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의 얼굴이 왕창 구겨졌다. 눈에 거슬리는 코딱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주인은 몹시 기분이 좋아졌고, 주인의 뒤에서 꼬리만 흔들고 있던 금자는 기묘한 인간들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웩!”
“……?”
사람을 앞에 대놓고 인상을 구긴 채 구역질이다. 그것으로 모자라는지 삼봉은 곧이어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몇 번이고 왝왝거리는 헛구역질을 멈추지도 않았다.
“뭐냐.”
“하다하다 안 되니께 인쟈 철 지난 리마리오 숭내를 내고 계시는 거여유? 아니다. 우마리오감유? 리마리온지 우마리온지는 모르겄지만 아주 느끼해 봐줄 수가 없구먼유. 철 좀 드세유.”
“……?”
트렌드에 따르는 말장난. 그것은 우주인이 가장 취약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텔레비전을 잘 보는 것도 아니고 신문을 읽는다지만 관심 가는 부분뿐이다. 그래서 그는 삼봉이 하는 말을 가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뭔가 떨떠름한 것이 비웃음을 당했다는 기분만큼은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만큼은 암만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는 우주인이라도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훈계였다.
코딱지만한 놈이 기어올라도 너무 기어올라 주신다.
“야. 코딱지.”
하지만 우주인의 코딱지는 이미 잘 마른 빨래 더미들을 한 아름 안고서 우주인을 지나쳐 안채로 가고 있었다.
“거기 서라. 응?”
“바쁘구먼유. 심심허시면 늘상 허시듯이 홀랑 벗고 볕이나 쬐시던지유.”
우주인은 타박타박 걸어가는 삼봉의 뒤태를 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원래 그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성질 머리 나쁘고 뒤끝 심하게 있어 주시는 그런 못된 성품인 것이다. 그런 그가 명명백백 자신을 놀린 사람을 삼봉이라고 봐주겠는가.
치사스럽게도 발치 언저리에 있던 작은 돌멩이를 집어든 그가 사악하게 웃는 얼굴을 삼봉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봤더라도 별수가 없었을 것이다.
매처럼 날아간 돌멩이가 삼봉의 무릎 뒤편을 가격했고 ‘엄마야!’ 하는 외침과 함께 앞으로 폭삭 고꾸라진 삼봉은 품안에 안고 있던 빨래 더미들 덕분에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하지만 다친 곳이 없다는 것과 빨래를 죄 다시 하게 생겼다는 일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고, 따끔하게 무릎 뒤를 가격한 것의 정체를 확인한 삼봉의 얼굴은 더 험상궂게 굳어졌다.
저 빌어 처먹을 외계인이 사람한테 돌을 던졌다.
덜 배운 어린애도 아니고 그게 무슨 짓인가. 누가 저 외계인에게 사람한테 돌 던지면 혼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라고 절규하는 삼봉의 마음을 우주인이 알리는 없었다.
그는 낄낄대면서 고꾸라진 삼봉을 놀렸다.
“어른 말씀도 끝나지 않았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돌아서면 혼나야지. 암!”
“다 했시유?”
“어쩔 건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시유?”
“뭐!”
제법 독기 어린 목소리지만 우주인의 입장에서 정삼봉은 자신의 반절이 될까 말까 하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독기를 품고 달려들어 봐야 따끔하기라도 할까? 설사 삼봉이 차예진에 버금가는 유단자라고 해도 물리적인 타격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웃던 우주인은 발딱 일어선 삼봉이 향하는 장소를 보면서 천천히 긴장했다. 잘난 얼굴에서 느리게 웃음기가 지워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삼봉은 냅따 수돗가로 뛰어갔고, 정원수에 물을 줄 때 사용하는 긴 호수의 끄트머리를 오른손에 그리고 수도꼭지를 왼손에 쥔 채 딱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으하하하하하하. 아자씨가 뭘 모르는가본대유. 지가 지 고향 마을에서는 서리오기 전날 독사새끼라는 별명을 갖고 있거든유? 그게 뭔 뜻인 중 모르지유? 인쟈 똑똑히 아시게 될 거구먼유.”
촤르르---.
떴다 무지개.
