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 현금 지출하지 마시고 카드 지출하셨으면 합니다. 아!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핸드폰 구입하셔서 제게 번호를 알려주십시오. 급한 일이 있을 때 연락처가 애매해서 말입니다. 물론, 핸드폰 구입비용은 업무상의 지출로 지급된 카드를 사용하실 수 있는 항목입니다.”
“……일도 없이 핸드폰은 뭣하러유. 지는 만날 집에 있는디. 집으로 하셔유.”
“새벽 두 시에 사장님 자택 전화로 삼봉 씨에게 연락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새벽 두……!”
삼봉이 놀라거나 말았거나 구 비서는 꿈쩍하지 않았다.
“통장에 명함을 끼워 놨습니다. 거기 이메일 주소가 있으니 그쪽으로 연락처 남겨 주십시오. 지출 항목 정리된 것은 매달 3일까지의 사용분을 정리해서 발송해 주십시오.”
그렇게 구 비서란 사람은 삼봉의 혼을 쏙 빼놓고는 배 변호사와 바통 터치를 하여 우주인과 면담을 하러 들어갔다.
삼봉은 폭풍이 지나간 것과 같은 혼돈 속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더 일거리를 늘려 놓으시면 파업할 겁니다!”
앙칼진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 비서는 크르릉거리며 우주인을 협박했다. 하지만 협박당하는 당사자는 후비적 후비적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고서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사실을 말해 봐.”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사실을 말해 보라고. 일을 늘려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업무 중의 일부를 코딱지한테 넘겨줘서 화가 난 거지?”
“예?”
회전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놀던 우주인이 벌떡 일어나 구 비서에게로 다가왔다. 가벼운 면바지를 걸친 긴 다리가 구 비서가 늘어놓은 서류로 포화상태가 된 소파 테이블 위에 걸쳐진다.
“여기. 이 집 관리 업무를 정삼봉이한테 넘겨서 화가 난 거 아니냐고.”
“제가 변탭니까?”
“아니야? 일 중독자.”
고용인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서류들을 챙기고 있던 구 비서의 움직임이 딱! 하고 멈춰 버렸다. 그것이 재미있는지 우주인은 다시 한 번 한글자 한글자 끊어 읊어 댄다.
“일.중.독.자.”
“…….”
“워터 파크 일을 새로 맡게 되었으니까 한 가지는 줄여 준 거야. 먹이 뺏긴 짐승처럼 너무 으르렁대지 말라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집 관리하는 일이야 구 비서한테는 한 시간 일감도 안 되잖아. 더군다나 양 여사처럼 완전히 맡겨 놓은 것도 아니고 담당만 시켜 놓은 일이니 결국 당신이 최종 검토는 해야 하는 부분이고 말이야. 안 그래?”
“……사장님.”
“삐치지 말어. 그렇게 새초롬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확 덮쳐 버릴지도 몰라.”
우주인은 지나치게 매력적인 남자다. 대단히 취향이 독특해서 곰보에 절름발이가 아니면 내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없다 외치는 사람이라도 우주인을 보고 판단하는 결론은 같았다.
지나치게 잘난 남자.
그런 남자가 은근히 들쩍지근한 추파를 던져 오자 구 비서는 몇 번 의미 없는 헛기침을 하였다.
“택도 없거든요?”
“없어?”
“불알 떼고 오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같은 물건 달린 남자와 노닥거릴 계획도 의지도 호기심조차도 없습니다. 저는.”
성별을 불문하고 가슴이 두근거릴 유혹에도 구 비서는 꿋꿋했다. 꿋꿋하고 싶어 꿋꿋한 것이 아니라 요따위 질 낮은 추파에 노출된 것이 너무 오래되어 그의 심장에는 스테인레스 와이어만큼이나 위력적인 털이 부숭부숭 나 있었던 것이다.
“쳇!”
“배 변호사님 덕분에 내일 드디어 착공식에 들어갑니다.”
“…….”
그 잠깐 사이 졸기라도 하는 듯 구 비서의 맞은편에 앉아 서류 위로 발을 걸친 우주인의 머리통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구 비서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사장님.”
