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58)

“태양빛에 말려야 한다고?”

“야.”

“그럼 집에다 태양광을 설치하면 비와도 팬티 빨 수 있지?”

“…….”

이건 뭐니 하는 표정의 삼봉이 흰눈을 뜨고 주인을 노려보지만 주인은 전혀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설치해 줄 테니까 팬티. 다시 빨아.”

태양은 뉘 집 똥강아지 이름이었나 보다. 우주인 마음대로 불렀다 쫓았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이상 이 실성한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인간적인 한계를 느낀 삼봉이 맥없이 방바닥으로 흩뿌려진 팬티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어이.”

“왜유.”

“너 호- 해주고 싶지?”

“……?”

삼봉의 머릿속에는 저걸 볶아서 죽이면 속이 시원할까 튀겨서 죽이면 속이 시원할까 하는 음흉한 계획들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살짝 볶아서 바삭바삭하게 튀겼다가 양념을 발라 찜통에 푹푹 찐 뒤 그 좋아하는 볕에 바짝 말려 두고두고 광에 두어 꺼내 먹으면 참말로 속이 시원하겠다는 결론이 내려지기도 전에 주인은 한방 크게 터트려 주신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우주인은 정삼봉을 인내의 한계. 그 한계에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너 오늘 한 번도 호 안 했잖아. 막 하고 싶지? 난 괜찮은 고용주니까 허락해 주마. 호 한번 해주고 나가도 돼.”

“…….”

주인의 눈에는 밸이 꼴려 죽겠다는 삼봉의 얼굴이 아예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제 삼봉은 그놈에 말좆 아직도 다 낫지 않았냐는 덧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가만 보면 풀 먹인 팬티에 쓸리고 까져서 난 흉이 몽땅 사라지고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한 그놈에 말좆보다는 정작 ‘호-’를 해줘야 하는 것이 따로 있지 싶었던 것이다.진심으로 주인의 머리통을 쪼개 열고 주름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 분명한 골수에다 ‘호-’를 해주고 싶은 삼봉이 넋 빠진 얼굴로 침대에 드러누운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니도 답답하쟈? 내도 그렇구먼. 참 안되았다.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디 말여. 나는 참말로 니가 안되았다고 생각혀. 근디 워쩌겠냐. 니가 참아야지. 오냐. 나도 그렇게 생각헌다.’

이제는 하도 봐서 이상하지도 어색하지도 않고 민망할 것은 더더욱 없었다. 머릿속으로 깡통 같은 대가리의 하반신에 달려 고생하는 양물을 한껏 동정해 준 삼봉은 성의 없이 그것을 호호 불어 주었다.

“호- 호- 호-.”

그것도 한 번 해주면 삐친다. 그래서 맘먹고 인심을 쓰는 것처럼 세 번이나 호호 불어 주었다.

“되았지유?”

“되게 하고 싶었던 거지?”

“훗……. 야. 그려유. 호 해주고 싶어서 몸살이 나는 중 아라씨유. 됐지유? 지는 인쟈 나가봐도 되지유?”

“가 봐.”

우중충한 날씨가 연이어지고 있지만 우주인은 꽤 기분이 좋았다.

일거리만 주면 마냥 좋다. 구 비서는 그랬다. 그게 어떤 일이든, 아무리 황당해도 아무리 우스워도 그는 일거리만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었다. 또 그렇게 심각한 일 중독자인 구 비서를 적절하게 부려 먹을 줄 아는 사람이 우주인이었다.

마당 한켠에 빨래를 말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당 여기저기에 파묻혀 있는 것(?)들을 훼손하지 않고 적당한 크기의 건조장을 만들기 위해 구 비서는 자기만의 도면을 들여다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앞으로 할당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고민하는 순간. 그 순간은 구 비서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복이었던 것이다.