비그어 눈부시게 새파란 초여름 하늘 위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화려하게 등장하는 그 순간 우주인은 이를 갈았다. 위기를 눈치 챈 듯 멀찌감치 달아나 이켠을 살피는 금자가 홀딱 젖어 가고 있는 주인을 향해 끙끙하는 소리를 내면서 맴을 돌았다.
개는 주인의 주변으로 끙끙끙끙 맴을 돌지, 무지개를 만들며 쏟아지는 물줄기는 시원하게 주인을 적신다.
깔깔대는 삼봉이의 웃음소리. 끙끙대는 금자의 신음 소리. 아드득빠드득 이가는 우주인의 소리.
물 소리 바람 소리.
정원은 온통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 차 즐겁게 와글거리기 시작했다.
“인쟈 알겄시유? 사람한테 돌 던지면 안 되는구먼유. 그러다 다치면 워쩔 꺼에유. 지가 아자씨한테 물 튼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지만. 아자씨도 잘한 것이 없으니 쌤쌤으로 쳐유. 헌디……. 푸흐흣! 아자씨 꼬라지가 시방 완전 물에 빠진 생쥐 모냥이구먼유. 크흐흑!”
열 받은 사자가 갈기를 털듯 주인이 머리를 털어 대는 통에 사라졌다 싶었던 무지개가 다시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주인은 삼봉의 얼굴만큼이나 활짝 웃는 표정으로 제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너야말로 다 했냐?”
“왜유. 또 무슨 억지를 부릴라고 표정이 그런감유? 아 왜 그래유!”
상당히 열을 받아 길길이 날뛰어도 모자랄 판에 배실 배실 웃는 우주인은 위험했다. 삼봉은 슬금슬금 주인의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주인은 홈빡 젖은 발치의 잔디를 발끝으로 파헤쳐 뒤집고 있을 뿐이었다.
꼭 금자가 심술 부려 잔디밭을 파헤칠 때처럼 뒤꿈치로 팍팍 잔디를 걷어 내기도 하고 발끝을 세워 흙을 차올리기도 한다.
“독사 새끼라고? 좋아.”
“왜, 왜 이래유? 사람 불안허게 왜 이런데유?”
“불안……. 좋지. 불안해야지. 아주 많이 불안해야지. 안 그러냐?”
왼발 오른발 부지런히도 잔디를 파헤친 우주인이 흡족한 미소를 띠면서 걸어오는 방향으로 삼봉은 그제서야 자신이 떨어트린 새하얀 침대 시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개초딩이 시방 뭔 짓을 하려는 거여.’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아니, 절대로 나이 스물일곱이나 처먹은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짓을 하려는 것일까? 왼발 오른발 진흙으로 처발라 흙발을 하고 지금 저 깨끗하게 잘 마른 시트를…….
“거기 서유! 안 돼유! 안 돼---!”
“흐흐흐흐. 안되긴 뭐가 안 돼. 다 돼!”
순결한 시트의 처녀성은 그렇게 짓밟혔다. 축축하게 젖은 붉고 검은 신발 밑창이 가혹하게 시트를 유린하는 동안 삼봉은 절규하며 손을 뻗었지만 우주인은 그런 삼봉의 외침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짓밟고, 비비고, 고루고루 뒤집어 가면서 살뜰하게도 더럽혀 주신다.
“어……. 어…….”
주인은 결국 양껏 시트를 더럽혀 놓고서야 개운한 얼굴로 삼봉의 옆을 지나쳤다. 얼을 빼고 서서 그저 망연자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트만 바라보는 삼봉의 속을 확 뒤집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게 왜 이기지도 못할 사람한테 덤벼. 응?”
“이……!”
“구 비서가 날더러 개초딩이라고 하잖아. 달리 그런 별명이 붙은 줄 알아? 독사 코딱지?”
“이……!”
열아홉 젊은 나이에 정삼봉은 뒷목 뻣뻣하게 혈압이 오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체험할 수가 있었다.
이게 체험 삶의 현장이면 피디를 고발할 노릇이고, 콩쥐 체험 프로젝트면 팥쥐 엄마(즉, 우주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줄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 삼봉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믿어지지 않을 무식과 파렴치한 몰상식에 덧붙여 뒤끝까지 심하게 있어 주는 우주인이라고 하지만 정삼봉 역시 만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어차피 세탁은 세탁기가 하는 것이다. 사람 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원시시대도 아니고 주인의 말마따나 미쿡에 있는 사람과 얼굴을 보며 전화하는 시대인 것이다. 옴팡 더러워진 시트를 일 번 이 번 삼 번 세탁기에 나눠 밀어 넣는 삼봉의 얼굴에는 이글이글 불타는 전의가 있었다.
