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58)

“훗…….”

싸늘한 웃음과 함께 바닥으로 날이 선 뼈칼이 떨어졌다.

바르작거리며 기어오르는 짐승을 향한 차예진의 시선이 방금 전까지 그 칼을 쥐고 있던 사람에게로 옮겨가자 우주인은 지금껏 그가 종용하던 대답은 이미 들었다고 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 비서한테 전화해. 묻을 곳을 지정해 줄 거야.”

“묻……어요?”

“특별히 봐 둔 자리 있으면 마당 아무 데나 묻고……. 갑자기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으니까 그냥 놀아.”

그녀는 뒤돌아서 나가려는 우주인을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까무러치며 거품을 물고 있는 짐승을 보면서도 실감 나지 않았던 상황이 그의 발자국 소리에 와 닿은 것처럼 그녀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평생을 굴레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공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흥분이 그녀의 심장을 자극했고, 혈관 속의 붉은 피가 짜릿한 감각을 남기며 온몸으로 돌았다.

“사장님!”

“왜.”

“전에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일까.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파리 한 마리 죽인 것보다 더 아무렇지 않은 우주인의 얼굴에 막연히 그런 질문이 튀어나온 것뿐이었다.

“사람 안 죽인지는 꽤 됐어. 아직도 차예진 씨 눈에는 저게 사람으로 보여?”

“아…….”

멍청한 소리나 하고 있는 차예진에게 흥미가 없어진 우주인은 몸을 돌려 나가려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차예진을 바라보았다.

“코딱지 잠든 후에.”

“예?”

“밤에 묻으라고.”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차예진의 집을 나가 버렸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사람도 들어가게 생긴 독부터 꿀단지 크기의 독까지 여남은 개 묻혀 있었다. 거긴 두고 먹을 묵은지도 있고, 장아찌도 있고 곶감이나 과일 같은 군것질 거리도 있었는데 삼봉이 가장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식초 독이었다. 감식초, 포도식초, 사과식초 이렇게 세 가지 종류가 시큼달콤한 냄새를 풍기면서 익어 가는 식초독 앞에 옹그리고 앉아 가지고 나온 대접에 식초를 퍼 담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막걸리로 식초를 만들어 먹는 것은 알아도 과일을 갖고 식초 만드는 것은 몰랐던 삼봉이 한껏 호기심 어린 눈을 하자 양 여사는 감나무에 감이 좀 영글면 감식초 담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약조까지 받아 냈다. 그 때 양 여사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리 번거로운 일을 왜 배우려 하냐며 타박을 하긴 했지만 제 신세 제가 볶겠다는데 누가 말리냐며 종래에는 웃어 버렸다. 하지만 삼봉은 식초 담는 일을 배우는 것이 딱히 신세 볶는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좋은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는 일이 어찌 신세 볶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본래 조상 때부터 그리 만들어 먹고 살았는데 세상이 요상해져서 다들 그걸 잊고 사는 거지 배울 수만 있다면 배워 둬서 손해 보는 짓은 아니라 생각했던 것이다. 간장 된장 담는 것도 고추장 담는 법도 그리 마음먹고 동네 아주머니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배운 삼봉이었다.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옳고, 그리 배워 아버지와 형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제대로 준비해 주겠다는 것이 삼봉의 생각이었다. 사내자식이 고추 떨어진다며 처음에는 동네 아주머니들도 타박이 여간 아니었지만 결국엔 양 여사가 그리한 것처럼 웃으며 삼봉에게 조근조근 장 담는 법을 알려주었었다.

뭐든 배워 두는 것이 남는 거라 생각하는 삼봉에게 이제 곧 담는 것을 배우게 될 식초 향은 유난히 달큰하고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음마?”

대접에 절반쯤 차게 사과식초를 담고 돌아선 삼봉의 눈에 기괴한 모양새가 비춰졌다.

우주인이 마당에서 훌떡 벗고 자빠져 있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삼봉에게 신기한 노릇이 아니다. 하지만 그 곁에 함께 누워 졸고 있는 금자는……. 참말로 신기한 노릇이 아닌가.

그는 이 집에 와서 주인을 보며 으르렁대지 않는 금자를 처음 봤고, 그리고 금자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 우주인 역시 처음이었다.

