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일담-1화 (17/23)

후일담

1.

[연오야, 나 좀 이따가 퇴원하고 올라갈게. 잠깐만 기다려줘.]

진동과 함께 도착한 연락에,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연오가 멈칫했다. 태헌이 퇴원하는 날이라 도와줄 게 있을까 싶어 미리 왔는데, 태헌은 당연히 기숙사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서 놀라게 해 줘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핸드폰에서 눈을 뗀 순간, 연오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조용한 병실 복도 한가운데 정한철이 서 있었다.

“…….”

연오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일단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머뭇거리던 정한철이 연오에게 다가왔다. 연오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가까워지는 정한철을 바라보았다. 가이딩만 받으면 죽다가도 살아나는 에스퍼 아들이 큰 폭발로 며칠 입원까지 했으니 걱정이 많았는지, 낯빛이 해쓱했다.

“연오야.”

“안녕하세요.”

가이드 각성 이후로 태헌의 부모와 만난 건 처음이었다. 네 부모님과 만나지 않게 해 달라는 요구를 충실히 이행한 태헌 덕분이었다.

그래, 아들이 퇴원하는 날인데 부모도 당연히 왔겠지. 오히려 병실을 오가는 며칠 동안 마주치지 않은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아저씨랑 얘기 좀 할래?”

조심스러운 제안에 연오는 잠깐 침묵했다.

지금 정한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태헌의 각인 가이드가 되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헤어질 거라더니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미안함이 가득한 눈을 보면 그러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였다. 대답이 다소 방어적으로 나갔다.

“태헌이 가이딩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가이딩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아저씨가 전에 너한테 실수한 것 같아서 그래. 너 안 그래도 힘들었는데 가이딩 강요해서 미안했다.”

정한철이 급하게 사과를 쏟아냈다. 연오가 곧장 가버릴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연오는 지나치게 조용한 복도를 의식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생각한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서 할 말이 정리되었다. 어쩌면 태헌의 핸드폰에 표시된 ‘아버지’라는 글자를 본 후부터 마음이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저 아저씨가 왜 그러셨는지 알아요. 태헌이 걱정되니까 하신 말씀이죠.”

연오 본인도 처음엔 그랬다. 태헌이 아프다는데, 아팠다는데, 몸을 갈아 가이딩 좀 해주는 게 뭐 꺼릴 일이냐 했다. 자기 자신부터가 그렇게 생각했으니 남이야 오죽했을까.

“이해하는데요…… 아저씨 전처럼 계속 뵙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새로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생일마다 함께했고, 또 사랑하는 태헌을 낳고 길러 준 이들이었으니까. 정한철은 살가운 이정우에 비해 조금 먼 존재였지만 그래도 연오는 그를 좋아했었다. 인천에서의 일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처음에는 남이어서 그런가 했는데, 왠지 제가 아저씨 진짜 아들이었어도 비슷했을 것 같아서.”

현실에서도 그런 일은 얼마나 많은가. 형이 아프니까 네가 도와줘. 동생이 힘드니까 네가 참아줘. 에스퍼와 가이드, 균열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가이드의 희생은 점점 당연해진다. 자신이 태헌의 형이거나 동생이었어도 정한철은 에스퍼의 입장을 우선했을 것이다. 한주연이 그랬듯이.

입장과 위치에 따른, 좁혀지지 않는 사고와 공감의 간극. 연오는 이제 그 간극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버리기로 했다. 그러자 복잡하던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저씨랑 아주머니 아니었다면 저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잊지 않을게요.”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이라면, 입장의 차이를 좁힐 수 없다면,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하면 된다. 부모님을 잃고 태헌의 집에서 그의 부모와 함께 살았던 날의 추억은 영원히 마음에 파편처럼 박혀 있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나아질 것이다.

“앞으로는 그냥, 아들의 잘 모르는 친구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연오야.”

“안녕히 가세요.”

연오는 더 듣지 않고 먼저 그를 스쳐 지났다. 가슴이 시원하기도 하고 몹시 아리기도 했다.

세상 모든 각성자를 에스퍼와 가이드로 나누어 편 가르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박이정 에스퍼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누구든 자신의 상황이나 소속 집단에 따라 행동을 바꿀 수 있음을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당연한 진리인데 무척이나 고된 노동 끝에 얻은 교훈처럼 느껴졌다.

상념을 누르고 병실 문을 열자, 옷을 갈아입은 태헌이 서 있었다. 짐을 마저 챙기는 중인지 이리저리 분주한 뒷모습이 괜히 멀게 느껴졌다.

그때, 기척을 알아차린 태헌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오야!”

