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꽃샘추위가 몰아친 후 3월이 되었다. 연오는 긴 휴학을 마치고 복학했다.
“세상이 달라 보여.”
개강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연오가 조수석에 오르며 그렇게 말했다. 태헌이 부드럽게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균열 문제가 없을 때면 늘 연오의 이동 수단을 자처했다. 학교 다니기로 했다고, 한주연에게 뱉은 그 말이 순 거짓은 아니었던 셈이다.
“달라 보인다고?”
“응. 학교에 가이드 동아리가 있더라고.”
전에는 몰랐는데, 학교 게시판이나 홈페이지에 가이드 동아리원 모집 공고가 몇 개 있었다. 가이드가 되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금은 어쩌면 그렇게 눈에 쏙쏙 들어오는지.
“센터에서도 만날 텐데 왜 학교에서 동아리까지 만드나 궁금했어.”
“글쎄, 아마 센터가 그다지 안전한 공간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고.”
“그런가…….”
“미친 에스퍼도 많잖아. 꼭 그런 거 아니어도, 같은 학교면 공통 화제도 있고 좀 더 의지도 되고.”
연오는 눈부시게 갠 하늘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음, 하고 대답하는 소리를 내니 태헌이 연오의 손을 살짝 잡아 왔다.
“가입하고 싶어?”
“딱히. 현종이 형이나 기호도 있으니까. 그리고 언제 가이딩 필요할지 모르는데 그런 활동 하기 좀 그렇잖아.”
“……나 때문에?”
연오가 멈칫했다. 태헌이 걸리적거린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너무 건조한 투로 말했을까. 의식적으로 표정을 부드럽게 만든 연오가 옆을 돌아보았다. 손을 꽉 맞잡았다가 풀어내는 몸짓이 다정했다.
“그냥 귀찮아서.”
“하고 싶으면 나 신경 쓰지 말고 해, 연오야. 이미 나 때문에 일 년이나 뺏겼잖아.”
뺏겼다니, 그렇게 표현할 만한 시간이었나. 연오는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태헌이 자신의 일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그걸 지켜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기에.
“미안해하지 마, 태헌아.”
“응…….”
“……동아리 생각해 볼게.”
차가 잠시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태헌이 몸을 기울여 흰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운 숨결에 연오가 목을 움츠리며 짧게 웃었다. 태헌이 연오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애교스럽게 푸념했다.
“괜히 지금 집으로 이사했나 봐.”
“왜?”
“학교까지 너무 금방이라 너랑 차에서 오래 못 있잖아. 아침마다 아쉬워.”
연오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몽글몽글한 기분에 잠겨 있던 그때, 태헌이 갑자기 연오의 목을 핥았다. 연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떨어뜨렸고, 마침 신호가 바뀌며 차가 출발했다. 태헌은 시치미를 떼고 운전에 집중한 척했다.
“너 왜, 왜 갑자기…….”
“아쉬워서.”
아쉬운 거랑 핥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기가 막혀 쳐다보자 태헌이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학교 지하 주차장에 대 놓고 잠깐 빨아줄까?”
“정태헌!”
“농담이야, 연오야.”
넓은 정문 가까이에 차가 섰다. 태헌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근데 진짜 해줄 순 있어. 필요하면 얘기해.”
“나 간다.”
연오는 철컥 벨트를 풀고 곧바로 문을 열었다. 뒤통수에 닿는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무시하고 성큼성큼 걷는 그의 얼굴이 붉었다. 좁은 차에서 몸을 기울인 태헌이 자신의 것을 물고 빨면…….
난 왜 여기까지 상상하고 있는 거야. 연오는 괜히 뒤를 쏘아보았다. 태헌은 그때까지도 창문 너머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음담패설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청량하고 순수한 미소였다.
연오는 가방 안의 짐이 덜컹거릴 정도로 거세게 걸어 강의실로 향했다. 3월의 차가운 바람도 얼굴의 열기를 식혀 주지 못했다.
-
꽤 넓은 계단식 강의실인데, 구석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연오를 힐끔거렸다. 무척이나 티가 나는 행동이라 연오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들 책을 챙겨 떠나느라 분주할 때, 셋쯤 되는 학생들이 연오에게 다가왔다.
“강연오 가이드!”
막 가방을 들던 연오가 멈칫했다. 아직 동기들에게도 가이드가 된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뜸 가이드라고 부르니 당황스러웠다. 연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자 말을 걸어 왔던 남학생이 주춤했다.
“어, 아닌가? 아까 출석 부를 때…… 강연오라고…….”
“누구세요?”
“저도 가이드예요. 센터에서 오다가다 봤는데.”
“네…….”
