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인은 맹한 얼굴로 서류를 짚어 가면서 되묻는 삼봉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주둥이는 더럽게 까칠하지만 그래도 애는 애다. 팔 년 세월을 공으로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순진한 질문을 하고 있는 코딱지가 코딱지 중에서도 조금 귀엽다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귀엽게 나오면 얼마든지 친절해질 수 있는 것도 우주인이었다.
“배변이 공증을 선 서류니까 내가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월급 떼먹고 도망가면 넌 그 서류를 바탕으로 날 고소할 수 있는 거다. 반대로 니가 일 안 하고 농땡이 부리면 나 역시도 그 서류를 바탕으로 널 고소할 수 있고 말이야. 오케이? 알아들어? 사인해.”
“그려도 무슨 문서 어쩌고 하면 도장을 쾅! 찍어야 되는 거 아닌감유?”
“찍고 싶으면 찍어. 지장을 찍든 족장을 찍든 니 마음대로 하고 빨랑 서류나 넘겨.”
“인주 어디 있서유?”
“인주 그딴 게 내 집에 왜 있어. 코피라도 터트려 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제법 진지하게 말하는 우주인의 모습에 삼봉은 손사래를 쳤다. 인주 대신 코피를 터트려 주겠다는 발상이라는 것이 아무나 못할 생각이겠지만 저 외계인은 완전 실성한 인간이니 하고도 남는다. 냉큼 하라는 대로 세 개의 고용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나니 그걸 받아다 우주인 역시 삼봉의 이름 위에 제 이름을 적었다.
우주인.
암만 봐도 이름 갖고 한껏 성의 없음을 공표한 것은 삼봉 자신의 아비가 아니라 저 실성한 집주인의 아비인 듯싶다. 우주인이 뭐냐. 우주인이.
“이건 내일 배변 출근하면 주고. 한 개는 네가 갖고. 하나는 내가 갖고. 이걸로 계약 끝.”
“뭐……. 야. 알겄구먼유.”
전적으로 삼봉에게 유리한 계약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귀찮은 일을 해치워 버린 듯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우주인이 참으로 요상했던 삼봉은 내내 똥 씹은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야.”
“야?”
“너 이제 우리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이다. 맞지?”
“그렇지유?”
“그러면 지금부터 할 일을 준다.”
“……?”
뭐가 번떡번떡한 것이 휙 날아왔는데 잽싸게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삼봉은 작은 그것이 자신의 머리통을 맞고 튕겨 나와 테이블 위로 찰싹 떨어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금색이 반짝거리는 카드 한 장이 삼봉의 눈앞에 떨어져 있었다.
“돌침대 하나 사.”
“……?”
이건 뭔 소리래? 삼봉의 눈이 왕사탕처럼 둥그렇게 변하자 우주인은 낄낄대며 웃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뜨끈뜨끈하게 되는 거 있더라. 하나 사서 내방 침실에 갖다 놔. 원적선인지 전원외선인지 뭔가 나와서 몸에도 좋고 정력에도 끝내 주는 거 있다더라. 오늘 손님 데리고 올 거니까 밤 9시 전에 세팅까지 끝내 놓으라고. 알아들어?”
“원적외선이유?”
“그래. 그거. 나가봐.”
지금이 벌써 정오를 넘어 오후가 되었는데 돌침대라는 것이 그리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든가? 삼봉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홈쇼핑을 둘러보고 아무리 빨리 물건을 구매해도 내일이나 되어야 물건이 올 것인데 오늘 밤에 그걸 방에다 갖다 놓으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내 옷 다림질해 놨어?”
“건 진즉에 다 해 놨지유.”
“가 봐. 나 외출할 거니까.”
어이없는 축객령에 삼봉은 막막한 심정으로 ‘저 냥반이 드디어 실성을 제대로 했구먼. 제대로 실성을 했어.’ 할 뿐이었다.
어쨌든 이 집의 고용인으로 채용된 후 처음으로 맞는 미션이다. 그깟 돌침대 사는 사람이 없어 못 팔지 팔 물건이 없어 못 파는 것이겠는가.
기필코 오늘 밤 그가 돌아왔을 때 제대로 설치되어 있는 돌침대를 보여주고 말겠다 다짐하며 삼봉은 순순히 우주인에게 내쫓김을 당해 주었다.
