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위라서 뽕뽕 구멍이 뚫리고 있지만 삼봉은 하얀 백지 위에 삐뚤빼뚤 ‘책임진다.’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주인의 지시에 따라 그 밑에 이름 쓰고 사인까지 했다.
그 모양을 보면서 주인은 세상에서 제일 사악하게 웃었고, 삼봉은 훌렁 바지를 벗고 침대 위로 돌아온 주인을 샛서방 반기듯 반갑게 맞았다.
“잘 먹겠습니다.”
“뭘 먹어유? 아 쫌 가만히 있어 봐유. 왜 이렇게 들러 붙어유. 나는 야그를 좀 허야겠다니깐유?”
삼봉의 주사는 그야말로 개차반이 맞았다.
그 덕에 주인은 어린애 손목 비틀기보다 쉽게 오랜만의 성찬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삼봉은 뭘 책임지고 어떻게, 언제까지 책임지겠다는 지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각서를 만들어 제 발목에 철커덩 채워 버린 것이고 말이다.
돌침대는 취향에 맞지 않는다. 등과 허리가 배겨서 아프고 엉치뼈를 누가 걷어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주인은 자신이 다시는 그 돌침대에서 잠잘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육체적인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주인은 잠에서 깨어났다.
잠든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알쏭달쏭한 삼봉은 귀신이 업어 가도 모르게 곯아떨어졌고, 그 코 고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 그리고 뽕뽕 뀌어 대는 방귀 소리를 들으면서 또다시 밤을 지새우고 싶지 않았던 주인은 삼봉의 방으로 와서 잠을 청했던 것이다. 일어나 맞이하는 아침 삼봉의 방은 또다시 아무도 살지 않는 방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놈에 돌침대로 기어 들어와 잠을 청한 주인과 주인이 덮은 이불을 제외한다면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삭막함이 흡족한 기분을 상쇄시킨다.
그는 가뿐하게 몸을 일으켜 그 방을 나가기 전에 아주 살짝 저지레를 좀 해 주었다.
싱크대에서 있는 대로 그릇과 컵을 꺼내 더럽혀 놓고 이불장 안에 있는 이불도 바닥에 흩어 놓아준 뒤 냉장고 문도 절반쯤 열어 놓았다. 바닥도 조리대도 그리고 옷장에도 무질서하게 사는 젊은 남자의 기운을 묻혀 놓고서야 그는 만족하여 그 방을 나섰고 주방으로 가는 길에 초토화되어 있는 거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밤의 행각을 모조리 알 수 있는 난장판에서 세 명의 인간이 엉겨 붙어 늦잠을 자고 있었다.
사실 늦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홍주와의 한판승에서 패배해 사망한 뒤 부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리라.
“혹시 잊어버렸을까 싶어서 말하지만 난 절대로 저 사람들 해장국까지는 챙겨 주지 않을 거야.”
“누가 그러래?”
거실에 세 놈을 자빠트려 놓고 주인의 침실에 또 한 놈까지 인사불성으로 넘어트린 홍주의 제작자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선언하자 주인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양 여사는 내 밥만 챙겨 주면 돼.”
“저것들도 죄 끌고 나가서 묻어 버리면 안 될까?”
“차라리 저것들로 술을 담겠다 그러지 그래?”
“괜찮은 생각이네.”
주인은 밝게 웃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양 여사의 토라짐의 도는 심각했던 모양이라며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주인이 싹싹 빌었다.
“진짜로 그러고 싶어?”
“…….”
얼굴 표정이나 행동거지는 잘못 해 놓고서 싹싹 비는 모양새지만 하는 말은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아마 지금 그녀의 입에서 진심이라는 말이 나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거실의 변사체 셋을 우물에 처넣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답을 회피했다.
“녹두죽 괜찮아?”
“달달한 간장은?”
주인이 말하는 것은 수 년 동안 달이고 묵혀 짠맛보다 단맛이 더 강해진 오래 묵은 간장이었다. 홍어와 가오리도 구분 못 하는 주제에 손 많이 가는 음식은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저 주둥이를 쥐어박고 싶어 하면서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다 모르겠는데 구 비서가 저러고 잘 줄은 몰랐어.”