“응?”
“딴청 피우지 말고 들으십시오. 시삽은 직접 하셔야 합니다.”
“꼭 해야 돼? 귀찮은데…….”
“…….”
자꾸만 물그릇으로 뛰어드는 병아리를 보는 어미 닭의 시선으로 구 비서의 눈길이 싸늘해졌다.
그는 두말없이 PDA를 꺼내 들었고, 뽁뽁 소리를 내며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뭐해?”
“…….”
“어이. 뭐해?”
“문자질이요.”
“사장하고 업무 회의하면서도 문자질이냐? 이 망할 비서 놈아?”
“사장님이 일을 안 하신다니까 내일 착공식 초대 손님들의 비서 분들 핸드폰으로 단체 문자 돌리는 중입니다. 빌어먹을 개초딩 사장님.”
“진짜 안 간다!”
우주인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초딩 재벌은 자수성가한 여느 재벌 노친네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행동 패턴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패턴을 파악한 사람들은 그를 다루는 일에 큰 애를 먹지 않는다. 가장 오랫동안 그의 곁에 있었던 양 여사가 그렇고, 그다음이 자칭 타칭 일 중독자 구 비서였다.
구 비서는 유연하게 자신의 PDA를 우주인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큼지막한 화면이 그대로 보이도록.
“발송할까요?”
“……너 해고야.”
최후의 카드를 내밀었지만 구 비서는 털끝만큼의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회심의 카드를 내보인 우주인에게 부메랑처럼 엄청난 역습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비서실이란 것을 만들어 보시려구요?”
“윽!”
“한 삼십 명 데리고 있으면서 월요일은 이비서 화요일은 김비서. 뭐 이런 식으로 스케줄 보고 받는 거 이제 하고 싶으신 겁니까?”
잘난 얼굴 아름다운 눈매가 잔뜩 화난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피곤해. 난 니들 먹여 살리느라 LA까지 납치를 당해도 찍소리 못하고 참았단 말이야. 고마운 줄 알라고!”
“LA 클럽들에 전화 돌릴까요? 체류하신 일주일 동안 어디 어디에 사장님이 출몰하셨는지 증언 받아서 보여드려도 그 소리 하실 겁니까? 사실은 핑곗김에 놀러 가신 거잖아요. 어디서 뻥을 치십니까.”
‘덱덱덱덱!’ 우주인은 지금부터 구 비서의 말이 저런 식으로 들린다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물끄러미 싸늘한 은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를 응시하자 천천히 그 ‘덱덱덱덱.’ 하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마 틀림없이 ‘일거리를 더 물어 오란 말이다! 일거리를 물어 와!’ 하는 말 따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구 비서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바카라 판에 뛰어들 판돈만 쥐여 주면 군말 없이 조용한 배변. 신체 접촉만 하지 않으면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찍소리 안 하는 차예진 씨처럼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일당백의 초능력 비서는 일거리만 물어다 주면 되는 것이다.
역시 집안 관리 업무를 코딱지한테 넘겨주는 게 아니었다. 제 일거리를 줄이면. 혹은 종료된 일이 생겨 일거리의 양이 적어진다 싶으면 달거리 하는 계집애처럼 온갖 신경질이 폭주하는 그를 알면서 무식하게 용감한 짓을 했다 싶었다.
그리고 우주인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구 비서는 결국 까칠 비서의 가면을 벗고 본능으로 돌아가 외쳐 대고 있었던 것이다.
“땅을 사서 금맥이라도 나오게 하란 말입니다. 일을 더 달라고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지만 구 비서는 자신의 말에 손톱만큼의 의심이 없었다. 그는 지금 저렇게 게으름 피우면서 어떻게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주인의 볼기짝을 두들겨 주고 싶었다.
배 변호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참말이어유?’ 하는 삼봉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구 비서는 자기 이름 말하는 거 진짜 싫어해.”
“음마. 대체 워떤 부모가 자석 이름을 고로코롬 짓는데유? 구라가 뭐여유. 구라가. 구씨 성에 이름은 라라구유? 그게 참말이어유?”
“응.”
“음마…….”
