꼬리가 뿜는 진액, 뒤통수에서 흐른 뜨끈한 피에 젖은 목덜미…….

혼란 그 자체였다.

천신만고 끝에 핵에 접근했을 때 태헌은 거의 탈진 상태였다. 에너지는 진작 바닥났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야 했다. 찐득거리는 눈가를 비비자 비린 피가 손에 묻어났다. 누구의 피인지 당장은 알 수 없었다.

‘태헌아.’

처음 핵에 뛰어들어 죽으며 사랑을 완성시켰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모든 일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사랑에 완성 같은 건 없다. 모든 감정과 모든 관계는 죽는 순간까지 미완이다. 그러니까 태헌은 연오에게 돌아가서, 불완전하고 부끄럽고 미완성인 사랑을, 마저 해야만 했다.

거대한 입처럼 벌어진 핵의 아가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불타는 금속을 잡은 듯 손바닥이 뜨거웠다. 활활 타는 듯한 고통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불살라 주었다.

태헌은 핵 깊은 곳으로 손을 뻗었다. 송곳니처럼 단단하고 뾰족한 무언가가 잡혔다. 태헌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힘을 준 탓인지 상처가 벌어지며 머리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눈앞이 아득하게 흐릿해졌다.

돌아가면 연오가 선물을 준다고 했지.

이번에는 내 모든 것을 허락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죽어서 너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은데. 네 일생 몫의 슬픔을 다 겪게 했으니 이제는 일생의 기쁨이 되어 주어야만 하는데.

파괴된 것은 균열의 핵만이 아니었다.

태헌의 몸이 작열했다. 별의 폭발처럼 엄청난 열이 발산되었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폭발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이 없었다. 폭주할 에너지 한 줌조차 남지 않은, 텅 빈 껍데기가 된 탈력감이 전부였다.

뭔가 이상하다.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일까.

너무.

너무 졸렸다.

-

태헌이는 무사할 거야.

연오는 어둠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기도처럼 되뇌었다. 겨울 하늘은 고요했으나 생각은 질풍처럼 몰아쳐 왔다.

그와의 관계를 끊어내고 싶었던 건 의심할 바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는 것이 두렵고 사랑하는 것이 두렵고 잃는 것이 두려웠다. 태헌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도, 때로는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마음의 뿌리를 뽑으려 들 때도, 선뜻 그를 허락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무서움 때문이었다.

그래도 태헌이는 무사할 거야.

그들에게는 늘 기적이 허락되었다. 가혹한 시련도 닥쳐왔지만 그래도 언제나 아침이 밝아왔다. 핵에서 죽었다던 태헌은 목숨을 부지한 채 돌아왔고, 기억을 잃고 잔인하게 굴다가도 결국은 눈물로 잘못을 고백했다. 영원히 끝나는가 했더니 마침내 기억을 되찾았고, 그 후에도 수많은 위험을 딛고 연오에게 달려왔다.

연오가 반기든 반기지 않든. 원망하든 그리워하든. 연오가 무수한 감정의 갈림길에서 헤맬 때조차 그는 늘 연오 곁을 맴돌았다.

“가이드님. 좀 마셔요.”

함께 기다리던 가이드가 따뜻한 물이 든 종이컵을 내밀며 속삭였다.

천막 안은 조용했다. 열 시부터 시작된 러시는 동이 터 오려는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대기하던 가이드들은 대부분 피로에 지친 몸을 간이 의자에 구겨 넣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피곤과 긴장, 침묵이 한 공간에 섞여 기묘했다.

“고맙습니다.”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마지막으로 잡았던 태헌의 손처럼 따스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연오는 마음을 굳게 먹고 물을 마셨다. 몰랐는데 갈증이 심했는지 따뜻한 물이 달게 느껴졌다.

연오는 종이컵을 건네준 가이드를 돌아보았다. 러시가 이어지는 동안, 자신처럼 담당 에스퍼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가이드였다. 비슷한 처지여서일까, 아니면 물 한 잔의 호의 때문일까, 연오도 그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곧 해가 뜬대요.”

“…….”

“끝날 거예요.”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격언은 사실이다. 천막 밖으로 나가자 매서운 바람과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어둠이 연오를 맞이했다. 서울을 벗어난 지 오래라 가로등도 많지 않았고, 강 풍경을 자랑하는 높은 카페나 식당도 불을 꺼 둔 상태라 사방이 캄캄했다. 천막이 선 곳은 강가의 자갈밭. 연오는 시큰한 눈을 비비며 심호흡을 했다. 한 걸음씩 앞으로 갈 때마다 발밑에서 자갈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곧 러시가 끝난다. 가이드 천막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게다가 태헌은 지금 마지막 균열에 들어가 있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뜰 테고, 그러면 태헌은 동트는 하늘을 가로질러 여명처럼 돌아올 것이다.

제발.

제발…….

그때, 천막이 젖혀지며 물을 챙겨 준 가이드가 달려 나왔다. 아직 덜 개발된 허허벌판의 강가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재빠르게 연오에게 다가왔다.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끝났대요. 마지막 균열까지 정리됐대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연오는 자기도 모르게 균열이 있다는 방향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주위가 혼란스러워지는 게 더 빨랐다. 연락을 받은 가이드들이 속속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함께 졸고 있던 직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밤을 지새우며 일을 마친 사람들 특유의 지나친 활력과 피로에 찌든 움직임이 순식간에 사방을 채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가 보았다. 자갈과 모래가 깔린 강변을 따라 귀환하는 에스퍼들을. 그들의 고단하고 지친 발걸음을.