삼봉도 은근히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단지 팬티를 말리기 위해 마당에 건조장을 짓겠다는 우주인의 발상은 황당 그 자체이지만 앞으로 우천과 관계없이 빨래를 말릴 수 있다는 것은 꽤 흐뭇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로 최첨단 기능을 갖춘 빨래 건조장이 생기는 일 자체에 관해서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차예진은 대체로 아름답다는 평가를 듣는 여성이었다. 시각적으로는 그러했지만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그것이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차예진의 마음은 공허한 벌판에 부는 바람처럼 가시 돋친 상흔을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괴물을 집안에 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머리로 사고할 수는 있지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해도 말이다. 짓눌려진 공포로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서도 차예진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온몸을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는 불쾌함이 아니, 불길함이나 그보다 더한 괴로움이 목을 조여 오는데도 머릿속 한켠으로는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젖은 가죽 끈이 말라가는 것처럼 천천히 옥죄어 오는 감각이 극에 다다를 때쯤 차예진은 제 눈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절망 속에서 바르작거리는 벌레처럼 어쩌지 못하는 육신의 자유로 회귀하고픈 것도 아니다. 다만 불길하게 닿아 더듬고 있는 짐승의 손을 떨쳐 버리고픈 것뿐이었다. 그것조차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 차예진을 짓밟고 억눌렀다.

무기력이 차예진의 발목을 움켜쥐고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똑. 똑.”

섹스는 집중이다. 겁탈 또한 집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행위 중에 방해받은 사내는 거칠게 고개를 쳐들었고, 시선이 당도한 곳에 서 있는 남자를 희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뭐야. 저건.”

표본 핀에 찔린 채 채집판을 벗어날 수 없는 차예진은 그저 천천히, 매우 느리게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차예진 씨 바빠?”

두툼한 뱃살로 차예진을 짓누르고 있던 사내의 흉흉함에도 굴하지 않는 얼굴로 우주인은 가볍게 말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뭘 해도 별반 심각할 것이 없는 양아치 말투 그대로이다.

눈앞의 광경이 여상하지 않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멋에 사는 개초딩다운 면모였다. 아니, 초딩이라면 이런 광경의 낯설음에 인상이라도 구겼을지 모르지만 몸도 머리도 어른인 채 생각만 초딩이라 상태는 더 나쁘다.

“나 오후에 외출하려고 하는데 바쁠까?”

“……사…….”

아무리 애를 써도 차예진의 목구멍에서는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의 격렬한 몸싸움 끝에 사내의 팔꿈치로 목을 찍힌 탓인지. 아니면 물리적인 폭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파격적인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저거 뭐야. 예진아. 저 새끼 뭔데 네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지?”

공포로 물든 차예진의 눈에 단 한 방울의 혐오가 떨어졌다. 아름다운 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공포를 대신한 눈물이었지만 맑고 뜨거운 감정을 오염시키기라도 할 듯 딱 한 방울의 다른 감정이 떨어지는 것을 사내는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누구냐고? 나 차예진 씨 고용주인데? 넌 뭐야.”

“뭐……. 난 예진이 사촌 오래비 되는 사람이요. 다 큰 처녀애 방에 이렇게 함부로 막 들어와도 되는 거요? 나가요. 나가!”

사촌 오빠.

까맣게 잊었다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되돌릴 수 있는 위력적인 이름이었다.

세월이라는 포장지로 몇 겹을 덮고 싸매서 이젠 그 흉흉한 가시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도 지금 차예진은 그 가시에 관통된 채 무기력하게 바르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 세월이 치유해 주지 못하는 상처도 있는 법이라고.

차예진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너하고 볼일 없어. 내 고용인한테 오후 스케줄을 묻는 거니까 하던 일 계속해.”

“뭐 이런…….”

우주인은 무기력한 채 고개만 이쪽으로 돌리고 있는 차예진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엄연히 누군가가 살고 있는 집안에 신을 신고 있는 채 난입하는 행위는 명백히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지만 우주인이 어디 그런 거 신경 쓰는 위인이던가.

