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0/23)

4.

한국대 근처에 위치한 두 사람의 새로운 집은 여러모로 안락했다. 텔레비전 대신 책장과 원목 탁자가 놓인 거실, 태헌의 취향에 맞는 조리용품이 가지런히 걸린 깔끔한 주방, 함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을 자그마한 공간. 커다란 창문에서는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온화한 햇빛이 들었고, 눈 내린 도심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라 창가에 서 있기만 해도 가슴이 트였다.

그리고 두 사람보다는 다른 이들이 더 자주 사용하게 될 공간도 있었다.

“게스트룸 다 치워 놨어.”

태헌은 먼지 묻은 손을 털며 개운하게 알렸다. 연오는 마침 막 전화를 끊고 있었다.

“거의 도착했대. 안 자고 갈 수도 있다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리 비켜줄까? 불편하지 않겠어?”

“괜찮아. 기호랑 현종이 형이랑 저번에도 한 번 봤잖아. 둘 다 괜찮다고 했고.”

나름의 집들이였다. 박이정은 연오만 있을 때 선물을 들고 한 번 다녀갔고, 남은 건 인천지부의 기호와 현종이었다. 기호는 요즘 애인에게 주말을 전부 바치고 있었는데, 오늘을 위해 토요일을 비웠다. 얼마나 대단한 결정인 줄 아느냐고 뻐기는 모습도 연오 눈에는 마냥 순수해 보였다.

조금 기다리니 인터폰이 울렸다. 연오는 직접 현관까지 가서 그들을 맞이했다. 안 그래도 집에 쌓인 휴지를 양손 가득 든 기호와 현종이 밝은 얼굴로 들어섰다. 기호는 아예 현관에 휴지를 내려놓더니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연오에게 마구 치댔다.

“형, 집 엄청 좋아요. 저 이렇게 좋은 집 처음 봐요.”

“그래? 얼른 들어와.”

“연오야, 이거.”

현종이 건네는 휴지를 받으랴, 기호의 감탄에 하나하나 대꾸하랴, 정신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현관으로 온 태헌이 연오의 손에서 휴지를 부드럽게 앗아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현관 분위기가 잠깐 어색해졌다.

“안녕하세요, 정태헌 에스퍼.”

기호가 붙임성 좋게 먼저 인사했다. 또 뵙네요, 하고 이어지는 말을 태헌도 웃는 얼굴로 받았다. 그런 다음 그가 현종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현종도 엉겁결에 마주 인사했다.

“음식은 했다고 해서 안 사 왔는데.”

“태헌이가 다 했어요, 형. 얼른 들어오세요.”

손님들을 식탁에 앉히자 거실이 평소보다 활기차게 느껴졌다. 센터 기숙사에서도 넷이 모인 적이 있지만 그때보다 상황이 나아져서일까, 연오의 마음도 한결 가볍고 편안했다. 오전 내내 음식을 하느라 분주했을 태헌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정작 태헌은 힘든 내색 없이 뿌듯한 얼굴이었다.

연오의 에스퍼로서, 또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으로서 이런 자리에 함께하는 일이 좋았다. 전에는 친구라고 할 수조차 없는 타인이었는데.

게다가 오늘은 다른 목적도 있다.

“요리하느라 힘들었겠네요.”

태헌은 현종의 형식적인 인사를 받으며 빙긋 웃었다.

그는 자신을 보는 현종의 눈빛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음을 첫 만남에서부터 알아차렸다. 인천지부 시절 연오의 힘든 일을 가장 많이 언급한 건 기호였지만, 그때 태헌의 얼굴을 확인한 건 현종이었다. 당시 태헌은 현종의 옅은 경계와 의심을 기민하게 읽어냈다. 연오에게 그런 걸 언급할 입장이 아님을 알아 입을 다물었고, 어쭙잖게 호감을 사겠다고 덤빌 수도 없어 가만히 있었지만.

오늘은 현종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어쨌든 연오가 좋아하는 형이고, 또 연오의 힘든 시절에 옆에 있어 준 고마운 사람이니까.

“연오 손님인데요. 별로 차린 것도 없어요.”

“…….”

현종은 갈비찜과 잡채로 시작해 바질페스토 샐러드와 뇨끼로 끝나는, 그야말로 차릴 수 있는 건 다 차린 듯한 식탁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만 마셨다. 기호의 반응이 훨씬 더 열렬했다.

“우와, 설 다가와서 갈비찜 한 거예요? 우리 집에서도 못 먹는데.”

“네, 조금만 해 봤어요. 밥도 밤 넣고 했는데.”

“요리사 같아요. 자격증 같은 거 따셨어요? 아니면 독학으로?”

“혼자 이것저것 하다가 동영상도 보고 그랬어요.”

한참 연애 중인 기호는 애인에게 해주고 싶은 음식 얘기로 태헌과 끊임없이 대화했다. 연오와 현종은 거의 입을 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기호는 열정적인 학생이었고, 나중에는 레시피 몇 가지를 메시지로 전송해 달라며 연락처까지 부탁했다. 태헌은 싫은 내색 없이 번호를 교환했다.

기호의 붙임성과 적극성 덕분에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집 구경을 할 때도 기호는 연신 감탄했다. 뭐가 좋고, 뭐가 대단하고, 뭐가 고급스럽고…… 그런 얘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게스트룸으로 갔을 때 기호의 기쁨은 절정에 달했다.

“어, 뭐가 있네요?”

기호는 새하얀 침대에 가지런히 놓인 선물 상자를 보고 단숨에 눈을 빛냈다. 태헌은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상자를 기호에게 건네주었다.

“데이트할 때 입기 좋을 것 같아서요.”