돌침대를 판매하는 곳은 많지만 당일 배송이 가능한 곳은 없었다. 삼봉은 수도 없이 많은 전화를 한 후 결국 당일 배송과 설치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대리점을 찾아내었다. 그렇게 돌침대를 구매하였지만 정작 그 돌침대를 사용할 이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삼봉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우주인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다면 훨씬 싼 가격에 돌침대를 구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봉은 그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우주인이 가출(?)한 지 일주일이 되어 가자 분노는 증오로 변질되었고, 그 저주는 차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걍 두지 않을 꺼구먼.”
아득아득!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오늘도 삼봉은 아무 죄 없는 장식장의 도자기들을 닦아대고 있었다.
“절대로 걍 두지 않을 거구먼.”
“뭘 그냥 안 둔다는 말이니.”
“아줌니.”
오늘도 한 손에 식칼을 드신 채 식품 저장고로 향하시는 양 여사를 발견하고 삼봉은 겸연쩍게 머리를 긁었다.
“암시렁도 안 혀유. 일 보셔유.”
“오늘 날 좋을 거 같더라. 빨래하지 그러니?”
“그럴려구 했시유. 한참 꾸물꾸물 날이 우악스럽더마 오늘은 볕이 좀 날 거 같지유?”
우주인이 집에 없어도 양 여사는 언제나 그의 음식을 만들었다. 별스러운 인간이 언제 들고 난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는 주제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밥!’이었다. 그 밥이 없으면 난리가 난다. 그러니 우주인이 있거나 없거나 양 여사는 일주일 단위로 짜여진 식단대로 음식을 만들어 놓는다. 요 일주일간 그 음식들은 모두 양 여사와 삼봉이 먹어 치웠다. 그래도 남는 것은 금자의 차지였고 말이다.
“날이 참말로…….”
이미 양 여사가 사라진 거실 한켠에서 우두커니 도자기를 닦던 삼봉이 말꼬리를 흐렸다.
“좋을 거 같구먼.”
그러면서 그는 웃었다.
스샤샥 하면서 벌어지는 작은 입술 사이로 하얗게 반짝거리는 이가 시원스럽게 드러난다. 사악함이 담뿍 묻어 있는 환한 미소를 띠며 삼봉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룰루루루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르스름하게 변색되기 시작한 밥이 두어 숟가락 정도 남아 있었다. 사람이 먹기는 양이 적기에 이것저것 섞어서 저녁에 금자 밥으로나 쓰려고 놔둔 것이지만 삼봉은 과감하게 그것을 면보에 넣고 주머니 끈을 칭칭 감아 묶었다.
면보를 손에 들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삼봉은 그것을 휘휘 돌리면서 세탁실로 갔다. 따뜻한 물이 담겨 있는 대야에서 조물조물 면보를 주무르는 손에 암팡지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삼봉이 한 일은 아주 단순하고 얼핏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음식 준비를 제외하고는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는 삼봉이었으니 세탁은 당연지사 그의 몫이다. 그런 그가 빨래에 쌀풀을 먹이는 일이 무에 대단할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짙게 우러난 쌀풀 물에 담근 의복의 종류는 당연스레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삼봉은 뽀얗게 잘 우러난 풀물에 형형색색의 팬티들을 휙휙 집어던진 것이다.
우주인은 별스럽게 한 종류의 속옷을 고집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겉에 입는 옷의 종류에 따라 트렁크도 브리프도 가리지 않고 입었는데 삼봉은 그 수많은 트렁크와 브리프. 즉, ‘빤쓰’들을 짙게 우러난 풀물에 담가 조물 거리는 것이다.
한여름 염천에 모시 적삼 풀 먹이는 것도 아니다.
연약한 맨살에 닿아 꼭 조이고 끼일 그것을 풀 먹이는 일이다.
어찌나 공을 들였는지 삼봉은 팬티들을 하나하나 건져내 꼭 짜서 다시 풀물에 담궈 조물거리는 일을 무려 세 번이나 하였다.
“으흐흐흐흐. 진인사대천명이라. 이제 모든 남은 일은 하늘이 정할 터. 크흐흐흐.”
누가 그리하라 이르지는 않았지만 삼봉은 세탁실에 있는 건조기 사용하는 일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다. 세탁기에서 꺼내 곧바로 건조기에 넣으면 따로 걸음 하지 않아도 보송보송하게 마른 세탁물을 얻을 수 있지만 굳이 계단으로 젖은 빨래를 들고 올라가 옥상에 널어 말리는 것이다.