“쟈가 뭘 잘못 묵었나? 뭔일이랴?”

개가 주인의 곁을 지키는 일이 무에 대수겠는가 마는 우주인과 우금자의 관계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주인에게 덤비는 금자와 그런 금자를 피해 달아나는 우주인이 너무도 충격적인 광경이었기에 정상적인 상황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삼봉의 기척에 슬쩍 고개를 쳐든 금자가 허공으로 코를 킁킁대며 식초 냄새를 맡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그도 귀찮은 듯 한숨을 폭 내쉬더니 다시 주인의 옆구리에 코를 박고 엎드리는 광경에 삼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딱지…….”

“…….”

마당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살짝 식초만 담아다가 내뺄 생각이었는데 걸렸다 싶은 마음으로 삼봉은 인상을 썼다. 저 양반이 아주 질리지도 않는지 얼굴만 보며 그놈에 ‘호-.’를 하라며 사람을 부려 먹는데 환장할 노릇이었던 것이다.

망했다. 하는 얼굴로 삼봉은 방금 전 금자가 했던 것처럼 한숨을 폭 내쉬었다.

“왜유. 호 해 줘유?”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고, 원래 내야 하는 세금이면 자진 납세가 속 편한 법이다. 우주인의 말좆에 해 줘야 하는 ‘호-.’를 통행세쯤으로 치부해 버린 삼봉이 성큼성큼 우주인에게로 다가섰다.

아침에 만났을 때 웬일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으니 눈에 띄지 마.’라며 호 타령을 안 하더니 그게 하루가 안 간다며 속으로만 혀를 차는 삼봉이었다.

“음마?”

“……?”

“얼굴이 왜 그려유? 봐유. 아! 워딜 봐유. 지를 좀 봐유.”

우주인의 미간이 슬쩍 찡그려졌지만 삼봉은 식초 대접까지 바닥에 내려놓고는 본격적으로 우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뭐 죄졌시유? 왜 사람 얼굴을 제대로 못 봐유. 좀 봐유. 왜 이래유. 이거 누가 그랬시유.”

“……!”

겁도 없이 우주인의 얼굴을 턱! 하니 양손으로 붙들고는 붉게 변해 가는 턱 어림을 요모조모 뜯어보는 삼봉이었다. 그리고 주인은 그런 삼봉을 어이없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왜 이래유. 얼굴이 왜 이런 거여유! 워디 가서 쌈질 했시유? 맞았시유? 음마……. 이 일을 워쩐댜. 그나마 볼 것은 잘난 얼굴 밖에 없는 냥반 얼굴이 이래서 워쩐대유. 쯧쯧쯧…….”

“……?”

그리고 아주 대놓고 혀까지 찬다.

하지만 그런 삼봉을 보며 우주인은 인상만 쓸 뿐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쌈질 했시유?”

“…….”

“아. 나가 몇 살인데 안적도 쌈박질을 해유! 흐미. 이거 멍들겄구먼. 잘난 얼굴에 멍 들겄어. 워디서 이랬시유. 누가 이랬시유! 아 입이 붙었시유? 어제까정만 해도 사람 속 뒤집는 소리 잘만 하더니 왜 암말도 없시유.”

표정으로 봐서는 당장에라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 속을 뒤집을 거 같은데 우주인은 아무 말이 없다. 그게 더 신경 쓰인다. 어떤 기분이냐면 노랗게 잘 익은 여드름을 보는 그런 기분이랄까? 삼봉은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살짝 열감이 있는 우주인의 턱 어림을 겁도 없이 쓰다듬었다.

“이는 괜찮은감유? 어디 흔들리고 그러지 않어유?”

“…….”

“아 왜 말을 안 혀유. 참말 입이 붙었시유?”

“……훠이.”

“……?”

삼봉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는가 싶었다. 하지만 영락없이 논에 참새 쫓을 때나 쓰는 그런 말이고 또 그런 행동이었다. 손을 까딱까딱해 가면서 우주인은 삼봉을 쫓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채 그렇게 삼봉을 쫓고 있던 주인의 눈에 대문간에서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배 변호사가 들어왔다. 적시 적소에 나타나는 사람이다 배 변호사는. 적어도 주인의 생각에는 그러했다. 생각보다 굼떠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일거리만 잔뜩 끌어안고 사는 구 비서와 그다지 열심인 것은 아니지만 딱 필요한 시간 딱 필요한 장소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배 변호사.

