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58)

“뭐?”

반면 우주인은 뜬금없는 팀장의 말에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과 달리 뻔뻔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정신병원에 신고하기 전에 장난질은 그만 하십시오.]

뚝!

굴하지 않는 정신력의 소유자 우주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쩌면 심심했는지도 모른다.

[……예. 별표 돌침대 고객 상담실입니다.]

다시 건 전화에 바로 팀장이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우주인은 ‘으하하하하.’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누가 봤다면 제대로 미친놈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정신 공격에 피폐해져 가고 있는 별표 돌침대 고객 상담실 팀장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전화를 끊어? 누구 맘대로 전화를 끊어. 니들 내가 누군지 알아?”

[예. 예. 잘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백차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뚝!

그 후로도 우주인은 지칠 줄 모르는 스테미너를 자랑했다.

[장난 전화 그만 하고 엄마 들어오기 전에 숙제부터 하세요. 초딩 어린이.]

뚝!

[백차 부르기 전에 그만 하자.]

뚝!

[이봐! 지금 초딩 방학이야?]

뚝! 이제는 우주인과 말을 하려 들지도 않는다.

[제발 이 인간 전화 나한테 연결하지 마!]

뚝!

그 후로는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광기 어린 표정으로 집요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갈 뿐 응답이 없는 소리를 셀 수 없이 듣고 있다 우주인은 마침내 새로운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그가 별표 돌침대 고객 상담실로 거는 전화를 그만둔 것은 처음 그가 고객 상담실의 직원과 통화를 시작한 뒤 세 시간이 지나서였다.

“예?”

배 변호사와 함께 일을 하고 있던 구 비서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자 배 변호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우주인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껏 배 변호사는 우주인과 통화하며 저런 표정을 짓는 구 비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뭐랄까. 그의 얼굴은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표정이랄까? 그게 절대로 구 비서에게 어울리는 얼굴이 아니라서 배 변호사는 더욱 궁금해졌다. 지금 저 망할 개초딩이 제 비서에게 뭐라고 하는 것일까.

아예 일손을 놓고 이쪽만 바라보는 배 변호사를 보며 구 비서는 인상을 쓴 채 서류를 가리켰지만 마음이 떠난 시선만 서류로 향한다고 일이 되지는 않는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셔야 하니까. 일찍 주무십시오. 예. 그럼……. 뭐하십니까?”

“궁금하잖아.”

“뭐가요.”

“사장님이 뭐라는 거야?”

“아…….”

커피 잔이 비어 버린 것을 보며 구 비서가 일어나자 배 변호사는 냉큼 그 꽁무니를 쫓았다. 이것도 사무실에 들어온 뒤 죽도록 일만 하다 간신히 얻은 커피 브레이크였다.

“별표 돌침대를 망하게 하라고 하시는데요? 자금줄 끊고, 가쉽 뿌리고 거래 업체 매수해서 쫄딱 망하게…….”

“뭐?”

“사장님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잖습니까.”

“허…….”

배 변호사는 기가 막혀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인생이 화보면 뭐에 쓰나 성질 머리가 개차반인데. 틀림없이 제 놈 침대로 뛰어드는 그 몹쓸 버릇은 생각지도 않고 엄한 돌침대 회사 하나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모양인데……. 사실 그의 눈에 그런 살벌한 소리를 들으며 저처럼 따스한 표정을 짓는 구 비서는 거의 보스 급의 몬스터로 보였다.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뭐가요.”

“대체 무슨 이유로……. 아니 왜. 돌침대 회사를 왜 망하게 하려는 건지……. 그러니까.”

“사장님이 한 말 그대로 재생해 드릴까요?”

“아니. 나는 구 비서 생각이 궁금한 거야. 저 망할 개초딩이 하는 말을 그대로 시행할 생각이냐고.”

“미쳤습니까?”

“응?”

