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빨래거리 내놓을 거 없지유?”
“…….”
“금 일 보서유. 지는 나가 볼께유.”
“왜 없어. 팬티 입을 게 하나도 없잖아!”
우주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한 아름 시트를 끌어안고 나가려던 삼봉이 화들짝 놀랄 만큼 큰 소리였다.
“빤쭈가 왜 없어유. 한가득 서랍에 넣어 놨구먼.”
“없어!”
“이상하다? 분명 어제 죄 빨아서 넣어 놨는디?”
다시 한 번 시트를 바닥에 내려놓은 삼봉이 타박타박 속옷장 앞으로 걸어가자 우주인은 한껏 심정 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을 게 하나도 없어. 봐. 나 지금도 팬티 입을 게 없어서 안 입고 있거든? 너 자꾸 게으름 피우면 월급에서 깐다!”
“지가 무신 게름을 피웠다구 그러는구먼유? 봐유. 여기 죄 들어 있는 게 빤쭈뿐인데 뭔 빤쭈가 없다는 거여유. 시방!”
삼봉의 말대로 속옷장 안에는 형형색색의 팬티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우주인이 입고 싶은 팬티는 하나도 없었다. 주인이 하고 있는 말은 그 말이었고, 삼봉은 결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제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진 주인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속옷장 안에 있는 팬티를 죄 꺼내 침실 바닥에 흩뿌렸다.
좀 예쁘게 봐주려고 해도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는 개초딩이다. 삼봉은 어이없는 얼굴로 순식간에 방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우주인의 행태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이것들이 다 흐물거리잖아. 썩은 거 같단 말이야. 빳빳하게 만들어.”
“야?”
그놈에 풀 먹인 팬티 때문에 벌써 보름이 되어 가도록 수시로 불려 와 ‘호-.’를 해줘야 하는 비운의 정삼봉에게 다시 팬티에 풀을 먹이란다. 지금 우주인이 하고 있는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너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 삼봉이 어이없이 되묻자 주인의 얼굴은 파렴치 그 자체로 비열하게 웃었다.
“썩은 것처럼 보이는 팬티를 어떻게 입어. 일을 제대로 하란 말이야. 제대로. 알아들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코딱지만한 게 어디서 요령을 피우고 있어. 이걸 확! 그냥…….”
“허. 허허…….”
삼봉은 팬티도 입지 않은 알궁둥이를 얇은 면바지로 슬쩍 가리기만 한 주인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웃었다. 예전에 어떤 시인이 그랬단다.
‘왜 사냐고 묻거든. 웃지요.’라고.
지금 삼봉의 심정이 딱 그것이었다.
‘저 외계인을 왜 죽이고 싶냐면 그냥 웃지요.’라고.
구 비서가 왜 왔는지 알기 때문에 양 여사는 그를 집안에 들이기 싫었다. 선거철만 되면 어차피 거절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놈에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 기어이 집으로 그 사달을 끌고 오는 구 비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쓸데없는 분란 거리를 계속 들고 들어오는 사람한테 친절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그 쓸데없어 보이는 분란 거리가 얼마짜리인 줄 알고 그러시는 겁니까?”
“사장님한테 돈의 액수라는 것이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가질까. 그건 생각해보지 않은 모양이야?”
“물론 사장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들들 볶이는 제 처지도 생각하신다면 제가 이러는 것을 이해는 해 주실 수 있잖겠습니까?”
우주인과 양 여사 그리고 삼봉과 차예진이 살고 있는 이 집은 엄청난 명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주인은 그냥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공기 좋은 곳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이곳으로 이사를 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지 일 년이 되지 않아 조선 팔도 내로라하는 지관들이 모조리 몰려와서는 이 집터에서 나랏님이 나게 될 양택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하지 않겠는가. 우주인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조용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내 집.
그가 원한 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는데 그 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바람이 쉽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권력에 눈이 먼 온갖 사람들이 집을 팔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협박을 해오는 이들은 구 비서가 처리할 수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집값을 올리는 사람도 어떻게 해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구 비서가 상대할 수 없는 것은 우주인이 취약한 재벌 노인네들을 통해 점잖은 청탁을 넣어 오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쉽게 대할 수 있는 계층에 있지 않았고, 구 비서의 입김만으로 이 집을 단념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런다 해도 사장님이 이 집을 팔지는 않아.”
“하아……. 양심이 여사.”
그걸 누가 몰라서 선거철마다 이 문제를 들고 쩔쩔매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구 비서는 곧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하게 변한 양 여사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써야 했다. 무려 세 군데서 전방위 공격을 해대는 덕에 정신머리가 쏙 빠져 버려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열어 버린 것이다.