엷은 경계를 두른 연오는 상대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오다가다 본 건 저쪽뿐인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대도 연오가 자기를 기억할 거라는 생각은 없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 가이드 동아리원 모집하는데 들어오실래요? 센터에서는 다들 바빠서 다른 가이드랑 친해지기도 어렵고, 에스퍼들 문제도 있고 그렇잖아요. 저희 대단한 거 안 하고 그냥 다니면서 밥 먹고 술 먹고 센터 까고 그래요.”
“근데 가이딩 언제 가야 할지 모르니까요. 모임 들기는 좀 부담스러워서, 죄송합니다.”
“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상대의 얼굴에 약한 동정의 기미가 나타났다.
“하긴, 정태헌 에스퍼 전담하고 계시죠. 성격 유명하긴 하니까…….”
연오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겠지만 듣기 달가운 소리는 아니었다. 이들은 태헌을 무슨 가이드 잡는 에스퍼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소문이 워낙 험악하니 무리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괜히 기분이 나빴다.
“정태헌 에스퍼 성격 때문 아닌데요. 그냥 제가 제때 가이딩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정태헌 에스퍼가 빨리 오라고 화내는 건 아니고요?”
“화를 왜 내요. 걔 성격 좋…….”
순간 연오의 양심이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아무튼 가이드한테 빨리 오라고 성질내는 에스퍼 아니에요.”
“그래요? 그럼 동아리 들 수 있겠네요!”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그런데 잘 되었다는 듯 웃는 가이드의 표정이 너무 해맑아서, 연오는 됐다고 재차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진짜 대단한 거 없어요. 안 오고 싶으면 안 와도 돼요!”
신청서가 쑥 내밀어졌다. 옆에 있던 다른 가이드가 기다렸다는 듯 펜까지 주었다. 연오는 곧장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대신 주저했다.
“아니, 이건 좀…….”
“그렇죠? 역시 정태헌 에스퍼가…….”
일부러 이러나 싶어 욱한 연오가 상대방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순수한 걱정과 염려를 본 후에는 화낼 기운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 이름이랑 전화번호 정도야 쓸 수 있지. 활동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연오는 대강 휘갈겨 작성한 가입 신청서를 돌려주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말하던 이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 친하게 지내요. 센터에서도 계속 말 걸고 싶었는데 못 걸었거든요.”
“네, 그럼 전…….”
“오늘.”
덥석 옷자락이 붙들렸다. 아까부터 참 스스럼없는 사람이었다.
“같이 점심 드실래요?”
-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연오는 진지한 의문을 품고 돈가스를 내려다보았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허겁지겁 돈가스를 자르던 성준이 멈칫했다.
“안 드세요?”
“먹어야지…….”
연오는 돈가스를 썰며 성준을, 가장 적극적으로 동아리 가입을 권하던 남자를 힐끔거렸다.
성준이 식사하자고 했을 때, 다른 두 사람은 연강이라 시간이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자연스럽게 흩어지나 했는데 성준은 둘이 먹어도 좋다며 연오를 붙잡았다.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자기 혼자 먹고 싶지 않으니 같이 먹어 달라고 매달리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형.”
게다가 성준은 무척 살갑고 붙임성이 좋았다. 방금 만난 거나 다름없는 연오를 자연스럽게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덕분에 어영부영 연오도 말을 놓았다.
“형은 가이드 생활 안 힘들어요?”
성준이 작은 돈가스 조각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앉자마자 가이드 생활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다니, 본인이 힘들어서일까, 아니면 그게 가이드들의 공통 화제여서일까.
“괜찮아.”
“그래요? 정태헌 에스퍼도 그렇고, 에스퍼들이 귀찮게 하지 않아요?”
“태헌이는 내 에스퍼니까 귀찮을 이유가 없고, 다른 에스퍼들은…….”
태헌이가 처리했겠지.
연오는 바보가 아니었다. 갖은 핑계로 연락을 시도하던 많은 에스퍼가 하나하나 사라지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가이딩을 목적으로 접근하는 에스퍼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참이라 굳이 태헌을 말리지 않았다. 한주연 본부장이 자신을 불러 태헌 단속을 부탁하지 않은 걸 보면, 그가 선을 넘은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할 얘기는 아니어서 연오는 적당히 말을 뭉갰다.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어서. 지금은 크게 힘들진 않아.”
“그렇구나…….”
“왜, 많이 힘들어?”
“아니, 그냥 물어봤어요. 아무래도 정태헌 에스퍼는 작년에 소문이 안 좋았잖아요.”
또 정태헌 얘기다. 특별히 그를 위해 변명할 마음은 없었는데 저절로 입이 열렸다.
“잘해줘. 오늘도 태워다줬는데. 요리도 다 해주고, 가이딩 받을 때도 매너 있고.”
물론 섹스 가이딩 때는 다르지만. 그 말을 삼키자 성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청 험악하다던데요?”