무표정하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며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챙기던 가방도 내려놓고 연오에게 다가왔다. 멀찍하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태헌이 연오를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순간, 그가 연오를 번쩍 들더니 반 바퀴를 돌아 병실 안쪽에 내려놓았다. 연오는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태헌을 보며 웃었다.

“왜 이렇게 들떴어?”

“와 줄 줄 몰랐어. 금방 정리하고 너 보러 가려고 했는데.”

“퇴원하는 날인데 와야지.”

“그래도 기숙사까지 금방이니까. 오느라 추웠나 보다, 너 손 차가워.”

태헌의 얼굴에 금세 걱정이 어렸다.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녹여 주는 태헌을, 연오는 잠깐 바라만 보았다.

“밖에서 아저씨 만났어.”

“…….”

태헌이 놀란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뭐라고 사과할지 뻔해서 연오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얘기 잘 끝냈어. 어차피 전처럼 너희 부모님이랑 살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정리하면 됐지.”

“미안해. 안 마주치게 미리 연락해야 했는데.”

태헌은 잠잠히 연오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공원에 주저앉아 울던 연오를, 그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연오에게 무엇을 준다 하더라도 그 순간을 지워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연오의 일부는 영원히 거기 주저앉아 울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연오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공원에서 울고 있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간다. 절대 극복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슬픔도 시간에 풍화된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정체된 마음을 일깨웠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연오는 태헌에게 붙들린 손을 빼고 침대로 다가갔다. 덜 챙긴 가방을 들어 보는 연오를 응시하는 태헌의 시선이 막막했다. 그런 눈빛을 알아차린 연오가 돌아선 채 툭 내뱉었다.

“괜찮다니까. 대신 명절에는 너 혼자 부모님 뵈러 가.”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는데도 태헌은 아직 심각했다.

“안 가. 어차피 명절에 잘 만나지도 않았어.”

“나랑 살 땐 항상 만났잖아.”

“네가 가라고 해서 간 거지.”

“…….”

“그 전엔 별로 만날 일도 없었어. 알잖아.”

잠시 멈칫한 연오는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았다.

태헌의 가족사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방임에 가까웠던 성장 과정도 안다. 그래도 과거의 연오는 태헌이 부모님과 잘 지내기를 바랐고 또 그러라고 요구했었다. 부모님을 잃은 지 얼마 안 된 때였던 데다 스스로는 부모님과 무척 살가운 관계였으니, 태헌도 부모님과 잘 지내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몇 살 더 먹은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도 태헌에게는 강요였으리라.

그런데도 태헌은 불편한 내색 없이 늘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 좋은 의도로 자꾸 부모님을 만나러 가라고 권하는 연오를 거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연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기도 했을 테고…….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연오를 살피던 태헌이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네가 원하면 만나러 갈게.”

“아니, 그냥 네 마음대로 해.”

모든 가족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있다. 부모님을 잃은 자신의 슬픔에 매몰되어 있던 어린 날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혹시 만나고 싶어지면 내 눈치 보지 말고 뵈러 가고. 나도 아저씨 미워하는 거 아니야. 그냥 친구 부모님 정도로 지내면 된다 싶은 거지.”

말을 끝낸 연오가 가방을 태헌에게 건네주었다.

태헌은 짐을 받은 다음 연오의 손을 쥐어 보았다. 찬기가 많이 가신 손은 따뜻했다. 균열 밖으로 튀어나온 괴물을 피해 달아나던 가이드들 틈에서 뒤처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어느새 그는 한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태헌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와 같이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태헌은 왠지 미래를 약속받은 양 마음이 굳세어졌다.

“너 더 멋있어진 것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진지하게 한 말이었는데 연오는 말도 안 되는 아부를 들은 사람처럼 픽 웃었다. 태헌은 괜히 억울해져서 항변했다.

“진짜야. 왠지 전보다 더 커 보여.”

“알았으니까 빨리 나와.”

연오는 믿지 않는 듯 쉽게 대답하고 먼저 병실을 나섰다. 태헌은 빠뜨린 물건이 없는지 간단히 확인한 후 그 뒤를 따랐다. 복도로 나가 보니, 몇 걸음 멀어진 연오의 뒷모습이 걸음에 맞춰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더 강한 척한 건 자신이었지만, 앞서간 사람은 늘 연오였다.

그때 연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으로 들이친 햇살이 눈 부셨고, 연오의 그림자가 벽을 향해 길게 늘어졌다. 왜 안 따라오냐는 듯 연오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햇볕을 받아 한쪽 윤곽만 금색으로 빛나는 그는, 확실히 태헌의 기억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같이 가.”

무심결에 부탁하며 발을 내디뎠다. 연오는 그를 기다려주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