구 비서의 이름만큼이나 양 여사의 이름도 알고는 있으되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모과나무 밑에 묻히고 싶은 모양이지. 구라 씨?”
웃고 있는 양 여사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협박이 쏟아졌지만 풀 네임을 불린 구 비서는 발끈해서 눈을 부릅떴다.
자손의 이름 짓는 일이 어지간히 귀찮았던 어떤 양반들 덕분에 당장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칼을 들고 서로 죽이겠다 덤벼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살벌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모과나무 밑에 있는 물건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경찰관과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눌까요?”
“사장님이 과연 그만한 시간을 줄까?”
“…….”
양 여사는 구 비서가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비켜서서는 싸늘하게 속삭였다.
“사장님이 누구를 선택할까. 밥 차려 주는 나? 아니면 일 대신 해주는 당신. 잘 생각해봐. 내가 해주는 밥을 위해서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서른 명의 비서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선택할 거 같지 않아? 이제 슬슬 시즌이 시작할 때가 되었지?”
“……양 여사님.”
“내 심기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난 적어도 제법 큰 걸 쥐고 있거든 구 비서님.”
구 비서는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저 빌어먹을 개초딩은 밥 주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고 그다음이 귀찮은 일을 대신 해주는 자신인 것이다. 맞부딪혀 깨질 것이 분명한 거물과는 분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그는 깔끔하게 두 손을 번쩍 들고 백기를 흔들었다.
“살려만 주십시오. 양 여사님. 제가 실수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시달렸더니 정신이 나간 모양입니다.”
양 여사 역시 상대방의 항복을 여상하게 받아넘겼다.
“요즘 밥 먹는 양이 줄었어요. 조만간 시즌을 시작할 거 같으니 준비하라고 미리 말하는 거예요.”
“예.”
“들어가 봐요. 기다리고 계시니까.”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그저 다소 살벌한 농담을 나누는 것처럼 들렸을 이야기를 끝으로 구 비서는 주인이 서재로 사용하고 있는 이층을 향했다. 양 여사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발길을 옮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눈 같은 것도 없었다.
하늘 위로 팬티가 날아오른다. 검정 팬티 파란 팬티 줄무늬 팬티.
“왜 못하는데!”
“비 오잖어유.”
“그게 뭐!”
“비 오는데 빨래를 워뜨케 말리남유. 그러니 못하지유.”
우주인은 그야말로 발끈했다. 이 집 세탁실에는 웬간한 세탁소에 있는 설비들보다 좋은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비가 오거나 말았거나 빨래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집이라는 말이다.
“건조기는 팔아먹었냐? 얼마 받았냐. 쪼끄만 게 벌써 집안 집기 팔아 푼돈 챙길 궁리를 해? 디질래?”
“하!”
옆에서 지랄을 떨었거나 말았거나 삼봉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사람을 요따위로 취급하는 데는 참지 못하고 발딱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다.
“뭐래유. 시방 뭐랬시유. 뭘 팔아먹어유?”
“멀쩡한 건조기 놔두고 왜 비와서 빨래를 못한대!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면 워쩔 건데유. 아자씨가 뭘 몰라서 그라는 모냥인디유. 풀 먹인 빨래를 워뜨케 건조기에 말려유. 말려서 그게 아자씨 말대루다 꽝꽝 얼어 바삭바삭 해진대유? 말이 안 되는 소릴 허는 것이 누군데 시방 지한테 이러는감유?”
우주인의 눈썹이 흉흉하게 치켜 올라갔다.
“뭐야?”
“풀 먹인 빨래는 볕에 말려야 해유. 안 그럼 눅눅해서 못 입는구먼유. 건조기는 내둥 비 오는 장마철에나 쓰지 사람이 볕에 말린 옷을 입어야잖겄시유? 갱신이 꼭 필요한 빨래 아니면 시방 빨래 혀두 아자씨 좋아하는 것 모냥으로는 나오질 않는구먼유.”
“그게 말이 돼?”
“돼유. 잘 되거든유? 남들 다 그렇게 알거든유? 아자씨만 시방 억지 부리고 있는 거 아녀유.”
삼봉은 주인의 무식함과 몰상식에 적절히 적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복장 터지는 갑갑함이 수그러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 양반이 실성했나 하는 소리는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봉의 말에 뭔가 고민에 잠긴 듯 잠시 조용하던 우주인의 반응도 그런 그의 적응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 주었다. 끝 간 데 없이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싸우던 그들은 이제 적어도 의사소통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냐.”
“야?”