“아니야. 전엔 좀 불안정해서 그랬던 거지 알고 보면 괜찮은 에스퍼야.”
연인이라서일까, 자기도 모르게 태헌의 편을 들고 있었다.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길어졌다. 무례한 에스퍼들 욕, 센터의 무능한 행정처리 욕, 가이드를 에스퍼에 기생하는 한량처럼 여기는 세상 사람들 욕……. 자신의 힘든 시절을 본 기호나 현종과 있을 때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의식적으로 피했던, 부정적인 얘기들이었다. 소소하게 쌓인 불만들을 가벼운 톤으로 나누니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편해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가이드 동아리에 드나?’
아침에 태헌과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왜 동아리 같은 걸 만들고 가입하나 궁금했는데, 머리에 반짝 불이 켜졌다.
“어, 저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성준의 말을 신호로 둘은 마침내 식사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준은 학교로 돌아가면서도 계속 떠들었다.
“형, 주말에 바빠요? 우리 주말이나 금요일에 모여서 이것저것 하는데. 대단한 건 아니고, 맛집 탐방이나 원 데이 클래스 같은 거요.”
친목 동아리인 만큼 고정적인 활동은 없는 모양이었다. 꾸준히 참석해야 하는 단체 활동이 아니니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같이 어울려도 부담 없고 재밌지 않을까. 어느새 연오는 동아리 같은 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아침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번 주말엔 뭐 하는데?”
옅은 흥미를 느낀 성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길 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댄스 스포츠요!”
-
그거 손잡고 하는 거잖아. 태헌은 그 치졸한 말을 겨우 삼켰다. 방송 댄스도 있고 하다못해 혼자 하는 요가 같은 것도 있는데 왜 하필 끈적하게 붙어 있는 모습부터 연상되는 댄스 스포츠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삼켜냈다. 대신 자신의 팔을 베고 누워 재잘거리는 연오에게 귀를 기울였다.
“몇 시간 만에 배우는 거라 복잡하진 않대. 몰랐는데 가이드들 스포츠 많이 하더라?”
“그래?”
“스트레스도 풀리고 괜찮다나 봐. 안 그래도 근력 운동 지겨웠는데 좀 활동적인 스포츠 해도 되냐고 병원에 물어볼까?”
“그런 스포츠는 대부분 둘이 하잖아.”
“성준이랑 하면 되지. 걔 시간 많다더라. 맡은 에스퍼가 별로 없어서 특별한 호출 없으면 평범한 대학생처럼 지낸대. 나보고 아무 때나 부르라고 했는데.”
“그랬어?”
“성준이가 안 된다고 하면 다른 동아리원이랑 가도 되고. 아무래도 현종이 형이나 기호는 멀리 살잖아. 가까이 사는 가이드들이랑 친해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댄스 스포츠도…….”
태헌은 듣다 말고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췄다. 취침 등의 노란 불빛을 받은 얼굴이 잠깐 붉어졌다.
“나랑도 하자.”
“어……. 당연히 그래야지.”
연오는 괜히 뺨을 문지르며 태헌을 살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말을 끊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하다못해 잠에서 덜 깬 상태로 횡설수설해도 미소 띤 얼굴로 끝까지 들어 주는데. 혹시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가이딩에 문제 안 생기게 할게.”
“연오야.”
태헌이 연오의 입술을 핥았다. 성적인 의미보다는 애정 어린 몸짓에 가까웠다.
“가이딩은 신경 쓰지 마. 그거 때문 아닌 거 알잖아.”
“……그럼?”
태헌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빠짐없이 교차했다. 어쩐지 손바닥이 간지러워서, 연오가 어깨를 움찔했다.
“거기 가면 이렇게 손도 잡고.”
“…….”
“몸도 엄청 붙을 텐데.”
태헌의 다리가 연오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둘 다 잠옷을 입고 있어서 맨살이 닿지 않는데도 약간 긴장이 되었다. 연오가 뒤로 물러나려 하자 태헌이 더욱 몸을 밀착해 왔다. 굵은 허벅지가 민감한 중심을 은근하게 문질렀다.
“그런, 이상한 거 아니야.”
“그래도.”
흰 어깨에 입술을 묻은 태헌이 잘근잘근 살을 씹어 댔다. 아프지 않게 깨문 자리를 핥는 혀가 뜨겁고 말캉했다. 그의 입술이 점점 목덜미로, 옷을 입어도 가릴 수 없는 자리로 올라왔다.
“해도 돼?”
“안, 안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중얼거리면서, 연오가 그의 머리통을 밀어냈다. 사람이 아니라 돌을 미는 것처럼 태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란 불빛이 번진 눈으로 연오를 내려다봤을 뿐이다. 왠지 정말 자국을 낼 것 같아서 연오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짚었다.