둘 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꽤 상성이 맞는 인간들이다.

“이거 좀 치워.”

딱딱하게 굳은 배 변호사의 입에서 한참만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차예진 씨는…….”

“거긴 됐고.”

이거라느니 코딱지라느니 하는 말을 하도 들어서 이제 기분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 삼봉이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서 처음에는 복장이 뒤집어질 것처럼 화가 났던 말이지만 지금은 그저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쉴 뿐이다.

일껏 걱정해 준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이 인간이 저 주둥이로 없는 빚도 만들어 낼 위인인 것이다. 그냥 인간이 그러려니 포기해 버리면 그만이다.

문제는 평소와 판이하게 다른 변호사 선생님의 태도였다. 이만하면 삼봉의 편을 들며 깐죽거려도 몇 번을 깐죽거렸을 배 변호사의 입에서 순순한 대답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삼봉아 가자.”

“식사는 하셨시유?”

갑작스레 삼 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삼봉은 여상한 인사말을 건넸다. 이제 우주인이 뭐라 그러거나 말았거나 별반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표정이 작은 얼굴에 역력했다. 그 모습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애써 지워 낸 배 변호사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배가 등짝에 달라붙을 지경이다.”

“지도 안적 점심 전이구먼유. 지랑 같이 드실래유?”

“내 밥도 있냐?”

“야. 들어가세유.”

“나 잠깐 사장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겠어?”

“그라지유. 언능 오세유.”

삼봉을 집안으로 들여보낸 배 변호사의 얼굴에서 미처 편안한 미소가 지워지기도 전에 우주인은 짜증스럽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귀찮게…….”

“원래는 별로 안 귀찮아했습니다.”

“…….”

“신경 쓰이시면 당분간 다른 곳으로 보내 놓을까요?”

“…….”

“…….”

대답이 없으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참만에야 우주인은 입을 열었다.

“쫓아낸다고 갈 놈이 아냐.”

“…….”

분명 눈앞의 우주인은 위험한 상태이다. 드디어 시즌이 도래했고, 몇 번을 경험하지만 배 변호사에게 우울증이 도진 우주인은 생경하고 어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배 변호사를 웃게 만들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슬그머니 입가로 번지는 그의 웃음에 주인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사장님이 감당 못하는 사람도 있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정말 귀찮아. ……시끄럽고.”

“저는 꽤 귀여워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주인의 아름다운 미간이 찡그려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항의였지만 배 변호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우울증이 도지면 주인은 난폭해 지고 사납게 변한다. 마치 굶주린 맹수처럼 탐욕스럽게 피를 원하지만 그만큼 게을러지기도 하기 때문에 성질만 건드리지 않으면 개초딩 버전의 우주인보다는 조용하고 고상해 보였다. 문제는 그의 우울증이 도지는 시기에 꼭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보들이 있는데 그 뒤처리는 구 비서의 몫이니까 배 변호사가 연연할 문제도 아니었다.

“구 비서 불러.”

“……?”

“차예진 씨한테 가보라고 해.”

“벌써…….”

“……?”

“벌써 한 건 하셨습니까?”

“훗…….”

빌어먹을 종자. 우울증이 도져도 저 인간은 인생이 화보다.

찡그린 배 변호사의 얼굴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모르지만 우주인은 길게 하품을 하며 돌아누웠다. 파릇파릇한 잔디에 엎드린 인간은 등 근육마저도 예술이다. 크고 작은 흉터들조차도 임의로 세긴 문양처럼 보일 만큼 실팍한 근육에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다들 합숙할 생각이야?”

“해야 할 거 같습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 혹시 제 목을 부러트리고 싶거나 머리통을 부숴 버리고 싶다거나 하십니까?”

엎드린 채 고개만 배 변호사쪽으로 돌리고 있는 우주인이 방긋 웃었다. 너무 해맑고 어린아이 같은 미소였기 때문에 저 가면의 위험함을 알면서도 배 변호사는 그 얼굴에 따라 웃을 뻔했다.

“사실은 입을 귀 밑까지 찢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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