“진짜? 원래 단단하게 보이는 사람일수록 띨띨한 모습이 더 많은 법이야. 필사적으로 자신을 감추는 이유가 뭐겠어.”
“사장님은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는 거야?”
“저절로 알아지게 되는 거 아니야? 내 죽은 어디 있는데.”
그야말로 동창이 밝아 오는 시간에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세 개의 변사체와 그리고 애진작에 뽈뽈거리며 집안을 휩쓸고 다녔을 삼봉의 모습까지도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들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삼봉이 일어난 것은 주인이 식사를 거의 끝마쳤을 때쯤이었다. 그러니까 거실의 변사체들이 좀비처럼 꿈틀거리며 거의 기다시피 식당으로 왔을 때 그 역시도 좀비 꼬라지를 하고 식당으로 기어왔다.
“아줌니……. 잘못했구먼유. 그런디 지가 시방 딱 죽을 거 같아유.”
헐떡이며 숨까지 몰아쉬는 삼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볕에 그을러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는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으니 상태의 심각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술병 났니?”
“건 잘 모르겄고 여튼 죄송하구먼유. 지가 시방 다른 볼일이 좀 급해 갖고서리……. 아자씨. 지가 왜 아자씨 방에서 자고 있는 거에유?”
세 마리의 좀비 중 둘이 벌떡 일어나 직립보행을 시작했다. 다른 하나가 식탁 의자를 짚고 서서 의자에 앉는 일을 하는 동안 두 마리의 좀비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쏟아 낸 삼봉을 향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봉을 보고 있는 눈과 달리 그들의 입에서는 주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사장님 설마…….”
“아니겠죠. 사장님?”
“뭔 말들을 하시는 거에유. 지한테 말씀하시는 거래유? 아자씨. 지가 왜 그 방서 자고 있었냐니께유?”
주인은 죽사발의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긁어먹고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방에서 자고 일어난 거 말고 다른 건 궁금한 게 없고?”
“혹시……. 지가 아자씨 방에 가서 주사를 부렸남유?”
“니 그 개차반이라는 주사가 뭔데.”
“지가 술만 처묵으믄 암 데서나 옷을 훌렁 훌렁 벗는다고 들었구먼유.”
“아. 그래? 그런데 어제 니 옷 벗긴 건 니가 아니라 난데?”
경악하는 좀비들과 의아해 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삼봉은 다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지가 토하고 그랬시유?”
“……?”
설마 그 개차반 주사에 토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주인은 제발 그 주사 속에 울고 싸움 거는 것만은 없기를 바랐다.
“근디 사타구니랑 불알은 왜 까졌대유? 궁뎅이까정 쓰라려 디질 거 같구먼유?”
“왜 까졌겠냐.”
비교적 담담한 주인의 말에 간신히 직립보행을 하던 좀비 둘께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이제는 뭐 절망하고 말 것도 없다는 체념이 그들의 얼굴에 짙게 배어 있었다.
“그니께유. 지가 옷을 홀랑 벗고서 낭구 등걸에 매달려 봉 춤을 춘 것도 아닌데 사타구니랑 불알은 왜 까졌대유? 참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 아녀유.”
“낭구 등걸?”
“나무 등걸이유.”
“아…….”
주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여전히 시즌 중이었고, 그 시즌이란 것은 주인의 고용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우울증 상태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즌이라는 것은 실제로 우주인이라는 인간이 비교적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때를 말하는 것으로 그는 본질적으로 대단히 난폭하고 거친데다 참을성이 없는 인간이었다.
시즌이 아닌 경우에도 그가 그다지 상식적인 인간이라 보기는 힘들겠지만 그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일없이 사람을 패느냐. 혹은 죽이느냐의 차이에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니가 술을 진탕 마시고 내가 자는 방으로 왔지.”
“지가 왜유?”
“내가 아냐?”
“지가 왜 그랬을까유?”