“학교에 가이드 말고 다른 사람도 많아. 하지 마…….”
뜨거운 입술이 귓불을 삼켰다. 앙, 하고 물었다가 이를 세워 지분거리는 느낌에 몸이 달아올랐다. 귓가에 스미는 숨결을 느끼며 연오가 고개를 반대로 틀었다.
“싫으면 안 갈게…….”
그 한마디에 태헌이 멈칫했다.
입맞춤이 상냥하게 변했다. 귓불에, 목에, 또 쇄골에 입술을 누르며 그가 연오에게 매달렸다. 맞잡았던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그런 게 아니라.”
어딘지 풀 죽은 음성에, 연오가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태헌은 기댈 곳을 찾는 짐승처럼 이마를 비볐다.
“나 질투하는 거 알아줘.”
투정을 강요로 느꼈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태헌이 속삭였다. 그는 연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만약 연오가 갑자기 다른 애인을 만들어 온다 해도, 그에게 미움을 사느니 그냥 또 다른 애인을 견디는 편을 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 차례 겪어 본 연오의 미움은 너무 차갑고, 너무 무섭다.
“알아, 태헌아.”
흰 손이 태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난 네 가이드야. 걱정하지 마.”
연오의 품으로 파고들며, 또 그의 입술을 삼키며, 태헌은 생각을 바꿨다. 연오가 다른 애인을 데려온다면 실수인 척 그 사람을 죽여 버린 다음 조용히 처리해야겠다. 이 따뜻하고 황홀한 품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
가이드 지인이 늘자 학교가 그만큼 즐거워졌다. 다른 사람들과는 나눌 수 없는 고민을 나누며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고, 센터의 크고 작은 소문도 빨리 접할 수 있었다. 태헌과도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주말마다 모임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오는 종종 얼굴을 보였고 그새 친해진 사람도 꽤 있었다.
태헌도 연오의 변화를 감지했다. 연오를 자신에게만 묶어 둘 생각도 없고, 오히려 그가 센터와 상관없이 자기 인생을 즐기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이런 변화는 반길 만한 것이었다.
물론 늘 반길 수만은 없었다.
[연오 형 에스퍼 되시죠?]
금요일 밤, 연오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귀가 시간이 조금 늦어지는 것 같아 속을 태우던 태헌의 기분이 좀 더 추락했다.
[지금 형이 집에 간다고 해서요. 술을 좀 마셔서 데리러 오시면 좋을 것 같은데…….]
병원에서 관리받기 시작한 후 연오는 의식적으로 술을 멀리했다. 애초부터 술자리를 즐기거나 과음하는 편도 아니었고. 얼마나 취했기에 다른 사람이 연오의 핸드폰을 뺏어 대신 전화까지 한 걸까. 태헌은 재빠르게 움직여 차 키를 챙겼다.
“바로 갈게요. 많이 취했어요?”
[태헌아, 나 괜찮아. 얘네가 오버하는 거야.]
핸드폰 너머에서 전해진 목소리는 확실히 멀쩡했다. 약간의 열기만 있을 뿐, 혀가 꼬부라지거나 발음이 뭉개지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맥주 몇 잔 마시고 멈춘 거다. 그래도 어차피 데리러 갈 생각이어서, 태헌은 기다려 달라고 말하기 위해 핸드폰을 더 가까이했다.
[아, 형 몸 관리 잘 해야 된다면서요. 혼자 가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요. 아니면 내가 택시 타고 데려다줘요?]
태헌이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가게 이름 불러 주세요.”
[태헌아, 진짜 안 와도 돼.]
중얼중얼 말리는 소리 너머로 누군가 가게 이름을 불러 주었다. 프랜차이즈인데 학교 근처라고, 짧게 덧붙은 말까지 잡아챈 태헌이 곧장 밖으로 나갔다. 어째서인지 마음이 타들어 갔다.
급하게 운전해서 가게 근처에 차를 세웠다. 모퉁이만 돌면 되는 걸 확인하고 주차해서, 태헌은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연오를 발견했다.
대학생들이 자주 가는,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운 곱창집 앞에 연오가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었다. 둘 다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형, 근데 원래 에스퍼가 매일 데리러 와요?”
“응.”
“대단하다.”
상대가 잠깐 말을 멈췄다. 아주 잠깐. 머릿속에서 뭔가 계산하듯이.
“사귀는 사이여도 에스퍼가 매일 데리러 오진 않잖아요.”
태헌의 발이 멈칫했다. 방금의 말은 어떻게 봐도 떠보는 거였다. 그저 연오의 사생활이 궁금했을 수도 있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 빛나는 연오의 옆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저 묘한 눈빛은.
연오가 고개를 숙이며 살짝 웃었다. 태헌은 처음으로 그 순한 미소보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의 표정에 집중했다.