니트로 유명한 브랜드였다. 기호는 눈에 띄게 기뻐하면서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고 옷을 확인했다. 그가 옷을 몸에 대 보며 연오에게 어떠냐고 묻는 사이, 태헌은 나머지 상자를 들어 현종에게 건넸다.

“가이드님, 이거.”

“네?”

“손목시계 쓰신다고 들어서요. 교환권도 있어서, 디자인 바꾸셔도 돼요.”

현종은 약간 당황하여 선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받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가격대였다. 그러나 거절당할 걸 염려했는지 아주 못 받을 가격의 물건도 아니었다. 현종이 머뭇거리는 사이 태헌이 부드럽게 상자를 손에 쥐여 주었다.

“저 가이드들 사이에서 소문도 나쁘고, 여러 가지로 못 미더운 거 알아요.”

둘의 눈이 마주쳤다. 연오는 기호의 옷을 봐주느라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태헌도 그쪽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낮추며 최대한 얌전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래도 잘 봐주세요.”

말하자면 뇌물이라는 소리였다.

불편해하는 티를 낸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고 이런 말까지 하는 걸까. 묻거나 거절하기도 전에 기호가 끼어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입을게요!”

“마음에 들어요?”

“당연히 마음에 들죠. 내일 데이트할 때 입을 거예요. 연오 형이랑 친하니까 이런 게 다 생기네?”

기호는 애교 있게 웃으며 연오에게 기댔다. 정작 태헌이 선물을 준비한 줄도 몰랐던 연오는 조금 당황했지만, 또 현종의 손에 들린 선물까지 발견하고는 정말 놀랐지만, 그 이상의 문제는 없었다.

그들은 전처럼 시시껄렁한 영화를 틀어놓고 팝콘을 집어 먹었다. 기호와는 달리 선물을 열어 보지도 않고 한쪽에 잘 내려놓기만 한 현종은, 영화를 보는 내내 연오 옆에 붙어 음료수를 챙기랴 팝콘을 더 갖다 놓으랴 분주한 태헌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태헌이 자신이나 기호에게까지 선물을 챙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각자에게 맞는 물건을 골라놓는 성의까지 보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연오의 마음에 쏙 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까 게스트룸에서 연오도 싫은 내색은 전혀 없었다. 내심으로는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을 것이다.

내일이면 세상을 등질 사람처럼 해쓱해진 채 인천으로 돌아왔던 연오를 생각하면, 태헌의 말대로 그가 참 못 미덥지만…… 자신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옆에 자신의 에스퍼를 앉혀 두고 행복하게 웃는 연오의 얼굴을 믿을 수밖에.

“콜라 더 드려요?”

현종의 컵이 비었음을 안 태헌이 선량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물었다. 꼭 한 살 많은 형을 착실하게 챙겨주는 후배 같은, 성실하고 무구한 얼굴이었다.

“괜찮아요.”

현종은 영화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돌렸다. 무시무시한 에스퍼라더니, 은근히 여우 같은 면이 있구나 싶었다. 하긴, 연오에게는 저런 면이 없으니 오히려 잘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시계 정도는 받아도 될 것 같았다.

-

기호와 현종은 게스트룸을 쓰지 않고 돌아갔다. 신혼부부 집 같다고 요란을 떤 건 기호 혼자뿐이었지만, 그를 질질 잡아끈 현종도 내심 그 말에 동의했다. 아마 자고 가지 않은 데는 그런 이유가 컸을 것이다.

연오와 태헌은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어수선해진 집을 정리했다. 태헌이 움직이고 연오는 기웃거렸다는 표현이 옳을 테지만. 연오는 거품을 내 설거지를 하는 연인 옆에 서 있다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선물 준비한 줄 몰랐어.”

“몰래 샀어.”

태헌은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며 눈을 찡긋했다. 예뻐해 달라는 듯 선 채로 몸을 구겨 연오의 어깨에 뺨을 대기까지 해서, 연오는 습관처럼 그를 쓰다듬었다. 태헌이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얼굴을 비볐다.

“네 주변 가이드들이 나 싫어할 것 같아서.”

“……안 싫어할걸?”

기숙사에 놀러 왔던 현종이 태헌을 경계했던 일이 떠올라 대답이 조금 늦어졌다. 태헌은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네 주변 사람들이 나 잘 봐주면 좋겠어.”

연오에게는 가족이 없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나 의지하는 사람은 있으니 그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원래 결혼할 생각이면 주위 사람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너무 억지로 안 그래도 돼. 너 별로 싹싹한 편은 아니잖아.”

“…….”

“비꼰 건 아니고.”

태헌이 충격받은 듯 굳자 연오가 재빨리 덧붙였다.

기억을 잃었을 때의 모습이 태헌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태헌의 일부이기는 하리라. 성질이 나쁘고,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모습도 그의 한 부분이었다.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인 지금, 태헌이 지나치게 애쓰진 않았으면 했다.

“그냥 꼭 그러지 않아도 나는 너 좋다는 뜻이야.”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태헌이 멈칫했다.

“연오야, 나도. 나도 너 사랑해.”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연오를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눈빛 때문에 괜히 쑥스러워져서, 또 그가 당장 고무장갑과 거품 묻은 접시를 내팽개치고 자신을 침대로 끌고 갈 것 같은 위기감에, 연오는 잽싸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솔직히 아직도 허리가 뻐근해서 오늘은 자신이 없었다.

“어…… 그럼 난 거실 정리 좀 해야겠다. 넌 설거지 마저 해.”

“빨리 하고 갈게!”

빨리 하고 와도 아무것도 없는데. 연오는 갑자기 맹렬한 기세로 접시를 해치우기 시작한 그를 주방에 남겨두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손님맞이를 해 피곤했지만, 그리고 왠지 오늘도 일찍 잠들기는 그른 것 같지만…… 평화롭고 행복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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