살림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살림을 즐기는 일에는 귀신같은 안목을 갖고 있는 우주인이 볕에 마른 시트며 타월을 마다할 리 없었다. 애꿎게 제 신세 들볶는 일이라며 양 여사만 한 번 혀를 찼을 뿐이다.
공들여 풀 먹인 팬티와 쨍하니 뜨거운 늦은 봄의 햇살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삼봉의 말대로 이제 모든 것은 작열하는 태양에 달려 있었다.
진영의 노친네가 보자기에 가볍게 나간 것이었다. 저녁에는 데이트 약속도 있었고, 그야말로 가벼운 마음으로 나간 길에 납치를 당해 LA까지 갔다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내도록 자기 손녀사위가 될 생각 없냐며 추파를 던지던 노친네가 아예 작정을 하고 사람까지 써서 납치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르신한테 대놓고 ‘나는 게이니까 여자한테는 안서요!’라고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왕지사 비행기에 실린 몸 공짜 티켓이다 생각하고 LA 게이들의 엉덩이나 실컷 쑤셔 주고 왔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진영 노친네의 손녀라는 아가씨는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했으되 그 머릿속은 그리 명품이라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지식이 많다고 명품은 아니다. 적어도 주인이 생각하는 바는 그러했다.
결혼은 할 계획도 생각도 의지도 없지만 피치 못 할 사정으로 혼인의 굴레에 스스로를 묶게 된다면 적어도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나름의 가치관이 있는 사람과 인연 맺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건 뭐 생각도 투지도 없는 온실 속의 화초가 공주병에 걸려 거만한데다 시끄럽기까지 했다. 싫고 좋은 것이 분명한 주인의 성격에 그녀와의 세 시간을 참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영 그룹의 큰 회장 즉, 그녀의 할아버지 체면만 아니면 그녀는 주인과 대면한 지 삼 분도 되지 않아 온갖 독설과 협박 그리고 아주 약간(?)의 폭력으로 눈물을 흩뿌리며 뛰쳐나갔을 것이다.
“양 여사 밥 줘!”
계획에 없던 외유로 일주일씩이나 집 밥에 굶주려 있던 주인은 신발도 벗기 전에 우렁차게 외쳤다. 그래 봤자 돌아오는 대답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방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양 여사가 아닌 코딱지일 줄은 몰랐다. 외유에서 돌아오면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현관까지 나와 어디 가서 밥도 굶고 다니냐고 타박을 한 뒤 뭐가 먹고 싶은 거냐 묻던 양 여사가 없다니.
주인은 절망 속에서 ‘끙…….’ 하며 이마를 짚었다.
“아줌니 안 계시는디유?”
“어디 갔어.”
“온다 간다 기별 없는 사람 기다리다 제철 놓치겠담서 장아찌 담글 봄 양파 사러 무안 내려가셨시유. 새벽에.”
“무안에?”
“사장님이 안 계셔서 지는 몬 델꼬 가겠담서 지보고는 가을에 같이 가자시던디유? 언제 들어오실지 모르니까 집을 비워 둘 수는 없담서……. 근디 워디 갔다 오신 거여유. 몬 들어오시면 몬 들어오신다. 언제 들어오실 거면 언제 들어오신다 말씀을 하시면 좋잖녀유.”
갑작스럽게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왔다.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슬금슬금 꼬여 오던 뱃속에서 요란하게 농성을 벌이자 바짝 곤두선 신경이 코딱지의 느릿느릿한 염장질까지도 귓등으로 듣게 하고 있었다.
“니 잔소리 들을 기력도 없다. 그래서. 밥 없어?”
“밥이야 있지유. 아줌니가 워디 집에 밥 떨어트릴 분이시던가유? 워째유. 차려 드려유? 아침나절에 아줌니가 고등어자반 갖고 고등어찜을 만드셨는디.”
“…….”
주인은 혹독한 갈등 앞에서 눈앞의 코딱지를 노려보았다.
양 여사가 만든 음식이라도 차리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날 수도 있다. 고등어찜은 그가 많이 좋아하는 메뉴들 중에 하나였지만 그것은 갓 끓여 낸 고등어찜을 양 여사가 식탁 위로 옮겨 줄 때의 일이다. 다른 사람 손 탄 음식을 어째서 집에서까지 먹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가 많이 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양파 장아찌를 위해 무안까지 내려갔다는 양 여사를 탓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코딱지에게 밥을 차려 달라고 해?