“우리도 사귀는데.”
“아.”
“내가 말 안 했나?”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태헌은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소란스러운 거리에 갑자기 나타난 태헌을 먼저 발견한 건 당연히 연오였다.
“태헌아.”
연오가 자연스럽게 가게 앞을 벗어나 연인에게 다가섰다.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떠보았던 가이드는, 다소 낭패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태헌은 그쪽을 무시하고 연오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많이 마시진 않았네.”
“당연하지. 선생님한테 혼나.”
학창 시절 모범생은 다 자라서도 모범생이었다. 반듯하게 대답한 연오가 잠시 태헌의 품을 벗어났다.
“인사하고 올게.”
태헌은 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았다. 대신, 가게로 들어가 사람들과 정답게 인사하는 연오를 응시했다. 유리창이 많아서 손을 흔드는 동작이며 다른 이들의 어깨를 짚는 모습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가이드 몇은 창밖의 태헌을 힐끔거렸고, 다른 몇은 연오에게 잠시 몸을 기대거나 가지 말라는 식의 말을 중얼거렸다. 입 모양을 모조리 읽은 태헌은 얼굴을 굳히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오가 밖으로 나왔다. 요즘 동아리 활동에 재미를 붙인 것 같더니 확실히 표정이 밝았다.
“가자. 여기 복잡한데 운전하고 오느라 힘들었겠다.”
“괜찮았어. 매일 오는데, 뭐.”
일상적인 대화와 함께 차에 올랐다. 연오는 불빛이 반짝거리는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태헌 안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휘몰아쳤다.
“더 놀고 싶었어?”
“아니. 얘기도 할 만큼 했고, 너도 기다리잖아.”
“밖에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야?”
“아, 성준이. 너한테 전화한 사람도 걔야. 핸드폰 만지지 말라고 했는데. 비밀번호라도 걸어 놔야겠다.”
걔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태헌은 불쑥 튀어나오려는 그 말을 삼켰다. 사실 그가 삼킨 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네가 간다고 하니까 물끄러미 보면서 아쉬워하던 여자애도 너 좋아하는 것 같아. 가지 말라고 네 손가락 끝 붙들고 살짝 흔들던 애도 이상했어. 과민 반응하는 거 아니야. 널 오래오래 좋아해 봐서, 널 좋아하면 어떤 표정 짓는지 다 알아. 네 어떤 표정에 반하는지도 다 알아. 아까 가로등 밑에서 살짝 웃었을 때…….
“태헌아?”
생각이 뚝 끊어졌다.
“기분 안 좋아?”
“아, 아니.”
“안 좋은 것 같은데.”
시트에 몸을 묻은 연오가 지그시 태헌을 바라보았다.
태헌은 자신의 경계심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연오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질투 같은 감정으로 훼방 놓을 마음은 없었다. 연오가 행복하게 오래 살려면 친구도 많이 필요하겠지.
그래서 태헌은 다른 말로 답했다.
“우리 반지 맞출래?”
“반지? 갑자기?”
연오가 자기 왼손을 펼쳤다. 기분 안 좋은 듯 조용하다가 갑자기 반지 얘기를 꺼내다니. 질투하는 걸 알아 달라고, 밉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던 태헌이 떠올랐다.
“왜, 사귀는 거 알리고 싶어서?”
“……안 돼?”
“되지. 사러 가자. 학교 다닐 때도 센터 나갈 때도 끼고 다닐게. 그럼 좀 안심이 돼?”
연오가 먼저 솔직해지자 태헌도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안심 안 돼.”
“……응?”
“앞으로 너 좋아할 사람이 한둘이겠어?”
연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 그가 민망한 듯 웃었다.
“무슨 소리야.”
“진짜야. 대학교에서도 센터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너 좋아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
“안심이 안 돼.”
연오는 그 말이 애정에 기반한 과장이라 여겼는지 대수롭지 않게 픽 웃었다. 그러나 태헌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연오가 왜 자신의 걱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지 않는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주차장으로 진입할 때, 연오가 태헌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질투하는 거야?”
태헌은 당연하지 않으냐는 뻔한 대답 대신 연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눈 마주친 연오가 가로등 아래서처럼,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귀엽다, 태헌이.”
초보 때도 그런 적 없는데 기둥에 차를 박을 뻔했다. 겨우 제대로 주차하고 돌아본 연인은 여전히 모두를 반하게 할 미소를 지은 채였다.
-
“아, 읏…….”
한계치까지 벌어진 구멍으로 검붉은 성기가 느릿하게 들어갔다. 차에서부터 분위기를 탄 지라, 또 오늘따라 태헌의 애무가 길고 진득했던지라 이미 몸이 달아오른 연오는 그 느린 속도에 안달을 냈다.