커다란 머그컵에 양껏 커피를 따라 담은 구 비서는 다시 홀린 것처럼 서류들 쪽으로 걸어갔다. 뒤꽁무니를 물고 졸졸 따라오는 배 변호사는 안중에도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서류에 집중하려고 해도 반짝반짝 빛나며 마치 애원하듯 응시하는 시선은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일을 하지 못하게 하면 구 비서는 짜증을 낸다. 그는 좀 짜증이 났다.

“배 변호사님 우리 사장님하고 같이 일하게 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이 년? 삼 년으로 접어들고 있지.”

“그럼 잘 모르시겠네요. 그리고 앞으로 명심하셔야겠네요.”

“그러니까 어쩌겠다는 거냐고.”

다리를 꼬고 그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얹은 구 비서가 진지한 얼굴로 배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우리 사장님 무식하죠? 말도 안 되게 유치하고 상식도 없고 가끔 보면 저게 스물일곱이나 처먹은 어른 맞나 싶죠?”

“두 번 말해 입 아픈 소리를 왜 해.”

“무식하고 상식 없고 유치한데다 성질 머리까지 반 실성한 사람 말을 진지하게 들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응?”

배 변호사는 뭔가 중요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그게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지 않아 한참 넋을 빼고 앉아 있었다.

“빽빽 소리 지르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삘삘 하면 그 앞에서만 예. 예. 해주면 끝납니다. 어차피 사흘도 못 가 자기도 잊어버리는 말인데요 뭐. 돌침대 사놓으란 말도 사실 그렇게 무시해 버리면 되는 말이었는데 삼봉 씨가 아직 사장님 성질 머리를 모르니까 곧이곧대로 해다 바쳐 이 사달이 일어난 거 아닙니까.”

“어…….”

“딴에는 그래 놓고 삼봉 씨한테 많이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세 시간 넘게 사장님한테 들들 볶였을 돌침대 회사 직원들만 불쌍하죠.”

시계까지 보면서 뭔가를 말하는데 배 변호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누가 미안하다는 거고 누가 불쌍하다는 건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설명 좀 자세히 해주면 안 될까. 구 비서? 난 도통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일 안 합니까. 일! 일합시다.”

배 변호사의 애원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구라’비서는 다시 서류를 들이대며 일할 것을 종용했다.

누가 불쌍하고 또 누가 미안하고 그리고 우주인이 뭔 말을 했다는 것일까.

배 변호사는 내도록 그 생각만 했다.

씨감자만한 양파들이 잔뜩 들어 있는 자루를 옮기면서 삼봉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양 여사는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디 아프니?”

“야?”

“너 어디 아픈 거냐고.”

“아녀유. 아까 참에……. 살짝 넘어졌시유.”

“어디서. 다쳤니?”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는 얼굴이 헤실 헤실 웃고 있었다.

“쥔 아자씨가 열 받아서 지를 살짝 밀쳤는디 엉덩방아를 찧었구먼유. 쥔 양반은 질 더러 돌침대 사다 놓으라고 한 것을 까맣게 까먹고 계셨는가봐유. 고냥 침대로 뛰어들었다가 부닥쳤다믄서 워찌나 성질을 부리시던지…….”

“…….”

양 여사는 가만히 한숨을 쉬며 삼봉의 어깨를 짚었다.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았어도 그 광경이란 것이 뻔하다. 애를 얼마나 들들 볶고 닦아 세웠는지 여간해서는 기죽는 법이 없었던 어린애 얼굴이 핼쑥해져 있지 않은가.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에 와 있는 애한테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치긴 했어도 그녀는 그리 큰 친절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다만 어린애가 좀 놀랐겠다 싶을 뿐이었다.

“몸이 많이 불편하니?”

“아녀유. 쪼깨 멍이 들었을라나? 별거 없시유. 그냥 우리 집 아랫목이 좀 생각나기는 하는 구먼유.”

“어린애가 지지는 거 좋아하는 모양이로구나.”

“헤헤헤. 촌놈이 별거 있간디유? 뜨끈한 아랫목에 시원하게 지지고 나면 깨뿌둥한 것두 곰방 날러가잖어유.”