단호하게 부정하기는 하지만 우주인의 심통이 삼봉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삼봉은 저 심술의 표적이 될 누군가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일전에 돌침대 회사를 그렇게 뒤집어 놓아 그 침대를 삼봉의 방으로 옮기는 것에 전화를 무려 열통은 넘게 해야 했었다. 물론, 그 비싼 침대를 선뜻 삼봉에게 내주는 우주인의 배포는 감탄스러웠지만 삼봉의 눈에 주인은 절대로 정상이 아니었다. 멀쩡한 돌침대가 불량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면서 얼마나 서비스 센터 사람들을 들볶아 놓았는지 그들은 이쪽 전화번호로 걸려 온 AS 신청을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간신히 어르고 달래서 무마시켰는데 이제 또 저 엉뚱한 심술을 어디다 풀려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이제는 멀쩡한 전자 제품 회사를 걸고넘어진다.
“제품 불량이야.”
“뭐가유. 건조기가유? 음마. 전화기는 왜 들어유?”
“왜는. 하자 있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 놈들은 다 뒈져야 해. 팬티도 제대로 마르지 않는 건조기가 무슨 건조기야. 그게 얼마짜린 줄 알아?”
자신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고 있다면 저만큼 당당한 포스는 나오지 않는다. 삼봉은 저 남자가 정진 정명 저 말도 안 되는 스스로의 논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결론 밖에 낼 수가 없었다. 풀 먹인 빨래를 바삭바삭하게 말리지 못하면 건조기로써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주장.
삼봉은 냉큼 수화기를 집어든 주인의 팔에 매달렸다. 워낙에 키 차이가 나니 고목나무에 매미 매달리듯 대롱대롱 턱걸이를 하는 모양이 되었지만 망가지는 모양새는 남들이 알 바 없는 일이고 AS 센터에 전화 걸어 지랄을 떨어 대는 우주인은 길게 봐서 삼봉에게 좋지 않았다.
전자 제품이야 언제든 고장 날 수 있는 일인데 혹여 진짜 문제가 생겨 AS 센터에 전화를 걸었는데 돌침대 사건 때와 같이 이쪽 말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리면 그 사달을 어쩐단 말인가.
“왜 이래유. 이게 뭔 짓이래유? 언네도 아니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워디 있대유. 당장 그만 못 둬유?”
“너처럼 제품에 하자가 있어도 그냥 꽉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기업들이 점점 더 소비자 알기를 똥으로 알잖아. 문제가 있으면 따져야지 왜 그걸 참아. 놔!”
“문제는 아자씨한테 있구먼유. 암시렁도 안 한 건조기를 갖고 또 왜 시비를 건데유. 아. 풀 먹인 속옷을 건조기로 워뜨케 말린단 말여유! 애당초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잖여유!”
“…….”
주인은 올리브양을 매단 뽀빠이 같은 포즈를 하고 선 채 물끄러미 삼봉을 바라보았다.
참 가볍기도 하다. 지금껏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다닌 것일까? 키만 작은 줄 알았더니 몸무게도 금자만 할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삼봉의 몸무게가 겨우 10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도 우주인은 코딱지의 몸무게는 딱 우금자 정도라고 머릿속에 못을 박아 버렸다.
“너 나한테 반했지?”
“그건 또 뭔 말이래유!”
“왜 치근덕거리면서 들러붙어. 귀찮게.”
“……으아아아악!”
어디를 다치거나, 놀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화가 나서 내지른 비명이 아니었다.
삼봉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복장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어 냉큼 주인의 팔뚝에서 떨어져 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삼봉이 철판 위에 올라간 마른오징어 모양 온몸을 배배 꼬며 괴로움에 신음하는 동안에도 주인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한 채 그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풀 먹인 팬티는 원래 건조기로 못 말린다고?”
“악! 악! 참말 저런 인간이 워디서 나온 거래. 내가 살 수가 없구먼. 당최 무신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구먼.”
“대답!”
넋 나간 사람 모양 궁시렁 궁시렁 신세 한탄을 해대는 삼봉의 머리 위로 벼락같은 고함소리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고함 소리에 맞춰 조건반사와 같은 신속한 대답이 주인에게 돌아왔다.
“야. 원래가 풀 먹인 빤쓰는 건조기 같은 것으로 못 말려유. 건조기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거여유. 아자씨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죄 아는 거라니깐유!”
“하여튼 코딱지만한 게 참 말이 많아. 그냥 그렇다고만 하면 될 걸 갖고 무슨……. 그럼 어떻게 말려야 하는데.”
“어우--!”
“쓰읍!”
제 가슴을 탕탕 치는 삼봉의 앞에 매섭게 혀를 찬 주인이 미간을 찡그리자 삼봉은 ‘참을 인’ 자를 천만 번 써 재끼면서 대답했다.
“볕에 말려야지유. 아자씨 볕만 나면 마당에 홀딱 벗고 나가 드러눕듯이 풀 먹인 빨래도 볕에 말려야 바삭바삭 해지는 구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