“태헌아, 빨리…….”
태헌은 대답 대신 땀이 맺히기 시작한 등에 입술을 댔다. 이를 세워 몇 번 잘근거리자 연오가 상체를 조금 뒤틀었다. 그럴 때마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성기가 더 깊은 곳까지 파묻혔다. 태헌은 고환이 눌릴 정도로 하체를 바짝 붙이며 연오를 자극했다. 가장 깊은 곳까지 침범한 성기가 버거운지, 아니면 쉽게 주어지지 않는 쾌락이 간절한 탓인지 연오의 숨이 가빠졌다.
태헌이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연오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엉덩이를 들려고 했다. 태헌의 두 손이 땀에 젖은 둔부를 눌러 움직임을 막았다. 연오가 고개를 틀어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왜?”
“왜, 이렇게 천천히…….”
“아파하잖아.”
“…….”
“내일 매칭률 측정 때문에 센터도 가야 하고.”
욕심껏 처박고 나면 연오는 다음 날 꼭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허리뿐인가, 몸을 지탱해야 하는 팔다리도 쑤셨다. 심지어 복근 운동을 한 것처럼 배가 아프다고 할 때도 있었다. 아무리 운동 처방을 받아 근력 운동에 매진해도, 전투로 다듬어진 태헌의 체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너 절뚝거리면서 다니면.”
“흑, 읏!”
“다른 에스퍼들이 쳐다볼까 봐 싫어.”
태헌이 느리게 연오가 느끼는 지점을 뭉갰다. 허벅지부터 종아리, 발끝까지 팽팽하게 긴장했지만 태헌은 허리를 뒤로 빼주지 않았다. 지나친 쾌락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워서, 연오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쏟아졌다. 태헌은 여전히 그곳을 후비듯 압박하며 눈물을 핥았다.
“울지 마, 연오야…….”
목소리는 애절하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손은 다정한데, 아래는 자비가 없었다. 아주 살짝 빠져나갔다가 퍽, 퍽, 규칙적으로 처박는 탓에 연오가 고개를 젖히고 할딱거렸다. 시트가 손 아래서 마구 구겨졌다.
“태헌아, 흣!”
갑자기 성기가 쑥 빠져나가더니 곧바로 몸이 뒤집혔다. 태헌은 애무할 때 지독하게 핥고 깨물어 붉어진 허벅지 안쪽에 제 것을 문지르며 낮게 신음했다. 설마 또 유두를 깨무는 건 아니겠지, 연오가 움찔하며 가슴을 가릴 것처럼 손을 들었다.
허공에서 곧바로 손이 붙잡혔다. 왼손이었다.
태헌은 길고 예쁜 약지를 덥석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반지가 들어갈 그 자리였다. 마치 성기를 애무하듯 정성껏 빠는 그의 시선은 연오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반지를 끼우기 전에 자기 이빨로 미리 자국을 내려는 사람 같았다.
갑자기 성기가 빠져 허전한 아래를 견디며 연오가 다리를 모았다. 그래봤자 태헌 아래 깔려 자세를 바꾸기가 어려웠다.
“왜?”
태헌이 약지를 입에 넣은 그대로 물었다.
“넣어 줄까?”
차마 긍정하기가 어려웠던 연오가 고개를 틀어 버렸다. 태헌은 여전히 손가락을 문 채로 웃더니 두 손으로 연오의 다리를 벌렸다. 부끄러움도 없이 쫙 벌어진 아래로 굵은 성기가 침범했다.
“아윽!”
아까와는 달리 빠른 속도였다. 태헌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고환이 철썩철썩 부딪혔다. 거의 아플 정도여서 연오가 우는 듯 신음을 토했다. 태헌은 연오의 손가락을 거의 끊어낼 것처럼 집요하게 물고, 자신 아래서 흐트러지는 흰 얼굴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아까부터 원하던 대로 빠르게 박아 준 덕일까. 연오의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하더니 곧 성기에서 탁한 정액이 쏟아졌다. 오늘 밤의 첫 사정이라 색이 진하고 향이 짙었다. 태헌은 사정하는 대신 예민한 내벽을 깊이 긁어내렸다. 연오가 물이나 다름없는 것을 질질 흘리며 제발 그만하자고 매달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귀엽다, 태헌이.’
불안에 젖은 뺨을 쓰다듬으며 던져 준 그 말에 개처럼 눈이 돌았다.
“태헌아, 잠깐…….”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말 했어?”
