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애 건드리지 말고 여기 늘씬하게 잘 빠진 구 비서 어떠냐구요.”
“가만있는 저는 왜…….”
“가만있으니까 가마니로 안 거지. 예? 사장님. 삼봉이는 아직 어리다구요. 잘하면 미성년자 추행으로 걸리는 거 아십니까?”
“날더러 짐승이라며.”
야심한 시간 남의 방문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짐승한테 법전 들이대며 따지는 거 보면 배변도 한물간 모양이야. 안 그래? 그리고 왜 구 비서야. 차라리 배변이면 몰라도 구 비서는 싫어. 나도 취향이란 게 있어.”
“커헉!”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겁니까?”
아찔한 크리티컬로 정신 줄을 놓을 뻔했던 배변이 신경질이 가득 배인 구 비서의 음성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사장님한테 취향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합니까? 그야말로 무작위 광폭이잖습니까.”
“그래도 구 비서는 아냐.”
“삼봉이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왜 말 안 까. 사람 헛갈리게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건데.”
“깔 상황이 돼야 깔죠.”
“깔리는 건 싫은데?”
배 변호사는 말을 잃었다. 간이 배 밖으로 가출하지 않는 이상 저 짐승을 깔겠다 덤비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그래서. 말릴 거야? 내가 이 방으로 못 들어가게? 자신 있으면 말려 보시든지.”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우주인의 눈빛은 진지했다. 저 정도라면 양 여사가 식칼을 들고 나와 당장 내일 아침부터 밥 없을 줄 알라고 외친다 한들 별반 소용이 없을 정도의 마음가짐이랄까. 뭐 그런 예감이 배변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는 안타깝게도 정삼봉에 대한 동정심을 놓아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으로서 어린 약자에게 가지는 동정심이란 것은 지극히 아름답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것이 제 목숨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상대가 우울증 도진 외계인일 때는 더욱 몸을 사려야 하니 이쯤에서 배변은 약삭빠르게도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구 비서만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이 왜 서류 더미들 속에서 끌려 나와야 하는지, 이들의 대화 중간 중간에 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해 인상을 쓸 뿐이었다.
“잘 자.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한가롭게 손을 흔들며 마침내 주인이 삼봉의 방문을 열었을 때 배 변호사는 안타깝고 서럽고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렇게 꽃다운 청춘이 사위어 간다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화보 인생.
문 앞에서 그 야단이 났는데도 어째 내다보질 않는다 싶었더니 씻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인은 처음 들어와 본 삼봉의 방을 휘적휘적 둘러보았다.
머슴 살러 오면서 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서울역 앞에 서 있었다더니 그게 사실인지 제법 넓은 고용인의 방은 휑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것도 아무 짐붙이 없는 방에 거대한 돌침대까지 한가운데 떡 하니 있으니 기괴한 느낌은 더 심했다.
저걸 사놓으라고 말만 했지 그 위에서는 하룻밤도 자 본 적이 없는 주인은 대체 저렇게 딱딱한 데서 어떻게 잠을 잘까 싶었다. 그거 너나 가지라고 말하니 화색이 만연했던 삼봉의 얼굴도 연구 대상이었다.
손님방에는 욕실이 딸려 있지 않았지만 고용인들의 방에는 철저한 개인 생활이 보장되어 있다.
욕실뿐만 아니라 간단한 조리 도구와 작은 사이즈의 냉장고까지 있는 방에 어쩌면 사람이 사는 흔적이란 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길바닥에서 하룻밤 노숙을 해도 사람 지나간 자리는 표가 나게 마련이라 생각하는 우주인에게는 그 방의 풍경이야말로 참으로 이상하고 요상한 것이었다.
그저 몸만 빠져나가면 이 집에 정삼봉이 머물렀다는 흔적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쳇!”
사람 성격 나름이겠지만 우주인은 그런 삼봉의 깔끔함이 못마땅했다. 원인 모를 역심이 들어 이불장에서 있는 대로 이불을 끌어내리고 베개도 기본 구성품 전부를 침대 위로 올려 난장판을 만드는 것이 그의 역심에 시작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조리장에서 컵을 세 가지나 꺼내 하나는 물을 담고 하나는 우유를 담고 하나는 주스를 담아 딱 한 모금만 마시고는 조리대에 내려놓았다. 그것으로 모자라 뭔가 더 어질러 놓을 것이 없나 찾고 있는데 달랑 수건 한 장을 두른 삼봉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방심하고 있었고 주인 역시 못지않았다.
둘은 서로의 모습에 놀라 제각각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경악스러운 반응을 보였는데 삼봉은 엉덩방아를 찧었고, 주인은 눈을 끔뻑였다.
“오메. 시방 넘의 방에서 뭐 하는 거래유?”
“이게 왜 니 방이냐. 여긴 내 집이야.”
“질더러 쓰라고 하셨잖어유!”
“그래도 내 집이야.”
“아우---!”
울화병이 도져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더는 군말이 없는 것을 보면 이제 삼봉도 우주인이라는 외계 생물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타박타박 걸어와 주인을 지나친 그가 옷장 문을 열고 그 문 안에 있는 가방에서 속옷을 꺼내 입는데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가 않았다.
주인 또한 체면 어쩌고 하면서 눈앞에서 홀랑 벗고 뛰어 주시는 젊은 아이의 알몸에서 눈을 돌릴 위인이 아니었다.
하얀 면 팬티를 주워 입은 삼봉이 마찬가지로 가방 안에서 러닝셔츠까지 껴입고 그렇게 속옷만 걸치고 있는 차림으로 제 몸을 닦은 수건을 탈탈 털어 욕실 수건걸이에 걸어 놓는 것까지 주인은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라면 호불호가 달리 없는 광폭 취향의 게이 앞에서 방만해도 너무 방만한 몸가짐이 아닌가.