이때쯤 되어서는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양 여사가 알면 또 고용인의 자세며 고용주의 권위며 삼봉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설교를 늘어놓겠지만 그것 또한 삼봉을 막지 못했다.
웬일로 집안에 바글바글 모여 도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다른 식구들 끼니를 챙기고 청소하고 정리하고 양 여사의 일까지 살뜰하게 도와 거들면서 삼봉은 낮에 있었던 해프닝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우주인도 낮에 있었던 일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우울한 시즌의 저녁이 찾아왔고, 내키지 않는 식사를 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배변이나 구 비서를 안심시켜 주는 일. 외출을 하려고 들면 왜장 앞에 몸을 던지는 구국 열사 모양 난리를 쳐댈 것이 분명하니 금자의 태도가 변할 때까지는 얌전히 그들과 함께 집에 있어 주는 것이 좋다. 몰랐다면 모를까 그들이 우주인의 우울함을 목격한 이상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되도록 얌전히 있겠다 다짐한 우주인은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홀랑 벗겨진 채 요염한 알몸을 드러내고 있는 매트리스만 덜렁 침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트는? 이불은? 하다못해 베개까지도 홀랑 벗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코딱지이----!”
그렇다.
그냥 넘어가면 우주인의 코딱지가 아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주인이 깨달은 사실은 저 코딱지만한 녀석이 바짝 말라 콧구멍에 들러붙어 있는 코딱지보다 더 성가신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시끄럽고 귀찮고 신경 쓰이지만 결코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 그래서 사람을 아주 환장하게 만드는 재주만큼은 높이 사서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녀석.
“그래서. 이불이 하나도 없다고?”
“야. 건 아자씨가 그렇게 맹근 거니께 할 말 없지유? 아자씨가 아까 흙발로 자근자근 밟아주셨잖아유.”
“왜 빨래를 한꺼번에 해. 그때그때 하면 이런 일이 없잖아.”
삼봉은 넉살 좋게 웃었다.
물론, 밀폐 비닐에 담아 잘 포장해 둔 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가 없을 리 없다. 허투루 보여도 삼봉은 제법 야무지게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이 집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허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훌륭히 자신의 업무를 처리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가 덮을 이불을 제 발로 더럽히는 인간에게 줄 이불 따위는 없다. 스스로 개초딩이라 말했으니 말 안 듣는 개초딩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은가. 엄한 부모님이 두들겨 패가면서 가르치지 못했다면 하다못해 사람의 기본 정도는 알게 해줘야 한다 생각하는 오지랖이 광폭인 정삼봉이었다.
“비가 왔다 갔다 날씨가 영 못썼잖아유. 더군다나 아자씨 요새 볕에 말린 빨래 맛을 들여 건조기에다 말리면 맘에 안 들어 하잖여유? 오늘 볕도 좋아서 그간 밀린 빨래 다 하고 말려 걷어 오는 길에 그 사달이 났으니 진들 우짜겠시유. 낼 말려서 씌워 놓을 테니께 오늘 하루만 그냥 자유. 날도 더운데 하루 이불 안 덮고 잤다고 탈이야 나겄시유?”
“건조장은 아껴서 어디 쓰려고! 니가 빨래는 볕에 말려야 한대서 건조장까지 만들어 줬잖아!”
삼봉은 콧방귀를 꼈다. 어디서 저 개초딩이 사봉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나 딱 그런 표정이었지만 우주인은 거기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무리 여름이 시작되어 저녁으로도 그리 서늘하지 않은 날씨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그래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자는 것은 싫었다. 흙바닥에 맨몸으로 뒹구는 일은 젊을 때나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였다. 그 생활 접은 지가 언제고 최고급 침구에 최고급 침대에서만 잠든 것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추억을 회상하며 궁상을 떨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전기세는 하늘에서 떨어진대유? 왜 그렇게 돈 아낄 줄을 모르는감유? 멀쩡하게 날 좋고 바람 좋은데 부러 전기 써서 빨래를 왜 말려유!”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잘 아시는구먼유.’