가로등 아래서 웃던 연오가 떠올랐다. 자기 손끝을 잡고 살랑살랑 흔드는 가이드를 거절하지 않던 그도. 몰랐겠지. 다들 매너 있게 마음을 숨기고 있으니까. 만약 정태헌이 강연오를 사랑하는 게 어떤 일인지 몰랐다면, 그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연오의 마음이 굳건한 걸 아는데도 보채게 된다. 태헌은 무슨 말인지 몰라 답하지 못하는 연오의 안을, 심술궂게 꾹 짓눌렀다. 사정의 여운조차 가시지 않았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자극이 오자 연오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거절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밀어내는 손이 야속했다.
“거기 사람들한테, 그런 말 하지 마.”
친절하고 착하고 마음 약한 내 연인. 태헌은 연오가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키스했다. 너무나 상냥한 강연오는, 태헌의 혀를 물까 봐 곧바로 입을 벌리고 턱에 힘을 풀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반쯤 풀린 눈빛이 아찔했다.
다시 쾌감이 차오르자 늘씬한 다리가 태헌의 허리에 감겼다.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스스로 허리를 흔들거나 성기를 조른 것도 아닌데, 태헌은 자제심을 잃고 말았다.
“아, 흐윽, 흣!”
몸이 계속해서 위로 밀렸다. 침대 헤드에 가까워지는 머리를 태헌의 커다란 손이 보호하듯 감쌌다. 쿵, 쿵, 어딘가 부딪히는 느낌만 있을 뿐 아픔은 전혀 없었다. 그 소리마저 자극이었다. 아래가 물을 흥건히 쏟아냈고 접합부에서 정액이 흘러내려, 찔꺽찔꺽 소리가 온 방을 채웠다. 침대는 이미 정액과 체액으로 젖어 축축했다. 젖은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지독하게 야했다.
“태헌아……!”
입술이 맞닿은 채로 연오가 신음처럼 그 이름을 불렀다. 두 번째 절정은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 연오는 지나치게 예민해져 있었고, 태헌은 정확히 그가 느끼는 부분만을 뭉갰다. 연오가 태헌을 끌어당기듯 다리를 조이며 길게 사정했다.
“헉, 헉…….”
연이은 사정에 지친 연오가 몸에 힘을 풀고 늘어졌다. 태헌의 몸을 밀어내는 손에도 기운이 없었다. 태헌은 거부하거나 버티는 대신, 그의 목과 쇄골, 가슴, 납작한 배, 그리고 젖어서 번들거리는 성기 끝에까지 입술을 떨어뜨렸다. 여운이 덜 가신 곳이 재차 자극받자 후희를 즐기던 연오가 진저리를 치며 몸을 틀려고 했다.
“잠깐만, 연오야.”
태헌이 다정하게 허리를 잡아 움직임을 차단했다. 그러더니 혀로 정액에 젖은 연오의 다리 사이를 싹싹 핥았다.
“정태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행위에 연오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태헌은 그의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하던 일에 몰두했다. 더러운 기색도 없이 허벅지 사이며 정액이 흐른 선단, 기둥, 심지어 고환까지 싹싹 핥은 그가 연오의 성기를 덥석 입에 물었다.
“그만해…….”
연오는 너무 놀라서 그의 머리를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태헌의 승리였다. 그는 능숙하게 선단을 핥고 빨았고, 두 번이나 사정한 후 반쯤 힘을 잃어가던 성기를 금세 세워냈다. 입에서 부풀고 급기야 목까지 찌르는 연오의 성기를, 그가 삼키듯 깊게 물며 자극을 더했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연오 앞에서는 내일 센터에 가야 하니 적당히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적당히 하기 싫었다. 이대로 연오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싶었다. 연오에게 눈독 들이는 사람이 없는, 안전하고 닫힌 공간에 가둬 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었으므로, 또 연오를 소유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으므로 태헌은 지금만이라도 연오를 완전히 먹어 치우고 싶었다.
연오의 성기가 곧 토정할 듯 움찔거릴 때, 하얀 허벅지 안쪽이 힘을 준 듯 당겨질 때, 태헌은 신호라도 받은 듯 성기를 뱉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연오가 그대로 사정했다.
“…….”
묽은 정액을 완전히 뒤집어쓴 태헌을 본 연오가 말을 잃었다.
그는 시뻘겋게 변한 얼굴을 틀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쉴 틈 없이 몰아친 섹스에 기운이 없었지만 태헌을 저대로 둘 수는 없었다.
“미안……. 그래서 내가 하지 말랬잖아.”
얼굴을 닦아 주려고 손을 뻗었지만 태헌이 제지했다. 그러더니 보란 듯 정액 범벅이 된 입가를 핥았다.
“괜찮은데.”
연오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뺨에 정액을 묻힌 모습 그대로 태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 한 번만 더 해도 돼?”
내려다보니 태헌의 것은 아직 서 있었다. 연오의 성기를 애무하며 스스로 선 것 같았다. 아니면 애초에 죽은 적이 없거나. 그러나 도저히 다시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연오가 머뭇거렸다. 저게 안에 들어오면 좋기는 하겠지만 지친 상태에서 느끼는 쾌감은 그만큼 힘들기도 했다.
