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그런데 진짜 그런 걸지도 모르죠.”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절대 아니거든?”
“밥 먹으러 가요. 갑자기 배가 고파졌어요.”
여자들은 무섭다. 배 변호사는 불현듯 화사하게 웃으며 날씬한 배를 두드리는 차예진이 섬뜩할 만큼 무섭게 느껴졌다.
그들은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야단하는 삼봉에게 싹싹 빌고 나서 맛있는 아침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집이 크고 넓다고는 하지만 사실 크게 손이 가는 곳은 없다. 그래서 삼봉이 조금만 바지런히 움직이면 얼마든지 쉬고 놀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구 비서는 그런 시간이 되면 공부라도 하라고 했고 변호사 선생님은 공부를 하라고 했고 양 여사나 셋방 누님도 넋 빼놓고 있지 말고 공부하라고 한다. 그런데 공부라면 학교 다닐 때도 징글징글하게 했다고 생각하는-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언제나 바닥을 기던- 삼봉은 처마 그늘 밑에 자리 깔고 앉아 빈둥빈둥 노는 것이 더 좋았다. 심심하다는 생각은 하는데 공부하라는 어른들의 말은 들을 생각이 나지 않고, 딱히 할 일이 없으니 빈둥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집은 꽤 넓은 대지 위에 아담한 건물 두 채가 있었다. 담이 높지만 일조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서 상당히 넓은 뒤꼍에 조차도 새파란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앞마당에는 못해도 뒤꼍에라도 작게 농사를 지으면 이 심심함이 사라질까 하는 고민이 삼봉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데 뻑하면 양지 녘으로 나가 훌렁 벗고 말좆 꺼내 놓던 아자씨가 슬금슬금 이리로 와서 또 무슨 트집을 잡을까 고민하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아주 귀찮아 죽을 지경이다.
그냥 혼자 볕 바라기 하면 그 광경이 심히 실성한 사람처럼 보여도 무시하면 그만일 텐데 왜 이렇게 들러붙는지 짜증이 솟구쳤다.
우주인, 금자, 삼봉의 순으로 나란히 처마 그늘 아래 자리 깔고 벽에 등을 기댄 채 멍 때리고 있는 모습은 당사자는 몰라도 이 집에 합숙하는 다른 이들에게 심히 불안한 광경이었다.
“너 왜 놀아.”
“할 일이 없시유.”
“서재 청소는?”
“했시유.”
“…….”
“…….”
침묵 사이로 새 한 마리가 포르르 그들의 발치로 내려와 흙을 쪼아댄다. 이 정도 거리면 금자 주둥이에 콱 물리겠다 싶은데 친절한 금자 씨는 제 밥그릇에 내려앉아 밥을 훔쳐 먹는 조폭 까치들에게도 짓거나 으르렁대는 법이 없었다.
“문서 세단기는 비웠어?”
“야.”
“…….”
“…….”
바닥에 납죽 엎드린 금자는 졸린 눈을 지그시 뜨고 눈앞에서 알짱대는 참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계단 청소는?”
“했시유.”
“…….”
“…….”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었다. 실성한 것도 전염되는가 싶어 삼봉이 발딱 고개를 치켜들었다. 전부 요상한 사람들뿐인데 자신마저 정신 줄을 놓으면 그야말로 야단이다 싶었던 것이다.
“커튼도 죄 걷어다 빨았구유. 아자씨 이불들도 다 널어놨구유. 거실도 치웠고 손님방 아자씨 방이랑 욕실들 청소도 싹 다 해놨구유. 하다못해 지하실까지 박박 쓸고 닦았구먼유. 할 일이 없어유.”
“그래?”
“야.”
“그럼 계속 놀아.”
“…….”
“…….”
“야…….”
한 쌍의 어울리는 백치 바보들이었다.
“아자씨는 왜 우울증에 걸렸시유?”
“누가 그래.”
“변호사 선상님이 시방 아자씨가 우울증이 도져서 성질 더러우니 건드지 말라 허신던데유?”
“배변이 그래? 그럼 건들지 마.”
멀찌감치 떨어져 망중한을 즐기는 삼봉의 옆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어 온 인간이 이제 건드리지 말란다. 그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삼봉은 그 문제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뭐 땀시 우울하신대유? 돈 많겄다. 얼굴 잘났겄다. 키도 크겄다. 지 같으면 우울할 일이 한 개도 없지 싶은데 뭐가 우울허시대유? 아자씨 좆도 크자녀유.”
“큰데 보태 준 거 있냐?”
“부러운 건 있구먼유.”
“계속 부러워해.”
“야…….”
“…….”
주인은 고개를 돌려 보지 않아도 삼봉이 오리처럼 입을 내민 채 궁시렁거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은 모두 불행해.”
“야?”
“특히 지나간 과거는 전부 불행하지. 가난하면 가난해서 불행하고 부자면 또 부자라서 불행하고……. 불행할 이유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행복한 것을 알지 못하니까 그래서 불행하고. 사람은 전부 똑같이 불행해.”
“…….”
“…….”
엎드려 있는 것에 싫증이 났는지 금자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었다. 습관적으로 금자의 등을 쓸어 주고 있던 주인의 손이 이제는 금자의 가슴과 배를 쓰다듬었다.