양 여사는 피식 웃어 버렸다.

아마 삼봉이는 뜨뜻한 아랫목에 몸을 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꽤 비싼 아랫목에 말이다.

“그거 부엌까지만 가져다 놓고 넌 가서 손님방 하나 치워라.”

“야?”

“사장님 오늘 사장님 침실에서 주무시지 않으실 거야. 원래 딱딱한 데서는 못 주무셔.”

“음마? 금 돌침대는 왜 사다 놓으라고 하신 거래유?”

“모르지. 그러니까 뭐라고 소리 지르기 전에 손님방 하나 치워놔.”

“참----말! 요상한 사람이구먼유.”

“원래 그런 사람이야.”

분개하는 삼봉과 달리 양 여사는 여상한 얼굴이었다.

“아줌니 이거 하시는 거 도와 드려야지유. 혼자 이 많은 걸 어쩌시려구유.”

“너 없이 계속 혼자 하던 일이야. 별스럽게 지금에 와서 네가 돕지 않으면 못할 이유 있겠니? 사장님한테 손님방 치워놨다고 말씀드리고 넌 사장님 방에서 자. 돌침대 새로 사 놓은 거 온열 기능도 있지? 구들막 아랫목이랑 같지는 않아도 뜨끈하게 지질 수 있을 거다.”

“야? 질더러 사장님 방에서 자라구유?”

“아프다면서.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거지. 멀쩡한 물건 그냥 놀릴 이유 있니? 어차피 내일 사장님 일어나시기 전에 넌 일어날 테니까 그 방서 자.”

“아줌니…….”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삼봉의 입이 터지기 전에 양 여사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녀로서는 어서 가서 손님방이나 하나 치우라는 의사 표현이었지만 삼봉은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녀의 배려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이놈에 집구석 요상한 사람들에 성질 머리 개차반 같은 주인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이리 친절하고 상냥하니까 나가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월급도 많이 주고 말이다.

다른 사람 다 좋고 사장 하나만 나쁜 놈이니까 사장 하나만 좋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 모두 고약한 거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하는 삼봉이었다.

그는 나름 오늘 고약한 짓을 한 우주인에게 보복할 방편이 있으니 더 열 받아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 밤 기대하는 대로 뜨듯하게 지지면서 잘 수 있다 생각하니 기분까지 좋아지고 있었다.

“가서 손님방 치우고 사장님한테 방 치워놨다고 말씀드려.”

“……야.”

미적미적 주방을 나가는 삼봉을 보면서 양 여사는 살짝 고민에 빠졌다.

돌침대라는 것이 장정 한둘로 옮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조만간 그걸 삼봉이 방으로 옮기려면 다시 구매처에서 사람을 불러야 할 것인데 부디 우주인이 뭔가 사고만 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구 비서보다 훨씬 오랫동안 우주인을 보살폈던 그녀는 우주인에 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으리으리한 우주인의 침실에서 뜨끈뜨끈한 돌침대에 밤새 몸을 지진 삼봉은 그야말로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발딱 일어나 대충 눈곱만 떼고 제가 잠든 방을 치우던 삼봉은 웬일로 새벽같이 일어나 방으로 들어오는 주인을 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속으로야 백 번을 갈아 마셔도 일단 눈앞에 대 놓고는 살살 기는 척해 주는 게 일신의 보양에 좋은 행동이다.

이제 슬슬 이 해괴한 집구석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터득하기 시작한 삼봉이었다.

“원래 이렇게 일찍 일어나냐?”

“야? 아……. 오늘은 별스럽게 일찍 인났구먼유. 잘 주무셨시유?”

“계약서 다시 써야 하는 줄 알고 긴장했잖아.”

주인으로서는 그의 수면 시간이 평균 여섯 시간에 미치지 못한다면 고용 계약서를 다시 써야 하고 삼봉의 연봉이 다시 계산되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을 불평한 것이지만 심하게 축약한 주인의 말을 삼봉은 알아듣지 못했다.

“여섯 시간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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