“흥! 그리고는 날 덮쳤지.”
구 비서와 배 변호사의 얼굴에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표정이 어렸지만 주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약간의 언어적 유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가유?”
“응. 니가 날 덮쳤지. 여기서 덮쳤다는 말은 명백히 성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다.”
창백한 삼봉의 얼굴이 다시금 창백함을 더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받은 충격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우주인은 쇼크 상태로 허우적대는 삼봉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망설임도 동정심도 없이 그냥 후려 박는 것이다.
“난 분명히 너한테 책임지라고 했고, 넌 책임진다고 했지. 여기 니가 쓴 각서다. 니 필체에 니 서명. 맞지?”
“이게 무신…….”
구멍이 뽕뽕 나 있는 백지에 다짜고짜 ‘책임진다.’만 쓰여 있는 종잇장을 앞으로 내미는 주인에게 삼봉이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한 종류의 각서가 법률적으로 가지는 구속력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배 변호사마저도 그 순간만큼은 한대 후려 맞은 것처럼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책임을 지울 것인지는 생각을 좀 해 보고 말해 줄 테니까 기다려.”
“책임…….”
망연자실 넋을 놓은 삼봉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주인은 지극히 유쾌한 얼굴로 구 비서와 차예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오늘 여의도 갈 거야. 둘 다 준비해.”
“……사, 사장님 지금은…….”
“뭐.”
“외출하지 않으시는 편이.”
“흐음…….”
낮은 한숨과 함께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은 주인은 정색을 한 얼굴로 배 변호사를 보았다.
“정당방어만 할게. 먼저 맞기 전에는 절대로 안 때리지. 그건 약속해.”
“언제는 먼저 때렸습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배 변호사에게 주인은 큰 인심을 썼다.
“알았어! 칼침 맞기 전에는 사람 패지 않을께. 됐어?”
이 정도까지 나오면 말릴 수가 없다. 사실 무작정 밖에 나가겠다고 우기면 어쩌겠는가. 짐승도 아닌데 우리에 가둬 둘 수도 없고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그들에게는 아무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배변도 한발 물러서야 했다.
“각서 쓰십시오.”
“쓰면 될 거 아냐. 쓰면! 한 시간 뒤에 출발할 거니까 준비해.”
각서가 난무하는 아침 풍경 속에서 개운한 표정으로 일어선 주인의 뒤는 악착같은 성격의 배 변호사가 따랐다. 그는 기어코 각서를 받겠다 소리쳤고, 주인은 써 준다고 큰소리친다.
그리고 주방에 남겨진 사람들의 굶주린 뱃속에서 와글와글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기에 삼봉은 너무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더럽혀진 시트와 알몸으로 누워 있던 자신. 그리고 욱씬거리는 근육통 쓰라린 피부.
더 이상 어떤 방식으로도 주인이 한 말보다 정확하게 현실을 표현하는 설명이 없었다.
누구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주인은 진실 또한 말한 적이 없었다.
주인은 증권가로 가자는 말을 했다.
“거긴 왜요?”
“돈 벌러.”
“…….”
구 비서는 잠시 침묵했다. 충격에 빠져 있을 삼봉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복잡한 일 서류 절차들이라면 그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차지하고 마는 그에게 돈을 벌겠다는 주인의 건전한 의지는 쌍수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요즘 증시가 좋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장님이라고는 하지만…….”
하지만 벌어 놓은 돈 까먹자는 말이라면 결단코 사양이다.
물론, 시즌 중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주인의 돈 냄새 맡는 감각은 최고조에 달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감각이 시즌 중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민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그의 믿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운과 판단력도 시즌 중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간의 증시는 여러 사람을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몰고 가는 중이었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에 갈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
“예?”
“부지 확보하고 실버타운 하나 짓는 데 얼마나 걸려?”
“무슨…….”
증시 이야기를 하다 또 왜 이야기가 거기로 튀는가 싶어 잠시 구 비서는 고민했다. 친절하지 못한 우주인이 자상하게 설명하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주인은 스쳐 지나는 창밖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