“건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죄다 행복하다는 말도 되잖여유?”
“응?”
“지나간 과거는 죄다 즐겁잖어유. 가난허면 가난헌 대로 행복했고, 부자면 부자니께 행복하고. 저 사람은 진짜 안 되아서 행복할 이유 같은 건 한 개도 없겠다 싶어두 정작 당사자가 불행허다 생각허지 않으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행복허고. 그러니께 사람들은 전부 행복한 거라는 말도 되잖여유?”
“…….”
“기여유. 안 기여유.”
“내가 왜 기어.”
“음마…….”
살짝 기분이 나빠져서 우주인은 정색을 하고 따졌다. 그리고 삼봉은 자신의 말을 또 요상하게 듣고서는 억지 부리는 주인이 갑갑스러웠다.
“인마. 내가 왜 기어. 웃긴 놈이네……. 야. 코딱지. 내가 왜 기어야 하는데. 너나 기어.”
“됐시유. 그만 혀유.”
“저게 꼭 불리하다 싶으면 됐다네. 웃겨 진짜.”
“……웃긴 게 누군데 날더러 웃기댜.”
삼봉은 혼잣말이라고 했지만 바로 곁에 앉은 주인의 귀에 안 들릴 리 만무하다.
“뭐?”
“암 것두 아녀유.”
“흥…….”
“…….”
“…….”
삼봉은 매 번 주인이 자신의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까먹어 버리곤 했다. 그것은 충분히 배려 받아 마땅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신문 유머란에나 나올 만한 오해를 매 번 해 주시는 우주인의 감각에 발끈해 버리는 것이다. 이놈에 욱하는 성질 머리만 아니면 지금껏 매 맞은 것에 절반은 깎을 수 있었을 텐데도 삼봉은 여전히 불끈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어이. 코딱지.”
“왜유.”
“심심하지?”
“야.”
“저기 저 독 보이냐?”
여름이 되면 새파랗게 잎이 올라 짙은 그늘을 만드는 연못가 등나무 아래에 작은 독이 묻혀 있었는데 삼봉은 그것을 가리키는 주인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야. 근데 왜 저것만 저기 혼자 떨렁 묻혀 있대유?”
“양 여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홍주거든. 약도 잔뜩 넣고 몇 년 동안 수시로 내리고 어쩌고 하면서 여간 공을 들이는 게 아니야.”
“술이어유?”
“저건 술이 아니라 약이라는데 내가 맛을 본 것으로는 딱 술이거든?”
이 집을 지어 이사 왔을 때 가장 먼저 묻은 독에 담은 술이다. 매 년 술을 지어 양을 보충하고 약재를 내리고 여간 공을 들이는 것이 아닌지라 양 여사는 주인이 술독 열라는 말을 제일 싫어했다. 마셔 주지 않으면 후아주도 과일 썩은 물이라는 배변의 애원에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그 독을 열 수 있는 것은 양 여사와 주인뿐이었다. 우주인이 열라면 싫은 기색을 팍팍 내지만 어쩌겠는가. 독을 열어야지. 지금 주인은 심심함에 몸부림치다 결국 술이라도 마시자는 권유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별반 기대하지 않은 삼봉의 반응이 환상적이었다.
“쓰르메 데칠까유?”
“쓰르메?”
“……오징어유. 고놈을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술안주로 딱인디.”
아주 침이 질질 흐른다. 어린놈이 벌써 술에 환장한다고 한소리 할 법도 하지만 우주인은 그런 상식과는 담을 쌓은 외계인이었다.
“술상 차려라.”
“야.”
지금껏 우주인의 말에 대답했던 그 어떤 경우보다 기운찬 대답이 금세 돌아왔고 삼봉은 아예 튕겨져 나가는 것처럼 주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미사일도 저것보다는 빠르겠다 싶었다.
그제야 그의 입에서는 다소 가증스러운 걱정의 말이 튀어나왔다.
“쪼끄만 놈이…….”
그것뿐이었다.
술판이 벌어지자 가장 신이 난 것은 배변이었다. 그놈에 홍주를 한번 얻어먹어 보려고 양 여사의 앞에서 떨어 댄 재롱이 얼마인데 이런 좋은 기회가 이같이 흉흉한 시절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신이 난 것은 삼봉이었다.
정작 술독 열라는 말을 한 우주인의 경우는 희희낙락 광희 난무하는 두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대낮에 거창한 술상이 차려졌고, 그리고 에미애비도 몰라본다는 낮술의 순배가 돌기 시작했다.
싫다는 구 비서도 끌려 나와 술상 머리에 앉아야 했고, 차예진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양 여사만이 속이 쓰린 얼굴로 토라져 방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거실 한가운데는 다섯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삼봉이 내공이 좀 있어 보인다? 술은 누구한테 배웠냐. 아버지? 형님들?”
“아이고. 아녀유.”
배변이 건네는 대로 냉큼냉큼 술잔을 비우는 삼봉이 크게 팔을 휘저으며 반박했다.
“지가 도적술을 배워서 술버릇이 개차반이구먼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