그는 사내의 몸에 짓눌린 채 거실 바닥에 누워 있는 차예진의 머리 근처로까지 와 쪼그리고 앉았다. 목적과 의도가 분명한 행동이지만 너무 거리낌이 없어 사내는 잠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묻잖아. 차예진 씨. 바쁘냐고. 내 오후 외출에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 대답해.”

“사장…….”

“반말하지 마. 사장님이면 사장님이지 사장은 또 뭐야. 택시 불러야 돼?”

“…….”

사내는 기가 막혔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지레 엄포를 놓으며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라는 것이 남에게 보여 좋을 것 없는 그런 모습 아닌가. 하지만 눈앞에 이 남자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외출 시간에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만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제 볼일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이 너무도 확연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새파랗게 번뜩이는 눈빛도 딱 정신 나간 미친놈의 그것이다. 만만찮게 돌아 버린 사내의 눈에도 확연히 느껴질 만큼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도와…….”

성마르게 움츠린 차예진의 목구멍에서 기묘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제가 당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 때부터 간절히 하고 싶었던 말. 차예진은 자신이 어째서 지금에서야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미에게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던 애원을 이 남자는 틀림없이 콧등으로 들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분명 쇳소리처럼 끊어지는 작은 목소리로 구원을 요청했다.

금수만도 못한 인간의 입에서 뭔가 차예진의 애원을 부정하는 소리가 나왔지만 그녀의 젖은 눈동자는 무식하고 상식 없는 남자의 시선에 못 박혀 있었다.

우주인은 그제서야 빙그레 웃음 지었다. 차예진도 남자도 그가 어째서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어쩌면 우주인 자신도 스스로의 웃음을 납득하지 못할지 모른다.

인생이 화보라는 평을 듣는 남자가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 안에서 마침내 빙그레 웃었을 때 차예진은 이 일이. 필사적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결코 도망치지 못했던 이 상황조차도 꿈이 아닌가 싶은 기분이었다.

그 어떤 순간보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차예진의 배 위에 올라탄 남자를 향하고 그리고 느린 화면처럼 우아하게 우주인의 손이 남자의 목을 밀었다.

목젖에 손을 댄 채 일어선다.

우주인의 몸이 일어나 남자를 밀어내는 만큼 남자는 뒤로 밀려났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과거의 상처가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는 해도 차예진은 유단자였다. 그런 그녀를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큼 크고 강한 힘을 갖고 있는 남자를 저렇게 밀어내는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주인이 190센티에 육박하는 신장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그는 호리호리하게 잘빠진 모델과 같은 몸매의 소유자였다. 방금까지 차예진의 배 위에 올라타고 있던, 지금 우주인의 팔 힘에 밀려 일어섰을 뿐만 아니라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마침내 쿵 소리를 내며 벽으로 밀쳐진 남자와는 체급이 다른 것이다.

“차예진 씨. 내가 외출하려면 택시를 불러야 하는 건지 대답해 주겠어?”

“사…….”

남자 또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움켜쥔 채 두툼한 눈꺼풀에 덮인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고서 우주인을 노려보았다.

“뭐……. 뭐야! 너 뭐야!”

“고용주. ……귀찮고 시끄러우니까 넌 입 좀 다물고 있어.”

“이……!”

흥분한 남자에게 우주인의 말투는 불씨처럼 작용했다. 잔뜩 달아올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에 당겨진 불씨 말이다.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뜬 채 남자가 짐승처럼 달려드는데도 우주인은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차예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시종일관 같은 질문을 했다. 그 때쯤 돼서는 다소간의 짜증이 섞여 있는 목소리로.

“택시 불러?”

“사장……님!”

커다란 주먹이 아름다운 얼굴의 턱을 가격하는 모습. 그리고 개초딩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아무 생각 없이 예쁘기만 한 그 얼굴이 살짝 흔들리는 모습.

차예진은 괴롭고 슬프고 그리고 황망 간이지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눈을 깜빡여야 했다.