저 앙큼 발랄한 코딱지라면 음식에 비소를 섞을지도 모르지만 독극물을 우려하기에는 너무도 주린 배가 맹렬하게 자기주장을 한다.
꾸륵꾸륵 아주 난리가 난 위장을 슬그머니 움켜쥐며 주인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차려.”
“야?”
“밥 차리라고. 씻고 갈 테니까. 대신 밥만 차려놓고 꺼져. 알아들어?”
“야?”
“귀가 썩었냐? 밥만 차려놓고 눈에 띄지 말라고! 내가 왜 일주일 만에 제대로 된 밥을 먹는 자리에서 네 얼굴까지 봐야 하는 거야. 꺼져! ……밥만 차려놓고.”
그 때 주인은 보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삼봉의 입술이 달싹달싹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냥 입술만 달싹거리지만 틀림없이 욕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렇다 해도 주인에게는 양보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철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욕을 한 게 분명한 주제에 방긋 웃으며 ‘그럴께유.’라고 말해도 속지는 않는다.
가벼운 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딱지를 노려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의 반발심에 편승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빌어먹을 뱃속은 주인의 저주를 한 몸에 받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는 삼봉이 차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밥상을 뒤집더니 이제는 잘만 처먹는다. 그냥 잘 먹는 게 아니라 수북하니 고봉으로 얹어 준 머슴밥 한 공기로 모자라 밥을 더 청해 먹을 만큼 게걸스러웠다. 삼봉은 주인이 저 멀쩡한 생김새를 하고서도 실상은 어디 가서 밥투정을 하다 쫄쫄 굶고 다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두 그릇. 실제로는 세 그릇 정도 되는 밥을 해치우고 나서야 우주인은 밥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집을 비운 동안 적막하기 그지없었던 집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가 귀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배 변호사가 달려왔고, 얼굴은 처음 봤지만 전화 통화는 많이 해서 목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우주인의 비서란 양반도 처음으로 집에 왔다.
“첨 뵙네유. 지는 삼봉이라고 혀유. 정삼봉이유.”
“아. 카드 받으셨죠? 이거 드려야 하는데 늦었네요. 여기 통장. 현금 카드입니다.”
배 변호사가 먼저 우주인을 차지했기 때문에 비서 양반은 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죽어도 멀티는 안 된다는 괴성을 질러 대는 반 실성 초딩은 재껴 두고 삼봉은 맥없이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린 비서에게 차를 내주며 인사말을 건넨 것이다.
하지만 이놈에 집구석 그야말로 집터가 수상한 것인지 하나같이 정상적인 인간이 없었다.
눈만 끔뻑이며 비서 양반의 가방에서 나온 통장과 현금 카드를 받아 든 삼봉은 뻐끔뻐끔 입술만 움직였다.
분명 인사를 했는데 상대편의 삼봉의 인사 따위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거에 관련된 비용이 전부 제 선에서 지출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삼봉 씨가 하게 되었다고 하시더군요. 카드는 이미 받으셨다 들었고, 현금 지출되는 항목을 대비해서 매달 통장으로 일정 금액이 입금됩니다. 용도에 맞게 사용하시고 영수증 발급받아서 저한테 이메일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영수증 받기 곤란한 지출은 항목만 적으셔서 지출 항목과 금액을 맞춰 주시구…….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지 이름은 삼봉이라구유.”
심사가 뒤틀리지만 삼봉은 그래도 사람의 도리를 지켜야 했다. 초면에 예의 ‘욱!’ 하는 성질 머리를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아! 죄송합니다. 일이 밀려 있어서 제가 실례를 했군요. 구 비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
이쪽은 이름을 말했는데 상대편은 직함만을 이야기한다.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삼봉은 붙임성 있게 웃어야 했다.
이게 다 일이다. 즉, 업무상의 미팅인 것이다. 그러니까 성질부리지 말자. 성깔 죽이자.
그건 지난 한 달 하고 일주일 동안 삼봉이 미친 듯이 자기최면을 걸던 말들 중에 하나였다.
“에이! 지 나이가 어리구먼유. 말씀 놓으셔유. 딱 봐도 성님뻘인데 지가 불편하구먼유. 동생같이 생각해 주서유.”
“전 누님 하나에 외동아들입니다. 남동생은 없습니다.”
“커헉!”
만화에나 나올 법한 신음 소리를 내었지만 구 비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태연하고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삼봉의 싹싹한 말을 튕겨 낸 것이다.
이쪽도 만만찮게 까칠한 인간성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