천막에서 기다리던 가이드들이 멍하게 선 연오 곁을 스쳐 먼저 달려 나갔다. 어깨가 부딪힐 때마다 연오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이상하게 어지러웠다. 아마, 빛이 너무 희미해 아직 태헌의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선했음이 분명한데도 패전한 듯 지쳐 보이는 에스퍼들을 보며 발작처럼 불안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오는 간신히 걸어갔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한 지점에서 만났다. 그들은 각자의 파트너를 찾아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옆으로 비껴가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말 없는 포옹으로 마음을 나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태헌도 오지 않았다.

“태헌아.”

겨우 쥐어짠 목소리가 남의 것 같았다.

“태헌아! 정태헌!”

연오는 와글와글 몰린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며 태헌을 목놓아 불렀다. 미칠 것처럼 무서웠다.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차라리 쓰러지면 편할까. 그러나 연오는 그만큼 약해지지는 않았다. 태헌이가 돌아온다고 했어. 돌아온다고, 나한테 돌아온다고.

“태헌아!”

새벽빛이 강을 따라 눈부시게 비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생명이라는 선물을 누리는 사람들 틈에서 연오는 덩그러니 혼자였다. 힘이 쑥 빠지며 어지러워서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는데,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일 수도 없었다.

울고 웃으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다 거짓말 같다. 분주하게 주위를 정리하며 어서 센터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직원들도 환각 같다. 산을 끼고 흐르는 강도 미숙한 화가의 그림처럼 밋밋하기만 하다. 정말 시간도 강도 다른 이들도 흐르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이렇게 멎어 있는데.

태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데.

눈물도 나지 않았다.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 자갈이 가득한 바닥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연고라곤 하나도 없는 자갈들이 꼭 자기 같았다. 텅 빈 독이 된 듯 헛헛했다. 이대로 딱딱한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그러면 빈 속을 드러내고 산산이 깨질 듯했다.

연오야.

그래서 그 목소리는 빈 독에 울리는 듯 공허했다.

연오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의식하지 못했던 강바람이 뼈까지 얼려버릴 듯했다. 이가 저절로 딱딱 부딪혔는데 정말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좌절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연오야!”

고개를 번쩍 쳐들자 여명을 등진 사람이 서 있다.

어떻게 그를 알아봤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오는 그에게 달려가고 있었고,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한 차례 넘어졌다. 딱딱한 바닥에 구르듯 넘어지는 연오를 번쩍 일으킨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정태헌이었다.

“태헌아.”

그가 괜찮으냐고 묻기도 전에 연오가 태헌의 얼굴을 감쌌다. 정말 산 것이 맞는지, 헛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눈이 절박했다.

싸늘한 물기를 느끼지 못했다면 연오는 그가 정말 환상인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얼굴, 앞머리와 가슴팍, 소매까지 물에 젖어 있었다. 무언가를 벅벅 씻어낸 듯 가슴팍이 구깃구깃해진 상태였다. 애써도 어쩔 수 없었는지 엷은 분홍빛의 피가 보였다. 그곳을 더듬거리는 연오의 손이 벌벌 떨렸다. 목소리도 꼭 그만큼 엉망이었다.

“너, 너 안 오는 줄 알았어…….”

“아.”

태헌이 뒤늦게 탄식했다. 이마를 문지르는 얼굴이 흐릿했다.

“미안해. 피를 너무 흘려서, 너 놀랄까 봐.”

기가 막혔다. 그를 찾아 헤맨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해야 했던 모든 좌절을 생각하면,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 달려왔어야지. 바로 나한테 와서 무사한 걸 확인시켜 줬어야지. 약속한 대로 돌아왔다고 하면서 지금처럼 환하게 웃었어야지.

화를 내고 싶었는데, 바보처럼 강가에 쪼그려 앉아 마른 피를 닦아낸답시고 세수나 하고 있었을 그를 떠올리니 그냥 웃어 버리고 싶기도 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로 연오는 태헌을 끌어안았다.

“근데 연오야.”

안개처럼 잦아드는 목소리가 귓전에 부딪혔다. 연오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숨까지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사실 나 너무…… 진짜 졸려…….”

되묻기도 전에 태헌의 몸이 급격히 허물어졌다.

놀란 연오가 허겁지겁 그를 껴안았다.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함께 넘어졌는데, 손이 금세 축축해졌다.

자갈 바닥에 쓰러진 채로 손을 펼쳐 보니 온통 시뻘겠다.

피.

어떻게 지금까지 서 있었을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진 자신을 일으켰을까. 얼굴을 보자마자 아프니까 빨리 가이딩하라고 다그치기나 할 것이지.

이런 면만은 끝내 예전의 태헌이었다.

그러나 맞닿은 심장만은 힘있게 쿵쿵 뛰고 있었다.

연오에게 돌아왔음을 알리듯이.

연오는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지 않았다. 그냥, 탁 트인 하늘을, 검보라색은 어느새 사라지고 눈물이 날 정도로 밝게 물들어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 무서운 세상의 에스퍼인 그는 앞으로도 계속 연오를 두렵게 할 것이다. 태헌만 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죽음이 계속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바보처럼 옷자락을 적시며 돌아온 태헌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오려고 애쓴 그를 본 순간에 연오는 깨달았다. 그가 자신에게 안길 두려움마저 허락할 수 있게 되었음을. 사랑뿐만이 아니라 태헌의 은밀한 고통도, 연약함도, 다듬어지지 않은 모든 부분도 끌어안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태헌과 다시 함께하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제까지 벌어진 일은 둘의 뿌리를 잘라냈고 심장의 중심부를 도려내 버렸다. 그런 다음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서로의 균열까지 끌어안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태헌은 온전히 허락된 존재였다.

그들은 결국 거기까지 함께 도달했다.

해가 마지막 어둠까지 남김없이 사르며 떠올랐다. 태헌이 늘 그러했듯, 연오는 끝까지 태헌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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