“왜 오셨시유?”
주인이 마구잡이로 꺼내 놓은 이불까지 착착 정리를 한 뒤에야 삼봉이 입을 열었다.
“자러 왔다.”
“야?”
“이불도 없이 어떻게 자. 내 이불이 없으니 니 이불이라도 덮어야지.”
“흠…….”
주인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삼봉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가 바라는 감정 같은 것은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삼봉이 당황하기를 바랐고, 대책 없이 삼봉의 방으로 쳐들어온 주인을 불편하게 생각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여그 돌침대라 엄청 딱딱한디유?”
“…….”
삼봉은 강적이다. 적어도 주인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강적이었다. 안하무인 무식에 몰상식에 유치한 우주인을 이처럼 태연하게 대우하는 사람이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야.”
“왜유?”
“…….”
하지만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애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겁을 좀 내달라 사정할 수도 없고, 당황이라도 해 달라 부탁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이불 깔아.”
“참말로 여그 딱딱해서 못 주무실 꺼여유. 딱딱한데 싫다 그러시지 않으셨시유?”
“잔말 말고 이불이나 깔아! 난 여기서 잘 거야.”
우기는 것도 저 정도면 수준급이다. 하지만 삼봉에게 네 이불이라도 내 놓으라 말하면 화가 났겠지만 착하게 생각하는 수준이 여기까지인 것이다.
“알았시유.”
“……?”
하면서 삼봉은 달랑 두 개 있는 이불로 하나는 돌침대에 깔고 하나는 덮을 것으로 펼쳐 잠자리를 마련했다. 다행히 베개는 여벌이 있어 베개까지 함께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안 씻고 주무실 꺼에요?”
“…….”
뭐 저런 게 다 있을까.
저는 잘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팬티 러닝 차림으로 얌전히 이불 속에 쏙 기어들어 가는 삼봉을 보며 주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정도면 방만한 것이 아니라 바보다.
“안 씻어.”
주인도 얇은 이불을 들추고 자리에 누웠다. 삼봉의 말대로 침대는 딱딱하고 차갑고 불편했다.
“원래 낭중에 눕는 사람이 불 끄는 거 아닌감유?”
“너 정말 잘 거냐?”
“이 시간에 안자면 뭐해유. 고스톱이라도 쳐유?”
“…….”
발딱 일어나 그 팬티 러닝 차림으로 타박타박 전등 스위치로 가더니 미련도 없이 불을 꺼 버린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만 천천히 밝아지는 방안에서 코딱지만한 놈이 다시 타박타박 걸어 짐승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데 어이가 가출해 버린 짐승께서는 식욕마저도 잊어버렸다.
“안녕히 주무셔유.”
“…….”
주인이 미리 알지 못한 것은 삼봉에게 두 명의 형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팍팍한 시골 살림에 형제들에게 각기 하나씩 방을 줄 형편도 아니라 태어나서 지금까지 제 방이란 것은 꿈도 꿔 보지 못한 삼봉에게 까탈스러운 잠자리 투정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곁에 누가 있거나 말았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게 남자라면 더 그렇다.
여기서 약간의 예외적인 조항을 둬야 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도 삼봉은 무지했다.
“야!”
“……왜유.”
“나 게이다.”
“야.”
대답이 너무 심심했다.
“나 게이라니까. 남자 좋아해.”
“알고 있구먼유. 첨 만났을 때 아자씨가 말 하셨잖아유.”
“그래도 나랑 자고 싶냐?”
“야. 아자씨도 주무셔유.”
너무도 단조로워 말똥말똥 눈 뜨고 있는 채 자신이 조는 건 아닌가 싶어지는 삼봉의 음성이었다.
“어이……!”
“크으으…….”
“……?”
처음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자는 시늉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사내라면 사족을 못 쓰게 좋아하는 짐승과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일이 그리 일상적이거나 평범하지는 않다. 그러니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라 자는 척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하지만 주인은 서서히 밝아지는 달빛에 의지해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삼봉의 얼굴을 노려보다 마침내 깨달아야 했다.
삼봉은 당황해 자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잠이 든 것이었다.
머리만 땅에 대면 잔다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심각한 수면 장애를 앓고 있는 주인으로서는 인간처럼 생긴 것이 이만큼 둔감할 수 있다는 것을 경이롭게 생각해야 했다.
자는 얼굴 위로 휙휙 손바람을 일으켜도 이름을 불러도 다소 큰 소리를 내도 삼봉을 꿈나라에서 끌어올 수가 없었다.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인간이 정삼봉이고, 평생 수면 장애는 꿈에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 정삼봉이었던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구 비서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즉각 양 여사를 찾았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
대체로 그러하듯 양 여사는 이번에도 앞뒤를 모두 잘라 낸 구 비서의 질문에 서늘한 시선만을 돌려주었다.
“왜 삼봉 씨 방에서 사장님이 주무신 거죠?”
“아…….”
그제야 그녀는 왜 이른 새벽부터 사색이 된 구 비서가 자신을 찾았는지 납득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삼봉 씨는 내년에 이 집을 나갈 사람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양 여사님이 제어를 해 주셔야 했던 거 아닙니까?”
“내가 어째서 그래야 하는 거죠?”
언제나 그렇지만 그녀는 터무니없을 만큼 냉정하고 쌀쌀맞은 구석이 있었다. 그건 그녀의 성품이고 변화의 필요가 절실하지 않다면 구태여 고칠 이유가 없는 그녀의 특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