설마 삼봉이 저 마음을 소리 내어 말하겠는가.
“지가 열챘시유? 부러 일을 만들어 속 시끄럽게 하겄시유? 지가 아자씨 모냥 심심해 환장할 만큼 할 일이 없는 사람인감유? 하---암!”
“……?”
주인의 침실 안에 있는 전자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켰고, 그것은 이제 삼봉이 잠자리에 들 시간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분명 아자씨가 지한테 하루 여섯 시간은 꼬박꼬박 자라고 말씀하셨지유? 지금이 열한 시니께 낼 다섯 시에 일어나려면 지는 이만 자야 하는구먼유. 정 암 것두 없이 못 주무시겠다 싶으면 목욕 수건도 있잖여유. 거 큼지막허니 배라도 덮고 자면 될 꺼구먼유. 안녕히 주무셔유.”
순진함을 가장한 사악함으로 방긋방긋 웃으며 허리까지 꾸벅 숙인 삼봉을 보면서도 우주인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의 입으로 하루 여섯 시간은 수면을 취하라고 말했다. 급여 계산을 다시 하기 싫으니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다짐까지 받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러 간다는 애를 말릴 명분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불 없이 어떻게 잠을 잔단 말인가.
목욕 타월과 맨 알몸뚱이의 매트리스를 번갈아 보며 주인이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삼봉은 제 볼일이 다 끝나 개운하다는 얼굴로 주인의 침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우주인은 삼봉의 방문 앞에 서서 지극히 변태스러운 웃음을 웃고 있었다. 막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던 배 변호사가 그 꼴을 목격했고 그는 잽싸게 뛰어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구 비서를 발굴해 끌고 나왔다.
그 때까지도 우주인은 삼봉의 방문 고리를 잡은 채 처녀애 속 고쟁이 들어다 보는 노친네 같은 얼굴로 웃고 서 있었다.
“사장님!”
차마 혼자서는 용기가 나지 않아 죄 없는 구 비서까지 발굴해 데려왔지만 일 중독자 구 비서는 엄청 복잡한 서류 더미들이 주는 쾌락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채 해롱대기만 해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옆에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아주 큰 차이인지라 배 변호사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주인을 부를 수 있었다.
천천히 돌아보는 얼굴이……. 빌어먹게도 저 인생은 갈데없이 변태스럽게 웃어도 화보인 것일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왜.”
“그,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야심한 밤에 왜 어린애 자는 방문 앞에서…….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당연한 말을 왜 물어. 야심한 밤에 잠밖에 더 자? 자려고 왔잖아.”
“그러니까 왜 사장님이 삼봉이 방문 앞에서 그러고 있냐구요.”
“여기서 자려고.”
“그러니까 왜요!”
갑갑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러 놓고도 지레 놀라 움찔하는 배 변호사였다. 주인은 그런 배변을 음산한 눈길로 응시했고, 그제야 행복한 서류 더미들의 쾌락에서 벗어난 구 비서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털었다.
“밖에도 못 나가게 하고, 사람을 불러다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어떡해. 자체 조달 해야 하잖아?”
“그게 왜 어리고 착하고 순진한 삼봉이냐구요!”
“그럼 누가 있는데.”
주인은 게이다. 배 변호사가 아는 한 한 번도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으니 아마 게이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이 년 동안 죽네 사네 목을 매며 매달리던 귀찮은 남자들을 처리해 준 전적이 있으니 확실히 게이일 것이다. 그것도 질 나쁘고 바람기 많으며 못돼 처먹은 게이 놈.
어쩐지 오늘 밤 내 수청은 누가 들 건데? 하고 묻는 듯한 주인의 시선에 배 변호사는 잽싸게 구 비서를 자신의 앞으로 밀어 세웠다. 치사하고 얍삽한 노릇이지만 저 짐승에게 순결한 엉덩이를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아주 복잡한 서류 몇 장만 던져 주면 구 비서도 불만이 없을 가능성이 컸다.
“구 비서라든지. 혹은 구 비서 같은 사람도 있고, 또 구 비서도 있잖습니까.”
“뭐요?”
“뭐라고?”
구 비서와 주인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어이없다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구 비서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묻는 거지만 주인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변은 자신과 그리고 삼봉의 엉덩이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변태 우주인이나 만만찮은 일중독 정신병자의 취향 따위 알게 뭐냐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