삼봉의 불확실한 명제가 확고부동의 법칙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놈에 집구석은 터가 이상한 게 분명하다.’
주인 양반 이름은 우주인.
변호사 선생님 이름은 배상중.
무엇보다 크리티컬은 비서 형님 이름이 구라.
물론, 삼봉의 이름도 흔하다면 흔하고 희한하다면 희한한 조합이다. 한 마디로 저질 몸 개그처럼 이름으로 웃겨 드립니다 세트로 구성될 수 있는 네 명의 남자들이 한집에 모여 있는 것이었다.
그쯤 되니 집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참말. 넘의 이름을 갖고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되었다 울어 줄 수도 없고. 난감하네유.”
“난감할 것까지야 있겠어?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뭘 알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양반은 못되는지 삼봉을 난감하게 만든 구라 씨가 한 아름 서류들을 안고 서재를 나왔다.
그는 낄낄대는 배 변호사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굴리며 고개도 들지 못하는 삼봉으로 모든 정황을 파악해 버렸다.
“또 제 이름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계셨습니까?”
“아니. 뭐……. 화기애애할 것까지야.”
“배상은 다 하시고 놀고 계시는 겁니까?”
“커헉!”
“풋!”
배 변호사는 질린 신음 소리를 내었지만 삼봉은 맥없이 웃었다.
이름을 바꾸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배상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의 직업이 변호사라는 것은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그 어떤 재판에서도 지지 않는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변호사의 이름이 배상하는 중이라는 것이 더 기막힐 노릇이지만 삼봉은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는 멀쩡하게 생긴 어른 남자 둘이서 서로의 이름을 갖고 유치하고 질 낮은 시비를 거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웃길 뿐이었다.
“정삼봉 씨. 지금 비웃으신 겁니까?”
“아녀유.”
삼봉 자신도 이름 때문에 놀림 당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냉큼 웃음기를 지우고는 진지한 얼굴로 구 비서를 보았다.
“정삼봉 씨도 제 이름이나 배 변호사님 이름을 갖고 비웃을 만한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요?”
“지가 뭐라고 했시유? 지는 암말도 안혔시유. 두 분 끼니는 드셨시유? 시간이 어중간헌디 안적 점심 전이시지유? 김치적을 맹글까 허는디 같이 자실래유?”
구 비서는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꼬맹이가 제법 유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칫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요령껏 위기를 모면하며 자연스럽게 친해질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에게서 한 가지 일거리를 빼앗아 간 몹쓸 녀석은 꽤 유능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영리하다.
영리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생각하는 구 비서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을 하거나 노름을 할 때만 제외하면 언제나 얼없이 사람 좋기 만한 배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치 부침개 지져지는 소리와 냄새는 그 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허기를 부추겼다.
세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잘 구워진 김치 부침개를 나눠 먹고 있던 어느 순간 그들의 젓가락질을 멈추게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사장님?”
“음마? 누가 문 열어놨시유? 금자가 들어왔나 봐유.”
배변은 친절한 금자 씨가 물고 흔드는 주인의 볼기짝을 안타까워하며 웃었다.
이 집에서 우주인을 저토록 목청 높여 비명 지르게 하는 것은 친절한 금자 씨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자 씨는 괴팍하고 성질 나쁜 우주인에게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 유일한 생명체이기도 했다. 우금자가 왜 주인만 보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지, 그 성격에 우주인은 어째서 우금자를 내쫓거나 구워 먹어 버리겠다는 협박조차도 하지 않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추측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다. 숨죽인 오후 나절의 집안 공기를 뒤흔드는 것은 우주인의 욕설뿐이었다. 금자에게 물렸을 때 소리는 지를망정 욕을 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는 주인이었기 때문에 배변을 필두로 세 명의 남자들 우주인의 침실로 뛰어갔다.
피곤하다며 자러 들어간 사람이 왜 혼자 방안에서 욕을 하고 있는 것일까.
주인의 침실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혼자 서서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욕을 하고 있는 우주인을 발견했다.
“빌어먹을 썅! 아우---!”
삼봉은 역시 이 집 주인은 실성한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굳혔다.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