사촌 오래비의 탈을 쓰고 있는 저 짐승은 피나는 노력으로 힘을 기르고 기술을 익힌 차예진도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자의 주먹이 제대로 턱을 가격한 상황에서 그저 약간 얼굴이 흔들린다니…….

원래 우주인이라서 몰상식한 것은 알았지만 물리법칙마저 무시한다면 뭔가 좀 이상한 것이었다.

“죽고 싶냐?”

크림처럼 희고 깨끗한 턱 어림의 피부가 하얗게 질렸다 천천히 붉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웃음기를 띈 듯한 우주인의 말은 매우 짧았다. 하지만 말보다 행동은 더 짧았다.

우주인은 춤추는 것처럼 가볍게 팔을 뻗어 남자의 명치를 쥐어박듯 쳐올렸다. 하지만 가벼워 보이는 펀치와 달리 거구의 남자는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는 게 아닌가. 웅크린 채 주저앉은 남자의 가슴쯤을 우주인의 발이 걷어차는 것도 차예진의 눈에는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톡 건드리듯 부딪힌 것 같은데 들려오는 소리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뭔가 부러지는 듯 섬뜩한 소리와 함께 차예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장님…….”

겁에 질린 그녀의 음성에 돌아보는 우주인의 얼굴은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묘기 부리듯 엄청난 거구의 남자 하나를 작살 내놓고도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예의 화사한 미소마저 그의 얼굴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씨발. 귀찮아…….”

뚜벅뚜벅.

거실의 바닥재를 밟으며 그가 주방으로 걸어가는 소리와 그윽그윽 하는 소리를 내며 아까부터 그저 꿈틀대기만 하는 남자의 소리만 차예진의 귓전을 울렸다.

우주인이 주방에서 들고 나온 것은 날카롭고 칼날이 긴 주방용 뼈칼이었다.

“1분 안에 결정해. 죽일 거야. 살릴 거야.”

“사장……님?”

하얗게 번들거리는 주방용 뼈칼의 날이 사람을 죽이자는 것인지 살리자는 것인지 차예진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칼을 들고 서 있어도 우주인은 태연하고 심드렁하고 그리고 위화감이 없었다.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찔렀어. 놔두면 자기 피에 익사해 죽을걸? 결정해 차예진 씨. 죽여. 살려.”

“…….”

죽이고 싶었던 적이 없었을까? 아니다. 매일 밤 매 시간 매 순간 그녀는 저 짐승을 죽이는 상상으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저 상상으로 남아 있을 때나 아름다운 것이다. 힘이 될 수 있고, 목표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진다면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힘이 되지도 목표가 될 수도 없는 범죄행위로 전락해 버린다.

차예진은 어이없는 눈으로 우주인을 바라보았다.

손에 쥐고 있는 뼈칼을 한가롭게 흔들면서 쓰러진 짐승을 보고 있는 우주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두려움이나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그의 목소리처럼 저 얼굴의 태연함처럼 지금 그가 차예진에게 선택하라 종용하는 행위가 그저 한 마리 짐승을 죽이는 일일 뿐인 것 같았다.

“사람을 어떻게…….”

“웃기고 있네.”

“……?‘

“선택해. 죽여. 아니면 살려.”

그윽그윽 하는 기묘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낡은 축구공에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헐떡이고 있는 짐승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 가고 있다.

그에게도 귀가 있으니 지금 차예진과 우주인이 하는 말이 들릴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 점점 희박해지는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그는 벌레처럼 기어와 차예진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발작을 일으키듯 몸부림치는 차예진의 발길에 차이면서도 그는 악착같이 차예진의 발목을 놓지 않았다.

“살려……. 살려줘……. 살려……줘.”

“……!”

살려 달라는 말. 눈물에 젖은 애원.

그녀는 기억조차 명확하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저 말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짐승은 제 욕심 차리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힘이 없어서 당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그 폭력과 탐욕에 길들여져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체념했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우주인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다.

짐승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단지 그녀의 꿈속에서만 가능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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