“그…… 나도 입으로 해줄까, 태헌아?”
“아니.”
태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웃었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연오와 다시 몸을 겹치려 들었다. 옆으로 어깨를 틀어 피하려는 연오를, 큰 손이 덥석 붙잡았다.
“넌 입이 작아서 안 돼. 찢어져.”
충분히 이완된 뒤가 굵은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연오는 좀 쉬자고 말하려다가, 그거야말로 태헌이 기다리는 말임을 알고 겨우 입을 다물었다. 태헌은 몇 번이나 사정했는데도 조금도 죽지 않은 성기를 다시 구멍에 맞췄다. 연오의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넘기고 골반에 손을 짚은 채, 그가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기대하는 연인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여기도 좁고, 연오야…….”
“흣…….”
내벽을 긁으며 침범하는 성기에 연오가 질끈 눈을 감았다. 태헌이 이지러진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정말,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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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골부터 발등까지 순흔이 빼곡했다.
얼룩덜룩 물어놓은 꼴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연오가 정신을 잃은 후에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거의 짐승에게 물어뜯긴 모습이 된 연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헌이 젖은 수건으로 목덜미부터 닦아 내렸다.
“으응…….”
지친 연오는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을 뿐 눈을 뜨지 않았다.
태헌은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긴 섹스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아랫배에 엉겨 붙고 다리 사이에 말라붙은 정액을 닦을 때는 신중하게 살갗을 살폈다. 허벅지 안쪽을 조금 집요하게 괴롭힌 것 같은데 다행히 살이 쓸리거나 벗겨지지는 않았다.
지쳐 쓰러진 듯 보이는 연오에 비해 태헌은 멀쩡했다. 연오가 무의식적으로 가이딩을 했는지 평소보다 몸이 가뿐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있으면 가이딩 부족 때문에 괴로워하던 날이 전생처럼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태헌은 연오가 일어나서 찜찜하지 않도록, 녹진하게 풀린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정액을 긁어냈다. 어찌나 싸댔는지 가만히 둬도 흘러내리던 것들이 본격적으로 빠져나왔다.
“연오야아…….”
깨끗해진 몸에 제 몸을 겹쳤다. 뒤에서 끌어안자 연오가 뒤척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이제는 습관이나 다름없는 몸짓에 태헌이 엷게 웃었다.
너를 좋아하게 될 사람이 한둘이겠냐고 한 건 진심이었다. 연오는, 혼자 자라 자기밖에 모르던 청소년 시절의 정태헌의 마음조차 쉽게 빼앗았다. 몇 마디의 말과 몇 차례의 미소, 전신을 감싼 특유의 분위기만으로. 게다가 지금의 연오는 그때보다 더 성숙해지고, 나름의 여유와 아우라를 풍긴다. 언젠가 박이정이 지나가듯 한 말처럼 태헌은 불안했다.
정신 나간 것처럼 들이대는 에스퍼들은 패버리면 된다. 그러나 연오의 친구와 동료 사이에 섞인 가이드들은 그렇게 대할 수가 없다. 연오에게는 친구가 필요하고, 태헌은 그들 중에서 스파이를 골라내듯 경쟁자를 제거할 수가 없었다.
연오가 싫어할 테니까.
‘귀엽다, 태헌이.’
고작 그 한마디로 나를 무너뜨리는 내 강연오.
아무 짓도 할 수 없어도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네가 그 사람에게 웃어줄 때마다,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질투하고 말 것 같다.
“연오야…….”
태헌이 보송하게 마른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 자신조차 듣지 못할 작은 물음이 뒤를 이었다.
“나 사랑해?”
“응…….”
당연히 대답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태헌은 조금 놀라서 연오를 들여다보았다. 잠잘 때 말을 걸면 대답하는 타입이었나. 아니면 사랑하느냐는 물음이라 특별히 대답해 준 걸까. 후자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왜 사랑해?”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태헌도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라, 색색 고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귀여워서…….”
연오가 깨 있었다면, 어둠에 묻힌 태헌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차에서 들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온몸에 자신의 흔적을 달고 잠에 취한 입술을 달싹이다가, 속삭이듯 중얼거린 그 말이 태헌을 점령했다.
그날 태헌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겨우 잠든 후에는 갑자기 귀와 꼬리가 생겨 연오에게 개처럼 귀여움받는 꿈을 꿨다. 주위에 똑같은 귀를 단 사람이 많았지만 연오가 귀엽다고 말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목줄을 채워 집까지 데려가 준 사람은 태헌뿐이었다. 너무 어이없는 꿈이어서 일어난 후에도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지만, 태헌은 그 꿈을 혼자 오래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